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삼국사기』에 임실군은 백제의 임실군任實郡으로 소개되어 있는데, 지금도 백제 때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백제 때 지명을 바꾸지 않고 지금도 여전히 쓰고 있는 곳은 임실군이 유일하다. 어찌 보면 통일신라 경덕왕 때 전통의 지명을 한자식으로 바꿀 때 본래의 지명을 지키겠다는 임실사람들의 강한 자긍심의 발로가 아닌가 싶다.
【향토】이 재실은 임실읍 갈마리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에 거주하는 강화노씨(江華 魯氏)의 재실이다. 입향조는 노여(魯輿)로 자는 덕운(德運)이며 호는 송재(松齋)니 효간공의 아들로 창녕부사를 지내셨다. 무진년 고려 창왕 1년(1388) 정월에 현량과에 올라 진현전 제학에 이르렀다.
【향토】인류가 불을 처음 이용하고 돌을 깨뜨려 만든 뗀석기와 나무나 뼈로 만든 도구를 사용한 시기를 구석기시대라고 한다. 인류의 역사에서 99% 이상을 차지한다. 임실군에 사람들이 처음 살기 시작한 것은 후기 구석기시대로 추정된다. 임실군 신평면 가덕리 하가유적에서 뗀석기와 몸돌, 슴베찌르개, 각추상석기, 나이프형석기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향토】만취정은 형조참의 예문관을 지낸 경주김씨 김위(金偉) 선생이 선조 5년(1572)에 지은 정자이다. 만취정은 선조5년(1572)에 짓고 선조23년(1590)에 단청을 하였다. 순조14년(1814)과 순조34년(1848)에 중수되었으며, 상량에 '숭정기원후정유'(丁酉)라 씌어 있는 것을 보아 1897년에도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향토】관란정은 오수의 대정리 대말 저수지 옆에 위치하고 있다. 4차선 국도를 따라 남원 쪽으로 가다가 우측으로 둔기와 대정마을로 들어가는 이정표를 따라 들어가면 마을 입구에서 동쪽으로 500m 지점에 풍치 좋고 아담한 저수지가 보인다. 관란정은 저수지 동편에 위치하여 저수지의 풍광을 멋들어지게 꾸며 주고 있으며, 가을에는 구절초가 흐드러지게 피어 풍치를 더하곤 한다.
【향토】삼국시대 때 임실군의 가장 큰 특징은 백제와 가야문화가 공존한다는 사실이다. 임실군을 중심으로 한 섬진강유역에서는 가야토기가 일색을 이루지 못하고 백제토기와 섞여 있거나 지역색이 강한 가야토기의 경우도 대가야토기와 소가야토기가 동일 지역에 혼재된 조합상을 보인다.
【향토】쌍백정은 삼계면 어은리 사월마을에서 삼계면과의 접경지 오수 오산리로 넘어가는 길가 좌측의 높직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 정자는 단기 4287년(1954) 유상규(柳庠珪)가 지었으며, 쌍백정기(雙白亭記)에 의하면 쌍백정의 쌍백(雙白)이란 뜻은 사백월백(沙白月白) 즉 모래도 희고 달도 희다는 글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향토】육우당은 삼계면 어은마을 안에 위치해 있는데, 조선 연산군 때에 육우당 한경생(韓慶生)이 지었다고 한다. 정자 상량문에 ‘광해8년병진중수(光海8年丙辰重修)’라는 글이 적혀진 것으로 보아 1616년에 중수했으며, 다시 357년 뒤 임자(壬子)년에 재 중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최근인 1972년에 다시 한 번 중수했음을 알 수 있다.
【향토】이 재실은 임실읍 신안리 정촌 마을에 있다. 임실 초등학교에서 현곡리 쪽으로 쉰재를 넘어 신안리 정촌마을에 이르면 마을 숲을 이루는 곳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에 거주하는 함양 오씨(咸陽 吳氏)의 입향조 오변하(吳變夏)의 재실로 문중에서 세웠다. 원래는 심곡사(深谷祠)의 강당으로 세워졌으나 뒤에 후손들에 의해 건물의 방향을 바꾸어 다시 건축하여 재실로 사용하게 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980년 중건한 것이다.
【향토】이상으로 지표조사 및 발굴조사에서 축적된 고고학 자료를 중심으로 임실의 선사와 고대문화에 대해 살펴보았다. 전북 임실군은 금남호남정맥과 호남정맥 산줄기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데, 수계상으로는 섬진강 상류지역에 속한다. 섬진강 본류와 지류를 따라 크고 작은 평야와 구릉지가 발달해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다.
【향토】팔초정은 관기마을 뒤쪽 재실 앞 논 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1950년에 지은 정자로서 팔작 시멘트 기와지붕에 정 측면 각각 2칸이다. 팔초정(八樵亭)이란 명칭은 노초 안병용(老樵 安炳龍), 관초 전병두(冠樵 全秉斗), 벽초 이명복(碧樵 李命福), 가초 안성수(可樵 安晟洙), 덕초 이점용(德樵 李占龍), 만초 전병택(晩樵 全秉澤), 석초 안도수(石樵 安道洙), 은초 안명진(隱樵 安明鎭) 등 8명의 계원들이 풍류를 즐기기 위해 지은 것에서 유래한다.
【향토】월파헌은 경주 김 만옹선생(晩翁先生)이 은둔(隱遯)한 곳이다. 경안도(慶安道) 역승(驛丞)으로 있을 때 관복을 벗어 던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말하기를 ‘사군자(士君子)가 벼슬살이를 할 만한 시대가 아니다.’라고 하며, 마침내 이곳에 들어와 작은 헌(軒)을, 문수(文殊)의 쌍암(雙巖)에 얽어짓고, 편액(扁額)을 ‘월파(月波)’라 하였으니, 이곳이 바로 삼계면 세심리에서 학정리로 가는 길 중간 도로 옆에 위치하고 있는 월파헌 이다.
임실(任實)이란 지명은 백제 때는 잉힐군(仍肹郡)이었으며 통일신라 때에 임실군이 되었다. 【임실】은 한자 취음으로 "임"은 "그립고 사랑하는 사람", "실"은 실(谷:마을)로 '서울'처럼 순우리말로 전해지는 지명이다. 고려때는 남원부에 속하였다가 고려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조선에서는 태종(太宗) 13년에 준례에 따라 현감(縣監)을 삼았으며, 중종(中宗)때에는 임실(任實)과 운수(雲水)로 불리었다.
임실군은 동쪽으로 진안군, 장수군, 남원시 서쪽으로는 순창군, 정읍시, 북쪽으로는 완주군과 각각 접하고 있다. 도청 소재지인 전주시와는 29km 거리에 위치해 있다.
동부에 소백 산맥, 북서부에 노령 산맥이 뻗어 산지가 많으며, 동부에서 남북으로 이어진 골짜기를 따라 분지가 발달하였다. 북서부에 섬진강 상류가 흐르고 있으나 넓은 평야가 발달하지 못하였고, 섬진강 다목적댐의 건설로 넓은 갈담 저수지가 생겼다. 기후는 남부 내륙형으로 다우 지역에 속한다.
주산업은 농업으로 쌀, 콩 외에 깨가 특산물이다. 그 밖에 누에고치, 토종꿀, 낙농 제품, 한지, 고랭지 채소의 생산이 활발하다. 전라선 철도와 국도 및 남원군을 통하는 올림픽 고속 도로가 있어 외지로의 교통이 편리하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267호로 지정된 임실 진구사지 석등 및 이도리 석불 입상, 해월암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