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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랑 만나 표류 중 온갖 고난 겪고 귀국, 명나라 실상 알려서 5단계 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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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濟州特別自治道) # 이섬 # 표류기
최근 3개월 조회수 : 13 (3 등급)
【문화】
(게재일: 2024.04.11. (최종: 2024.04.15. 10:23)) 
◈ 풍랑 만나 표류 중 온갖 고난 겪고 귀국, 명나라 실상 알려서 5단계 승진
정의현감 이섬(李暹) 표류기
제주도 사라오름 산정호수를 탐방하고, 제주해군호텔에서 이섬(李暹)의 〈표류기〉를 읽었다. 제주 정의현감(旌義縣監) 이섬의 표류기는 최부(崔溥, 1454~1504)의 《표해록(漂海錄)》보다 5년이나 앞선 놀라운 기록이다.
정의현감 이섬(李暹) 표류기
 
제주도 사라오름 산정호수를 탐방하고, 제주해군호텔에서 이섬(李暹)의 〈표류기〉를 읽었다. 제주 정의현감(旌義縣監) 이섬의 표류기는 최부(崔溥, 1454~1504)의 《표해록(漂海錄)》보다 5년이나 앞선 놀라운 기록이다.
 
제주 뱃사공의 노련한 솜씨로 표류한 사람들은 기적같이 고향에 돌아왔다. 고려 시대 정몽주도 공민왕 21년(1372) 서장관으로 정사 홍사범(洪師範)을 따라 중국에 갔다가 남경에서 귀국할 때 태풍을 만나 배가 13일간 표류하다 바위섬에 매달려 말다래를 씹으며 버텼다.
 
정몽주의 목숨이 다 꺼져갈 때 지나가는 어부에 간신히 구조되었다. 사신 정몽주가 명 황제가 써준 문서를 바닷물에 훼손되지 않게 잘 보관했다. 이 소식을 들은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정몽주를 불러 격려하고 안전하게 고려로 돌아가도록 했다.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 157권 성종 14년(1483년) 8월 2일 자 기록을 보면 명나라 황태자의 생일 축하하러 천추사(千秋使)로 베이징에 갔던 박건(朴楗, 1434~1509)이 제주도에서 표류하여 중국에 갔던 정의현감(旌義縣監) 이섬(李暹)과 훈도(訓導) 김효반(金孝胖) 등 33명을 함께 데리고 돌아온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성종은 홍문관 직제학(弘文館 直提學) 김종집에게 소상하게 기록을 남기라 하고, 송환에 따른 사은사 파견을 논의했다. 성종은 종6품의 정의현감 이섬에게 다섯 직급을 올려주었다. 이에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이종윤(李從允)이 들어와 아뢰기를 “이섬은 단지 표류하다 살아서 돌아온 것뿐이며,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운 것도 아닌데 특별히 다섯 자급(資級)을 뛰어 올리셨으니 적당하지 못합니다.”하고 다른 예를 들었으나 성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483년 2월 29일 이섬은 정의현감의 임기를 다 마치고 제주 포구를 출항했다. 다음 날 배가 추자도 10리 근해에 이르자 바다 날씨가 급변하기 시작해 배에 탄 사람들은 놀라 당황했다. 동북풍이 불어와 사방에 운무가 꽉 차고 빗줄기가 마치 동아리로 퍼붓는 것처럼 내리고 파도가 산이 같이 일어나 물이 배 안으로 물밀듯이 들어왔다.
 
사공이 사람들을 안정시키려고 했으나, 황천 항해에 놀란 사람들은 바다가 무서웠다. 풍랑이 몹시 거칠어 중간 돛대가 쪼개져 나가고 노(櫓)가 다 부러져 버렸다. 사방에서 파도가 쳐 배 안에 물이 그득했다.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다투며 머리를 봉옥(蓬屋, 선실)에 목을 매었다. 동행했던 김효반도 또한 목을 매었다. 이때 이섬이 나서서 말하기를 “만약 물을 모두 퍼내어 버리고 배를 조정한다면 우리는 모두 살아날 도리가 있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반드시 물속에서 죽을 것이다. 너희들이 목을 풀고 배를 구출하지 않는다면 나도 또한 죽을 것이다.”라고 말하고는 봉옥에 목을 매니 이섬의 첩 순비(順非)가 따라서 이섬 옆에 두 아이를 잡고 목을 매었다.
 
이를 본 읍리(邑吏) 한진(韓進)이 무릎을 꿇어앉아 이섬에게 간청하기를 “배 안에 있는 물은 밑바닥에서 새어 나온 것이 아니라, 밖의 물이 밀려서 들어온 것이므로 우리가 인사(人事)를 다 한다면 구할 수가 있을 것이니, 원컨대 관인께서 먼저 죽지를 마소서.”하고 애원하며 달려들어 이섬을 풀어주고 김효반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힘을 합쳐 모든 사람의 매듭을 풀어주었다. 배 안의 사람들은 힘을 합쳐 분주하게 물을 퍼내니 어느새 배 안에 있던 물이 모두 사라졌다. 떠다니는 나무를 가지고 노(櫓)를 삼아서 조금씩 저어가자, 기울어진 배가 안정되었다. 사람들은 배가 몹시 고파 어쩔 줄 몰라 엉뚱하게 행동했다. 이섬은 사람을 모아놓고 ”내가 일찍이 들으니 정서(正西)는 바로 중국이요, 남쪽은 해수가 무애(無涯)하다고 하니 배가 나아갈 때마다 조금씩 오른손으로 저어갔다면 중국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러 사람이 나서서 나무 구멍에 불을 지펴 바닷물로 밥을 지어 먹었다. 그런데 밥이 너무 짜 이 밥을 먹은 사람들은 갈증으로 바닷물을 퍼먹자, 더욱 갈증 현상이 심해졌다. 제주 포구를 떠난 지 6일이 지나자 허생(許生) 등 여섯 사람이 갑자기 포식하여 배탈로 죽었다. 9일째 되는 날 강산(姜山) 등 일곱 사람이 죽고, 10일째 되는 날 부계의(夫繼義) 등 네 사람이 죽었다. 표류하던 배는 마침내 중국 강소성 해안 모래밭이 긴 장사(長沙)에 표착했다.
 
 
▲ 江蘇省 南通市 如東縣 掘港鎭(사진:바이두백과)
 
 
표류한 배를 발견한 사람들이 관에 신고하여 천호(千戶) 상개(桑鎧)와 순검관(巡檢官) 섭총(聶摠)이 나타나 표류민을 심문하면서 변방을 침범했다고 말했다. 장사진에 도착한 이후 장졸(將卒)들이 왜구가 쳐들어온 줄 알고 갑옷을 입고 북을 치며 죽창을 들고 나타나 표류민을 모두 죽이려는 것을 순검이 소리를 치고 말려 표류민들의 목숨을 구했다.
 
장사진에서 이틀을 머문 표류민은 굴항지휘소(掘港指揮所)로 옮겨갔다. 굴항은 현재 중국 江蘇省 南通市 如東縣 掘港鎭으로 상하이 위쪽에 있다. 총병관은 표류민들을 심문하러 소주(蘇州)로부터 굴항(掘港) 지휘소로 왔다. 천호 상개 등이 공장(供裝)을 가지고 와서 이섬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성화 19년 3월에 이섬이 여러 돛대를 가진 큰 배를 타고 궁전(弓箭)에 요도(腰刀)를 차고 중국의 경계에 침입해 왔으니, 이 공술(供述)은 적실한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 江蘇省 南通市 如東縣 掘港鎭(사진:바이두백과)
 
 
이에 이섬은 글을 써서 바치기를 “저는 조선국 제주 정의현감으로 체임(遞任)되어 경성으로 가던 중에 바람을 만나 중국에 오게 된 것을 만만천행(萬萬天幸)으로 여기는데, 어찌 경계를 침입해 왔겠습니까? 한갓 입으로 차마 말 못 할 일뿐만 아니라 귀로 차마 들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섬이 비록 백인(白刃:서슬이 시퍼렇게 번쩍이는 날카로운 칼날)에 죽는다 해도 속여서 공술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랬더니 옆에 서 있던 이졸(吏卒)이 나서 눈을 부릅뜨고 꾸짖으며 의령(依領)을 잡고 강제로 행하려 하자, 이섬이 고두(叩頭:경의를 표하려고 머리를 조아림)하고 부복(俯伏:무릎을 꿇고 엎드림)하며 끝내 공장에 서명(署名)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이섬은 무신으로 최고 우두머리인 총병관(摠兵官) 곽총(郭銃)의 심문을 받았다.
 
곽총은 글로 이섬에게 물으며 “네가 계로(係虜:일이나 사물에 얽매임) 된 것을 숨기지 말고 전형(典刑)에 걸리게 된 것부터 명확하게 써라.”라고 명령했다. 이에 이섬은 글로 대답했다.
 
이섬은 성화(成化) 15년(1479년) 윤12월에 중국 조서를 받들어 여진(女眞)을 북벌한 이야기를 적었다. 이섬은 당시 예군관(預軍官)으로 12월에 적경(敵境) 깊이 들어가 수급(首級)을 베어서 돌아왔으며 잡은 포로를 중국에 바쳤다고 적었다. 그리고 1480년부터 1481년까지 중국 사신이 조선에 건너온 일과, 세자의 고명을 청한 일, 조선 사신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 일을 계속 설명했다.
 
이런 상세한 내용을 들은 총병관은 표류민의 목에 씌운 형틀 항쇄(項鎖)와 손에 채운 수박(手搏)을 풀어주었다. 이섬이 계속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하다고 하자, 총병관도 같이 손을 잡고 답례했다. 표류민들은 양주(楊州)로 갔다.
 
 
▲ 중국 양주(楊州)(사진:위키백과)
 
 
이섬 일행은 양주에서 지휘첨사(指揮僉事) 유윤(劉胤) 등이 글로 심문했다. “너희 나라 임금은 어떤 것으로 정치를 하며, 무엇으로 양민(養民)하는가? 또 관리가 된 자는 어떤 일을 행하며, 朝士服, 工商服, 儒子의 冠服, 僧人, 道師의 관복을 명확하게 쓰라.”고 말했다. 이섬은 조선의 전하는 인의(仁義)에 의한 정치를 하고, 농상(農桑)을 중요시하며 양민하고, 관리가 된 자는 형벌을 덜고, 상법을 준수하며, 부렴(賦斂)을 박(薄)하게 함으로써 민생을 후하게 합니다.
 
임금을 섬기되 忠으로써 하고 어버이를 섬기되 孝로써 하며 형장(兄長)을 섬기되 敬으로써 하며 朋友를 접하되 信으로써 합니다. 조선의 생활 습관과 복장은 중국과 거의 같고, 도교의 도사(道師)는 본국(本國)에 있지 않습니다.”라고 글을 적어 답변하였다. 지휘첨사 유윤(劉胤)이 다시 묻기를 “너희 나라에 문무(文武)에 탁이(卓異)한 자가 몇 사람이나 되며, 너와 같은 무리가 몇이나 되는가?”라고 말했다. 이섬은 종이에 적기를 “문무에 탁이한 자는 현재 조정에 있는 이는 천명이나 되며, 나와 같은 무리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섬은 양주를 떠나면서, 사사원(射士元)이 시를 요구하기에 바로 시를 써서 주었다.
 
 
강남(江南)의 명승지는 바로 양주 땅,
청작(靑雀) 황룡(黃龍)이 서루(書樓)에 그려져 있네
노를 잡아 돛을 펴고 푸른 물에 떠가니
저문 날 쓸쓸한 달이 사람 따라 흐르네!
 
江南勝地是楊州
靑雀黃龍裁書樓
卬枻張帆浮碧水
暮天凉月逐人流
 
 
이에 사사원(射士元)이 이 시에 차운(次韻)하기를
 
 
바람결을 타고서 중주(中州)에 이르니
용안(龍顔) 오봉루(五鳳樓)가 환히 보이네
천 년의 역사 지닌 기자(箕子)가 봉해진 나라
지금도 인물들이 유학을 중히 여기네
 
天風吹送到中州
快覩龍顔五鳳樓
千載遠封箕子國
至今人物重儒流
 
 
라고 화답하였다.
 
이섬 일행은 한신의 고향인 회음현(淮安)에 도착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다가와 글을 써서 묻기를 “천순(天順) 연간에 진감(陳鑑)이 조선에 가서 鄭麟趾, 朴元亨과 함께 창화(唱和)를 하였는데, 너는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느냐?”라고 질문했다. 이섬이 글의 내용을 보고는 ”시를 지었다는 일은 들었으나 나는 무신(武臣)이라 그 사람을 기억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 사람은 “너희 나라 현왕(賢王)이 시로써 《황화집(皇華集)》을 지었다는데, 실제로 그러한가?”라고 물었다. 이섬은 글을 읽고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인데, 이런 것을 나에게 묻는가?”하고 반문하니 “진감은 나의 악부(嶽父:장인)인데 이미 돌아가셨다.”라고 답을 했다.
 
이섬은 “박원형은 나의 족숙(族叔)이 되는데, 이미 돌아가셨다.”라고 말했더니 그 사람은 탄식하고 사라졌다. 《皇華集》이란 책 제목은 《詩經》에 실려 있는 〈皇皇者華〉에서 따온 것으로 ‘황화’는 사신을 의미한다. 이 시의 첫머리는 “활짝 핀 꽃이여, 저 언덕과 습지에 있도다. 달려가는 나그네여, 늘상 늦을 것처럼 생각하네”로 시작한다. “온갖 꽃이 만개한 들판을 지나가는 나그네가 있다. 잠시 멈춰 꽃구경이라도 할 법한데, 나그네는 눈 돌릴 겨를도 없이 달려가기에 바쁘다. 어째서일까. 나그네는 임금의 명령을 받고 먼 길을 가는 사신이기 때문이다.”
 
《황화집》은 명나라 사신과 조선의 접대관이 1450년(세종 32)부터 만나 1633년(인조 11)까지 서로 화답한 시를 엮은 책으로 훗날 1773년(영조 49)에 영조의 명으로 180년간 24차례 교환한 시를 모아 편집하여 50권 목판본으로 발간하였다.
 
 
▲ 돈재 성세창저 《황화집》(사진:국립중앙도서관)
 
 
표류민들은 3개월이 지나 6월 10일에 베이징에 도착하였다. 이섬은 비록 무신이지만 시를 잘 지었다. 병부낭관(兵部郎官)이 최발(崔潑)을 불러 말하기를 “조선에서 표류해 온 이섬 등이 길에서 시를 지었다고 하는데 가져올 수가 있는가?”하고 물었다. 이섬은 시 5~6수를 보냈다.
 
명나라는 베이징에 머물던 조선 사신에게 표류 사실을 알리고 함께 돌아가도록 주선했다. 이섬이 성종께 복명(復命)한 것이 1483년 8월 22일로 제주도를 출항한 지 6개월 만에 조산에 돌아온 셈이다. 표류 기록에서 중국에서 가져온 통사 기록에는 죽은 사람이 14명이라고 기록했으나, 이섬 등 표류민의 증언 기록에는 17명이다.
 
성종이 힘들게 돌아온 사람들을 칭찬하고, 역(役)을 면해주고, 외교적인 활동을 칭찬했으나 사간원 헌납 양면, 사헌부 지평 이녹승 등은 계속해서 표류민에게 과하게 표창하고, 특히 이섬의 직급을 크게 올린 것을 불가하다고 아뢰었다. 이섬과 대화하며 6개월 동안의 있었던 일들을 기록한 김종직은 성상의 은혜와 영광이 지극하다고 칭송할 뿐만 아니라, 중국 시인들과 시로 대화하며 조선의 성교(聖敎)를 덜어드리지 않은 훈도(訓導) 김효반과 이섬이 바다에서 죽으려고 할 때 이를 중지시킨 호장(戶長) 한진도 상을 주도록 건의했다.
 
성종은 이섬이 풍랑을 만나 표류하면서 온갖 고난을 겪고 고생 끝에 조선에 돌아와 명나라의 사회상과 정보를 정확하게 말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성종은 사헌부 간언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고 이섬을 1484년 종 3품의 평안도 만포첨절제사(滿浦僉節制使)로 임명했다.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 157권 성종 14년(1483년) 8월 12일 자 기록을 보면, 12살에 왕으로 즉위한 성종은 이섬 송환에 따른 사은사 파견 문제를 영돈녕이상(領敦寧以上)에게 의논하게 했다. 이에 조정의 鄭昌孫, 沈澮, 尹弼商, 洪應, 尹壕, 盧思愼, 李克培 등이 모여 사은사, 성절사(聖節使)를 논의하다가 사은사로 파능군(坡陵君) 윤보(尹甫)를 사신으로 삼고 박옹(朴壅)을 부사(副使)로 삼도록 하였다. 성종 친정기의 정국 운영의 핵심을 담당한 대신들은 영돈녕이상(領敦寧以上) 집단으로 이들은 府院君과 三政丞, 領中樞府事, 領敦寧府事로 구성된 정1품 이상의 고위 관리로 공신(功臣)과 외척(外戚)이었다. 학자들은 성종 때를 대간(大諫)의 성장이 두드러진 시기로 본다. 대간들은 외척들의 정치참여를 맹렬히 반대했지만, 성종은 대간들의 말을 경청하면서 외척도 보호했다.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 157권 성종 14년(1483년) 8월 22일 자 기록을 보면, 천추사 박건을 따라 이섬이 돌아와 임금을 뵙고, 표류했던 내용을 모두 아뢰었다. 성종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만약 글을 해득하지 못하였더라면 어찌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겠는가?”하고 인하여 뒤에 다시 아뢰라고 명하니, 대개 상직(賞職)하고자 함이었다. 홍문관 직제학 김종직이 이섬의 행록(行錄)을 따라 다시 그의 말을 뽑아 글로 아뢰었다.
 
하루는 숙종이 경연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집의(執義) 최응현(崔應賢)과 헌납(獻納) 양면(楊沔), 홍응(洪應)이 나서 또 아뢰기를 “남녀가 분별이 있음은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풍속인데, 이섬은 제주에 첩을 데리고 갔었으므로 중국 사람이 반드시 분별이 없다고 여길 것입니다. 이섬은 죄가 있고, 공이 없으므로 1자급(資級)만 더할 것인데, 5자급을 특별히 올렸으니, 매우 적당하지 못합니다.”라고 간하였다.
 
이에 숙종은 ”이섬이 장사에 도착하자 천호(千戶)가 국경을 범한 것으로 보고 취초(取招: 범죄자를 심문하여 죄를 자백하게 하는 것)하였으나, 이섬이 끝내 이를 거절하고 일행의 인명(人命, 사람의 목숨)을 온전히 하고, 중국 사람들과 더불어 창화(唱和)하였다. 이것은 나라의 이름을 드날린 것이므로 5자급을 더하여도 지나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성종은 조선왕조 사대부들 사이에서 어질고 덕이 뛰어난 군주로 성군(聖君)으로 불렸다. 성종의 왕릉은 임진전쟁(1592) 때 왜병들이 유해를 강탈하고, 왕릉 속의 유물을 훼손해 조선과 일본의 화친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후 화친 조건으로 1606년 9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국서를 보내오고, 도굴범 2명 송환으로 형식상 마무리되었다.
 
1913년 일제강점기 당시 오대산사고에서 강탈당해 도쿄대로 간 오대산사고본 실록은 불교계, 문화재청의 노력을 통해 2011년 국내에 환수되어 2023년 11월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이 개관되었다. 왕조실록은 원래 공개를 하지 않으나, 이곳에서만 관람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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