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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의 길잡이
2015년 6월 6일
about 문화재·역사·전
내서재
추천 : 0
(2019.11.21. 19:07) 
◈ 조선왕릉의 길잡이
TV 드라마 <징비록>을 보면서 왕릉에 대해 알고 싶었습니다. 마침 조선왕릉에 대한 강좌를 듣고 내용을 정리하여 포스팅합니다. 조선 왕릉은 1392년 태조 이성계가 개국하여 1910년 순종황제까지 519년 동안 조선 27대 왕과 왕비가 묻힌 곳이다.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의 무덤은 능이라 하지 않고 묘라하며 연산군묘는 도봉구, 광해군묘는 남양주에 있습니다.
TV 드라마 <징비록>을 보면서 왕릉에 대해 알고 싶었습니다. 마침 조선왕릉에 대한 강좌를 듣고 내용을 정리하여 포스팅합니다. 조선 왕릉은 1392년 태조 이성계가 개국하여 1910년 순종황제까지 519년 동안 조선 27대 왕과 왕비가 묻힌 곳이다.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의 무덤은 능이라 하지 않고 묘라하며 연산군묘는 도봉구, 광해군묘는 남양주에 있습니다.
 
조선왕릉은 총 42기로 북한 소재 2기(정종과 비, 태조 원비)를 제외한 남한의 40기는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으며, 왕릉은 그 시대의 건축, 조각, 조경 등을 알아볼 수 있는 종합예술품으로 역사 문화적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조선 왕릉에 대해 알아본다.
 
▶조선 왕릉의 수는?
☞왕족을 포함한 총 118기로 왕릉(王陵)은 42개, 원(園)은 12기, 묘(墓)는 64기이다 신분에 따라 명칭을 달리한다.
 
▶무덤의 종류인 능(陵), 원(園), 묘(墓)의 차이는?
☞왕족의 무덤은 왕실의 위계에 따라 능, 원, 묘로 분류된다.
능(陵)은 추존왕(追尊王, 실제로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죽은 뒤에 묘호가 내려진 왕). 추존왕비를 포함한 왕과 왕비의 무덤이고,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묘(墓)는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아들, 딸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 등의 무덤을 일컫는다.
 
▶휘(諱), 묘호(廟號), 능호(陵號)란?
☞휘는 왕의 이름, 묘호는 왕이 3년상을 끝내고 종묘(宗廟)에 신위(神位)를 모실 때 붙이는 이름, 능호는 능의 이름이다. 예를 들면 휘는 이산, 정조(正祖)는 묘호고 건릉은 능호다.
 
▶묘호 결정방법은?
☞선왕이 승하한 이후, 선왕의 뒤를 이은 후임 왕이 대신들과 논의하여 최종적으로 결정하였다.
 
▶조(祖)와 종(宗)의 차이는?
나라를 세운 왕(創業之主)에겐 ‘조’를, 선왕의 뜻을 계승하여 나라를 잘 다스린 왕(繼體之主)에겐 ‘종’을 붙인다. 태조는 나라를 세운 왕에게, 성종은 국가의 문물을 완성한 암금이다. 종(宗)은 선왕의 적자(嫡子)로 왕통을 계승한 임금을 말한다. 선조때부터 조(祖)를 선호하여 선조는 선종에서 바꿨고 정조때때영종대왕에서 고종이 영조대왕으로 바꿨다.
 
▶왕릉 조성 기간은?
왕릉은 왕이 사망하고 나서 5개월 안에는 반드시 그 조성이 완료되어 왕의 시신을 그곳에 안치해야 하는 시간적, 절대적 제약을 안고 조성되었다. 왕이나 왕비 또는 왕세자, 왕대비가 승하하면 궁궐 안에 빈소를 차려놓고 그 시신을 5개월 동안 모셔두고 정성껏 제사를 모신다. 이 기간 동안에 왕릉의 터를 결정하고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장인들을 불러 모으고 가장 좋은 석재와 목재를 수집한다. 이어서 봉분을 꾸미고 봉분 주변의 석물을 조각해서 배치하고 정자각을 비롯해서 비각, 홍살문, 재실 등을 짓는다.
 
▶조선 27대 왕릉 일람표(북한 소재,연산군묘, 광해군묘 포함)
 
 
 
 
 
☞봉릉(封陵)이란 폐위(廢位)된 국왕 ·후비(后妃)를 복위(復位) ·추숭(追崇)하였을 때, 그 원묘(園墓)를 능(陵)으로 추봉(追封)하는것을 말한다.
 
▶왕릉의 선정 기준은?
☞유교국가지만 조선왕릉의 터를 잡을 때에는 풍수상의 길지를 택하기 위해 신중을 다했다. 풍수에 밝은 지관이 몇 군데 후보지를 골라서 최종적으로는 임금이 가장 좋은 조건의 터를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 관례였다.
 
현재 많은 왕릉이 자리 잡은 도성 안팎의 장소들은 각 시대 여건에서 판단한 가장 이상적인 장소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왕릉을 조영할 때에는 가급적 본래의 지형 조건을 훼손하지 않고 지형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최소한의 인공적인 시설을 설치하려는 자연과 조화를 우선시하였다.
 
풍수적으로 명당(배산임수 : 背山臨水, 산을 등지고 물을 내려다 봄)이어야 하고 한양 도성 밖 10리에서 100리 안에 있어야 왕이 하루에 행차할 수 있다. 왜냐면 선왕들의 왕릉을 수시로 참배하기 위함과 왕의 참배로 백성들의 수고와 민폐를 줄이기 위함이었다.
 
▣ 왕릉 장소선택은 선왕의 유지도 중요하지만 살아 남아 있는자의 몫이다. 영조는 원하던 곳이 아닌 원릉에 묻혔다. 정조의 사도세자 죽임에 대한 소심한 복수가 아닐까?
 
▶왕릉 선정 기준에 어긋난 능은?
☞거리가 가장중요한 항목이다.
①먼저 정릉(貞陵)이다. 태조가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를 잊지 못해 한양도성 밖에 왕릉을 만들어야 하나 현재 중명전과 덕수궁사이에 정릉을 만들고 옆에 흥천사를 지었다. 1408년 태조 사망 후 앙숙지간인 태종(太宗)은 1409년 정릉을 강제로 중구에서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겼다.
 
정릉(貞陵)에서 나온 정동(貞洞)이란 명칭을 지금도 사용한다. 옮길 때 나온 병풍석은 무너진 청계천의 광통교(광교) 다리 보수에 사용하여 지금도 볼 수 있다. 강남구 정릉(靖陵)은 도성밖이다.
②정종과 정종 비의 무덤인 후릉과 태조 원비의 제릉이
개성에 있다.
③세종의 무덤인
여주의 영릉(英陵)은 원래 서울 대모산에 있었으나 천장하였다.
④단종의 무덤은
영월의 장릉으로 청령포에서 유배당해 영월에 묻혔다.
⑤효종의 무덤은
여주의 영릉(寧陵)이다. 여주에 영릉이 2개다.
 
 
 
\na-;▼세계유산 미등재된 개성의
제릉,후릉
 
 
 
 
폐위된 연산군묘와 광해군묘는 있는 곳은 ?
 
 
 
▶장례치룰 임시 조직은?
☞왕이 죽으면, 궁에서는 장례를 치르기 위해 장례를 총괄하는
국장도감(國葬都監), 시신을 임시로 안치할 빈소의 설치와 상복을 준비하는
빈전도감(殯殿都監), 무덤을 조성하는
산릉도감(山陵都監)이 임시로 구성된다.
 
▶왕릉의 형태는?
☞왕은 살아서는 궁궐이고 죽어서는 왕릉이다.
 
①단릉(單陵)은 왕, 왕비의 봉분을 각각 조성한 능으로 단종(장릉), 태조(건원릉), 중종(강남의 정릉)이 있다.
쌍릉(雙陵)은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하게 배치한 능으로 태종과 비(헌릉), 명종과 비(강릉)이 있다.
합장릉(合葬陵)은 왕과 비를 하나의 봉분에 합장한 능으로 세종과 비 (영릉), 순종과 원비. 계비(유릉)이 있다.특히 유릉은 동봉삼실릉(同封三室陵)이라고도 한다.
동원이강릉(同源異岡陵)은 하니의 정자각 뒤 각기 다른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과 석물을 배치한 능으로 세조와 비(광릉), 문종과 비(현릉)이 있다.
동원상하봉릉(同源上下封陵)은 한 언덕에 위, 아래로 각각 왕과 비의 봉분과 석물을 설치한 능으로 효종과 비(영릉), 경종과 비(의릉)이 있다.
삼연릉(三連陵)은 왕과 왕비,계비의 3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헌종과 원비, 계비(경릉)이 있다.
 
 
 
 
 
왕릉의 변천사는?
 
☞단릉 형식은 건원릉부터 시작하여 조선중기까지 나타나며 18세기 이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쌍릉 형식은 시대별로 고르게 나타난다. 동원이강릉형식은 세조가 친히 능지를 정한 경릉부터 시작되었으나
15세기경에만 집중되었을 뿐 이다. 합장릉, 삼연릉의 형식은 18세기 이후에 많이 나타나는데, 이는 능역 조성시 소요되는 경비와 인력을 절감하는데 효과적이어서 많이 이용되었다. 그리고 풍수적으로 적합한 입지가 공간적으로 협소하거나 정축(正軸)의 조성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동원상하의 형식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왕릉의 구성은?
☞능침공간, 제향공간, 진입공간으로 나눈다.
능침공간은 왕과 비의 능침(봉분)이 있는 성역으로 죽은 자의 공간이다. 능침. 곡장(曲牆. 능침 보호를 위한 쌓은 담장), 망주석(望柱石. 무덤 앞에 놓은 혼유석의 좌우에 벌려 세우는 한 쌍의 8각 돌기둥), 혼유석(魂遊石. 무덤 앞에 놓은 영혼이 나와서 놀도록 설치한 직육면채의 돌), 장명등(長明燈. 묘역에 불을 밝혀 사악한 기운을 쫓는 등), 문석인(文石人), 무석인(武石人), 양석(羊石)과 호석(虎石), 석마(石馬)가 있다.
제향공간은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비각, 참도(신도와 어도), 정자각, 홍살문이 있다.
진입공간은 왕릉의 관리와 제례준비를 하는 곳으로 재실(능참봉이 총책임자)과 금천교가 있다.
 
 
 
 
 
▶추가로 용어 뜻은?
①하마비(下馬碑) : 말에서 내리는 곳으로 여기서부터 재실까지는 가마로 이동한다.
②배위(拜位) : 절을 올리는 곳이다.
③수복방(守僕房) : 능을 지키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참도의 동쪽에 위치한다.
④수라간(水喇間) : 제향음식을 준비하고 차리는 곳이다.
⑤예감 : 축문과 폐백을 태우고 묻는 돌상자이다.
⑥망주석(望柱石) ; 혼이 백을 찾을 때 표지역할을 한다.
⑦병풍석(屛風石) ;봉분을 보호하기위해 12개의 판석(12지신상) 또는 면석(面石)이다.
⑧난간석(欄干石) : 봉분둘레에 설치한 돌 난간이나 석주이다.
⑨홀(笏) : 문인석에 들고 있는 것으로 신하가 알현(
見)할 때 손에 쥐던 것으로 길이는 30
cm 가량이고 넓이는 아래가 6
cm, 위가 3.5
cm정도다. 본래가 임금 앞에 나아가 여쭐 말씀이나 이르시는 말씀을 붓글씨로 메모했다 지울 수 있게 만든 것이었는데 나중에는 의례적으로 들게 되었다.
⑩산릉제례(山陵祭禮) : 역대 제왕과 왕후에 대한 제사의식을 지칭하는 것으로, 오례의(五禮儀) 가운데 길례(吉禮)에 해당한다. 산릉제례는 속절제(俗節祭)와 기신제(忌辰祭)로 나눌 수 있다. 속절제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대표하는 날(정월초, 한식, 단오, 추석, 동지, 섣달 금음)과 청명(淸明)날에 각 능에서 모시는 제례를 의미하며 기신제는 왕이나 왕비가 승하하면 기일에 제를 봉행하는 예이다.
 
석물은 왜 설치했나?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인물상과 동물상을 비롯하여 봉분의 둘레와 전면에 무덤의 주인공의 영혼을 위한 의식용 석물들이 배치된다.
 
조선왕릉은 음양사상과 풍수지리를 기본으로 하여 신인(神人)과 신수(神獸), 신비한 힘을 지닌 신령한 도구와 상서로운 물건 등으로 꾸몄고 능실을 보호하고 왕의 영원한 안식의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와 같은 간절한 기원이 왕릉 주위를 장식하거나 주변에 배치된 석조 의례물의 모든 요소에 체계적으로 배어있는 것이 조선 왕릉 제도에서 석물의 역할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한국인의 내세관과 수호적 성격이 상징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석물은 거의 능침공간에 배치되어 있으며 왕릉으로서 장엄함을 강조하고 주변 경관과 조형적으로도 조화를 이루는 선조(先祖)의 사후 세계를 위한 격조 있는 예술품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조선왕조 500여 년 동안 1300여 점의 조각이 동일한 유형으로 끊임없이 조성되었고 대부분 온전히 보존되어 있어 그 역사적 가치와 예술적 고유성이 매우 높다.
 
▶석물에서 느끼는 유교,불교,도교흔적은?
 
①유교적 측면
 
문무석인 배치에서 문인을 무인보다 높은 위계에 놓은 문관 우위 사상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예외는 있지만 대체로 남성 중심적인 경향이다. 일부 석양을 제외하고는 모든 동물과 인물이 남성이고 무보다는 문을, 여보다는 남을 우위로 두었던 유교의 가치와 상통한다.
그리고 전체 규모에서 과대하게 크게 조성하지 않은 특징도 보인다. 여기에는 왕으로서 백성을 사랑하라는 유교의 가르침을 실천한 것으로, 능의 조성 과정에서 민폐나 백성의 원성을 피하려는 흔적이 곳곳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예를 들어 기록에 보면 왕릉 제작에 동원된 인원들에게 충분한 인건비를 지급하도록 배려했으며 능을 조성하면서 이주하게 되는 가옥에 대한 보상관련 내용이 의궤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었다.
 
②불교적 측면
 
조선은 불교를 배척한 유교 국가였지만 왕릉의 장식 면에서는 불교적 소재가 조선 왕릉 전반에 나타난다. 우선 사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석등을 장명등의 형태로 봉분의 정면 가운데 부분에 놓았고 조각에서도 연잎을 장식하였다. 또 불구(佛具)의 일종인 영탁과 영저를 새긴 석물도 많이 등장한다.
 
③도교적 측면
 
석양과 석호의 교차 배치는 음양사상이 반영된 것으로 보이며, 불교 용구인 영탁(방울)의 표현에서 가운데 부분에 태극을 도입했고, 불교와 결합된 12지신상을 병풍석의 사방에 표현하고, 구름 문양을 반복적으로 표현한 것은 도교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불교, 유교, 도교적인 요소가 토착화하면서 민간신앙과 합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석호는 산신사상과 결합한 것으로 볼 수 있고 특히 산신석을 놓아서 산신에게 제사지낸 것 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귀면(무석인의 갑옷, 고석의 표면), 모란 등의 장식 소재와 풍수지리에서 무덤을 피장자의 집으로 인식하여 명계(冥界)의 주택으로 영원한 거주를 보장하려고 하였다
 
▶정자각의 동쪽계단과 서쪽 계단의 차이는?
☞정자각의 동쪽은 신계(神階)와 어계(御階)로 2개고 서쪽은 어계만 있다. 왜냐면 신(神)은 봉분으로 가기 때문이다.
 
▶혼유석(魂遊石)과 상석(床石)의 차이는?
☞상석과 혼유석은 모두 직육면체 돌이지만 사대부의 묘 앞의 상석(床石)은 제사 음식을 차려 놓지만 왕릉은 정자각에 제사 음식을 차려놓고 무덤 앞의 혼유석(魂遊石)은 영혼이 나와서 놀도록 설치한 곳이다. 혼유석의 받침돌을 고석(鼓石)이라 한다.
 
▶정자각의 제수진설도(건원릉)는?
 
 
▶혼백(魂魄)은 무엇인가?
☞죽으면 혼과 백이 분리된다고 믿었고 혼은 영혼으로 정신, 백은 육체를 통제한다고 하여 혼은 종묘, 시체인 백은 왕릉에 모셨다, 그래서 종묘제례가 열리고 왕릉에서 혼을 불러 제례를 치룬다.
 
제례의식과 절차?
☞조선 초는 고려의 영향을 받아 불교식으로 기신제를 모셨지만 세종 때(1433)부터는 유교의식의 예를 정립하고 이를 모든 제례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래서 제례 의식은 법식에 따라 경건하고 엄격하게 진행되었다. 제례를 모시기 하루 이틀 전에는 봉심(奉審)이라 하여 반드시 묘소가 이상없는지 살피는 의식을 먼저 행하게 되고 제례 시에는 제관들은 검은 뿔모자에 옅푸른 제복을 입고 검은 대와 끈으로 여미며 예화(禮靴)를 착용하고 의식을 행하였다.
 
①궁궐 준비의식
 
②왕릉 준비의식
 
③제례의식
 
▶종묘제례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다. 2001년 5월 18일 종묘제례악과 함께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되어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전통 제례 의식으로 대제를 봉행하고 있다.
 
북한에 있는 왕릉(제릉과 후릉)에 대한 제례는?
☞건원릉에서 정자각 뒷문을 닫고 기신제를 지낸다.
 
▶도굴에 어떻게 대비하였나?
☞신라,백제능처럼 고가의 부장품을 넣지 않아서 도굴범들의 표적에서 벗어났다. 석실로 테두리하고 여러 겹으로 쌓고 횟가루라고 하는 회를 이용해 방수와 도굴방지를 했다, 회는 오래갈수록 더 단단해진다. 포크레인으로 파도 잘 안파질 정도다. 묘지를 관리하는 능참봉도 있어 도굴범 접근이 어려웠다.
 
▶왕릉 중 특색있는 능은?
①태조의 건원능 봉분은 잔디 대신 함경도 고향에서 가져온 흙에 억새를 심었다.
②태종의 헌릉은 문인석, 무인석, 석마가 다른 곳의 2배인 각각 4개다.
③세조의 광릉은 병풍석이 없고 숙종의 명릉은 왜소하고 철종의 예릉은 비교적 크다. 이는 선왕의 유지와 정치적 의지 때문이다.
④성종의 선릉과 중종의 정릉(靖陵)은 왜병에 의하여 파헤쳐지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⑤선조의 목릉의 참도는 곡선이다.
⑥사도세자의 융릉에는 난간석이 없고 정자긱과 봉분이 일직선이 아니며 주변에 소나무대신 참나무류가 대부분이다.시야에 막힘이 없애려는 정조의 배려일 것이다.
⑦순종황제의 유릉은 황제능이라 왕릉과 다르게 석물의 위치와 종류가 많고 다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릉의 문화적 가치는?
☞조선왕릉은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사후 공간이 융합된 건축양식을 비롯해 한 시대를 이끌었던 왕과 왕비의 무덤이 600년의 세월동안 전혀 훼손되지 않고 모두 완전하게 보존되어 온 점, 역사를 간직한 전통 제례의식이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는 점 등이 살아있는 문화유산으로 높이 평가받는 이유다
 
①보존성: 훼손되거나 없어지지 않고 보존되어 지금도 매년 제향일에 제례가 엄숙하게 행해진다.
②기록성: 국장의 절차, 왕릉조성 과정, 보존 관리를 역사에 기록하고 있다.
③독창성: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입지, 석물 배치 등 동양사상에 맞춰 조성하였다.
 
 
 
▼ 각 왕릉에 대한 정보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은 무료 입장
 
★ 공개하지 않는 곳은?
☞조선왕릉은 원,묘를 포함하여 총 118기이나 70기는 비공개다.(2017.3월)
 
 
2
 
온릉(양주), 효릉(고양 서삼릉 경내)
 
 
8
 
순강원(남양주), 휘경원(남양주), 영원, 회인원(남양주 홍릉과 유릉 경내),
영회원(광명), 소경원(고양 서삼릉 경내), 소령원(파주), 수길원(파주)
 
 
60
 
명빈묘(구리), 영빈묘(남양주), 의창군묘(남양주), 광해군묘(남양주), 성묘(남양주),
안빈묘(남양주), 의친왕묘, 덕혜옹주묘, 광화당묘, 삼축당묘, 귀인장씨묘, 수관당묘,
수인당묘(남양주 홍릉과 유릉 경내), 회묘 등(서삼릉 경내 및 부근)
※ 2016년 6월 파주 장릉이 공개됨
 
★공개하지 얺는 이유는?
☞조선왕릉 중 일부를 비공개하는 것은 문화재 보존과 훼손 방지를 위해서다.
①사유지 내에 있어서 관람을 위한 진입 공간이 확보되지 않았거나, 주변의 장애물 등으로 인하여 접근할 수 없는 경우
② 고건물, 석조물, 전통 조경물, 관람 시설물, 소방 시설물의 수리 혹은 복원공사가 전면적이고 장기간 시행되어 관람 환경에 영향을 미칠 경우
③관리 면적이 좁아서 관람 환경을 마련할 수 없는 경우
④자연 생태 환경(동물, 식생, 수문, 토양 등) 보존을 위해 필요한 경우
 
★비공개지역에 들어 갈수 있는 경우는?
☞비공개 지역은 다음 중 하나 이상에 해당하는 경우 문화재청장의 허가를 받아 출입할 수 있다.
① 학술조사 및 문화재의 수리·관리 등을 목적으로 입장하는 경우
②취재를 목적으로 하는 경우
③기타 문화재청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
 
★ 상업용 영화나 스틸사진촬영은 허가 받아야 하는지?
☞촬영을 위해서는 문화재청 궁.능원 및 유적 관람 등에 관한 규정에 의거 허가신청서와 함께 촬영시나리오, 문화재보존 준수서약서 등의 별도 신청서류를 작성하시어 촬영 3일전에 문화재청장의 허가를 받도록 되어있다.
관람객 기념용 촬영, 보도를 위한 취재촬영 및 기상예보용 배경 촬영, 국민교육자료 및 학술연구용 촬영 등에 대해서는 촬영요금이 면제된다.
 
 
 
\na-;출처: 문화재청,민족문화대백과. 위키백과.네이버, 동구릉 홈페이지,조선 왕릉 관리소 홈페이지,서헌강사진,YTN
 

 
※ 원문보기
문화재·역사·전
• 조선태조와 선조가 묻힌 동구릉(東九陵)
• 조선왕릉의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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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