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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7년 금강산(金剛山) 김만덕(金萬德) 조선 정조(正祖) 채제공(蔡濟恭) # 효의왕후
【문화】
(2024.04.22. 10:57) 
◈ 한양서 선비들과 교류하면서 제주 풍속 대화 나눠...이상한 소문도 나
채제공과 김만덕의 만남
정조와 효의왕후를 대궐에서 알현하고 나온 김만덕은 영상 채제공의 집으로 돌아간 이후, 한양도성의 선비들을 만나 교유하며 제주 한라산의 아름다움과 매년 세차게 불어오는 무서운 태풍 및 흉년의 참상을 모두 설명하였다.
채제공과 김만덕의 만남
 
정조와 효의왕후를 대궐에서 알현하고 나온 김만덕은 영상 채제공의 집으로 돌아간 이후, 한양도성의 선비들을 만나 교유하며 제주 한라산의 아름다움과 매년 세차게 불어오는 무서운 태풍 및 흉년의 참상을 모두 설명하였다.
 
선비들과 대화하면서 만덕은 한양 사람들이 잘 모르는 “소랑 헵수다(사랑합니다)”“고끼다(숨 막히다)” “왕왕작작(떠들석~)” “혼잠녀(해녀)” “무사 경 고람쑤꽈(왜 그렇게 말하십니까?)”라고 제주도 사투리로 말하였다.
 
그러면 선비들은 이상한 표정을 들으면서 제주의 풍속을 묻고 만덕은 소상하게 대답했다. 1653년에 만든 《탐라지》에 제주도 사투리는 “본토와 다른 말이 많아 서울을 서나(西那)라 하고, 숲을 고지(高之)라 하며, 산을 올음(兀音), 손톱을 굽(蹄)이라 하고, 입을 굴에(勒)라 하며, 굴레를 녹대, 재갈을 가달(加達)이라 한다.”라고 했다.
 
 
▲ 채제공 초상화(사진:수원 화성박물관)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 이명기(李命基, 1756~1813)가 1789년 그린 채제공의 초상에는 그의 온화한 성품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채제공과 만덕은 방안에 발을 걸어두고 멀리 떨어져 앉아서 대화하였다.
 
만덕은 사도세자의 스승이었고, 조선을 풍요롭게 만든 채제공과 대화를 통해 깊은 감화를 받았다. 채제공은 사람이 살아가는 근본 도리를 은연중 가르쳤다. “네 말이 가상하다. 한양에 머무는 동안 자주 내 집에 들어와 탐라 이야기를 하여라. 내가 네 전기를 지을 것이다.”
 
이후 만덕은 영상 채제공 집을 자주 방문하여 제주도 민속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인의 영수이자 영의정을 지낸 채제공이 만덕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자, 한때 도성 안에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다.
 
 
▲ 제주 전통배 테우
 
 
일반 선비들은 제주의 독특한 풍속을 알고 싶어 만덕을 찾아와 끊임없이 물었다. 김만덕은 물을 운반할 때 사용하는 물 허벅과 항아리, 옥돔국, 자리돔을 잡을 때 사용하는 제주 전통배 테우, 방물장수, 제주 오일장, 한라산, 말, 낭쉐(나무로 만든 소), 제주 관기, 선정을 베푼 제주 목사 등을 아는 대로 제주 생활사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선비들은 테우를 만들 때 어떤 나무로 만드냐고 물었다. 만덕은 “제주에는 구상나무가 많아 굵은 통나무를 7~10여 개 엮어서 테우를 만든다.”라고 말했다.
 
선비들의 궁금증은 끝이 없어 제주 사람은 노동할 때 어떤 옷을 입는지, 무엇을 먹는지가 궁금하여 계속 물었다. 만덕은 감물을 들인 옷을 입고, 감즙 염색하는 모든 과정을 천천히 설명했다.
 
 
▲ 제주 갈옷(상의는 갈적삼, 하의는 갈중)
 
 
갈옷은 방수성이 뛰어나 풀밭에서 일할 때 옷이 젖지 않고, 옷이 시원하며, 때도 안 타고, 땀에 젖어도 냄새가 나지 않는 제주만의 독특한 옷이라고 말해주었다.
 
14세기 후반에 탐라는 원나라의 왕족이 망명 와서 머물렀다. 명나라는 원나라 잔존(殘存) 세력을 평정하고 그들을 탐라로 유배 보냈다. 고려 창왕 1년(1388)에 원나라 왕족 달달친왕(達達親王) 등 80여 호를 탐라로 보냈다.
 
고려는 전리판서 이희춘(李希春)이 제주에 내려가 삼양동 근처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명 태조 주원장은 원의 제후국이었던 윈난(雲南) 지역을 평정하고 명나라에 귀순한 귀족인 양왕(梁王)의 태자 백백태자(拍拍太子, 伯伯太子 ? ~1404)와 그의 아들 육십노(六十奴) 등 많은 사람을 탐라로 이주시켰다.
 
 
▲ 제사(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1392년에 양왕의 후손인 애안첩목아(愛顔帖木兒)와 식솔 4명을 탐라로 보내 거주하게 하였다. 탐라에는 조선 전기 무렵 원나라와 관련된 양(梁), 강(姜), 안(安), 대(對) 씨의 성을 가진 주민이 있었다.
 
【출처】 고려사 137卷, 世家, 列傳 卷第五十, 昌王 卽位年, 12월
 
帝遣前元院使喜山,大卿金麗普化等來, 求馬及閹人.喜山等, 皆我國人也, 禮畢下庭, 稽首四拜,昌立受之.喜山等又傳聖旨云, “征北歸順來的達達親王等八十餘戶, 都要敎他耽羅住去. 恁去高麗, 說知敎差人那里, 淨便去處, 打落了房兒, 一同來回報.” 於是, 遣典理判書李希椿于濟州, 修葺新舊可居房舍八十五所.
 
1443년 12월 제주 목사로 온 기건(奇虔, 1390~1460)은 잠녀(潛女. 해녀)들이 바다에 들어가 힘들게 전복 따는 모습을 보고는 2년간 목사로 있으면서 전복을 한 번도 입에 대지 않았다.
 
만덕은 “제주 목사 기건은 전염병과 괴질이 도는 제주에서 부모가 죽으면, 구덩이나 언덕에 버리는 풍속을 교화시켜 예절을 갖추어 목관에 부모를 장사 지내도록 지도하였고, 부녀자들의 외출할 때 나올(羅兀)을 창안해 머리 덮개로 이용하게 하였다.”라고 말했다.
 
 
▲ 제주 삼승할망 제사(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제주 칠머리당 영등굿은 제주 어부들의 민속 제례 의식, 굿이다. 영등 신앙은 겨울을 지나 봄이 찾아올 때 재주를 찾아오는 영등신을 맞이하고 보내는 음력 2월의 풍속으로 500년 이상 이어져 왔다.
 
영등굿은 바다의 평온과 풍어를 기원하는 굿으로 바람의 신 영등할망과 용왕, 산신과 의식을 주관하는 무당이 등장한다. 영등굿은 1980년 11월 17일 국가무형문화재 제71호로 지정되었고, 2009년 9월 30일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제주 칠머리당 영등긋(사진:제주특별자치도)
 
 
필자는 제주 민속학 인문학자 고광민 선생이 저술하신 제주학연구센터 제주학총서 39 《제주도 도구의 생활사》를 읽으면서, 고광민 선생이 40여 년 동안 제주도의 사라져 가는 농업의 모든 농기구와 풍속·민속·생활사를 수집 기록한 노력에 놀라움과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고 선생은 제주도 사람만이 아는 특수한 언어를 현대적으로 알기 쉽게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제주학총서에는 정말 귀한 자료가 많다.
 
 
▲ 무당의 무령(巫鈴)과 산판(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만덕은 채제공이 구해준 집에 머물면서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금강산을 다녀온 선비들의 금강산 유람록(遊覽錄)과 산수유기(山水留記)를 읽으며 시간을 바쁘게 보냈다. 만덕은 제주도에서 객주를 운영하면서 귀양 온 선비들이나 한라산을 보러 온 선비들을 통해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귀가 아프도록 많이 들었지만, 선비들의 명문이 담긴 유람록을 읽으며 금강산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했다.
 
하루는 조선왕조 숙종 29년(1703)에 태어나 영조 5년(1729) 27세에 생원 1등으로 급제하고, 영조 11년(1735)에 대증광시(大增廣試) 을과(乙科) 5위를 한 자(子)가 순백(淳伯), 호(號)가 삼산(三山)인 유정원(柳正源, 1703~1761)의 《금강산유람록》을 읽었다. 삼산은 문집 《대산집》을 남겼다.
 
유정원은 “1753년(계유) 9월. 산속 집의 잠자리에서 금강산 유람을 시작하여 비로봉과 용연(龍淵)을 두루 답사하고 돌아왔다. 길에서 도롱이 삿갓 쓴 사람을 만났는데, 한 골짜기의 절경을 유람했다고 스스로 말하면서 소매 속에서 오언시를 꺼내 나에게 보여주었다. 나는 곧장 차운하여 그에게 주었다. 조금 있다가 꿈을 깨어 보니 날이 밝았다. 잠자면서 배에 획을 그었던 일을 명확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그 시는 이러하다.”
 
 
九月秋將盡
凉風吹脩脩
 
구월 가을은 다 가는데
서늘한 바람 간단없이 부네.
 
我策一款段
遠作蓬萊遊
 
나는 조랑말을 채찍질하여
먼 금강산 유람을 떠나네.
 
倰空歌浩浩
萬二千峯頭
 
허공을 찌를 듯 넓고 큰 노랫소리
만 이천 봉우리 꼭대기라네.
 
拂袖而歸來
山閒月一鉤
 
소매를 떨치고 돌아오니
한가한 산에 달 한 조각.
 
又聞君遊勝
景物句裏收
 
그대가 절경을 유람했다 듣고
경치를 글귀 속에 거두어들였네.
 
大小雖不同
意趣各有求
 
크고 작은 것은 같지 않으나
취향은 각각 구한 것이 있다네.
 
旣望吳門馬
更泛武陵舟
 
이미 오문의 말(馬)을 바라보았으니
다시 무릉의 배를 띄우네.
 
二者苟能兼
何異鶴又州
 
두 가지를 진실로 겸하였으니
학 타고 양주고을 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悠然起我興
神往洞府幽
 
자연스럽게 흥이 일어나니
정신은 그윽한 골짝으로 가네. (번역: 한국학중앙연구원)
 
 
지방 선비들은 금강산 여행 정보 수집도 어렵고, 동행할 사람을 구하는 것이 무척 어려웠다. 금강산을 가는 사람들은 말이나 나귀를 빌려서 타고 가고, 식량을 지니고 다녀야 해서 하인들이 여러 명 따라갔다.
 
가난한 선비들은 여러 사람의 유산기를 한데 묶어 와유록(臥遊錄)이라 이름 짓고 돌려가면서 보았다. 그들은 금강산을 방문할 비용과 말을 마련하지 못해 놀랄 만큼 명문(名文)이 실린 책과 그림을 집에 누워서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1797년 1월에 만덕은 좌의정 채제공을 따라 여주와 화성 행궁을 방문하고, 대궐에 입궐(入闕)하여 정조를 다시 알현(謁見)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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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7년 금강산(金剛山) 김만덕(金萬德) 조선 정조(正祖) 채제공(蔡濟恭) # 효의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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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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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