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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지문덕 ◈
◇ 진희(陳姬) '국향(菊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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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
김동인
1
일찌기 을지 대신께 바치려고 산삼을 향산서 캐다가 을지 대신을 만나서, 그 길로 정승을 따라온 연파대는 이내 승상 댁 한 방에 우거해 있었다.
 
2
천하의 형편이 좀 이상야릇해 가므로, 서울로 돌아와서는 아침 일찌기 입궐하고 저녁 늦게야 귀택하며, 며칠 지나서 임금의 옥체 미령하여 승상이 집에 들어앉을 시간이 거의 없으므로, 파대는 승상께 뵈올 기회가 태무하였다.
 
3
승상 댁에 비치해 있는 책을 보며 소일하였다. 그 책은 대개가 한적(漢籍) 이었다. 한토에서 한인이 저술하여 발간된 책이었지만, 한토라는 데는 끊임 없는 역왕 난리(易王亂離)와 혁명 소동에, 저술의 본고장인 한토에 전하는 자 쉽지 않고, 동방 낙원 고구려에 도리어 곱다랗게 보존되어 있어서, 본고 향 한토에서는 이름까지 잃은 희귀서(稀貴書)가 을지 승상댁 서고(書庫)에 가득히 들어 있었다.
 
4
심심하기 때문에 소일로 읽기 시작한 것이 어느덧 거기 빠졌다. 빠져서 탐독하노라면 책이란 것은 또한 읽느니만큼 소득이 컸다.
 
5
이십 미만의 한창 총명한 나이의 파대였다. 한 번 읽으면 좀체 잊히지 않았다. 부쩍부쩍 늘어가는 자기의 지식에 스스로 경이의 눈을 던지면서, 파 대는 욕심 사납게도 읽고 또 읽었다.
 
6
서고와 제 방에 왕복하는 이외에는, 일체로밖에 나다니지 않고 독서에 미쳤다.
 
7
승상의 존재까지 잊었다. 승상도 파대의 존재를 잊었는지, 집에 데려다 둔 뿐 아무 참견이 없었다.
 
8
파대가 소리골서 을지 승상을 따라 서울로 올라온 지 거의 반 년이나 지나서 이듬해(영양왕 제이년) 정월이었다.
 
9
글읽기에 피곤한 허리를 좀 펴느라고 파대는 뜰에 나섰다.
 
10
하늘을 우러르니 북국 특유의 맑게 갠 하늘에는 바람 한 점 없는 양하여, 움직임 없는 고요하고 찬 공기는 도리어 일종의 쾌감을 준다.
 
11
파대는 머리를 젖혀 하늘을 향하고 상쾌한 한기(寒氣)를 즐기며 한참을 그 자세대로 서 있었다. 문득 두런두런 하는 소리에 머리를 들고 보니, 지금 막 대궐에서 돌아오는 을지 승상의 수레가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 모양이었다. 승상 댁에 우거해 있으면서도 승상을 뵈옵기 진실로 오래간만이었다.
 
12
그렇게도 사모하고 존경하는 승상을 오래간만에 뵈오매 참으로 반가왔다.
 
13
좀 비켜 서서 수레가 가까이 들어와 승상이 수레에서 내리기를 기다렸다.
 
14
수레가 파대의 앞을 지나서 청방 뜰 아래까지 이르러, 승상이 바야흐로 수레에서 내릴 때에, 파대는 빨리 그 앞에 가서 국궁하였다.
 
15
"승상님, 오래간만에 뵈옵습니다."
 
16
을지 승상은 고개를 돌려 파대를 보았다. 낯익은 젊은이지만 언뜻 누군지 생각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17
그 눈치에 파대가 앞질러 스스로 자기가 누구임을 아뢰었다.
 
18
"아! 이게 누구요? 언제 올라왔소?"
 
19
"저는 상년에 승상을 따라 올라와서 지금껏 승상 댁에 숙식하고 있었읍니 다."
 
20
"그렇소? 한 뜰안에서 살면서도 모르고 지냈군! 좌우간 들어오오."
 
21
파대는 승상을 따라 청방 안으로 들어갔다.
 
22
"나는 하도 바쁜 몸이라, 내 집에 객을 두고도 전연 무관심했군. 과히 나쁘게 생각 마오."
 
23
"아이, 대인은… 대인, 보잘것 없는 소동이올시다. 해라를 하세요. 그렇 지 않으면 저는- 당초에…."
 
24
마치 소녀처럼 얼굴이 다홍빛이 되었다.
 
25
"허허- 남의 사람을 해라야 할 수 있나? 그렇게 어렵다면 허게를 하지."
 
26
"네, 제발…."
 
27
평생을 두고 사모하던 어른을 이렇게 가까이 모시고 직접 그이와 수작을 하니 파대는 다만 황공할 따름이었다.
 
28
"동무도 없이, 게다가 내가 주인 구실을 못했으니, 그동안 퍽 갑갑했겠군?"
 
29
"네, 대인 댁 많은 책을 여쭈어 보지도 않고 꺼내다 읽느라고 적적한 줄은 모르고 지냈읍니다."
 
30
"거 기특하지! 젊은이가 놀든가 장난할 생각을 않고 공부를 한단- 책이란 무슨 책이든 해롭지 않은 게니…."
 
31
"하도 읽을 욕심에 급하와 대인께 여쭈어 보지도 않고…"
 
32
"천만에! 책이란 읽으라고 생긴 게지 서고에 잠재우라고 생긴 건 아니니까, 읽을 사람이 있으면 읽을 게지. 한창 놀고 싶을 나이에 공부에 빠진담!
 
33
기특하지. 참, 젊은이가 그 정성으로 구한 산삼, 나랏님의…."
 
34
왕의 일을 말할 때는 으례 승상은 머리를 깊이 숙이는 것이었다.
 
35
"탈이 중하시어 나랏님께 바쳤네. 내가 먹은 것보다 더 흡족하겠지?"
 
36
"삼의 효험은 보셨읍니까?"
 
37
"하늘이 부르시는데 삼 따위가 무슨 보람을 내겠나? 삼의 보람은 못 보셨지만 마음으로 흡족해 하셨지."
 
38
파대는 머리가 수그러졌다. 국왕의 승하고 모르고 지낸 불충의 꾸지람이 가슴을 눌렀다. 아무리 공부에 열중했다기로 이 나라 신자된 도리로 나랏님의 승하도 모르고 지내단, 이런 불충이 어디에 있으랴? 승상은 고요히 말을 계속하였다.
 
39
"적자 된 우리로서야 애통망극한 일이지만, 우리 전 나랏님은 만왕의 왕으로서 천하 만방을 눈 아래 굽어보시며 일생을 지내셨네. 보수가 고희(古稀)를 지내시어 명민하신 태자께 위를 부탁하시고, 유감없이 떠나셨으니 한 되는 일은 조금도 없네."
 
40
물론 승상으로서는 그 임금을 임종 때까지 모시고 그 뒤 고이고이 안장(安葬)까지 해 모셨으니 한 되는 일이 없지만, 파대는 이 나라 만성으로, 더우기 같은 서울 안에 있으면서, 독서에 혹하여 임금의 승하까지 몰랐다는 불충에 대한 가책 때문에, 충성의 덩어리인 승상의 앞에 감히 머리도 들 수 없었다.
 
41
이치로 따지자면 대살림 댁 한편 방에 있는 자기에게 국상 같은 중대한 일도 알려 주지 않은 승상을 나무람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지만, 파대에게 있어서는 을지 승상은 다만 신성한 존재일 따름이지 원망이나 나무람의 대상이 아니었다.
 
42
가까이 모시어 본 일은 없었다. 용안조차 우러른 일이 없었다. 따라서 정 으로는 관심되는 바 없었지만, 이 나라 만성에게 전통적으로 새겨져 있는 임금께 대한 충성의 탓으로, 파대는 무거운 자책감을 느낀 것이었다.
 
43
무거운 마음으로 자기 방에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망연히 앉아 있었다.
 
44
돌아와서 망연히 앉아 있는 파대의 귀에, 문득 이상한 음률이 들렸다.
 
45
무거운 마음으로 저녁을 끝낸 방금 뒤였다. 귀를 기울이니 거문고소리- 무엇을 사뢰는 듯 조르는 듯, 밤하늘에 울리어 나가는 그 음향은,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마음에 커다란 오뇌를 품은 사람이 몇 가닥 줄로써 가슴의 오뇌를 하소연하는 애끊는 음조에 틀림이 없었다.
 
46
자기의 오뇌를 따로 가지고 있는 파대는 처음에는 무심히 들었다. 그러나 무심히 듣고 있는 동안 부득부득 가슴에 사무쳤다. 그 음조는 '이런 것이라'는 격식과 틀에 맞는 종류의 것이 아니고, 탄자(彈者) 스스로가 자기의 가슴에 사무친 호소를 거문고를 통하여 사뢰는 진실한 음조였다. 매한가지로 가슴에 큰 수심을 가지고 있는 파대에게는 절절이 심현에 울리는 음조였다. 무심히 귀를 기울이다가 어느덧 공명하였다. 자기로도 무슨 때문인지 모르면서 몸을 일으켰다. 방을 나서서 뜰로 내려섰다. 얼굴과 온몸에 끼얹는 밤의 냉기에 뜻하지 않고 몸서리치면서, 파대는 그 음률의 날아오는 방향을 타진해 보고 그쪽으로 차차 발을 옮겼다.
 
47
캄캄한 그믐이었다. 백만을 자랑하는 대고구려 서울 장안경(長安京)도 겨울의 밤은 죽은 듯이 고요하였다.
 
48
국상 중의 장안경은 이 나라 만성의 왕실에 대한 충성을 상징하는 무한한 정숙이 이을 따름이었다.
 
49
파대는 그냥 들려오는 음률을 향도삼아 차차 뒤로 돌아갔다.
 
50
이 댁에 몸을 붙인 지 반 년이 넘었지만 지리를 전연 모르는 파대는, 오직 그 음률만을 향도삼아 어딘지도 모르는 모퉁이를 몇 개 돌았다. 그리고 이 댁 후당 쪽으로 들어섰다.
 
51
또 한 모퉁이를 돌아서니 비로소 불빛이 보였다. 캄캄한 가운데를 뚫고 오던 파대는, 맞은편에 홀연히 나타난 광명에 한순간 멈칫 섰다.
 
52
맞은편에는 별당 한 채가 있었다. 꼭꼭 닫힌 창 안에 휘황하게 켠 불이 창을 통하여 이 근처 일대를 환하게 비치는 것이었다. 그리고 거문고의 음률은 그 방에서 울리는 것이 분명하였다.
 
53
음률의 유혹에 끌려서 여기까지 무심히 오기는 하였지만, 무슨 목적이나 목표가 없는 파대는 거기 우두커니 서 버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54
서는 것과 동시에 파대의 머리에는 여러 가지의 호기심이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55
그 음조는 '이런 곡조는 이렇게 뜯는다'는 능한 솜씨뿐 아니라, 탄주자 의 마음속 깊이 박혀 있는 오뇌를 진정으로 사뢰는 하소연이니, 그도 정녕 무슨 오뇌를 마음속에 품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면 탄주자는 사내일까, 여인일까?
 
56
그 섬세한 솜씨로 보아 탄주자는 분명 여인으로 보았다. 여인일진댄 젊은 일까? 노파일까? 또는 중년일까?
 
57
그 음조의 박력과 탄력으로 보아서, 세상 만사에 피곤한 노파로 보기보다 중년이나 젊은이로 보는 것이 지당하다. '어떤''젊은''여인'일까? 의문과 함께 일어나는 그 호기심은, 파대로 하여금 그냥 못박은 듯이 그 자리에 서 있게 하였다.
 
58
언제부터 시작된 거문고인지 언제까지 계속될 거문고인지, 방 안의 거문고 는 그냥 계속되었다.
 
59
그 방 밖에도 몇 채 후당이 우뚝우뚝 서 있는 모양이지만, 다른 방에는 불빛도 인기척도 없고, 오직 그 한 방에서 거문고 소리만이 울려 나오는 것이었다.
 
60
그 타는 곡조가 무슨 곡조인지는 파대는 모른다. 그러나 그 곡조는 탄주자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곡조다. 젊은 파대의 마음에 푹푹 들어박히는 호소다.
 
61
이로써 탄주자는 가슴에 무슨 큰 오뇌를 품은 자일시 분명하였다. 가슴에 오뇌를 품은 '젊은 아낙'-.
 
62
누구일까? 대신 댁 누구일까?
 
63
문득 다른 음률이 한 가지 더 섞이었다. 사람의 육성(肉聲)으로서의 노래였다.
 
64
지금껏 거무고로만 하소연하던 음률의 주인은 육성까지 섞어서 부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65
여성(女聲)이었다. 그리고 탄력 많은 젊은 여성이었다.
 
66
그런데 여기 파대의 호기심과 의혹을 더 크게 한 것은, 그 육성으로 부르는 노래의 가사(歌詞)가 부여 계통의 말이 아니고 한어인 듯싶은 것이다.
 
67
한어를 모르는 파대라 분명한어라고 단정키는 힘들었지만, 그 노래의 악센트나 발음이나 청이 분명한어 계통이었다.
 
68
(한어? 한녀-漢女?) 알지 못하는 방언이라 가사의 뜻은 알아들을 바이 없지만, 거문고와 어울 려서 들려 오는 그 육성은 오장을 끊는 듯한 무슨 호소일시 분명하였다.
 
69
(공녀-貢女일까? 을지 승상의 애첩일까?) 파대는 머리를 기울였다.
 
70
한토에 생기는 뭇 제왕들이 고구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고구려 왕께 무슨 높은 벼슬과 함께 값나가는 보물을 보내는 전례가 있는 것은 파대도 아는 바였다.
 
71
그러면 저 노래부르는 한녀는 저곳의 어느 천자가 고구려 대신 을지공에게 그 환심을 사고자 보낸 한희(漢姬)일까?
 
72
저 여인은 을지 승상의 한 애첩일까? 외국 여인을 애첩으로 두었다는 일종의 분개심이 을지 대신께 일어나려는 것을 파대는 힘있게 눌렀다.
 
73
을지문덕은 파대에게 있어서는 다만 신성한 존재였다. 그 신성한 존재에 대하여 신성치 못한 현실이 보이려 할 때에, 파대는 마음에 저절로 일어나려는 불쾌감을 금할 수가 없었다.
 
74
눈앞의 현재한 외국의 젊은 여인을 보매, 그런 것이 있는 이상은 을지 승 상의 신성이 얼마간 깎일 것이로되, 그래도 승상만은 절대로 신성시하고 싶은 파대는, 이 불쾌한 현실에 직면하여, 자기가 여기까지 나왔던 것을 후회하였다. 그리고 내 방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발을 떼려 하였다.
 
75
그때 후당 안에서 들려 오던 거문고소리가 문득 그쳤다. 그리고 거문고를 약간 밀어 놓은 듯한 소리가 들렸다.
 
76
"아-아!"
 
77
그것은 노래부르던 음성의 탄식성이었다.
 
78
"이젠 다 뜯으셨어요?"
 
79
후당 안에는 두 명 이상의 여인이 있는 양하여, 노래부르던 음성과는 다른 음성이 하는 말이었다.
 
80
"아유 곤하다! 이젠 자련다."
 
81
분명 고구려 발음이 약간 서투른 외국 여인의 말이었다.
 
82
"곤하시구말구요! 언제부터 시라구-금침하리까?"
 
83
"승상도 주무시는지?"
 
84
"승상께서는 자정이 지나서야 주무시니까 아직 안 주무실걸요."
 
85
"그럼 나도 더 앉아 있으련다. 승상께서도 그냥 기침해 계신데, 나 같은 것이 벌써 다리 뻗고 자서야 되겠니?"
 
86
그 뒤에는 기다란 한숨- 적적하고도 진실미를 띤 한숨이었다.
 
87
그 한숨소리에 동정이 간 듯한 시녀의 소리가 뒤를 이어났다.
 
88
"참 아씨도 적적하시겠어요. 젊으신 신세로 부모님 슬하를 떠나 만리 밖 타국에- 쇤네 같으면 가슴 답답해 탁 죽겠는걸요."
 
89
"답답하거든 장지문이나 좀 열어라."
 
90
"창문 연다고 가슴 답답한 것이 좀 나으리까?"
 
91
"하여간 좀 열어라."
 
92
그 소리에 응하여 밖으로 향한 장지문이 더르륵 열렸다.
 
93
안에서 흘러 나오는 불빛을 피해서 약간 비켜서며 파대는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94
광명한 촛불 화광 아래 드러난 방 안의 광경은 파대의 앞에 전개되었다.
 
95
시녀와 마주 거문고를 약간 밀어 놓고 앉아 있는 색시는 분명한녀였다.
 
96
나이는 십 칠팔-.
 
97
세도를 자랑하는 한 토의 어느 천자가 고구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고르고 골라서 보낸 선물이라고 볼 수 있을 만한 희대의 미녀였다. 그 눈초리, 입매, 눈매, 코 모양, 추호나무랄 데가 없는 희대의 인품이었다. 불쾌한 감정으로 그 여인을 보려 했고 또 보아야 할 파대였지만, 열어 젖힌 창 안에 나타난 한녀의 자태에 눈을 던질 때, 파대는 황홀하여 눈이 아득하였다.
 
98
문창이 열리기 때문에 파대는 황홀히 어두운 쪽으로 비켜 섰지만, 안에서 의 이야기는 그냥 계속된다.
 
99
"고국 만리…."
 
100
"가시고 싶으시겠어요."
 
101
"아니 추호도 가기 싫다. 승상께서 두어 주시기만 하시면 한 백 년이 나라에 살고 싶다."
 
102
"아씨, 창을 열면 아직 몹시 서늘한걸요. 도로 닫읍시다."
 
103
"좋도록 하려무나."
 
104
다시 창이 더르륵 닫혔다.
 
105
창이 열렸던 시간은 진실로 짧은 시간이었다. 그리고는 다시 닫겼다.
 
106
짧은 시간이니만큼 파대가 그 한녀를 본 것도 잠깐 사이였다. 그러나 창이 도로 닫힌 뒤에는, 파대는 마치 그 창에 넋을 앗긴 사람처럼 정신을 수습할 수가 없었다.
 
107
그 여인을 파대는 분명 공녀요 승상의 애첩으로 보았다. 저런 미녀를 차지 할 수 있는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인가 하는 시기와 부러움에 가까운 감정 이 일어남과 함께 욕심까지 무럭무럭 일어났다. 숭배하여 마지않는 승상 을 지문덕과, 미인 한녀의 주인을지 승상과는 분리되어, 을지 승상에게 대한 엷은 시기까지 일어났다.
 
108
예전 같으면 을지 승상께 대한 불쾌한 감정은 죄악으로 여겨서 스스로 크게 꾸짖을 파대였지만, 평소 경건함을 자랑하던 파대의 마음에도 그런 더럽고 불쾌한 감정이 연해 일어나는 것은 금할 수가 없었다.
 
109
방 안에서 불을 끄고 자리에 드는 소리를 듣고야, 파대는 무슨 큰 보물을 떨어뜨린 듯한 애석한 느낌을 가슴 부듯이 느끼면서 제 방으로 돌아왔다.
 
110
×
 
111
그 젊은 미녀는 과연 공녀였다. 진(陳) 천자가, 진이 수에게 망하기 직전에, 무슨 보람이라도 볼까 하여 고구려 대시니 을지문덕에게 보낸 황실지친(皇室至親) 가운데서 고르고 고른 특선 미녀였다.
 
112
이름은 국향(菊香)이라 하였다.
 
113
나이는 열일곱 살이었다.
 
114
사람의 나이 열일곱이라 하면 아직 소꿉질이나 할 철없는 나이지만, 궁녀 삼천이 염( 艶)을 다투는 진나라 제실에서 자라난 국향이는 본시 오된 천성이라, 인간사의 얽히어 나가는 데 대강 짐작이 가는 계집애였다. 당시 어지 러운 판국에서 한때는 제후국(諸侯國) 천여 개로까지 갈라졌던 중국땅이 차례로 다 없어지고 진과 수만이 남게 될 때에 국향이는 장차 반드시 진은 수 나라에 먹힐 것을 알았다.
 
115
그렇게 되면 어쩌나 하는 것은 중국 계집애의 생각하는 바 아니다. 산 사람에게 거미줄 치는 법 없으니 어떻게든 될 것이라 믿었다. 그의 생활 환경이 그에게 가르친 바와 같이, 자기는 얼굴이 예쁜 계집애니 누가 거두어 줄 것으로 알았다. 자기를 끔찍이 귀애하던 어버이의 슬하를 떠나는 것은 마음 에 걸렸지만, 계집이란 필경에 부모 슬하는 떠나서 지아비의 품으로 가는 것이라, 이것은 하늘이 정한 이치라, 다만 하늘이 시키는 대로 할 것으로 보았다.
 
116
그런데 어떤 날 부왕(父王)은 국향이에게 편지 한 장을 맡기며, 이것을 가 지고 고구려고 가라고 분부하였다.
 
117
고구려? 동이?
 
118
이 나를 동이의 나라로?
 
119
고구려로 시집을 보내?
 
120
몇 가지의 의문이 그의 머리에 끓었다.
 
121
"고구려는 누구를 찾아가랍니까?"
 
122
"응, 그도 그럴듯한 말이다. 고구려의 승상 을지문덕을 찾아가서 내 글월을 전해라."
 
123
"그 나라에도 승상이 있읍니까?"
 
124
"승상 벼슬은 짐이 주어야 하는 것인데 그 나라에서는 저희끼리 주고 받고 하는 모양이더라."
 
125
"그럼 오랑캐 나라이외다그려?"
 
126
"그럼 오랑캐지- 아아! 짐도 불운해서 오랑캐에게 딸을 부탁하는구나!"
 
127
그로부터 국향이는 고구려로 갈 준비로 우선 고구려 말을 익혔다.
 
128
그러는 동안 수 문제의 이끈 친위대가 홀연 이 진나라 도성으로 달려들었다.
 
129
이 소란스러운 찰나에 국향이는 미리부터 준비해 두었던 남복으로 바꾸어 입고 부왕 앞에 하직의 인사를 드리러 갔다.
 
130
"폐하! 소녀는 을지 공께로 가겠읍니다."
 
131
"오오, 잘 가거라! 을지가 너를 용남만 하거든 평생을 두고 잘 섬겨라."
 
132
적병이 벌써 궁정 안까지 들어온 듯 소란스러운 가운데서, 총총히 부왕께 하직하고 국향이는 대궐을 빠져 나왔다.
 
133
그로부터 국향이는 망명의 길이었다.
 
134
여자의 발걸음이라 세지도 못한 발걸음으로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여 진나라 서울을 빠져 나왔다.
 
135
그가 산동(山東)의 어떤 바닷가에 다다랐을 때에 비로소 부왕의 부보를 들었다. 부왕은 수 문제에게 욕보는 것을 피하여, 궁정 안 우물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하는 것이었다.
 
136
그러나 이 일은 국향이에게 그리 큰 충격을 주지 못하였다. 그에게는 다만 '망명''피신'이라는 생각 밖에는 다른 생각은 없었다.
 
137
어서 이 소란한 진나라를 피해서 소문에 듣던 낙원 나라 고구려로 가자. 그리고 고구려의 승상 을지문덕이라는 사람에게 이 내 운명을 내어 맡기자.
 
138
이 한 생각 밖에는 다른 생각은 할 여지가 없었다. 그의 아버지가 우물에 몸을 던져서 죽고 어머니가 난 군중에 참혹한 욕을 보고 드디어 죽기까지 하고, 그의 형제가 모두 비슷비슷한 화를 입고 목숨까지 잃는 가운데서, 재빨리 몸을 피해서 신상 아무 피해도 입지 않고 망명의 길을 가는 것은, 부모며 형제에게 비기어 훨씬 다복한 것이었지만 국향은 다만 이 피곤한 다리와 몸이 괴롭고 쑤실 뿐이지, 세상 다른 일은 거들떠 보기도 싫었다.
 
139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만리 길을 가는 국향이었다. 더우기 부모 형제를 한꺼번에 잃은 천하에 외로운 몸이었다. 명랑한 천성이요 티 없는 마음씨건만, 때때로 폭풍우같이 그를 엄습하는 공포와 적막감이 있었다.
 
140
제실에 태어난 존귀한 몸이라는 자긍심이 있기에 아무 겁 없이 이 고단한 길을 가지, 세상 보통의 계집애였더면, 한 걸읆을 옮기기에 힘들고 무겁고 도 어려운 입장이었다.
 
141
아버지 황제에게서 고구려 승상을지 공께 부치는 글월을 가슴에 깊이 간직하고, 열일곱 살의 어린 몸으로 만리 길을 가는 국향이는, 비록 남복은 하였다 하나 그래도 열일곱 살 무르익은 처녀로서의 체격이었다.
 
142
스스로도 이를 짐작하는 국향이는 전전긍긍 유심한 눈을 피해 가면서 고구려나라로 길을 채었다.
 
143
한 열흘 지나서 어떤 곳을 가노라는데, 길가의 어떤 집에서 무슨 시비가 생긴 듯 무엇이 왁자그르 하더니, 웬 여편네가 뛰어나오며, '고구려의 아낙은 그런 짓은 안 한다'고 고함을 꽥 지르고 저편으로 달려간다.
 
144
고구려와의 국경이 차차 가까와 오는 모양으로 '고구려 아낙''부여의 젊은이' 등등의 소리가 차차 자주 들린다.
 
145
소란의 진나라를 망명하여 고구려를 찾아가는 국향이로서는, 그 고구려라는 말에 아주 무관심할 수가 없었다. 더우기 '고구려 아낙''부여 젊은이'라는 그 말들은 모두가 나는 당당한 고구려 사람이로라는 자랑으로서 내던이는 경우에 쓰이는 것이었다.
 
146
'진나라 아낙''진나라 젊은이'- 국향이는 속으로 중얼거려 보았다. 어울리지 않고 쑥스러웠다.
 
147
아아! 고구려 사람은 이렇듯 자기가 고구려인이라는 것을 자랑으로 알고 있는가? 이 중국땅 안에서도 고구려 사람이로란 것을 탕탕 자랑하고 다닐 수 있느니만큼, 고구려 사람은 제 신분을 자랑스러이 생각하는가?
 
148
국향이는 여기서 제 국적의 자랑이라는 것을 비로소 느끼었다. 내가 진나 가 제실의 딸은커녕 이 고구려나라의 한 농군의 딸로라도 태어났더면, 나는 천하에 고구려 사람이라고 외칠 수가 있겠거늘-.
 
149
태고적부터 고구려의 자손이라는 것을 자세하며 내려온 이 고구려인들은, 언제까지나 그것을 자랑하며 지내려는가?
 
150
"하늘의 아들 하백(河伯)의 사위, 고주몽의 나라의 만성-."
 
151
이라고 외치는 것이 고구려의 행세다.
 
152
그리고 그것을 구호로 삼느니만큼 고구려인은 떳떳하고 버젓하게 살았다.
 
153
같은 단군의 자손이라는 백제인이며 신라인은 자기가 백제인(혹은 신라인) 이란 것을 자랑치 못하며 지내는 동안, 고구려인은 그 첫마디에 벌써 '하 백의 사위 나라 만성이로라'고 호통을 하고, 이 호통만 한 번 내리면 다른 인종들은 꿈쩍 못하고 잠잠하여 버린다.
 
154
차차 자주 들리는,
 
155
"부여의 사람은 그렇지 않다."
 
156
는 호통을 들을 때마다 가슴에 흠칫흠칫 울리는 것을 느끼며, 장차 나도 을지 공이 이 내 몸 용납만 해준다면, 그때는 남에게 향하여 '부여의 아낙' 소리를 크게 외쳐 보리라 새삼스레 결심하며, 더욱 동쪽으로 동쪽으로 발을 옮겼다.
 
157
고구려의 국경이 차차 가까와 오자, 기이한 현상으로는 흰 옷 입은 사람이 가속도로 늘어 가는 것이었다. 국향이 아버지의 나라를 망명할 때는 구월 중순으로서 지금이 한창 섣달이나 정월일 터인데 흰 옷 입은 사람이 많은 것이었다.
 
158
고구려는 흰 옷을 입는다는 말은 일찍부터 들었지만, 겨울 흰 눈에 덮인 세상에 흰 옷 입은 사람의 움직임은 기이한 느낌을 주었다.
 
159
그런 한편으로는 검은 옷 무색 옷 입은 사람의 무리가 몇 백 명 혹은 몇 천 명씩 집단이 되어 고구려로 고구려로 가는 무리가 부지기수였다. 이는 모두가 소란한 한토를 망명하여, 동방 낙원이라는 고구려를 사모하여 그리로 밀려 가는 한족 무리들이었다.
 
160
관(關)을 넘어서면서 국향이로 하여금 처음 눈을 크게 한 것은, 백 리, 천 리를 한 일자로 금그은 듯 곧추 뻗은 포도였다. 이게 길이냐고 놀랄 만큼 넓고 긴 길이 몇 백 리 몇 천 리를 그냥 뻗은 것이었다. 뒤에 안 바이지만, 고구려 서울 평양 근처의 양회를 캐내어 길에 바르면 이렇게 되는 것이었다.
 
161
그 넓은 길에는 고구려 젊은이들이 마치 전쟁인 듯 말을 이리저리 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 큰 길을 한인 망명인들이 끝 닿은 데까지 그냥 연이어 있고, 고구려의 관원은 곳곳이 지켜 서서 망명인들을 검문하고 있다.
 
162
과연 동방의 웅국이요, 수나라와 천하를 다투려는 고구려의 기백은 온갖 곳에 사무쳐 있었다.
 
163
홑몸인 관계상 고구려의 관원의 검문을 곱게 피해 오던 국향이도 한 관문에서는 드디어 걸렸다.
 
164
"여보! 젊은 양반 어디까지 가오?"
 
165
"네, 장안 서울까지 갑니다."
 
166
"어디서부터?"
 
167
"네, 저는 강남 사는 상인이온데…."
 
168
미리 준비하였던 변명을 하려는데 관원은 국향이를 의심쩍다 보았는지,
 
169
"이리로 좀 비켜서 주시오."
 
170
하여 한편으로 치워 놓았다. 그 다음 사람은 오십쯤 난 점잖은 사람과 그의 가족으로서, 소란의 곳을 피하여 고구려로 가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171
"왜, 못 살겠읍니까?"
 
172
"나라가 하두 자주 변하니 누구를 믿고 삽니까? 그래서 단군 선인(仙人) 의 나라로 살러 옵니다."
 
173
"잘 생각했소. 고구려에 오시면 탁 마음 놓고 지내시오."
 
174
이 검문이라는 것은 목표가 백제인이나 신라인에 있는 것이다.
 
175
백제인이나 신라인이 연해 진나라 수나라에 잠입하여 고구려와의 사이를 이간 붙이고 나쁘게 되도록 공작을 한다.
 
176
그 악질적 간첩들을 예방하기 위하여 국경선 근처에는 방첩 감시가 꽤 엄중하다. 그 사이 곱게 피해 오던 국향이가 드디어 고구려 방첩 관원의 눈에 수상타 여겨 억류를 당한 것이었다.
 
177
국향이는 관원에게 끌리어 인도하는 데로 따라갔다.
 
178
조금 가다가 큰 홍살문 하나를 지나서 좀 더 가노라니, 방적 제일관(防狄 第一關)이라 큰 간판이 달린 아문 안으로 들어섰다.
 
179
그 안에는 각곳에서 억류된 수많은 사람이 두룩거리고 있다. 맨 끝에 자리 잡고 앉아서 보노라니, 대국 고구려의 기품은 이런 곳에서도 넉넉히 볼 수가 있었다. 한 사람씩 끌어 내어서 한두 마디 물어 보고는 그냥 돌려 보내는데, 만약 시장한 기색이 보이면 배불리 먹이기까지 하고 노자가 없으면 노잣냥도 주기까지 해서 돌려 보내는 것이었다.
 
180
국향이는 거기 앉아서 고요히 제 차례를 기다렸다. 그러노라는데 웬 소년 하나가 국향이 곁으로 오더니, 국향이를 손짓하여 데리고 안으로 앞서서 들어간다.
 
181
이 나라 사람의 체통이 본시 굵직굵직한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아문의 청사들도 모두 넓고 컸다. 큼직한 방 몇 개를 지나서는 내정인 듯싶은 곳에 이르렀다. 그러자 내정에 시종드는 듯한 계집 하인이 인도를 한다.
 
182
좀 유다른 신분이요, 유다른 체질을 가진 국향이는 이렇듯 색채 다른 대우 를 당하니 가슴이 선뜻하였다.
 
183
(어쩌려는 셈인가?) 좌우간 당하는 대로 겪을 밖에는 없는 국향이는, 다만 공손히 따를밖에는 없었다.
 
184
몇 뜰을 지나서 몇 방을 건너서 어떤 큰 집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는 그 밖에 있는 하인에게 또 국향이를 맡겼다.
 
185
새로 국향이를 맡은 계집하인은 국향이와 연갑세나 될 아름다운 소녀였다.
 
186
"아이, 곤하시겠어요. 이리 올라와 쉬세요."
 
187
하면서 국향이를 위로 오르라 청하였다.
 
188
관청에 간 촌닭이라 하지만, 사실 시키는 대로 할 외에는 딴 도리 없는 국향이는 서슴지 않고 거기 댓돌에 앉아 감발을 풀고 주저치 않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189
계집 하인은 국향이를 안으로 들여보내고는,
 
190
"쇤네가 문밖에 꼭 지킬 터이니 마음 놓고 다리 뻗고 쉬세요."
 
191
감발을 벗노라니 발에서는 고린내가 물컥 났다. 그 사이 만리길을 자고 깨면 걷고 또 걸을 피곤이 감발을 푸는 순간 한꺼번에 올랐다.
 
192
"나 좀 쉬겠어요. 어이 참 곤해 죽겠군…."
 
193
하며 국향이는 염치 불고하고 방 안으로 들어가서 다리 기다랗게 뻗으며 자빠졌다.
 
194
-사람의 세상이란 이처럼도 살기 고단하고 어려운 것인가?
 
195
누구 다리를 좀 쳐 주는 고마운 사람은 없는가?
 
196
몽롱하게 이런 생각을 하면서 깜빡 잠이 들었다가는 스스로 펄떡 놀라 깨고 하였다.
 
197
"서방님! 서방님!"
 
198
두세 번 부르는 소리에 국향이는 펄떡 깨었다. 어느덧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깨어 보니 아까의 계집 하인이 문밖에서 국향이를 깨우는 것이었다.
 
199
"어! 뭐야?"
 
200
"주무세요? 이 밀수 한 잔 잡숫구 또 목욕물이 더웠는데 목욕하시구, 아주 편히 주무세요."
 
201
계집 하인은 밀수가 든 큰 은그릇을 국향이의 앞에 공손히 바쳤다.
 
202
국향이는 누웠던 몸을 일으켰다.
 
203
"아유! 아유…."
 
204
뜻하지 않고 새어 나오는 신음소리를 막지 못하며, 일어나서 한 대접이 되 는 밀수를 받아서 단숨에 마시었다.
 
205
"자! 목욕탕으로 가세요."
 
206
그러나 국향이는 일어설 자신이 없었다. 그 사이 악에 받쳐서 쉬지도 않고 여기까지 걸어오기는 하였지만, 한 번 다리를 뻗고 나니 다리 쓸 자신이 없 었다.
 
207
"목욕은 싫으이, 하두 발이 더러우니…."
 
208
"더러우셨기 목욕을 하셔야지. 자, 일어나세요."
 
209
"그럼 날 좀 업어다 주게."
 
210
여자 된 몸으로 남복으로 예까지 온 국향이에게는 이 목욕이라는 것은 여 간한 문제가 아니었다. 진의 제실의 공주로 몸에 때라는 것을 모르고 자란 국향이가, 이번에 비로소 서너 달을 만리길을 걸으며 오노라니, 몸에는 때 투성이요, 먼지 투성이로서, 목욕은 못하나마 하다못해 세수라도 하고 싶은 욕망은 여간이 아니지만, 사내 행색이라는 한 가지의 일 때문에 세수 한 번도 못하고, 몸이 끈적끈적한 것을 간신히 참아 가면서 오는 길이다.
 
211
"자! 어서 그럼 쇤네께 업히셔요."
 
212
국향이는 몽치같이 된 다리를 간신히 움직여 몸을 계집 하인에게 돌리면서,
 
213
"난 철든 이래 남 보는 데서 몸 벗은 일이 없는 사람인데…."
 
214
하며 중얼거렸다.
 
215
"아이구, 서방님두! 서방님이 아니구 아주 도련님이셔! 이 고구려 사람은 남의 벗은 몸 보라 해도 보지 않습니다. 자 업히셔요."
 
216
국향이는 계집 하인의 등에 몸을 실으면서 요것이 능히 나를 업을까 의심하였는데, 계집 하인은 국향이를 가볍게 업고 일어서서 통통걸음으로 얼마를 가더니 내려놓는다.
 
217
"자! 이 안이 목욕탕입니다. 또 여기 이 열쇠를 드릴 테니 안에 들어가셔서 마음 놓고 문을 잠그시고 그 사이 석 달 쌓인 때를 죄닦으세요. 쇤네는 물러가겠읍니다. 쇤네를 부르시려면 여기의 징을 서너 번 두드려주세요. 그러면 쇤네 곧 대령하겠읍니다."
 
218
그런 뒤에는 국향이에게 가볍게 인사를 드리고 저편으로 물러갔다.
 
219
제일관에서 검문하는데 억류를 당했으면 자기는 으례히 수인(囚人)일 것인 데, 수인답지 않은 이런 모든 융숭한 대접에 국향이는 적지 않게 의아하여, 거기 내려놓인 채 잠시 움직이지 못하고 앉아 있었다.
 
220
계집하인이 물러간 뒤에도, 국향이는 한 손가락도 움직이기 싫어서 그냥 그 자세로 앉아 있었다.
 
221
그런데 일단 물러갔던 계집 하인이 또 통통 이리로 달려온다. 무엇을 한아름 안고서-.
 
222
"아이머니! 아직 목욕탕에 안 들어가셨어요? 물 다 식겠네!"
 
223
수선을 떨더니 가슴에 붙안고 온 물건을 거기 내려놓는다.
 
224
"목욕하시고 이 옷 갈아입으시라구 마님께서 내어주셔요."
 
225
고구려 비단으로 꾸민 위아래 옷 한 벌이었다.
 
226
"나! 어서 목욕탕에 들어가세요."
 
227
"들어가지."
 
228
무릎을 짚으며 몸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다리가 몽치같이 뻣뻣하게 되어서 마음대로 놀릴 수가 없었다. 무릎을 짚고 일어서다가 그냥 모로 쓰러졌다.
 
229
다시 계집하인에게 몸을 의지하고 겨우 목욕탕 문 안까지 들어섰다.
 
230
문에 쇠를 잠그고 국향이가 제 낡은 옷까지 다 벗을 때는 꽤 한참 되었다.
 
231
몇 번을 두루 살펴서 바늘 구멍만한 틈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 비로소 몸을 홀랑 벗었다. 발에서 비롯하여 종다리까지 새까맣게 때로 덮인 것이 우선 눈에 띄었다.
 
232
거기는 열일곱 살의 무르익은 처녀로서의 살결은 엿볼 수가 없는 대신에, 부왕의 심려로 닦달한, 승마와 비수로 단련된 야문 근육이 그 사이 몇 달 동안 고된 길거리의 때에 덜 민 까무퇴퇴하고 얼룩진 몸뚱아리가 아래로 뻗어 있었다.
 
233
하인이 준비해 준 수건으로 앞을 가리고 물에까지 내려섰다.
 
234
내려서기는 했지만 이때로 덜 민 몸을 염치에 수정같이 맑은 물에 잠그기가 부끄러웠다.
 
235
국향이는 거기 있는 바가지로 물을 떠서 몸에 발라서 우선 가장자리에 쫑그리고 앉아서 초벌 멱을 감았다. 한 번 손으로 밀면 국수처럼 몽기몽기 밀리는 때를 한 번 통 밖에서 벗긴 뒤에 그것을 온통 아래로 흘려 보내고야 비로소 몸을 목욕물에 잠갔다.
 
236
덥도 차도 않은 꼭 알맞은 물이었다. 문을 꼭 잠그고 때를 씻을 때에도 누가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혹은 물에 비친 제 그림자에 스스로 깜짝깜짝 놀라고 하였지만, 물 속에 드러앉으니 마음이 쭉 펴진다. 국향이는 물 속에서 팔과 다리를 힘껏 펴 보았다.
 
237
꽤 오랜 시간을 물에 잠겨 있었다. 온몸이 쑤시는 것이 거의 풀린쯤하여 서 국향이는 일어섰다. 이마에까지 땀이 훈훈히 내배었다.
 
238
물 속에서 나와 몸을 말리고 준비된 옷을 갈아입었다. 벗어 놓은 낡은 옷에 다른 소지품은 없지만, 부왕의 을지 승상에게의 편지가 하나 있으므로 낡은 옷을 뒤적여 그 편지를 얻어 내어 간직하였다.
 
239
그런데 낡은 옷을 뒤질 때에 시꺼먼 보리알 같은 이를 몇 마리 발견하였다. 그 이도 내 몸에서 떨어진 것이겠지만, 국향이는 몸서리치며 옷을 집어 던졌다.
 
240
준비되어 있는 고구려 옷을 갈아입고 아래를 굽어보니 정녕 한 얌전한 고구려 젊은이였다.
 
241
한데 자기는 무엇인가? 포로인가, 수인인가, 손님인가? 여기서 자기에 대 한 대접이 너무도 융숭하므로 자기의 입장을 얼른 알 수가 없었다.
 
242
낡은 옷을 가지고 갈까 어쩔까고 잠깐 주저하였다. 서너 달을 만리길을 몸에 걸쳤었던 정의는 잊을 수 없지만, 그래도 그 더러운 품이 차마 몸에 걸칠 수 없어서, 얼른 손끝만 대어 보고 그냥 내어버리고 문을 열고 문밖에 나섰다. 문밖에는 계집 하인이 다소곳이 국향이의 목욕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243
"다 하셨어요? 이리 오세요."
 
244
하며 국향이를 인도한다.
 
245
이번 인도된 방은 장대(帳臺)가 둘린 것으로 보아 침실인 모양이다. 아직 채 어둡지는 않았지만 그 방에는 벌써 촛불이 켜 있었다.
 
246
"저녁 진지 내어올께요."
 
247
"아아, 저녁이구 뭐구 하도 오래간만에 목욕을 했더니 그저 어서 자기나 했으면 좋겠다."
 
248
"곧 내어올께요."
 
249
계집 하인은 저녁을 가지러 저쪽으로 간다.
 
250
국향이는 장대 안에 들어가 다리를 펴며 누웠다. 두툼한 보료며 이부자리 가 준비되어 있었다.
 
251
진나라 대궐을 망명한 지 겨우 서너 달이 지나지 않지만, 그 사이 겪은 숱한 고난과 고생은 인간 백 년에 겪고 또 겪고도 다 못 겪을 만한 분량이었다. 그런 고생 뒤끝에 또 이 뜻안한 융숭한 대접은, 비록 뒤에 큰 욕이 예약된 것이라 할지라도 국향이에게는 고맙고 달가운 일이었다.
 
252
수라반에 지지 않을 훌륭한 저녁상을 대강 받는 것처럼 하고는 물리고 국향이는 어서 자기로 하였다.
 
253
"이 방에는 쇠 없는가? 나는 꼭 쇠 잠그고야 자는데…."
 
254
"서방님두, 꼭 색시같이 무슨 내우를 그렇게 하세요?"
 
255
"좌우간 쇠 없는가?"
 
256
"고구려 집은 쇠 없는 방이 없답니다. 갖다 드릴까요?"
 
257
"응, 그래."
 
258
하인이 가져온 쇠를 문에 굳게 잡그고 국향이는 마음의 다리까지 쭉 뻗고 장대 안에 드러누웠다.
 
259
(나는 지금 무엇인가? 죄수인가 손님인가?) 자기는 분명 통관(通關)에 걸려 억류된 인물- 말하자면 이 나라의 한 죄수 다. 문초를 아직 안 받았으니 결정된 죄목은 없겠지만, 방적관 관원에게 억류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억류된 피의자이면, 우선 그 신분을 밝힐 문 초가 있어야 할 터인데, 아무 문초도 없이 억류된 이때껏 무슨 귀한 손님이 나 대접하듯 공손하고 극진한 대접으로 아직껏 지냈으니, 대체 이 고구려라는 나라는 죄수의 대접을 이렇게 하는 나라일까?
 
260
이런 생각을 막연히 하면서 촛불을 끄고 잠이 들었다.
 
261
집 모퉁이 낟가리 틈 어디든 몸 눕힐 곳만 있으면 거기 구겨박혀 하룻밤을 지내고- 이렇듯 고된 삼사 삭을 겪고 나서 여기서 비로소 장대에 들어서 팔 다리 마음대로 뻗고 편히 한 밤을 지낸 국향이는, 아침은 꽤 늦게야 눈을 비비며 깨었다.
 
262
처음에는 여기가 어딘지 분간이 안 났다.
 
263
장대의 장을 약간 걷고 내다보았다. 어제 시중들던 계집하인이 있는 것을 보고야 어디인지 이해가 갔다. 국향이는 옷 앞자락을 여미며 장대에서 내렸다. 등대되는 세숫물에 활활 얼굴을 씻고 나자 곧 조반상이 들어왔다.
 
264
'메유파즈'라는 중국인의 커다란 철학 가운데서 자란 국향이로서는, 이 모든 알 수 없는 사물 가운데서 그저 겪고 지냈다.
 
265
국향이가 조반을 끝내자, 계집 하인은 이번엔 국향이를 또 다른 방으로 인도하였다.
 
266
"이게 서방님 방이온데 마음 놓고 들어가 쓰세요."
 
267
그것은 얌전한 책실이었다. 그런데 국향이로 하여금 의외의 느낌을 가지게 한 것은 그 책실은 사내의 것이 아니요 여자의 책실이었다. 고구려 자기로 만든 가지각색의 크고 작은 그릇이며 화장품 등이 정비되어 있고, 책상이며 가구들이 모두 값진 물건들이었다. 천하의 조공(朝貢)을 받는 진나라 황실에서 자란 국향이로서도 다만 입을 딱 벌릴 밖에는 없을 정도의 한 책실이었다.
 
268
국향이는 잠시 멍하니 섰다가 책상머리에 가 앉았다. 그리고 펴기를 기다리는 듯이 준비되어 있는 책을 한 권 꺼내어 폈다.
 
269
유기(留記)였다. 몇 줄 내려 읽어 보니 고구려나라 건국의 위대한 사실을 엮어 쓴 기록이었다.
 
270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이며 하백의 딸 유화의 이야기를 한창 재미나게 읽는 데, 밖에서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271
동시에 이 책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는 계집하인이 통통 들어왔다.
 
272
"영감마님이 오십니다."
 
273
"?"
 
274
동시에 한 사십 살 되어 보이는 한 장년 사내가 이 방으로 들어왔다.
 
275
국향이는 황급히 일어서서 그를 맞는 뜻으로 허리를 굽혔다.
 
276
그는 들어와서 되는 대로 자리잡으며,
 
277
"너희들은 부를 때까지 물러가거라. 좀 멀찍이-."
 
278
하고 하인들에게 분부하였다.
 
279
하인들을 다 멀찍이 물린 뒤에
 
280
"나는 이곳 태수-관지기입니다. 손님은 어디서 어디로 가시는 길이오니까?"
 
281
하고 물었다.
 
282
"저는 강남 장사치온데 고구려 서울 장안으로 가는 길이옵니다."
 
283
"증단(證單)은?"
 
284
"미처 못 준비했읍니다."
 
285
태수는 눈을 들어 국향이의 얼굴을 한참 건너다보았다.
 
286
"수제 견(隋帝 堅)이에게서 이런 조회가 있읍니다. 이게 아마 손님께 관계되는 일인 듯싶은데…."
 
287
태수는 품에서 무슨 꽤 큼직한 첩지를 꺼내어 손으로 툭툭 튀기고 있다.
 
288
국향이는 '수제 견'이라는 말에 담이 터지는 듯 정신이 아득하였다.
 
289
그러면 이곳 태수는 내가 누구임을 벌써 짐작하였던가? 그 모든 융숭한 대접은 진나라 공주에게 대한 대접이던가?
 
290
수제 양견이는 부왕과 모후를 비롯하여 여러 동기까지 잔멸하고도, 아직도 부족하여 그의 마수를 멀리 고구려로까지 뻗쳤던가? 만리길 도망해 와서 여기서 그의 마수에 걸리게 되단 너무도 억울한 일이었다.
 
291
수나라 문제에게서의 글월을 태수에게서 받아 보니, 거기는 첫머리에 국향 자기의 화상을 그리고, 이 계집을 붙들어 집에게 보내면 후한 녹작과 상이 있으리라는 뜻이 적히어 있다.
 
292
국향이는 몸에 한 조각이 쇠 부스러기가 없는 것이 한이었다. 계집이 제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비수가 으뜸이라 하여 스승을 따로 고빙하여 비수 쓰기를 연습한국향이는, 지금 이 위급한 찰나에 한 조각의 쇠만 있으면 어떻게든 무슨 수단이든 강구할 수가 있을 듯하였다.
 
293
국향이는 딱 마주 앉아 태수를 쳐다보았다.
 
294
"네, 과연 제가 국향 공주올시다. 태수님께서는 국향 공주를 양견이에게 잡아 보내셔서 후한 녹작을 받으시렵니까?"
 
295
"고구려의 사람은 품에 날아드는 궁조를 결코 해치지 않습니다. 태수 모(某)도 고구려 사람이외다. 부왕께서 어떻게 되셨는지 아십니까?"
 
296
"산동을 지나가다가 소문으로 안 바인데, 양견이에게 몰려 피할 길 없어서 우물에 몸을 던져 자진하셨다구요-."
 
297
진나라 오 제 삼십삼 년간의 길지 못한 역사의 마지막 잔물이 모진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이 고구려나라로 망명해 오는가?
 
298
태수도 잠깐 묵연히 이 사실을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299
"공주께서 장안으로 가시면 누구를 찾으시겠읍니까?"
 
300
"승상을지 공께 몸을 의탁하고자…."
 
301
"무슨 선제의 글월이라도…."
 
302
"네, 수찰 한 장이 있읍니다."
 
303
"하지만 공주께서는 너무 얼굴이 어여쁘십니다. 여자의 얼굴이라 어여뻐야만 하는 게옵지만, 너무 어여쁜 것도 인생 행로에 많은 지장이 생기는 것이올시다."
 
304
"얼굴에 못하지 않은 무술을 닦달했읍니다. 이런 운명이 오리라고 닦달한 무술은 아닙지만…."
 
305
"무술이란 잘못하다가는 되레 몸을 해치는 일이 있는 게니깐, 공주 내내 명심하시옵소서. 유(柔) 능히 강(剛)을 이깁니다. 공주께서는 장차 무슨 고 난을 만나실지라도 먼저 무(武)를 앞세울 생각은 마시고, 오로지 강을 제하 실 궁리를 하시옵소서."
 
306
국향이는 머리를 숙여 고요히 고맙게 들었다.
 
307
국향이는 그 태수의 집에 한 열흘간 묵었다. 몇 달 간에 지친 피곤이 다 삭도록 푹 묵었다.
 
308
한 열흘 묵어서 피곤을 다 삭이고 길 떠날 때에 태수는 국향이에게 말을 한 필 제공하였다.
 
309
"공주께서 넉넉히 부리실지?"
 
310
하면서 제공하는 말은 '돌궐'산의 아주 사나운 말이었다.
 
311
그 말에 가볍게 올라 타고 또 장안으로 길을 떠날 때, 태수는 십여 리를 따라오며 바래 주었다.
 
312
그 길에서 국향이는 고구려나라의 부력과 통치력에 마음껏 멱감았다.
 
313
휑하니 넓은 포도는 백 리 천 리를 그냥 곧게 뻗어 있고 그 길에 십 리마다 이정표(里程標)가 서 있고 이정표에는 '서울까지 몇 리'라 정확히 새겨져 있고, 삼십 리에 한 군데씩 중화처(中火處)가 있어서 거기는 물이며 땔나무 의 준비까지 되어 있고, 그곳을 지키는 관원들은 아주 친절스럽게 모든 편의를 보아 준다. 한 오십 리마다 밤 쉴 곳이 있고, 이 모든 것은 나라에서 경영하는 바이라, 거저 만성의 편의를 보아 주는 것이다.
 
314
관원들은 극진히 만성을 헤가린다. 만성들은 모든 것을 관원에게 탁 믿고 의뢰한다.
 
315
고구려는 인구 사천만을 자랑한다. 그러나 그 사천만이란 것은 사천만이 한 덩어리가 된 단 한 뭉치의 덩어리요, 임금의 한 마디 분부라면 사천만이라는 덩어리가 하나로 되어 그 분부에 복종할 성질의 것이었다.
 
316
이것으로 보아서 고구려는 능히 천하에 그 강성을 자랑할 만하였다.
 
317
제각기 제 잘난 맛에 살아 가는 사람의 세상에 이런 나라도 있었던가?
 
318
-이러하니까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자기는 고구려인이라는 것을 자랑하고 뽐내는 것이다.
 
319
아아, 나도 어디서 한 번 마음 놓고서 나는 고구려인이로라는 호통을 하여 보면 얼마나 유쾌할까?
 
320
고구려의 재상 을지 승상이 이 내 몸을 용납해 주시기만 하면- 그리고 나 더러 '아내여'하기만 하여주시면, 나는 천하에 고구려인으로 호통을 하며 횡행할 수 있으련만-.
 
321
해가 벌에서 떠서 벌로 지는 요서의 평원을 돌궐 말에 높이 앉아서, 이런 생각을 뇌면서, 국향이는 장안 서울로 장안 서울로 길을 더듬고 있었다.
 
322
장안 서울이 여기서 몇 백 리 몇 천 리나 되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진나라 서울서 여기까지의 만리길을 걸어서 온 국향이로서는, 지금 마상에 높이 앉아 흥그러이 가는 길은 다만 마음 흥그러울 뿐이었다.
 
323
절기로 따지자면 봄, 이월경일 것이다. 그 사이 혹한의 절기를 잠자리 하나 변변치 못하게 남의 집 집모퉁이의 굴뚝 틈에서 몸을 쉬면서 만리 길을 온 것이다. 이제는 절기는 양춘에 가깝고 탈 말도 있고, 게다가 고구려땅은 아무데를 갈지라도 길손 먹일 준비는 나라에서 마련하고 있다.
 
324
오리내도 지났다. 오리내를 지나서도 아직 오백여 리를 더 가야 장안 서울 이라 하지만, 국향이는 서울 안뜰에 들어선 듯 이제 장안에 다 온 것으로 여겼다.
 
325
길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326
"을지 승상 댁이 어디쯤 됩니까?"
 
327
고 물어서,
 
328
"승상 댁은 장안에 있다오. 아직 오백 리를 더 가야지요."
 
329
하는 대답에 오히려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330
그 사이 온 만리길에 비기건대, 이제 남은 오백 리라는 것은 이제 다 왔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 며칠을 더 가야 되는 길이다.
 
331
지금껏 요동 칠백 리의 무연한 벌판만 오다가, 오리내 넘어서니 올롱졸롱 한 산과 골짜기다.
 
332
그래도 장안 서울이 가까운 증거로는, 사람들의 성품이 차차 더 어질고 질박해 간다.
 
333
날을 물어보니 벌써 양춘삼월이라 한다. 논밭에는 무럭무럭 양춘의 김이 떠오르고 길에는 말똥구리가 말똥을 굴려 가고 있다.
 
334
아버지의 대궐을 망명한 것은 벌써 반 년 전인 작년 가을이다. 그 사이 겪은 고생을 다 쌓으면 태산같이 높을 것이요, 당한 욕도 부지기수다. 그것을 참아 가면서 모진 목숨 그냥 유지해 가는 것은 장차 무엇을 바라고?
 
335
부왕모후를 비롯해서 모든 동기들도 모두 참화를 보고, 지금뎅그렇게 외톨이로 살아 남은 자기다.
 
336
장차는 누구를 믿고 누구를 의뢰하고 살아가랴?
 
337
'고구려의 을지문덕이라는 대신을 찾아가서 네 장래의 운명을 맡겨라." 하던 아버님의 유명을 받아 나는 열일곱 해 기른 이 몸을 을지문덕이라는 고구려인에게 바치려고, 만리길 멀다 하지 않고 을지가 산다는 장안 서울을 찾아간다.
 
338
을지라니 몇 살이 난 사람일까? 과히 늙은이는 아닐까? 몸이 승상이라니 괄괄한 젊은이는 아니겠지만 꼬부라진 늙은이는 아닐까? 고구려 지역에 들면서 내내 경험한 바이지만, 고구려 사람은 천 사람이면 천 사람 만 사람이면 만 사람 모두가 한 사람같이 을지 대신께는 최상의 경모의 정을 아끼지 않는다.
 
339
그렇듯 을지 승상은 온 고구려인의 숭앙의 사람이다. 지금 부왕의 글월을 지니고 가지만, 을지 대신은 그 글월로 이 몸을 용납해 줄 것인가?
 
340
고구려 사천만 인의 어버이-.
 
341
열일곱 살 처녀 국향이의 가슴에 떠오른 동이 사천만의 아버지로서의 을지 문덕을 목표로 길을 가면서도, 국향이의 마음에는 용납하려는가 안 하려는 가의 일말의 불안은 지울 수가 없었다.
 
342
준마의 빠른 걸음으로 하루를 가고 이틀을 가고 사흘을 가서 장안성 밖까지 이르렀다.
 
343
한 채찍만 더하면 넉넉히 성 안에 들어갈 것이로되, 국향이는 성 밖 주막에서 그 밤을 지내기로 하였다.
 
344
이제는 다 왔다 하는 안심의 탓도 있겠지만, 꽤 느지막이까지 자고 일어나서, 오늘은 승상을 뵙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소세 단정히 하고 주막집을 나섰다.
 
345
이 큰길로 곧장 가면 스물 몇 골목 지나서 큰 솟을대문 달린 집이 승상 댁이라는 말을 목표로, 시원하고 넓은 큰길을 골목마다 세면서 갔다.
 
346
스물 몇 골목 지나서 과연 큰 대문이 있었다. 국향이는 서슴지 않고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347
들어서 보매 그곳도 무슨 큰 일곽 같지 개인의 집 같지 않았다. 그냥 말을 타고 그 엉성한 가운데를 동서로 헤매었다.
 
348
어딘지도 모르면서 그 곽 내를 편답하다가 지나가는 하인 하나를 붙들어서 사정을 통하였다.
 
349
"승상은 지금 입궐해서 댁에 안 계시고 마님께라도 여쭈랍니까?"
 
350
국향이는 사실을지 부인께 먼저 뵈옵고 싶었다.
 
351
"그럼 마님께라도 여쭈어 주십시오."
 
352
"이리 오세요."
 
353
이리하여 국향이는 을지 부인의 앞으로 인도되었다.
 
354
친척인지 하인배인지는 모르나, 많은 여인들과 마주 무슨 담소를 하고 있 던 을지 부인은 국향이 편으로 향하였다.
 
355
"내가 을지의 아내요, 승상을 뵙겠다고?"
 
356
"네…."
 
357
"승상께서는 정무 다단하시어 좀체 뵈옵기 힘드는데 무슨 사단으로 뵙겠 다는지?"
 
358
한 국가의 승상을 그리 쉽게 뵈오리라고는 국향이는 생각하지 않았던 바였다. 그래서 품에서 부왕의 글월을 꺼내었다.
 
359
"진(陳) 천자의 소개하는 글월이 여기 있읍니다."
 
360
그 사이 반 년간, 한 품에 품고 오느라고 구겨지고 더렵혀진 부왕의 글월을 국향이는 품에서 꺼내어 승상 부인 앞에 내어놓았다.
 
361
"지아비에게 오는 글월을 먼저 본다는 것은 부여의 여인의 안 하는 바요.
 
362
승상 들어오시거든 드릴 터이니 여기 맡겨 두시오. 그리고 보아하니 매우 피곤하신 듯한데, 저 후당 방 하나 내어 드릴께 가서 편히 한잠 주무시 지."
 
363
"아이, 잠은 실컷 잤읍니다."
 
364
국향이가 사양하건 말건 승상 부인은 하인 하나를 불러서 후당을 깨끗이 치울 것을 분부하였다.
 
365
동탕한 국향이의 얼굴을 승상 부인은 탐나는 듯이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366
"참! 손님 나이 몇 살이요?"
 
367
"열일곱 살이옵니다."
 
368
"열일곱? 우리 자식두 살아 있으면 금년 열일곱이로구먼- 열 일곱이며 저렇게 장발하는 걸 홑 일곱 살에 죽여 버리고…."
 
369
×
 
370
후당으로 인도받아서 거기서 몸을 쉬는 국향이는 자기의 기구한 열일곱 해의 생애를 띄엄띄엄 추상하면서, 자는 듯 깬 듯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371
자기는 부왕의 소개로 이 댁에 들기는 하였지만 승상은 자기를 용납하려는 지? 승상 부인은 한 마흔 살 되었을까 말았을까 한 아낙이었지만, 대고구려 국을지 승상의 아내라는 긍지가 그 미우에 차고 넘치듯 나타나 있는 여인이었다. 그리고 상냥하고 친절하였다. 진나라 공주라는 국향이의 신분을 알고도 그냥 친절할지 어떨지는 모르되, 지금껏 본 바로 아주 상냥한 아낙이었다.
 
372
"이 근처(후당) 일대는 손님이 묵어 계실 동안은 손님 혼자만이 쓰실 곳이니까 그리 아시고 마음대로 쓰십쇼. 이 근처의 하인들도 손님 홀로 쓰실 하인입니다."
 
373
승상 부인은 이렇게 말하고 하인 몇 명을 남기고 돌아갔다.
 
374
승상께 뵈올 일 밖에는 다른 일은 없는 국향이는 문갑에 가려 있는 책 한 권을 뽑아 들고 책상에 기대어 책을 폈다.
 
375
유기(留記)였다. 방적 제일관(防狄 弟一關) 태수의 집에서 그 첫머리를 얼마간 읽던 국향이는 여기서 그 다음 줄거리를 읽기 시작하였다.
 
376
고구려라는 위대한 나라를 세운 조상들이 나라와 만성을 애호한 그 기특한 사실이 줄줄이 사무쳐 있는 기록이었다.
 
377
-이렇게 고심하고 이렇게 애써서 이 나라를 세웠고 키웠느니라- 하는 지나간 날의 현인들의 고심 기록이 국향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래서 유기에 침혹되어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읽고 있었다.
 
378
국향이는 거기서 민족 종족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이 민족의 한 영주(英主)엿던 평안 호태왕(平安 好太王) 시절에 이 고구려 민족과 조상을 같이한 신라라는 나라가 남쪽 바다 건너 왜에게 침노를 받을 때에, 호태왕은 오만 명의 고구려 장졸을 이끌고, 수륙 이천여 리를 신라까지 달려가서 왜 족을 쳐 쫓은 일이 있다. 고구려 임금 평안 호태왕은 무슨 까닭으로 내 나라 장졸 오만여 명을 이끌고 신라까지 갔던가? 왜는 어디 감히 고구려는 건드릴 염도 못 내고 도리어 방물을 바치며 왕녀를 바쳐서 고구려에게 아첨만 하거늘, 호태왕은 무슨 까닭으로 내막하오만여 명을 멀리 신라까지 데리고 가서 숱한 인명과 숱한 국탕을 소모하여 왜를 때려 쫓았는가?
 
379
여기 종족이라는 것이 고마운 것임을 볼 수 있었다. 한 옛날 단군 왕검이라는 선인(仙人)에게서 흘러내린 같은 피의 종족으로서, 호태왕은 신라의 수난을 남의 일 같지 않게 본 것이다.
 
380
같은 종족끼리 서로 천자가 되려고 죽이고 죽이는 중국 종족으로서는 좀 이해하기 곤란한 일이었다.
 
381
- 이러하였으니까 고구려는 흥하고 크게 됐구나! 아아! 이 고구려나라를 운영하시고 지도하시는 을지문덕승상이시여!
 
382
국향이는 마음 초조히 기다렸다.
 
383
지난날 현인들이 고구려라는 나라를 세우고 키운 기록에 국향이는 열중하였다. 자기가 지금 어디 있는지, 어떤 환경에 있는지도 잊고, 유기에 열중 하여 유기를 탐독하고 있었다.
 
384
문득 시야의 한편 구석에 무엇이 움직이는 바람에 그리로 주의를 돌렸다.
 
385
보니 거기에는 웬 사람의 발이 한 쌍 눈에 띄었다. 국향이는 펄떡 정신을 차렸다. 동시에 자기가 어떤 환경에 어떤 곳에 있는지 전후를 가릴 수가 있었다.
 
386
그 발에서 차츰 더듬어서 가슴으로 얼굴로 눈을 옮겼다.
 
387
거기는 한 사십 살로 볼 수 있는 웬 한 장년이 발을 멈추고 국향이를 굽어 보고 있는 것이었다.
 
388
평복-편복(便服)으로 차린 사람이었지만, 온화스러운 그 얼굴에 천하를 위압하는 기개가 감추여 있었다.
 
389
국향이는 이 인물이 누구임을 알 수 있었다. 뜻하지 않고 벌떡 일어섰다.
 
390
그리고 그 인물에게 향하여 넓적 절을 하였다.
 
391
"승상님, 문안드리겠읍니다."
 
392
"국향 공주라구?"
 
393
그 인물은 이렇게 말하며 그 자리에 자리잡고 앉았다.
 
394
"네- 국향이올시다."
 
395
"폐하의 수서는 보았소, 폐하가 공주를 떠나보내신 뒤에 어떤 일을 당하셨는지 공주는 아시는지요?"
 
396
"산동을 지날 무렵에 약간 풍문으로 들었읍니다."
 
397
"폐하께서는 공주의 일신을 내게 맡긴다고 하오셨지만 그것이 무슨 뜻인 지 이해하시오?"
 
398
국향이는 미처 대답치 못했다. 제 일신을 장차영구히 보아 주세요-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 말은 염치에 나오지를 못했다.
 
399
"좌우간 공주는 하늘 아래 혼자 남은 신세니까, 이 내 집을 진궁(陳宮)으로 알고- 내 처를 어머니로 여기고 나는 아버지로 여기고, 마음 놓고 여기 계시오. 고구려 재상 내 집에 묵어 계시면 하늘 밖에는 공주를 범할 자인 세상에는 없을 게요."
 
400
고구려의 만성이 자기는 고구려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하는데, 고구려의 대 재상이 어찌 그 신분을 자랑치 않으랴.
 
401
하늘 밖에는 그대를 범할 자 없느니라. 내 집에 묵어 있는 동안은… 이런 말을 감히 외칠 수 있는 그 신분에 대하여 국향이는 만강의 경의를 표하였다.
 
402
"사람의 팔자란 칠전팔기- 공주 팔자 기박하여 지금 이 동이의 범부에게까지 굴해지내시지만, 장차 우리나라 나랏님께서 공주의 앞에 절하 오실 날이 없으리라고 장담 못할 일이오. 그러니까 고요히 팔자 돌아올 날을 기다립시오. 여기 내 집에 푹 마음 놓고 계시면서-."
 
403
"승상님이 두어 주시기만 하면…."
 
404
이리하여 국향이는 을지 승상의 보호 아래 승상 댁에 몸을 두기로 하였다.
 
405
이튿날 아침에 국향이를 위하여 고구려 처녀의 옷이 국향이에게 제공되었다.
【원문】진희(陳姬) '국향(菊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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