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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金剛山) 식목일(植木日) 정약용(丁若鏞) 조선 정조(正祖)
【문화】
(2024.04.22. 11:01) 
◈ 정약용 통해 과천과 용인 등 8개 고을에 7년간 1200만 그루 심어
식목왕(植木王) 정조대왕
매년 봄이 시작되면 사람들은 나무를 심는다. 신라는 문무왕 17년(677) 음력 2월 25일(양 4월 5일)에 당나라 세력을 완전히 밀어내고 삼국통일을 이룩해, 이날을 기념하여 나무를 심었다.
식목왕(植木王) 정조대왕
 
 
매년 봄이 시작되면 사람들은 나무를 심는다. 신라는 문무왕 17년(677) 음력 2월 25일(양 4월 5일)에 당나라 세력을 완전히 밀어내고 삼국통일을 이룩해, 이날을 기념하여 나무를 심었다.
 
고려 시대에는 풍수 사상의 영향 아래 수도가 있는 개성 송악산의 땅기운을 보호하기 위해 소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과거에는 나무를 바닷가에서 바람의 피해를 예방하거나, 홍수를 방지하고, 땅기운이 약한 곳에 나무를 심어 보호해 주려는 비보(裨補) 조림을 위해 숲을 조성했다.
 
조선에서는 경국대전이라는 법률에 나무를 심고 가꾸는 조항을 넣어 백성들의 나무 가꾸기를 강조하고 산림 관리를 강화했다. 요즘은 기후변화로 나무를 심는 시기가 약 2주 정도 빨라졌다.
 
중국에서는 매년 3월 12일을 식수절(植樹節)로 정해 전국적으로 나무를 심어 산지를 자원화하고 있다. 독일은 나무의 날(Tag des Baumes)을 정하고 1달 동안 나무를 심는다. 우리나라도 매년 식목일 무렵에 5억 그루의 나무를 심는다.
 
 
▲ 국가산림 1호 울진금강소나무숲(수령 200년 소나무)
 
 
조선왕조 태종(太宗, 1367~1422)은 공조판서 박자청(朴子靑, 1357~1423)에게 왕릉 주변에 많은 나무를 심도록 지시하고, 상림원 별감을 제주로 보내 감귤 나무 수백 주를 순천 등 바닷가 고을에 옮겨 심도록 했다.
 
【출처】 태종실록 24권, 태종 12년(1412년) 11월 21일
 
「遣上林園別監金用于濟州, 移栽柑橘數百株于順天等沿海郡。」
 
제9대 왕 성종(成宗, 1457~1494)은 선농단에서 친경제(親耕祭)로 한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고 나무를 심는 행사를 하였다. 제19대 왕 숙종(肅宗, 1661~1720)은 금송(禁松) 정책을 강하게 실시했지만, 아궁이 취사와 난방하는 온돌로 백성들이 따르지 못했다. 산에 나무가 없어 홍수와 한 발이 계속 이어졌다.
 
정조는 전국 산림을 보전하고, 식목 정책을 강하게 추진하여 1789년 7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도호부 화산 현릉원 융릉(隆陵)에 이장하면서 화성행궁과 팔달산(八達山) 주변에 소나무를 많이 심었다. 이를 본 백성들도 왕을 따라서 헐벗은 부모 묘역에 나무를 심고 가꾸는 것을 효(孝)로 여겼다.
 
 
▲ 화성행궁과 산림
 
 
정조는 광주, 용인, 과천, 진위, 시흥, 안산, 안성, 남양에 집중적으로 나무를 심고 보고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지방관리들은 항상 부정확한 숫자를 알려와 정조는 문신 정약용에게 임무를 주었다.
 
정약용은 새로운 방식으로 나무를 심은 숫자를 파악한 결과, 7년 동안 소나무, 회화나무, 상수리나무, 뽕나무, 잣나무, 느티나무, 자두나무, 과실수 등 1,200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정조는 소나무만 심지 않고, 혼합림을 만들어 산불을 예방하였다. 정조는 나무를 많이 심은 8개 고을에는 환곡을 탕감하고, 그동안의 힘든 일을 격려했다.
 
【출처】정조실록 38권, 정조 17년(1793년) 10월 18일/
 
「戊寅/蠲廣州、南陽、安城、安山、龍仁、振威、始興、果川等邑,水原府壬子條停退還穀。 敎曰: "畿內八邑之以植木年年役民, 而守令略施酬勞之擧, 小民未蒙一視之惠。 爲所重, 旣役民, 當有示意之政。 今年以稍熟, 昨年停退, 聞欲督捧, 趁今施惠, 可謂實政。 八邑壬子條還穀在民間者, 特令勿捧。" 又命水原府, 亦依廣州等邑例。」
 
신라 진덕왕 때는 동쪽의 청송산(靑松山), 남쪽의 오지산(亏知山, 于知山, 우지산), 서쪽의 피전(皮田), 북쪽의 금강산에 4대 영지(靈地)가 있었다. 나라에서 큰일을 결정할 때 울창한 숲 영지에 모여 화백(和白)회의를 개최하고 국사를 의논하면 하는 일들이 모두 이루어졌다.
 
 
▲ 청송 주왕산(720m)
 
 
고려의 금강산 신앙은 신라와 동일하게 존중되었다. 태조 왕건이 금강산의 법기보살(法起菩薩, 담무갈보살)에게 경배하는 목각탱(木刻幀)이 고려 후기 1307년에 제작되었는데, 고려 시대 화가 노영(魯英)이 제작한 세로 22.5cm, 가로 13cm의 〈阿彌陀如來九尊과 高麗 太祖 曇無竭菩薩禮拜圖〉는 조성 연대와 작가 발원자가 있어 당시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 〈阿彌陀如來九尊과 高麗 太祖 曇無竭菩薩禮拜圖〉(사진:문화재청)
 
 
원나라 제국 간섭기에도 금강산은 보살의 상주처(常住處)로 더욱 주목받았다. 고려 우왕 때 정몽주(鄭夢周, 1337~1392)를 따라 일본에서 사신으로 온 승려 천우(天祐)는 공민왕에게 금강산에 꼭 갈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1396년에 조선에서 보낸 표전문(表箋文)에 불손한 글귀가 있다고 트집을 잡았다. 해명과 사죄를 겸한 사신을 보내라고 하였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문신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을 보내려다, 1389년에 주원장을 만난 적이 있었던 양촌(陽村) 권근(權近, 1352~1409)을 사신으로 보냈다.
 
【출전】 태조실록 10권, 태조 5년 7월 19일 甲戌 1번째 기사 / 표문과 전문 지은 권근·정탁 등을 남경으로 보내며 시말(始末)을 주달(奏達:임금께 아룀)한 글.
 
「還。 判司譯院事李乙修爲管押使, 管送撰表箋人藝文春秋館學士權近、右承旨鄭擢、當該啓稟校正人敬興府舍人盧仁度於京師。 以漢城尹河崙爲啓稟使, 具奏于帝曰: 洪武二十九年六月十一日, 欽差尙寶司丞牛牛等官至, 準禮部咨, 欽奉聖旨節該: "前者進正旦表箋文內, 輕薄戲侮, 著將撰文者發來, 止送撰箋者至, 其撰表人鄭道傳、鄭擢 , 至今不見送到。 今再差牛牛等...」
 
 
▲ 충북 음성 권근 신도비, 1922년 촬영(사진:국립중앙박물관)
 
 
명나라 태조는 권근을 특별히 우대하며, 그의 시재(詩才)를 시험하고자 조선의 명승지 시를 지어 바치도록 하여, 권근은 〈금강산〉 칠언율시(七言律詩)를 지어 태조를 감동하게 했다.
 
 
雪立亭亭千萬峰 (설립정정천만봉)
海雲開出玉芙蓉 (해운개출옥부용)
神光蕩蕩滄溟闊 (신광탕탕창명활)
淑氣蜿蜒造化鐘 (숙기완연조화종)
 
눈 속에 천만 봉우리 우뚝우뚝 솟았고
바다 구름 걷히니 옥 같은 부용(태양)이 드러나네
신비한 광명 햇빛 넘실대니 푸른 바다 드넓고
맑은 기운 완연하니 조화 부림 많구나.
 
突兀崗巒臨鳥道 (돌올강만임조도)
淸幽洞壑秘仙蹤 (청유동학비선종)
東遊便欲陵高頂 (동유변욕능고정)
俯仰鴻濛一盪胸 (부앙홍몽일탕흉)
 
뾰족한 산봉우리 사이로 험한 길이 이어졌고
맑고 깊은 골짜기에 신선들의 자취뿐이네
동국에 놀러 와 높은 봉우리에 올라 보소,
천지를 굽어보고 우러러보며 가슴을 한번 씻고 싶네.
 
 
▲ 금강산 구룡폭포(74m)
 
 
정조는 금강산을 한 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역대 선왕(先王)들이 금강산에 있는 사찰에 시주를 올린 옛 문헌을 본 적이 있어 금강산을 찾아가는 만덕에게 금강산의 유명 사찰에 대하여 깊이 있는 대화를 할 수가 있었다.
 
금강산에 유명한 사찰로 유점사(楡岾寺), 신계사(神溪寺), 장안사(長安寺), 표훈사(表訓寺), 정양사(正陽寺), 보덕굴(普德窟), 마하연(摩訶衍), 도솔암(兜率庵), 장경암(長慶庵), 지장암(地藏庵), 관음암(觀音庵), 안양함(安養庵) 등 108개의 사찰이 있는데, 신라 시대에 창건된 오래된 사찰도 있었다.
 
조선왕조 7대 왕 세조(世祖, 1417~1468)가 나이 어린 단종(端宗, 1441~1457)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뒤 피부병으로 고생하다가 1466년(세조 12) 2월에 금강산 온정리 행궁을 수축하고, 3월 16일부터 윤삼월 28일간에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금강산 순행에 올랐다.
 
 
▲ 내금강 장안사(長安寺)
 
 
당시 순행 길은 양주, 파주, 철원, 김화, 금성을 거쳐 장안사, 정양사, 표훈사를 방문하고 행궁에 머물다가 유점사를 찾고 내려와 행궁에 머물렀다. 세조는 순행 중 3월 21일에는 장안사, 정양사를 거쳐 표훈사로 가서 간경도감(刊經都監)에 명하여 수륙회(水陸會)를 설하게 하고 호조에 명하여 쌀 삼백석, 찹쌀 10석, 깨 20석을 금강산 안의 여러 절에 나누어주었다. 세조는 간성, 양양 낙산사, 강릉, 오대산 상원사, 원주, 지평을 거쳐 한양으로 돌아왔다.
 
 
▲ 오대산 사고의 옛 사진
 
 
영조는 마흔이 넘도록 왕위를 이을 후계자가 없었다. 1735년 후궁 영빈 이 씨가 왕자를 출생했다. 영조는 두 살 아이를 세자로 책봉했다. 사도세자는 열 살 때인 1744년에 외척과 파당의 문제점을 알았다. 1749년부터 1762년까지 13년 동안 영조 대신 대리청정을 하였으나, 자신을 보호해 주던 중전과 대비의 죽음과 알지 못하는 정신병, 당파 갈등 속에 세자는 외롭고 나날이 약해졌다.
 
세손이 11세 때 1762년 5월 22일 윤급(尹汲, 1697~1770)의 시종 나경언의 고변(告變)으로 아버지 장조(莊祖) 사도세자가 폐위되고 뒤주에 갇혀 20일 후 죽는 임오화변(壬午禍變) 아픔을 겪었다. 세손은 할아버지 영조(英祖, 1694~1776)를 대신하여 1년간 대리청정하다 1776년 영조의 승하로, 조선 제22대 국왕 정조로 등극했다.
 
정조(正祖, 재위 1776~1800)는 초기에 홍국영 등 여러 신하에게 의존하여 정책을 펼쳤으나, 1780년부터 친정체제를 확립하고 탕평책으로 신하들을 골고루 등용했다.
 
정조는 개혁 정책을 시행하면서 산이 푸르고 숲이 무성해야 국가가 더욱 강해진다고 생각해 산에 나무를 많이 심으라고 독려했다. 《일성록》을 보면 수원 화성에 버드나무를 많이 심어 화성을 유천성(柳川城)이라 불렀고, 수원 상인을 유상(柳商)이라 불렀다.
 
정조 당시 영의정 서명선(徐命善, 1728~1791)은 왕궁의 식목을 관리하는 규정을 담은 농업서 《식목실총(植木實總)》을 왕에게 올렸다. 이후 11개 항의 식목절목(植木節目) 규정에 따라 궁궐 안에 봄과 가을에 나무를 심고, 관리가 검사하고, 왕에게 보고하였다. 책은 규장각(奎章閣) 도서에 있다.(계속됩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금강산(金剛山) 식목일(植木日) 정약용(丁若鏞) 조선 정조(正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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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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