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고종 21년)에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가 일으킨 정변.
일본 세력을 이용하여 청나라의 간섭을 물리치고, 근대적인 혁신 정부를 세우려는 목적으로 급진적인 개혁을 꾀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배경
임오군란 후 청나라의 도움으로 정권을 다시 잡은 민씨 세력은 친청 사대 경향을 띠게 되고, 청나라는 이 때부터 조선의 내정에 깊이 간섭하였다. 이에 불만을 가진 사람이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등 젊은 개화파들이었다.
이들은 청나라의 간섭을 물리치고 근대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빨리 근대 국가를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민씨 세력은 청나라에 의존하여 서양 문물을 서서히 받아들이자는 온건 개화파와 손을 잡고 이들의 주장에 반대하였다. 이에 급진 개화파는 빨리 근대화를 이룩하여 열강과 대등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비상 수단을 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때마침 청나라가 청·프 전쟁에서 패배하여 정국이 어수선하게 되자, 급진 개화파는 이 틈을 이용하기로 하고, 일본과 모의하여 정변을 일으켜 혁신 정부를 세우려 하였다.
경과
1884년 10월에 새로 설치된 우정국 개설 축하연을 계기로 급진 개화파는 정변을 일으켜 반대 세력을 몰아내고, 고종 을 경우궁으로 모신 뒤 새 내각을 조직하였다.
문벌 타파, 사민 평등, 재정의 일원화, 지조법(地租法)의 개정, 경찰제 실시, 행정 기구 개편 등 14개조로 된 개혁안을 선포하였으나 청나라의 간섭으로 사흘 만에 실패하고, 그 중심 인물들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결과
이 정변은 오히려 조선 국내에 청나라의 세력만 강화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그리고 조선과 일본 간에는 정변의 뒤처리를 위한
한성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청나라와 일본 간에는
톈진 조약이 체결되어 다시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의 세력 다툼장이 되었다.
의의
그 목적은 근대적이었으나, 민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지 않은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는 점과 외국 세력에 기대어 자기들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려 한 점이 전근대적이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일어난 자발적인 근대화 운동이었다는 점에 그 뜻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