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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록 (壬辰錄) ◈
◇ 권지삼(卷之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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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진록 (壬辰錄)
 
2
권지삼(卷之三)
 
 
 
3
각설, 정유(丁酉) 구 월 십육 일에 전선 수백 척이 바다를 덮어 나아 오거늘 순신이 제장으로 더불어 전선 십여 척을 거느려 맞아 싸우려 할새 거제현령 안위(安衛) 가만히 도망코자 하거늘 순신이 선두(船頭)에 서서 크게 불러 왈,
 
4
“안위 어찌 국법에 죽고자 하느냐.”
 
5
안위 황망히 이르되,
 
6
“어찌 감히 힘을 다하지 아니하리요.”
 
7
하며 분력하여 적진 중에 달려들어 싸우더니 적선 사오백 척이 안위를 사면으로 둘러싸고 거의 함몰케 되었더니 순신이 사 척 전선을 거느려 구원한대 적선 수백 척이 순신을 에워싸고 어지러이 짓치니 포성이 천지진동하고 함성이 뒤눕는 곳에 순신이 누(樓)에 높이 올라 몸소 채를 잡아 북을 울리며 시석(矢石)을 무릅써 싸움을 돋우니 사졸이 분려(奮勵)하여 죽기를 다투어 이르되,
 
8
“우리 사또 나라에 진충하사 이같이 하시니 우리가 어찌 사생을 돌아보리요.”
 
9
하고 일심육력(一心戮力)하여 십여 합을 싸우니 하나가 열을 당하고 백이 천을 당하는지라. 능히 이소역대(以小易大)하여 사시(巳時)부터 신시(申時)까지 싸워 피차 승부를 결치 못하더니 초경은 하여 적이 잠깐 퇴하거늘 순신이 승세하여 일진을 짓쳐 적선 사오 척을 함몰하고 연하여 따르니 적이 크게 패하여 달아나니 이로부터 순신을 대함이 더욱 중하더라. 이날 순신이 진을 옮기고 첩서(捷書)를 보내니 경이 크게 기뻐 포상하니 상이 기뻐 작(爵)을 더하시려 하니 제신이 주왈,
 
10
“다시 성공한 후 작을 더하심이 가하리이다.”
 
11
상이 좇으사 다만 제장을 위로하시니라. 순신의 계자(季子)의 이름은 면(葂)이니 용력 있고 기사(騎射)를 잘하는지라, 순신이 가장 사랑하더니 정유 구 월에 이르러 면이 모(母)를 좇아 집에 있더니 적이 불의에 이름을 듣고 가인으로 더불어 내달아 도적 수십 인을 쳐 죽이고 뒤를 따르러니 도적의 복병을 만나 어지러이 싸우다가 마침내 도적의 손에 죽은 바 되니라. 순신이 이 기별을 듣고 비통함을 마지아니하더니 이로 인하여 정신이 날로 감하는지라, 스스로 기운을 수련하여 억제하더라. 순신이 일일은 서안(書案)을 의지하여 잠깐 조으더니 홀연 죽은 면이 앞에 이르러,
 
12
“소자 죽인 도적을 부친이 어찌 죽이지 아니하시나이까.”
 
13
순신이 답왈,
 
14
“네 살았을 제 용력과 담기 있더니 이제 비록 죽었으나 어찌 원수를 갚지 못하느뇨.”
 
15
면이 울며 대왈,
 
16
“소자 이미 적수에 죽었으니 비록 혼백이나 감히 하수치 못하나이다.”
 
17
순신이 다시 묻고자 하다가 홀연 놀라 깨달으니 남가일몽이라. 제장을 불러 몽사를 이르고 비회(悲懷)를 금치 못하더니 또 몸이 혼곤하여 서안을 의지하니 비몽사몽간에 면이 또 앞에 나와 고하되,
 
18
“부친이 어찌 소자의 원수를 갚지 않으시고 그 도적을 진중에 용납하시나이까.”
 
19
하고 크게 통곡하거늘 순신이 놀라 깨어 마음에 가장 괴이히 여겨 좌우에 문왈,
 
20
“진중에 행여 사로잡아 온 군사 있는가.”
 
21
좌우 답왈,
 
22
“오늘 아침 적군 일 명을 잡아 선중에 가두었나이다.”
 
23
순신이 즉시 잡아 당전에 올려 수말(首末)을 묻되 과연 면을 죽인 놈이어늘 드디어 사지를 찢어 죽여 면의 원수를 갚으니라. 처음 당장 양원호 등이 남원을 지키더니 한산이 패한 후 도적이 수륙으로 크게 나아오니 성중이 흉흉하여 도산(逃散)하는 자 많으되 오직 양원호가 삼천 병을 거느리고 성중에 있어 전라병사 이옥과 광양현감 이춘원과 방어사 김성노로 더불어 굳이 지키더니 적이 크게 이르러 성을 싸고 급히 치는지라, 양원호 등이 견수불출(堅守不出)하더니 성중에 양식이 점점 진하고 구병이 이르지 아니하는지라, 군심이 흉흉하여 능히 정히 못하더니 이 날 밤 성 외에 함성이 대진하매 일시에 성중을 향하여 조총을 발하니 철환이 비오는듯하는지라, 성첩(城堞) 지킨 군사 감히 거두지 못하더니 이윽고 적이 성 밑에 섶을 쌓아 성과 같이 하고 조총을 일시에 발하니 성중이 대란하는지라, 장병이 북문으로 좇아 달아나더니 적이 장병을 둘러싸고 어지러이 짓치니 장병이 난을 벗어난 자 많지 못하더라. 양원호 의갑을 버리고 겨우 도망하여 여러 겹 싼 데를 벗어나니 혹 이르되 양원호를 짐짓 놓아 보내다 하더라. 남원이 이미 함몰하매 전주 이북이 분궤하는지라. 이때 적이 승승장구하여 나아오니 각 읍 수령들이 각각 명을 도망하고 오직 의병장 곽자위가 창령 화왕산성(火旺山城)에 올라 굳게 지키더니 적이 산하에 이르러 보니 산세 가장 험준한지라, 감히 치지 못하고 물러가거늘 자위가 군사를 모아 산에서 내려와 적의 뒤를 엄습하여 일진을 시살하니 도적이 대패하여 달아나니라. 또 황석산(黃石山)을 칠새 이때 안음현감 곽준(郭䞭)과 함양군수 조종도(趙宗道)와 김해부사 백사림(白士霖)이 먼저 달아나니 민심히 흉흉하여 능히 성을 지키지 못하더라. 적이 드디어 성을 함몰하니 곽준이 그 아들 이상과 이 후로 한가지 힘써 싸우더니 마침내 난군(亂軍)중에서 죽으니 준의 딸이 그 지아비 유문호로 더불어 준을 찾아 성중에 피난하였더니 준이 이미 죽고 또 그 지아비 적에게 사로잡힌 바 되었음을 듣고 스스로 탄식하여 이르되,
 
24
“이제 아비와 지아비를 잃었으니 내 홀로 살아 무엇 하리요.”
 
25
하고 인하여 목매어 죽으니라. 함양군수 조종도 일찍 난을 피하여 산중에 숨었다가 일일은 한가지로 피난 온 사람들이 이르되,
 
26
“내 이미 국은을 입었는지라. 어찌 국은을 저버리고 한갓 초야에 묻혀 이름 없이 죽으리요.”
 
27
하고 드디어 처자를 거느려 성을 지키더니 성이 함몰하기에 당하여 곽준의 부자와 한가지로 죽으니라.
 
 
28
재설, 통제사 이순신이 전선 이십여 척을 거느려 진도 벽파진(碧波津) 아래 결진하였더니 적장 마흑시 전선 이백여 척을 거느려 아군을 향하여 나오거늘 순신이 배마다 화촉을 싣고 순풍을 좇아 나아가며 어지러이 짓치니 적이 능히 대적지 못하여 달아나거늘 순신이 따라가며 짓쳐 적장 심안둔을 버혀 수급을 돛에 달아 호령하니 군성이 대진하는지라, 순신이 드디어 나아가 금도에 결진하니 군사 이미 팔천여 명이요 난민 모인 자 수만여 명이라, 군용(軍容) 장함이 한산도에서 십 배나 더하더라.
 
 
 
 

1. 이순신(李舜臣)의 최후

 
30
무술(戊戌) 칠 월 수군도독 진린(陳璘)이 경성에 이르러 한가지로 도적을 치려 할새 인의 천성이 사나와 여러 사람의 뜻에 맞지 아니하는지라. 가장 두려워하는 자 많더니 상이 강두에 행하사 전송하실 새 진린의 수하군사 수평을 양매하되 조금도 기탄치 아니하고 찰방 이상규를 무수 난타하여 유혈이 낭자한지라, 상이 크게 근심하사 즉시 정지하사 순신으로 하여금 진인을 후대하여 촉노(觸怒)함이 없게 하라 하시다.
 
 
31
재설, 이순신이 당장 진인의 이름을 듣고 미리 주육(酒肉)을 장만하여 기다리더니 진인이 이미 도중에 이르매 순신이 맞아 보는 예를 필하매 일변 잔치를 배설하여 진인을 관대하고 일변으로 천병을 호궤하니 천병이 서로 이르되,
 
32
“과연 양장이라.”
 
33
하고 진인이 또한 기뻐하더라. 양진이 합세하여 군중사를 의논하더니 홀연 보하되,
 
34
“적선 백여 척이 나아 온다.”
 
35
하거늘 순신이 진인으로 더불어 각각 전선을 거느려 녹도에 이르니 적이 아군을 바라보고 짐짓 뒤로 물러가며 아군을 유인하거늘 순신이 따르지 아니하고 녹도 만호 만송 여동으로 하여금 십여 척 전선을 거느려 절이도에 돌아와 매복할새 진인이 또한 수십 척 전선을 머물러 싸움을 돕게 하다. 차일 진인이 순신으로 더불어 함께 술을 먹더니 진인의 휘하 천총(千總)이 품하여 왈,
 
36
“아침에 도적을 만나 조선 주사는 적 수백여 급을 버히되 천병은 풍세 불리하여 적병을 하나도 참하지 못하였다.”
 
37
한대 진인이 대로하여,
 
38
“무사로 하여금 밀어내어 참하라.”
 
39
하고 잡았던 술잔을 땅에 던지거늘 순신이 그 뜻을 알고 즉시 이르되,
 
40
“노야(老爺) 이미 천조대장이 되어 이곳에 임하시니 우리 승첩(勝捷)은 곧 노야의 승첩이라, 노야의 복으로 임전하신 지 오래지 아니하여 첩서를 황조에 보하면 어찌 아름답지 않으리요.”
 
41
하니 진인이 이에 대희하여 순신의 손을 잡고 이르되,
 
42
“내 일찍 공의 이름을 우레같이 들었더니 과연 허언이 아니로다.”
 
43
하고 다시 술을 나와 종일토록 즐기더라. 이로부터 진인이 순신의 진중에 있어 그 호령이 엄명함을 보고 마음에 깊이 항복할 뿐 아니라 거느릴 전선이 비록 많으나 도적 막기 편치 못한지라, 매양 전을 임하여 아국관선을 타고 순신의 지휘를 좇아 반드시 ‘노야(老爺)’라 일컫고 이르되,
 
44
“공은 동방사람이 아니라 만일 중원에 들어가 쓰이면 마땅히 천하대장이 되리라.”
 
45
하더라, 진인이 주상께 주문하여 이르되,
 
46
“통제사 이순신이 경천위지(經天緯地)할 재주 있삽고 보천요일(普天曜日)할 공이 있다.”
 
47
하니 대개 심복하는 말일러라. 천병이 비록 순신의 위엄(威嚴)을 꺼리나 자못 노략하기를 일삼더라. 군민이 가장 괴로이 여기더니 하루는 순신이 영을 내려 도중 인가를 대소 없이 헐며 방(訪)을 붙이되,
 
48
‘모일부터 모일까지 못 섬중으로 백성을 옮기리라.’
 
49
영을 내리고 자기 의금(衣衾)도 배에서 내리니 진인의 막하가 방을 가지고 가 고하거늘, 진인이 급히 가정을 보내어 연유를 물으니 순신이 답하되,
 
50
“아국 백성이 천병을 인하여 노략(擄掠)을 일삼으니 양민이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는지라, 내 이제 대장이 되어 군민으로 하여금 능히 편안치 못하게 하고 무슨 면목으로 이곳에 머물리요, 이러므로 다른 곳에 옮아 가고자 하노라.”
 
51
가정이 돌아가 그 연유를 자세히 고하니 진인이 대경하여 전도에 이르러 순신의 손을 잡고 만류하며 또 사람을 선중에 보내어 그 의금을 도로 수운(輸運)하여 드리고 간청하기를 마지아니하는지라, 순신이 이르되,
 
52
“노야 만일 내 말을 좇으시면 어찌 즐겨 서로 떠나리요.”
 
53
진인이 가로되,
 
54
“내 어찌 공의 말을 아니 좇으리요.”
 
55
순신이 이르되,
 
56
“천병이 아국으로서 제후국(諸侯國)이라 하여 조금도 기탄함이 없는지라, 노야 만일 나로 하여금 임의로 금지케 하면 다시 다른 염려 없을까 하나이다.”
 
57
진인 왈,
 
58
“이 일이 무슨 어려움이 있으리요.”
 
59
하고 즉시 허락하니 그 후부터 천병이 죄 범하는 자 있으면 반드시 그 죄를 다스리니 천병이 두려워하기를 진인에게 지나는지라, 이로 인하여 군민이 평안하더라.
 
60
이때 적병이 삼도에 통행하여 다니며 여사(旅舍)를 불지르고 아국인을 잡으면 혹 죽이며 코도 베어 위엄을 보이고 그들의 전공으로 삼으며 점점 나아가 충청도 직산(稷山)에 이르니 경성이 진동하는지라, 양경리와 마제독이 제장으로 하여금 아국 군사로 더불어 한가지로 협력하며 각처 액구(隘口)를 지키니 적이 경기지경에 이르러 아국이 이미 준비함을 보고 즉시 군사를 돌이켜 돌아갈새 청정이 다시 울산(蔚山)에 둔하고 평의지는 사천(泗川)에 둔하였으니 수미 서로 연락하여 팔백 리에 벌였더라.
 
61
처음 적이 경성을 향하여 올 때 조신이 다투어 피난할 묘책을 의논할새, 지사 신집이 이르되,
 
62
“어가(御駕) 영변(寧邊)으로 행하심이 마땅하리라, 내 일찍 평양병사 하였을 제 영변 일을 자세히 아나니 성첩(城堞)이 굳고 해자(垓字) 가장 깊으니 가히 지키엄직하거니와 다만 양식이 없으니 만일 미리 준비함이 없으면 장차 큰 근심이 되리라.‘
 
63
한대 듣는 자 이르대,
 
64
“신불합장(辛不合醬)이라.”
 
65
하고 일시 기담(奇譚)을 삼아 웃기를 마지 아니하더라.
 
66
도원수 권율이 경상도에서 도망하여 도성에 이르니 상이 인견하사 적정을 물으시니 율이 대왈,
 
67
“적병의 형세 태산 같으니 그 봉예를 대적키 어려운지라.”
 
68
당초에 상이 근심하시더니 오래지 아니하여 적병이 물러가고 권율이 다시 경상도로 내려가니 대간(臺諫)이 계사하되,
 
69
“율이 본디 지모(智謀) 없고 또한 겁이 많사오니 도원수의 소임을 당치 못하리이다.”
 
70
하나 상이 불윤하시니라.
 
71
이때 양경리 마제독이 보군(步軍) 수만을 거느려 아군으로 선봉을 삼고 경상도로 내려가 울산에 웅거한 도적을 칠새, 이때 적장 청정이 울산 동해변의 험한 곳을 가려 성을 쌓고 굳게 지키거늘 양경리 등이 나아가 성을 치니 적이 군사를 내어 싸우다가 능히 대적지 못하여 물러 성으로 달아들거늘 장병이 승세하여 나아가 성을 싸고 급히 치니 적이 성상에서 총을 어지러이 발하고 또 돌을 날려 성하에 내려치니 장병과 아군이 맞아 죽는 자 많은지라, 양경리 등이 취승치 못하고 정히 근심하더니 이 날 밤에 김응서(金應瑞) 수백 군을 거느려 성 외에 매복하였다가 급수(汲水)하는 도적 백여 인을 잡았으되 다 주린 빛이 있는지라.
 
72
제장이 이르되,
 
73
“성중에 양식이 이미 진하였나니 오래지 않아서 적이 반드시 달아나리라.”
 
74
한대 경리 군사를 재촉하여 성을 치더니 이때 천기(天氣) 심히 차고 궂은 비 연일 오는지라, 군졸이 수족을 떨고 능히 싸우지 못할 뿐 아니라 적선 백여 척이 나아 와 청정을 구하려 하는지라, 양경리 적세를 보고 즉시 군사를 거두어 경성에 돌아와 다시 진병하기를 의논하더라.
 
75
무술 칠 월에 이르러 중조병부주사 정응대 경리 양호를 무함(誣陷)하여 파직하고 인하여 잡아 돌아가니 상이 경리의 공로를 생각하시고 즉시 좌의정 이원익을 천조에 보내어 양호의 애매함을 주하시니라. 구월에 이르러 중조대장 형개 다시 군마를 조발하여 도적을 칠 새 마귀(麻貴)로 울산을 지키고 동일원으로 사천을 지키고 수군도독 진인을 재촉하여 도적을 치라 하다. 진인이 순신으로 더불어 주사를 거느려 좌수영(左水營) 앞에 이르러 결진하였더니 제적이 장차 돌아가려 함을 듣고 즉시 전선을 재촉하여 순천 왜교에 이르니 이는 적장 평행장의 앞진이라. 순신이 남해현감 김이행 등으로 하여금 전선 십여 척을 거느려 적진을 충돌하여 왜선 사오 척을 파하고 크게 싸우더니 조수(潮水) 물러남을 인하여 돌아왔더니 이 날 천조 육군도독 유정(劉綎)이 마병 일만 오천을 거느려 왜교 북녘에 이르러 행장(行長)을 치려 하더니 적장 평의지 정병 수백을 거느려 남해로부터 평행장의 진에 이르니 이는 다른 연고 아니라, 정히 평행장으로 더불어 유정을 언약하여 수륙으로 적진을 협공하더니 사도첨사 황세득이 적병의 철환을 맞아 죽었는지라. 세득이 본디 순신의 처족이라, 제장이 들어와 조문하니 순신 왈,
 
76
“세득이 왕사에 죽었으니 가장 영행한지라,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리요.‘
 
77
하더라,
 
78
십일 월에 이르러 변성남이라 하는 자 적진으로부터 도망하여 이르되,
 
79
“일본 관백 평수길이 이미 죽었는지라, 제직이 관백을 다투어 급히 돌아가려 한다.”
 
80
하더라.
 
81
일일은 진인이 순신에게 일러 가로되,
 
82
“내 밤에 천문을 보니 동방의 장성(將星)이 떨어지고자 하는지라, 이는 반드시 공에게 응함이니 공이 어찌 삼국적 제갈무후(諸葛武候)의 법술을 본받지 아니하느뇨.”
 
83
순신이 답하여 이르되,
 
84
“나의 충성이 무후에게 미치지 못하고 덕이 또한 무후에게 미치지 못하고 재주 또한 부족하니 내 비록 무후의 법술을 쓴들 하늘이 어찌 응함이 있으리요.”
 
85
하더라. 이때 평행장 등이 급히 돌아가고자 하나 아국 주사 막혀 능히 뜻을 이루지 못하여 드디어 회뢰(賄賂)를 많이 진 도독께 끼치고 강화함을 주하니 진인이 순신을 권하여 적으로 더불어 화친을 통하고 군을 파하라 한대 순신 왈,
 
86
“내 이미 조선 대장이 되었으니 가히 화친을 구하지 못할 것이요, 하물며 도적을 돌려보내지 못하리라.”
 
87
한대 도독이 부끄러워 다시 말을 못하고 왜사에게 이르되,
 
88
“너희를 위하여 통제사를 권하되 통제사 즐겨 듣지 아니하니 장차 어찌하리요.”
 
89
왜사 돌아가 평행장에게 고한대 행장이 다시 조총과 보화를 순신에게 보내고 강화하기를 간청하니 순신이 대질 왈,
 
90
“임진(壬辰) 이후에 도적을 무수히 죽이고 얻은 병기와 치중(輜重)이 뫼같이 쌓였으니 이것은 무엇에 쓰리요. 마땅히 네 머리를 베어 군중에 호령할 것이로되 아직 용서하나니 빨리 돌아가 행장다려 일러 다만 목을 씻고 죽기를 기다리게 하라.”
 
91
왜사 크게 두려 머리를 싸고 쥐숨듯 달아나니라.
 
92
진 도독이 이미 왜적의 뇌물을 많이 받았는지라, 기어이 길을 헤쳐 놓아 보내고자 하여 순신에게 이르되,
 
93
“내 잠깐 행장을 버리고 남해 웅거한 도적을 치고자 하니 공의 뜻이 어떠하뇨.”
 
94
순신이 대왈,
 
95
“남해에 있는 도적은 본디 조선 백성이요, 진실로 도적이 아니라, 어찌 치려 하느뇨.”
 
96
진 도독이 이르되,
 
97
“비록 조선사람이라 하나 이미 도적을 좇았으니 이 또한 도적이라 이제 나아가 치면 조금도 수고를 허비치 않고 많이 버히리라.‘
 
98
한대 순신 왈,
 
99
“천조 황상이 특별이 모든 장군을 명하사 도적을 치고자 하심은 진실로 소방(小邦) 사람을 구코자 하심이어늘 장군이 도로혀 주육(誅戮)을 더하려 하시니 이는 저어하건대 황상의 본뜻이 아닌가 하나이다.”
 
100
도독이 노왈,
 
101
“황상이 주신 인검(印劍)이 내게 있으니 뉘 감히 내 영을 항거하리요.”
 
102
순신 왈,
 
103
“이 몸이 비록 한 번 죽으나 어찌 차마 왜적을 버리고 도로혀 내 불쌍한 군민을 해하리요.”
 
104
하고 힘써 다투니 도독이 감히 뜻을 세우지 못하더라.
 
105
이 달 십칠 일 초혼(初昏)에 이르러 평행장이 불을 들어 남해 적으로 더불어 서로 응하니 대개 평행장이 곤양 사천에 웅거하나 도적을 청함이니라. 이 도적은 본디 일본국 산주군이니 용맹이 무적한 고로 하여금 선봉을 삼아 조선군사를 해치고 달아나려 함이라, 순신이 제군을 신칙하여 싸울 기계를 준비하더니 십팔 일에 이르러는 왜군의 전선 오백 척이 남해 곤양 사천으로 말미암아 아국 군병을 향하여 나아 오거늘 순신이 도독으로 더불어 노량(露梁)에 이르러 도적을 만나 크게 싸워 적선 백여 척을 파하고 쟁쳐 군을 거두어 잠깐 쉬더니 이 날 밤 삼경에 이르러 순신이 배 위에서 하늘을 우러러 사배하고 암축(暗祝) 왈,
 
106
“도적을 진멸하오면 순신이 비록 죽사와도 한이 없으리니 명천이 감동하사 수륙에 미만(彌滿)한 왜적을 진멸하게 하소서.”
 
107
하고 정히 빌 즈음에 홀연 큰 별이 빛이 황홀하여 해중에 떨어지는지라, 순신이 놀라 탄식하기를 마지아니하고 보는 자 아니 놀랄 이 없더라. 십구 일에 이르러 순신이 다시 진인으로 더불어 남해지계에 이르러 왜장 청정의 전선을 만나 크게 싸우더니 홀연 급한 철환이 날아와 순신의 가슴을 맞아 바로 등을 꿰뚫고 나가는지라, 좌우 붙들어 장중에 들어가니 순신이 이르되,
 
108
“싸움이 바야흐로 급한지라, 나의 죽음을 누설치 말라.”
 
109
하고 말을 마치며 천명(天命)이 진하니 순신의 조카 완(莞)이 본디 담략(膽略)이 있는지라. 순신의 아들 회(薈)에게 이르되,
 
110
“일이 이미 이에 이르렀으니 망극하기를 어이 참으리요마는 만일 상사(喪事)를 발설하면 일군이 경동하리니 만일 도적이 허한 때를 타 엄습하면 시신(屍身)을 또한 보전하여 돌아가지 못하리라.”
 
111
하고 드디어 순신의 영으로 싸움을 독촉하더니, 진 도독의 전선이 적병에게 싸인 바 되어 거의 함몰케 되었거늘 이완이 중군을 지휘하여 나아가 적선을 짓치니 도적이 일시에 달아나는지라, 도독이 배를 재촉하여 나아 오며 크게 불러 왈,
 
112
“통제사는 어디 있느뇨.”
 
113
이완이 뱃머리에서 크게 통곡 왈,
 
114
“숙부의 명이 이미 진하였는지라, 어찌 슬프지 아니하리요.”
 
115
도독이 대경하여 배 위에서 거꾸러지며 통곡 왈,
 
116
“통제사 이미 죽은 후에 날을 구하도다.”
 
117
하고 인하여 가슴을 두드려 통곡하기를 마지아니하고 일군이 또한 통곡하니 곡성이 해중에 진동하는지라, 천조 장군이 또한 아니 슬퍼하는 자 없더라.
 
118
이때 평행장 등이 액구를 벗어나 일본으로 돌아가고 곤양 사천 거제 웅천 부산 순천 등지에 둔취하였던 도적이 또한 일시에 돌아가니라. 순신의 아들 이회 등이 고금도(古今島)로부터 영구(靈柩)를 받들어 아산(牙山)으로 돌아갈새 일로 인민이 곡성이 진동하고 도독의 제장이 각각 치제하며 또한 만장(輓章)을 지어 순신의 공을 찬양하더라. 진 도독이 군사를 거두어 돌아올 때에 아산에 들어가 치제코저 하더니 마침 형국문(형개)이 경사에 사람을 보내어 도독의 양병하기를 재촉하는지라, 다만 수백 냥을 보내어 부의(賻儀)를 삼으니 이회 비록 초상에 있으나 가히 아니 사례 못할지라, 급히 달려가더니 아산 대로에 이르러 도독을 만나 즉시 말에서 내려 절하여 뵈니 도독이 이회의 손을 잡고 양구히 통곡하다가 인하여 문왈,
 
119
“제 이제 무슨 벼슬을 하였느냐.”
 
120
회 답왈,
 
121
“소자 이제 초상에 있는지라, 어찌 관작(官爵)을 배하리요.”
 
122
도독이 이르되,
 
123
“중국은 비록 초상에 있으나 오히려 상전을 폐치 아니하거늘 너희 나라는 논공(論功)하는 법이 가장 늦은지라, 내 마땅히 너희 국왕께 고하고 빨리 봉작(封爵)을 받게 하리라.”
 
124
하더라. 상이 순신의 죽음을 들으시고 가장 슬퍼하사 즉시 제관을 보내어 치제하시고 승직(陞職)하사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우의정 부 영의정 겸 영경연(領經筵)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을 추증하시고 시호(諡號)를 충무공(忠武公)이라 하시니라.
 
125
순신이 가정(嘉靖) 원년 을사에 탄생하여 만력(萬曆) 원년 무술에 졸하니 연이 오십사 세라. 순신의 제장이 충무공을 위하여 묘당(廟堂) 세우기를 청하니 조정이 좇아 경상좌수영 북녘에 묘당을 세우고 이름을 충무사(忠武祠)라 하더라. 호남 군민이 다투어 재물을 내어 돌비[石碑] 하나를 만들고 방백에게 새겨 세우기를 청하니 방백이 진안현감 신인도를 보내어 돌비에 크게 쓰되,
 
126
“조선국 영의정 덕풍부원군 충무공 이장군 파로비(破擄裨)”
 
127
라 하여 동령영에 세우니 이는 좌수영을 왕래하는 길이더라. 그 후에 이운룡(李雲龍)이 통제사를 배하매 민심을 좇아 묘당을 거제 당에 세우니 대소선척이 발행할 제 고사(告祀)치 않을 이 없더라. 영남 해변에 있는 백성들이 또한 재물을 내어 충무공의 묘당을 노량에 세우고 출입에 반드시 제사를 행하니 대개 노량이 한산도에서 가까운 연고일러라.
 
 
128
차설, 충무공이 처음으로 탄생하매 복자(卜者) 이르되,
 
129
“이 아이 행년 오십에 남방에서 큰 공을 세우고 벼슬이 대장에 이르리라.”
 
130
하더라. 공이 어렸을 때에 동리 소아들로 더불어 유희할 제 매양 돌을 쌓아 진법을 만드니 보는 자 가장 기특히 여기더라. 자라매 여력이 과인하고 기사(奇事)를 잘하는지라, 동류 중에 미칠 이 없더니 병자춘(丙子春)에 무과에 뽑히어 선영에 배알(拜謁)할새 묘전에 세웠던 석인(石人)이 땅에 거꾸러졌는지라, 공이 하인 수십 인으로 하여금 다시 세우라 한대 중인이 능히 그 돌을 이기지 못하거늘 공이 중인을 꾸짖어 물리치고 두 손을 잡아 일으키니 보는 자 놀라지 않을 이 없더라. 공의 천성이 사람 찾기를 좋아 아니하는 고로 비록 낙중(落中)에서 생장하였으나 사람이 알 리 없으되 홀로 서애(西厓) 유성룡이 어려서부터 친한 고로 매양 대장의 재주라 일컫더라.
 
131
병인년 겨울 비로소 훈련원(訓練院)에 근사(勤仕)하더니 이때 율곡선생(栗谷先生)이 이조판서로 있어 공의 이름을 듣고 서애 유성룡을 인하여 한번 보기를 청한대 공이 사양 왈,
 
132
“율곡이 날로 더불어 동성이요 또한 장자니 가히 봄즉하나 정관(政官)으로 있을 때는 가치 아니하다.”
 
133
하고 마침내 나아가지 아니하니라. 병조판서 김귀영(金貴榮)이 또한 공의 이름을 듣고 매파(媒婆)를 넣어 첩 딸로써 공의 첩을 주고자 하거늘 공이 즐겨 아니하며 왈,
 
134
“내 처음으로 사로(仕路)에 났는지라, 어찌 자취를 권문(權門)에 의탁하리요.”
 
135
하고 마침내 듣지 아니하니라.
 
136
이 해 겨울에 충청병사(忠淸兵使)의 군관(軍官)이 되어 청주로 내려가매 병사를 지성으로 섬길 뿐 아니라 상시 거처에 다만 의금(衣衾)뿐이요 근친(覲親)하러 돌아올 때는 남은 양식을 하인에게 맡겨 분명히 하니 병사 듣고 가장 사랑하며 극진히 공경하더니 일일은 병사 밤들기를 인하여 취흥(醉興)을 겨워 공의 손을 잡고 이끌어 한 군관의 방을 찾아가고자 하니 그 군관은 평일에 사랑하고 가장 친한지라, 공이 가로되,
 
137
“대장이 혼야(昏夜)에 스스로 막하를 찾음이 가치 아니하다.”
 
138
하여 거짓 취한 체하고 병사의 손을 받들며 이르되,
 
139
“사또 장차 어느 곳으로 가려 하시느뇨.”
 
140
병사 바야흐로 깨달아 땅에 앉으며 왈,
 
141
“내 진실로 취하였다.”
 
142
하더라.
 
143
경진년 구 월에 공이 훈련원(訓練院) 말관으로 발개[鉢浦]만호를 제수하여 부임하였더니 이때 감사 손식이 장한 이름을 듣고 공을 해코자 하더니 순력(巡歷)을 당하여 능주에 이르러 공을 불러 진법을 강론하고 진을 그리라 한대 공이 즉시 붓을 잡아 그리더니 손식이 양구히 보다가 이르되,
 
144
“필법이 어찌 이렇듯 정묘하뇨.”
 
145
하고 인하여 선세(先世)를 물은즉 본디 세문의 양반이라, 감사 스스로 차탄 왈,
 
146
“내 처음에 서로 아지 못함을 한하노라.”
 
147
하고 이로부터 관중히 대접하더라.
 
148
차설, 좌수사 형백[成鎛]이 사람은 본진에 보내어 객사 앞에 있는 오동나무를 취하여 거문고를 만들고자 하거늘 공이 허치 않으며 왈,
 
149
“이는 공해(公廨)에 있는 나무요 하물며 심은 지가 오래거늘 어찌 일조에 버히리오.”
 
150
수사 비록 대로하나 마침내 그 나무를 가져가지 못하니라. 그 후에 이용이 수사 되었더니 또한 차언을 듣고 공을 해코자 하여 불의에 다섯 진변 장수와 군사를 점고하니 네 진변 장에는 궐한 것이 많고 발개는 다만 삼 인이 궐하였으되 수사 오직 공의 이름만 주문하여 죄를 청하고자 하거늘 공이 이 일을 알고 네 진변 장 궐한 것을 자세히 기록하여 수영에 이르러 모든 비장을 보고 그 일을 자세히 이르니 모든 비장이 수사에게 고하여,
 
151
“발개라 하는 곳이 적을 뿐 아니라 순신이 이미 네 진의 궐한 것을 알았으니 이제 만일 장문하여 후에 반드시 뉘우침이 있을까 하나이다.”
 
152
하니 수사가 그렇게 여겨 그 일을 정하지 못하였더니, 그 후에 전지(傳旨)를 당하여 장차 하등을 쓰고자 하거늘 충청병사 조헌(趙憲)이 붓을 잡고 즐겨 쓰지 않으며 왈,
 
153
“내 들으니 순신이 변비(邊鄙)를 다스림이 일도에 으뜸이라 하는지라, 가히 폄(貶)치 못하리라.”
 
154
하고 인하여 상등에 두었더니, 임오년 춘삼월에 이르러 군기경차관(軍器敬差官)이 본조에 이르러 군기를 수정치 않음으로써 계문하여 파직하매 사람이 이르되,
 
155
“공의 군기를 수정함이 다른 사람과 다르되 마침내 변을 입으니 이는 다른 연고 아니라 전일 훈련원에 있을 때에 병조정랑(兵曹正郞)을 촉노(觸怒)한 연고라.”
 
156
하더라.
 
157
계미년 가을에 이르러 이용이 남병사를 배하매 공을 계청하여 군관을 삼으니 이는 전일을 뉘우쳐 깊이 사귀고자 함이러라. 공으로 더불어 친밀함이 다른 사람과 지나는지라, 대소 군무를 반드시 의논하더니 하루는 병사 장차 발행하여 북으로 갈새 공이 변방 군관에 있어 행군하기를 서문으로부터 나가게 하는지라, 병사가 대로 왈,
 
158
“내 본디 서문으로 나지 말고자 하거늘 어찌 구태여 이 길로 행하려 하느뇨.”
 
159
하거늘 공이 이르되,
 
160
“서는 금방이라, 사시로 의논하면 금의 속함이 가을이요 가을은 숙살(肅殺)하기를 주장하는 고로 이로 인하여 서문으로 나고자 함이니이다.”
 
161
병사 이 말을 돋고 도로혀 크게 기뻐하더라.
 
162
이 해 겨울에 건원군관(乾原軍官)이 되었더니 이때 적호 오랑캐 자주 변방을 침노하는지라, 조정이 크게 근심하나니 공이 부임한 후 계교를 베풀어 오랑캐를 유인하여 크게 파하니 북평사 김우서(金禹瑞)가 홀로 순신의 성공함을 꺼려 주장께 품하지 않고 천자(擅恣)히 대사를 행하리라 하여 공의 죄를 다투어 계문하니 조정이 바야흐로 순신의 큰 공을 더하고자 하다가 주장의 계문을 인하여 비록 정치 못하였으나 이로 인하여 이름이 자자한데 세상에 행하기를 얻지 못하니 지식 있는 자 가장 아까워하더라. 이 해 겨울에 그 부친 덕전군의 상사를 만나 분산하였더니 이때 조정이 바야흐로 공을 중히 쓰고자 하여 겨우 소상(小祥)을 지낸 후에 결복(闋服)하는 기한을 자주 묻더라. 병술년 정월에 비로소 삼년상을 마치매 즉시 사복주부(司僕主簿)를 제수하였더니 행공(行公)한 지 겨우 십륙 일에 조산만호(造山萬戶)를 제수하시니 이는 다른 연고 아니라, 이때 오랑캐 자주 변방을 침노하는 고로 조산이 호지(胡地)에 가깝다 하여 공으로 만호를 삼았더니 정해년 가을에 이르러 녹둔도(鹿屯島) 둔전 소임을 겸하니 그곳이 본진에서 극히 요원할 뿐 아니라 지킨 군사 또한 적은지라, 여러 번 보장하여 청병하기를 청하되 병사 이일이 즐겨 듣지 아니하더니 오래지 않아 적병이 크게 이르러 섬을 싸거늘 공이 중군을 호령하여 일시에 쏘며 공이 스스로 활을 잡아 도적의 괴수 십여 인을 쏘아 죽이니 적이 대경하여 군사를 거두어 달아나거늘 공이 이운용 등으로 더불어 뒤를 따라 일진을 엄살하니 적이 사산분주(四散奔走)하거늘 아국 피로인(被虜人) 육십여 명을 앗아 들이온대 병사 이일이 심중에 꺼려 공을 죽여 제 죄를 면코자 하여 공을 잡아 영문(營門)에 이르러 패군함으로써 복초(伏招)하라 한대 공이 소리를 가다듬어 이르되,
 
163
“내 일찍 군사 적음으로써 여러 번 영문에 고하던 서목(書目)이 이에 있는지라, 조정이 만일 알면 그 죄 내게 있지 아니할 것이요, 하물며 내 힘써 싸워 도적을 물리치고 피로인 육십여 명을 살려 돌아왔거늘 어찌 패군함을 내게 돌려보내어 죄를 의논하리요.”
 
164
하고 조금도 낯빛을 변치 아니하는지라, 이일이 묵연양구(黙然良久)에 공을 잡아 가두고 패군한 형상을 갖추어 계문하니 상이 가로되,
 
165
“이순신은 패군할 무리 아니라.”
 
166
하시고 하여금 백의종군(白衣從軍)으로 공을 세워 죄를 속하게 하시다. 이 해 겨울에 오랑캐를 파하고 사명(赦命)을 얻으니라. 무자년 유월에 비로소 집에 돌아왔더니 이때 조정이 무변중 불차탁용(不次擢用)할 사람을 가릴새 공의 이름을 둘째 빼었으되 미처 서용(敍用)치 못한 고로 능히 벼슬을 얻지 못하니라. 기축년 이 월에 이르러 전라도 순찰사 이광(李洸)이 공으로써 군관을 삼고 인하여 탄왈,
 
167
“공의 재주로써 이렇듯 침체하였으니 어찌 가석치 않으리요.”
 
168
하고 드디어 공을 주청하여 본도 조방장을 삼았더니 이 해 겨울에 무신 겸 선전관(武臣兼宣傳官)으로 경성에 올라왔다가 오래지 아니하여 정읍현감(井邑縣監)을 제수하시매 공이 즉시 부임하였더니 이때 구대중이 본도 도사 되어 글월로써 안부를 묻거늘 공이 다만 평안함으로써 회답하였더니 그 후에 대중이 역모(逆謀)에 관련하여 제집 서적을 수탐할새 공의 서간(書簡)이 수탐중 드러난지라, 공이 마침 채사원으로 경성에 올라오다가 길에서 금오랑(金吾郞)을 만나니 이는 공의 평일 소친자(所親者)라. 공에게 이르되,
 
169
“이번 수험(搜驗)중에 공의 필적이 있는지라 내 이제 공을 위하여 서적을 빼고자 하노라. 공의 뜻이 어떠하뇨.”
 
170
공이 이르되,
 
171
“전일 대중이 글월을 부쳐 회답할 따름이라, 하물며 이미 수탐중에 있나니 어찌 감히 빼리요.”
 
172
금오랑이 인하여 돌아가더니 오래지 아니하여 공을 돋워 당상(堂上)을 하이시고 인하여 만포첨사(萬浦僉使)를 하이시니 의논하는 자 이르되,
 
173
“상이 공의 문필을 보시고 벼슬을 돋우다.”
 
174
하더라. 공의 형이 일찍 구몰(俱沒)하고 그 자녀 다 대부인께서 양육하는지라, 공이 정읍에 부임할 제 그 형의 자녀 다 대부인을 좇아갔는지라, 혹 이르되,
 
175
“남들로 득죄함이 있을까 하노라.”
 
176
하니 공이 이르되,
 
177
“차라리 남들로 죄를 얻을지언정 어찌 차마 의지 없는 유치(幼穉)를 버리리요.‘
 
178
하더라. 공이 정읍으로부터 만포에 도임코자 하더니 신묘년 이 월에 진도군수(珍島郡守)를 제수하였다가 미처 부임치 못하여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를 명하시니 공이 드디어 정읍으로부터 부임하니라. 공이 처음 수사를 배할 때 공의 벗이 한 꿈을 얻으니 나무가 하늘에 가득하고 여러 가지 사면으로 피었는데 그 위에 인민이 천만이나 부지하였더니 그 나무가 홀연 뿌리가 빠져 장차 기울게 되었는지라, 문득 한 사람이 급히 달려들어 구하거늘 그 사람은 이른바 공이라. 훗사람이 송나라 정승 문천상(文天祥)이 하늘 받든 꿈에 비할러라. 대개 하늘이 먼저 변을 지어 보이나니 백홍(白虹)이 관일(貫日)하고 태백(太白)이 현천(現天)함은 해마다 있으니 사람이 상사로 알거니와 그 남은 재변은 증험할 것이 많은지라. 임진년에 괴이한 재변이 많으니 능히 다 기록지 못하거니와 신묘년에 한강물이 연하여 삼 일을 핏빛이 되고 성안에 검은 기운이 크게 일어나 바로 하늘에 깨쳐지더니 수일 후에야 바야흐로 걷으며 평양 대동강 물이 서편은 맑으며 동편은 흐리고 또 무수한 범이 평양성 중에 들어와 인민을 해하니 범은 본디 뫼에 있는 짐승이라. 어찌 성지 중에 들어와 사람을 해하리요. 이는 도둑이 장차 성중에 들어올 징조라 하늘이 먼저 재변을 사람에게 간절히 하시되 사람이 능히 살피지 못하더라.
 
179
관공(關公)이 도성에 현성(顯聖)하신 후에 또 전라도 남원에서 현성하사 왜적을 많이 죽이시는지라, 왜적이 이때 능히 저당하리요. 아국 병란이 평정 후에 묘당을 세우고 위패(位牌)를 만들어 천추에 미멸케 하고자 하되 화상을 일찍 보지 못하였는지라, 중원에 들어가 구할새 원래 관공이 중원에 현성하심이 많은 고로 가가호호이 혹 관공의 화상도 위하여 혹 위패를 만들어 제사하는지라, 드디어 그 위패 하나를 구하여 아국에 내어 와 동남에 관왕묘(關王廟)를 세우고 위패를 당년 생시같이 모셔 봉안할새, 명천자(明天子) 왕작 추증을 더하사 현성 무안왕이라 하시니 동남 관왕묘 천지로 더불어 한 가지로 하실지라, 어찌 아름답지 않으리요. 남원에 또한 관왕묘를 세우고 연년 사시로 제사하며 기도하는 자 많은지라, 만일 기도를 지성으로 행하면 효험(效驗)이 명백하다 하더라.
 
 
 
 

2. 논개(論介)의 순사(殉死)

 
181
각설, 왜적이 처음에 진주를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사상한 자 많은지라, 두 번 나올 제 부디 진주를 무찔러 적의 원수를 갚고자 하여 힘써 싸워 성을 함몰하고 사람을 만나는 족족 죽이고 개와 닭을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더니 그 읍 중에 기생 논개(論介)라 하는 이 있어 그 얼굴이 아름다움을 보고 차마 죽이지 못하여 왜장이 데리고 촉석루(矗石樓)에 올라 서로 희롱하며 가까이하고자 하거늘 논개 생각하되,
 
182
‘내 몸이 비록 천한 기생인들 어찌 타국의 무지한 도적들에게 몸을 더럽히리오.’
 
183
하고 심중에 한 계교를 생각하고 적장(敵將)을 죽이고자 하여 속여 이르되,
 
184
“내 천성이 괴이하여 주의한 뜻이 있나니 장군이 내 말을 들으면 비록 사지(死地)라도 따르려니와 그렇지 아니한즉 장군이 만일 천첩의 몸을 만단으로 찢어도 결단코 듣지 아니하리라.”
 
185
적장이 가로되,
 
186
“무슨 일이뇨.”
 
187
논개 이에 강수를 가리켜 왈,
 
188
“저 강 속에 들어가 바위 끝에 올라 한가지로 춤을 춘 후 바야흐로 장군을 좇으리라.”
 
189
적장 왈,
 
190
“무엇이 어려우리오.”
 
191
하고 논개로 더불어 바위위에서 대무(大舞)하더니 적장의 흥이 바야흐로 무르녹을 때에 논개 문득 왜장의 허리를 안고 물속에 뛰어드니 강수 표묘(縹渺)하여 잠깐 사이에 두 사람의 간 바를 아지 못하는지라. 적장이 이미 없으므로 적병이 성을 버리고 돌아가니 이로 인하여 진주(晉州)를 다시 회복하니라. 논개 비록 천한 여자나 그 강개(慷慨)한 마음과 이 같은 지혜 있으니 고인에게 비하매 족히 부끄럽지 아니할지라,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리요. 후인이 그 바위를 이름하여 의암(義岩)이라 하는지라, 사적이 기이한 고로 만단의 논개 행적을 기록하노라.
 
 
192
차설, 평행장 등이 일본으로 돌아가니 왜란이 이미 평정한지라, 어가(御駕)가 의주 취승당을 떠나 경성에 환궁하실새 지나는바 열읍이 팔년병화(八年兵禍)를 지내며 도로(徒勞)의 인연이 그치고 물색이 극히 소조(蕭條)하여 잔멸(殘滅)치 않을 곳이 없더라.
 
193
이때 평안도 용강(龍岡)사람 김응서(金應瑞)와 전라도 진주사람 강홍립(姜弘立))이 용맹이 과인하더니 왜란을 당하여 비록 조정에 입신치 못하나 전장에 나아가 기특한 공을 세웠더니 상이 환공하신 후 양인의 공로를 들으시고 패초하사 양인의 근본을 물으시고 은근히 위유(慰諭)하시니 양인이 복지 사은하온대 상이 대연을 배설하여 문무중관을 모아 즐기실새 공신을 탁용하시고 전망자손(戰亡子孫)을 위로하시고 김응서 강홍립을 각별 추천하사 봉작을 더하시니 양인이 고두주왈(叩頭奏曰),
 
194
“천은이 망극하온지라, 국은을 갚을 길 없사오니 원컨대 수만 병을 주시면 왜국을 탕멸하와 임진년 원수를 설분(雪憤)하옵고 후환(後患)을 그쳐지이다.”
 
195
상이 옳게 여기사 김응서로 도원수를 삼고 강홍립으로 부원수를 정하시고 팔도에 행관(行關)하여 군병을 취합하여 일본을 치라 하시다.
 
 
 
 

3. 만고충신 김덕령(金德齡)

 
197
조신 윤옥이 주왈,
 
198
“강원도 이천 땅에 김덕령(金德齡)이란 사람이 용맹이 절륜(絶倫)하되 난시를 당하여 국가를 받들지 아니하옵고 청정의 진에 들어가 무슨 약속을 하온 지 삼 일 만에 퇴군하여 공주로 갔다 하오니 나국엄문(拿鞠嚴問)하여 실상을 알아지이다.”
 
199
상이 들으시고 대로하사 김덕령을 나래(拿來)하시니 금부도사(禁府都事) 엄명을 받자와 급히 내려가 덕령을 잡아올새 철원 땅에 이르러 덕령이 도사를 불러 이르되,
 
200
“잠깐 머물러 벗을 보고자 하노라.”
 
201
도사가 대질 왈,
 
202
“나명(拿命)이 지중하니 어찌 일각인들 지체하리요.”
 
203
재촉하니 덕령이 분연 왈,
 
204
“아무리 나라 죄인인들 어찌 사정이 없으리요.”
 
205
도사 덕령의 용맹을 들었는지라, 감히 거스리지 못하여 묵연하더니, 이윽고 한 사람이 헌 관을 쓰고 나아와 덕령의 손을 잡고 이르되,
 
206
“내 너에게 무엇이라 하더뇨, 네 모친 말씀을 듣지 말고 난시를 도으라 하였더니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런 대화(大禍)를 만나니 누구를 원망하리요, 다만 가석한 바는 네 재주로서 속절없이 죄인이 되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리요, 이 또한 천명이니 어찌하리요, 이제 천명이 지중하니 감히 거역지 못할지라. 빨리 나아가고 역명(逆命)을 취하지 말라.”
 
207
하고 서로 손을 잡고 눈물을 뿌리며 이별하니라. 도성에 이르러 봉명(奉命)하온대 상이 국문하실새 가라사대,
 
208
“네 재주를 품고 난시를 당하여 국가를 돕지 아니하고 청정의 진에 들어가 무슨 약속을 하였느냐.”
 
209
덕령이 주왈,
 
210
“소신이 만일 의심이 있사오면 어찌 부상(父喪)을 입삽고 적진에 들어가오며 청정을 물림은 나라를 돕사온 일이오니 어찌 도적과 약속을 하리요, 신의 반심(叛心) 없음을 밝히옵소서.”
 
211
하고 말을 마치며 몸을 솟아 열 길이나 올랐다가 도로 내려오는지라, 아니 놀랄 이 없더라. 덕령이 가로되,
 
212
“원컨대 신을 빨리 죽여 국법을 정히 하소서.”
 
213
상이 무사를 명하여 엄형을 가하되 마침내 죽는 일이 없는지라, 덕령 왈,
 
214
“신을 역신(逆臣)이라 마옵고 ‘만고충신 김덕령(萬古忠臣 金德齡)’이라 써붙이시면 죽으리이다.”
 
215
상이 하릴없이 그대로 하시니 덕령이 그제야 난데없는 비수(匕首)를 빼어 제 무릎을 거스리고 비늘을 때고 이르되,
 
216
“이곳을 치면 죽으리이다.”
 
217
하거늘 그곳을 치니 과연 즉시 죽더라.
 
 
 
 

4. 김응서(金應瑞)․강홍립(姜弘立)의 정왜(征倭)

 
219
각설, 김응서와 강홍립이 군사를 연습하더니 상이 양장을 불러 가라사대,
 
220
“뉘 감히 선봉이 되리오.”
 
221
응서 주왈,
 
222
“소신이 당하리이다.”
 
223
하고 서로 선봉을 다투거늘 상왈,
 
224
“각각 제비를 잡으라.”
 
225
하신대 강홍립이 선봉을 잡은지라, 응서는 후군장(後軍將)이 되어 대병을 거느리고 성상께 하직할새 상왈,
 
226
“일본이 강성하니 삼가 경적(輕敵)치 말고 일찍 항복받은 첩서(捷書)를 주하라.”
 
227
응서 주왈,
 
228
“신이 죽기로써 일본을 멸하여 근심을 덜리이다.”
 
229
하고 인하여 행군하니라.
 
230
이때는 경자(庚子) 삼 월이라. 동래부사 이현룡(李見龍)이 선척을 준비하여 수만중을 대후(待候)하였더니 행군한 십 일 만에 동래(東萊)에 득달하니 부사 대군을 맞아 결진하고 양장(兩將)을 위로하며 대연을 배설하여 즐기더니 십여 일 후 순풍을 만나 승선(乘船)하여 행군하더니 삼 일 만에 응서의 진 뒤에서 크게 웨여 왈,
 
231
“장군은 아직 행군치 말고 잠깐 내 말을 들으라.”
 
232
하거늘 응서 문왈,
 
233
“네 귀신이냐.”
 
234
답왈,
 
235
“나는 조선 땅에 있는 어둑강이란 귀신이러니 장군이 행군한 삼 일만에 천문을 보니 이제 삼 일만 머물러 가면 대공을 이루려니와 만일 그렇지 않으면 대환을 만나 회환치 못하리이다.”
 
236
응서 이 말을 듣고 기를 둘러 군을 머무르고 홍립을 청하여 들은 바를 전하니 홍립이 듣지 아니하고 행군하거늘 응서 탄식하고 재삼 간청하니 홍립이 여성(厲聲) 왈,
 
237
“그대 어찌 법이 엄중함을 모르느냐, 나는 상장(上將)이요 그대는 아장(亞將)이라 어찌 단언을 하느냐, 만일 다시 이르면 군법을 행하리라.”
 
238
응서 왈,
 
239
“후환을 만나도 나를 원망치 말라.”
 
240
하고 행군하더니 그 귀신이 또 응서의 앞에 와 웨여 왈,
 
241
“장군이 내 말을 듣지 않고 가거니와 마침내 화를 면치 못하리라.”
 
242
하거늘 응서 심중에 의심하더니 선봉이 벌써 우무령이란 뫼 밑에 다다른지라, 군사 고하되,
 
243
“앞길이 협착하고 발이 빠져 능히 행치 못하나이다.”
 
244
하거늘 홍립 왈,
 
245
“길이 비록 험준하나 어찌 행치 못하리요.”
 
246
하고 군사를 재촉하여 나아가더니 문득 음풍이 일어나며 일성 포향에 좌우로 복병이 내달아 짓치니 함성이 천지 진동하는지라, 양장이 불의지변을 만나 수미를 돌아보지 못하여 아무리 할 줄 몰라 겨우 정신을 차려 복병을 헤치고 내달으니 천지 명랑하고 풍세 잔잔하더라.
 
247
응서 앙천 탄왈,
 
248
“장군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대환을 만났으니 뉘우친들 어찌 미치리요. 수만 병을 다 죽였으니 이를 장차 어찌하리요.”
 
249
하고 한탄하더니 문득 후면에 함성이 진동하며 추병(追兵)이 급하거늘 양장이 대로하여 정신을 가다듬어 칼을 춤추며 좌우로 짓쳐 들어가니 검광(劍光)이 상설(霜雪) 같고 빠름이 풍우 같은지라, 좌충우돌하기를 무인지경같이 하니 이르는 곳에 장졸의 머리 추풍낙엽 같은지라, 이때 왜왕이 삼봉산에 올라 승패를 보다가 쟁을 쳐 군을 거두고 이르되,
 
250
“조선 장수의 검술을 보니 신기함이 무쌍한지라, 저런 영웅이 조선에 있거든 청정 소섭이 비록 팔십만 기병을 거느렸으나 어찌 패망치 아니하리요. 만일 저 장수를 제어치 못하면 일본이 장차 망하리로다.”
 
251
하더니 날이 이미 황혼이 되매 응서와 홍립이 앙천 통곡 왈,
 
252
“이제 수만 병을 다 죽였으니 우리 둘이 있은들 어찌하리요.”
 
253
응서 책왈,
 
254
“당초 내 말을 듣지 않아 오늘 대환을 만나니 누구를 원망하리요.”
 
255
홍립이 위로 왈,
 
256
“장군은 안심하라. 우리 둘이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죽을지언정 대장부 어찌 죽기를 두려하리요.”
 
257
하고 분기철천(忿氣徹天)하여 밤을 새우더라.
 
258
이때 왜왕이 수다 장졸을 죽이고 군신을 모아 정히 상의하더니 좌연이란 신하가 주왈,
 
259
“신의 소견은 적진에 전서를 보내되 양진에 각각 두 장수씩 나서 서로 검무(劍舞)하여 승부를 결하자 하소서.”
 
260
왜왕이 그 말을 좇아 즉시 전서를 써 보내니라. 홍립이 전서를 보고 낙담 왈,
 
261
“이제는 항복함만 같지 못하도다.”
 
262
응서 분연 대질 왈,
 
263
“차라리 죽을지언정 어찌 적장에게 굴슬(屈膝)하여 살기를 취하리요.”
 
264
하고 즉시 회보하여 명일 결진함을 언약하니라. 이때 왜왕이 높은 뫼에 올라 좌정하여 여팔도 여팔낙 양장을 불러 왈,
 
265
“과인이 경의 재주를 아나니 힘을 다하여 임진년 원수를 갚으라.”
 
266
곽선이 주왈,
 
267
“대왕은 진중하소서. 여팔도 여팔낙의 재주는 옛날 상신(相臣) 조운(趙雲)이라도 더하지 못하리이다.”
 
268
하고 삼십리허에 진세를 이루매 양장이 대호 왈,
 
269
“적장은 쾌히 나와 승부를 결하라.”
 
270
하고 검무(劍舞)할새 검광이 검은 구름 위의 번개 같은지라, 홍립이 응서를 말려 왈,
 
271
“적장의 검술을 보니 가히 대적지 못할지라, 장군은 어쩌코자 하느뇨.”
 
272
응서 대책 왈,
 
273
“저 같은 담략(膽略)을 가지고 어찌 대장이 되리요. 한번 싸워 사생을 결할지라, 어찌 왜적을 돌려보내리오.”
 
274
하고 즉시 전복(戰服)을 벗고 학창의(鶴氅衣)를 입고 칼을 버리고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대적코자 하거늘 홍립이 더욱 말리니 응서 왈,
 
275
“적장의 검무를 보니 족히 두렵지 않은지라. 장군은 과히 겁하지 말라.”
 
276
하고 크게 웨여 왈,
 
277
“적장은 멀리 서지 말고 가까이 나아 오라.”
 
278
왜왕이 살펴보니 응서 몸에 갑주를 벗고 다만 학창의만 입고 손에 촌철(寸鐵)도 없이 진전에 나섰으니 왕이 대소 왈,
 
279
“적장이 스스로 용맹을 믿고 아국을 능멸하거니와 벌써 해심(垓心)중에 들었으니 승천입지(昇天入地)하면 가히 면하려니와 불연즉 능히 벗어나지 못하리라.”
 
280
하더라. 왜장 여팔도 여팔낙이 칼을 춤추어 앞으로 나오거늘 응서 모른체 하고 눈을 감고 섰으니 적장의 칼이 거의 몸에 범하거늘 응서 그제야 소리를 우레같이 지르고 몸을 공중에 솟아올라 두 발로 양장을 치니 두 장수 칼을 버리고 입으로 피를 토하고 거꾸러져 죽거늘, 응서 눈을 부릅뜨고 대질 왈,
 
281
“적진 중에 나의 적수 있거든 쾌히 나오라.”
 
282
왜장이 대경실색하여 왕께 주왈,
 
283
“여팔도 여팔낙의 검술은 적수 없을까 하였더니 적장의 발에 채여 죽었으니 그 용맹을 당할 자 없는지라, 싸우면 반드시 패하리니 적장을 청하여 좋은 말로 달램만 같지 못할까 하나이다.”
 
284
왜왕이 양장의 죽음을 보고 또한 낙담하여 정히 경겁하더니 이 말을 듣고 옳이 여겨 즉시 사람을 보내어 화친(和親)함을 청하니라.
 
285
응서 적장 둘을 죽이고 본진에 돌아와 홍립다려 왈,
 
286
“오늘날 내 재주를 보니 어떠하뇨.”
 
287
홍립 왈,
 
288
“만일 장군의 재주 곧 아니면 어찌 적장을 죽이리오.”
 
289
하고 본국으로 돌아감을 상의하더니 문득 보하되 왜왕의 글월이 왔다하거늘 떼어 보니 하였으되,
 
 
290
그대 비록 아국의 적장이나 조선에는 충신이라, 우리 장수를 죽였으나 나라를 위한 일이라 어찌 족히 허물할 바리오. 조금도 의심치 말고 금일 연석(宴席)에 참예하여 좋은 뜻을 저버리지 말라. 그대 비록 항적의 용맹이 있으나 깊이 중지(重地)에 들어와 형세 외롭고 아국이 비록 약하나 오히려 강병맹장(强兵猛將)이 있는지라, 한번 병마를 움직이면 성명을 마치리니 뉘우치지 말라.
 
 
291
하였더라.
 
292
홍립 등이 남파(覽罷)에 가로되,
 
293
“이제 왜왕이 우리를 청하였으니 장차 어찌하리요.”
 
294
응서 왈,
 
295
“우리를 청함은 머물고자 함이라, 어찌 제 계교에 빠지리요.”
 
296
홍립 왈,
 
297
“비록 그러하나 길이 막혀 능히 들어가지 못하는지라, 사의(事意) 지차(至此)하니 아직 들어가 동정을 살핀 후 다시 선처함이 어찌 가치 아니리요.”
 
298
응서 침음양구(沈吟良久)에 또한 사세(事勢) 난득한지라, 마지못하여 왜사(倭使)를 따라 들어가니 왜왕이 용상(龍床)에 좌정하고 양장을 청하여 상좌에 좌석을 주고 이르되,
 
299
“임진년 병란은 피차 한가지라, 누를 한하리요, 장군 등이 왕명을 받아 타국에 들어와 수다 군병을 죽였으니 무슨 면목으로 고국에 돌아가리요. 옛날 초한(楚漢)이 쟁봉할 때 한신(韓信)이 기초귀한(起楚歸漢)하여 사백 년 기업을 이뤘으되 지금 칭찬하나니 장군은 옛 일을 효칙(效則)하여 길이 부귀를 안향(安享)하라. 아국이 협착하여 조선을 통합코자 하더니 장군 등이 귀순하니 어찌 기쁘지 않으리요.”
 
300
응서와 홍립이 서로 돌아보고 묵묵부답이라. 왜왕이 재삼 관위(寬慰)한대 응서는 종불용(終不容)이라. 왜왕이 이에 삼 일 대연을 배설하여 풍류(風流) 주색(酒色)으로 그 마음을 즐겁게 하되 마침내 희색이 없는지라, 왜왕이 군하(群下)를 모으고 의논 왈,
 
301
“강홍립은 비록 용장이나 신의 없는 사람이요 김응서는 용맹뿐 아니라 유신한 사람이니 이제 양인을 각각 매서(妹婿)를 삼음이 어떠하뇨.”
 
302
제신이 주왈,
 
303
“하교 마땅하오나 두 사람을 불러 진진(津津)의 좋은 뜻은 일러 만일 순종치 아니하거든 죽임이 옳을까 하나이다.”
 
304
왜왕이 청필에 대희하며 즉시 태서라 하는 신하를 보내어 양인을 권유하라 하니, 태서는 본디 조선사람으로서 잡혀 왔다가 인하여 높은 벼슬을 얻어 왜인이 되었더니 왕명을 듣고 물러 관역에 나와 응서와 홍립을 보고 왜왕의 뜻을 전하고 왈,
 
305
“만일 호의를 거역하면 돌아가기 어렵도다.”
 
306
홍립 왈,
 
307
“저의 청하는 뜻을 아니 듣기 어려운가 하노라.”
 
308
응서 왈,
 
309
“어찌 범으로써 개게 허하리요.”
 
310
태서 왈,
 
311
“왕의 소견을 불청하면 목숨을 보전치 못하리니 모름지기 왕의 말을 듣고 그 형세를 보아 후일 회환하면 소원을 다 이룰 것이니 나도 한가지로 고국에 돌아가면 어찌 기쁘지 아니하리요.”
 
312
응서가 태서의 말을 듣고 이에 허락하거늘 태서 돌아가니라.
 
313
양인이 부득이 조참(朝參)에 들어가니 왕이 좌를 주고 위로 왈,
 
314
“경 등이 타국에 들어가 패군하였으니 어찌 마음이 평안하리요. 이제 일배주(一杯酒)로써 수회(愁懷)를 위로하나니 사양치 말라.”
 
315
하고 인하여 향온(香醞)을 나와 술이 반감에 왕이 친히 잔을 잡고 왈,
 
316
“관인이 경 등에게 붙일 말이 있으니 즐겨 청납(聽納)하랴.”
 
317
응서 왈,
 
318
“무슨 말씁이나이까.”
 
319
왕 왈,
 
320
“과인에게 일매(一妹)있으니 방년(芳年)이 이십이라. 색덕(色德)이 겸비하여 유한정정(幽閑靜貞)하니 강 장군께 허하고, 또 공주(公主) 있으니 요조현철(窈窕賢哲)하여 숙녀지풍(淑女之風)이 있으니 김 장군께 허하야 백 년을 즐기게 하나니 경 등의 뜻이 어떠하뇨.”
 
321
홍립이 배사 왈,
 
322
“대왕이 패군지장(敗軍之將)을 이렇듯 과애하사 천금옥주(千金玉酒)로써 허하시니 어찌 후의를 감히 사양하리요.”
 
323
응서가 홍립의 낙종(諾從)함을 보고 또한 면치 못할지라, 마지못하여 허한대 왕이 양장의 순종함을 보고 대희하여 즉시 길월(吉月) 양신(良辰)을 택하여 성례(成禮)하니 위의 장려하고 물색이 번화하더라. 대연을 배설하여 연일 환락하고 강 장군으로 매서군을 삼고 김 장군으로 서식군(婿息君)을 삼으니 양인이 왜국 부귀를 누리더라.
 
324
이러구러 세월이 여류하여 삼 년이 되었더니 일일은 왜왕이 대연을 배설하고 매서군과 서식군을 데리고 한가지로 즐기더니 날이 황혼이 되매 파연곡(罷宴曲)을 주하니 양인이 물러갈새, 응서가 홍립의 침소에 이르러 홍립에게 왈,
 
325
“장군은 고국(故國)에 돌아갈 뜻이 없느냐.”
 
326
홍립이 변색 왈,
 
327
“어찌 돌아갈 마음이 없으리오마는 길이 막혔으니 어찌 득달하며 수년을 이곳에 머물러 부귀를 누리니 어찌 일조에 배반하리요.”
 
328
응서 왈,
 
329
“어찌 임금의 대은을 저버리고 타국을 섬겨 부귀를 취하리요.”
 
330
홍립 왈,
 
331
“비록 조선에 돌아가나 어찌 이에서 더 영귀하리요.”
 
332
응서 대책 왈,
 
333
“그대 일시 부귀를 흠모하여 고국을 생각지 아니하니 어찌 부끄럽지 아니하리요. 내 맹세코 왜왕의 수급(首級)을 가지고 우리 둘이 전후를 당하면 어찌 돌아가지 못하리오. 국은이 망극하고 부모처자를 생각하니 천지 망극한지라, 어찌 슬프지 아니하리요. 대장부 불충불효(不忠不孝)를 무릅쓰고 어찌 세상에 서리요.”
 
334
홍립이 응서의 말을 듣고 마음에 부끄러워 거짓 허락하고 인하여 들어가 가만히 대왕께 수말을 고하니 왕이 차언을 듣고 대경하여 즉시 문무(文武)를 모아 이 일을 의논하되 제신이 주왈,
 
335
“전일 양인이 귀순할 때 매서군은 혼연 응낙하되 서식군은 매양 돌아갈 뜻이 있더니 이제 과연 반심(叛心)을 먹도소이다.”
 
336
왜왕이 대로 왈,
 
337
“제 과인의 후은(厚恩)을 저버리고 도로혀 해코자 하니 어찌 통탄치 아니하리오.”
 
338
하고 등촉을 밝히고 양인을 불러 왈,
 
339
“과인이 너희 목숨을 잔잉히 여겨 죽이지 아니하고 도로혀 봉작을 높이고 금지옥엽(金枝玉葉)을 삼아 부귀 극하거늘 무슨 원한이 있어 감히 흉계를 의논하였느뇨. 옛사람의 충성을 본받아 고국에 돌아가려 하면 보내려든 어찌 은혜를 저버리고 나를 해코자 하니 가히 요대(饒貸)치 못하리라.”
 
340
하고 무사를 명하여 빨리 내어 버히라 하거늘 응서 일이 패루한 줄 알고 죽기를 면치 못할지라. 이에 고성대매(高聲大罵) 왈,
 
341
“네 천시를 아지 못하고 한갓 강포만 믿어 날을 죽이려 하거니와 네 들으라. 내 충성을 다하여 수만 군중을 거느리고 이곳에 들어와 네 머리를 버혀 우리 임금께 드리고 임진년 원수를 씻을까 하였더니 홍립의 간계(奸計)에 빠져 대사를 그르치니 어찌 분치 아니하리요. 하늘이 돕지 않으사 나를 이곳에서 죽게 하시니 죽어도 섧지 아니하거니와 나라를 배반하는 역적 강홍립에 대한 분기 두우(斗牛)를 꿰치노라.”
 
342
홍립이 마침 왜왕 곁에 섰는지라, 응서 칼을 날려 급히 치니 홍립이 크게 한 소리 지르고 거꾸러져 죽거늘 응서 이미 홍립을 죽이매 일분 쾌활하여 하늘께 축수하고 칼을 들어 제 허리를 버혀 던지는지라, 때에 응서 타던 말이 마구(馬廐)에서 뛰어나와 응서의 머리를 찾아 물고 벽해(碧海)를 건너오니라.
 
 
343
각설, 조선국왕이 응서와 홍립을 만리 타국에 보내시고 전진의 승패와 소식을 몰라 주야 염려하시더니 응서의 말이 벽해를 건너 주야로 행하여 평안도 용강 땅에 득달하였는지라, 이때 응서의 부인이 낭군을 만리 타국에 보내고 여러 세월이 되되 소식이 묘연한지라, 삼춘가절(三春佳節)을 당하여 꽃을 대하매 수운(愁雲)이 원산 아미(蛾眉)에 맺히고 추국단풍시(秋菊丹楓時) 명절을 대하여 느낌을 마지아니하더니 일일은 밤이 깊도록 전전(輾轉)하여 능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촛불을 밝히고 괴로이 시름하더니 홀연 몸이 떨리고 경천이 아득한지라, 잔등을 돋우고 탄식 왈,
 
344
“명천은 지원(至願)을 살피사 낭군을 승전입공(勝戰立功)하여 무사히 고국에 돌아오게 하소서.”
 
345
하고 슬픈 마음을 진정치 못하여 눈물을 흘리더니 문득 공중에서 발소리 들리거늘 심신이 자연 경황하여 급히 창호(窓戶)를 열치고 뜰에 내려와 살펴보니 난데없는 말이 뛰어들어오되 사람의 머리를 입에 물었는지라, 일변 놀라며 자세히 살펴보니 이는 낭군의 머리라, 머리를 안고 땅에 구르며 통곡하니 자주 혼절하는지라, 경색이 참불인견(慘不忍見)이러라. 말을 붙들고 이르되,
 
346
“너는 짐승이로되 임자의 머리를 찾아오되 낭군은 타향의 원혼이 되어 돌아오지 못하느뇨.”
 
347
하고 혈루(血淚) 종횡하더라. 날이 밝기를 기다려 응서의 머리를 목합(木盒)에 넣어 가지고 길을 떠나 한양으로 향하여 삼 일 만에 득달하여 궐하에 나아가 원정(原情)을 바치니 내시(內侍) 들어가 상께 아뢴대 상이 보시고 대경하사 가라사대,
 
348
“삼 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으매 회포 만단이러니 이런 불측한 변이 있을 줄 어찌 알리요.”
 
349
하시고 즉일에 예부에 전지하사 제문(祭文) 지어 치제하시고 벼슬을 돋우어 추증하시고 머리를 목함(木函)에 넣어 길지(吉地)에 안장하게 할 새, 각 읍이 호상(護喪)하라 하시고 백미 일백 석을 주어 응서와 전망사졸(戰亡士卒)을 위하여 크게 수록하여 영혼을 제도(濟度)하라 하시다.
 
350
일일은 상이 옥상(玉床)을 의지하여 잠깐 조으시더니 문득 김응서 갑주를 갖추고 들어오거늘 상이 크게 반기사 정히 묻고자 하시더니 응서 복지 주왈,
 
351
“소장이 명을 받자와 왜국에 들어갔삽더니 강홍립의 간계에 빠져 수만 군병을 중로에서 다 함몰하옵고 돌아오려 하옵다가 분기를 참지 못하와 홍립을 데리고 일본에 들어가 동정을 살핀 후에 왜왕의 수급을 버혀 가지고 왜국을 탕멸하와 임진년 원수를 갚으려 하였삽더니 왜왕이 의로써 대접하오매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옵고 이미 삼 년이 되었삽기로 전하의 기다리심을 생각하와 일일은 홍립과 의논하고 왜왕의 머리를 버히려 하옵더니 역신(逆臣) 홍립이 왕께 가만히 누설하여 사기 패루하온지라, 신이 죽기를 임하여 분을 이기지 못하여 홍립을 먼저 죽이옵고 신이 또한 자수하여 이 몸이 되었사오니 신의 죄 만사무석(萬死無惜)이로소이다. 신이 황천에 돌아가 원혼이 되었사오나 성은이 망극하온지라, 신이 삼 년 후 다시 돌아와 전하를 섬기리이다.”
 
352
하고 문득 간데없는지라, 상이 놀라 깨달으시니 문득 침변일몽(枕邊一夢)이라. 상이 차탄하심을 마지아니하시고 이튿날 문무중관을 모아 몽사를 이르시고 다시 제문 지어 응서의 혼령을 위로하시고 슬퍼하시니 조신이 또한 추연(愀然)하더라.
 
 
353
각설, 왜왕이 응서를 죽이고 다시 조신을 모아 의논 왈,
 
354
“이제 조선 맹장 둘이 죽었으니 족히 두려움이 없는지라, 다시 조선을 쳐 임진년 원수를 갚으리라.”
 
355
하고 병마를 조련하고 선척(船隻)을 새로 준비하더라.
 
 
 
 

5. 사명당(四溟堂)의 보복(報復)

 
357
이때 아국 평안도 영변 향산사(香山寺)에 한 도승(道僧)이 있으니 서산대사(西山大師)라 칭하더라. 아시(兒時)로부터 불경(佛經)을 통달하여 어진 도덕이 원근에 가득하였더니 하루는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불경을 외우다가 밖에서 괴이한 소리 나거늘 이상히 여겨 나와 보니 아무것도 없거늘 우러러 하늘을 살펴보니 익성(翼星)이란 별이 방위를 떠나 서방을 향하여 시살하고 모든 별이 서녘을 응하였거늘 대사 홀로 탄식 왈,
 
358
“익성은 왜왕의 주성(主星)이요, 하물며 임진년 원수로 말미암아 조선을 다시 침범하려 함이로다.”
 
359
하고 법당(法堂)에 들어가 제자 사명당(四溟堂)을 불러 가로되,
 
360
“세상에 나와 불경을 승상하며 산당에 거처하여 일신이 평안함은 성상의 덕택이라. 아까 밖에 나가 천문(天文)을 보니 왜왕의 주성이 방위를 떠나 서녘을 시살하니 이는 조선을 침범함이라, 우리 비록 삭발위승(削髮爲僧)하여 산문(山門)에 의탁하였으나 솔토지민(率土之民)이 막비왕신(莫非王臣)이요 보천지하(普天之下)에 막비왕토(莫非王土)라, 이런 난시를 당하여 기미를 알고 어찌 임금을 돕지 아니하리요.”
 
361
사명당이 대왈,
 
362
“스승님이 이르시지 아니하오나 제자도 잠깐 기미를 아옵거니와 스승님이 지휘하시면 곧 영대로 하리이다.”
 
363
대사 사명당의 법술(法術)을 아는지라. 이르되,
 
364
“내 나이 늙어 산문(山門)을 나지 않은 지 여러 십 년이라, 나라에 나가 이 말씀을 아뢰고 일본에 들어가 왜란을 평정할 것이로되 행보(行步)를 임의치 못하니 어찌 선처하리요.”
 
365
사명당이 대사의 슬퍼함을 보고,
 
366
“사부(師傅)는 슬퍼 말으소서. 원컨대 지휘를 들어지이다.”
 
367
대사 크게 기뻐하며 이에 행리(行李)를 수습하여 스승 제자가 길을 떠나 경성에 올라와 궐하에 이르러 정원(情願)의 소유를 고하니 승지(承旨) 이 말을 듣고 즉시 탑전(榻前)에 주달하온대 상이 들으시고 근시(近侍)를 명하여 부르시니 대사 들어가 계하(階下)에 복지 사배하거늘, 상이 눈을 들어 보시니 그 중이 양미(兩眉) 호백하고 의표(儀表) 탈속(脫俗)하고 거지(擧止) 헌앙(軒昻)하여 범승(凡僧)이 아니더라.
 
368
상이 문왈,
 
369
“네 어느 절에 살며 무슨 말을 아뢰고자 하느냐.”
 
370
그 중이 합장 배례 왈,
 
371
“빈승(貧僧)은 평안도 영변 묘향산(妙香山)에 있는 중이옵더니 십 세 전에 삭발위승(削髮爲僧)하여 불경을 숭상하옵더니 국운이 불행하와 임진년 왜란을 만나오니 어찌 망극지 아니하리요. 천행으로 왜란이 진정하옵고 전하 환궁하옵시니 신민의 만행이오나 의외에 김홍 양장(金弘 兩將)이 일본에 들어가와 사졸을 다 전망(全亡)하오니 어찌 분연 강개치 아니하리까. 소승이 속인과 다르와 국난(國難)을 받들지 못하오니 만사무석이로소이다.”
 
372
상이 들으시고 새로이 차탄하시매,
 
373
“네 비록 중생이나 국가를 근심하니 가히 기특하도다.”
 
374
하시고 난세를 의논하신대 그 중이 복지배례 왈,
 
375
“소승이 주야 불경을 송독(誦讀)하옵더니 홀연 마음이 강개하옵고 또한 몽매간(夢寐間)에 부처님이 이르시되 일본이 장차 기병하여 조선을 침범한다 하옵거늘 놀라 깨달아 밖에 나와 천문을 보오니 익성이 분야(分野)를 떠났사오니 반드시 조선을 침략코자 하옴이라. 아무리 중이온들 어찌 통회(痛悔)치 아니리이까.”
 
376
대사가 한 봉 서간(書簡)을 주거늘 받아 보니 하였으되,
 
 
377
그대 세존(世尊)의 제자로 국가를 근심하고 백성의 평안함을 원하는 고로 정성을 감동하여 상제께 주달하고 삼해용왕(三海龍王)을 보내나니 충성을 다하여 국가 대환을 없게 하라. 또한 일본국왕도 익성으로서 상제께 득죄하여 왜왕이 되었으니 과도히 보채지 말라. 왜국을 항복받으면 장차 태평하리라. 부디 대공을 세워 이름이 사해에 진동케 하라.
 
 
378
사명당이 용궁 서간을 가지고 즉시 단을 무으고 단상에 올라 사해를 향하여 무수히 합장 배례하고 인하여 대사께 하직한대, 대사 왈,
 
379
“부디 조심하려니와 왜왕이 필연 취맥코저 하여 다섯 가지로 청하리니 그 중 어려운 일이 있거든 향산(香山)을 향하여 사배하면 자연 도움이 있으리라.”
 
380
사명당이 스승의 교령(敎令)을 듣고 길을 떠날새 만조백관이 십리허(十里許)에 나와 전송하더라. 각 읍에 선문(先文) 놓고 발행할새 이때 동래부사 송정이 노문(路文)을 보고 웃으며 왈,
 
381
“조정에 사람이 무수하거늘 어찌 구태여 중을 보내리오. 이는 더욱 패망할 징조라.”
 
382
하더니 하인이 보하되,
 
383
“사명당 행차 온다 하오니 어찌 접대하리이까.”
 
384
송정이 분부 왈,
 
385
“상례(常例)로 대접하라. 제 비록 부처라 한들 어찌 곧이 들으리요.”
 
386
하고 심상히 여기거늘, 하리 분부를 듣고 나와 부사의 말을 이르고 왈,
 
387
“지방관의 도리에 봉명사신(奉命使臣)을 불관히 여기거니와 반드시 환을 면치 못하리로다.”
 
388
하더니 자연 삼 일 만에 이르렀는지라. 대접하는 도리와 수응하는 일이 가장 만홀(漫忽)하거늘 사명당이 대로하여 객사(客舍)에 좌기(坐起)하고 무사를 명하여 송정을 잡아 계하에 꿇게 하고 이르되,
 
389
“네 벼슬이 비록 옥당(玉堂)이나 지방관이오 내 비록 중이나 일국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이오 봉명사신(奉命使臣)이어늘 네 한갓 벼슬만 믿고 국명을 심상히 여겨 방자함이 태심하니 내어 버혀 국법을 엄히 하라.”
 
390
하고 즉시 나라에 장문(狀聞)하여 선참후계(先斬後啓)하고 인하여 길을 떠날새 순풍을 만나 행선(行船)하니라.
 
 
391
각설, 왜왕이 원수를 갚고자 하여 매일 군마를 연습하며 조선 칠 모책을 의논하더니 문득 보하되,
 
392
‘패문이 왔다.’
 
393
하거늘 즉시 떼어 보니,
 
394
‘생불사신(生佛使臣)이 간다.’
 
395
하였거늘 왜왕이 남파(覽罷)에 대로 왈,
 
396
“우습고 기괴하도다. 어찌 조선 조그만 나라에 생불이 있으리오. 이는 반드시 우리를 업신여겨 의혹케 함이라.”
 
397
하고 이에 제신(諸臣)을 모아 의논 왈,
 
398
“조선이 부처를 보내노라 함은 저의 계교 궁진(窮盡)하여 우리를 의혹케 함이로다.”
 
399
제신이 주왈,
 
400
“이제 생불이 온다 하오니 글을 지어 병풍을 만들어 좌우에 세우고 그 뒤에 자리를 치고 문을 닫았다가 오거든 말을 몰아 병풍 안에 들거든 닫는 말을 갈아 태워 급히 지나게 하면 자연 취맥하기 쉬우리이다.”
 
401
왜왕이 옳이 여겨 그대로 하니라. 이때 사명당이 길을 재촉하여 조정에 다다르니 날이 이미 황혼이라. 문득 방포 소리 나며 말을 갈아 태우고 등촉이 명랑하며 말을 급히 몰아 가더니 이윽고 조정에 들어가는지라. 왜왕이 문왈,
 
402
“그대 부처라 하니 오다가 길 좌우의 병풍서(屛風書)를 보니이까.”
 
403
사명당이 대왈,
 
404
“어찌 그만한 것을 모르리이까.”
 
405
왜왕 왈,
 
406
“그대 능히 그 병풍서를 외울쏘냐.”
 
407
사명당이 그 말을 듣고 일체 생각는 바 없이 음성을 밝게 하여 읊는지라. 일만 오천 간 병풍서를 낱낱이 외우되 한 글을 불독하는지라.
 
408
왜왕이 발연 변색 왈,
 
409
“그대 어찌 한 간 글을 이르지 아니하느뇨.”
 
410
사명당 왈,
 
411
“그는 보지 못하였으니 어찌 이르리오.”
 
412
왜왕이 꾸짖어 왈,
 
413
“한가지로 세웠거늘 어찌 보지 못하리오.”
 
414
하고 사람을 보내어 적간(摘奸)하니 과연 바람에 덮여 못 봄이 적실하더라. 돌아와 이대로 고하니 왜왕이 이 말을 듣고 실색하더라.
 
415
사명당이 관역에 돌아오니 왜왕이 제신을 모아 의논 왈,
 
416
“이제 사명당의 거동을 보니 듣는 말과 같어 법력(法力)이 심상치 아니한지라 장차 어찌하리요.”
 
417
제신이 주왈,
 
418
“그리 마옵고 이 앞에 승당이란 못이 있으니 깊기 삼십 길이나 되는지라, 사명당으로 하여금 방석을 주어 물 위에 띄우고 그 못에 놀게하소서. 만일 부처가 명백하오면 물에 가라앉지 아니하리이다.”
 
419
왜왕이 그 말을 옳이 여겨 그대로 한 후 사명당을 청하여 좌정 후 왕이 가로되,
 
420
“이 앞에 승당이란 못이 있으되 경개 절승하여 한번 구경함직하니 저 방석을 타고 물 위에서 완경(玩景)함이 어떠하뇨.”
 
421
사명당이 사양치 아니하고 조선을 향하여 사배하고 그 방석을 못에 띄우고 그 위에 올라앉는지라. 그제야 모든 사람이 긴 막대로 방석을 밀치되 가라앉지 아니하고 바람을 좇아 임의로 떠서 다니거늘, 사명당을 청하여 위로하며 별당(別堂)에 들이고 문무를 모아 의논 왈,
 
422
“오늘밤 사명당 침방에 화철을 깔고 큰 풀무를 놓은 후 사명당을 청하여 들게 하고 사면에서 풀무를 일시에 불면 가히 부처 법력을 알리라.”
 
423
하더라.
 
424
이 날 사명당이 기와 한 장을 가지고 방에 들어가 쉬려 하더니 왜놈이 문을 봉하고 사면으로 풀무를 부니 그 방에 든 자 어디로 가리오. 사명당이 화열(火熱)이 급함을 보고 조선을 향하고 사배한 후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외우니 문득 지하에서 화기 스스로 스러지고 냉기(冷氣) 올라 방중에 서리 가득하였더라.
 
425
이튿날 왜왕의 사자가 명을 받아 문안하니 사명당이 문을 열치고 크게 꾸짖어 왈,
 
426
“네 돌아가 네 국왕에게 자세히 전하라. 내 조선서 들으니 일본이 심히 덥다 하더니 이에 와 보니 더운 곳이 아니라, 방이 빙하여 잠을 편히 못 잤으니 쉬 더운 곳으로 하처(下處)를 옮기라.”
 
427
사자 이 말을 듣고 혼불부체(魂不附體)하여 돌아가 왕을 보고 수말을 자세히 고하니 왜왕이 청파에 놀라 마지아니하고 군신을 모아 의논 왈,
 
428
“이제 조선 사신이 생불일시 적실하니 어찌하리요.”
 
429
예부상서 한자경이 주왈,
 
430
“전하 신의 말을 듣지 아니하옵다가 이리되었사오니 후회한들 어찌 미치리요. 조선 사자 깊은 못에 들어도 빠지지 아니하고 화철방을 빙고(氷庫)같이 지내오니 이는 범인이 아니라, 반드시 큰 화를 면치 못할까 하나이다.”
 
431
왜왕이 대경 왈,
 
432
“그러면 장차 어찌하리요.”
 
433
하더니 문득 삼도태수 주왈,
 
434
“왕사는 이르옵거니와 다시 취맥할 일이 있나이다.”
 
435
하고 오색 방석을 만들어 놓고 취맥할새 즉시 대연을 배설하고 사명당을 청하니 사명당이 들어와 보니 오색 방석을 놓았거늘 사명당이 비단 방석에는 신을 벗지 아니하고 백목(白木) 방석에 신을 벗고 들어가 앉으니 왜왕이 문왈,
 
436
“비단방석에 아니 앉고 백목 방석에 앉느뇨.”
 
437
사명당이 주왈,
 
438
“비단방석은 잡충(雜蟲)의 소출이오 백목은 꽃이라 더럽지 아니하나이다.”
 
439
왜왕이 묵연부답(黙然不答)일러라. 종일토록 연락(宴樂)하고 황혼이 되매 파연하니 사명당이 하처로 돌아오니라.
 
440
백관이 주왈,
 
441
“오늘 연석에 조선 사신을 보니 주식(酒食)을 좋아하오니 부처는 아니라 무슨 법술을 배워 사람을 미혹케 하오니 만일 이 사람을 살려 돌려보내면 반드시 후환이 되리이다.”
 
442
왜왕 왈,
 
443
“그러면 어찌하여야 죽이리요. 경 등(卿等)의 소견을 듣고자 하노라.”
 
444
채만홍이 주왈,
 
445
“신의 소견은 철마(鐵馬)를 만들어 불같이 달구고 사명당을 태우면 비록 부처라도 능히 살지 못하리이다.‘
 
446
왜왕이 그 말을 옳이 여겨 즉시 풀무를 놓고 철마를 지어 만든 후 백탄을 뫼같이 쌓고 철마는 그 위에 놓아 불같이 달군 후에 사명당을 청하여 가로되,
 
447
“그래 저 말을 능히 타면 부처 법력을 가히 알리라.”
 
448
사명당이 심중에 망극하여 납관을 쓰고 조선 향산(香山)을 향하여 사배하더니 문득 서녘에서 오색 구름이 일어나며 천지가 희미하거늘 사명당이 마지못하여 정히 철마를 타려 하더니 홀연 벽력 소리 진동하며 천지 뒤눕는 듯하고 태풍이 진작하여 모래 날리고 돌이 달음질하고 뫼 밖으로 담아 붓듯이 와 사람이 지척을 분변치 못하는지라, 경각(頃刻) 사이에 성중에 물이 창일(漲溢)하여 바다가 되고 성 외의 백성들이 물에 빠져 죽는 자 수를 아지 못하되 사명당 있는 곳은 비 한방울이 아니 젖는지라. 왜왕이 경황 실색하여 이르되,
 
449
“어찌하여 천위(天威)를 안정하리요.”
 
450
예부상서 한자경이 주왈,
 
451
“처음에 신의 말씀을 들었사오면 어찌 오늘날 환이 있으리이까. 방금 사세를 생각하옵건대 조선에 항복하여 백성을 평안히 함만 같지 못하나이다.”
 
452
왜왕이 자경의 말을 뜨고 마지못하여 항서(降書)를 써 보내니 사명당이 높이 좌하고 삼해 용왕을 호령하더니 문득 보하되,
 
453
“네 나라 항복받기는 내 장악(掌握)에 있거니와 왜왕의 머리를 베어 상에 받쳐 들이라.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일본을 멸하여 생령(生靈)을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리라. 네 돌아가 왜왕에게 자세히 이르라.”
 
454
사자 돌아가 수말을 고하니 왜왕이 이 말을 듣고 머리를 숙이고 능히 할말을 못하거늘 관백이 주왈,
 
455
“전하는 모름지기 옥체를 진중하소서.”
 
456
왕이 정신을 차려 살펴보니 남은 백성이 살기를 도모하여 사면 팔방으로 헤어져 우는 소리 유월 염천에 큰 비오고 방초 중의 왕머구리 소리 같은지라. 왕이 차경을 보니 만신이 떨려 능히 진정치 못하거늘 관백이 다시 가지고 들어가 사명당께 드리니 사명당이 항서를 보고 대책 왈,
 
457
“네 왕이 항복할진대 일찍이 항서를 드릴 것이어늘 어찌 감히 나를 속이려 하느냐.”
 
458
하고 용왕을 불러 이르되,
 
459
“그대는 얼굴을 드러내어 일본 사람을 보게 하라.”
 
460
용왕이 반공 중에서 이 말을 듣고 사람의 머리를 버혀 들고 소리를 벽력같이 지르고 운무 중에 몸을 드러내니 사명당이 관백에게 왈,
 
461
“네 빨리 돌아가 왜왕에게 일러 용의 거동을 보게 하라.”
 
462
관백이 돌아가 그대로 고하니 왜왕이 창황중 눈을 들어 하늘을 치밀어 보니 중천에 삼룡(三龍)이 구름을 피우고 사람의 머리를 베어 들었으니 형세 산악 같고 인갑(鱗甲)이 조요(照耀)하여 일광에 바애고 소리 벽력 같아 천지 진동하는지라. 이진걸이 주왈,
 
463
“본국 보화(寶貨)를 다 봉하고 항표(降表)를 올려 간걸(懇乞)하소서.”
 
464
왕이 즉시 이진걸을 명하여 항표를 올린대 사명당이 대로 왈,
 
465
“네 나라 임금의 머리를 버혀 들이라 한대 마침내 거역하니 일본을 무찔러 혈천(血川)을 만들리라.”
 
466
하고 인하여 육환장(六環杖)을 들어 공중을 향하여 축수하더니 문득 뇌성벽력(雷聲霹靂)이 진동하여 산악이 무너지는 듯 천지 훈흑(曛黑)한지라. 왜왕이 이때를 당하여 삼혼(三魂)이 흩어지며 칠백(七魄)이 달아나니 망지소조(罔知所措)하여 가로되,
 
467
“목금에 물이 편만하여 궐중(闕中)을 잠겼으니 미구에 만성인민(滿城人民)이 다 어육(魚肉)이 될지라. 이를 장차 어찌하리요.”
 
468
백관이 주왈,
 
469
“만민이 다 물에 빠져 죽고 남은 백성이 마자 함몰케 되었사오니 원컨대 전하는 급히 처치하소서.”
 
470
왜왕이 서안(書案)을 치고 방성대곡 왈,
 
471
“방금 사세여차(事勢如此)하니 경 등은 염려치 말라. 내 어찌 안민을 구치 아니하리요.”
 
472
하고 칼을 들어 자문(自刎)코자 하거늘 신하 호걸산이 급히 들어와 읍주 왈,
 
473
“전하는 아직 옥체를 보증하소서.”
 
474
하고 칼을 쥐고 문무백관이 한가지로 사명당 앞에 나아가 복지 왈,
 
475
“호국왕이 무도하여 부처님을 모르고 사죄(死罪)를 지었사오니 복걸 부처님은 덕택을 드리워 소국왕의 죄를 사(赦)하시고 억만창생을 살리소서.”
 
476
하고 일시에 머리를 조아려 통곡하며 일제히 손을 고쳐 축수하거늘 사명당이 대로하여 꾸짖어 가로되,
 
477
“빨리 왜왕의 머리를 버혀 들어 생령의 도탄을 면하라.”
 
478
백관이 고두 사죄 왈,
 
479
“소신 등이 원컨대 왕명을 대신하여 각각 머리를 베어지이다.”
 
480
하거늘 사명당이 그제야 노를 잠깐 그치고 이르되,
 
481
“너의 정성을 감동하여 아직 용서하나니 빨리 왜왕을 결박하여 대하에 꿇리라. 불연즉 왜왕의 머리를 버혀 가지고 일본을 탕멸하리라.”
 
482
중관이 차언을 듣고 왜왕에게 돌아가 그 수말을 고하니 노산홍이 주왈,
 
483
“사세 위급하오니 전하는 부처의 말대로 하시면 생령을 보전하려니와 만일 지완하면 대화(大禍) 당도하리이다.”
 
484
왕이 노산홍의 손을 잡고 통곡 왈,
 
485
“과인이 일찍 경의 말을 들었던들 어찌 오늘날 환을 만나리요.”
 
486
하고 하릴없이 흰옷을 입고 스스로 결박하여 문무백관을 거느려 항표(降表)를 가지고 사명당 앞에 나아가 복지청죄(伏地請罪)한대 사명당이 고성대매(高聲大罵) 왈,
 
487
“왜왕은 들으라. 너희 나라가 근본 진시황(秦始皇)의 신하로 동남동녀 오백 인을 배에 싣고 방장(方丈) 봉래(蓬萊) 영주(瀛州) 삼신산(三神山)에 들어가 불사약(不死藥)을 얻으러 가노라 하고 천자를 속이고 이곳에 도망하여 거짓 신선이라 칭하고 여러 대를 평안히 지내매 또한 조선 덕택이요, 너도 또한 천상익성(天上翼星)으로 반도회(蟠桃會)에 참예하여 월궁항아(月宮姮娥)를 희롱한 죄로 상제께 득죄하고 인간에 적거(謫居)하여 대왕이 되었거늘 임진년에 외람한 의사를 내어 조선을 침노하여 생령을 많이 살해하매 상천(上天)이 진노하사 극벌(極罰)을 내려 너희 장졸을 다 멸하였거늘 네 아무리 속객(俗客)이 되었은들 아득히 아지 못하고 조선을 침범코자 뜻을 다시 내매 상제 노하사 사해 용왕을 주시고 너희 죄상을 물으라 하시매 내 특별히 문죄하나니 어찌 감히 거역하느냐, 빨리 머리를 베어 들어라.”
 
488
왜왕이 돈수 청죄 왈,
 
489
“소왕이 밝지 못하여 천위(天威)를 범하였사오니 덕택을 드리워 죄를 용서하소서.”
 
490
사명당 왈,
 
491
“네 이제는 순종할쏘냐.”
 
492
왜왕이 사죄 왈,
 
493
“수화중(水火中)이라도 어찌 사양하리이까.”
 
494
사명당 왈,
 
495
“네 그러면 예단(禮緞)을랑 말고 인피(人皮) 삼백 장씩 매년 진공(進貢)하라.”
 
496
왜왕이 이 말을 듣고 주저하여 진시 답지 못하거늘 백관이 주왈,
 
497
“전하는 근심 말으시고 윤종하소서.”
 
498
왕이 마지못하여,
 
499
“그대로 하리이다.”
 
500
하거늘 사명당이 또 이르되,
 
501
“그러면 문서를 써 올리라.”
 
502
왜왕이 이에 문서를 써 올리거늘,
 
503
사명당 왈,
 
504
“차후는 생심도 외람한 뜻을 두지 말라.”
 
505
왕이 돈수 청명하거늘 이에 용왕을 불러 왈,
 
506
“이제 왜왕이 항복하매 죄를 사하였으니 용왕은 풍운뇌우(風雲雷雨)를 거두라.”
 
507
하니 즉시 천지 명랑하고 일색이 조요하니 일본 군신 백성이 저마다 놀라고 칭찬하며 과연 생불이라 하더라.
 
508
이러구러 삼 삭(三朔)이 되매 사명당이 환국하려 할새 왜왕이 만류 왈,
 
509
“십 년만 유하시면 영세 태평할까 하나이다.”
 
510
사명당이 왈,
 
511
“대왕의 후의(厚意)는 감사하거니와 빈승이 왕명을 받자와 귀국에 온 지 이미 삼 삭이라, 어찌 오래 지완하리요.”
 
512
하고 즉시 떠날새 왕이 문무백관을 거느려 백리허에 나와 전송하거늘 사명당 왈,
 
513
“대왕은 정사(政事)를 닦아 백성을 사랑하시고 백세 무강하소서.”
 
514
하고 이별하니라.
 
515
이때 조선 왕상이 사명당을 일본에 보내시고 소식을 고대하시더니 문득 사명당의 장문이 왔거늘 보시니 동래부사 버힌 장문이라 상이 대희하사 서산대사(西山大師)를 청하여 가라사대,
 
516
“사명당이 동래부사 송경을 선참후계(先斬後啓)하였으니 가히 대사를 이룰지라, 어찌 근심하리오.”
 
517
대사 주왈
 
518
“복원 선상은 물우(勿憂)하소서. 사명당이 이미 일본을 항복받고 회정(回程)하였나이다.”
 
519
상이 가라사대,
 
520
“대사 비록 법력이 신통하나 만 리 일을 어찌 알리오.”
 
521
대사 왈,
 
522
“금월 이십 일에 내조(來朝)하리이다. 만일 그릇 아룀이 있삽거든 소승이 기군(欺君)한 죄를 당하리이다.”
 
523
하더니 과연 수일이 못하여 동래부사 윤옥의 장문이 왔거늘 보시니 하였으되, 사명당을 처음에 취맥하던 일과 왜왕을 항복받던 사연을 일일이 계달하였거늘 상이 대희하여 가라사대,
 
524
“이는 천고에 없는 일이로다.”
 
525
하시고 문무중관을 모아 장문을 뵈시고 못내 칭찬하신대 제신이 주왈,
 
526
“이는 국가 흥복(興福)이오며 이 같은 법력을 가지고 전일 대환을 당하옵기는 도시 천수인가 하나이다.”
 
527
상이 가라사대,
 
528
“그렇다.”
 
529
하시고 즉일에 서산대사를 인견하사 왈,
 
530
“대사의 말과 같아 사명당이 일본을 항복받은 장문이 왔으니 보라.”
 
531
하시고,
 
532
“조선이 태평함은 대사의 공이라.”
 
533
하시고 위로하시더라.
 
534
이때 사명당이 동래부에서 삼 일을 유하고 배도겸행(倍道兼行)하여 오 일 만에 득달하여 경성에 이르니 서산대사의 이른바 이십 일에 내도하리란 말이 맞았더라. 만성 인민이 길에 메여 구경하며 환성(歡聲)이 여류하더라. 사명당이 궐내에 다다르니 상이 들으시고 빨리 인견하시고 위로 왈,
 
535
“경이 과인을 위하여 만리 타국에 들어가 일본을 항복받고 위엄을 빛내니 어찌 상쾌치 아니하리요.”
 
536
하시고 못내 칭찬하시니 사명당이 황공복지(惶恐伏地) 주왈,
 
537
“어찌 소승의 공이리이까. 이는 국가 흥복이옵고 전하 성덕이로소이다.”
 
538
상이 왜왕의 항복받은 설화를 물으신대 사명당이 다섯 가지 취맥하던 일과 인피 삼백 장씩 일 년 육 삭으로 진공하게 문서받은 일이며 왕과 제신이 백 리 밖에 전송하던 일을 세세히 아뢴대 상이 들으시고 대희하사 왈,
 
539
“범백 일이 빛니고 상쾌하나 인피 바치게 함은 실로 중난(重難)하도다.”
 
540
사명당이 주왈,
 
541
“그는 전하 덕택으로 처분에 있삽거니와 소신이 일본 지형을 보오니 산천이 험악하옵고 인물이 간악하와 유화치 못하오매 불구에 다시 반심(叛心)을 두올지라, 그런 고로 인피를 진공하여 차후는 외람한 뜻을 먹지 못하게 함이로소이다.”
 
542
상이 가라사대,
 
543
“내두(來頭)에 예단을 보면 알려니와 진실로 기특한 일이로다.”
 
544
하시고 백관을 보아 가라사대,
 
545
“사명당의 대공을 어찌 갚으리오.”
 
546
하신대 제신이 주왈,
 
547
“이는 고금에 없는 일이오니 고관대작(高官大爵)을 주옵소서.”
 
548
상이 즉시 봉작을 높이려 하시니 사명당이 주왈,
 
549
“소신이 어려서 삭발위승하와 불경을 숭상하옵다가 국난을 당하와 만리 타국에 나아가매 대환을 더옵고 태평하옵거니와 불전에 처신하여 어찌 다른 뜻이 있으리이까. 산당초암(山堂草庵)에 불상을 위하와 가고자 하오며 몸에 벼슬을 띠고 산문의 종적이 불안하오니 불경을 원하옵고 부운(浮雲) 같은 환로(宦路)는 원치 아니하나이다.”
 
550
상이 그 뜻이 굳음을 보시고 차탄하심을 마지아니하시고 전송하시니 사명당이 기뻐 하직하고 궐문을 나 대사를 뫼시고 한가지로 향산에 이르니 모든 중이 나와 대후(待候)하더라. 불전에 나아가 배례하고 불경만 주야 송독하니 높은 도덕과 명망이 일국에 진동하더라.
 
 
551
각설, 이때는 정유 십일 월이라, 왜왕이 사명당을 보내고 백관을 모아 의논 왈,
 
552
“어찌 십 척(十尺)되는 인피 삼백 장을 얻어 보내리요.”
 
553
제신이 다 묵연하여 말이 없더니 예부상서 한자경이 출반주(出班奏) 왈,
 
554
“이제 인피 삼백 장을 폐하오면 다시 환을 면치 못하리니 신의 소견은 키 크고 장력 있는 백성 삼백을 모아 서로 싸워 승부를 결하여 죽이라 하소서.”
 
555
왕이 옳이 여겨 장력 있는 백성 삼백을 뽑아 서로 싸워 죽이게 하니 백성이 통곡하며 서로 죽여 즉시 인피 삼백 장을 얻어 조공(朝貢)을 봉할새 왜왕이 앙천 통곡 왈,
 
556
“이제 인피 삼백 장을 연연 조공하면 백성이 어찌 견디리오. 제신은 과인의 머리를 베어 무죄한 백성의 살생하는 환을 면케 하라.”
 
557
제신이 읍주 왈,
 
558
“전하는 진중하소서. 금번 사신이 조선에 다녀오면 조선왕도 필연 처단이 있으리이다. 벽도화 노산홍의 모략(謀略)이 과인하오니 이 사람을 보내소서.”
 
559
왕이 즉시 노산홍을 불러 탄왈,
 
560
“경은 조선에 들어가 구변(口辯)을 잘하여 차후 인피 삼백 장 조공을 면케 하라.”
 
561
노산홍이 주왈,
 
562
“조선왕도 백성이 있는지라, 인피를 바치오면 어찌 놀라지 아니리이까. 소신이 비록 재주 없사오나 힘을 다하여 도모하리이다.”
 
563
하고 왜왕을 하직고 나와 벽해(碧海)를 건너와 주문하고 동래로부터 발행하여 한양에 이르러 조회함을 아뢰니라.
 
 
564
각설, 상이 사명당을 보내시고 압록강에 칠보부처를 위하여 안주성 밖에 칠보암(七寶庵)을 짓고 칠불탱(七佛幀)을 앉히고 천금을 들여 수축(修築)하고 향산사 중을 잡역물침(雜役勿侵)하라 하시니라.
 
565
이때 일본 사신 주문이 왔거늘 상이 사관으로 맞으라 하시다. 왜사가 들어와 진공(進貢)할새 인피를 바치니 상이 대경하사 왜사를 인견하신대 노산홍이 들어와 복지하온대 상이 가라사대,
 
566
“인피 삼백 장을 조공하니 네 나라 백성이 얼마나 반성하였느냐?”
 
567
노산홍이 눈물을 흘리며 묵묵하고 백배사례만 하거늘 상이 전교 왈,
 
568
“왜왕이 죄상이 불측하매 네 나라 백성을 다 없애고자 하였더니 이제 귀순하니 다시 외람된 뜻을 두지 말라. 인피 삼백 장을 체감하나니 왜놈 삼백씩 동래관에 번(番)을 세우고 놋쇠 일천 근과 정철(正鐵)을 연년 조공하라.”
 
569
하시니 왜사가 하교를 듣잡고 황공 사죄 왈,
 
570
“대왕이 성신 문무하사 덕택을 드리우시니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571
하고 사은 숙배 후 퇴조(退朝)하여 십 일을 머물러 행리를 점검하여 본국으로 돌아가 왜왕을 보고 조선왕의 말씀을 고하니 왕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문무백관을 모아 조선왕의 은혜를 감격하여 산호만세(山呼萬歲)하며 일본 백성이 부처국이라 하고 만만세를 부르니 도로 태평이 되었더라.
 
572
그 후에 왜왕이 동래 땅에 관(關)을 짓고 군사 삼백 명을 보내어 수자리 살리며 무쇠와 정철을 연년 조공하더라.
 
573
이때 조선 백성이 팔년병화 중 사생근고(死生勤苦)하더니 성덕이 연천하여 왕화(王化) 사해에 덮였으니 백성이 만세를 부르고 격양가(擊壤歌)를 읊으니 요천일월(堯天日月)이요 순지건곤(舜之乾坤)이라. 미재(美哉)라, 동방산하지고여 의관문물(衣冠文物)이 태평만만세 지금탕이로다.
 
574
지금 평안도 묘향산에 수충사란 묘당(廟堂)을 지어 사시로 향화(香火)를 받드니 서산대사와 사명당의 전후 행적이 있으니 후인은 알지어다.
 
 
575
세재 무자 오월일 초동 필서(歲在 戊子 五月日 初冬 筆書)
【원문】권지삼(卷之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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