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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석(木石) 부인 ◈
◇ 제4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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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9~10
이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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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목석(木石) 부인
2
제4장
 
 

1. 제1절

 
4
주 여사의 이 말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5
그렇다고 주 여사의 얼굴을 알아보아서가 아니다. 내가 놀란 것은 이 여성이 나라는 인간을 알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 앞에서였다. 내게 대한 그의 지식이 나의 생애의 어느 부분에 해당하는지를 몰랐었다. 그것이 나의 생의 어느 토막이든 내게는 조금이라도 이 여성 앞에서 떳떳할 수 있는 토막이란 별로 없던 것이다. 이 아름다운 여성한테 나란 이간을 잘 보이고 싶은 잠재 의식이 나로 하여금 더 당황케 했던지도 모를 일이다.
 
6
그렇다고 주 여사한테 자신을 돋보이고자 하는 심리에 불순한 그런 구석이 있던 것도 아니다. 그것은 마치 처녀가 남자 앞에서 자기의 살을 가리려 드는 본능과도 같은 심리였을 것이다. 노출된 처녀의 육체의 어느 부분이고를 막론하고 그것은 아름다움이 못 되듯 나의 생애의 그 어느 부분이든 주 여사 앞에 노출시켜서 추하지 않을 부분이란 없었기 때문이었다.
 
7
주 여사의 명령에 쫓듯 나는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찬찬히 대답했었다.
 
8
"… 모르겠는데요?"
 
9
"그러실 겝니다."
 
10
주 여사의 대답은 예측했더니보다도 간단하다.
 
11
"모르시는 게 당연하겠습죠."
 
12
"저… 날 어디서 보셨던가요?"
 
13
나는 아까보다도 더 열심이었다. 주 여사가 나를 아는 것이 분명한 이상 그것이 나의 생애의 어느 부분에든간 내게 대한 그의 기억은 지워버릴 수는 없다는 일종의 체념에서였겠지만 그보다도 전혀 내 기억에는 없던지라 정말 궁금하기도 했던 것이다.
 
14
"어디서 뵈었던가?"
 
15
"통 생각이 안 나셔요?"
 
16
"글쎄요…"
 
17
"찬찬히 생각해보셔요. 제가 선생님을 알아보았을 적엔 선생님을 만나뵌 일이 있는 건 사실 아닙니까, 그런데 선생님은 몰라보시고 저만이 선생님을 알아뵈었다는 건 제 자존심이 허락지 않습니다요. 잘 차안찬히 생각해보셔요!"
 
18
주 여사는 어린 학생한테 어려운 질문이나 할 때처럼 친절했다. 사뭇 달래는 투였다.
 
19
"한 해 두 해 더듬어 올라가보셔요. 그러면 기억나시는 해가 있으실 테니깐요."
 
20
주 여사는 해죽이 웃기까지 한다. 정말 어린 학생의 기능을 유도해주는 여 선생님의 태도다.
 
21
"한 해, 두 해…"
 
22
하고 나도 일찍게 따라 웃어보였다.
 
23
"네, 한 해 두 해…"
 
24
나는 이렇게 뇌까리며 주 여사의 말대로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기도 했었다.
 
25
그러나 올라가면 갈수록 나의 기억은 뿌예져 갈 뿐이었다.
 
26
"정말 모르시겠나봐?"
 
27
주 여사가 이렇게 말했을 때는 나는 전람회장을 헤매고 있었다. 해방 이듬 해였을게다. 그때까지는 그래도 나는 나의 생활을 가지고 있었다. 신념도 있었고 정열도 있었다. 생활력도 갖고 있을 때다. 나는 나의 모든 정열을 오직 나의 예술에만 바칠 수 있었다. 그 해 가을 나는 나의 개인 전람회를 가졌던 것이다.
 
28
"전람회장에서?"
 
29
하고 대답도 아니요 혼잣말도 아닌 어련무던한 소리를 하고 치어다보려니까 주 여사는,
 
30
"아아뇨!"
 
31
하고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어보인다.
 
32
사뭇 귀엽다는 표정처럼도 보인다. 전람회가 아니라면 내가 여성들과 접촉한 기회란 술집밖에는 없고 보니 도화 선생 시대의 제사들 이름 중에서 주란 성을 가졌던 선생의 이름을 되는 대로 주워섬기어도 보았으나 주 여사는 여전히 고개만 짤래짤래 흔들면서 재미있다는 듯이 해쭉해쭉 웃고만 있다.
 
33
나는 더 생각해볼 용기도 나지 않았다. 아니 나는 이렇게 아름다운 여성과 맞대해본 일이 없던지라 애당초에 그런 노력을 하는 것부터가 우스운 일이었다. 나는 할 수 없이 모르겠노라고 손을 들고 말았다.
 
34
그랬더니 주 여사는 아까의 말보다는 심상하게,
 
35
"그러실 거야."
 
36
하고 천연덕스럽다.
 
37
"선생님은 기억 못하실 거야요. 벌써 십오륙 년이나 되었는걸요, 뭐."
 
38
주 여사의 이 말을 듣고서도 나는 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주 여사가 나를 아노라 한 것은 농담이라고만 여겼었다. 이야깃거리가 없으니까 나를 놀리느라고 그런 것이 아닌가도 했다. 그래서,
 
39
"부인께서 날 보셨다는 것이 아마 꿈속이었던가봅니다."
 
40
이렇게 웃으려니까 주 여사는 눈을 호동그라니 뜨고서,
 
41
"꿈은 왜 꿈입니까? 한 십오륙 년 전에 선생님이 아시는 어른이 술례골 뒤 일각대문 집에 사시지 않으셨어요? 그러셨죠?"
 
42
하는 소리에 나는 귀가 번쩍 뜨였다.
 
43
"그 어른이 뭣하시는 어른이셨던가요?"
 
44
내가 이렇게 묻는 말에 주 여사는 또 해죽이 웃어보이고는,
 
45
그만하면 생각이 나셨나본데 " 그려셔? 이름도 성도 대지 않았는데도 그 어른이라구 깍듯이 공대를 하시는 것만 봐두 짐작이 가신 것 아닙니까?"
 
46
"글쎄, 뭣하는 어른이셨어요?"
 
47
"선생님과 꼭 같으신…"
 
48
주 여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49
"아아…"
 
50
하고 소리를 지르다시피 했다.
 
51
나는 그제서야 모든 것을 깨우쳤던 것이다.
 
 
 

2. 제2절

 
53
따지고 보니 역시 십오륙 년 전이다. 그 해 나는 동경서 나왔었다. 미술학교를 졸업하던 해고 보니 스물넷이었을 것이다. 고국에 돌아온 것도 5월의 아침처럼 희망에 찼었다. 현해탄의 거친 물결도 희망에 뛰는 나의 가슴인 양 싶어 즐거웠고, 경성역에 내리자마자 물안개가 자욱하도록 비가 내리퍼부어서 내리던 길로 물에 빠진 생쥐가 되었건만 역시 나는 흐뭇했었다. 괄시 못할 사람들의 소개장이 다섯 장이나 가방 속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54
한 장은 신문사요, 한 장은 학무과장, 나머지는 전부 중학교 교장과 교감이었고 보니 나는 이 다섯 장 중에서 어느 것을 골라가져도 좋았었다.
 
55
'고리탑작지극한 도화 선생보단 신문살 가지, 사내자식으로 태어났으니 네 활갤 쫙 펼치구서 가루 세루 한번 뛰어보다가 안 되면 학교두 되가면 그만이 아니다.'
 
56
나는 이렇게 생각했었다. 사실 나는 이런 생각을 즐길 수 있는 처지에 있었다. 취직을 하고 나면 나머지 소개장은 누구를 줄까? 나는 비가 주룩주룩 내려는 창 밖을 내어다보면서도 여관에서 이런 생각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이다.
 
57
그렇던 나의 5월의 희망은 그 해가 다 가도록 좀처럼 이루어질 줄 몰랐다. 나는 세번이나 집에 전보를 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십여 일이 지나서야 짤막한 현지를 받았을 뿐이다.
 
58
"… 물가만 고등하고, 곡식 좀 판댔자 세금 물어가기도 바쁘다. 취직이 되지 않거든 빨리 내려와서 감농이나 하게 하여라…"
 
59
늙으신 아버지의 편지 사연은 이러했다.
 
60
나는 막다른 골목 안에 든 셈이었다.- 내가 술레골 종묘담 밑 일각대문 집에를 드나든 것은 그 해 섣달 그믐께부터다. 이 이각대문 집에 우리 미술계의 선구자이신 소계(小憩) 선생이 살고 계셨던 것이다.
 
61
소계 선생은 코발트니 블루니 하는 용어를 우리 나라에 첫 수입해 오신 선구자이시기도 했지만, 내가 선생을 찾아다닌 동기는 선생을 존경해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취직 알선을 바라서였다. 반년 이상을 두고서 거의 2,3일에 한 번씩은 선생 댁 일각문을 두드렸었다.
 
62
소계 선생 댁은 방 셋에 부엌 한 칸인 도합 일곱 칸 반의 초라한 그야말로 오막살이였다 몇 해 전만 . 해도 초가였던 것을 양철로 덮었고 보니 기둥이고 서까래고 볼 나위도 없었다. 이 초라한 짐도 아홉 식구나 되는 많은 가족이 혼자 쓰지 못하고 뜰아랫방은 사글세로 내어놓지 않으면 안 되는 소개 선생의 처지도 처지였지만, 추녀 끝에 삭아빠진 양철 한 쪽을 붙이고서 부엌이랍시고 쓰고 있는 뜰아랫방 식구의 처지는 소계 선생만도 못했을 것은 빠안한 일이다.
 
63
이 뜰아랫방에 60이 가까운 노파가 딸 하나를 데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늙었뿐 아니라 병까지 갖고 있었다. 찬바람이 일면서 시작한 기침이 날이 따스해질 때 가서야 겨우 맞는 천식병이었다.
 
64
"지금 아이로선 참 무던해요."
 
65
하고 소계 선생이 부인은 뜰아랫방 처녀 이야기만 나면 입술에 침이 말랐다.
 
66
"긴 병에 효자 없다더구먼서두 이것은 일년을 두구 보아도 꼭 하루 같군요. 밤이면 더구나 잠을 못 자더군요. 그럴라치면 아무리 추운 밤에도 일어나서 어머니를 안고서 밤을 세우나봅니다."
 
67
"효녀로군요."
 
68
한 처녀가 늙고 병든 어머니한테 효성이 극진하다는 사실보다도 그때의 내게는 취직이 되지 않는 것이 더 중대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가 거듭될수록에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처녀한테 관심을 갖기 시작했었다. 밤에는 어머니를 안다시피 하고 밤을 세우면서도 새벽이면 일어나서 안집 물솥에 불 먼저 지펴놓고 자기네 조반을 끓인다던 것이다.
 
69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는가 했더니만 소실을 얻어가지구 따루 산다는군요. 복덕방을 한다는 주제에 첩은 무슨 말라비틀어질 놈의 첩인지 모르지. 그두 젊디젊다니 계집은 또 무슨 계집이 그런 게 있더람."
 
70
부인이 소계 선생의 마고자를 뒤집으며 푸슬푸슬 이런 소리를 하니까 소계 선생이,
 
71
"허 임자, 그러다가 강짜하지 않겠소?"
 
72
하고 껄껄 웃는다.
 
73
"강짜가 아니라 그래 말이 됐수. 사내양반들이란 다 그렇답니까. 복덕방 영감 주제에 첩이 다 무슨 아랑곳이래요. 식구두 많지 않은 단 세 식구겠다. 돈푼이나 생기거든 보글보글 끓여놓구 둘러앉아 먹을 것이지 그 비럭질하듯 해서 번 돈을 젊은년한테 '요것뿐이올시다.' 하구 갖다바쳐야 한대요?"
 
74
"뭐 병든 어미 싫다구 처잘 차구 나서야 딴살림을 하는 녀석두 있는데…"
 
75
역시 뜰아랫방 식구 이야기다. 장성한 아들이 있어 장가까지 들였더니 제 댁 꾐에 빠져서 취직자리를 옮겨가지고 청진으로 달아났다는 것이다. 마루보시 본사에 있다가 지점으로 갔다고 한다.
 
76
"그래두 오라빌 따라갈 게지, 색시 혼자서 병든 어머닐 어떻게 모시자구 악지를 써요?"
 
77
소계 선생의 부인이 이렇게 딸한테 나무람을 하려니까 딸은 옷고름싹으로 눈물을 찍어내면서,
 
78
저두 웬만하면사 뭐하러 " 이렇게 떨어졌겠습니까, 내 집 흉 같지만 올케란 사람이 여간 매몰차지 않아요. 고수머리치구 마음 독한 사람 없다는 것두 헛말이더군요. 시어머닐 이건 개가 고양이 보듯 한답니다요. 하루 밥 한숱 얻어 자시는 것이 살루 가지두 못하게 들들 볶아대니 살겠어요."
 
79
"떡 해먹을 집안야."
 
80
부인도 나중에는 처녀의 처사에 동감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3. 제3절

 
82
내가 소계 선생 댁 일각문을 드나든 것은 그 해 섣달 그믐께로부터 이듬해 첫여름까지였고 보니 반년이나 남짓했을 것이다. 이 반년 동안 나는 뜰아랫방 모녀가 밥을 끓이는지 죽을 끓이는지까지도 알고 있었다. 아내 꾐에 빠져서 어미를 버리고 나간 아들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사람의 탈을 쓴 값을 하느라고 한 달에 돈 5워씩 보내주어 방세를 물고 모녀의 생활비는 모녀가 삯바느질로 이어가고 있었다. 어려서는 학교에 다니느라 했고, 중학에도 이태나 다니었다면서 워낙 눈썰미가 있어서 꽤 까탈스러운 기생들의 바느질 시중에도 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83
"지금두 푼푼이 모은 것으로 공부를 하겠다구 그런답니다. 공불 못해서 아주 재술해요. 어서 부지런히 서둘러 취직이 되거든 저 색시 월사금이나 좀 대주시구려."
 
84
소계 선생의 부인은 이런 소리까지 했었다.
 
85
"그러다가 연애나 되면 어떡하게요, 사모님?"
 
86
"떡가게에 엎드러진 셈 치지 뭐."
 
87
"허, 취직을 못하니까 막 값이 싸지는군요."
 
88
부인과 이런 농담을 할 수 있는 사이까지 되어 있었다.
 
89
"그렇게 되면사 오죽이나 좋겠수. 나이두 스물다섯에 열일곱이니 여덟살 차 밖에 더 되우. 어디 궁합 좀 볼까?"
 
90
"선두 안 보구 궁합 먼저 보는 데가 어디 있답니까."
 
91
물론 부인도 농담이었고 나도 그랬다. 그러나 농이면서도 그렇게 했으면 하는 것이 소계 선생 부인의 심정이었던 모양인 것이 무꾸리를 갔던 길에 싸우를 맞춰보기도 했다는 것이다. 내 나이는 알았지만 생일을 내어준 일이 없는 더라 웃음엣소리로만 들었더니 부인은 내가 소계 선생한테 갖다 맡긴 석장이나 되는 이력서에서 생일을 알았다는 것이다.
 
92
"아니 그럼 정말이셨군요, 사모님?"
 
93
"그럼 정말이지. 누가 익은 밥 먹구 선소리만 하구 있는 줄 아나봐?"
 
94
"그래 궁합이 맞습니까?"
 
95
"아주 그만야… 신랑은 정축생에 6월이니 한세상 만났구, 규수는 시울 뱀이니 소발에 밟힐 것정이 없어 대주가 벌어다 주면 아내는 동절에 든 뱀처럼 간직해놓구 과동을 할 께니 깨소금이 쏟아지는 가정이 되겠답디다요."
 
96
"궁합을 봤으니 인전 맞선을 봐야잖습니까?"
 
97
소계 선생 댁을 찾아갔을 때면 으레껏 한번은 그 아랫방 처녀 이야기가 났었다.
 
98
"우리 색시가 잘 있는지 원…"
 
99
이것이 선생 방에 들어서면서 하는 나의 첫인사였었다.
 
100
이렇게 내가 술례골 소계 선생 댁 일각대문을 드나든 동안은 반년이나 되었건만 기실 나는 그때까지도 그 화제의 아랫방 처녀를 한 번도 정면으로 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선생 댁에를 가는 시간이란 대개 아침 먹고 나서니까 열시 가량이었다. 선생을 만나뵙는 시간은 이때가 제일 좋았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소계 선생은 환갑이 가까우신지라 열시쯤 친구 사랑으로 가서 놀기도 하고 그림도 그리곤 한다. 서양화로 출발한 소계 선생이 그즈음부터 동양화에 취미를 갖기 시작하고, 동양화의 대가요, 소계 선생의 후배이기도 한 죽헌(竹軒) 화백의 화실로 가서 밤에나 돌아오시던 것이다.
 
101
이 열시란 시간은 처녀는 아침 설거지를 해치우고 바느질에 일손을 잡을 때라 그런지 3,4일돌이로 갔건만 한 번도 얼굴을 볼 수가 없다. 몇 번인가는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마주친 일도 있었지만 미처 얼굴을 눈여겨볼 사이도 없이 흭 외면을 하던 것이다.
 
102
그때까지 내가 보았다는 것은 그 처녀의 옆얼굴뿐이었다.
 
103
그 옆얼굴이 정말 아름다웠었다. 윤이 자르르 흐르는 까만 머리와 갓 뽑아온 석고 삿 같은 흰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오목조복한 귀, 그때만 해도 그럴 시대가 아니건만 그 처녀는 웬일인지 화장도 별로 않는 것 같았다. 분명히 입술에는 아무것도 바르지 않았을 터인데 붉은 꽃잎 같은 입술이다. 그렇게 자세히 보지는 못 했었으려만 그 처녀의 속눈썹은 위로 도르르 말리듯 했더니라고-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104
이 술례골 소계 선생의 일각대문집 뜰아랫방 처녀가 바로 지금의 주 여사라는 것이다.
 
105
"아주 깜빡 몰라뵈었습니다. 정말 그렇게 말씀을 듣고 나니 그때 뵈온 부인의 옆얼굴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오는군요. 처음 뵈었을 땐 나는 보통 사람이라기보다는 조각처럼 느껴졌었습니다."
 
106
내가 이렇게 하는 말에 주 여사는 손끝으로 어깨나 툭 치는 듯싶게,
 
107
"사교의 말씀!"
 
108
하면서도 배시시 웃어보이며,
 
109
"그렇게 인상적으루 보셨다면 불과 십오 년밖에 안 되었는데 귀띔을 해드려도 몰라보세요? 거지뿌렁이시지!"
 
110
"정말 죄송했습니다만 언제 한번 정면으로 뵌 일이 있어야지요. 갯가의 방게처럼 내가 얼른만 해두 방으루 쏙 들어가버리지 않으셨나요? 내 기억엔 부인께서두 날 자세히 볼 기회가 없었을 껜데 그래두 용히 알아보셨습니다."
 
111
"선생님한텐 제 얼굴을 안 보여드렸지만 전 얼마든지 뵈었거든요. 드나드실 때마다 문틈으루 훔쳐보았었죠."
 
112
"아, 그래서…"
 
113
하고 나도 웃고 주 여사도 웃고 말았었다.
 
114
"그렇게 몰래 훔쳐보신 걸 보면 그 사모님 말씀대루 내게 호감을 가지셨던 것두 사실인가봅니다요?"
 
115
낯빛을 살펴가며 이렇게 띄엄띄엄 하는 말에 주 여사는 방울처럼 웃고는,
 
116
"가지뿌렁! 사모님이 그런 말씀을 다 하셨어요?"
 
117
"그럼요."
 
118
"그 사모님 참 엉뚱하셨네. 저보군 또 선생님이 제게 여간 호의를 갖구 계시지 않다구 그러시던데? 앉으면 선생님 칭찬이셨어요. 그저 하나 재산이 없어서 그렇지 사람은 그러시던데? 앉으면 선생님 칭찬이셨어요. 그저 하나 재산이 없어서 그렇지 사람은 더 볼 나위 없다구. 인품두 있구 재간도 있구 진짜 총각이시구, 또 뭐라시더라? 옳지 그래, 마음이 고와서 아내가 맘에만 들면 입구 다닐 게라구? 제가 하마터면 그 사모님 꼬임에 넘어가서 지금쯤 생과부가 뻔하지 않았습니까?"
 
119
"생과분 왜요?"
 
120
하고 내가 뜨끔해 물으려니까,
 
121
"그만두세요! 제가 모르구 있는 줄만 아시죠? 허지만 다 알구 있답니다. 부인까지 내어쫒으시구서 혼자 약주만 잡숫구 다니시는 줄 제가 모르는 것만 같으시죠? 전 이런 시골 구석에 쳐박혀 있으면서두 선생님이 종달세집 마담한테 반해서 다니시구 줄두 알구, 뉘 집 뉘 집에 외상값이 얼마 있으신 것까지 다 알구 있답니다요. 종달새집에서 마담한테 혹해서 다니는 어떤 고관님하구 격투를 한 사실까지두 알구 있는데요 뭐…컵을 다 내던지시구…"
 
122
"아이니."
 
123
"왜 그뿐인 줄만 아십니까?"
 
124
"또 있습니까?"
 
125
"그럼요! 더 말씀드려볼까요?"
 
126
주 여사는 이렇게 말을 하더니 무슨 생각을 했는지,
 
127
"인제 그만 해야겠군. 그러나 정말 선생님이 무안해서 가시면 어쩌개."
 
128
이렇게 깔깔 웃는다.
 
129
나는 몸이 굳어졌었다. 주 여사의 말마따나 이런 시골 구석에 쳐박혀 있는 이 여자가 어떻게 그렇게도 자기 신상을 내다보듯이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종달새점에서 싸운 것이 고관도 아니요, 싸움이 원인이 주 여사 말대로 마담과의 삼각관계는 아니었지만 싸운 것도 사실이었고, 더구나 컵을 던진 것까지 본 듯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130
"아아니, 어떻게 그렇게 다 알구 계십니까?"
 
131
하고 어이가 없어 물어도 주 여사는 그 말에는 대꾸도 않고서,
 
132
"선생님, 세게 감사해야 해요. 제가 이렇게 선생님을 모셔오지만 않았더라면 지금쯤 그 고관 나으리의 앞잡이가 선생님 뒬 밟을지도 모르지요. 마담한텐 불쌍한 생각이 안 가는 것두 아니지만…"
 
133
"흥!"
 
134
하고 나는 코 웃음이 치어졌다. 내가 마담한테 몸이 달아서 다닌다는 것은 지나친 상상이다. 마담한테는 나와 같은 성격 파탄자가 아니라도 자기의 강한 남편 외에도 젊은 사람이 두셋 달려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135
주 여사가 어디서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듣고 하는 소리인지는 알 수 없으되 내가 술보다도 여자한테 눈을 떴더라면 혹 마담과 그런 결과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르느니라고, 나는 또한 생각해본 것이었다. 언제던가 한번은 3막사에 놀러 가자는 권을 받은 적도 있었던 것이다.
 
136
그러나 지금까지의 내게는 그런 애욕보다는 알코올이 더 필요했었다. 백년해로를 해야 할 아내와 세상 사람이 다 귀엽다고 하는 자식들까지도 알코올과 바꾼 지금까지의 나였던 것이다.
 
137
"부인께서 그때 나 같은 인간과 맺어지지 않기를 다행입니다. 사실 나는 알콜로 해서 내 인생을 망친 성격 파탄자입니다. 이 점 부군께선 술을 하시면서도 아주…"
 
138
이렇게 내가 부군 이야기를 꺼내자 주 여사는 확실히 불쾌해진 낯으로,
 
139
"신성한?"
 
140
내가 어이가 없어하는데,
 
141
"그럼 뭡니까, 인간이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아름답던 옛 꿈을 더듬는 것이 신성치 않고 무엇이 신성합니까? 누가 선생님더러 지금 이런 자리서 그런…"
 
142
무안해서 연못 물 위로 눈을 던지고 있으려니 말이 뚝 그쳐진다.
 
143
그럴밖에, 주 여사는 아랫입술을 자그시 깨물고 있던 것이다. 아니 이보다도 나를 놀라킨 것은 주 여사의 차양진 긴 속눈썹에 맺혀진 이슬방울이었다.
【원문】제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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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 정보
◈ 기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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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무영(李無影) [저자]
 
  1962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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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8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