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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7년 금강산(金剛山) 김만덕(金萬德) 김창흡(金昌翕) 이병연(李秉淵) 정선(鄭敾) 채제공(蔡濟恭)
【문화】
(2024.04.24. 17:01) 
◈ 중국 산수화 본떠서 상상으로 그려... 원형 구도로 봉우리 한눈에 보는 금강전도 국보 지정
겸재 정선의 금강산 여행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아들 태종의 처신을 못마땅히 여겨 태종 1년(1401) 윤삼월 11~15 일 사이에 한양에서 금강산으로 여행을 떠났다. 태종은 하륜(河崙, 1347~1416), 태조의 부마인 이거이(李居易, 1348~1412), 성석린(成石璘, 1338~1423), 조준(趙浚, 1346~1405), 이무(李茂), 이서(李舒) 등과 정사를 의논하다가 금강산을 신하들에게 묻는다.
겸재 정선의 금강산 여행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아들 태종의 처신을 못마땅히 여겨 태종 1년(1401) 윤삼월 11~15 일 사이에 한양에서 금강산으로 여행을 떠났다. 태종은 하륜(河崙, 1347~1416), 태조의 부마인 이거이(李居易, 1348~1412), 성석린(成石璘, 1338~1423), 조준(趙浚, 1346~1405), 이무(李茂), 이서(李舒) 등과 정사를 의논하다가 금강산을 신하들에게 묻는다.
 
태종은 “중국 사신이 조선에 오기만 하면 반드시 금강산을 보려 하니, 무슨 까닭이오? 속담에 중국인이 이르기를 ‘고려국에 태어나서 직접 금강산을 구경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였다는데, 그래서 그러는 것이오?”하고 왕이 물었다.
 
이에 하륜(河倫)이 “금강산이 우리나라에 있다는 말이 대장경에 실려 있는 까닭으로 그러한가 하옵니다.”라고 대답했다.
 
【출처】 태종실록 8권, 태종 4년(1404) 9월 21일 기미 1번째 기사
 
○ 己未/召河崙、李居易、成石璘、趙浚、李茂、李舒議事。 上曰: "中國使臣來則必欲見金剛山, 何也? 諺曰: ‘中國人有云: 「願生高麗國, 親見金剛山」者。’ 然乎?"崙進曰: "金剛山在東國之語, 載在《大藏經》故云爾。" 上曰: "然。" 上曰: "昔唐太宗手擎小鷹, 値魏徵至, 乃袖其鷹,徵知之, 故自久留, 鷹乃斃。 何畏徵甚也?"浚進曰: "此非徵之賢, 乃太宗之賢也。" 上曰: "然。"
 
다른 신하들은 금강산은 영험한 산으로 신라의 화랑도 금강산을 순례하였고 이후 고려왕조를 거쳐 조선의 선비들에게도 이어져 내려왔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조선의 선비들은 심신 수양뿐 아니라 유교 공부를 위해 금강산을 경쟁하듯 찾았다. 선비들은 산이 사물의 이치를 깨닫게 하는 큰 요소라고 생각했다.
 
공자는 흐르는 물을 ‘시간의 흐름’이라는 철학적 이치로 해석했다. 산과 물을 어진 자와 지혜로운 자의 속성으로 이해하여 유학자들은 산과 물을 살피면서 자연의 운행 질서를 이해하고, 관물찰기(觀物察己)를 통해 자신을 수양하려 하였다.
 
1408년 4월 중국에서 온 사신 황엄, 전가화, 해수, 기원(奇原) 및 진경이 금강산에 가서 놀기를 청하니, 태종은 세자를 명해 흥인문(興仁門) 밖에서 사신을 전송하게 하고, 호조판서 이문화(李文和),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권완(權緩), 총제(摠制) 이간(李衎), 철성군(鐵城君) 이원(李原)으로 반행(伴行)을 삼았다.
 
【출처】 태종실록 15권. 태종 8년(1408) 4월 25일 계묘 1번째 기사
 
○ 癸卯/黃儼、田嘉禾、海壽、奇原及陳敬, 請遊金剛山, 命世子餞于興仁門外。 以戶曹判書李文和、藝文館提學權緩、摠制李衎、鐵城君李原, 爲伴行。
 
 
▲ 정선이 방문한 포천 화적연(명승 제93호)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은 숙종 2년 한성 북부 유란동(幽蘭洞)에서 태어났다. 14세에 아버지 정시익(鄭時翊)을 여읜 후 외조부의 도움을 받았다. 정선은 그림을 잘 그려 김창흡의 문하에 들어갔다.
 
이웃에 살던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 1671~1751)과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 1686~1761), 안동 김씨 김창집(金昌集), 창협, 창흡, 창업, 창연, 창립 여섯 형제가 정선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겸재의 자(子)는 원백(元伯), 號는 겸재(謙齋), 겸초(兼艸), 난곡(蘭谷)이다. 정선은 김창집의 도움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 위수(衛率)을 비롯하여 영조 5년(1729) 한성부주부(漢城府主簿), 1734년 청하현감(淸河縣監)을 지냈다. 1740년 훈련도감낭청(訓鍊都監郎廳), 양천현령(陽川縣令)을 거쳐 사도시첨정(司導寺僉正),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내고 1756년에 화가로서는 최고의 대우인 가선대부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이병연과 정선은 한동네에서 살며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의 문하생으로 동문수학하였다. 정선보다 5살이나 많은 이병연이 숙종 36년(1710) 5월에 금화(金化)현감으로 부임하여 다음 해 평생지기인 정선을 금화로 초대하였다.
 
이병연이 금화현감으로 만 5년간 재임하는 동안 정선은 금화를 방문하여 금강산을 많이 그렸다. 정선은 18세기 중국에서 유행한 남종화법(南宗畵法)이나 오파(吳派) 같은 새로운 산수화 기법에 영향을 받았으나, 김창흡과 노가재 김창업(金昌業, 1658~1721)의 화법(畫法)과 화론(畫論)을 전수하여 조선 고유의 산천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독창적인 진경산수화법을 창안했다.
 
김창흡은 김상헌의 증손이며, 영의정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의 셋째 아들로 자는 자익(子益)이다. 그는 정선의 후원자로 1711년 제5차 금강산 여행에 정선과 동행하였다.
 
 
▲ 〈鄭敾筆金剛山圖〉(사진: 고려대학교박물관) 가로 28.1㎝, 세로 33.7㎝
 
 
조선의 화가들은 중국 산수화를 본떠서 가본 적도 없는 산 풍경을 상상으로만 그렸다. 김창업은 1712년 12월 사은겸동지사(謝恩兼冬至使)로 가는 큰형 김창집을 따라 베이징을 다녀와 중국 산수화의 진수를 체득하고 돌아와 정선에게 중국 산수화 화법을 알려주었다.
 
이후 정선은 조선의 강산을 답사하고, 산의 아름다운 모습을 자기 의지대로 화폭에 옮겼다. 사람들은 온고지신(溫故知新)을 말하지만, 그것은 옛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전혀 없애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정선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법고창신(法古創新)을 택했다. 원래 법고창신은 제도를 바꿀 때 사용하던 말이다. 이것은 옛날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을 탄생시키는 것을 말한다.
 
정선은 직접 눈으로 본 금강산의 생생한 모습을 그대로 그렸다. 이후 사람들은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라고 불렀다. 김창흡은 정선에게 성리학과 시, 문장을 직접 가르쳐 주었다. 김창흡은 어려서부터 부귀와 화려함을 싫어하고 당쟁의 화를 피해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시를 쓰며 은둔 생활을 추구하였다.
 
김창협은 큰아버지 김수증이 당쟁에 대비해 춘천에 마련한 농수정사를 찾았다. 1671년(19세)에 형 김창협과 천마산, 성거산, 금강산 등지를 유람하였다. 이후 속리산, 백마강, 평양, 가을 한계령, 영암 월출산, 도갑사, 강진 만덕산 백련사, 북한산, 중흥사, 철원 삼부연, 속리산, 여주, 춘천 청평산, 청풍, 단양, 영월, 제천, 진도, 강화, 속리산, 간성 운근정, 오죽헌 등을 방문했다.
 
김창흡은 37세 되는 해, 숙종 15년(1689) 2월에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탄핵을 받아 진도(珍島)로 유배 가는 아버지 김수항을 따라 진도에 갔다.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 김수항은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회갑을 4달 앞둔 4월에 임금이 내린 사약을 받고 절명했다.
 
김창흡은 부친의 시신을 직접 운구하여 경기도 양주 율복리 운곡에서 장사를 지냈다. 그리고 설악산으로 들어가 불교에 귀의하며 은둔 생활을 하였다. 부친은 숙종 20년에 복권되었다. 김창흡은 58세(1710년, 숙종 36년)에 금강산에 올라 시를 지었다. 김창흡은 정선을 높이 평가했고, 문인들은 정선 그림에 김창흡의 시를 덧붙인 작품을 최고로 여겼다.
 
 
빈 암자 찾아와 고요함을 배우네,
홀로 누워 선방의 문을 닫았다.
조용한 정원, 물통에 샘물 떨어지고
처마에 부는 바람, 떡갈잎이 날린다.
 
멍하게 있을 뿐, 누구와 벗하겠는가?
담담한 마음뿐 돌아가고 싶지 않네.
길에서 만났네, 시 짓는 스님들
솔잎차로 배고픔을 달래주는구나. (詩: 김창흡)
 
 
▲ 金剛內山總圖(사진:국립중앙박물관) 絹本淡彩 37.5×35.9cm
 
 
정선은 영조 임금의 총애를 받은 도화서(圖畫署) 화가로 종 2품의 동지중추부사까지 올랐다. 1734년(영조 10) 정선이 59세에 그린 가로 94.5cm, 세로 130.8cm의 《금강전도(金剛全圖)》는 내금강의 겨울 실경(實景)을 수묵담채(水墨淡彩)로 그렸다.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원형의 구도를 이루고 금강산의 봉우리가 한순간 눈에 들어오도록 그렸다. 작품을 위에서 아래로 감상하면 제대로 금강산의 웅장함을 느낄 수 있다. 위로는 비로봉이 솟구치고 화면 중심에 만폭동 계곡이 흐르고 있다. 그림 오른쪽에 제목과 그림에 대한 감상이 적혀 있다.
 
이 작품은 겸재 정선이 그린 작품 중에서 가장 크고 진경산수 화풍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금강전도(金剛全圖)》는 이병철(李秉喆, 1910~1987) 회장이 작품을 매입하여 리움(LEEUM)에 소장하였고, 1984년 8월 6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 겸재 정선 《금강전도(金剛全圖)》(사진:문화재청)
 
 
《금강전도(金剛全圖)》 작품 윗부분에 제화시(題畫詩)와 함께 ‘갑인동재(甲寅冬題)’ 라는 관기(款記)가 적혀 있다. 관기의 관(款)은 원래 청동 기물(器物)에 새겨진 글자였다.
 
【출처】 관(款): 「器物上刻的字,书画、信件头尾上的名字:落~(题写名字)。题~。」
 
제화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이천봉 개골산, 누가 참 모습 그릴런가. 뭇 향기 동해 밖에 떠오르고, 쌓인 기운 세계에 서려 있네. 몇 송이 연꽃 해맑은 자태 드러내고, 솔과 잣나무 숲에 절간일랑 가려 있네. 비록 걸어서 이제 찾아간다 해도, 그려서 벽에 걸어 놓고 실컷 보느니만 못하겠네.”
 
《금강전도(金剛全圖)》는 원형 구도로 위에 비로봉이 우뚝 솟아 있고, 중앙에 만폭동과 장안사 비홍교가 배치되어 있다. 그림의 왼쪽에는 표훈사와 정양사와 무성한 숲이 맞은편의 암산과 잘 대조되어 묘사되어 있다.
 
조선의 선비들은 금강산 와유록(臥遊錄)을 빌려서 읽고, 금강산 그림을 구해 벽에 걸어놓고 감상하는 것을 좋아했다. 와유(臥遊)는 와이유지(臥以遊之)의 준말로 산수화를 보며 즐기는 일이다. 위진남북조 때 산수화론(山水畫論)의 대가인 종병(宗炳, 375~443)의 이론서 《畵山水序》에서 와유(臥遊)가 시작되었다.
 
종병은 宋의 화가이자 음악가, 불교도로서 산수화와 인물화를 그렸다. 그는 승려 혜원(慧遠, 335~417)에게 사상을 배워 《明佛論》를 저술했다. 그는 “佛家의 관점에서 儒家와 道家 그리고 현학적 관점을 융합시키며 ‘神佛滅論’을 주장했다.” 종병을 연구한 김석주 선생은 연구 논문에서 “山水畵는 主體와 客體의 分別이 사라져서 自我와 山水의 境界가 없어지는 관조(觀照) 또는 冥想의 과정으로 설명될 수 있다.
 
산수화는 道와 山水, 그리고 畫家와 鑑賞者가 感應하고 疏通하여 하나 되는 手段이다.”라고 보았다. 宋史 宗炳傳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老病俱至名山恐難遍睹 唯當澄懷觀道臥以遊之。」 늙어 병이 함께 다가오니 명산을 두루 편력하기가 어렵구나! 오직 마음을 닦고 도를 관조하기 위해 그림을 벽에 걸어두고 명산을 유람하리라! 이후 와유강산(臥遊江山)의 유래가 되었다.
 
금강산을 6번이나 찾은 김창흡이 “최고의 시는 명산대천(名山大川)에서 나온다.”라고 말하자. 이 소문이 한양도성에 퍼져 나갔다. 시인의 속마음을 들은 선비들은 잇따라 행장을 꾸려 금강산을 찾아갔다.
 
 
▲ 정선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1751년, 국보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정선이 72세에 금강산 사생(寫生)을 떠나 36세에 그린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 21폭을 1747년에 다시 제작했다. 정선의 작품으로 《仁王霽色圖》 《通川門巖圖》 《金剛全圖》 《입암도(立巖圖)》 《萬瀑洞圖) 등이 있다.
 
겸재는 84세로 돌아가 京畿 楊州 해등촌면(海等村面) 계성리(鷄聲里, 현 도봉구 쌍문2동)에 묘를 썼으나 후대에 잃어버렸다. 후손 정황(鄭榥)이 집안 묘역을 그린 〈楊州 松楸圖〉에 근거하여 역사유적지 표석이라도 세웠으면 좋겠다.
 
만덕은 영상 채제공이 구해 준 《금강산 와유록》과 《금강산 화첩》 등을 보면서 금강산을 내내 그리워했다. 봄이 되자, 추위가 어느덧 물러가고 따듯한 봄바람이 불어와 꽃망울이 터져, 만덕은 한양도성을 떠날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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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7년 금강산(金剛山) 김만덕(金萬德) 김창흡(金昌翕) 이병연(李秉淵) 정선(鄭敾) 채제공(蔡濟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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