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의 모습과 역신에 대한 것이 자세히 곁들여 있고, 역신에 대한 분노가 고조되어 있는 비교적 장형(長形)의 노래이다. 귀신을 쫓는 ‘나례(儺禮)’에서 처용가면(處容假面)을 쓰고 춤출 때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하며, 조선시대에 들어와 세조(世祖) 때는 대부악(大部樂)으로 확장된 가면희에서 불렀고, 고려 속요 '처용가'는 향가 '처용가'와 마찬가지로 처용이 역신을 몰아내는 축사의 내용을 지닌 일종의 무가로처용의 모습이 자세히 묘사되고, 역신에 대한 처용의 분노가 절실하게 나타나 있어서 희곡적 분위기가 강하다. 향가 '처용가'의 일부분이 들어 있으며, 처용희의 일부로서 가창되었으며, 이 작품을 읽으면서 처용의 정신적 자세를 한번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4. 심화자료
• 나례(儺禮)
대나(大儺)라고도 하며, 원래 중국에서 시작된 것으로 《고려사》에 1040년(고려 정종 6)에 세밑 나례를 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전에 전래된 듯하다. 나례에 동원된 인원은 시대에 따라 다르나, 고려의 궁중에서는 12~16세의 소년을 뽑아 이를 진자(粉子:초라니)라 하고 24인을 1대(隊)로, 6인을1줄로 하여 가면을 씌우고 붉은 치마를 입혔다. 집사자(執事者) 12인도 붉은 옷을 입었고, 공인(工人) 24인 가운데 한 사람은 방상시(方相氏)가 되었는데, 가면을 쓰고 오른손에는 창을, 왼손에는 방망이를 들고, 황금으로 된 눈이 4개 달린 곰의 가죽을 뒤집어썼다. 호각군은 20인을 1대로 하는데 기(旗)를 잡는 사람 4인, 퉁소를 부는 사람 4인, 북을 가지는 사람 12인으로 구성하였다.
이 나례의식이 그대로 조선시대까지 전해져 궁중뿐만 아니라 민간에도 널리 퍼졌다. 민간에서는 섣달 그믐날 집 안팎을 깨끗이 청소하고, 악귀는 굉음에 놀라서 달아난다 하므로 그믐날 밤에 마당에 불을 피우고 폭죽을 터뜨렸다. 조선시대에는 나례가 악귀를 쫓아내는 일 외에도 칙사의 영접, 왕의 행차, 감사의 영접 등에 광대의 노래와 춤을 곁들여 오락으로 전용되었다. 나례 가운데 처용무는 악공과 기녀가 맡고, 곡예 ·희학지사(戱謔之事) 등은 재인(才人)이 담당했는데 여악(女樂)까지 동원되었다. 이것을 잡희 ·백희 ·나희라 하였다.
나례 출연자로는 나례청에 소속된 배우 ·광대 ·수척(水尺) ·중[僧] ·재인 ·현수재인(絃首才人) ·백정(白丁) 등이 있는데 이들은 사회적으로 천대받았다. 나례의 공연 장소는 야외인 경우는 무대장치를 하였고, 궁중에서는 인정전(仁政殿) ·사정전(思政殿) ·명정전(明政殿) 등에서 행하였다. 그리고 윤거(輪車)라는 수레를 몇 개씩 이동해서 나례를 하였다. 오늘날의 나례는 화려하지 않은 민속예술로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