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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백제 박물관을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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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문화재·역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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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1. 19:07) 
◈ 한성백제 박물관을 다녀와서
6월 12일 서울 올림픽공원내 한성백제 박물관을 용산도서관 학습동아리분과 함께 다녀왔다. 백제하면 먼저 무엇이 생각나는가? 온조가 나라를 세웠고 영토를 넓힌 근초고왕, 로맨스의 무왕, 성왕, 계백, 의자왕, 부여의 부소산성과 낙화암, 정림사지 5층탑, 왕인과 아직기 등이다.
6월 12일 서울 올림픽공원내 한성백제 박물관을 용산도서관 학습동아리분과 함께 다녀왔다. 백제하면 먼저 무엇이 생각나는가? 온조가 나라를 세웠고 영토를 넓힌 근초고왕, 로맨스의 무왕, 성왕, 계백, 의자왕, 부여의 부소산성과 낙화암, 정림사지 5층탑, 왕인과 아직기 등이다.
 
한성(위례성)은 백제(BC18~660)의 역사 기간 중 73%인 493년 동안(18BC~475) 수도였다. 그래서 한성백제란 단어를 썼단다. 475년 개로왕때 고구려의 공격으로 웅진(공주), 그 이후 538년 성왕때 사비(부여)로 즉 한강유역에서 금강유역으로 내려갔다.
 
위례성이라 확신하는 풍납토성은 땅속에 묻혔으나, 1925년 을축년 한강 대홍수 때 숨겼던 그 모습을 보여주었다. 패망한 나라를 기록하고 자료와 유물 보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으로 남아 있는 백제의 유물은 많지 않으나 이곳에서 발견된 것과 중국과 일본의 백제유물은 그 찬란함을 말해준다. 과거의 영광은 지는 해처럼 사라졌지만...
 
\na-;▼한성백제 박물관 전경으로 건물형태는 배모양, 외벽은 풍납토성처럼 디자인했다.
 
 
\na-;▼칠지도(七支刀)를 눕힌 한성백제 박물관 로고
 
 
●위례성(慰禮城)은?
한강의 다른 이름은 한수, 아리수, 백제의 왕은 어라하(於羅河)이라했으며 삼국사기에 따르면 위례성은 북으로 한수(漢水)를 띠고 동으로 높은 산악에 의거하고 있으며 남으로 비옥한 들판이 보이고 서쪽으로 큰 바다에 막혀있다. 풍납토성(위례성)은 몽촌토성(한산)과 2성(二城)체제로 볼 수 있다.
●한강의 명칭
백제 사람들은 한수(漢水), 욱리하(郁里河) 등으로 부르고, 고구려는 아리수(阿利水), 조선시대에는 경강(京江)이라 불렀다.
 
\na-;▼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위치
 
\na-;▼ 따뜻한 남쪽으로
 
 
 
 
 
 
\na-;▼풍납토성에 대한 설명
 
 
 
 
 
 
\na-;▼토성의 성벽은 판축(版築: 돌을 판판하게 깔고 위에 흙을 다지는 것)방법을 사용하여 고운 모래로 한 층씩 다져 쌓았다. 이러한 축성방법은 돌이 별로 없는 중국의 평야지대에서 성을 쌓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이것이 백제에 전해져 풍납토성·몽촌토성(夢村土城)을 비롯하여 백제의 성곽이나 목탑기단 축조에 주로 이용되었다. 토성에서 물이 흐르도록 토관으로 만든 하류관이 보인다.
 
 
 
\na-;▼백제국(伯濟國)에서 마한의 중심으로 우뚝 서다.
 
 
 
 
\na-;▼토성위에 있는 매
 
 
\na-;▼백제왕 계보 : 개로왕때 고구려의 공격으로 웅진(공주)으로 천도
 
▼백제를 세운 온조의 사당은 남한산성내 숭렬전이다.
 
 
\na-;▼ 백제 최고 전성기의 근초고왕(近肖古王)
①백제 제13대 왕
 
②재위 346∼375. 비류왕의 아들이다. 일본의 ≪고사기 古事記≫에는 ‘조고왕(照古王)’으로, ≪일본서기 日本書紀≫에는 ‘초고왕(肖古王)’으로, ≪진서 晉書≫ 간문제기에는 ‘여구(餘句)’로 표기되어 있다
 
 
 
\na-;▼한성 모형
 
\na-;▼일본에 있는 바둑판
 
 
 
 
\na-;▼해상무역 강국이었던 복원한 백제 배
 
\
 
 
 
 
 
\na-;▼칠지도(七支刀)
일본 나라현(奈良縣) 덴리시(天理市)의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에 소장된 백제 시대의 철제 가지모양의 칼이다. 철을 두드려서 만들었다. 전체 길이는 74.9㎝이다. 그 중 손잡이 내지 연결부를 뺀 칼날 부분이 66.5㎝이다. 칼의 양쪽 날 부분에 마치 소뿔이나 나뭇가지처럼 굴곡진 가지가 각각 3개씩 일정한 간격으로 뻗어 나와 있다. 이 같은 형태는 아직 다른 곳에서 발견된 바 없기 때문에 정확한 용도와 명칭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였다. 특히 명문이 발견되기 전에는 칠지도의 연결부에 주목해 이를 칼이 아닌 창으로 간주하기도 하였다. 1873∼1877년에 이소노카미신궁의 대궁사(大宮司)로 있던 간마사도모(菅政友)가 칠지도에 붙어있던 녹을 닦아내다가 칼의 양쪽 옆면에 금(金)으로 상감(象嵌)된 명문(銘文)을 발견하였다. 이로써 이것이 칼이며, 제작 당시의 명칭이 칠지도였음이 분명해졌다.
 
 
 
 
 
 
\na-;▼화려한 금동신발
 
 
\na-;▼양직공도
중국 양(梁)나라의 원제(元帝) 소역(蕭繹)이 그린 사신도(使臣圖).
 
백제국사(百濟國使)에 관한 부분은 사신도와 7행 160여 자의 짧은 글로 구성되어 있다. 사신도에 그려진 백제 사신은 발을 약간 왼편을 향하여 나란히 하고 있다. 단아한 용모에 관(冠)을 쓰는 좌임(左衽)의 대수포(大袖袍)를 무릎을 약간 덮을 정도로 착용하고 그 아래에 바지를 입었으며, 검은 신을 신고 양손은 모은 채 가리고 있다.
 
\na-;▼백제 사신도와 관련글
 
\na-;▼멀리 페르시아까지 그려진 것으로 보아 교역이 있었을 것이다.
 
 
 
 
\na-;▼일본 교토(京都) 고류지(廣隆寺)에 소장된 목조 미륵보살반가상.
 
 
\na-;▼팜플릿
 
 
 
 
 
 
 
 
 
 

 
\na-;출처: 민족문화백과 ,유튜브,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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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