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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7년 김만덕(金萬德) 홍도(紅桃) # 홍도야 울지마라
【문화】
(2024.04.25. 11:30) 
◈ 정조, 재색 겸비하고 노래와 춤 뛰어난 ‘홍도야 울지마라’ 주인공에 별호 하사
동도명기 홍도(紅桃)가 만덕에게 시를 보내다
한양에 머문 지 반년이 지난 만덕(萬德)은 1797년 3월에 영상 채제공과 장안 선비들의 환송을 받으며 금강산 유람에 올랐다. 만덕의 금강산 출발이 장안에 퍼지자. 선비들은 모두 그녀의 용기를 칭송하였다. 당시 시를 잘 짓기로 유명한 홍도(紅桃)가 그녀의 덕행에 감탄하여 길을 떠나는 만덕을 위해 칭송하는 시를 보내와, 만덕은 감사 인사를 전했다.
동도명기 홍도(紅桃)가 만덕에게 시를 보내다
 
 
한양에 머문 지 반년이 지난 만덕(萬德)은 1797년 3월에 영상 채제공과 장안 선비들의 환송을 받으며 금강산 유람에 올랐다. 만덕의 금강산 출발이 장안에 퍼지자. 선비들은 모두 그녀의 용기를 칭송하였다. 당시 시를 잘 짓기로 유명한 홍도(紅桃)가 그녀의 덕행에 감탄하여 길을 떠나는 만덕을 위해 칭송하는 시를 보내와, 만덕은 감사 인사를 전했다.
 
 
女醫行首耽羅妓 萬里層溟不畏風
又向金剛山裡去 香名留在敎坊中
 
탐라 기생 행수 의녀는 만 리 높은 파도도 겁내지 않았네!
이제 금강산으로 길을 향해 떠나니 꽃 같은 이름 교방에 남기네.
 
 
홍도는 조선왕조 제22대 정조(正祖, 1752~1800) 임금이 특별히 내린 별호(別號)이다. 홍도는 경주에서 세를 떨치던 향리 토호 최명동(崔鳴東. 종 2품 嘉善大夫)과 관기 사이에서 태어난 최계옥(崔桂玉, 1778~1822)으로 자는 초산월(楚山月)이다. 아이는 종모법(從母法)에 따라 어머니와 같이 살며 기적(妓籍)되었다.
 
계월은 글(書)에 능해 충분히 천민 신분을 벗어날 수가 있었지만, 신분이 엄한 시절이라 사회 관습에 따랐다. 계월은 어릴 때부터 머리가 명석하여 12세에 시를 잘 짓고 춤을 잘 추었다. 14세에는 예(藝)가 남보다 뛰어났다. 특히 옛글에 밝았고, 얼굴과 태도가 뛰어나고, 노래와 춤이 빼어났다.
 
 
▲ 東都名妓紅桃之墓碑(사진: 시인 김백)
 
 
경주 교방에서 활동하다가, 정조 21년에 경주 부윤(府尹) 유한모( 兪漢謨)의 천거로 상의원(尙醫院)에 뽑혀 창경궁(昌慶苑)에 들어왔다. 이때 계월의 나이가 20세였다. 궁궐 연회석에서 정조의 장인이자 순조의 외조부 금석(錦石) 박준원(朴準源, 1739~1807)이 계월의 가무를 보다 마음에 꼭 들었다.
 
상궁의 소리에 깊이 빠졌다. 당시 박준원은 상처한 지 10여 년이 지나 만년을 외롭게 지내는 환갑을 맞이한 나이였다. 그는 본관이 반남(潘南)이고 참봉공파 19세 손으로 錦城尉 朴明源, 《熱河日記》를 쓴 박지원과 한 집안이다.
 
정조는 음악과 기예에 밝은 장인의 오랜만에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계월을 권했는지, 박준원이 사위인 정조에게 계월을 외부(外婦, 소실)로 허락해 줄 것을 간청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문헌에는 장인이 사위에게 부탁하여 정조가 별호를 내렸다고 한다.
 
박준원은 사마시에 급제한 문인으로 그의 셋째 딸이 정조 11년 2월 수빈(綬嬪)으로 간택되어 아들을 낳았다. 보은 현감으로 있던 박준원을 정조가 초치하여 동궁의 교도와 호위를 맡게 했다. 박준원은 근세에 드물게 덕행이 높고 청빈하여 정조가 저동(苧洞)에 집을 구해주었는데, 현재 서울 영락교회 자리이다.
 
동궁은 훗날 순조(純祖, 1790~1834)가 되었다. 박준원은 노래와 음악을 즐기며, 39살이나 차이가 나는 홍도와 11년간 행복하게 살며 《금석집(錦石集)》을 남겼다. 홍도는 늘 경주 고향을 그리워하며 수심에 잠겼다. 박상공이 홍도에게 “자네는 어찌 날이 갈수록 병약하고 쇠약해 보이는가? 하고 물었다. 이에 홍도는 작은 목소리로 앵무시(鸚鵡屎) 시를 읊었다.
 
 
綠琴紅裳鳥 (노금홍상조)
每向雲齋鳴 (매향운제명)
鳥籠深鎖久 (조롱심쇄구)
那得不鎖形 (나득부쇄형)
 
푸른 옷깃 붉은 치마 입은 새가
언제나 구름 낀 무지개 하늘 향해 우는구나
이 몸 깊고 깊은 새장 속에 갇힌 지 오래라
하여 이 몸 어찌 쇠하지 않겠어요!
 
 
홍도는 남편 박상공이 세상을 떠나자, 여주에 묘를 쓰고 3년 상례를 마쳤다. 그녀는 자유인의 신분이 되어 32세에 고향 경주로 돌아와 살았다, 그녀는 자청하여 궁궐에서 보고 배운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 경주 관아 기방에서 스승이 되어 기생의 교양과 詩歌, 가무를 비롯하여 敎坊鼓, 杖鼓, 大鼓, 小鼓, 節鼓, 唐笛, 大禁, 同簫素, 당피리, 大平簫, 玄琴, 伽倻琴, 月琴, 奚琴, 唐琵琶, 鄕琵琶,大箏, 牙箏, 方饗, 饗鈸, 銅鈸 등을 13년 동안 가르쳤다.
 
그녀는 주로 속악(俗樂)을 전해주고,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여 동도악부(東都樂府)에서 사종(師宗)이 되었다. 많은 문인이 그녀를 찾아와 고금(古今)을 논하고 시를 지었다. 그러나 약한 몸에 병이 깊어 순조 22년(1822) 박상공에게 물려받은 자신의 전 재산을 후사가 없어 어려운 친척과 이웃에게 골고루 나눠주고 45세로 생을 마쳤다. 묘는 선산이 있는 경주시 도지동 형제산 산627-1에 안장되었다.
 
28년 후 철종 2년(1851)에 경주의 악공과 기생, 풍류객이 홍도 스승을 기리는 묘비를 건립했다. 묘비는 소리꾼 이상복(李尙福)이 비문을 짓고, 전 검지(僉知) 절충장군 최남곤(崔南崑, 1793~1866)이 388자 예서체로 정교하게 썼다.
 
비문에는 ”娘을 따르고 사모하던 풍류 협객들이 娘을 추모하고 기록을 남겨 후세에 전하기 위해 숭정(崇禎)後 四 辛亥(1851) 8월, 최남곤(崔南崑)이 쓰고, 교방 기생 복절(福節), 운열(雲悅)이 모금 비를 세워 길이 남긴다.”라고 되어 있다.
 
【출처】 東都名妓紅桃之墓
 
伶 李尙福 妓 允惠 松切
 
逮至辛亥 州之風流諸俠及敎坊諸伶妓 以娘之爲樂府師宗 不欲泯晦 各損若干財 立石表其墓 屬余爲文 余以娘之實蹟 書而歸之 傳之不朽云爾 爲之銘曰 有美一人兮 擅大東. 容之丰兮 藝之工. 詩以歌兮 諧律音. 山花寂寂兮 月蒼蒼. 崇禎后四 辛亥八月 日立前僉知 崔南崑識 監役 閑良金周海 折衝張斗寅 敎坊有司 方⌧範 妓有司 福節 雲悅. 娘之姓崔 名桂玉 字楚山月. 世以紅桃稱者 其尙宮時御賜別號也. 父嘉善大夫諱鳴東 母⌧⌧東都世妓也. 娘生於戊戌 天姿潁異 年才十歲 通詩書 曉音律 十四歲 色藝雙絶 二十選入于尙醫院 以歌舞獨步長安 名振三國 國舅苧洞朴相公 見而悅之 納爲外婦 深居數十年 朴相公 戱之曰 汝近何鎖瘐也. 娘題鸚鵡詩 喩意曰 緣衿紅裳鳥 每向雲霽鳴 雕籠深鎖久 那得不鎖形 及相公捐館 服闋後 歸鄕里 守紅 歲壬午 遘疾疾革 取筆書身後事 以無后嗣 家眥物 施親戚 投筆 就枕而逝 得年四十五 葬于東都之兄弟山 先隴下負艮原.
 
홍도의 묘는 경주 시내에서 불국사로 가다 동방역 근처 산에 있어 해방 이후에 경주의 국악인과 전국에서 온 판소리꾼이 자주 들렸다. 숙종 때 영매(英梅)는 거문고, 장고, 노래, 춤에 능해 경주를 찾아오는 문인이 많았다.
 
판소리 명창 정순임의 모친 장월중 선생이 묘역을 돌보고 제사를 지냈다. 조선 시대 기생은 우리가 이해하는 수준보다 훨씬 높았다. 공무로 지방에 간 관리들이 각 고을에서 접대받은 옛 기록을 살펴보면 기생의 접대란 기악(妓樂) 음악과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였다. 기생은 조금 수준이 있는 사람과는 시를 주고받았다.
 
1970년대 정비석 선생은 신문에 ‘명기열전(名妓列傳)’을 기고하면서 경주를 세 번 방문했다. 그러나 홍도에 관해 증언할 어른을 만나지 못해 글을 발표하지 못했다. 시인 김명석은 경주의 문인들이 1978년부터 홍도의 묘에 벌초도 하고 술잔을 올렸다고 회고했다. 경주문화원장을 지낸 조철제 선생은 교사 시절에 홍도 비석을 탁본하여 김형진 선생에게 자문을 구했다.
 
 
▲ 東都名妓紅桃之墓碑
 
 
1989년에 시인 김백은 홍도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취재에 나섰다. 길을 물어 찾아가니 홍도의 비가 깨진 채 있었다. 김백은 주변 사람들을 모아 사진을 찍고는 비문을 해석할 수 있는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에 있는 최효식 교수를 찾아가 비문 해석을 의뢰했다. 1990년 8월 14일에 경주시 도지동 627번지 동광포도원 야산에서 홍도 비석을 찾아냈다는 특종 보도가 나가자 많은 사람이 묘를 보려고 경주를 방문했다.
 
최효식 교수는 당시 박물관장으로 근무했다. 비문을 판독하여 기자들에게 소상하게 알렸다. “홍도비는 홍도가 세상을 떠난 지 28년 뒤인 1851년(철종 2년)에 세웠다. 높이 1.2m, 너비 50cm, 두께 20cm의 화강암으로 앞면에 ‘동도 명기 홍도 지묘’로 되어 있고, 뒷면과 옆면에는 388자의 글자가 있다.
 
낭자 이름이 최계옥이고 홍도라는 예명은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별호라고 하였다. 비 중간에 사라진 한자는 알 수가 없다. 묘는 일반 사람들의 묘보다 2배 내외이다.” 신문 기사가 나가자 김백 기자를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
 
어느 날 동국대 젊은 교수 두 사람이 김백 기자를 찾아와 묘 안내를 부탁했다. 세 사람은 홍도 무덤을 방문하여 제물을 차려 놓고 절을 하고 “한 시대를 풍미하며 뭇 사람들의 꽃이 되어 피고 진 그대여, 여기 또 한 시대를 풍미하는 낭인들이 사모의 정을 올리노니...”하며 술잔을 올렸다. 최효식 교수는 《한국 향토사 연구》라는 책을 발간했다. 이후 계간지 신라문화에 〈東都의 명기 紅桃 崔桂玉〉 논문을 게재했다.
 
 
▲ 경주시 도지동 산 627-1번지에 있었던 홍도 명기 묘역으로 2007년 8월 발굴 당시 모습(경주신문)
 
 
경주에 아파트 건축 붐이 불었다. 어느 날 홍도 묘비 위에 코아루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선산 묘역이 위태로워졌다. 어느 날 포도밭 주인이 비석을 보니 누군가 비석을 깨 두 개로 쪼개졌다. 농부는 안타까워 시멘트로 붙여 놓았다. 묘역이 아파트부지로 편입되면서, 2005년 5월경 아파트를 시공하는 시행자가 경주시에 무연분묘 개장신고를 하였다. 그러고 나서 며칠 후에 홍도 비석이 사라졌다. 누군가 택지 개발에 방해가 된다고 하여 비석을 몰래 없애버린 것이었다.
 
2005년 11월 11일 홍도의 무덤은 파헤쳐 화장된 뒤 건천 영호공원납골당에 봉안되었다. 이런 내용이 뉴스로 보도되자 뒤늦게 문화재청이 나섰다. 문화재청은 건설사에 묘비를 찾으라고 요청했지만, 비석을 찾지 못하고 현장에 안내판만 남겼다.
 
경주시청 최홍락 건설과장은 뒤늦게 사실을 알고 부부가 수년 동안 제사를 모셨다. 경주 최씨 딸들의 모임인 ‘명가회’는 ‘동도 명기 홍도 제례’을 가졌다. 무연고 분묘 납골 보관 기간 10년이 지나 행정절차에 따라 사라질뻔하였다. 2014년 10월 신라문화진흥원에서 유연고 분묘로 이관해 임시로 영호공원납골당에 봉안되어 있다.
 
 
▲ 동도 명기 홍도 추모비 제막(사진:경주신문)
 
 
경주의 시민들과 사회단체는 경주예술의 전당에 모여 〈홍도 최계옥 기념사업회〉 발기인 모임을 하고 추모비 건립을 추진했다. 추모비는 시민 50명이 재원을 마련해 조철제 선생이 글을 짓고 외동석재 한동식 대표가 기증한 돌에 정수암 선생이 글을 새겼다. 시민단체는 홍도 비의 복원 장소로 원래 자리를 생각하다 기러기가 찾아오는 금장대 일원으로 정했다.
 
 
▲ 청동시 시대 암각화(사진 경주시청)
 
 
금장대에는 암각화와 신라 고분, 동국대 캠퍼스, 경주예술의 전당이 모여 있어 탐방객이 즐겨 찾는 명소이다. 김동리(金東里, 1913~1995) 선생의 작품 《무녀도》의 배경지로 유명하다. 경주시는 동천강 금장대 공원에 홍도를 위한 공원을 특별 조성하고 추모비를 2016년 4월 건립했다. 이후 매년 10월 〈홍도 추모예술제〉 기념행사를 하고 있다.
 
 
▲ 제6회 동도 명기 홍도 최계옥 추모예술제(사진:한겨레신문)
 
 
일제강점기 암울한 시기에 신파극이 유행했다. 임선규(본명 임승복, 1912~1970)는 동경에 유학을 다녀와 1936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란 글을 썼다. 그리고 1936년 7월에 동양극장 악극 무대에 이를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라는 제목으로 무대에 선보였다. 가엾은 홍도는 장안의 화제였다.
 
 
▲ 홍도야 울지마라 노래 음반
 
 
이서구(李瑞求, 1899~1982) 선생이 노랫말을 지어 가수 김영춘이 ‘홍도야 울지 마라’ 노래를 1940년 콜롬비아 레코드에서 취입했다. 장안의 기생들은 오빠를 위해 기생이 된 홍도의 애절한 모습을 보려고 연일 동양극장에 몰려들어 눈물바다를 만들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좌익단체 검거령이 내려지자, 아내 문예봉과 북으로 갔다. 임선규가 창작한 가상 인물 홍도는 경주 지방의 홍도(紅桃)와 아무런 연관이 없다.
 
만덕은 경흥로를 따라 도봉산 쪽으로 가면서 홍도가 준 시를 계속 읊조렸다. (계속)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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