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장쑤성의
양쯔강 왼쪽 기슭에 있는 도시. 남쪽의 전장과 함께
양쯔강과
대운하가 교차하는 수운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쌀 및 농기구 등의 집산지이며, 칠기, 자수, 조각 등의 전통 공예가 성하다.
역사
후한 대에 광릉현이라 불리었으며 동명의 군(서주 광릉군)의 치소도 당연히 이곳에 있었다. 그러나 한나라가 쪼개지고 삼국시대가 되어 이 지역이 위나라와 오나라 사이의 최전방이 되자 위나라는 광릉군의 치소를 화이안시 일대로 옮겨버렸다. 수나라 대에 양주를 재설치하고 치소를 이곳에 두었는데 지금의 양저우라는 이름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후에 대운하가 양주 옆에 건설되자 양쯔강과 대운하가 교차하는 환상적인 위치 조건이 갖추어져 엄청난 번영을 이루었다. 강도(江都)로 불리며 남쪽의 부수도가 되었고 수양제가 수서호를 세워 즐겨 찾았으며, 마지막에는 결국 이곳으로 피신했다가 암살되었다.
당나라 대에는 아시아 각지에서 온 상인들이 광저우나 하노이 등에 내려서 올려보낸 제품, 사천에서 보내온 비단 등이 대운하를 통해 화북으로 보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집결하는 물류의 허브가 되었다. 그렇기에 환전업, 금융업도 번영하고, 큰 신라방과 페르시아, 아랍 상인의 무역거점인 번방(蕃坊)이 존재하던 국제적인 상업도시였다. 당나라 대에는 사람들 사이에서 양주에서 죽는 것이 소원이라는 말이 돌았을 정도. 양저우에서 시안으로 보내던 물품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소금과 곡물이었는데, 황하 유역의 지력이 다해 늘어나는 화북의 인구를 먹여살릴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양저우는 당나라의 식량 안보를 책임지는 최중요지가 되었다.
그러나 8세기~9세기 동안 전신공, 필사탁, 손유 같은 반란군 우두머리들이 양저우를 뻑하면 털어대고 상인들을 학살했고, 마지막으로는 10세기에 후주의 침략을 받으면서 도시가 결국 몰락하고 만다. 결국 송나라 대에는 시인들이 양주의 적막한 풍경을 노래할 정도가 되고 말았다. 수운 교통의 최중요지 역할도 인근의 쑤저우, 항저우 등에 넘겨주었다. 그러나 금나라의 남침으로 송 조정이 피신하였을 시에 임시 수도로 삼아질 만큼 여전히 요충지로 대접받고 있었으며(1128 ~ 1129년), 동방견문록에 의하면 마르코 폴로가 양저우의 행정관이 되었다고 한다.
원명 대에 도시는 소금 유통의 중심지로 다시 번영하였다. 하지만 명청교체기 (남명) 시기 병부상서, 예부상서를 지낸 사가법(史可法)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청나라 군대에 함락된 후 수만명이 학살되는 피해를 입었다. 이후 강 건너 전장과 동쪽의 난퉁이 번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