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경자년 새해에는 건강과 행복과 사랑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한국의 9개 서원"이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한국의 14번째 유네스코 세계유산 서원(조선 중기 이후 학문 연구와 선현 제향을 위하여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멋과 전통건축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등재된 9개 서원은 ①경북 영주시 소수서원, ②경남 함양군 남계서원, ③경북 경주시 옥산서원, ④경북 안동시 도산서원, ⑤전남 장성군 필암서원, ⑥대구광역시 달성군 도동서원, ⑦경북 안동시 병산서원, ⑧전북 정읍시 무성서원, ⑨충남 논산시 돈암서원입니다. 경상도에 소재하는 서원이 많지요.
교육은 100년 앞을 내다보는 백년지 대계(百年之大計)라고 합니다. 고려 충렬왕 때 안향(安珦, 1243 ~ 1306)이 원나라에서 받아들인 성리학(유학)을 조선의 건국 이념으로 하였지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서원과 조선의 교육 기관에 대해 알아봅니다. ①조선의 교육 : 관리 양성과 유학 교육을 위해 설립 | | | | ▶4학(동학, 서학, 남학, 중학 각 100명) | ▶향교(소과 준비. 부, 목, 군, 현에 1개) | | | ▶서원(교육 기회 확대, 백운동 서원이 최초) |
☞ 조선의 관리는 과거(科擧), 음서(蔭敍 : 고관 자손을 관리로 임용) ,천거(薦擧 : 인재 추천 받아 씀)를 통해 되지요. 대부분 과거(科擧) 시험을 통해 관료로 임명되므로 자신의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위해 학연(學緣), 혈연(血緣), 지연(地緣)을 최대한 활용하였다. 오직 입신양명이 부귀영화의 지름길이었으니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 과거제는 갑오개혁(1894년)으로 폐지
※ 기술 교육기관 ② 최초의 서원은 백운동 서원(白雲洞 書院) 풍기 군수 주세붕(1495~1554)이 1543년 경상도 영주 순흥면 숙수사 터(宿水寺址)에 세운 백운동 서원(안향을 모심)이 처음이며, 1550년 최초로 국가로부터 사액(賜額: 임금이 사당, 서원, 누문 樓門 등에 이름을 지어 새긴 편액을 내리는 것)을 받아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개칭되었다. 사액서원이 되면 어필(御筆) 현판과 서적, 노비를 주며 감세 등 혜택이 따른다.
③서원의 역할(제향+학문) 서원의 제향은 정기적으로 매년 봄・가을로 지내는 춘추 향사와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하는 삭망 해, 정월초 5일이나 6일에 행하는 정알례가 있다. 서원은 이름난 선비나 공신을 숭배하고 그 덕행을 추모하였고, 유생이 한자리에 모여 학문을 닦고 연구함(도서관 기능 포함)으로써 향촌 사회의 교화에 공헌하였다. 이에 따라 국가에서는 서원의 설립을 장려하여 전국 각지에 많은 서원이 세워졌다.
④서원 원생 선발 서원의 구성원인 원생은 지정된 천거자의 추천을 통해 입학할 수 있었다. 서원의 운영을 상세하게 알 수 있는 자료의 하나인 대구 도동서원 원규에 의하면 원생은 20세 이상인 자로 선발하였고, 1~5명으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천거하였다. 선정된 원생들은 일종의 입학 자격시험을 통해 최종적으로 원생에 선발되었다. 입학 과목은 성리학의 경전을 중심으로 시험이 이루어졌다. 원생의 명단을 기록한 『입원록(入院錄)』에 의하면, 16~19세기까지 약 10여 명 내외의 유생들이 매년 입원(入院)하였다. 선발 과정은 각 서원이 자율적으로 운영하였기 때문에 입원생의 숫자는 서원별·시기별로 차이가 있다. ⑤서원의 운영 서원 교육은 원장(院長)·강장(講長)·훈장(訓長) 등에 의하여 수행되었다. 원장은 산장(山長), 혹은 동주(洞主)라 불렸고, 서원의 정신적인 지주이면서 유림의 사표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서원에 따라 다소간 차이가 있었으나, 원장은 물러난 관료나 당대의 유명 학자가 맡는 것이 관례이었다. ⑥서원의 교재 사서오경을 본원(本原)으로 삼고, 『소학』·『가례 家禮』를 문호(門戶)로 삼는다는 것이 상례로 되었다. 독서의 순서는 『소학』·『대학』·『논어』·『맹자』·『중용』·『시경』·『서경』·『주역』·『춘추』로 하고 있는데 일반적인 교육과정이다. ⑦서원의 건물 배치(배산임수로 자연과 조화) 건축물은 크게 선현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祠堂), 선현의 뜻을 받들어 교육을 실시하는 강당, 원생·진사 등이 숙식하는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로 이루어져 향교와 비슷하다. 사당과 강당의 위치는 앞, 뒤로 바뀌기도 하는데, 성균관은 사당(대성전)이 강당(명륜당)보다 앞에 있고(전묘후학, 前廟後學) 지방 향교는 강당이 사당보다 앞에 있는 경우(전학후묘)가 많다.
⑧조경 서원내 조경은 철 따라 피고 지는 꽃과 낙엽수를 심어 계절에 따른 풍치를 감상하도록 하였고, 서원 밖에 소나무(松)·대나무(竹) 등의 나무를 심어 푸른 산의 정기와 선비의 기상을 풍기게 하였다. 나무들은 대체로 산수유·느티나무·은행·작약·살구·모과·진달래·개나리·난초·모란·매화·단풍 등을 심었다. ⑨사액 서원의 혜택 ☞ 어필(명필) 현판과 서적 하사 ☞ 서원이 소유한 서원전(書院田) 가운데 3결(結:1결은 약 3,300평)에 대해 면세함. ☞ 원생수(院生數)는 정원이 없었으나 양정(良丁: 양민 장정)을 원생이라 하여 피역 (避役) 시키는 폐단이 발생하여, 1707년(숙종 33)에 사액서원은 20인, 비사액서원은 15인까지 원생으로 인정. ☞ 군역 대상자를 함부로 불러들여 피역(성균관 유생, 사학 유생, 향교 유생은 군역 면제) 시키는 대신 돈을 징수하는 모입(冒入)을 20명까지 둘 수 있도록 함. ☞ 사액 시 지급되는 노비를 포함하여 7명까지의 노비를 둘 수 있게 함. ⑩서원의 발전과 폐단 전국 각지에 세워지며 학문 활동의 중심지이자 지방 사림의 정치적 근거지로 기능하였다. 서원을 기반으로 성장한 사림이 집권한데다 사액 서원이 되기를 희망하는 서원의 요구로 많은 사액 서원이 생겨났다. 명종 때 건립된 수가 17개소에 불과했던 서원이 선조 때는 100개가 넘었으며, 18세기 중반에는 전국에 700여 개소에 이르러 사립학교(서원)가 관립학교(향교)보다 많았다. ☞ 2018년 한국의 고등학교(2358개, 154만명) 숙종(肅宗, 재위 1674~1720) 때 131개의 서원에 사액을 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사액 서원이 남발되면서 교육 기관으로서의 기능보다는 특정 인물을 높이기 위하고 붕당의 근거지가 되는 등 폐단이 나타나자 영조(英祖, 재위 1724~1776) 때에는 사액을 중단하였다. 서원의 학문 연구와 제향의 순기능보다 끼리끼리 문화가 발생하며 여러 가지 문제를 발생시켰다. 마치 과거제도는 사법고시나 행정고시처럼 그룹을 형성하며 자신들의 파워를 키웠고 누구 줄을 잡느냐에 따라 출세가도에 영향을 미쳤다. ⑪서원철폐 서원은 학연이 성행하고 너무 많이 설립되어 군역과 세금 문제 등 사회적 폐단이 발생하여 1871년(고종 8)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이 서원철폐령(잔존 47개)을 내려 많이 없어졌다. ☞흥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이후 남은 47개 서원 등(유네스코 등재 서원) ☞ 백이: 중국 상나라의 신하로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 하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로 연명하다가 굶어 죽음 ☞ 제갈량 : 삼국지에 나오는 촉나라 재상으로 유비, 관운장, 장비와 함께 함 ☞ 석성 : 임진왜란 때 중국 명나라 병부상서로 조선 원군을 파견하는 결정함 ☞ 휴정 :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승병을 일으켜 승병장 서산대사임 ⑫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 서원 서원은 일제강점기 때 지역 유림들이 복원하기도 했으나 동시에 일제가 강제로 철폐한 것도 있었고, 결정적으로 한국전쟁 때 상당수가 파괴되었다. 이 때문에 남은 서원은 남한에 36곳, 북한에 11곳이 전부이다. 한국전쟁 이후 지역 유림들이 일부 복원한 서원들이 있지만 소수에 불과하다. 성균관은 과거제 폐지되면서 제향 기능을 유지하다 해방 후 전국 유림대회가 열렸고 사립대학으로 바뀌고 성균대 총장과 성균관장은 심산 김창숙(金昌淑,1879~1962)이 취임했다. ★서원, 500년 전 인문학을 탐하다.(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PrWWh3fIXLI&t=880s \na-;출처: 민족문화대백과, 구글, 네이버, 연합뉴스, 문화재청, 역사넷, 유튜브, 문화유산채널,서원 ★대한민국의 세계문화유산(14개) http://www.heritage.go.kr/heri/html/HtmlPage.do?pg=/unesco/korHeritageInfo.j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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