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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동해안의 바다와 산과 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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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8
김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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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동해안의 바다와 산과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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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어촌 현지 보고 ─
 
 

1. 1. 강원도라고는 하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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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금융조합연합회 보급과의 부탁을 받고 강원도의 농촌을 견학한답시고 서울을 떠나기는 하였으나, 짧은 시일로 한정 있는 코스를 말(馬)보다도 빠른 차를 타고 달리면서, 제법 옳게 농민들의 사는 모양을 견학하고 돌아오리란 생각은 애초부터 가지지 못하였었다. 나를 안내하기로 된 연합회의 박원식 씨는 다년간 강원도에서 근무하던 분으로, 이 분이 꾸며 놓은 여행의 일정은 이러하였다. 6월 20일 밤차로 서울을 떠나서 안변(安邊)서 차를 바꾸어 타고 동해선으로 접어들어 이튿날 아침에 장전 항구에 내린다. 장전서 어민 훈련소를 구경하고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하는 실황을 구경하고 외금강 온정리에서 들메를 푼다. 이튿날 아침 간성으로 가서 그 곳 금융 조합이 안내하는 부락을 구경하고 그날 밤은 농민들과 같이 침식한다. 22일엔 양양을 거쳐 강릉에 이르러 그 곳 조합의 안내로 읍내에서 가까운 부락을 보고 돌아와서 읍내에서 몸을 쉬인다. 23일 아침 강릉을 출발, 대관령을 넘고 고원 지대를 자동차로 달려서 4백 리 원주에 도착하는 것이 오후 두세 시경, 그 곳서 경경선(京慶線)의 기차를 잡아타고 그 날 밤으로 서울에 돌아온다는 것이다. 이거야말로 달리는 말 위에 앉아 산을 바라보는 격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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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지로 다녀 보고 깨달은 것이지만 박원식 씨가 꾸민 강원도의 일주 코스는 퍽 재미스럽고도 또한 요령 있는 것이었었다. 동해안을 달려서 바다와 산을 만끽한 뒤 대관령을 준령을 넘어 강원도의 산간 지대, 고원 지대를 횡단하여 강원도 농촌다운 풍경과 풍속과 생활 습속을 구경한다. 이 코스 중에 어촌이 있고 농촌이 있고 조선서 제일 는 바다 풍경이 있고 세계에 으뜸가는 금강산이 있고, 어는 곳에서는 기차, 어느 곳에서는 자동차, 온정 호텔에서 잤는가 하면 그 이튿날은 옷을 입은 채로 목침을 베고 농가의 웃방에서 고단한 몸을 눕히고……. 여하(간) 이렇듯이 여행의 흥미와 재미는 버라이어티가 있고 다색다채(多色多彩)한 것이었다. 3, 4일의 날짜를 가지고 강원도를 일주하는 코스에 이것보다 으뜸이 있으리라 생각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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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물론 예정과 같이 이 코스를 돌아왔다고는 하여도 이것으로 강원도의 농민 생활의 특수성을 알았다고 할 자신은 서지 않는 것이고, 외관을 펀뜻펀뜻 지나치는 듯이 구경하고서 그 속에 파묻혀서 갖은 희로애락을 맛보며 살아나가는 농민들의 생활을 이해했노라고 호언할 자격은 생기지 않는 것이다. 이십 년, 삼십 년의 혼신의 노력, 피와 땀으로 이루어 놓은 농민들의 ‘공든 탑’을 도회에서 사는 풋내기 청년이 기차에 앉아 훌쩍훌쩍 지나쳐 가고서 나는 농촌 생활을 알았노라고 지껄인다면 그것은 말짱한 거짓일 뿐더러 또한 염치없는 교만한 자기 과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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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곳에서 보고하고자 하는 것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사정 밑에서 나의 둔한 관찰력으로 친히 바라본 것과 부락에서 만나 본 부락민들의 이야기를 유일한 재료로 하는 것인데, 이렇게 나에게 재료를 제공하신 분들은 금융 조합의 이사와 부이사, 그리고 부락을 지도하는 중견 지도자들이었다. 이 지도자들은 순전한 농민임에 틀림은 없는 것이나 실제로 논밭에 들어서서 일하는 분이기보다는 대체는 부락의 소지주나 자작농들이었다. 빈농, 소작인들과 대면할 기회는 농번기인 만큼 얻기 힘들었다.
 
 

2. 2. 간성 조합의 주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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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오전에 장전에서 기차를 내리니까 비가 퍼붓고 있었다. 떠날 때부터 흐리던 것이 안변서 차를 바꾸는 전후해서 비는 줄기차게 차창을 때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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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 없는 플랫폼에서 대합실에 뛰어들어가 한참동안 머뭇거린 것이 원인이 되어 우리는 장전 조합에서 일부러 마중 나온 분과 길을 어겨서 드디어 비를 맞으면서 얼마간 길을 헤매지 않을 수 없었다. 박원식 씨가 오랫동안 이사로 근무하던 고장이라 곧 어느 음식점에서 아침 요기를 하며 사람을 시켜 장전 조합의 남상습 이사를 오시라 하였다. 어민 훈련소의 배는 이미 바다로 낙 버린 뒤였고, 비가 갠 때엔 오전 열 한 시였다. 어선을 타고 바다에 나가 친히 고기를 잡는 어민의 활동과 훈련을 받는 어민들의 상황을 견학하기로 하였던 제일 일정은 호사(好事)에 끼인 마(魔)로 해서 부득이 중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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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를 구경하고 자동차로 남상습 이사와 강종섭, 전선진 등 제씨와 함께 우리는 온정리 가로서 하룻밤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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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열 시경에 간성역에 내리니까 김충식 이사가 마중을 나왔었다. 조합이 있는 동네까지 가는 데는 한참이나 걸어야 하였다. 뙤약볕 속에 장이 벌어져 있는 비스듬히 언덕이 진 시골 장거리였다. 낡은 목제로 된 어둡고 답답한 사무실이었다. 장날이라 바쁜 것 같았고 또 월말이 가까워서 모두 출장 중이었다. 나는 거기서 냉수로 땀을 들이며 이야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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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간성 금융 조합은 부락 지도 시설과 경영이 우량한 조합으로서 벌서 두 차례(소화 10년과 15년)나 연합 회장한테 표창을 받았다고 한다. 절미 저금(節米貯金), 공동 경작, 생활 개선, 부업 장려, 그밖에 시국에 대응해서 여러 가지 모범 될 만한 일을 많이 해 오던 중 무엇보다도 이 조합의 특수한 것은 주부회라고 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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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모든 활동과 지도는 소화 7, 8년 농촌 진흥 운동이 시작될 때부터 있어 온 것인데, 사변 이후 더욱 활발히 되었다고 한다. 가령 절미 저금 같은 것도 한 술, 두 술 쌀을 절약해서 부인네들이 저금한 액수가 3만 원에 이르렀다. 하며 대부액(貸付額)이 50만 원에 대해서 기한을 어기어 지연되는 연체액은 근근 천 원에 불과하다 하였다. 작정한 기한 안에 대부했던 금액을 납부치 못하는 것, 조합의 지시하는 사항을 이행하지 못하는 것, 이런 것을 진심으로 수치라고 생각하리만큼 백성들의 성품은 순박하고 또 열심스러운 것이었다. 보국 저금이나 기타 시국적인 정신 운동 전체에 이러한 열성이 나타나서 그것은 누차 다른 조합과 부락의 모범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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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회라는 것은 일종의 부인의 모임인데 조합 운동의 주체를 간성 조합에서는 이 부인네들의 활동에다 두었던 것이다. 각 부락마다 주부회가 있고 거기엔 책임자가 있어서 책임자들의 연합 총회 때에는 우승기와 상품을 가지고 각각 그 성적을 다툰다고 한다. 요즘 모든 활동이 애국반에 통일되면서 이 단체도 명목을 고치게 되었으나 될수록 여태껏의 전통을 살려서 부인네들의 활약을 조직화하겠다고 이사는 말하였다. 이 조합을 오늘날과 같이 만든 데는 현재 이사 김충식 씨의 성실한 지도는 물론 지금은 홍천 조합에서 근무하는 전이사 김경배 씨의 헌신적인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고 들었다.
 
 

3. 3. 오봉촌(五峰村)의 단체적 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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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성 조합 이사더러 가까운 부락을 안내하라고 하니까 김충식 이사는 교통이 편한 곳을 택한다고 이 곳서 한 정거장 남쪽으로 가는 공현진(公峴津)역에다 우리를 하차시켰다. 이 작다란 간이역은 동쪽으로 바다를 끼고 서쪽으로 이앙이 끝난 논을 바라보면서 철로선 위에 장기쪽처럼 놓이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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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일행은 바다를 따라 어촌을 찾았다. 어업 조합의 출장소가 있는 이 부락에서는 이 날 남녀노유가 떨어나서 미역을 따고 있었다. 옷을 적시면 파란물이 옮을 것 같은 바다 위에 목선을 띄워 놓고 어민들은 미역을 베고 따기에 바빴다. 장정들은 바다에 떠 있고 늙은이는 배에서 내리는 미역을 지게로 날랐고 부인네와 색시들은 날라온 미역을 백사장에 펴서 말리는 노동에 종사하였다. 그 옆에서 아이들은 미역 줄거리를 꺾어 껍질을 벗겨 씹으면서 어른들의 일하는 것을 바라보며 놀았다. 모래를 걸으며 혹은 바위 위에 앉아서 나는 쾌청한 하늘 밑에 벌어진 근로하는 백성들의 모양을 오랫동안 구경하면서 도무지 싫증을 느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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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뉘엿뉘엿할 무렵에 우리 일행은 목적지인 오봉리 부락으로 향하였다. 양양군에 속하는 죽왕면인 것이나 편의상 고성군 간성 조합의 관할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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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리에서 마중 나온 구장과 청년단 간부에게 안내되어 철둑을 넘어서 우리는 바다를 등지고 해당화와 찔레꽃이 덮힌 언덕길로 접어든다. 철둑을 넘을 무렵에 우리는 길게 행렬을 지어 자루를 하나씩 머리에 이고 가는 소녀들의 부대를 만났다. 이들은 오봉리의 소녀들이었다. 청년단 안에 있는 여자부(실상은 소녀부)로서 오늘 멀리 금잔디가 많은 언덕으로 띄씨를 훑으러 나갔던 길이라 한다. 머리에 인 것은 사방공사에 팔아서 청년단 기본금의 일부로 하려는 띄씨의 자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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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리 청년단에는 소년 소녀와 성년 부인과 청년들을 각각 나누어서 제 힘에 합당한 근로 작업을 시키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는데 지도자의 지휘에 좇아 각기 공동 경작, 공동 작업, 탁아 근로에 종사한다고 한다. 이앙도 전부 공동으로 한 까닭에 벌써 이 부락에 들어서면 퍼런 빛이 벌판이 펀하니 깔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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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직업이나 경작 외에도 단체 훈련이나 국어 강습이나 운동회 같은 것이 부락의 주최로 가끔 열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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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직한 고개를 넘어서 부락으로 통하는 언덕 위에 섰을 때 다섯 개의 봉오리에 아늑히 둘러싸인 작다란 분지에 들어앉은 백여 호의 가옥이 한눈에 들었다. 아름다운 영새집 틈에 군데 군데 기와집이 끼어 있는 것이 보이었다. 박원식 씨가 부인의 작업 상황을 사진에 찍겠다고 교섭하였을 때, 지도자는 종을 울려서 저녁 설거지에 바쁜 부인네들을 소집하였다. 나는 옆에서 시계를 보았다. 청년단원의 지르는 소리에 맞추어서 순식간에 부인네들은 부엌으로부터 뛰어나와 낫을 들고 소정의 보리밭에 모였다. 이 동안이 약 십오분. 부인네들의 보리 베는 모양을 바라보며 협동적인 단체 훈련이 표창당할 만하다고 나는 혼자서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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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장댁에서 저녁을 먹고 우리는 지도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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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의 옥외 노동은 농진 운동(農振運動) 이전 30년래의 습속으로서 어려운 일로 여자에게 부적당한 것을 제하고는 대부분을 부인네들이 협동적으로 처분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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퍽 전부터 탁아소를 설비해서 농번기에는 논밭에 나갈 수 없는 늙은이들이 아이를 맡아서 한 곳에 모아 놓고 장난감과 더불어 어머니가 돌아와서 젖을 주는 동안을 보낸다. 표창도 받았고 국고 보조까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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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 개량에 힘써 온 것도 오래된 일이어서 소 외양간도 전부 개량했고 액비(液肥)를 모아두는 웅덩이(溜)도 준비되어 있다. 퇴비도 도상(道賞)을 받을 만큼 우량하여 매호 평균 4천 5백 관, 임야 벌채를 적게 하기 위해서 포플라를 2만 주나 논둑에 심어서 녹비(綠肥) 대용으로 이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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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축도 조합 관할 구역 내에서 가장 우수하여 보국 저금(報國貯金)이 8천원, 절미 저금이 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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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락의 자랑으로 지도자들이 말한 것을 초기(抄記)해 보면 대략 이상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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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동이 틀 무렵인데 벌써 고단한 잠귀를 시끄럽게 굴면서 종소리와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그 소리에 눈을 부비며 고단한 목침에서 머리를 일으켰다.
 
 

4. 4. 정신 운동과 박월리촌(博月里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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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서 자동차를 타고 주문진을 지나 강릉에 이른 것은 23일 오후 한 시경 이었다. 강릉 조합에서 점심을 먹고 우종대 부이사의 안내로 읍내서 시오리 가량 되는 박월리 동네로 향하였다. 태울 듯한 뙤약볕에 강릉 특유의 바람이 있어 고된 몸에 시오리 길은 내 힘에 부칠 듯하였다. 의논 끝에 나와 우종대 이사와 둘이서 자전거를 타기로 하였다. 6년 전 수해의 흔적을 아직도 남겨 가지고 있는 강을 다리로 건너서 신작로를 따라 굽이굽이 산길을 돌다가 평지에 들어서서 밭 샛길로 접어드니까, 감나무의 윤택 나는 수풀에 싸여 있는 동네와 동네 앞에 양철로 지붕을 한 목제의 교사와 운동장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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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학교 교사가 부락민이 혼신의 정력으로 쌓아 놓은 학술 강습소였다. 소학교에 들어가지 못하는 부락의 아동을 수용해서 학술과 농사 기술을 가르치는 곳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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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나무 밑에 자전거를 세우고 최돈호 씨를 만나서 부락의 이야기를 한 시간 동안 듣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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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월리 부락도 그러하지만, 통틀어 강릉 조합 구역 내에서는 이사 호리다(堀田[굴전])씨의 신념으로 보덕(報德) 정신의 운동이 널리 전개되어 있었다. 보덕 정신이란 니노미야 손도쿠(二官尊德[이관존덕]) 선생의 보덕 정신을 조합 활동과 병합시켜서 물심 양면으로 농촌의 갱생 부흥을 꾀하자는 취지인데 각처에 보덕사라는 조직체가 있었다. 금융 조합 운동은 본시 일종의 경제적인 운동인데 여기에 정신적 또는 도덕적인 운동을 합치시키자는 것으로 시국 하 여러 가지 의미로 운동의 전개에 진지한 검토를 요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것과는 달리 우종대 씨와 식은(殖銀) 한상태 씨의 안내로 이율곡 선생의 출생지인 오죽헌과 경포대에 청유(淸遊)의 기회를 가진 것은 나 개인의 깊은 인상을 주었다.
 
 

5. 5. 느낀 바를 추려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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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강릉을 출발하여 자동차로 대관령과 고원 지대를 달려 대화에서 낮참한 후 오후 세 시에 원주에 도착, 다시 오후 차로 동지를 출발, 동 아홉시 반 경성역에 이르러서 우리들의 짧은 여행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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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안에 내가 보고들은 바에서 결론이랄 것까지는 없으나 약간 느낀 바를 추려서 적어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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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의 곤란성 ─ 대중 생활을 지도하기가 얼마나 힘들 것인가 하는 느낌이었다. 특히 요즘과 같이 물자가 바르고 모든 부분에 새로운 전환이 진척되고 있는 시대에는 민중을 위해서 하는 일이, 일시적일지라도 일반 생활에 손해를 주는 것 같은 연상을 주기 쉬운 때, 농사 개량과 정신 활동과 문화 계몽과 저축 장려와… 이러한 모든 것을 가난한 농민에게 실행시키는 것은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닐 줄 알았다. 특히 강원도 동해안은 농촌과 어촌이 겸하여 있는 곳이 많아서 조합이나 기타 당국자로서 지도하기도 퍽 복잡할 것이라 믿어졌다. 조합 이사 이하 직원 일동은 농민과 다름없는 헌신적 노력을 기울여서 이들의 지도를 맡아보고 있다. 말하자면 면소 직원과 함께 이들은 제일선 부대다. 제일선 부대의 노력에 대해서는 도시나 상급 관청에서는 충분한 이해를 가져야 할 것이라고 믿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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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 부락의 성격 ─ 내가 본 두 군데의 농촌은 모두 손꼽이에 드는 모범 부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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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외관으로 보는데도, 어딘가 여유가 있고 풍경화 같은 윤택과 평화가 흘러 있는 것 같았다. 큰 지주와 가난한 빈농이 없고 자작농과 자작 겸 소작인이 많은 것이 특징이요, 부락에는 건실한 한두 사람의 중견 인물이 있는 것이 정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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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인물 ─ 지도 인물은 대체로 먹을 것이나 있는 분이든가, 간신히 게량이 나는 대로 약간의 신학문을 받은 분이 많은 것 같은데, 이들의 생각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네 부락을 평화하고 굶주리지 않는 동네로 만들어 보고 싶다는 일념에 불타는 분으로, 자기 개인보다도 부락 전체의 이해와 문화적 향상을 언제나 마음과 머리에 가지고 다니는 분들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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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半島の光[반도광]』, 1941년 8월)
【원문】강원도 동해안의 바다와 산과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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