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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를 읽어보면 선교(仙敎)는 우리나라 고대에 성행한 교(敎)이다. 당시 서적이 흩어져 없어져 그 원류(源流)를 상고키 어려운 까닭에 어떤 자는 이것을 중국 도교(道敎)가 동쪽으로 들어온 것으로 인정할 뿐이나 좌우로 참조하건대 이 교가 우리나라에 고유한 것이요, 중국에서 오지 아니한 증거가 참으로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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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선(天仙)ㆍ국선(國仙)ㆍ대선(大仙)의 명칭이 삼국 이전 및 삼국 초기에 여러 번 나오는데, 도교(道敎)의 경전(經傳)은 고구려 영류왕(榮留王) 때에 처음 들어온 것이 그 첫째 증거이다. 도교의 동쪽으로 들어옴이 불교(佛敎)가 들어온 뒤에 있었는데 선교(仙敎)는 불교 수입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 그 둘째 증거이다. 도교는 노자(老子)에 비롯하였는데, 『기년아람(紀年兒覽)』에 단군(檀君)을 천선(天仙)이라 불렀으며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단군을 선인(仙人)이라 불렀은즉 단군과 노자의 선후를 계산해 보라. 단군은 천수 백년 이전 사람이요 노자는 천수백년 이후 사람이니, 천수백년 이전 사람이 어찌 천수백년 이후 사람이 창설한 교를 수입하리요. 그러니 이는 말이 되지 않는다는 세번째 증거이다. 선교가 만일 삼국시대의 인군(人君)이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것이라면 동명성왕(東明聖王)과 대무신왕(大武神王)도 저 한(漢)나라 무제(武帝)ㆍ선제(宣帝)같이 방사(方士)를 바다로 보내 불사약(不死藥)을 구하였을 것이며, 명림답부(明臨答夫)와 김유신(金庾信)도 저 장량(張良)ㆍ이필(李泌)같이 곡식을 먹지 않고 도인법(導引法)을 배웠을 것이거늘 이것이 없는 것이 넷째 증거이다. 도교는 비록 천사진인(天師眞人)의 봉작이 있으나 이것이 당ㆍ송(唐宋) 이후에 시작되었을뿐더러 또한 하늘ㆍ땅ㆍ별에 제사지낼 뿐이요 정치상 하등 실권이 없는 것이요, 고구려ㆍ백제의 조의(皂衣)ㆍ대선(大仙) 등은 그 권력이 당시 왕자(王者)와 서로 버텨 서양 고대의 예수교 승정(僧正)과 같은 것이 다섯째 증거이다. 중국 도교는 세상을 피하는 교요 죽음을 두려워하는 도이다. 그러므로 제왕이 된 자가 이 교를 믿으면 임금의 자리를 뱀 허물같이 보고 대낮에 하늘에 오늘 것을 바라며, 사민(士民)으로 이 교를 믿으면 산속에 들어가 금단(金丹)을 만들되 우리나라의 선교(仙敎)는 그렇지 아니하다. 명림답부는 대선(大仙) 이로되 폭군(次大王[차대왕] ─ 原註[원주])을 폐하고 외구(外寇:公孫度[공손도] ─ 原註[원주])를 물리쳤으며, 바보 온달(溫達)은 대형(大兄:곧 仙人[선인] ─ 原註[원주])이로되 선비(鮮卑)를 물리쳐 영토를 개척하였으며, 또 신라와 격렬히 싸우다가 죽었으며, 김유신은 국선(國仙)이로되 중악 에 들어가 (中嶽)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고구려ㆍ백제를 멸망시켰으며, 김흠순(金欽純)ㆍ김인문(金仁問)은 선도(仙徒)로되 모두 전쟁에 종사하던 이름난 장군이요, 관창(官昌)ㆍ김영윤(金令胤)ㆍ김흠운(金歆運)도 또한 선도로되 나라를 위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이 여섯째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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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즉 그 선교라 일컬음은 단지 당시 한문학자(漢文學者)가 이와 같이 번역한 것이요, 기실은 장생불사(長生不死)의 미신을 가진 중국 선교 즉 도교와는 소리와 영위하는 취미 및 그 역사가 전혀 같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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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崔致遠)의 「난랑비서(鸞郞碑序)」에 “나라에서 세운 깊고 묘한 도는 선교이다.(國立玄妙之道[국립현묘지도] 仙敎是已[선교시이])”라고 하고 또 “설교(說敎)의 근원은 선사(仙史)에 상세히 갖추어졌다. (說敎之源[설교지원] 備詳仙史[비상선사])” 라고 하였다. 슬프다, 선사가 오늘날에 전해진 것이 있으면 민족 진화(進化)의 원리를 고찰 구명하는 큰 재료가 될 뿐더러, 또한 동양 고대 여러 나라에는 보통 역사만 있고 종교ㆍ철학 등 전문 분야 역사는 없는데, 홀로 이 선사는 우리나라에서만 특별히 산출된 종교인 까닭에 역사상 일대 광채를 더할 것이다. 아아, 그 책이 오늘날에 전하지 못함이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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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동린서조(東鱗西爪)로 구비(口碑) 및 남아 있는 글에서 수집해 보면 선교의 한 점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고기(古記)』에 “환인(桓因)이 아들 환웅(桓雄)을 보내어 따르는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太白山)에 내려가니, 이분이 환웅천왕이다”라고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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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웅천왕이 인간의 길흉화복을 주재(主宰)하며 아들 단군(檀君)을 낳았다 하였으나 『기년아람(紀年兒覽)』에는 “환인은 천(天)이요, 환웅은 신(神)이다”라고 말했으니, 환인ㆍ환웅ㆍ단군은 곧 이른바 삼신(三神:또는 三聖[삼성]이라고도 한다. ─ 原註[원주])이요, 삼신은 곧 선교(仙敎) 창립의 조상이다. 그런즉 환인ㆍ환웅은 곧 실재의 사람이 아니고 추상적인 신이니, 그 뜻이 대략 예수교의 삼위일체와 불교의 삼불여래(三佛如來)와 같은 것이거늘 후세 역사를 편찬하는 자가 때때로 단군의 할아버지가 환인이요, 아버지가 환웅이라고 하니 어찌 우습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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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아이가 낳으매 삼신(三神)에게 기도하는 것은 곧 선교가 남긴 규칙임을 의심할 수 없고, 이 교의 신앙 조건은 세상에 전해지지 않았으나 신라사(新羅史)에 실려 있는 “① 임금을 충성으로써 섬기고(事君以忠[사군이충]), ② 부모를 효도로써 받들고(事父以孝[사부이효]), ③ 벗을 믿음으로써 사귀고(交友以信[교우이신]), ④ 전쟁에 나아가서는 물러남이 없고(臨戰無退[임전무퇴]), ⑤ 죽이는 데 있어서도 가려야 한다(殺傷有擇[살상유택])” 는 것이 또한 그 조건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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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향산(妙香山)에는 단군굴(檀君窟)이 있으며, 금수산(錦繡山)에는 동명왕의 기린굴(麒麟窟)이 있으며, 석다산(石多山)에는 을지문덕굴이 있으며, 중악산(中嶽山)에는 김유신굴이 있으니, 단군시대는 기록이 없어져 고찰하기 어렵거니와 대개 삼국시대는 결코 혈거시대(穴居時代) 민족이 아닐 것이며, 또 을지문덕ㆍ김유신 두 분은 경천위지(經天緯地)의 큰 인물이거늘 무슨 까닭으로 굴에서 살았겠는가. 뜻하건대, 이것이 석가모니의 영산(靈山)과 마호멧의 동굴과 같이 선교도가 심술(心術)을 수련할 때에 반드시 굴에서 산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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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역사가가 모두 한국 고대에 일종의 야만스런 종교가 유행하였다 하니, 숙신족(肅愼族)의 호랑이 숭배와 예맥족의 뱀 숭배 등은 이것이 동물 숭배의 야만적인 종교이거니와 앞에서 논한 바와 의거하건대 부여족은 신을 숭배한 것이요, 동물을 숭배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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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저 이 선교(仙敎)가 삼국시대에는 불교와 격렬한 경쟁을 행하였다. 그러므로 불교가 처음 수입되매 신라 여러 신하들이 다 이도(異道)를 배척하였으며(고구려ㆍ백제는 역사가 없어져 고찰할 수 없다 ─ 原註[원주]) 이차돈(異次頓)이 불교를 확장시키고자 하여 심지어 그 몸을 자살까지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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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므로 신라 말기와 고려 초기에 불교가 크게 성행함을 맞이하여 마침내 끊어져 없어졌으니, 이것은 그 교리의 조직이 정밀하고 깊지 못하여 우세한 자가 이기고 열등한 자는 패망한다는 법칙을 벗어나지 못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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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는 혹시 그 설교 규모가 당시의 시세와 인심에 적합하지 못하여 자연적으로 쇠퇴하여 끊어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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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중고사(中古史)의 한 큰 연구의 가치가 있는 것인데, 김부식(金富軾)ㆍ정하동(鄭河東:鄭麟趾[정린지])이 이를 다 모호하게 지나쳐버리고 오직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이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선교시말(仙敎始末)을 알기 어렵다고 탄식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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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적의 흩어져 없어짐을 한탄하며 옛 역사가들의 노망(魯莽)을 애석히 여겨 이 선교 사실을 여러 가지 책에서 베껴서 역사를 읽는 자의 참고에 이바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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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每日申報[대한매일신보] 1910.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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