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고종 31년)에 일본의 강요로 그 때까지의 문물 제도를 근대적 법식에 따라 고친 일. 갑오경장이라고도 한다.
우리 나라가 근대화를 이루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으나 일본이 침략을 목적으로 강요한 것이었으므로 국력을 강화시키지는 못했고, 국민의 지지도 받지 못하였다.
배경
갑신정변의 실패로 세력이 꺾였던 개화 세력은
동학 운동의 반발을 계기로 다시금 내정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때, 동학군의 진압을 위해 조선에 들어온 일본은 동학군의 진압에 성공하자 우리 나라 정부에 대해 내정 개혁을 요구하였다. 조선에서 청나라 세력을 몰아 내고,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여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자는 속셈이었다. 정부는 그들의 개혁 요구에 대해 이미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고 거절하며 일본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일본은 군대를 출동시켜 경복궁을 포위하고, 대원군을 앞세워 민씨 세력을 몰아 낸 다음, 개화파로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여 개혁을 단행하였다.
개혁 과정
1894년 7월, 새로 들어선
김홍집 내각은 개혁 추진 기관인
군국 기무처를 설치하고, 3개월 동안에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분야에 걸친 208건의 개혁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개혁의 기본 정신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홍범 14조(洪範十四條)를 마련하여 그것을 고종이 공포하도록 하였다.
홍범 14조는 우리 나라 최초의 헌법적 성격을 띤 것이었다. 한편 정부 는 그 기회에 그 동안 애쓰고 있던 부국 강병을 위한 근대적 개혁을 단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 정부와 사회 를 일본과 비슷한 모습으로 바꾸어 그들의 침략을 쉽게 하려던 계획이었으므로, 우리 정부의 생각은 전혀 반영되지 못하였다.
개혁 내용
정치· 경제·사회적으로 많은 개혁이 이루어졌으나, 가장 절실했던 군사 제도의 개혁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① 정치적 개혁 : 정부 조직을 의정부와 궁내부로 나누고, 의정부 아래에 8 아문을 두었으며, 과거 제도를 폐지하여 새로운 관리 임용법을 제정하는 한편, 독자적인 개국 기원 을 쓰도록 하였다.
② 사회·경제적 개혁 : 재정을 일원화하고, 납세 제도를 고쳤으며, 도량형을 통일하였다. 그리고 계급 타파, 신분 해방 등으로 신분 제도를 철폐하고, 조혼을 금지하는 한편, 과부의 재혼을 허용하였다.
의의
일본의 강압적 요구로 이루어진 것이어서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고, 일본의 조선 침략을 더욱 쉽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