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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리의 목가 ◈
◇ 1 ◇
카탈로그   목차 (총 : 12권)     처음◀ 1권 다음
1937. 10 ~
이효석
지면에 ‘중편소설(中篇小說)’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애정 획득을 위한 인물 간의 갈등이 주를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 여성 1937. 10. ~ 38. 4
1
거리의 목가
 
2
1
 
 
3
“몇 점이요.”
 
4
“스물다섯.”
 
5
“요번에야 ──”
 
6
힘 맺힌 장대 끝에서 튀어난 골프알은 쏜살같이 둔덕을 넘어서 오목한 솥 안에 뛰어들기는 하였으나 지나친 탄력으로 하여 볼 동안에 다시 솥을 튀어 나와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7
“두 점하니 ── 스물일곱.”
 
8
골프알이 코스의 테두리를 벗어났으므로 말미암아 두 점을 더한 것이다.
 
9
명호는 거듭되는 실수에 혀를 차고 알을 다시 집어다가 제자리에 놓고 손수건을 내서 이마의 땀을 씻는다. 부드러운 미소 속에 떠오르는 지친 빛을 볼 때 영옥은 너무도 오래 끌어가는 그의 실수에 민망한 생각조차 들었다.
 
10
베이비 골프는 역시 마지막 코스가 제일 지리해서 단 두 사람만의 결전이면서 벌써 한 시간을 훨씬 넘었다. 코스는 쉬운 데서부터 점차 까다로워져서 열째 코스가 가장 난관이었다. 당초부터 명호에게 유리하던 승산이 별안간 뒤집혀진 것은 참으로 이 열째 코스에서였다. 그렇다고 영옥의 재주가 더 익숙한 것은 아니었으니 그는 명호에게 끌려오자 오늘이 처음이었다. 온전히 그 순간순간의 손의 수요 재치여서 처음인 영옥이면서도 익숙한 명호와 거의 같은 점수로 진행되어 온 것이 마지막 코스에 들어와서는 도리어 그보다 한 수 앞서 의외의 승패의 결단을 짓게 된 것이었다.
 
11
한번 이지러지기 시작한 명호의 수는 빗나가게만 되어 실수를 거듭하는 동안에 좀체 바른 호흡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솥 안 구멍 속에 빠져 버려야 할 골프알은 번번이 솥을 튀어나와 언덕을 굴러 내려왔다. 알은 알로서 손은 손으로서 피차에 고집을 피우는 셈이었다. 그 코스 끝나기를 기다리노라고 울레줄레 옆에 와선 다른 폐들 속에서 명호는 겸연한 표정을 지니고 알을 노리며 장대를 흔들었다.
 
12
거의 십분이나 더 지나 스무 점 이상을 거듭하고서야 겨우 판은 끝났다. 지리하던 판에 알이 솥 안으로 굴러 사라졌을 때 영옥은 모르는 결에 박수를 하였다. 명호는 겸연한 낯에 빙그레 웃으며 오래된 그 자리를 떠나가 경기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코스 밖 벤치 있는 곳으로 걸었다. 저고리를 벗고 땀을 들이는 동안 영옥도 벤치에 걸어앉아 허공을 스쳐 오는 바람을 맞았다. 그곳은 백화점의 오층 위 옥상 정원이어서 도회의 상층을 흐르는 바람이 난간의 기슭을 스치고는 나무 아래로 흘러들었다. 먼 하늘에 거뿐하게 떠있는 신문사의 경기구도 시원하게 보인다. 다섯 층 아래 거리가 불에 얹은 남비 속같이 무덥고 답답한데 비겨 그곳은 다섯 층만큼 하늘에 가까운 천국인 셈이었다. 시원하고 즐겁고 한가들 하였다.
 
13
“졌소이다.”
 
14
쪽지에 적히운 점수를 속으로 계산하고 나서 명호는 반드시 실망의 어조가 아니요 차라리 명랑하고 유쾌한 목소리로 영옥을 바라보았다.
 
15
“그것도 오십 점이나.”
 
16
“부러 져주셨지요.”
 
17
영옥은 미안한 어조였다.
 
18
“그럴 리 있나요. 승부라는 것은 언제든지 본능적으로 최선의 노력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19
“우연히 이긴 게지요.”
 
20
“첫솜씨로는 대단히 훌륭하셨습니다. 목적하시는 음악의 길도 그렇게 수월하게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21
“예술에도 우연이라는 것이 있을까요. 골프와 음악과 ── 꼬올로 통하는 길은 일반일까요. 장구한 세월의 기초와 노력이 없이 무엇이 되겠어요.”
 
22
“음악의 길도 천차만층이겠지만 유행가수의 길쯤이야 골프의 요령과 다를게 없겠지요.”
 
23
“그럴까요.”
 
24
여옥의 목표는 손쉬운 유행가수로서의 성공에 있었다. 미국 출신의 고명한 성악가인 명호의 말을 영옥은 믿고 싶었다.
 
25
유행가수의 길쯤이야 골프의 요령과 다를 게 없다고,
 
26
“골프에 이긴 듯이 재치 있고 묘리 있게 목표만 향하고 나가시오.”
 
27
지도는 얼마든지 아끼지 않겠다는 뜻이 말속에 은연중 포함되어 있는 듯하여서 여옥은 기쁘면서도 한편 그를 알게 된 당초부터 느껴오는 일종의 무거운 감정을 억제할 수는 없었다. 무슨 까닭에 그는 그만큼의 지위로서 초면의 영옥의 지도를 그렇게 선선하게 맡았던가 하는 의문에서 오는 감정이었다. 그만한 호의와 친절에 값갈 만한 무슨 턱과 소질이 자기에게 있는가 하고 영옥은 생각한 까닭이었다.
 
28
“어떻든 유쾌한 승패였소이다.”
 
29
명호는 하루의 행락을 마음으로 유쾌히 여기는 듯이 옷소매에 팔을 넣으면서 자리를 일어섰다. 영옥도 자태를 수습하고 약간 피곤한 걸음으로 뒤를 따랐다. 골프의 행락은 그것으로서 끝났으나 앞날의 행사는 결코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골프의 승패의 결과는 파를 끌어서 스스로 다음의 행동을 작정하였다.
 
30
“진 때에는 진만큼의 턱이 있는 법이지요.”
 
31
명호의 거의 선언에 가까운 말이 들렸을 때에 두 사람은 마침 층계를 걸어 내려와 삼층 어귀에 서 있었다. 그 한구석에는 악기부가 있었다.
 
32
“드려야 할 선물이 있는데 ──.”
 
33
악기부에 가서 별로 오래 따질 것도 없이 점원에게 분부하여 고급품 포터블 측음기 한 대를 골라서 고이 싸도록 이를 때까지 영옥은 다만 얼떨떨하여서 그의 거동을 눈부시게 바라볼 뿐이었다.
 
34
“숙소가 어디신가요.”
 
35
점원이 별안간 묻는 바람에 영옥은 하는 수 없이 쪽지 위에 숙소를 적지 않을 수 없었다. 물건을 배달해 주자는 뜻이었다. 집이 초라해서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의미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던 숙소를 공교로운 서슬에 그 자리에서 그만 명호에게 알리게 된 것을 속으로 괴롭게 여겼다.
 
36
“성악 공부에는 역시 손쉬운 것으로 축음기가 필요하니까요.”
 
37
필요한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속으로 은근히 원하고도 있기는 있었으나 그렇게 수월하게 생길 줄은 짐작하지 못하였다. 너무도 과분의 선물을 미안히 여기노라니 문득 골프에서부터 시작된 오늘의 출발이 결국 이 결과를 위한 그의 성산이 아니었던가 하고도 생각되었다. 그러니 벌써 그 과당한 선물을 받을까 말까 망설일 여유조차 없었다. 점원과의 매매의 교섭은 간단하게도 끝난 뒤였다.
 
38
그 길로 지하층 식당에 내려가 다시 오찬의 대접을 받게 되었을 때까지 영옥의 마음속은 그날의 반성으로 채워졌다. 어차피 속세에 출마하여 적으나마 목표의 야심을 가진 이상 홀로 고결하고 상망하게만 굴 수는 없는 노릇이요, 때때로 텁텁하게 휩쓸리기도 하고 웬만한 정도의 타협이라면 용납해 들이자고 일종의 속세의 철학으로 배짱을 작정은 한 바였으나 그러나 오늘의 선물은 아무리 해도 과분하고 부당한 것으로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현재의 자기의 형편을 가늠본 것이라면 오히려 견딜 수 있는 것이나 마음속까지 뽑히운 것이라면 부끄럽고 괴로운 노릇이라고 생각되었다.
 
39
서울 올라온 것부터가 불과 달포였다. 한번 접지른 생애를 가지고 새삼스럽게 새 출발을 하기에는 고향이 좁다고 생각한 까닭에 평양을 등지게 된 것이었다. 기구한 생애는 결혼에서 시작되었다. 딸의 뜻을 휘어서 어머니는 어떤 성심 아래에서 결혼을 강제하였으나 그 어머니조차도 결코 행복되지 못한 것은 결혼한지 석 달만에 남편이 우연히 세상을 떠났음이다. 결혼 석달 ── 이라는 것은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니어서 어느 모로 보든지 불행만을 의미하는 것이다. 남편의 거만의 재산에는 손가락 하나 댈 것 없이 영옥은 한 몸을 희생만 당한 채, 그러나 개운한 마음으로 친가로 돌아와 버렸다.
 
40
어머니는 못마땅하나마 이제는 더 딸의 마음을 휘일 수 없었다. 희생을 당하였을지언정 영옥에게는 차라리 생애의 한 기회가 되었다. 본격적인 음악의 길은 철늦은 이제 감히 엄두를 못낸다 하더라도 백 걸음을 사양하여 고른 유행가수의 길, 그것이 그의 오래 전부터 희망하여 오던 길이었다. 그만의 희망의 길이 아니라 어머니의 행복의 길도 의미하였으니 성공의 날, 그는 그것으로서 어머니를 봉양하려고 생각하였다.
 
41
몇 달 동안을 망설이다가 굳은 결심을 하고 드디어 낯설은 곳에 배수의 진을 치게 된 것이다. 신문사의 동무 애란을 의지하고 올라온 것이었으나 결국은 외로운 가시길이었다. 애란의 소개로 음악비평가 민수를 알고 민수의 인도로 성악가 명호를 사귀게 되었다. 명호의 지도로 새삼스럽게 성악의 근본지식인 호흡법, 발성법, 시창법視唱法를 연습해 온 지 몇 주일이 되었다. 명호는 믿음직하고 성실한 지도자였다. 그의 말은 별반 거역할 것이 없었으나 오늘의 선물만은 아무리 생각해도 과만하였던 것이다.
 
 
42
정식의 긴 코스 동안 영옥은 더 많이 침묵을 지키게 되었다.
 
43
과실을 먹고 차를 마실 때에 난데없는 한패가 별안간 등뒤로부터 몰려 들어와서 영옥을 놀라게 하였다. 민수와 낯모를 남자와의 세 사람이었다. 명호와 단둘만의 그 자리를 민수에게 보인 것이 그다지 유쾌한 일은 못되었다. 민수는 위인이 데설데설하고 시원스럽기는 하였으나 그 반면에 경한 데가 있어서 애란이 처음에 소개할 때에도 특별히 주의하라고 은근히 귀띔하여 준 인물이었다. 첫째 그의 굵은 알의 누런 안경이 비위에 거슬렸고 터놓고 선전하는 그의 독신주의라는 것이 수상하였다.
 
44
“소개를 할까요.”
 
45
바로 옆 식탁에 자리를 잡고 나서 민수는 영옥의 편을 보았다.
 
46
“방송국 문예부의 남구씨. 강남회사 전속가수 박인실씨.”
 
47
남녀를 소개한 후 영옥을 마저 그 편에 소개하였다. 이가 바로 그들인가 하고 영옥은 전부터 민수가 소개하겠다고 벼르던 남구와 인실을 찬찬히 바라보면서 인사의 고개를 숙였다. 이들이 모두 그 방면의 유명한 사람들이며 앞으로 기어이 길을 같이하지 않으면 안될 인물들임을 깨닫고 영옥은 일종의 감화와 흥분을 느꼈다.
 
48
“이름은 익히 듣고 있었습니다.”
 
49
마치 구면인 듯이 남구는 말을 걸었다.
 
50
“명호씨의 지도 아래서 공부하시니 어련하실까요.”
 
51
“농담은 쉬엄쉬엄 하십니다.”
 
52
영옥을 대신해서 명호가 한마디 갚았다.
 
53
“대단히 사무적이어서 미안합니다만 인사 드리자 곧 부탁이 있는데요.”
 
54
남구가 말을 내자 민수가 꾀바르게 그 앞을 채었다.
 
55
“실상 내가 먼저 말씀 전하려고 하던 것인데 알맞은 기회가 없어서 ── 오는 달쯤에 신인의 밤의 방송을 연다는 것입니다.”
 
56
뒤를 이어 남구가 자세히 설명하였다.
 
57
“── 일종의 앙데팡당이어서 말하자면 방송의 기회 없는 신인들에게 한 기회를 던져서 출세의 길을 주자는 것입니다. 성악이나 기악이나 각각 장기를 가지고 모여 재주껏 해서 세상 사람의 판단을 받자는 것이지요. 실력의 인정을 받으면 라디오의 가수로 출세할 수도 있겠고 혹은 레코드회사에 채용될 수도 있겠고, 특별히 전선중계여서 방송국으로서는 대단한 용단이고 신인들에게는 둘 없는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영옥씨께서도 한몫 끼어 주신다면 국으로서는 영광이겠다고 민수씨와 의론했던 터인데 의향이 어떠실는지요.”
 
58
미처 생각의 여유도 주지 않고 민수가 뒤를 받았다.
 
59
“외람한 것 같으나 의향 여부가 없을 것 같습니다. 예술의 세상에는 실력을 충분히 가졌다고 하더라도 항상 기회라는 것이 중요하여서 알맞은 기회를 놓치면 세상에 나설 시기를 영영 잃어버리는 수조차 있는 것이니까요. 이번 기회 같은 것은 응당 붙들어야 할 것인데 주저 여부가 있겠습니까.”
 
60
신인의 밤! 너무도 현란한 미끼요 유혹이었다. 영옥은 전신이 상기되어서 얼떨떨할 뿐이었다. 사실 그것을 놓치고는 다른 기회가 그다지 흔할 것 같지도 않았다. 꿀같이 단 말은 기쁨과 함께 초조를 가져왔다.
 
61
“그러나 실력이 있어야지요.”
 
62
하면서 명호를 바라보는 수밖에는 없었0다.
 
63
“겸손의 말씀이겠지요.”
 
64
민수는 어디까지든지 우겨든다.
 
65
“충분히 연습을 해서 나가 보시는 것도 한 수겠지요.”
 
66
명호의 한마디가 영옥에게는 묵직한 선언같이 믿음직하게 들렸다. 다만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이고 그 말이 주는 흥분을 새기고 있었다.
 
67
“승낙하였지요. 크게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68
남구는 중대한 교섭이나 마친 듯이 대견한 표정을 띠었다.
 
69
“죄 없는 유행가수만 늘어간다. 그러지 않아도 수가 많아서 먹고살기 어려운데 레코드쟁이 음악가 나부랭이가 제멋대로 자꾸 맨들어 내노니 어떻게 살아가란 말인고, 팔자 없는 유행가수가 되었더니 꼴사나워 살 수 있나.”
 
70
인실의 암팡진 하소연이 좌중을 보기 좋게 휘젓고 찔렀다. 이 선진의 무례한 말씨를 영옥은 딴은 그럴 법도 하다고 생각하고 그 게정꾼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예측하지 않았던 다른 한 폭의 현실이 별안간 눈앞을 가리우게 되면서 영옥에게는 그것이 또한 반성의 재료가 되는 것이었다.
 
71
좌석이 식어진 것을 기회로 명호가 자리를 일어서자 영옥도 따라서 일어났다. 문간에까지 이르렀을 때에 민수가 와서 긴한 듯이 영옥에게 은근히 귀띔하였다.
 
72
“신인의 밤이 있기 전에 늘 말하던 윤주, 강남레코드회사 문예부장을 만나 두는 것이 유리할 것 같으니 그쯤 생각하고 기회를 엿보아 두시오. 이건 한마디 충고요.”
 
73
여옥은 황망한 마음에 영문을 모르고 우두커니 듣고만 있었다.
【원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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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 : 근/현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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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 지식지도
▣ 기본 정보
◈ 기본
  # 거리의 목가 [제목]
 
  이효석(李孝石) [저자]
 
  여성(女性) [출처]
 
  1937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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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02월 0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