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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1년 김만덕(金萬德) # 가흥대장경
【문화】
(2024.04.22. 11:09) 
◈ 1681년 중국 출항해 일본 항해 중 태풍 만나 임자도 정박... 400경전 수집 복각
만덕과《가흥대장경(嘉興大藏經)》
만덕은 부처님의 심오한 교리는 잘 모르지만, 순천과 해남 지역에서 온 승려들을 만나 부처님 법문을 듣고, 선비들을 만나 금강산 유람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만덕은 제주도에 표착한 청나라 사람들을 보면서 이웃에 있는 다른 나라의 소식을 알게 되었다.
만덕과《가흥대장경(嘉興大藏經)》
 
 
만덕은 부처님의 심오한 교리는 잘 모르지만, 순천과 해남 지역에서 온 승려들을 만나 부처님 법문을 듣고, 선비들을 만나 금강산 유람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만덕은 제주도에 표착한 청나라 사람들을 보면서 이웃에 있는 다른 나라의 소식을 알게 되었다.
 
만덕은 화북포구 앞의 바다를 보면서 제주를 벗어나 육지에 나가보았으면 하는 것이 간절한 소원이었다. 만덕은 한양도성에서 금강산유람록을 읽으며, 금강산의 절이 어떻게 생겼는지 항상 궁금했다. 그래서 선비들에게 금강산에 관한 궁금한 것을 질문했다. 조선은 뜨거운 여름철이 지나고 나면 항상 무서운 비와 강한 바람을 동반하는 태풍을 두려워했다.
 
 
▲ 2022년 7월 31일 태풍 송다(SONGDA)진로-WINDY (사진: 소박사TV 촬영)
 
 
조선왕조 숙종 7년 신유년(1681) 6월에 강한 태풍이 육지를 강타했다. 이때 궁궐을 에워싸고 있는 한양 도성 주변 산에 소나무가 부러지고 뽑혔다.
 
 
【출처】 〈숙종실록〉 11권, 숙종 7년(1681) 6월 5일 병술 1번째 기사
「丙戌/大風, 四山松林多折拔。」
 
 
태풍이 우리나라 근해를 통과할 때 크고 작은 해난(海難) 사고가 발생했다. 1681년 6월 전남 임자도(荏子島)에 아무도 탄 사람이 없는 수상한 배가 밀려와 정박했다. 섬에 사는 주민들은 심하게 부서진 배를 조사하고, 살아있는 사람을 찾았으나 한 명도 보이지 않고 불교대장경(佛敎大藏經)과 그릇이 가득 실려 있었다.
 
무역선은 주변 암초에 걸려 부서져 많은 물건이 바다에 흩어져 떠다니고, 무거운 물건은 모두 바다에 가라앉았다. 필자는 10여 년을 범선과 요트를 타고 항해를 하면서 서해 항해 도중에 표류를 자주 경험했다. 배의 엔진이 고장 나서 표류를 시작하면 조류의 흐름에 따라 마치 나뭇잎으로 떠다녔다.
 
 
▲ 영파선(영파 영안회관, 2021.4.19. 촬영)
 
 
1681년 당시 고문헌을 조사해 보니, 중국 상선이 많은 물건을 싣고 중국 항구를 출항해 일본으로 향하다가 태풍을 만나 표류했다. 배는 칠산도 앞바다에서 파괴되고, 왕대장(王大章) 등 여섯 사람이 바다에 빠져 죽었다.
 
고자영(高子英) 등 26명이 간신히 살아남아 양호(兩湖: 호남과 호서)에서 도성으로 호송되어, 1681년 8월에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 이집(李諿)과 역관 이경화(李慶和)가 표류한 사람을 위로하고 잘 대접하여 안동(眼同)하여 청나라로 들여보냈다.
 
무역선은 태풍으로 돛대가 부러지고, 배가 부서져 서해를 한없이 표류했다. 영광군 낙월면 일대에 있는 칠산도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표류하여 임자도 해안에 정박했다. 임자도 배에서 나온 물건은 나주 관아에서 대장경 천여 권을 수거하였다.
 
당시 영광 불갑사에 있던 백암성총(栢庵性聰, 1631~1700)은 인근 주민이 주워 온 불교 서적을 보고는 승려들을 이끌고 바닷가로 달려가 불교 서적을 수습했다. 그리고 며칠간 인근 해안가에 흩어져 있던 불화(佛畫)와 목함(木函) 나무상자를 근처 승려들과 합세하여 수습하였다. 그러나 백암은 대장경 완질(完帙)을 구하지 못해 세 번 능가사에 갔고, 두 번 선운사를 찾아갔다.
 
바닷가에서 불서를 주운 사람들은 대부분 서적을 잘 말려 인근 절에 모두 바쳤다. 백암은 여러 경전을 찾아서 400여 권을 얻었다. 백암은 구봉산 보현사 승려에게 편지를 보내 불서 수집의 어려운 사정을 알렸다. 이런 노력으로 마침내 전질을 수집하여 가흥장(嘉興藏)을 복각(復刻)할 수 있었다.
 
가흥장은 담양 용흥사, 합천 백련암, 동국대 도서관에서 수백 권이 발견되었다. 이후 가흥장을 복각하거나, 개간한 것도 발견되고, 현재 19종 242권의 복각본과 5종의 개간 본이 확인되고 있다. 많은 경전의 출현으로 큰 사찰마다 강원교육이 발전하게 되었다.
 
 
▲ 《가흥대장경(嘉興大藏經)》(사진:위키백과)
 
 
많은 서적이 수레에 실려 서울로 보내지고, 숙종 임금이 새로운 불교 서적을 펼쳐 보게 되었다, 그런데 숙종이 책을 본 이후 돌려주지 않자, 신하들은 왕에게 이단(異端)의 서책을 오래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진언하여 숙종은 할 수 없이 불서(佛書)를 돌려주었다.
 
당시 염헌(恬軒) 임상원(任相元, 1638~1697)이 동부승지로 있었는데, 많은 불서를 암송하고 있어서 사람들은 그를 암내전(諳內典)이라 불렸다. 하루는 숙종 임금이 《유마힐경(維摩詰經)》을 보다가 임상원에게 해설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자 임상원이 사양하며 “신의 직분은 경연에서 질의하는 것인데 어전에서 불서를 강의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임금이 옳게 여기고 불서를 모두 남한산성 개원사(開元寺)로 보냈다. 그리고 《유마힐경》 3권은 임상원에게 하사하여 그 집안에서 소장하였다. 후에 어린 승려가 그것을 얻어 권첩을 절개하고 필사하였지만, 임상원의 증손 희성(希聖)이 다시 얻어 소장하였다.
 
 
【출처】 숙종실록 12권, 숙종 7년 7월 9일(1681) 경신 1번째 기사
 
“그때 중국의 장사하는 배가 큰 풍랑 때문에 표류(漂流)하여 나주(羅州) 지도(智島) 등지에 도달한 것이 많았다. 또 불경(佛經) 책으로 매우 새로운 것과 불사(佛事)에 쓰는 그릇 등 기이하고 교묘한 것이 있었다. 이것들이 물에 떠다니다가 조수[海潮]에 밀려와, 잇따라 전라도(全羅道)·충청도(忠淸道) 등의 바닷가 여러 진(鎭)과 포구(浦口)에서 건져 내었는데, 총계가 1천여 권이었다. 도신(道臣)이 연속(連續)해서 계문(啓聞)하고, 그 책을 첨부하여 올렸다. 임금이 가져다 보고 오래도록 내려주지 않으므로, 문신 민정중(閔鼎重, 1628~1692)이 이단(異端)의 서책(書冊)을 오래 머물러 두고서 임금이 보는 것은 적당하지 못하다고 말하고 김수항도 그것을 말하자, 임금이 남한(南漢)의 사찰(寺刹)에 나누어 내려주도록 명하였다.”
 
○ 庚申/領議政金壽恒、左議政閔鼎重請對。壽恒曰: 時,中國商舶因大風, 多漂到羅州智島等處, 而又有佛經縹帙甚新, 佛器等物製造奇巧, 漂泛海潮, 連爲全羅、忠淸等道沿海諸鎭浦所拯得, 通計千餘卷。 道臣連續啓聞, 附上其書。 上取覽, 久不下。鼎重言: "異端之書, 不宜久留聖覽。"壽恒亦言之, 上乃命分賜南漢寺刹。
 
 
‘동양고전 아카데미’ 강의 시간에 당시(唐詩) 300수를 매주 하나씩 감상한다. 시인 왕유(王維, 699~761)의 시 산중(山中)을 김영환 교수 지도로 감상했다.
 
〈山中〉王維
 
荊溪白石出 天寒紅葉稀
山路元無雨 空翠習人衣
 
형계 강물이 흐르면서 하얀 돌은 드러나고,
날씨는 추워져서 단풍도 드물구나!
산속 작은 길에는 원래 비가 오지 않았는데,
푸른 빛 나는 안개가 사람의 옷을 적시는구나! (김영환 교수 번역)
 
 
당나라 시인 왕유의 시를 감상하면서 하동(河東, 원청시, 安邑) 포주 사람 왕유의 자(子)가 마힐(摩詰), 호가 마힐거사(摩詰居士)인 연유를 조사했다. 왕유는 어려서 어머니의 영향으로 불학(佛學)에 정통하였고, 왕유가 대장경을 통해 인도의 상인이며 석가모니 부처의 재가 제자였던 비말라키르티(維摩居士, 淨名, 無垢稱, 維摩詰)을 존숭(尊崇)했기 때문이었다.
 
유마거사(維摩居士)는 부유했지만 절대로 인색하지 않았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수도하는 승려들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였다. 유마거사는 일찍부터 복전(福田)을 가꾸어 재원이 끊이지 않았다. 중국 민간에서는 유마(維摩)를 부(富)의 신으로 간주했다.
 
중국의 시인 이백, 양나라 소명태자(昭明太子, 蕭統, 501~531), 산수시인(山水詩人) 사령운(謝靈運, 385~433), 왕유가 모두 유마를 존숭한 것처럼 조선의 숙종 임금도 평소 불교를 선호하여 《維摩詰經》을 오래 읽다가 신하들의 독촉으로 할 수 없이 내놓았다.
 
 
▲ 돈황 벽화에 그려진 유마거사(사진:위키백과)
 
 
조선왕조는 유교를 숭상하는 국가지만, 명나라에서 제작한 《가흥대장경(嘉興大藏經)》이 해난(海難) 사고로 반입되어 자연스럽게 전국 사찰의 승려와 선비들이 읽게 되었다. 가흥대장경은 명나라 말기 능엄사(楞嚴寺)에서 자백진가(紫柏眞可, 1543~1603), 도개(道開), 법본(法本) 등이 참여하여 시작되었다.
 
자백진가(紫柏眞可)는 명대의 유명한 승려로 운서주굉(雲棲袾宏, 1535~1615), 감산덕청(憨山德淸, 1546~1622), 우익지욱(藕益知旭, 1599~1655)와 ​​함께 만력(萬曆) 황제의 4大 스승의 한 사람이다. 자백의 자는 달관(達觀)이고 호가 자백(紫柏)으로, 사람들은 그를 자백존자(紫柏尊者)라고 불렀다. 속성은 심(沈)이고, 장쑤성(江蘇省) 우강(吳江) 사람이다.
 
자백은 17세에 부모 곁을 떠나 유랑하고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성격은 용맹하고 비범한 재주를 가졌다. 여러 곳을 방문하며 전전하여 스승을 찾았다. 자백은 20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아 화엄, 법상, 선, 염불을 배우고 불교 부흥에 힘썼다. 선사는 항상 선(禪)과 정토교(淨土敎)를 습합(習合)한 선정일치(禪淨一致)를 강설(講說)했다. 불법(佛法)을 퍼뜨려 중생을 구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방책본대장경》을 간행하여 사탑(寺塔)의 부흥에 힘썼다.
 
 
▲ 자백진가(紫柏眞可) 초상화(사진:위키백과)
 
 
그는 명말 사상계를 석권한 왕양명(王陽明) 발본색원(拔本塞源)의 영향을 받아 사회적 관심이 많았다. 사람들은 당나라 선승 임제(臨済義玄)와 간화선을 창안한 대혜(大慧宗杲, 1089~1163) 선사의 재래(在來) 화신이라고 칭하며 존경했다.
 
자백은 명나라 조정의 총애도 받았지만, 감산덕청(憨山德淸)의 유령(流刑)과 광산 개발과 증세로 사람들이 힘들어하자 이를 비난하고, 폐단을 바로잡으려고 해서 관리들의 눈총을 받았다.
 
자백은 당시 유학자 이지(李贄, 이탁오, 1527~1602)와 더불어 마승(魔僧)의 논란이 있었다. 1603년(만력 31) 신종(神宗) 황태자 옹립에 관련된 요사스러운 문서(妖書)에 연좌되어, 12월 17일 옥사하였다. 저서로 《紫柏尊者全集》 29권, 《同別集》 4권 등이 있고, 《가흥장》 간행에 진력하여 공적이 매우 크다.
 
《嘉興大藏經》에 수록된 전적(典籍)은 약 2195부, 10,332권으로서 중국에서 간행된 역대 대장경 중에 가장 많은 분량이다. 밀장 도개(密藏道開)가 1582년(만력 10)경에 발원하여 환예법본(幻豫法本)과 함께 1589년(만력 17)에 오대산(五臺山) 자하곡(紫霞谷) 묘덕암(妙德菴)에서 처음 판각하였다.
 
그런데 오대산은 날씨가 춥고(氷雪苦寒) 지역이 험준하며 교통이 불편하여 4년 후 1593년에 따뜻한 절강성(浙江省) 여항(余杭) 경산사(徑山寺)로 판각 장소를 옮겼다. 이후 경산 만수선사(萬壽禪寺), 적조암(寂照庵), 화성사(化城寺)를 중심으로 판각이 이루어졌다. 1597년에 도개(道開)가 갑자기 사라지고 얼마 후 법본(法本)마저 세상을 떠났다.
 
대장경 판각 사업이 혼란을 빚었으나, 1601년에 도개의 제자 염운흥근(念云興勤)에 의해 다시 추진되었다. 이후 농민반란이 일어나고, 청나라가 침입해 옴에 따라 시주자를 구하기가 힘들어져 경전 판각을 각지에 분산하여 위임하였다. 대장경의 판각과 유통의 중심지가 절강성(浙江省) 가흥부(嘉興府) 능엄사(楞嚴寺)로 바뀌었다.
 
《嘉興大藏經》에는 약 2,195부 10,332권을 수록하고 있는데, 이 소장품의 가장 큰 특징은 기존에 사용하던 접이식 판본을 버리고 가벼운 선장본(線裝本)식으로 바꾼 것이다. 한 판에 20줄, 한 줄에 20자씩 2페이지로 접는다. 《嘉興大藏經》에는 532종의 중국 불교 저서가 소장되어 있으며, 학술 가치가 매우 높다. 《嘉興大藏經》은 강희 50년(1712) 완성 때까지 120여 년이나 걸렸다.
 
《嘉興大藏經》을 수집했던 백암성총(栢庵性聰, 1631~1700)은 1686~1700년에 7종 154권을 복각하여 낙안(樂安) 징광사(澄光寺)에 목판을 보관하였다. 성파성능은 1695년에 지리산 쌍계사에서 1종 40권을 복각하였다. 복각한 대장경은 일본으로 수출돼 《황벽대장경》으로 복각되기도 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판 중에는 바다가 지닌 8개 공덕에 대한 경전이 있는데, 이는 후한(後漢) 때 축법란(竺法蘭)이 번역한 《불설해팔덕경(佛說海八德經)》이다.
 
“거대한 바다를 보면 여덟 가지 덕(八德)이 있으니, 그 넓이는 끝이 없는 바다 같고 그 깊이는 바닥을 가늠할 수 없느니라.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앞에 장애물이 없고 이것이 하나의 덕(德)이다. 바닷물은 한계에 다다르기 전에는 끝나지 않는데, 이것이 두 가지 미덕이다....”
 
 
▲ 소동파(蘇軾)(사진:위키백과)
 
 
11세기 북송의 시인 소동파(蘇軾, 1037~1101)는 항시 금강산을 예찬했다. 소식은 시인이자 문장가, 학자, 정치가로 자(字)는 자첨(子瞻)이고 호가 동파거사(東坡居士)이다. 소동파는 “고려국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 번 보는 것이 소원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출전】 「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
 
 
조선의 승려들은 바다의 8대 공덕이 담긴 《불설해팔덕경(佛說海八德經)》을 중요시했다, 만덕은 선비들과 교유하면서 새로운 문헌을 새롭게 익히고, 금강산을 다녀온 선비들의 《금강산유람록》의 글을 읽으며 추운 날이 빨리 끝나고, 날씨가 따뜻해져 금강산으로 가기를 원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1681년 김만덕(金萬德) # 가흥대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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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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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