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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7년 금강산(金剛山) 김만덕(金萬德) 병자호란(丙子胡亂) # 경흥로 # 김수증 # 김승경
【문화】
(2024.04.26. 16:24) 
◈ 금강산 등정하는 여정에서 병자호란 포로 김승경 사연 듣고 밤새 울어
만덕과 경흥로
만덕을 가마에 태운 일행은 조선시대 6대로 중 2대로 인 경흥로를 거쳐 금강산으로 향했다. 경흥로는 한양에서 출발하여 수유리를 지나 누원점(樓院店), 축석령, 송우점, 파발막, 양문역, 김화, 금성, 창도역, 회양, 철령, 고산역, 안변, 함흥, 북청, 길주, 명천, 회령, 온성, 경원, 경흥, 서수라까지 이어지는 긴 도로이다.
만덕과 경흥로
 
 
만덕을 가마에 태운 일행은 조선시대 6대로 중 2대로 인 경흥로를 거쳐 금강산으로 향했다. 경흥로는 한양에서 출발하여 수유리를 지나 누원점(樓院店), 축석령, 송우점, 파발막, 양문역, 김화, 금성, 창도역, 회양, 철령, 고산역, 안변, 함흥, 북청, 길주, 명천, 회령, 온성, 경원, 경흥, 서수라까지 이어지는 긴 도로이다. 경흥로는 한양 도성에서 김화를 거쳐 함흥과 북청을 지나 두만강까지 가는 먼 길이다.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은 1770년(영조 46년)에 상업 발달과 유통, 도로망의 정비를 표시한 《도로고(道路考)》을 저술했는데, 경성동북저경흥로제이(京城東北抵慶興路第二)라는 도로 명칭이 있다.
 
▲ 신경준의 《도로고(道路考)》(사진:공간기록연구소)
 
신경준은 숙종 38년(1712)에 순창읍 가남리 남산마을에서 태어나 아홉 달 만에 벽에 쓰인 글씨를 알고, 네 살 때 천자문을 읽었다. 다섯 살에 시경을 읽고, 여덟 살에 부모를 떠나 한양에 유학하며 당시 뛰어난 학문을 접하고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였다.
 
신경준은 젊은 시절부터 산수 유람을 좋아했고, 조선의 빼어난 경치가 있는 산들을 두루 찾아다녔다. 신경준은 학문의 진수는 자기가 사색하고 경험한 결과에서 구할 수 있다고 여겼다. 여러 곳을 돌아다닌 신경준은 고향에 돌아와 10년간 저술에 힘써 《훈민정음운해》과 교통과 지리에 관한 《강계지》 《산경표》를 남겼다.
 
▲ 조선광문회본 산경표
 
신경준의 뛰어난 가치를 처음 알은 사람이 위당 정인보(鄭寅普, 1892~?) 선생과 육당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이다. 《산경표》는 1913년 조선광문회에서 발간한 102쪽의 책으로 여암 신경준이 지은 《동국문헌비고》 중 〈여지고〉의 ‘산수고’에 기초하여 쓴 책이다. 신경준은 영조 때의 실학자, 지리학자이지만 높이 등용되지 못했다.
 
조선왕조에서는 백두산을 국토의 조종(祖宗)으로 보고 도읍지를 국토의 중심으로 보았다. 조선 중기 이익(李瀷, 1681~1763)의 《성호사설》에 백두대간이란 용어가 처음 등장했고, 지리서인 산경표(山經表)에 백두대간, 장백정간, 13개 정맥 산줄기에 위계를 체계화했다.
 
▲ 백지도를 이용한 산경도(사진:한경상)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개최하고 나서 많은 사람이 등산을 즐기기 시작할 때 산을 주제로 한 잡지가 발간되었다. 《사람과 산》 잡지에서 처음으로 우리나라 산줄기 백두대간과 정맥을 자세히 소개하면서 사람들은 지리학자 신경준의 가치를 재인식했다.
 
과거의 등산 방식은 대체로 높은 산을 찾아 빠르게 올라갔다 내려오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신경준의 백두대간 줄기를 밝힌 자연지리도서 《산경표》를 보고 난 이후 1990년부터는 종주 산행이 널리 유행했다.
 
필자도 이 당시 구례역에서 출발해 화엄사 노고단과 세석산장, 천왕봉을 거쳐 칠선계곡으로 내려오는 지리산 종주을 하였다. 덕유산 종주할 때는 무주구천동으로 들어가 덕유산을 거쳐 남덕유산이 있는 육십령으로 하산했다. 설악산은 인제 십이선녀탕에서 출발하여 대청봉을 지나 설악동으로 내려오는 설악산 종주를 하였다.
 
 
만덕은 한양 관문인 양주 누원점에 들러 시장을 구경하고 상인들을 만났다. 누원점은 원도봉산 회룡사가 있는 지역의 상점으로 교역이 무척 번창했다. 이곳 상인들은 동북(東北) 지방에서 한양으로 올라오는 어물(魚物)을 모두 사서 한양 도성의 어물전에 넘기지 않고 행상인에게 직접 팔아 많은 이익을 남겼다.
 
도성 칠패(七牌) 이현(梨峴) 상인들은 지방 산물이 한양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의정부 다락원에 지점을 차려 놓고 건어물과 곡물을 사들였다. 육의전 상인들은 이로 인해 물품 구입에 어려움을 겪어 관에 민원을 제기했다.
 
 
《영등포구지(永登浦區誌)》와 경기문화재단에서 발간한 《경기백성실록》 ‘일하고 생산하고 노래하다’에 삼전도(三田渡) 상인 손도강에 대한 내용이 자세히 적혀있다. 손도강은 난전의 우두머리로 의정 다락원의 상인으로부터 거액의 돈을 받아 원산으로 가서 어선 전체를 매점했다. 상인은 의정부와 포천 길목에서 한양으로 들어오는 물건을 모두 사들여 돈을 벌었다.
 
한국외대 이영학 교수는 〈조선후기 어물의 유통〉을 논문으로 발표했다. 논문에 도성 인구의 증가와 서울의 어물 유통에 관한 자세한 내용이 적혀있다. “18세기 중엽 이후 상품 유통 활성화로 인하여 새로운 길이 운행되면서 운행되었다. 18세기 말에는 원산에서 강릉을 거쳐 부산으로 가는 뱃길이 새로 열렸고, 경강과 평안도의 대동강 유역의 뱃길도 새롭게 정비되었다.” 삼전도 상인 손도강에 관한 글은 《각전기사(各廛記事)》 천권(天卷), 正丑(純祖 5년, 1805) 8월 조(條)에도 기록이 남아있다.
 
 
고대에 곰말(큰마을)이라고 불리던 송파는 오래전부터 상업이 발달했다. 19세기 초에는 송파 장시는 전국 15대 장시의 하나로 뽑혔다. 필자는 송파에서 50년 거주하면서 가락동농수산물시장이 가락동에 세워진 것도 오랜 세월의 흔적임을 알게 되었다. 상인들은 “임금께 진상하는 꿀단지도 송파를 거친다.”라는 말할 정도로 전국의 물건이 송파장에 집합되어 팔려나갔다.
 
만덕 일행은 의정부를 지나 축석령에 올랐다. 이 길은 천보산 고갯길로 정조가 광릉을 참배하러 다녔던 높은 고개이다. 만덕은 포천읍 송우리를 지나 영평에서 머물렀다. 영평은 백제 및 고구려의 양골현(梁骨縣) 지역으로 통일신라 경덕왕 때 동음현이라 부르다가 고려에서는 영흥현으로 개칭되었다.
 
1394년 이성계가 자기 고향을 영흥부로 이름을 지으면서 영흥현을 다시 영평현이라 불렀는데, 현재 포천시 영중면, 이동면, 일동면, 창수면 지역이다. 영평에서 하루를 푹 쉬고 다음 날 금화까지 빠르게 이동하여 저녁에 관아에 머물렀다.
 
만덕은 금화에 머물 때 동네 사람들로부터 몽골에 잡혀갔다 돌아온 사람 이야기와 승려 법성의 표류기를 재미있게 들었다. 법성은 예전 제주 한라산을 오른 적이 있었다.
 
몽골에 잡혀갔다 돌아온 사람 이야기는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이 채록한 이야기다. 김수증의 자(子는 연지(延之), 호는 곡운(谷雲). 할아버지는 김상헌(金尙憲)이며, 젊어서부터 산수를 좋아하여 금강산 등 여러 곳을 유람한 뒤 기행문을 남겼다.
 
 
▲ 조세걸(曺世傑) 〈谷雲九曲圖〉(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수증은 1670년에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영당리에 농수정사(籠水精舍)를 지었다. 숙종 1년(1675)에 성천 부사로 있던 동생 김수항(金壽恒, 1629~1689)과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유배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화천으로 가서 지낸다. 김수증은 주자(朱子)의 행적을 모방하여 땅을 곡운(谷雲)이라 이름 지었다. 1682년 화가 조세걸(曺世傑, 1635~?)을 시켜 〈곡운구곡도〉를 그리게 했다.
 
김수증은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송시열과 동생 김수항 등이 죽자, 벼슬을 그만두고 화음동(華陰洞)으로 들어왔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다시 관직에 임명되어 한성부 좌윤과 공조참판에 제수되었다.
 
세월이 지나 김수증은 세상을 피해 화악산으로 깊숙이 들어와 은둔 생활을 하였다. 이곳에서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많은 사람을 만나 지나온 이야기를 듣고 모두 글로 기록했다. 김수증은 이때 성리학에 깊이 빠져 북송(北宋) 성리학자들의 저서와 주자의 성리서(性理書)를 탐독했다. 그리고 주자의 사상을 그림으로 만들었다.
 
금화 사람 김승경은 1625년(인조 3)에 태어나 1637년 병자호란 때 15세 나이에 몽골군의 포로가 되어 차하르(察哈尔, 할하) 몽골에 끌려가 차하르 전사가 되어 외몽골과 전투에 참여했다.
 
 
▲ 몽골 말
 
 
부족장이 조선에서 잡아 온 여자를 내려주어 혼인하고 2남 1녀를 낳고 살았다. 1654년에 아내와 딸이 죽어 인생의 허망함을 느꼈다. 20년간 몽골인으로 살았지만, 밤하늘에 은하수를 보다가 죽기 전에 어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1663년 10월에 이웃에게 사냥한다고 핑계를 대고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에 올라탄 뒤 해가 뜨는 곳으로 무작정 달려갔다.
 
한 달이 지나 말이 지쳐서 가지 않으려 하자 말을 버리고 걸어서 12월에 간신히 선양(瀋陽, 심양)에 도착했다. 길 가는 도중에 조선에서 끌려온 사람들을 만나 말을 얻었다.
 
김승경은 1664년 3월 선양을 떠나 조선에서 끌려온 사람들을 만나 동행하여 5월경에 조선 땅 의주부(義州府) 창성(昌城)에 도달하고 8월에 금성에 도착했다. 어릴 적에 고향을 떠나 기억이 아주 가물가물했지만, 기억을 더듬어 부모의 집을 찾아가니 어머니는 몇 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아들을 전혀 몰라봤다. 형제들이 나와서 김승경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아버지는 한참 지나서 크게 성장한 아들을 알아보고는 서로 붙들고 밤새 통곡했다.
 
 
▲ 금성(金化)
 
 
만덕은 김승경이 병자호란으로 몽골 차하르에 포로로 끌려가 고생한 이야기를 듣고 슬퍼서 밤새 눈물을 흘렸다.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너무나 놀라운 이야기를 많이 들어 가슴이 먹먹했다. 만덕은 밤하늘에 별을 보면서 제주도에 있는 가족을 생각하고 늦게 잠을 청했다. (계속)
 
 
▲ 병자호란 삼전도비(옛날 사진)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1797년 금강산(金剛山) 김만덕(金萬德) 병자호란(丙子胡亂) # 경흥로 # 김수증 # 김승경
【문화】 궁인창의 독서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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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산 등정하는 여정에서 병자호란 포로 김승경 사연 듣고 밤새 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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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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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