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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리 동산재(東山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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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군(任實郡) 재실(齋室) # 동산재
최근 3개월 조회수 : 2 (5 등급)
【향토】
(게재일: 2024.01.03. (최종: 2024.01.02. 22:02)) 
◈ 산수리 동산재(東山齋)
이 재실은 임실군 삼계면 산수리 동산마을 안에 위치해 있다. 이 지역 진주 하씨(晉州 河氏) 입향조인 하세정(河世汀)의 재실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집으로 현판이 2개, 주련이 4개 걸려있다.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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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리 동산재(東山齋)
 
이 재실은 임실군 삼계면 산수리 동산마을 안에 위치해 있다. 이 지역 진주 하씨(晉州 河氏) 입향조인 하세정(河世汀)의 재실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집으로 현판이 2개, 주련이 4개 걸려있다.
 
 
 
 

1. 산수 동산재기(東山齋記)

 
운수현(雲水縣) 삼계(三溪) 아래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동산촌(東山村)이 있다. 동산촌은 산과 물이 맑고 수려하고 숲과 골짜기가 깊고 그윽한 곳으로 군자가 거처하기에 좋은 곳이다. 우리 12세 조고(祖考) 하세정(河世汀)은 문효공(文孝公) 하연(河演)의 5세손으로 대대로 서울에 살았다. 선조[穆陵]가 다스리던 시대에 음직으로 충순위[忠順]를 지내고 참봉을 지냈으나 그의 뜻은 아니었다.
 
평소에 안개와 노을 속에 조용히 살고자 하는 뜻을 품었기에 호연(浩然)히 이곳으로 귀래(歸來)하였으니 동산의 승경에 주인이 있게 되었다. 벗과 술잔 나누며 날마다 시를 지으며 이런 시절에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강가에 푸른 바람이 일고, 산 사이로 밝은 달 떠오르니 오직 소리와 색은 이목(耳目)에 있어서 사방득(謝枋得)의 취미이자 구양수(歐陽脩)의 즐거움을 거의 다 얻었다고 할 만하다.318) 무엇이 공께서 도(道)로써 자립하여 성현을 앙모하는 덕과 후생을 이끌어 주는 학문으로 이런 산수의 승경에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게 하겠는가! 세상의 명예와 이득이 어떻게 그 마음과 뜻을 지킬 수 있게 하겠는가! 그러므로 ‘동산의 산수(山水)에 주인이 있게 되었고 그 주인은 즐거움을 얻었구나.’라고 하겠다.
 
아, 세월은 차츰차츰 지나 세상은 갑자기 크게 변하더니 이곳 산수(山水)도 하씨 문중의 세장지(世葬地)가 되었다. 가을 서리, 봄 이슬 밟으며 조상을 생각하고 속절없이 사라져 버리는 유적을 탄식하며 달밤에 빈 산에서는 오직 잔나비와 학 울음소리만 들리고 있다.319) 돌아보니 자손들마저 세거(世居)하지 못하고 각처로 흩어지고 가난에 수호할 도리도 온전히 하지 못하고 있으니 추모(追慕)하는 마음이 끊어져 버릴까 이에 몇 칸의 재각을 짓었다.
 
족숙(族叔) 상팔(相汃), 상필(相弼)씨와 족제(族弟) 항용(恒容)이 그 일을 주관하여 여러 달 만에 완공하였다. 너무 사치스럽지도 너무 검소하지도 않으니 정결하게 제사를 지낼 만한 곳이라고 하겠다.
 
다만 산수는 의구(依舊)하고 풍월(風月)은 변하지 않았으니 선조들의 덕을 생각하며 더욱이 처연한 마음을 견딜 수가 없어 감히 몇 줄의 글로 감모하는 마음의 만분의 일이라도 적어 두니 후손들에게 조상에게 보답하는 바탕이 되었으면 한다.320)
 
 
 

1.1. 東山齋記

 
雲水縣 三溪之下 數武之地 有東山村者 山水明麗 林壑窈窕 宜乎君子之居也 惟我十二世祖考諱世汀 文孝公諱演之五世孫 而世居京華 當穆陵盛際 蔭忠順參奉 非其志也 素抱煙霞之志 浩然歸來於是乎東山之勝有主矣 朋樽日夕詩書 自娛于斯時也 江上淸風 山間明月 惟聲色之於耳目 而謝公之趣 歐公之樂者 可庶幾而得也 何者 公以道自立 慕仰聖賢之德 誘掖後生之學 得此山水之勝 樂此烟景之好 凡世間榮利 何足以介其心志哉 故曰東山之山水有主 而主人亦得其樂也 噫歲月荏苒 滄桑倏變 使此山水便作河門之世葬 秋霜春露 空歎遺蹟之冺然 夜月空山 但聞猿鶴之啾啁 而顧此孱孫 不能世居散在各處 貪不能全守護之道 追遠之思則㘦矣 故玆搆數間齋 族叔相汃相弼氏與族弟恒容主其事 閱數月而功告 不侈不儉 可堪敢盛之所矣 然但山水依舊 風月無變 撫念先德 益不堪凄然之思敢記數行 文以存感慕之一 而欲勉後孫報本之資云爾
 
十二世孫 晟容 謹識
 
 
 

2. 산수 동산재기(東山齋記)

 
묘에 재각을 마련하는 것은 옛날에는 보지 못했던 것인데 우리 동방에 성행하였고 그 동방의 호남 사람들이 더욱 힘을 다하였다. 묘재(墓齋)가 막히게 되면 자손들의 영화가 쇠퇴하게 될 것이다. 대개 옛 사람들은 묘(廟)를 중히 여겼으나 중대한 묘제(廟制)는 사람마다 따라할 수 없는 일이다. 묘라는 곳은 선조의 뼈가 묻힌 곳이며 세시(歲時)에 첨배(瞻拜)하는 곳이기에 그 곳을 나갈 바로 삼은 것이다. 재각에서 서로 제사를 받들며 친족들이 화목하게 지내는 것은 인정(人情)에 부합되고 그 사의(事宜)도 옛 묘제(廟制)에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 동방에서 예의(禮義)의 하나로 일컫으며 남토(南土)가 으뜸이 되는 까닭이다.
 
진주하씨(晉州河氏)는 조선의 명신(名臣)이신 문효공(文孝公) 하연(河演)의 후손이다. 공의 5세손 참봉(參奉) 하세정(河世汀)은 한양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남원에 터를 잡았다. 그래서 삼계(三溪)의 동산촌(東山村)이 참봉 이하 세장(世藏)하는 곳이 되었다. 수백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재숙(齋宿)할 집 한 채 짓지 못하였다. 이곳을 지나는 사람이 다만 겹겹이 무덤을 보기는 하지만 어떤 집안의 무덤인지 알지 못하였다.
 
하씨는 명신(名臣)의 후예로서 이 땅에 내려와 거주하면서 비록 현달하지는 못하였지만 선영(先塋)이 이와 같으니 그 슬픔이 다함이 있겠는가! 하성용(河晟容) 군이 이를 애석하게 여겨서 특별히 자재(資材)를 기부하였고, 족인(族人) 하상팔(河相汃), 하상필(河相弼) 하항용(河恒容)과 함께 그 뜻을 이어 받아321) 몇 개월 만에 준공하였다. 그 곳을 ‘동산(東山)’이라고 편액하고 찾아와서 기문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내가 『서경(書經)』의 「주고(酒誥)」322)를 보니, ‘크게 서직(黍稷)을 심어 부지런히 부형들을 섬기고, 멀리 장사에 종사하여 부모를 효성으로 봉양해서 부모가 기뻐하거든 그제야 스스로 깨끗이 씻고 많이 차려라.’ 하였으니, 이것은 무왕이 매토(妹土)의 백성들에게 명(命)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지금 백성들이 덕을 잃은 것은 마치 상나라의 주왕(紂王)이323) 술에 빠져 버린 것과 같을 뿐만이 아니다.324)
 
하군이 남쪽 들녘에 있을 때 바꾸는 것을 일삼으며 조금 남은 나머지 추용(推用)하여 선조를 공경하여 받들었으니 그 또한 선왕의 가르침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일어났으니 그 선조들이 지각이 있다면 지하에서 서로 기뻐하실 것이다. 세상의 군자들이 어찌 퇴속한 풍속을 경계하는데 기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선조를 위하는 도리가 이에 그치지 않는 것이니 오직 행동을 삼가 당시의 명인(名人)이 되어 후손들이 서로 전하여 칭송(稱頌)하면 동산의 후손이라고 할 테니 또한 아름답지 아니한가? 하군이 그 족인들과 더불어 더욱더 다시 힘써야 할 것이다.
 
신축년(辛丑) 중춘(中春) 어느날 전주 이기원(李起完)이 쓰다.
재무(財務) 하상석(河相錫)
유사(有司) 하상열(河相烈), 하일객(河日客)
간사(幹事) 하해용(河海容), 하기용(河琦容)
감역(監役) 하상표(河相杓), 하상현(河相賢)
 
 
 

2.1. 東山齋記

 
墓之有齋 不見於古 而盛於吾東 其在吾東 惟湖南之人 尤致力焉 以墓齋否 而子姓之榮替見焉 盖古人重廟 而廟制重大 有非人人所可及 惟墓是先骸所藏 而歲時瞻拜之所也 就其所而爲之齋相與供祭祀 敦親睦誠合於人情 而其事宜若無讓於古廟制之義也 此吾東邦 所以稱禮義之一事 而南土寔爲之首也 晉州河氏 國朝名宦 文孝公 演之後也 公五世孫 參奉世汀 自京南下 居於南原 而三溪之東山村 因爲參奉以下 世藏之阡 經數百年 尙未建一屋 以爲齋宿之所 過之者 但見其累累 然而不知爲誰氏之墓 河氏以名臣之後來居玆土 縱未顯榮先塋 至於如此 其所慨傷庸有旣乎 河君晟容爲是之恨 特捐資材 與其族人 相汃 相弼 恒容 乃堂乃搆 閱數月而竣工 因其地額以東山 來請爲記 余惟書稱 純藝其黍稷 奔走事厥考遠服賈 用 孝養厥父母 厥父母慶乃洗腆此 武王所以明命于妹土之民者也 今民之喪德 非特若啇受酗酒之化 而河君南畝之睱 轉移爲業 稍有嬴餘 卽推以用之 敬祖事先 其亦不待先王之敎 而能自興者也 厥祖有知應 相喜慶於地下 而世之君子 曷可不書以爲頹俗之警乎 然爲先之道不止乎是已 惟飭身修行爲時名人 使後之人互相傳頌稱之 爲東山阡後孫云爾 則不亦美矣乎 惟河君與其族人 益復勉旃於夫
 
辛丑 中春日 全州李起完記
財務 河相錫    有司 河相烈 河日客
幹事 河海容 河琦容 監役 河相杓 河相賢
 
 

 
각주
318) 사공(謝公)은 송(宋)나라 사방득(謝枋得)을 가리킨다. 그의 〈창포가(菖蒲歌)〉에 “특이한 그 뿌리는 먼지와 티끌을 띠지 않고, 외로운 그 절조는 천석과 맹세하길 좋아한다오.[異根不帶塵埃氣 孤操愛結泉石盟]”라는 구절이 나온다. 『古文眞寶 前集 卷8』 [주D-001]은리(隱吏) : 관직을 그만두고 은사(隱士)처럼 생활하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한 평제(漢平帝) 때 왕망(王莽)이 전횡(專橫)하자 남창위(南昌尉)를 그만두고 회계(會稽)에 숨어서 성명을 바꾼 채 문지기 노릇을 한 매복(梅福)을 시에서 보통 은리라고 표현한다.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은리인 매복을 만나 보면서, 산을 유람했던 사영운(謝靈運)을 추억하리.[隱吏逢梅福 遊山憶謝公]”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3 送裴二虯尉永嘉』
319) 남제(南齊) 때 공치규(孔稚圭)가 일찍이 변절하여 벼슬길에 나간 주옹(周顒)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긴 나머지, 북산(北山) 신령의 이름을 가탁하여 관청의 이문(移文)을 본떠서 〈북산이문(北山移文)〉을 지어 그로 하여금 다시는 북산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하는 뜻을 서술했던바, 그 대략에 “종산의 영령과 초당의 신령이 연기로 하여금 역로를 달려가서 산정에 이문을 새기게 하였다.……혜초 장막은 텅 비어 밤 학이 원망하고, 산중 사람이 떠나감에 새벽 원숭이가 놀란다.〔鍾山之英 草堂之靈 馳煙驛路 勒移山庭……蕙帳空兮夜鶴怨 山人去兮曉猿驚〕”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원숭이와 학은 모두 흔히 은사(隱士)의 배경을 의미하는 말로 쓰인다.
320) 중국 황제가 옛날에 처음 행했을 때의 순수한 자세를 지니고서 교제를 지내고 대사면을 행했다는 말이다. 보본(報本)은 교제(郊祭)를 가리키고, 추은은 널리 은혜를 베풀었다는 뜻으로 대사면령을 가리킨다. 『예기』 〈교특생(郊特牲)〉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본원을 잊지 않고 보답하기 위해서 거행하는 큰일이다.〔郊之祭也 大報本反始也〕”라는 말이 나온다. 태평천자는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를 잘하여 태평 시대를 이룬 제왕이라는 말이다.
321) 당구(堂構)는 긍당긍구(肯堂肯構)의 준말로, 가업을 이어받아 발전시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서경』 〈대고(大誥)〉의 “아버지가 집을 지으려 하여 이미 설계까지 끝냈다 하더라도, 그 자손이 집터도 닦으려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집이 완성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若考作室 旣底法 厥子乃不肯堂 矧肯構〕”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322) 『서경』 〈주고(酒誥)〉에 나오는 말로, 무왕(武王)이 매토(妹土)의 백성들을 가르치는 내용이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매토의 백성들아. 너희 팔다리의 힘을 써서 크게 서직(黍稷)을 심어 부지런히 부형들을 섬기고, 민첩하게 수레와 소를 끌고 멀리 장사에 종사하여 부모를 효성으로 봉양해서 부모가 기뻐하거든 그제야 스스로 깨끗이 씻고 많이 차려서 술을 가져와 먹어라.〔妹土 嗣爾股肱 純其藝黍稷 奔走事厥考厥長 肇牽車牛遠服賈 用孝養厥父母 厥父母慶 自洗腆 致用酒〕”
323) 원문의 상수는 은나라 주왕(紂王)의 이름이다.
324) 대개 술에 상한 병을 흉(酗)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곧 흉(凶)하다는 뜻이다. 술을 흉주(酗酒)라고 하는 것은 병기(兵器)를 흉기(凶器)라고 하는 것과 똑같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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