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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군(任實郡) 재실(齋室) # 귀후재
최근 3개월 조회수 : 5 (4 등급)
【향토】
(게재일: 2024.01.04. (최종: 2024.01.02. 22:46)) 
◈ 죽계리 귀후재(歸厚齋)
이 재실은 삼계면 죽계리 대판이 마을 북쪽 끝에 있다. 이 지역에 거주하는 남원 양씨(南原 梁氏) 문중의 재실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집이다. 현판은 10개가 걸려있으며 주련은 5개이다. 4320년(1987)에 중수하였는데 대청 안에 중건기(1931)가 걸려 있다.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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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계리 귀후재(歸厚齋)
 
이 재실은 삼계면 죽계리 대판이 마을 북쪽 끝에 있다. 이 지역에 거주하는 남원 양씨(南原 梁氏) 문중의 재실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집이다. 현판은 10개가 걸려있으며 주련은 5개이다. 4320년(1987)에 중수하였는데 대청 안에 중건기(1931)가 걸려 있다.
 
 
 
 

1. 죽계 귀후재 중건기(歸厚齋重建記)

 
옛 남원 석현방(石峴坊)이었는데 지금은 새로 임실 삼계면(三溪面)이 되었다. 군면명(郡面名)은 비록 달라졌지만 그 근본은 하나이다. 우뚝 솟아 있는 노산(魯山) 중간에 고개가 길게 늘어져 있는데 산 한줄기가 남쪽으로 힘차게 뻗어 감은(甘隱)과 아산(阿山)이 되었다. 조항(鳥項)과 중미(衆尾)와 더불어 여러 기슭이 송곳니처럼 관쇄(關鎖)390)의 형국으로 서쪽 허리로 곁가지로 떨어진 듯 굽이쳐 돌다가 바뀌어 일어났다가 엎어지는데 크게 열린 동부(洞府) 아래에 있는 마을이 대판(大板)이다.
 
물은 자산(玆山)의 북쪽에서 혹은 작은 물줄기로 시내를 이루고, 혹은 물이 고여서 못을 이루는데 굽고 감싸고 돌면서 2,30리나 흘러 합쳐져서 적성강(赤城江)으로 흘러 들어간다. 그 가운데 맑은 물이 빠르게 흐르며 수려한 남쪽 고을의 명승지가 있으니 삼계(三溪)의 대판(大板)이다. 그 뒤 전체 산림이 모두 우리 집안 소유로, 직장부군(直長府君) 이하 여러 대에 걸쳐서 안장된 곳이다.
 
옛날에 몇 칸 재실(齋室)이 있었는데 서까래가 기울어지고 벽돌에 물이 스며들었다. 몇 집의 후손들이 약간의 재물을 몇 년 동안 모아서 지난 정묘년 봄에 경영하여 옛 규모대로 4칸[四楹]으로 중건하였다. 동서에 방을 두었고, 집의 중앙에 대청을 두었다. 편액하기를 귀후(歸厚)라고 하였다. 대개 증자(曾子)께서 말씀하신 ‘부모의 장례를 엄숙히 하고 조상의 제사를 정성스레 하면 백성들이 모두 두터운 덕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라는 뜻에서 취하였다. 후손된 사람으로서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비조(鼻祖)는 양을나(良乙那)391)이며 후손 양탕(良宕)이 광순사(廣巡使)로서 신라에 입조하여 성주왕자(星主王子)라는 작위를 하사받고 양(良)을 고쳐서 양(梁)으로 하였다. 양보원(梁寶瑗)은 당나라 태종[唐太宗]이 동방을 정벌할 때 탐라국의 왕세자로서 중국에 인질이 되었다가 10년 후에 환국하여 동생 양보기(梁寶璣)와 양보용(梁寶瑢)과 함께 신라에서 벼슬하였다.
 
양보원의 아들 양자영(梁自瀛)은 왕실에 공훈이 있어서 남원에 사적(賜籍)되었으며 관직은 시각(侍閣)에 이르렀다. 이후로 남원을 성관(姓貫)을 삼았다. 중시조[中祖] 양수정(梁水精)도 왕실에 공훈이 있어서 대방부원군(帶方府院君)에 봉작되었다. 이후 이름난 벼슬아치가 연이어 나와서 문중을 빛내며 우리나라의 명문 집안이 되었다. 여러 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분파(分派)에 대해서는 다 기록하지는 못하였다.
 
오직 나의 15세조 양사귀(梁思貴)는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392) 그 아들은 결(山+絜), 민(岷), 기(岐), 역(嶧), 준(峻)이다. 양결은 창원부사(昌原府使)를 지냈고, 양기(梁岐)는 산음현감(山陰縣監)과 정의현감[知旌義]을 지냈고, 양준(梁峻)은 행의(行義)로 천거되어 군수를 지냈고 그 아들 양보(梁普)는 음직으로 오수찰방(獒樹道察訪)을 지냈고 뒤에 사옹원 직장(司甕直長)에 제수되었다. 묘는 대판촌(大板村) 뒤 계좌(癸坐原) 자리에 부인 숙인과 합묘하고 묘갈(墓碣)과 상석(床石)을 갖추었다. 아들은 양귀수(梁龜壽), 양봉수(梁鳳壽)인데 모두 참봉을 지냈다. 양귀수는 아버지 묘소 아래에 쌍분[雙塋]하였고, 묘갈이 있다. 양봉수는 아버지 묘 아래 동쪽 산사면 자좌(子坐) 자리에 쌍분하였고, 묘갈이 있다. 아들 양홍택(梁弘澤)은 참봉을 지냈고, 공조참의(贈工曹參)에 증직되었고, 아버지 묘소의 서쪽 기슭에 합묘하였으며 상석을 갖추었다. 아들은 양호(梁浩)이며 호는 소계(紹溪)이다. 임진왜란에 의병을 일으키고 사재를 털고 식솔들을 거느리고 적을 많이 죽였다. 그 공훈으로 특별히 사제감(司帝監) 첨정(僉正)에 제수되었다. 묘는 서산(西山) 아래 탄방(炭坊) 오좌(午坐) 자리에 있으며, 아들 양사준(梁士俊)이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행진주병사(行晉州兵使)를 지냈고, 묘는 둔덕(屯德) 우번촌(雨翻村) 뒤기슭 해좌(亥坐) 자리에 있다.
 
근래 이래 자손들이 침체하였으니 어찌 한탄스럽지 않겠는가. 선친 오위장(五衛將) 양운표(梁運杓)가, 을미년 봄에 화재[回祿之災]393)를 당하여, 재각에 성묘하러 가는데 지붕이 뚫리고 타서 문드러질 때 불기와가 땅에 뒹굴고 화염이 하늘에 치솟아 끝내 몇 칸만 구해내어 겨우겨우 고쳐서 근년까지 보존하였다. 최근에 이르러 새로 짓고자 하여 족형 양병희(梁炳曦), 양병하(梁炳夏), 양병길(梁炳吉), 양병규(梁炳圭)가 부지런히 감독하고 심혈을 기울여 힘을 써서 완공하였으니, 이런 모든 것이 모범이 될 만한 치적이다. 아아, 후손들이 심법(心法)을 전수받아 영세토록 보존한다면 이 집은 폐하여지지 않을 것이리라.
 
신미년(1871, 重光協治) 4월 기망(期望)
후손 양병두(梁炳斗) 삼가 지음
 
 
 

1.1. 歸厚齋重建記

 
故南原石峴坊 今新任實三溪面 而郡面名 雖殊其本則一也 魯山屹然 中立長嶝 一脈南奔 爲甘隱阿山 與島項衆尾 諸麓犬牙 作關鎖西 腰枝旁落 曲廻而變 換起伏大 開洞府之下 有村是大板也 水自玆山之北 或細流而成川 或渟滀而成潭 彎抱 二三十里 而合後川 歸于赤城江 其中流峙 淸駛明麗 亦一南州 名勝區也 此三溪大板 後全局山林 皆吾家所有 而直長府君 以下屢代 衣履之藏也 舊有齋室數 棟榱桷攲支 瓦甎滲漏 幾戶孱孫 鳩聚若干財 數年拮据 去丁卯春 經之營之 依舊制 重建四 楹東西室堂中央大廳 扁之曰歸厚 盖取曾子所云 愼終追遠民德歸厚之意也 爲人後者 可不勉㫋哉 鼻祖良乙那 後良宕以廣巡使 入朝新羅 賜星主王子爵 改良爲梁 諱寶瑗 唐太宗東征時 以耽羅王世子 質于中國 十年後返國 與第寶璣寶瑢 仕新羅寶瑗 子諱自瀛 有功王室 賜籍南原 官至侍閣 自後以南原爲姓貫 中祖諱水精 亦有功王室 封帶方府院君 玆後名公巨卿 連綿烜爀 爲我東望族派 分散居不可盡錄 惟吾十五世祖 諱思貴 文科大司諫 是生諱山+絜岷岐嶧峻 山+絜昌原府使 岐山陰縣監又知旌義 峻擧於行義爲郡守 是生諱普 蔭獒樹道察訪 後承召拜司甕直長 墓在大板村後癸坐 配淑人合窆有碣床石 是生諱龜壽鳳壽 皆參奉 龜壽考位 階下雙塋有碣 鳳壽考位 東麓雙塋子坐有碣 子諱弘澤 參奉贈工曹參議 考位西麓 合窆有床石 子諱浩 號紹溪 壬辰擧義 傾財産率家僮 赴敵多有功 特除司宰監僉正 墓在西山下 炭坊午坐原 子諱士俊 中武科行晉州兵使 墓在屯德雨翻村後亥坐原 挽近以來 子孫沈滯 慨歎奈何 先子五衛將 諱運杓 當乙未春 回祿之災 齋閣將歸掃如憤身 上屋鑒截 焦爛之際 火瓦搏地 烟炎漲天 終乃救出數間 僅僅修補存至近年 近年重新之役 族兄 炳曦 炳夏 炳吉 炳圭 謹孜監董血心了畢 此皆可爲模範之積也 嗟嗟 後仍傳受心法 永世嗣葺 庶斯室之不廢也夫
 
夫重光協治 淸和月 期望後孫 炳斗 謹識
 
 
 

2. 죽계 귀후재기

 
十歲經營葺登廬  십년 동안 수리한 여막에 오르니
誠心事死事生如  성심으로 죽어서나 살아서나 똑같이 섬겼네.
華閥鄧林兼薊竹  등림(鄧林)394), 계죽(薊竹) 같이 빛나는 문벌
珍羞秋果與春蔬  가을 과일와 봄 푸성귀 진찬(珍饌)을 마련하네.
 
宗法有模蘇世牒  종법(宗法)은 소식(蘇軾)의 세첩(世牒)을 본받았고
碣銘無愧柳公書  비에 새긴 글은 유공(柳公)에 부끄럽지 않으니
後承若繼吾先志  후손들은 이에 우리 선조의 뜻을 이어가며
本是同根遠不疎  본래 같은 뿌리였으니 멀어도 소원할 수 없으리
 
 
 

3. 죽계 귀후재기

 
我家厚德自來前  우리 집안의 후덕(厚德)은 오래 전부터
奕葉遺芬一洞天  빛나는 후손들이 남긴 향기 하나의 동천(洞天)395)
歷世雲仍花滿樹  대대로 이어온 후손들 꽃나무로 가득하고
當春雨露草盈阡  이번 봄에 이슬비로 풀은 무덤길에 가득하네.
 
奐輪非是觀人美  화려한 모습 사람이 만든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 아니니
潔藻香將享祖先  마름풀396) 향기내어 선조에게 제향하려 하네.
眼中常欲松枝翠  눈 앞에 솔가지는 항상 푸르를 것이니
齋與靑山久久淸  재각과 청산은 영원히 푸르리라.
 
불초 후손 병희(炳羲) 삼가 씀
 
 
 

4. 죽계 귀후재기

 
鳩謀蟻役創墳廬  모으기로 모의하여 열심히 일해서 재각을 지었네397)
自此英靈在上如  이 영령(英靈)이 위에 계신 듯 하네
寓慕未忘獒驛樹  사모하여 오수역의 나무에 새긴 것을 잊지 않으리
獻誠何擇鴈門蔬  헌성(獻誠)을 무엇을 선택하리 안문의 푸성귀
 
山來中夏尼丘魯  산에 찾아오는 중하(中夏) 이구(尼丘)의 노산398)
板揭當胡世宰書  편액 걸기에 어찌 세상의 재상 글씨가 당하랴.
共扡愼終追遠誼  함께 신종추원(愼終追遠)의 정의로 의지하니
繼承遮莫有親疎  후손들의 친소(親疎)가 무슨 상관이리오.
 
後孫正基謹識 후손 정기 삼가 씀.
 
 
 

5. 죽계 귀후재기

 
魯南有此奉先廬  노산 남쪽 여기에 선조를 위한 여막 받드니
重疊奇峰畫不如  겹겹이 기이한 봉우리 그림 같지 않네.
秋熟牧童齎美果  무르익은 가을에 목동은 좋은 과일을 가져오고
春深採女報新蔬  봄 깊어 나물캐는 여인은 봄나물로 보답하네.
 
焄蒿神自來昭格  좋은 향으로399) 신이 저절로 밝게 오시니
侍墓誰曾敎讀書  시묘(侍墓)하며 누가 독서를 가르치겠는가?
花樹年年爾會約  대대로 화수회(花樹회)를 약속하여
莫將香影也扶疎  우거진 나무에 향기로 그림자 드리우지 말라.
 
後孫正基謹識 후손 정기 삼가 씀
 
 
 

6. 죽계 귀후재기

 
귀후재(歸厚齋) 중수운(重修韻)
 
肯構重光墓隧前  집을 지으니 무덤 앞 길 더욱 빛나고
微誠庶有格于天  작은 정성이 하늘에 이를 듯 하네
杉松老栢瞻行地  삼나무 소나무 늙은 잣나무도 길가를 쳐다보며
春露秋霜感慕阡  봄이슬 가을서리에 무덤가에서 감모하네
 
詩禮業敦能啓後  시예(詩禮)를 업삼으니 후손의 길을 도탑게 열어
豆籩儀潔可承先  정결한 의례로 제사400) 드리니 선조를 이을 만하네
遠追拜頌楣頭揭  추원(追遠)하며 절하며 문미(門楣) 맡에 걸어두니
歸厚遺風萬世傳  ‘귀후(歸厚)’의 유풍(遺風)은 영원히 전하리라.
 
신미(辛未) 4월 日
13세손 병식(炳軾) 삼가 씀.
 
 

7. 죽계 귀후재기

 
草南山勢此有前  초남(草南)의 산세(山勢)는 예전에도 이러했지
瞻仰愈高崢上天  더욱 높이 첨앙(瞻仰)하여 가파르게 하늘에 오르네
風自珍城彼轉地  바람은 절로 진중하여 땅에서 구르니
雲來方丈草連阡  구름이 방장(方丈)에서 오니 풀은 무덤가에 잇닿았네.
 
常時壤樹猶陰庇  평소 심어 기른 나무 그늘 더욱 덮이네
過處羹墻是慕先  이곳을 지나며 선조를 그리며 사모하는 마음일세.
累世苾芬由厚績  오랜세월 향기로운 제사 두터이 쌓였으니
一如初築再相傳  처음 지었을 때와 같이 서로 전하리라.
 
후예(後裔) 병하(炳夏) 삼가 지음
 
 
 

8. 죽계 귀후재기

 
墳菴瀟灑魯山前  노산(魯山) 앞 분암(墳菴) 맑고 깨끗하여
流水浮雲是別天  유수(流水)와 부운(浮雲) 바로 별천지로세
板楣昭著曾賢訓  판미(板楣)에 현명한 유훈이 더욱 밝게 드러나니
樵牧皆知梁氏阡  초목동목수(樵童牧竪)도 모두 양씨 무덤인줄 알겠네
 
澗毛亦可伸情禮  시냇가 나물에서도 정례(情禮)를 펴니
風木倂爲感慕先  풍목(風木)도401) 함께 선조를 감모하누나.
世遠愈誠歸厚德  먼 세대도 더욱 정성 드리니 귀후(歸厚)의 덕이라
登斯禪血戒相傳  이 곳에 오르는 자 가르침을 서로 전해 주리
 
후손 갑표(甲杓) 삼가 지음
 
 
 

9. 죽계 귀후재기

 
廳堂新制勝於前  청당(廳堂)을 새로 지으니 이전보다 좋으네
悽息尊靈極樂天  이곳에 거하는 영령이여 극락천이리다.
漠漠世問黃壤路  막막한 세상에 무덤가는 길 물으니
悠悠仙跡白雲阡  유유한 신선의 자취 흰 구름 가는 길이라
 
斯馨奠禮愈瑩昵  이 향기로운 전례(奠禮)
愈久微誠恐忝先  아주 오래 하찮은 정성으로 선조를 욕하면 어쩌나
大板山中全局蔭  대판(大板) 산 중 모든 곳에 음덕이니
鬱蒼松柏至今傳  울창한 소나무 잣나무 지금까지 전해지네
 
후손 봉표(奉杓) 삼가 지음
 
 
 

10. 죽계 귀후재기

 
吉蠲爲饎自來前  정결히 술밥 지어 올리는 제사 예전부터 이어오니
歸厚吾齋一洞天  ‘귀후’라는 우리 재각이 하나의 하늘이라.
陶瓦崢麗新棟宇  기와도 가파르게 수려한 새로 지은 재각
杉松蒼鬱舊封阡  삼송(杉松) 울창한 옛 봉분길
 
爰居爰處追思遠  여기에 거처하며 선조를 생각하며
肯構肯堂永慕先  선조의 사업을 이어가며 영원히 사모하리
且勗諸宗花樹會  힘써 여러 종족의 화수회
聿修世世共斯傳  조상의 덕을 닦으며 세세토록 함께 이곳을 전하리라.
 
후손(後裔) 한표(漢杓) 삼가 지음.
 
 

 
각주
390) 관쇄란 문에 빗장을 걸어 자물쇠를 잠근다는 풍수형
391) 양을나(良乙那) : 탐라(耽羅)를 처음 세웠다는 전설상의 세 신인(神人) 중의 하나.
392) 묘는 경상남도 산청군 신안면 중촌리 창안마을 산39번지에 있다.
393) 원문의 회록(回祿)은 축융(祝融)과 함께 전설 속에 전하는 화신(火神)의 이름이다
394) 등림(鄧林) : 전설상의 숲이다. 옛날에 과부(夸父)가 해를 쫓아 달려서 해가 들어가려 할 즈음에 목이 말라 하수(河水)와 위수(渭水)를 마셨는데도 부족하여 대택(大澤)의 물을 마시려고 하였는데 도중에 목이 말라서 죽고, 버려진 그의 지팡이가 화(化)하여 등림이 되었다고 한다. 《山海經 卷8 海外北經》
395) 동천(洞天) : 도가(道家)의 용어로, 신선이 사는 별천지(別天地)를 뜻한다
396) 《시경(詩經)》 소남(召南) 채빈(采蘋)에 “마름풀을 캐어라, 남쪽 시냇가에서. 마름풀을 캐어라, 저 길가의 흐르는 물에서.[于以采蘋 南澗之濱 于以采藻 于彼行潦]”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이 시는 대부(大夫)의 부인(夫人)이 마름풀을 캐어서 제사를 정결하게 지내는 것을 찬미하여 부른 노래이다. 간비(澗阰)의 간은 시내이고, 비는 비산(阰山)을 가리키는데, 비산에는 향초(香草)가 많기로 유명하다
397) 《시경》 〈소남(召南) 작소(鵲巢)〉에 “까치가 둥지를 지어 놓으니, 비둘기가 들어가서 살도다.〔維鵲有巢 維鳩居之〕”라고 한 데서 나온 말로, 비둘기는 본래 스스로 둥지를 만들지 못하고 까치가 만들어 놓은 둥지에 들어가서 살기 때문에, 생계를 영위하지 못하는 데에 비유된다.
398) 이구(尼丘) : 산동(山東) 곡부(曲阜)에 있는 산 이름이다. 공자(孔子)의 부모가 이곳에서 기도하여 공자를 낳았다는 기록이 《사기(史記)》 권47 〈공자세가(孔子世家)〉에 나온다. 그래서 공자의 이름이 구(丘)이고, 자(字)가 중니(仲尼)라고 한다.
399) 《예기》 〈제의(祭義)〉에 “뭇 생명체는 반드시 죽고, 죽으면 반드시 흙으로 돌아간다. 이것을 귀(鬼)라고 한다. 뼈와 고기는 아래에 묻히고 이것이 야토(野土)가 되면 그 기운은 위로 올라가서 소명, 훈호(焄蒿), 처창(悽愴)이 된다. 이것이 바로 백물(百物)의 정기가 되니, 여기에 신(神)이 나타난다.” 하였는데, 주자(朱子)가 이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귀신이 밝게 드러나는 것을 소명, 그 기가 위로 올라가는 것을 훈호, 사람의 정신을 두렵게 하는 것을 처창이라 한다.” 하였다.
400) 원문의 豆籩은 모두 법도에 맞게 쓰는 예기(禮器)로 제사를 지내는 것을 뜻한다.
401) 풍목은 ‘풍수(風樹)’와 같은 말로, 생전에 어버이께 효성을 다하지 못해 사후에 슬퍼하는 마음을 말한다. 춘추 시대 때 공자(孔子)가 길을 가는데 고어(皐魚)라는 사람이 길에서 칼을 안고 슬피 울고 있기에 까닭을 물었더니,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여도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고 싶어도 어버이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라고 하고는, 서서 울다가 말라 죽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韓詩外傳 卷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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