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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리의 목가 ◈
◇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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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10 ~
이효석
1
거리의 목가
 
2
8
 
 
3
사랑의 기쁨은 굴복을 할 때보다 굴복을 받을 때가 크다.
 
4
비록 한 장의 엽서였만 영옥이 그렇게까지 기뻐한 것은 순도가 은근히 굴복해온 까닭이다. 피차에 고집스런 마음으로 어느편이 꺾이워 드나 하고 기다리던 판에 기어코 순도 편에서 먼저 말을 걸어온 까닭이다. 문밖 고요한 교외에서 하루를 이야기하고 지내자는 간단한 사연이 영옥을 날 듯이 기쁘게 하였다. 날을 두고 달을 두고 괴어 온 수심이 한꺼번에 개이는 듯도 하였다.
 
5
이튿날 영옥은 원족을 떠나는 아이같이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서 약속한 교외를 찾았다. 오래간만에 보는 벌판, 언덕, 초목들이 모두 마음을 뛰놀게 하는 것들 뿐이었다. 푸른 하늘을 우러러보면 흰구름을 잡아타고 금시에 날듯도 싶었다.
 
6
순도를 만나 것은 언덕을 넘은 풀밭에서였으나 일껏 사람을 불러내 놓고도 막상 만나서는 인사 한마디 걸지 않았다. 영옥은 마음 같아서는 오래간만에 만난 터에 순도에게 몸을 쏠리고 실컷 응이래도 부리고 싶었으나 말이 없는 이상 그럴 수도 없이 그의 곁에 묵묵히 앉은 채 그의 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7
마음을 뛰놀게 하던 초목도 하늘도 구름도 사랑의 말이 없는 속에서는 다시 의미 없는 것으로 변하였다. 은근한 사랑에는 말이 필요하지 않을까. 말의 실마리를 얻기가 부끄러운 탓일까. 먼저 휘어들기가 싫은 탓일까. 세상에 문학청년이라는 것은 대체 무슨 턱에 무엇을 믿고 그렇게도 교만하고 고집스러울까. ── 의미 없이 풀을 쥐어뜯으면서 영옥은 순도의 마음속을 이모저모로 헤아려 보았다. 누가 어디 먼저 말을 걸게 되나 보자 하고 은근히 마음속으로 으르고 있는 듯도 한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가로막혔다. 물론 비록 말은 없다 하더라도 순도와 같이 있는 시간이 영옥에게는 가령 명호나 민수나 남구나 그 어떤 사람과 같이 있는 시간보다도 행복스러운 것이기는 하나 그만큼 침묵은 한결 안타까운 것이었다. 먼 바다의 기선같이도 굼뜬 한 조각의 흰구름이 맞은편 언덕 위 백양나무 사이를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도 두 사람은 그 구름을 우러러볼 뿐 벙어리같이 잠잠하였다.
 
8
“어느 때까지나 잠자코만 계시구 ── 실례라고 생각지 않으세요.”
 
9
구름에서 암시나 얻은 듯 영옥은 이윽고 몸을 일으키면서 한마디 게정을 부렸다.
 
10
“할말이 퍽도 많은 듯하더니 막상 만나고 보니 ──”
 
11
순도도 덩달아 일어서면서 비로소 입을 열었다.
 
12
“무엇보다도 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인지도 알고 싶고 ──”
 
13
지향 없이 발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앞으로 또 다른 언덕이 가리워 있었다. 두 사람은 풀밭을 걸어내려 좁은 언덕길을 더듬어 올랐다.
 
14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15
“내 길도 옳게 못 잡는 형편에 다른 사람 몫까지 알 수야 있소.”
 
16
“기껏 그렇게 대답하실 것을 당초에 말은 왜 내세요.”
 
17
영옥은 샐룩해지면서 발끝으로 대중없이 풀잎을 찼다.
 
18
“어떻게 대답하면 좋단 말요.”
 
19
속에는 가득히 품으면서도 그것을 마음껏 표현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순도도 할 바를 모르고 실상은 마음을 죄일 뿐이었다. 길바닥의 돌멩이를 집어 뜻 없이 언덕 위로 팔매를 던지는 것이 화풀이도 되고 심심풀이도 되었다. 돌은 언덕을 휘엿이 넘어서는 보이지 않는 그 너머로 떨어지곤 하였다. 순도는 어린아이와 같이도 몇 번이고 돌을 집어서는 언덕너머를 겨누었다.
 
20
“위험해요 ── 그 넘에 집이 있어요.”
 
21
보다 못해 영옥이 순도의 팔을 낚구었다.
 
22
“빈집인걸 ── 상관 있나요.”
 
23
“아무리 빈집이래도 집에 돌을 던지면 꾸중을 듣잖아요.”
 
24
“누구에게.”
 
25
“서양 마마에게요.”
 
26
어느덧 언덕 너머 지붕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언덕을 오르는 동안에 산 허리에 선 외채의 양옥이 드러났다. 회사엔지 다니는 외국 사람 부부가 들었다가 조그만 가정적 갈등으로 해서 아내가 본국으로 돌아가자 남편 혼자 빈집에 살기도 멋쩍어서 어딘지로 옮겨 버린 후 완전히 비인 지가 거의 반년에 가깝다는 ── 그런 곡절 있는 집이었다. 거리의 풍편으로 들은 그런 이야기를 마음속으로 새기면서 두 사람은 언덕을 내려 빈집 후원께로 가까이 갔다. 창안으로는 휘장이 가리워져 있고 짐승소리 한마디 없는 강감한 속에서 후원의 나무와 풀만이 철망 안에 우거질 대로 우거져 있는 것이 그 무슨 이야기 속의 집과도 같은 신비로운 느낌을 두 사람에게 주었다. 벽으로 얼크러져 올라간 담장이 그늘에서는 그 무슨 이야기의 나머지가 서리어 있는 듯도 해서 그것이 알 수 없이 마음을 댕겼다. 보지 못한 외국 사람 두 양주는 담장이넝쿨 속 벽 안에서 어떤 살림을 하였을까. 두 사람이 갈라진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27
“이왕 빈집이니 기웃거려 볼까요.”
 
28
문득 호기심을 느끼면서 영옥이 제의하였다.
 
29
“돌을 던지면 꾸중을 들어두 기웃거리면 꾸중 듣지 않나.”
 
30
순도가 싫은 소리로 대답할 때 영옥은 그러나 벌써 철망 사이에 다리를 걸고 있었다. 몸만은 들어섰으나 철망에 걸린 치마폭을 수습하노라고 애를 쓰건만 순도는 그것을 부축해줄 만큼의 재치도 보이지 않는다. 영옥이 완전히 철망해서 손을 떼인 후에야 순도는 혼자 스스로 뒤를 이어 뜰 안으로 들어섰다. 확실히 불만을 품은 영옥은 한 걸음 먼저 그 자리를 떠나 담장을 등지고 남쪽 벽에 기대어 섰다.
 
31
“여자가 항상 제일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32
“수수께끼를 거는 셈이오.”
 
33
“친절이예요. 따뜻한 마음이예요 ── 아무리 사내양반이기루 왜 그리 무뚝뚝하세요 늘.”
 
34
“내겐 원래 그런 미덕이 없나부오. 억지로 친절하게 하고 싶지 않을 젠.”
 
35
“마음에 없으니까 그렇죠.”
 
36
“그런 뜻의 따뜻한 마음이라면 난 굳이 보이고 싶지 않소. 웃음이라든지 아첨이라든지 재미있는 이야기라든지 라면 얼마든지 그런 것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잖우 ── 가령 명호나 민수나 그런 지도자들.”
 
37
“지도자들이 어쨌단 말예요.”
 
38
영옥은 짜증을 내며 몇 걸음 옆으로 물러섰다.
 
39
“왜 그렇게 늘 빈정만 대세요. 그것이 사랑이예요. 사랑이 그래야 돼요. 왜 좀더 달리 사랑의 마음을 표현하시지 못해요. 늘 윽박어만 댄다면 그것이 미움이지 사랑인가요.”
 
40
“어떻게 표현하란 말요. ── 이것이 내겐 기껏의 표현인데. 나도 실상 어쨌으면 좋을는지 몰라서 그러우.”
 
41
순도는 사실 어쩔 줄을 몰라서 그 자리에 그대로 아이 모양으로 주저 앉아버렸다.
 
42
“── 가령 내가 달아날 때 쫓아와서 왜 붙들어 주시지 못하세요. 따뜻한 말을 던져 주시지 못하세요.”
 
43
영옥도 넘치는 감정을 억잡을 수 없어서 문득 순도에게 달려들며 전신을 쏠렸다.
 
44
“── 제발 더 빗나가지 마세요. 솔직한 마음을 보여 주세요. 냉정하게 구실 젠 제 마음은 저며 내는 것같이 괴로워요.”
 
45
두 사람은 복받치는 감정을 못 이기고 한데 휩쓸려 그 자리에 쓰러졌다. 순도는 영옥의 따뜻한 체온 속에서 목소리를 놓고 울고 싶었다. 맞닿은 그의 부드러운 입술을 어느 때까지나 놓고 싶지 않았다. 늘 원하고 바라온 것이 그런 무더운 사랑의 기쁨이었었건만 그것을 대담하게 구하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한 것이 생각하면 부끄러웠다. 대체 무엇을 가운데 두고 마음이 지금까지 그 테두리를 한결같이 뱅 돌았던지를 알 수 없다. 피차에 처음으로 주고받는 열정에 두 사람은 꿈속에 있는 듯이 혼몽하였다. 잠시 동안 온전히 말을 잊었다. 말없는 열정 속에서는 무슨 생각이 솟아야 옳을 것인지 순도는 모든 것을 잊어야 할 그 무더운 사랑 속에서 오히려 한 갈피의 욕심이 솟아오름을 슬퍼하였다. 사랑의 욕심은 항상 질투에서부터 온다.
 
46
“강남레코드에 나갈 작정이오.”
 
47
이렇게 물은 순도의 한마디는 질투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48
“글쎄요. 모처럼 희망했던 길을 중간에서 일부러 버릴 수도 없고 어떻게 했으면 좋을는지요.”
 
49
“윤주라는 위인이 웬일인지 비위에 안 맞는구료. ── 생긴 품이 음탕한 짐승 같아서 은근히 걱정돼서 하는 말이오.”
 
50
“세상의 사내란 사내는 왜 모두 그런지요. 윤주뿐이겠어요. 민수란 양반도 점잖은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망나니예요.”
 
51
“그런 것을 날보고 그 사람같이 하란 말요. 어쩌자는 생각인지 속을 알 수 없구려. 내가 그 사람들을 결코 좋아하지 않는 줄 뻔히 아는 처지가 아니오.”
 
52
“그럼……. 나를 의심하시는 말씀이죠.”
 
53
영옥은 불쾌한 생각이 들면서 혼자 자리를 일어섰다.
 
54
“정색할 필요야 있소. 의심하지 말라는 말요.”
 
55
“얼마든지 의심해 보세요.”
 
56
영옥은 손을 번긴 듯이 화를 내며 달아나는 듯이 철망께로 내뺐다. 그 거동에 문득 순도도 노염을 품고 자리를 일어섰다.
 
57
“의심하지 말구 ── 밤낮 마음을 괴롭히는 것이 그 생각이오.”
 
58
“사람을 무시해두 분수가 있죠.”
 
59
영옥은 얼굴을 붉히면서 혼자 허둥허둥 다시 철망을 타넘었다.
 
60
“사람의 속을 뉘 알꼬.”
 
61
순도의 이 한마디가 거의 치명적이었다. 날카로운 소리가 나며 급스럽게 서두는 영옥의 치마자락이 철망에 걸려 보기 좋게 찢어졌다. 노염과 격동을 못 이겨 영옥은 너펄거리는 치마폭을 돌아다보지도 않고 도망이나 하는 듯 쏜살같이 언덕을 달았다.
 
62
“── 사람의 속을 뉘 알꼬.”
 
63
손도는 고집스럽게 한 번 더 마음속으로 이것을 외쳐 보며 아무 감상도 없는 목석같이 ── 기실은 용솟음치는 뭇 감정으로 가슴이 터질 듯도 하였으나 ── 여옥의 뒷모양을 우두커니 바라만 보고 섰었다.
 
64
마음의 싸움이 왜 항상 사람을 이렇게도 괴롭히나를 생각할 때 영옥은 숨차게 달으면서도 안타까운 심정에 차라리 이대로 솔곳이 사라졌으면 하고 느꼈다. 물론 우두커니는 서 있을지언정 순도도 똑같은 생각을 마음 한편에 떠올리기고 있기는 일반이었다.
【원문】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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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효석(李孝石)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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