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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지문덕 ◈
◇ 승상의 순시(巡視) ◇
카탈로그   목차 (총 : 11권)     이전 10권 다음
1948
김동인
1
국향이는 또 아들을 낳았다.
 
2
을지 승상의 두 자식을 낳아서, 이제는 마음으로든 몸으로든 완전한 승상 댁 사람이로라는 자각을 가지고, 국향이는 이 두 번째의 아들을 들여다보았다. 그 두드러진 이마며 커다란 눈이며, 틀림없이 승상을 닮은 이 아이를 굽어볼 때에 국향이는 승상 댁에 버려 둔 바위를 생각하고 한 순간 기분이 흐려졌다. 지금은 토동토동 뛰어다니며 놀 귀여운 아들을 내버리고 석다산으로 달아났던 한때의 광란 심리를 못내 후회하였다.
 
3
국향이가 갓난애를 젖을 물리고 암담한 기분에 잠겨 있을 때에 주인 마누라가 이 방으로 들어왔다.
 
4
"우리 집에 귀한 손님이 오실 터인데, 색시 잠깐만 피해 주어야겠는데…."
 
5
"몸푼 지 열흘도 못 돼서 어디로 피합니까?"
 
6
하면서 국향이는 기저귀 강보를 주섬주섬 추리기 시작했다.
 
7
"아니, 지금이 아니라, 일간 큰 손님이 오실 터인데 그때 말이오."
 
8
"큰 손님이란 어떤 분이십니까?"
 
9
"우리나라 대승상을 지상공이랍니다."
 
10
국향이는 가슴이 철썩 하였다. 승상이 어떻게 이런 곳까지 오시는가?
 
11
어떻게 아셨는가? 가지가지 의문이 국향이의 머리에 생겨났다.
 
12
"승상은 우리 집 돌아간 영강님과 가까우신 사입니다. 승상님이 이번온 고구려의 민정 민심을 순찰하시러 길어 오르셨는데, 이 앞을 지나가시는 길에 우리 집에 들르시겠다구…."
 
13
일찍이 을지 댁에 있을 때에 들은 일이었다.
 
14
민심 애국심 적개심 등이 얼마나 일었는지, 한 번 전국을 돌아 관찰해야겠다더니 지금 떠나는가?
 
15
처음 승상님이 오신다 할 때에 국향이는 자기 일 때문이가 가슴도 철썩 했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국사 때문이라 하매, 일면 마음도 놓였지만 일말의 불안감은 막을 수 없었다.
 
16
여기서 국향이는 주인 마누라에게 비로소 자기의 신분이며 이 갓난애가 어떻게 된 것인지 등을 죄다 알려 주었다.
 
17
"그래도 난 승상님이 내 집에 들르시면 나더러 서방 맞이하랄 게 걱정이외다. 그 말씀 나시면 색시 좀 역성들어 주오."
 
18
당시 고구려는 남녀 열일곱 살 이상이면 시집장가 갈 것이고, 아직 생산 시기에 과부가 되었으면 재가하여 나라에 자식을 낳아 바치라는 것이 엄하게 규정되어 있더니만큼, 주인 마누라의 풍만하고 건강한 육체는 아직 자식 두셋은 넉넉히 낳을 만한지라, 주인 마누라의 걱정도 헛걱정은 아니었다.
 
19
"아주머니 시집가시구료."
 
20
"사실은 아이가 든 것 같아."
 
21
"장 서방의?"
 
22
주인 마누라는 눈을 섬벅섬벅 하였다.
 
23
"거 경사구료!"
 
24
"아직 아무한테도 발설 말아요."
 
25
주인 마누라는 당부하였다.
 
26
을지 승상은 예통이 있는 뒤, 한 열흘 지나서야 국향이 묵어 있는 동네에 이르렀다. 지나는 곳마다 그곳 젊은이들을 모아 놓고, 그 사상 관계며 훈련 정도를 검토하느라니까 이렇듯 길이 더딘 것이었다.
 
27
주인 마누라는 반겨 나가서 승상을 맞아 객실로 인도하였다. 국향이는 갓난애를 붙안고 내실에 가만히 박혀 있었다.
 
28
"마나님은 아직 홀몸으로 계시오?"
 
29
"네이, 선부 가신 뒤에 내내 혼자 늙습니다."
 
30
"동네에서 재가하라고 권하지 않습디까?"
 
31
"권하는 사람도 있기는 있읍지만, 이 늙은이가 이제 어디를 갑니까?"
 
32
"늙은이라고? 마나님 금년 몇 살이시오?"
 
33
"갓 마흔이올시다."
 
34
"갓 마흔이면 아직 남편이 있으면 아이 두셋은 더 낳겠군. 재가하시오. 나라에서는 지금 홀몸으로 지내는 걸 허락하지 않습니다. 재가하시오. 나라에 서는 지금 아이를 기다립니다. 우리나라 인구가 지금 사천만, 수(隋)나라 중국 인구에게 부족하기 천만입니다. 적어도 이천만은 더 낳아 길러야 할 처지입니다. 마나님 같은이가 앞장서서 재가를 하셔야지 ─ 나라의 분부에 따라서 아이를 낳으시오. 이것이 마나님이 나라의 은혜를 갚는 길입니다."
 
35
주인 마누라는 숨을 길게 들이쉬었다.
 
36
"승상님, 소인네 뱃속에는 한 아이가 있는 듯싶습니다."
 
37
"시집 안 가고 아이가 있으면 그런 아이는 나라가 허락치 않습니다. 고구려 아무리 만성이 필요하다 해도 불순한 아이는 용납치 않습니다. 어서 시집을 가시오. 이 몸도 불행 아내가 단산했지만, 자식이 없어서 나랏님의 윤허를 받자와 한 처녀를 아내로 맞아서 한 아들을 보았지만, 그 색시는 남편 늙었다고 젊은 녀석 따라갔구료!"
 
38
국향이의 이야기일시 분명하였다.
 
39
"승상님, 소인네더러 시집가라기보다 승상님이 먼저 또 장가를 가셔야겠읍니다그려."
 
40
"나는 내 젊은 아내가 돌아올 날을 기다리고 있소이다."
 
41
"돌아오면 승상님 받아 주시겠어요?"
 
42
"죄만 범치 않았으면 ─ 피만 더럽히지를 않았으면 받고 말고요."
 
43
"소인네가 승상님께 한 색시를 주선하오리까?"
 
44
"나보다 마나님이나 어서 좋은 낭군을 택하시오. 내야 언제든…."
 
45
"승상님을 위해서 승상님 둘째 아드님을 낳은 색시를 승상님께 추천하오리 다."
 
46
"내 아들을 낳은 색시라? 나는 함부로 오입을 안 하는 사람인데?"
 
47
"승상님 작은마나님 국향 공주가 한 이십 일 전에 소인네 집에서 한 아드님을 낳았는데, 어찌도승상님을 닮았는지, 지금 저 후실에서 생전 처음 아버님께 뵙겠다고 기다리고 있읍니다. 승상님, 국향 공주를 용납해 주세요."
 
48
"용납 여부가 있소? 공주는 내 아내요."
 
49
주인 마누라의 부르는 소리에 응하여 기디리고 있었던 듯이,
 
50
"예!"
 
51
하는 소리가 응하며, 그 방으로 통하는 샛문이 사뿐히 열렸다.
 
52
그리고 그 문으로는 한 갓난애를 불안은 색시의 청초한 자태가 나타나며 승상이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53
"승상님, 오래간만에 인사 여쭙습니다. 국향이올시다."
 
54
을지 승상은 이 갑작스런 변동에 대응할 마음의 준비가 미처 되지 않아서, 다만 몸을 움질움질 물러앉으며,
 
55
"고놈 영악하게 생겼는데!"
 
56
하며 손을 내밀어 갓난애를 얼렀다.
 
57
"고놈 이름은 뭐라?"
 
58
"아버님을 아직 뵙지 못해서 이름은 아직 없읍니다."
 
59
"제 형이 바위니 요놈은 조약돌이라고 이름지을까? 요놈 조약아! 아비가 좀 안아 보자."
 
60
승상은 팔을 폈다.
 
61
주인 마누라는 이 내외의 단란한 장면에 있기가 거북스러웠던지. 슬그머니 자기 처소로 건너가 버렸다.
 
62
청초한 고구려 초가을 옷을 차리고 아이를 붙안은 국향이의 자세는 진실로 깨끗하고 청초하였다.
 
63
해산 후 한 달이 지나니, 산욕의 덜민 것도 다 씻기고, 스무 살의 젊은 여인의 아리땁고 청초한 모양에 을지 승상은 도취한 듯, 갓난애를 붙안으려고 길게 폈던 팔은 갓난애와 아울러 애 어머니인 국향 공주의 몸까지 쓸어안았다.
 
64
"공주! 객지에서 몸을 푸느라고 얼마나 고생했소?"
 
65
"주인 아주머니가 친절히 보아 주셨어요."
 
66
"참 주인 마누라 어디 갔나?"
 
67
"두어 두셔요. 당신 방에 간 모양이지요."
 
68
"그 마누랄 알맞은 데 있으면 시집을 보내야겠는데, 자식도 셋은 아직 넉넉히 낳을 마누라가 과부로 지내면 나라에서는 손해나는 노릇인걸. 공주처럼 남편 집을 떠나려거든, 아이를 뱃속에 지니고 떠나는 게지. 참, 장량이라 하는 진나라 유민을 보았소?"
 
69
"장 서방을 고구려 색시께 장가를 들여 주었읍니다. 저하고 주인 아주머니하고 알선해서 ─."
 
70
"공주께 장가들일 게지."
 
71
"그렇지 않아도 제게 장가들자고 몇 번 조르는 걸 집어 팽개치고 했더니, 지금은 함박꽃 같은 새색시하고 의좋게 잘 사는걸요."
 
72
"그 녀석도 함박꽃 같은 새색시하고 의좋게 잘 사는걸요."
 
73
"그 녀석도 이사람이 서글서글한 게 자식을 낳으면 시원한 자식을 낳을걸.
 
74
아이 아직 없답디까?"
 
75
"장가 보낸 지 두 달밖에 안 되는걸요. 그동안 한 번 문 안 온 밖에 색시댁에 꾹 박혀 나지도 않아요."
 
76
"좋은 세월에 태어났으면 한몫 볼 녀석인데, 그 녀석도 아까운 녀석이야!
 
77
그때 공주가 그 녀석 따라 내 집을 나간 것도 버려 두었구료!"
 
78
승상은 공주와 한방에서 묵었다.
 
79
오래 그리던 아내라, 갓난애의 존재까지 잊을 정도로 내외는 의좋게 서로 품고 잤다.
 
80
이튿날 아침 주인 마누라가 문안 들어오자 승상은 주인 마누라더러,
 
81
"마나님도 시집을 가시오. 나라의 분부외다. 내 마땅한 서방 하나 골라 드리리까?"
 
82
하였다.
 
83
"승상님도 당신 좋으면 좋았지, 애꿎은 수절 과부 괜스레 훼절시키려네.
 
84
나라에선 수절도 못하게 하십니까?"
 
85
곁에서 국향이가 역성을 들었다.
 
86
"승상님, 애꿎은 아주머니 그저 버려 두세요."
 
87
"공주 그렇지 않아요? 게다가 나라에서 아이가 쓸데 있으면 시집 안가고라도 낳아 바치면 그만 아닙니까? 승상님이나 새 마나님 품으시고…."
 
88
"새 아내도 아니오. 혼인한 지 삼 년이오. 바위, 조약이 두 아이의 어머니요."
 
89
"길이길이 복 누리소서. 애꿎은 수절 과부 훼절시키지 말아 주세요."
 
90
"허허, 나라의 분부를 꺽으려는 마나님을, 공주, 어떻게 벌하잡니까?"
 
91
"그저 아주머니 뜻대로 버려 두세요."
 
92
승상은 하루를 더 묵어서, 이튿날 길 떠날 무렵에 국향이를 데리고 떠나기로 하였다.
 
93
"참 마누라라는 물건은 없어도 불편하거니와 있어도 귀찮고 성가신 물건이 든. 요서(遼西)까지 돌아서 가얄 터인데 이천여 리 길을 아이와 여편네를 끌고 가야 한단 큰 짐이로군."
 
94
"저는 전에 만리길을 삼동에 걸어온 사람입니다."
 
95
"그때야 마음에 벼르는 일이 있으니깐 어려운 줄을 몰랐지."
 
96
"이번은 승상님 모시고 조약 붙안고 가는 길이라, 십만 리라도 어려운 줄 모르겠어요."
 
97
이러한 벽촌까지 승상이 다녀간다는 일은 개벽 이래 있어 보지 못한 일이라, 동네의 환송은 대단하였다. 몇 십 리 몇 백 리 밖에서까지 사람이 모여 들어서는, 우리 승상님'의 길을 축복하였다.
 
98
"내 회로에 여기 다시 들를 터인데, 그때마나님 새 낭군 맞아 사는 모양을 꼭 봅시다그려. 그렇지 않았다가는 내 병정이라도 마나님 방에 집어넣으리다."
 
99
"승상님 언제쯤 회로에 오르셔요?"
 
100
"글쎄, 일 년이 될지, 이 년이 될지 예측치 못하겠소이다."
 
101
"그럼 공주님 조약의 돐은 꼭 우리 집에서 지내세요. 기다리겠읍니다."
 
102
"이 탯덩어리를 붙안고 일이 년을 벽지로 돌아다니자면 대체 돐을 볼수가 있겠는지?"
 
103
"고구려에는 아무런 벽지라도 상당한 의원이 있으니까 다름 염려야 없겠지 만서두 ─ 조약 도련님, 명년에 다시 뵙시다."
 
104
이리하여 온 부락의 칭송을 받으며 승상 내외는 민정 시찰의 길에 디시 올랐다.
 
105
천하에 그 정교하고 탄탄함을 자랑하는 고구려 공예가, 그 수를 다하여 꾸민 수레가 국향 공주를 위하여 제공되었다.
 
106
완전히 포도된 큰길에 나서서 조약을 붙안고 포도된 한길을 달리는 정취는 또한 각별하였다.
 
107
길가에는 고구려 만성이, 그들의 애모하는 승상을 환송하기 위하여, 있는껏 아이를 업고 혹은 붙안고 혹은 손목 잡고, 줄을 늘어서서 만세를 부르며 승상을 환송하고 있었다.
 
108
"어제는 진씨네 땅이요, 오늘은 수씨(隋氏)의 땅이 되는 공주네 고국과 비겨 보아서 어떻소?"
 
109
그러잖아도 국향이에게는 그 대조가 통절히 느껴지던 즈음이었다.
 
110
"승상님, 저도 고구려 사람입니다."
 
111
유시(劉氏)에게서 진씨(陳氏)로 수씨(隋氏)로, 끊임없이 변동되는 중국은, 명일 또 누구의 것이 될지 예측할 수 없는지라 천년지계 만년지계는 꿈에도 생각할 바 아니요. 십년지계도 십 년 뒤에는 누구의 땅이 될지 모르는지라 준비할 수 없다.
 
112
그러한 진나라의 황녀로 태어나서, 왕검님의 세상 천여 년, 고씨의 세월 천여 년 가까이를 한 왕실 밑에서 건전하고 고요하게 자라고 발전된, 이 고구려나라의 승상 댁 아이어머니로 있는 현재를 비교해 보자면, 과연 가슴에 깊이 느껴지는 바이 있었다.
 
113
"승상님, 저는 고구려인의 아낙입니다. 진나라와는 아무런 인연도 관련도 없는 동방인입니다."
 
114
"그 고구려도 장차 말갈에게 눌릴 날이 있을 것 같구료! 지금껏 오면서 기상을 보니, 말갈의 기상이 아무리 해도 고구려 아이들보다 승하단 말이지."
 
115
"우리 바위며 조약이도 바깥 아이보다 못하리까?"
 
116
"바위, 차돌, 모래의 문제가 아니외다. 한 종족이 흥하고 망하는건, 한 사람의 뜻이나 의사로 결정되는 게 아니외다. 내가 고구려 수상의 자리에 앉아서 극력 종족의 기상을 늘려 보려고 애썼지만, 하늘의 지휘하시는 걸 벗어날 수가 없단 말이지."
 
117
"우리 바위의 대까지는 부강한 고구려를 누려야 할 터인데…."
 
118
"한두 대를 말함이 아니외다. 고구려 만년의 진흥을 위하여 나는 걱정하는 바이외다."
 
119
그러나 진나라 오 대 삼십년 년간이라는 두꺼비 꼬리만한 역사를 겪은 국향이로서는 국가의 운명이라는 것도 진실로 보잘것 없는, 초로 같은 것이라는 국가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120
고구려로 보자면 지금 창성한 국운이 한창 팽창해 나가고 뻗어 나가는 나 라이지만, 한 발 실수하면 어디서 어떠한 차질이 생길는지 예측동 할수가 없을 것이다.
 
121
국향이는 품에 안은 조약이를 굽어보았다.
 
122
"조약아! 너도 장차 아버님께 지지 않는 큰사람이 되어라. 어미는 축수한 다."
 
123
국향이는 머리를 숙여 조약이의 머리에 입맞추었다.
 
124
승상 을지문덕과 그의 아내 국향 공주는 조약을 붙안고 단출한 수원 몇 명을 거느리고, 잘 포장된 초가을의 도로를 상쾌한 기분으로 요서(遼西)로 달리고 있었다.
 
125
"공주 진나라 서울과 어때요?"
 
126
"승상님, 이젠 전 진인이 아니올시다. 고구려 아낙이 된 지 삼사 년, 조국 고향 잊은 지 오랜 사람이옵니다. 진나라 일은 묻지 말아 주세요."
 
127
그리고는 또한 귀여운 조약을 굽어보는 진국향 공주 ─.
 
128
"공주! 고구려로 투신한 거 참 잘한 일이외다. 지금껏 길가에서도 무수히 본 바처럼, 무수한 진나라 한나라 백성들이 구고려로 넘어와서 편안히 살고 있소이다. 제 나라에 있었더면 유리걸식할 무수한 백성들이…."
 
129
어떤 곳에서 그들은 한 노인을 보았다. 눈결보다도 흰 기다란 수염과 머리털을 초가을 바람에 휘날리며 농구를 들고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 곁에는 아직 젖먹이 갓난애가 혼자서 싱글벙글 하고 있었다.
 
130
을지 승상의 국내 순시하는 것은 온 고구려에 알려진 소문이라, 노인도 그 점은 안 모양이었다. 노인은 승상께 공손히 절하였다.
 
131
"을지 승상님이시지요?"
 
132
"예. 노인 춘추가 어떻게 되시오?"
 
133
"금년에 여든 ─ 일곱인가 여덟인가 그쯤 되나 봅니다."
 
134
"아직 튼튼하십니다."
 
135
"장차 팔십 년은 더 살 듯하오이다."
 
136
"저 아기는?"
 
137
"소인의 자식놈이올시다."
 
138
"어이 장해라! 구십에 아드님을 보시니 참 장사시군. 마나님 춘추는 어떻게 되십니까?"
 
139
"소인의 아내는 아이를 열 개를 낳고서 사십 년 전에 죽었읍니다.
 
140
"저 아기는?"
 
141
"네 그래서 오십 홀아비로 지내노라는데, 나라에서 자식 낳을 만한 사내들은 재취하라고 하시기에 또 둘이나 얻었는데 다 죽어 버렸지요. 그래서 소인의 증손녀의 소꿉동무 되는 처녀 아이를 장난삼아 그런 노릇이 작년 에 저 아이가 났읍니다그려. 그래서 애지중지 기르는 중입니다."
 
142
"노인 자제가 몇 분이나 되시오?"
 
143
"서른셋이라던 게 벌써 한 옛적이고 그 뒤에도 몇 개 또 낳았으니까 아마 마흔은 넘을 것이올시다."
 
144
"모두 잘 자라시오?"
 
145
"맏이가 금년 갓 일흔 살인데 잘 자라지 않아 잘 늙습니다. 역시 아비를 닮아 건강합니다."
 
146
"아아, 고구려 만성이 모두 노인 같으면 고구려 육천만은 문제가 없을 걸.
 
147
노인, 자식 많이 낳으셔서 나라에 보답해 주시오. 고구려는 지금 만성이 귀 합니다. 이 넓은 벌에 사람이 그득해지는 날을 우리 상감은 기다리십니 다."
 
148
"아내가 한 아이를 낳고 다음을 또 낳으려면 삼 년의 세월이 걸리니 그게 딱한 일이올시다."
 
149
"노인은 나라의 다산록(多產祿)을 받으셨겠구료?"
 
150
"그럼요! 열 놈째 낳았을 적, 처음으로 한 열흘갈이 땅을 다산록으로 받았 읍니다. 그 이래 연년이 받은 게, 이 근처 한 사십 리는 남의 흙 밟지 않고 다닐 수 있을 만큼 모두가 나라에서 하사하신 녹지입니다. 아내만 감당한다면 소인 같아서는 일 년에 오륙백 명은 낳을 수 있겠는데 여인이란 것이 남편 같지 못합니다그려, 허허허허!"
 
151
"일 년이면 삼백육십 일에 어떻게 오륙백을 낳으십니까?"
 
152
"이틀에 서너 번야 못하겠어요?"
 
153
"참 장하신 기개로군. 노인 자손이 몇 분이나 되시오. 모두가?"
 
154
"글쎄올시다. 연전에 천이 넘는다고 맏이가 말하더군요."
 
155
"한 사람이 천 명 자손 ─ 몇 해만 그대로 나가면 한 나라가 되겠군요."
 
156
승상은 곁에 가만 듣고 있는 국향이를 돌아보았다.
 
157
"공주도 다산록을 하사받아 보시구료! 공주가 내게 시집온 지 삼 년에, 노인의 말씀대로 치자면 일천 몇 십 명의 자식은 거느렸어야 할 터인데, 겨우 단 두 명이요? 그리고 이삼십 년 겪고는 단산해 버리고, 여인은 하늘의 명령을 감당치 못하거든 ─."
 
158
국향이도 마음에 느껴지는 바이 있었다.
 
159
진궁(陳宮)에는 삼천의 후궁이 있다. 그 삼천이 모두 천자의 귀염을 받는가 하면 그것도 복불복이어서, 어떤 자는 동정(童貞)을 지닌 채 늙어 헛되이 청춘을 썩히는 자가 꽤 많다. 많이 낳고 못 낳는 것은 오직 여인에게 탓이 있는 바가 아니다.
 
160
그렇다기로서니 남자가 여인을 삼백 번 거느렸으면 자녀 삼백은 낳도록 마련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일천여 번이나 거느려야 겨우 한 자식을 볼까 말까 마련되었으니까, 자식을 기다리는 남편은 작은댁 후실 등을 거느리는 것, 이것도 또한 하늘의 섭리에 다른 일이라, 여인 된 자로서는 하늘을 원망할밖에 도리가 없을 것이다.
 
161
"승상님, 이 아기를 유모에게 줍시다."
 
162
"건 또 왜?"
 
163
"젖을 떼면 또 아이가 든다는데…."
 
164
"공주도 다산록에 욕심이 나오?"
 
165
"나라에 많은 자식을 바쳐야 하지 않겠읍니까?"
 
166
"하기는 난 아직 본전도 못했단 말이지. 한 사내에 두 아내면 자식 삼남매는 두어야 본전인데, 지금 겨우 형제 뿐이니 아직 본전 뽑지 못했어.
 
167
자, 우린 이제 우리 길을 갑시다. 그럼 노인, 더 많은 자제를 보셔서 나라에 바쳐 주십시오. 고구려나라는 지금 젊은이를 기다립니다. 나라에서는 자 손 많이 둔 분은, 자손두니만큼 대접도 해 드리니까, 만 명이라도 십만 명 이라도 자식을 많이 두십시오."
 
168
"승상님, 차 한 잔 대접 못하구…."
 
169
"안녕히 계십시오."
 
170
"많이 많이 창성하세요."
 
171
이리하여 승상 내외는 이곳을 떠났다. 천여 명의 자손을 두었노라는 노인과 작별하여 다시 길에 올랐지만, 국향이의 마음은 왜 그런지 찌푸득이 시원치 못한 기분이 다분히 섞여 있었다.
 
172
"승상님!"
 
173
"…?"
 
174
"이 조약이를 위해서 한 유모를 구해 주세요."
 
175
"왜 젖이 부족하오?"
 
176
"젖은 철철 넘습니다마는…."
 
177
"젖은 넉넉하면 유모는 왜? 갓난애란 생모의 젖을 먹고 자라야 옳게 자라는 법이오. 유모는 아무리 해도 남이지 뭐야."
 
178
"그래도 아이 젖먹이는 동안은 새 아인는 못 본다고 들었읍니다."
 
179
"자식 생각이 또 나오?"
 
180
"저는 고구려의 아낙이올시다"
 
181
승상은 머리를 돌려 국향이를 굽어보았다.
 
182
"공주는 다산록(多産祿)이 생각 나는가 보구료? 대체 고구려의 아낙은 격식대로 아이를 낳아서 튼튼하게 길러야지, 송사리 벌레 떼처럼 한 배에 천 마리 만 마리 낳아서 쓸데없소, 개돼지처럼 한 배에 대여섯 마리씩 낳으면 수요야 늘겠지만 하늘은 사람에게는 한 배에 하나씩으로 정해주셔셔, 그 하나도 잘 넉넉히 자란 뒤에야 다음 아이가 들도록 정해 주신게니까, 공주가 내게 와서 삼 년에 아이 둘을 낳은 건 꼭 알맞은 수효외다. 그 이상 낳으면 감당치를 못하거니와 쓸데도 없소이다."
 
183
"그래도 아까 그 노인은…."
 
184
"그 노인이야 짐승이지. 일 년에 오백 마리를 낳겠다니 ─ 그게 사람의 일이요? 거저리 작대기 천을 낳으면 뭘 하고 만을 낳으면 뭘 하오? 모두…."
 
185
승상은 공주의 품에서 조약이를 가만히 끌어당겼다.
 
186
"모두 요런 진짜 알맹이를 낳아야 하지 거저리 작대기를 만 개를 낳으면 무얼 하고 십만을 낳으면 뭘 하오? 나라에서도 영특하고 똑똑하고 건강한 놈을 구하시지 거저리 새끼를 구하는 바가 아니니까 ─."
 
187
"승상님께서도 제가 낳은 것을 알맞다고 보십니까?"
 
188
"알맞고, 더 많이 낳는다면 나도 감당을 못하겠거니와, 공주의 몸도 감당치 못할 줄 아오."
 
189
"전 감당하겠어요."
 
190
"명년쯤, 조약이 젖 떨어질 때쯤 해서 또 한 아이를 낳아 봅시다. 이번은 꼭 딸아이를 만들어야겠는데 ─."
 
191
국향이도 속으로 가만히 세어 보았다.
 
192
"그러면 제가 승상님 모시어 일생에 열댓 명밖에야 자식을 보겠어요?"
 
193
"한 내외에서 열댓 명은커녕 홑 댓 명이라도 충실한 것만 낳아서 완전하게 길러 내놓으면 완전히 국민의 책무는 다하게 될 게요."
 
194
"대여섯 명은 제가 승상 가문에 낳아서 바치오리다."
 
195
"고구려의 가을은 상쾌도 하다. 중국도 이런 좋은 날씨가 있소?"
 
196
승상은 유쾌한 숨을 들이키며 말하였다.
 
197
요동(遼東) 칠백 리의 무연한 벌에 이르는 곳마다 큰 성이요, 가득 찬 창고(倉庫)요, 거기 움직이는 시민들은 모두가 씩씩하고 건강한 젊은이였다.
 
198
"고구려는 과연 크고 훌륭한 나라입니다."
 
199
국향이는 종내 승상께 진심을 토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200
"되 땅과 어떻소?"
 
201
고구려인은 고구려 아닌 곳은 죄다 되라 한다. 중국 계통의 사람은 이말을 좋게 해석하여, '대국(大國)'이라 한다고 한다.
 
202
되놈이라 하고 되 사람이라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분명 '되'라는 한 층 낮은 인종을 규정한 것일시 분명하였다.
 
203
과연 고구려인에게는 고구려인으로서의 긍지가 컸다. 그들이 같은 단군님의 후손이라 인정하는 계림(鷄林)이나 백제에 대해서는 계림 사람 백제사람이라고 사람 대접을 해주었지만, 고구려와 이웃해 살고 있는 말갈계통이 인종을 비롯하여 돌궐(突厥)이나 그런 오랑캐 종류이면, 중국 계통의 중국인까지 모두 되놈이라 하여 경멸하고 얕보았다. 그리고 오직 신선의 족속이로 라는 단군 백성만을 사람으로 꼽는 고구려인이었다.
 
204
이 요동 지역엔느 고구려인 아닌 인종이 꽤 많이 살고 있었다. 우선 중국 의 끊임없는 내란 때문에 중국을 피해 망명한 중국 망명인들이 소문에 듣던 낙토 고구려를 사모하여 넘어와서, 이곳 저곳에 중국인 부락을 이루고 있었다.
 
205
중국인은 또한 중국인이로라는 긍지가 있으므로, 다른 족속을 얕보는 천성 이 있지만, '메유파즈'의 철학을 가지고 있는 중국인라, 이 고구려인의 존대심과도 넉넉히 융화가 되어 곧잘 살아 갔다. 아직 문화의 세계에 도달하지 못한 말갈 종족은 불함산 기슭에서 고구려 인종과 함께 차차 번식하였 지만, 아직 음식을 손가락으로 쥐어 먹으며, 뒷간과거처실의 구별이 없이 되는 대로 살아 가는 미개 인종이다. 고구려인의 예하에서 아무 불평이며 불만 없이 곧잘 심부름이라 하며 지내 갔다.
 
206
갖은 수모 시종 다하며 고구려의 예하에서 사는 인종들도, 워낙 고구려와 의 문화 정도가 차이가 큰 위에, 실력으로 감히 겨눌 수가 없으므로, 불평의 기색조차 보이지 않고 고구려의 충실한 종으로 살아 간다.
 
207
어제는 양나라의 예하고, 오늘은 진나라의 예하고, 내일은 수나라의 예하 로 지내지 않을 수 없는 불안정한 주권 밑에, 한 인종으로서 고구려에 넘어 온 덕에 튼튼하게 '승상 부인'이라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국향이는, 자기가 연전에 진나라 피를 유지해 보겠다는 철없는 생각으로, 장량이는 젊은 이를 쫓아 승상 댁을 배반하고 뛰쳐나왔던 지난날의 철없는 행동을 돌아보아, 요행 그 뛰쳐나올 때 승상의 둘째 아이가 뱃속에 들어 있었던 일을 못 내 다행히 여겼다.
 
208
"승상님, 저는 기쁘옵니다. 승상님의 아내로, 바위 조약이의 어머니로, 고구려의 아낙으로 굳어진 제 지위는 반석 같습니다."
 
209
국향이는 승상을 우러르며 하소연하였다.
 
210
승상과 국향이가 고구려와 중국의 국경선인 방적 제일관(防狄第一關)에 이른 것은, 그 해도 다 간 연말에 가까운 때였다.
 
211
제일관 태수는 신을 거꾸로 신다시피 하면서 뛰어나와 승상을 맞았다.
 
212
"승상님, 먼 길 오시느라고 얼마나 고단하시옵니까?"
 
213
"태수도 방적에 얼마나 애를 쓰시오? 나 여기서 월동이나 할까 합니다."
 
214
이리하여 승상은 제일관에 닻을 주었다.
 
215
연전에 진나라의 한 망명 소녀로서 부왕의 글월 한 장을 지니고, 이곳에 한동안 신세진 일이 있는 국향이는 감회가 무량하였다.
 
216
"태수님, 안녕하시오니까?"
 
217
"태수는 눈을 들어 국향이를 우러러 보았다. 옛날 한 망명 소녀로서 지낸 국향이를 처음은 언뜻 못 알아 보았다.
 
218
"태수님께서 주신 돌궐 말은 참 잘 닫던걸요."
 
219
"아이, 부인 참 기승(騎乘)에 능하시던걸요. 그 돌궐 말은 좀체의 사람은 능히 타지 못했읍니다. 그 말이 부인의 앞에서는 머리 숙여 굴복을 했으니까요."
 
220
승상이 가로 들어왔다.
 
221
"참 태수와 내 아내와는 초면이 아니겠구료?"
 
222
"이 관에 달포를 묵어 가셨읍니다."
 
223
"참 부인께도 신세 많이 졌읍니다."
 
224
"참 태수, 이즈음 신라나 백제 아이들이 자주 안 보입니까?"
 
225
"왜 안 보여요? 지금 여기 억류된 아이도 십여 명이 되는가 봅니다."
 
226
"무론 수상한 아이들도 있겠지?"
 
227
"예사 사람은 그저 넘겨 주고요, 좀 수상한 아이들은 억류해 두었읍니 다."
 
228
"그 아이들을 내가 좀 보고 싶은데…."
 
229
"그리 하시지요. 좌우간 이리로 들어오세요. 승상님 묵으실 방이 준비되어 있읍니다."
 
230
장차 어떻게 되면 나랏님의 거둥을 볼 경우도 고려하여 꾸민 태수관이라, 승상이 묵을 만한 방은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다.
 
231
"장안의 내집에 못지않은걸. 훌륭한 방이외다. 장차 경우에 따라서는 일이 년 묵어 갈지도 알 수 없소이다. 공주, 어떻소? 일이 년 묵게 되면 어떡할 테요?"
 
232
승상은 머리를 돌려 국향이를 돌아보았다.
 
233
국향이는 승상을 맞으러 달려나온 태수 부인과 만나서 벌써 이야기에 꽃이 피어 있었다.
 
234
"공주, 혹은 나는 이 태수와 바둑이나 두며, 일이 년 여기서 놀다 갈지도 모르겠는데, 공주는 어떻게 할 테요?"
 
235
"승상님 저는 언제까지든 승상님 모시고 승상님 가시는 데 따라가겠습니다. 저도 일이 년 여기서 놀지요."
 
236
"부인도 이 근처 풍물이나 구경하며 승상님 계실 동안 그냥 계시지요."
 
237
"아이고 방도 넓기도 해라!"
 
238
오래간만에 내 집 같은 편안한 기분으로 제일관의 밤을 보내고, 아침도 느직이 깨어서 우선 곁의 아내를 돌아보았다.
 
239
"잘 잤소?"
 
240
"세상 모르고 잤읍니다. 이 조약이가 밤새 얼마나 보챘는지─."
 
241
"나도 정신없이 잤으니까 모르겠소마는 조약이도 잘 자던 모양이던데."
 
242
승상은 준비된 조반을 얼른 먹고 공청으로 나가 보았다. 공청에는 태수가 보이질 않았다.
 
243
거기 일보는 사람더러 물어 보니, 태수는 별실에서 무슨 문초를 하고 있다 한다.
 
244
승상이 별실 문을 열며 틈으로 보매, 태수는 한 스무 살 난 소년과 마주 앉아서 무슨 의논성 좋게 이야기하고 있다가,
 
245
"승상님, 벌써 기침해 계십니까?"
 
246
하면서 인사를 한다.
 
247
승상이라 하는 벼슬은 중국에도 있다. 그러나 이 동방에는 고구려에서 그 머리 재상 을지 공을 승상이라 부르는 밖에 승상이 없다. 태수와 마주 앉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던 소년은, 황황히 머리를 돌리며 외면하여 버렸다.
 
248
"벌써 무슨 공무를 보시오?"
 
249
"네이, 그 계림 아이를 좀…."
 
250
"그게 계림 애입니까?"
 
251
"그렇습니다."
 
252
승상은 허리를 굽혀 머리 돌려 외면하는 소년을 굽어 보았다.
 
253
"네가 계림 아이냐?"
 
254
"아니올시다. 소인은 하백의 외손이신 고주몽님의 나라 고구려 만성이 올시다."
 
255
"저 애는 그냥 자기는 고구려 만성이로라고 우기고 버팁니다."
 
256
태수가 곁에서 아뢰었다.
 
257
"이니올시다. 승상님께 직고하겠읍니다. 소인은 이번 낙양에 우연히 갔다가, 계림 동행을 만나 함께 오던 중이옵지만 소인은 훌륭한 고구려 소년입니다. 계림 아이란 소인께 억울합니다."
 
258
승상은 태수를 바라보았다.
 
259
"생긴 모습은 고구려 계통인데 ─ 말 사투리도 추호도 틀림없는 고구려 사투리고…."
 
260
"한 떼 계림 아이들이 지나가는 걸 붙든 모양인데, 이 녀석 하나는 꿋꿋하고 믿음성 있음직해서 문초해 보는데, 자기는 고구려 만성이로라고 그냥 버팁니다."
 
261
"태수, 이 애를 내게 주시오. 내가 알아서 좀 알아볼 터이니 ─."
 
262
"승상님께서 이런 일을 직접 하시겠읍니까?"
 
263
"하여간 내게 맡기시오. 얘, 일어나 나하고 저리로 가자."
 
264
"승상님은 고구려 대승상을지공이십니까?"
 
265
"오오, 내가 을지문덕이다."
 
266
"아이고 이 제일관에 붙들린 덕에 상공을 직접 뵈옵다니, 소인의 집안말대까지 영광으로 생각하옵니다."
 
267
"좌우간 나를 따라오너라."
 
268
승상은 저버저벅 그 별실을 나왔다. 태수는 경호라도 뒤에 달아 드리고자 경호를 찾으며 뒤따랐다.
 
269
승상은 그 계림 아이라는 인물을 데리고 승상 처소로 구획된 곳으로 돌아 왔다.
 
270
소위 계림 소년을 데리고 승상이승상 방으로 돌아오니, 이곳 시녀들이 한창 소제에 바쁘고 있었다.
 
271
"공주, 저 하인들을 데리고 좀 다른 데로 피해주시오. 내 이소년과 좀 이야기할 게 있는데."
 
272
하여 공주며 하인들을 모두 물리치고서 그 계림 소년과 마주 대좌하였다.
 
273
"네가 계림 아이냐?"
 
274
"아니올시다. 소인은 패수(浿水) 물에 멱감고 자란 고구려 아이올시다. 계림은 아직 가 보지도 못했읍니다."
 
275
"그래서?"
 
276
"소인은 어려서 유기(留記)를 읽습고 우리나라 역사를 짐작하옵자, 승상님 의 그 굳세신 정책이 짐작되었읍니다. 그래서 소인은 낙양으로 자리를 옮겨 수(隋)나라의 동정을 엿보고 있었읍니다. 그동안에 낙양서 만난 동무가 저 계림 아이들입니다. 계림 아이들은 분명 계림의 큰 집 아이들이 모양으로, 수제(隋帝)와도 무슨 연락이 있는 듯하였읍니다. 그러다가 이번 갑자기 제 나라로 돌아간답기 무슨 수제의 밀서라도 품고 가는 듯 하옵기로, 소인은 그 애들과 동행하여 돌아가는 듯이 하다가 그 밀서가 입수되면 승상님께 바치고자 함께 돌아가던 중이올시다."
 
277
수제의 밀서? 승상은 마음이 선뜻하였다. 수나라와 계림 혹은 백제의 사이 에 무슨 연락이 긴밀하게 맺어지고 계속되는 것은 짐작하는 바였다. 그런 일을 좀 조사해 보기 위하여 이곳에 일이 년간 묵어 가면서 알아보려던 것이었다.
 
278
수제가 계림국에 무슨 밀서가 있다 하면, 그것은 계림과 수의 공수 동맹에 관한 것이든가, 고구려 절벌에 힘을 아우르자는 종류의 것일 밖에는 없을 것이다.
 
279
"그래, 그 밀서라는 것은 혹 네가 본 일이 있느냐?"
 
280
"없읍니다. 그 밀서를 품은 듯한 아이는 재빨리 몸을 빼쳐서 지금쯤은 한 백여 리더 가 있을 것입니다."
 
281
"뭐? 그게 무슨 말이냐?"
 
282
"저희들이 붙들릴 때 그 밀서를 가진 듯한 소년은 한사코 몸을 빼쳐서 도망쳐 버렸읍니다."
 
283
"그걸 따라가 뺏아야겠구나."
 
284
"제가 말을 한 필 주세요. 제가 따라가서 빼앗아 오겠읍니다. 그 달아난 아이놈은 무술도 꽤 통한 듯하와, 좀체의 사람으로는 당하지 못하오리다."
 
285
승상은 당황한 기색으로 일어섰다. 그리고 이곳 태수를 불렀다.
 
286
"태수, 여기 좀 걸음 빠른 말을 한 마리 구할 수 없겠소?"
 
287
"있읍니다마는 말이 좀 거세어서 잘 다룰 사람이 없는 듯하옵니다."
 
288
"좌우간 좀 내어오오."
 
289
태수가 하인들에게 분부하니까, 하인들은 저편으로 가서 한 마리의 말을 네댓 명이 호위하여 가지고 나왔다.
 
290
"이 말은 어떻겠읍니까?"
 
291
"공주 ─ 공주!"
 
292
승상은 말의 감정인으로 공주를 불렀다.
 
293
국향이도 이자리에 불리어 나왔다.
 
294
"공주, 좀 어려운 심부름을 하나 해야겠는데…."
 
295
"무에 오니까?"
 
296
"공주, 저 말을 넉넉히 타겠소?"
 
297
"그 말쯤이야 타겠읍지만, 그게 제게 시키실 심부름이오니까?"
 
298
"아니, 저 말을 타고 달려가서 좀 붙들어 와야 할 사람이 있는데…."
 
299
"조약이는 어떻게 하고요?"
 
300
"참…."
 
301
승산은 머리를 숙였다.
 
302
"하루쯤은 어미 없이 못 지낼까?"
 
303
"고구려의 아낙은 젖먹이 갓난애를 떼어 버리고 한때도 떠날 수 없읍니 다."
 
304
"그 계림 아이놈을 좀 붙들어 와야 할 터인데…."
 
305
승상은 고구려 아이로라는 젊은이를 돌아다 보았다.
 
306
"자, 어떻게 하나?"
 
307
승상님, 제가 가서 잡아오리다."
 
308
"네가 능히 당하겠느냐?"
 
309
"그 놈도 화랑인가 낭도쯤인 모양이지만, 소인도 묘향선이 문하에서 십여 년 닦달한 놈이올시다."
 
310
"묘향선인? 너도 말 탈 줄 알겠구나."
 
311
소년은 승상께 가볍게 인사하고 말 있는 쪽을 향하여 무슨 기이한 부르짖음을 내었다.
 
312
지금껏 네 명의 장정에게 호위되어 버둥거리던 말이, 한 번 고함치매 네 명의 장정 손에서 벗어나와 소년께로 달려와서 소년의 앞에 고요히 꿇어 앉는다.
 
313
소년은 그 안장도 없는 말께 한 손대는 듯하더니 어느덧 마상에 올라 앉았다.
 
314
"응, 그만했으면 쓰겠다. 그럼 다녀오너라."
 
315
"승상님, 다녀오겠읍니다.
 
316
뭇 사람이 부르짖고 부르는 가운데서 말을 달려서 동쪽을 향하여 채찍을 쳤다.
 
317
"승상님, 무슨 일이오니까?"
 
318
국향이가 물었다.
 
319
"아니, 어제 문초처에서 도망친 계림 아이놈이 수제 견(隋帝 堅)이의 밀서를 품은 듯하단 말이지. 그래서 그걸 뺏아 오라고, 계림 주인에게 주는 밀서인 듯한데 무슨 사연이 있는지 좀 보아야겠어…."
 
320
"그래 저를 보내실 작정이셨어요?"
 
321
"공주밖에야 그런 중대한 일에 믿음직한 사람이 어디 있소?"
 
322
"지금 쫓아간 사람은 어때요?"
 
323
"모르겠소마는 자기 말로는 패수(浿水)에 멱감은 녀석이라 하니 ─ 내가 패수에 멱감은 탓인지는 모르지만, 패수에 멱감은 인생치고는 그래도 너무 허탕한 놈은 없단 말이지."
 
324
"견이의 밀서요? 그럼 제가 갈 걸 그랬어요."
 
325
"화랑도로 닦달한 계림 아이를 공주가 당할 듯하오?"
 
326
"고구려 아낙의 일편단심은 화랑도로 천만 번 닦달한 아이라도 겁을 안 냅니다. 수제 견이는 공주의 부황을 시(弑)한 역적이올시다. 중국 오천만 적자의 원수입니다. 그 견이의 밀서를 지닌 자이면 공주가 꼭 붙들고 싶었읍니다."
 
327
잠깐 다녀오마고 돌궐 말을 타고 나간 소년은 이틀 사흘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328
승상도 몹시 기다렸지만, 승상 부인인 국향 공주의 초조함도 또한 매우 컸다.
 
329
"그 녀석도 뺑소니친 모양입니다그려."
 
330
"공주는 장량 기다리듯 기다리는구료. 제 올 날이 있겠지."
 
331
"그 녀석 동행이 있다지요?"
 
332
"계림 아이 서넛이 동행이라고…."
 
333
"그것한테 알아보시지요?"
 
334
"글쎄…."
 
335
이리하여 승상은 미처 못 뛰고 붙들린 계림 애들을 불러 알아보았다.
 
336
달아난 녀석은 계림의 화랑이었다. 못 달아나고 붙들린 것은 그 화랑의 낭도들이었다.
 
337
낭도가 화랑의 일에 어찌 용훼를 하랴마는 무슨 꽤 귀중한 문건(文件)을 수제에게서 계림 임금께 전달하라고 맡은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인 모양이었다.
 
338
그러나 승상으로서 놀라고 감탄한 것은 계림 위정가의 정치 방침이었다.
 
339
아이들에게 어렸을 적부터 고구려에 대한 적개심과 반항심을 어린 뼈에 부어 넣도록 교육을 한다.
 
340
'울면 강구가 잡아간다.' '강구가 불알 짼다.' 하여 고구려에서는 강구라 하는 한 무형물을 강조하여, 생떼쓰는 아이며 못 된 아이들을 위협하는 수단으로 쓰거늘, 계림에서는, '요놈 고구려 놈 온다.' '고구려 놈이 불알 까먹는다.' '떼쓰면 고구려 놈한테 준다.' 하여 어려서부터 고구려에 대한 공포심과 적개심을 길러 주는 것이었다.
 
341
그래서, 계림 천지에서는 고구려라 하면 무섭고 잔학한 것으로 아주 인상 박혀 있다고 한다.
 
342
승상은 내심 깊이 감탄하였다. 같은 단군님을 조상으로 모신 계림과 부여 ─ 중간에 서로 갈라져서, 너는 계림인이라 나는 부여인이라, 서로 딴 나라를 이룩해 딴 살림을 한 지 일천여 년에, 오늘날 이처럼 원수가 된 까닭이 어디 있고 필요가 어디 있을까?
 
343
전하는 말에 의하건대, 고구려 광개통왕 시절에 계림이 왜종(倭種)에게 침 노를 받았을 때, 광개토왕 ─ 평안호태왕께서는 몸소 오만의 고구려 아이들을 이끌고 멀리 계림까지 가셔셔 그 왜종을 쫓아 내어 주었다 하지 않은가?
 
344
뿐만 아니라, 고구려는 계림을 지금껏 남같이 생각치 않고 꾸준히 그냥 그 뒤를 받들어 주거늘, 계림에서는 어린애 때부터 고구려에 대한 적개심과 방 항심을 배양하고 있는가? 이것은 한심하고 딱한 일이었다. 고구려의 목민책임자로 앉아 있는 을지 승상으로서는 다시 좀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었다.
 
345
이제부터라도 고구려에서 역시 계림처럼 아동 교육 방침을 바꾸어 놓으면, 고구려 아동들의 괄괄한 성미로서, 계림은 고구려인에게 씨도 남지 않도록 부숴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승상으로선 같은 단군님의 후예인 계림을 잔멸시킬 마음은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346
승상은 계림 아이들을 문초하다가, 계림서는 우는 애를 어르는 데도 고구려을 내세운다는 데 그만 어처구니 없어서 뒤를 계속하지 못하였다.
 
347
"계림서는 그렇듯 우리 고구려를 원수로 삼느냐?"
 
348
만약 그렇다 할진대, 고구려에서도 거기 대응할 방침을 세워야 할 것이다.
 
349
지금껏은 그래도 계림도 단군님의 한 후예로 여겨서 사사에 계림을 보호하고 아껴 왔거늘, 계림서는 소년 적부터 벌써 그런 교육을 받고 자라면, 장차 계림과 고구려는 종내 견원지간(犬猿之間)이 되겠구나!
 
350
지금 바야흐로 수나라와 맞서서 국력을 양성하고 국민 정신을 기르는 이 비상 시기에 집안끼리의 그런 내분이 있으면 이를 어찌하는가?
 
351
더우기 계림은 고구려를 원수로 보니만큼, 고구려의 원수 되는 수나라와 까지라도 친선하며, 수나라의 한 변방 되기라도 사양치 않을 형세다.
 
352
아아, 단군님의 성역을 더럽히는 구나! 고구려로서 만약 벌하고자 하면, 계림쯤은 아주 허수로이 없애 버릴 실력은 넉넉하다. 그리고 배달 종족 발흥을 위해서는 반역자인 계림 따위는 없애 버리는 것이 종족 만년 지계가 될 것이다.
 
353
계림도 계림이려니와, 백제의 괘씸함은 또한 어찌하랴! 백제는 그 시조(始組) 고온조가 벌써 우리 고구려 시조 동명성주와 지친의 사이였다.
 
354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를 원수로 잡아, 상주적(常駐的)으로 사신을 보 내어, 중국 서울에 상주하는 그 사신을 통하여 늘 고구려에게 반역하는 외교 정책을 쓰고 있다.
 
355
한 할아버지의 자손으로 고구려는 늘 그들(계림과 백제)을 보호하고 북돋아 주었거늘, 그들은 조국에 반역 행동을 취하여 왔다.
 
356
"너희 계림에서는 조국을 모르는 구나."
 
357
"조국이란 무에 오니까?"
 
358
"할아버지의 나라가 조국이니라."
 
359
"소인의…."
 
360
아비는 누구요, 할아비는 누구요, 하여 그들은 고구려와 계림은 조손(祖孫)의 관계가 없다고 그냥 주장하였다.
 
361
"그렇게 꼽아서 백 대 가까지만 세어 올라가 보아라. 너희도 무두 부여에서 갈려 나간 아이들이니라."
 
362
"소인의 할아버지가 아직 살아 있사온데, 그런 말씀은 들은 일이 없읍니 다. 승상님!"
 
363
"네 할아버지는 금년 춘추가 어떻게 되시는냐?"
 
364
"예순셋으로 짐작하옵니다."
 
365
"노인도 육십여 년 헛수고하였군. 불초한 자손 두시고 ─ 너희들 여기서 고구려 교육을 좀 받고 가거라. 계림 교육과는 다르다."
 
366
이리하여 승상은 여기서 붙든 계림 소년들에게 성군 단군님께서 펴져서 온 동방에 가득히 찬 배달 종족의 거룩한 역사를 가르쳐 주려 하였다. 비록 서 너 아이에 지나지 못하지만, 그들만이라도 거룩한 민족의 역사를 알고 고구려의 사상을 알면, 차차 그것이 전파될 날을 예기하고서 ─ 승상의 분부로 이 제일관에는 한 개 서당이 즉시로 설치되었다.
 
367
삼국 아이, 중국 아이들의 교육을 목표로 한 서당으로서, 사오십 명의 소년을 모아 넣었다.
 
368
고구려의 건국 이념이며, 국가 운명의 목표인 온 동방 민족을 한 나라로 모으려는 고구려 사상을, 이 고구려인이 아닌 아이들에게 부어 넣어 주려는 목표에서였다.
 
369
"여기 왜갈보는 없소?"
 
370
"왜 없으리까? 수십 명 잘 될 줄로 믿습니다."
 
371
대체 왜종은 아내 아닌 여인을 돈 주고 하룻밤씩 사서, 사내의 옹색을 펴는 풍습이 예로부터 있어서, 고구려 지역 안에도 무수히 왜갈보 동네가 있던 것이었다.
 
372
"대체 사내 녀석들이란 계집에게 마음이 들면 공부는 머리에 들어가지 않는 법이건든. 그 서당 아이들에게도 왜갈보를 한 마리씩 떼어 맡기지? 얼굴 판대기 곱살한 것도 있소?"
 
373
"소인은 가 본 일은 없지만, 말로 듣자면 꽤 씀직한 것도 있나 봅니다."
 
374
"태수도 좀 오입을 해보시지?"
 
375
"소인은 집에 늙은 아내가 있읍니다."
 
376
태수는 좀 오입을 해보시지?"
 
377
"소인은 집에 늙은 아내가 있읍니다."
 
378
태수는 오입이란 천부당한 말씀이란 듯이 대답하였다.
 
379
이리하여 제일관에는 외국 청년들을 목표로 한 서당이 개설 되었다. 그리고 서당의 성년 된 청년들로서 객지의 옹색한 자들을 위해서는 왜갈보로서 한 명씩의 아내가 배분되었다.
 
380
제일관 관문을 통과하려던 몇 명의 계림 아이들도 이 서당에 수용하기로 되었다.
 
381
거기서 가르치는 바는 주로 고구려 건국의 역사였다. 단군님에서 시작되어 부여로 흘러내려오던 이 종족의 혈통이 어떻게 하여 삼한(三韓)으로 갈려 내려가서 백제며 계림, 가락 등이 생겼으며, 이 단군 후예가 모두 모이려면 어떤 방침 아래서 통합되어야 할지, 이 문제가 주요한 교수 재료였다.
 
382
이곳 검문을 피하여 도망치던 한 계림 소년을 쫓아가던 고구려 소년은, 쫓아간 지 반 삭이나 지나서, 그 놈마저 뺑소니쳤나 보다고 모두들 단념케 된 뒤에야 비로소 제일관으로 돌아왔다.
 
383
"승상님, 이제야 왔읍니다,"
 
384
"요녀석, 너도 도망친 줄 알았구나."
 
385
"소인이 무슨 죄가 있어서 도망치겠읍니까?"
 
386
"그래 계림 아이놈은 붙들어 왔느냐?"
 
387
"네이, 그 놈 때문에 이렇듯 지체가 되었읍니다."
 
388
"어디서 붙들었느냐?"
 
389
"여기서 한 이백 리쯤 가서 붙들었는데요, 영 어디 승상님께 도로 오려야지요. 그래서 묘향선인께 전수받은 선술로 좀 두들겨 잡아왔읍니다."
 
390
"화랑도로 대항치 않더냐?"
 
391
"좀 꿈틀거립더이다마는 묘향선인께 받은 선술에야 제가 감히 대항하겠읍니까?"
 
392
"그래, 어디 있느냐, 그 녀석은?"
 
393
"저기 밖에 있읍니다."
 
394
"이리 불러 들여라."
 
395
계림 소년은 이 방으로 끌려 들어왔다. 보매 준수한 모습이었다.
 
396
"네가 계림 진골(眞骨)집 자손이냐?"
 
397
"말씀을 약간 고쳐 주십시오. 저는 계림 소년을 다시금 굽어보았다.
 
398
"자네라면 어떨꼬? 사십 장년이니 장유유서라는 것도 있어야겠지?
 
399
더우기 내 신분이 이 나라의 승상이니 어린 자네 따위를 자네라 불러도 무관하겠지?"
 
400
"승상이시라면을지공이시오니까?"
 
401
소년은 눈을 들어 숭상을 한참 동안 우러러보았다.
 
402
"노인이 강구를 부리신다는 을지 승상님이시오니까?"
 
403
"강구를 부려? 내가 ─ 을지문덕이?"
 
404
"고구려에서는 외국인을 붙들면 강구에게 내어주어 바작바작 깨물어 먹인다고 들었읍니다."
 
405
"그래서 도망치댔구나?"
 
406
"……."
 
407
"고구려의 아이들은 강구를 만나면, 그 강구를 잡아서 부려 먹는다.
 
408
계림 아이처럼 강구를 피해 다니지 않는다. 계림화랑은 강구를 무서워 하는구나?"
 
409
"이니올시다. 그러나 고구려 강구는 계림 아이 고기를 좋아한다고 들었읍니다."
 
410
어려서부터 이런 교육을 시켜서 고구려에 대한 적개심을 배양하는 모양이었다.
 
411
"여보게, 잘 듣게, 고구려의 강구는 말갈 아이나 되놈의 아이나 잡아먹지, 단군님의 자손은 결코 해치지 않는다네, 그래서 고구려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다녀 보았지만, 그래 강구를 몇 번이나 만났는가?"
 
412
"요일전에 꼭 한 마리 만났읍니다."
 
413
"자네는 이번 낙양까지 가서 수제도 만나 보고 왔는데, 무슨 전갈이라도 없던가? 전갈 글월이라도 ─."
 
414
"없읍니다."
 
415
이게 제 짐이올시다고 내놓은 그 손년의 짐이란 아무것도 없고 중국서 뜬 종이 한 권이 있을 뿐이었다.
 
416
"이게 수나라 다녀오는 기념이로구나."
 
417
하면서 승상은 그 종이를 펴서 찬찬히 주의하여 보고서 한편으로 치워버렸다.
 
418
몸을 뒤지고 옷깃 속을 모두 뒤져 보았으나, 아무것도 별다른 물건이 없었다.
 
419
"이 종이는 수날 물건이라 고구려에서는 금제품이니 몰수한다."
 
420
"노인님, 수나라 만여 리 다녀오는 기념물이오니, 단 한 장만이라도 소인께 내어 주십시오."
 
421
"인정상 그럴듯하다. 한 장은 용서할 떠이니 네가 골라 내거라."
 
422
소년은 종이권에서 한 장을 골라 내어 따로 치웠다.
 
423
승상이 조사해 보매, 아주 별다른 것이 아니므로 그냥 그 소년에게 내어 주었다.
 
424
승상은 그 계림 화랑이라는 소년도 새로 설치한 서당에 집어넣기로 하였다.
 
425
그러나 수제의 무슨 밀서를 지닌 듯한 혐의를 두었는데, 그것이 발견되지 않아서 온통 옷을 벗기고 이곳의 제복을 바꾸어 입히고 그 벗은 옷을 조사해 보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나오는 것이 없었다.
 
426
그래서 제 물건을 도로 내어주고 서당에 수용하였다.
 
427
그 서당에서 가르치는 학문이란 별다른 것이 없고 전혀 고구려학이었다.
 
428
단군님이 주인 없이 유랑하는 사람을 통 모아서 태고에 한 나라를 이룩하시고, 그것이 중국 족속의 침략 때문에 허리를 끊겨, 남쪽으로 삼한이 생기고 북으로 부여가 생긴, 이 종족 발기의 근원으로 시작하여, 이렇듯 두 토막이 된 이 종족을 다시금 규합하기 위하여 고구려나라를 이룩하고서, 다시 나아가서는 한 아드님은 남쪽으로 보내서 백제국을 세우고, 그러자 동남쪽 끝에서는 계림과 가락이 또 제 나라를 따로 세워서, 지금 고구려 계림, 백제, 세나라가 정립 형세이지만 단군님 시절과 매한 가지로 한 내 나라로 통합해 보려고 노력하는 중이라는, 고구려의 국시를 가르치는 ─ 말하자면 이 민족에게 고구려의 방침을 가르쳐서, 너희도 딴 생각 버리고 고구려 통합 운동에 돌아오라는 취지를 알리는 교육이었다. 이 고구려 민족과 중국의 갈 등도 가르쳤다.
 
429
이 사람의 세계에서 자기네만이 주인이라는 생각을 가진 중국인은, 중국인 도 아니 고구려의 발흥과 웅대를 꺼리어서, 유사 이래 고구려를 꺾으려는 침략의 손이 뻗은 것은 부지기수였으나, 중국의 힘이 도저히 고구려를 당치 못하여 할 수 없이 참고 지내왔지만, 지금 수나라가 중국민족을 통합한 그 여세로서 고구려를 둘러엎으려는 공작이 시작될 터이니, 고구려인 된 자 정신 바짝 차려서 외구의 침략에 대항하여야 할 것이다. 여기는 단군님의 후 손된 자, 계림이든 백제든, 모두 힘을 합하여 단군님 후손 방위의 큰 역사 에 나서야 할 것이다. 이것은 계림이라 백제라 작은 것을 다 통일하는 것이 아니라, 단군님 종족 사회의 큰 문제다. 그러매, 장차 고구려가 수군(隋軍)의 침략을 받는 날에는, 계림도 백제도 땅을 들어 이 수군을 두들겨 주어야 할 것이다.
 
430
대략 이런 방침의 교육이었다.
 
431
그 교육을 받는 동안, 그 계림 화랑이라는 소년은, 누차 승상께 무슨 말을 할 듯이 움찔거렸다.
 
432
"자네 나한테 무슨 할 말이 있는가?"
 
433
"네이, 좀 조용히…."
 
434
"그럼 저 방으로 가세."
 
435
이리하여 승상은 그 소년을 딴 방으로 데리고 갔다.
 
436
"무슨 말인가?"
 
437
"네이, 소인께 천자께서 계림 임금께 주시는 글이 있읍니다."
 
438
이거야말로 승상이 찾고자 하던 물건이었다.
 
439
"그게 어디 있는가?"
 
440
"소인께 수나라서 만든 종이 한 권이 있는데 그 가운데 끼여 있읍니다."
 
441
이리하여 그 소년이 따로 골라 내었던 한 장 종이가 앞에 등대되었다.
 
442
그것은 전일 승상도 자세히 검분한 일이 있는 수나라 종이 한 장이었다.
 
443
"이게 수제의 글월이란 말인가?"
 
444
"네이, 은혈로 쓴 글월이옵니다."
 
445
당시 국제 정세가 미묘한 시절이라, 각 나라와 나라 사이의 비밀한 글월은, 비밀을 감추기 위하여 숨은 글씨로 쓰는 일이 흔히 있었다.
 
446
"은혈은 백반인가, 소금인가?"
 
447
"백반이올시다. 물에 감그면 글씨가 보입니다."
 
448
"이렇듯 숨은 글씨의 글월까지 왕래할 필요가 있을까?"
 
449
승상은 하인에게 분부하여 냉수를 대야에 내어오게 하였다. 그리고 내어온 대야 물에 그 편지를 잘 펴서 한끝부터 차례로 담가 갔다. 담그는 데 따라서, 수나라 황제가 계림 주인에게 보낸 비밀 글월이 차례로 나타났다.
 
450
그 글에 의지하건대, 짐은 어느 달 며칠 날 몇 만 대군을 친솔하고 고구려를 칠 터이니, 너는 남쪽에서 고구려 어디를 엄습하여, 고구려로 하여금 남북으로 적을 받아 오금을 못 쓰도록 하여라, 하는 뜻이 꽤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451
"수제와의 서신 교환은 있었는가?"
 
452
"늘 있었읍니다."
 
453
"여기는 고구려 승상의 생명을 도모하자는 뜻의 글이 있는 모양인데, 고구려 승상이란 이 나를 가리킴인가?"
 
454
"네이, 상공이 계신 동안은 고구려를 침공키 힘들리라는 것이 수인의 고통된 의견이옵니다."
 
455
"그럼, 자네가 한 번 내 목숨을 도모해 볼 생각은 없는가?"
 
456
"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은 없읍니다."
 
457
"왜? 한 번 해보지?"
 
458
"승상님 소인도 단군님 후예이옵니다. 단군님 후예를 위해서 애쓰시는 우 리 승상님께 어찌 감히 딴 생각을 먹으오리까?"
 
459
"계림에 자네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일만 명만 된다면 단군님 후손만 만세 할걸세."
 
460
"소인이 계림에 돌아가거든 그렇게 힘쓰오리다."
 
461
"자네는 수제 견이를 만나 보았다니, 견이의 인품이 어떻던가?"
 
462
"만용과 욕심이 남에게 곱 이상 되는 쉽잖은 영걸이옵니다."
 
463
"그만하기에 오호십육군을 통합을 했지."
 
464
"게다가 색을 즐겨해서 후궁이 한 사천여 명 되나 봅니다."
 
465
"그 아들 광이도 보았나?"
 
466
"광이야말로 장차 말썽꾸러기인가고 보았읍니다."
 
467
"그래?"
 
468
"색에도 야심에도 부황의 곱이 되는 인물이 아닐까고 보았읍니다."
 
469
"자네 눈에 나는 어떤고?"
 
470
"승상님은 색에도 야심에도 아무것도 모르는, 한 천치 비슷한 사람이 아닐까고 소인은 생각하옵니다."
 
471
"바로 잘 보았네."
 
472
조약이의 돐도 제일관에서 지냈다. 일찌기 요동 어떤 산촌에서 조약을 낳고, 그 뒤 승상과 함께 순시의 길을 떠날 때에, 여막 주인 마누라는 조약의 돐은 여기서 지내 달라고 간절한 부탁을 받은 국향이는, 마음에 그때의 주인 마누라가 저절로 생각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473
"그때 주인 아주머니는 조약이의 돐은 꼭 여기서 지내 달라고 부탁하였더니…."
 
474
"참, 그 마님도 그때 태중이더니, 뭐나 낳았는지?"
 
475
"그 아주머니 말씀이 그건 장 서방 ─ 장량이의 아이라더군요."
 
476
"그 장가놈이 그 마나님께 붙었소?"
 
477
"그런가 보아요."
 
478
"흉한 놈에 흉한 마나님이지! 공주께 아이가 마나님께 헛들었는가 보오."
 
479
"승상님도!"
 
480
국향이는 뾰로통해지며 외면하여 버렸다.
 
481
조약이도 돐이 되어 차차 젖도 덜 먹고 하여, 국향이는 얼굴이 보얗게 아주 혹할이만큼 예쁘게 되었다.
 
482
"그 마나님이 장가 녀석의 아이를 뱄다 하면 사람하고 되놈하고의 반종이겠구료!"
 
483
이것도 또한 국향이의 가슴에 걸리는 말이었다. 국향이의 양심에는 자기도 또한 되년이거늘, 그렇다 하면 저 바위도 조약이도 되년과의 반종에 틀림이 없었다.
 
484
"승상님은 왜 그리 독설이 심하시어?"
 
485
국향이는 외면한 채 머리를 숙였다.
 
486
자기가 지금껏 승상께 바친 적심은 하늘이 아시는 바이어늘, 그것도 되년 의 한 낮은 정에 지나지 못한다고 인정받으면 국향이에게는 억울한 일이었다.
 
487
"공주, 노여웠소?"
 
488
승상은 이윽고 공주를 돌아보면서 은근히 음성으로 말을 걸었다.
 
489
"노여웠으면 내 공주께 절해서 사죄하지."
 
490
하고는 거기에 장난하는 조약이를 굽어보았다.
 
491
"요놈, 조약아! 아빠가 이제 엄마께 사죄의 절을 할 테니 구경해라.
 
492
자, 공주! 고구려 천만 만성에게 절 받던 승상 을지문덕이 제 마누라 국향 공주께 하는 절을 받으시오."
 
493
하면서 일어나면서 너붓이 절을 하였다.
 
494
"아이, 승상님도 망령되이 이게 무엇입니까?
 
495
"동이(東夷 )의 재상이 되나라 공주께 노염을 풉시사 하는 절 이외다."
 
496
"되나라 계집애가 어디 감히 승상님께 노염이 무슨 노염이에요? 승상님 이 아이의 어미를 가긍히 보아 주세요."
 
497
승상은 그의 유난히 기다란 팔을 펼쳤다. 그때 국향이는 홱 몸을 승상께로 돌렸다.
 
498
그리하여 승상의 벌린 품 안으로 국향이는 말려들어갔다.
 
499
"공주!"
 
500
"승상님!"
 
501
"공주, 우리 아이 또 하나 만들어 볼까?"
 
502
"이따가 밤에요."
 
503
"노염을 풀었소?"
 
504
"되계집이 승상님께 노염이 무슨 노염이에요?"
 
505
"공주가 늙은 몸 내게는 과히 예뻐!"
【원문】승상의 순시(巡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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