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에 대한 강좌를 듣고 구리시 인창동에 위치한 동구릉(東九陵)을 서울 용산도서관 학습동아리와 함께 다녀왔다. 이름처럼 한양의 동쪽에 있는 아홉 개의 왕릉이 있는 곳이다. 왕릉은 왕과 왕비가 묻힌 곳이다. 조선왕릉은 총 42기로 북한 소재 2기(정종과 비, 태조 원비)를 제외한 남한의 40기는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동구릉은 1408년(태종 8) 태조 이성계가 승하하자 조성한 건원릉(健元陵)을 중심으로 임금 아홉 분과 17위의 왕비와 계비를 모신 곳이다.
조선왕릉에 대한 강좌를 듣고 구리시 인창동에 위치한 동구릉(東九陵)을 서울 용산도서관 학습동아리와 함께 다녀왔다. 이름처럼 한양의 동쪽에 있는 아홉 개의 왕릉이 있는 곳이다. 왕릉은 왕과 왕비가 묻힌 곳이다. 조선왕릉은 총 42기로 북한 소재 2기(정종과 비, 태조 원비)를 제외한 남한의 40기는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동구릉은 1408년(태종 8) 태조 이성계가 승하하자 조성한 건원릉(健元陵)을 중심으로 임금 아홉 분과 17위의 왕비와 계비를 모신 곳이다.
왕릉의 수호관리를 담당하던 참봉(參奉)이 상주하던 곳으로 제사에 쓸 향을 보관하고 제기(祭器)를 간수하며 제사와 관련한 전반적인 준비를 하던 곳이다.
\na-;▼수릉
\na-;▼좌측의 높은 길은 신도(神道) 우측은 어도(御道)
\na-;▼현릉
\na-;▼건원릉
\na-;▼개경사
\na-;▼금천교(禁川橋)
\na-;▼배위(拜位) : 이곳에서 절을 4배한다.
\na-;▼홍살문(紅箭門)
능역의 가장 아래쪽 정자각 남측 신도·어도가 시작되는 곳에 신성구역임을 표시하기 위해 세워놓은 문이다.
\na-;▼ 정자각 동쪽에서 올라가는 계단으로 좌측이 신계(神階) 우측은 어계(御階)로 각각 신도와 어도에서 연결된다.
\na-;▼정자각에서 본 건원능
\na-;▼건원릉 신도비, 보물 1803호
①1409년(태종 9 ) 4월 건립.
② 규모
☞ 총 높이 448㎝, 비신 : 높이 227㎝, 폭 120㎝, 두께 37㎝
☞ 이수 : 높이 108㎝, 폭 129㎝, 두께 38㎝
☞ 귀부 : 높이 113㎝, 폭 231㎝, 두께 228㎝
③태종의 명을 받아 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이 지은 비문을 좌정승(左政丞) 성석린(成石璘)이 글씨를 썼으며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정구(鄭矩)가 전액(篆額)을 담당하였다. 비석 뒷면에 새기는 글인 비음기는 예조좌참의(禮曹左參議) 변계량(卞季良)이 글을 지었고 역시 성석린이 글씨를 썼다. 총 높이 448㎝의 규모에 귀부이수(龜趺螭首) 양식을 갖추었다. 1691년(숙종 17)에 건립한 비각에 안치되어 있다.
④신도비 비신(碑身)의 앞면에는 권근이 지은 비문이 성석린의 단정한 해서체(楷書體)로 쓰여 있다. 비문에는 태조가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아 탁월한 무공(武功)과 정치력으로 백성들의 신망을 얻고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을 거쳐 조선을 개국한 후 왕위에 올라 선정을 펼친 전 과정이 개괄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비문의 첫 머리에 “유명(有明) 시강헌(諡康獻) 조선국태조(朝鮮國太祖) 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 건원릉신도비명병서(健元陵神道碑銘幷序)”라 표기되어 있고 비신의 상단 중앙에 새긴 전액이 “태조건원릉비(太祖健元陵碑)”라 되어 있어 건원릉 신도비임을 알 수 있다. 비문 말미에 새겨진 “영락(永樂) 칠년(七年) 사월(四月) 일(日) 입석(立石)”이라는 연대를 통해 1409년(태종 9) 4월에 건립하였음을 파악할 수 있다.
\na-;▼1900년 세운 대한 태조 고황제 건원릉 비
\na-;▼망우리(忘憂里)의 유래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종묘사직을 마련한 후, 선왕들의 능지를 정하기 위해 대신들과 함께 현재의 동구릉을 답사하였다. 그런데 무학대사는 그 자리가 선왕의 능지보다는 태조의 신후지지(身後支地)로 더 적합하다고 권고하였다. 태조는 그 권고를 받아들여 자신의 능지로 결정한다. 기쁜 마음으로 환궁하던 중 지금의 망우고개 위에서 잠시 발길을 멈추고 자신의 능지로 결정한 곳을 바라보니 과연 명당이었다. 이에 태조가 “이제는 근심을 잊게 됐다.”라고 한 데서 ‘망우(忘憂)’라는 이름이 붙게 됐다.
\na-;▼선조의 목릉 (유일하게 봉분까지 갈 수 있다. 2015.6.12현재)
\na-;▼선조대왕 목릉 신도비
\na-;▼좌측부터 문인석, 석마, 무인석, 석마
\na-;▼장명등
\na-;▼홀(笏)을 들고 있는 문인석(문석인)
머리에 쓰는 복두(幞頭), 포(袍)로 불리는 옷, 허리띠인 대(帶), 손에 드는 홀(笏), 가죽신인 화(靴)를 갖춘 공복을 착용한 백관의 모습이다.
\na-;▼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칼을 잡고 서 있는 무인석(무석인)
\na-;▼ 바늘처럼 구멍있는 망주석(望柱石)은 혼이 자기의 유택을 찾을 때 이용한다.
\na-;▼혼유석과 받침돌인 고석
\na-;▼병풍석
\na-;▼난간석
\na-;▼석호(돌 호랑이)
\na-;▼석양(돌 양)
\na-;▼석마
말의 크기나 형태가 사실감이 떨어진다. 크기는 문무석인에 비해 말의 크기가 너무 작고 안장이 없으며 꼬리도 길게 땅에 끌리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