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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롱(幻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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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6
계용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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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롱(幻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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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한 끼 굶고 지나기도 거북한 노릇이다. 오늘 따라 굶어 본 점심이 아니건만 이리도 유별히 몸에 마친다. 머리가 다 지긋지긋하고 다릿맥이 뽑힌다. 비비 틀리고 시달리기가 싫어, 영 전차는 안 타는 성질이었건만, 오늘은 정말 전차 생각이 다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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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단돈 십 원 없다. 명동서 돈암동까질 그대로 걸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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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다는 건 확실히 자기 모욕이다. 밤을 새워 가며 글을 써다주고 재삼 독촉을 해도 받을 수 없는 원고료였다. 오늘도 이걸 믿고 나왔다가 허탕이다. 책이 나온 다음에야 준댔으니 미끈한 노릇이긴 했지만 보니 아내는 경위가 저녁 쌀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돈 나올 구멍이 없는 것을 빤히 아는 아내라 그러지 않아도 늘 미안해하는 남편임을 눈치챈 이후부턴 쌀이 떨어져도 자기 앞에선 돈 소리 한마디 아니하고 저 혼자 어떻게 우물쭈물 마련해다가 위급을 면하곤 하는 것이 더욱이 미안해서, 고료가 오늘 안 되면 달리라도 변통을 해 보리라, 그리하여 저녁 끼니도 끼니려니와 우선 남편으로서의 위신도 세워야 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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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쯤은 아마 식량이 또 떨어지게 되었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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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돈을 또 변통해 와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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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아내의 대답이 있기도 전에 저 혼자 말을 주고받으며 돈 변통이 그리 어려운 게 아니라는 눈치를 보이고 나왔던 것이, 고료(稿料)는 역시 또 안 되었다. 맥이 뽑히는데 좋지 않은 기분까지 덮치어 정말 들리지 않는 다리를 지긋지긋 옮겨놓으며 인젠 혜화동 김군이나 찾아가서 사정을 해 봐야겠다고 창경원 곁담을 끼고 터덕터덕 올라가다가 문득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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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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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우뚝 걸음을 멈추더니, 대학병원 정문 앞으로 걸어 내려오는 한 젊은 여인에게 눈을 쏘고 돌릴 줄을 모른다. 아무리 보아도 그건 자기의 아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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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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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든 그 보퉁이는 무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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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그의 머리에는 책이란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다, 아내는 책을 가지고 떠났는지 모른다. 돈에는 늘 신용이 없는 자기라, 저녁 쌀이 떨어졌는데도 그런 남편을 어떻게 믿고만 앉았으랴, 용수를 하여 보지 않을 수 없어 떠난 것일까, 필시 그랬을 것이라고 짐작이 되니, 아내와 눈이 마주칠까 보아 겁이 난다. 책까지 뽑아들고 나오게 만든 아내라 대하기도 미안하려니와, 우선 만나면 어떻게 인사를 하여야 될 것인지가 아득했던 것이다. 어디 숨어라도 버리고 싶게 몸이 줄어드는 것 같음을 느끼며 못 본 체 그대로 서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만 가로수를 등지고 곁눈으로 바라보니, 아니나 다르랴, 들었던 보퉁이는 그게 책이 분명하였다. 아내는 그 아래 십자길을 건너서더니 불문곡직하고 발길을 과학서점으로 들여놓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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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책일까. 팔아서는 안 될 책을 뽑아가지고 나온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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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미 아내는 그렇게도 아끼던 제 반지까지 벌써 다 팔아먹은 걸 안다. 자기가 아끼는 책을 판다고 큰소리 할 처지가 못 된다. 자기를 못 믿어 저녁 쌀을 대겠다고 애를 쓰는 건 당연한 일일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자기는 아내에게 감사해야 할는지 모른다. 그러지 않아도 이제 김 군에게서 돈이 안 되면 어떻게 하노 하고 근심이 태산 같던 자기이었음은 변명할 여지도 없다. 친한 사이라고 해도 정말 남에게 돈 소리 하긴 끔찍하다. 열두 번 잘 된 일 같았다. 인젠 김군에게 돈 이야기를 않아도 위급은 면했것다. 돈도 변통 못 해가지고 들어가 아내가 마련해다 짓는 밥을 기다리고 앉았다가 받아먹겠다고 하기보다는 다 지어 놓은 다음에 들어가 먹는 편이 어째 마음에 좀 덜 거북할 것 같아, 이왕 가던 길이니 김군한테 들려 바둑이나 한 판 놓으며 시간을 보내다 들어가리라, 다시 힘없는 발길을 떼어 수굿하고 그냥 걸어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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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판만 놓자던 바둑이 붙으면 늘 도깨비 씨름이 된다. 한 판만 더, 한판만 더 하던 것이 잡은 참 다섯 판이나 붙게 되어 일곱시가 넘어서 집으로 돌아오니 저녁을 지어 놓기커녕은, 아내는 자기 들어오기를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앉았던 눈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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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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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연유를 묻기도 멋쩍어서, 아무 말도 없이 그냥 아랫목 벽을 지고 털썩 주저앉아 피로한 다리만 쭉 내뻗었다. 아내 역시 “늦으셨군요.” 하는 한마디의 인사가 있을 뿐, 더는 말이 없이 뜨던 자켓만 그저 뒤적이고 있었다. 저녁을 못 지었단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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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어디 나가지 않으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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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긴요? 홧김에 일만 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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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눈이 가리키는 대로 그의 손에서 매만져지는 자켓을 건너다보니, 반도 안 되어 구들밖에 덜렁덜렁 굴던 자켓이 오늘 하루 동안에 거의 다 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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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아까, 낮에, 그 원남동 과학서점으로 보퉁이를 끼고 들어가던 여자가 그게 분명헌 아내였는데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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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해 놓은 품으로 보아서도 아내가 밖에 나가지 않았던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으니, 필시 자기가 사람을 빗보았던 것이 분명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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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젠 이놈의 눈깔까지 다 환장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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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노릇이었다. 입맛이 썼다. 정색을 하고 그대로 앉았긴 차마 낯이 없었다. 네 활개를 훌쩍 펴고 번듯이 나가넘어져 한쪽 팔을 이마에 얹었다. 이렇게라도 해서 자신의 무안한 낯을 스스로 모면해 보는 일밖에 더 무슨 말이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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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지〕(문학) (195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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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단행본〕*『한국문학전집』제12권(민중서관. 1959)
【원문】환롱(幻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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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용묵(桂鎔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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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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