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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 여자(女子)의 일생(一生) ◈
◇ 따르는 정(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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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5
채만식
1
女子[여자]의 一生[일생]
 
2
따르는 情[정]
 
 
3
반공일이자 마침 무슨 제일이어서 학교는 이틀을 연거푸 놀았다. 그러나 놀기는 고사요 이틀을 거푸 아침부터 밤중까지 노박이로 글방엘 가 그 싫은 한문글을 읽어야 하던 것이니, 준호에게는 도리어 불행한 휴일의 연속이라 할 것이었다. 그것이 우환 중에 새댁 진주가 쫓기어가고 없어 통히 마음 푸접할 바를 몰라 백사에 뜻이 없고 모든 것이 다 성가신 생각만 드는 요 며침이고 보매 연거푸 그 이틀이나 글방 고역를 치르기란 가뜩이 우울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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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새댁 진주가 쫓기어가던 자리에서 준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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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죽어버리구 말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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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비상을 탔다는 약보시기를 얼른 집어다 주욱 마셔는 버렸던 것이나 그러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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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는 죽어 없어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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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 그만 설움이 저절로 복받쳐 그렇게 섧게 울기까지 하였던 것이나, 그러면서 이제나저제나 하고 있어보아도 조금도 죽는 줄을 모르겠었다. 속도 간밤의 곽란 빌미로 간간이 아프고 뉘엿거리고 하는 것 외에는 달리 더는 아프거나 뉘엿거리지도 낳고 정신도 말짱하고. 그러고서 입맛만 지독하게 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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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친 박씨부인은 옆에서 어쩌는고 하면, 눈도 깜짝 아니하고 앉아서 한참이나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혀를 끌끌 차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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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리 못난 것 같으니로고! 못났거든 국으루 못나지 이마빡에 피두 안 마른 것이 벌써버틈 기집 역성 드느라구 에미 폭폭허라구 그래. 시방 사약 사발 들이킨 꼬락사니루구면 ? 아기뚱헌 심술은 있어서…… 자알 헌다. 어서 죽어라, 어서 죽어. 그렇게 못날려거든 진작 어서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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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싸면서 담뱃대 꼭지로 쿡쿡 옆구리를 직신거리기까지 하는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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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수록이 준호는 보아란 듯이 딸꼭 죽어져 버렸으면 정말 고소하고 쌔원하겠는데 답답이 하나도 죽는 것 같은 기미는 없고 하여 사뭇 딩굴고 싶게 보풀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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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으면 으례껏 죽는 법인 비상을 먹었는데 도무지 죽어지지를 않는 것이 당자 준호에게는 안타까운 중에도 큰 수수께끼였으나 비밀을 아는 박씨부인에게는 조금치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약이 비상이 아니라 멀쩡한 금계탑이요, 분량도 아주 적어 학질도 떨어지지 아니할 정도의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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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도 미상불 같이 있기는 하였고, 또 비상으로 할 생각도 없지 아니 하였으나 박씨부인은 안전을 위해 짐짓 금계랍을 조그만큼 그렇게 탄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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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밀은 박씨부인이 필생토록 발설을 아니하고 무덤으로 간직해 가지고 갈 것으로 아무려나 영원한 비밀이 될 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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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는 사흘 동안 누워 조리를 하다 나흘 만에는 벌써 학교엘 다녔다. 그러고서 다시 두 주일이 지난 구월 초생의 오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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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방꾼들이 마당으로 흩어져 참을 쉬고 있다. 아직 오전…… 이번을 쉬고 나서 한 차례 더 읽어야 비로소 점심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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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리 굵은 놈 조무래기 합하여 열댓 명이나 된다. 글방만 전문으로 다니는 놈과 학교와 글방을 얼러 다니는 놈이 절반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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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투 튼 놈, 머리 땋은 놈, 까까중이, 그런 놈들이 여드름 더덕더덕 난 놈, 콧물 흘리는 놈, 행전 단정히 친 놈, 손과 옷에 굉장하게 먹을 쥐어 바른 놈, 눈다래끼 난 놈, 수염 고스러진 놈 해서 너절하게 모두 제각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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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은 어느덧 햇볕이 싫지 아니하여 더러는 마당을 서성거리며 더러는 토방으로 혹은 마당 귀퉁이에 무은 가난한 화단 가로 쪼글트리고 앉아서 짧은 휴식과 풍부한 일광을 더불어 즐기면서 지껄이고 이야기하고 장난치고 하기에 여념들이 없다.
 
21
준호는 여럿과 떨어져 마룻전에 걸터앉아서 우두커니 먼산바라기를 하고 있다. 글읽기는 물론 말할 것도 없거니와 쉬는 것 노는 것까지도 다 귀치가 않을 지경이었다. 움직거리며 호흡하며 하여야 하는 저의 몸뚱이조차가 내다버렸으면 싶게 성가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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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황이 이러하니 우두커니 그러고 앉았는 얼굴이 남이 보기에 조금 마음 시장스러울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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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게 저래뵈두 응? 색시 재밀 제법 아나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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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와 빗밋이 마주 행하여 화단 가로 나란히 쪼글트리고 앉았던 두 녀석 중에서 코보라는 여드름장이가 옆의 상투장이를 무르팍을 꾹 찌르면서 턱짓으로 준호를 가리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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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투장이는 싱그레 웃으면서 곰곰이 준호를 건너다보다가 고개를 끄덕끄덕 하더니……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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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긴 무얼 알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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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길래 즈이 색시가 쫓겨간 댐버틈 저렇게 더 풀기가 없어져 가지구 댕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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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 일찍 덜어진 강아지새끼가 킹킹거리구 보채는 심일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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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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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보는 한바탕 너털웃음을 치고 나더니 별안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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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준호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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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꽥 소리를 질러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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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다 도로 외면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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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보가 앉았는 바로 옆으로 한 포기의 화양목이 있었다. 본시도 잎과 가지가 푸짐하지를 못하고 다닥다닥 땅에 가 늘어붙은 나무가 겸하여 가을을 타 그 용잔하고 까친 형용이 어설프고 초라스럽기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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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화양목을 코보는 손으로 쓸어 만져 보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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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 넌 정녕 아마 이 화양목 태생인가 보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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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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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는 들은 성도 않고 여럿만 와악하고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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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앤 글쎄 화양목으루 생길래다 잘못 고만 사람으루 생겼나봐 으응? 준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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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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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명년엔 또 윤달이 드는데 절 어떡허면 좋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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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윤달이 준호더러 무얼 달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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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리 굵은 한 녀석이 빈들거리면서 말 참섭을 하고 와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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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화양목이란 잡것은 말야, 하두우 안 자라다아 안 자라다 못해 윤달이 드는 핸 한매디가 되려 졸아진대잖아? 보나마나 재두 명년 가선 한 친 키가 줄 거야. 거 딱헌 노릇 아닌가배? 그나그뿐인가. 윤달 든 핼 여남은 번만 치루구 난다치면 잰 머리통만 저 아래 발목에 가 붙었을 거 아니겠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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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럿의 웃음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준호의 가죽신 한짝이 날아오다 코보의 앞 저기만치 가 떨어진다. 준호는 색색하면서 코보를 노려보고 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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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보는 성큼 일어서서 가죽신짝을 집어 들고 넉장으로 팔을 내뻗혀 보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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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한짝마저 줄렴. 우리 아들놈 발엔 좀 낙낙허겠다만서두, 쯧 아순대루 신기긴 신길까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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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보는 나이 열아홉살이요 세살박이 아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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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여럿의 요란히 웃는 소리에 섞이어 방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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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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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선생의 녹슨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선생이 입으로 상학종을 치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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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였다. 방으로 들어갈 참으로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준호는 문득 저의 집 앞 신작로에서 꺾이는 고무래정자 소로를 두 짐의 짐꾼을 거느린 한 채의 네패 교군이 닥쳐들어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글방 통방에 서서 보면 활 서너 바탕 상거의 퍼어한 벌판을 건너 준호의 집 문전이 그 앞 신작로랑 고무래정자로 꺾이는 소로랑 손에 만질 듯 빠안히 바라다보이게 마련이었다.
 
53
준호는 저의 새댁의 돌아옴임을 직각하였고 그 순간 가슴이 휘저은 것처럼 설레면서 피가 한꺼번에 죄다 얼굴로 솟구쳐 오르는 것 같았다. 확 붉는 얼굴이 반짝이는 눈과 함께 생기가 가득히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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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지에 달라진 얼굴을 동무들에게 들킬까 저어하여 찬찬히 더 보고 섰을 염의도 못하고 얼른 고개를 숙인 채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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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고 급한 마음 하여서는 곧장 집으로 달려가고 싶은 생각이야 꿀안 같으나 글방을 중판 메고 그랬다는 뒷일이 어려워 못하는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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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설레는 것이 좀처럼 갈앉지를 않고 글 읽는 소리가 자꾸만 떨렸다. 정신을 차리자 하면서도 책 위로 연방 방긋이 웃으면서 마루로 마주나서는 새댁의 얼굴이 얼찐거려 글이 헛읽어지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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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만들 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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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이 소리가 평소에도 지리하기야 하였지만, 이다지도 기다리기 지리한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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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으로 한 시간과 반 남짓한 동안에 정신을 판다고 선생에게 회초리로 얻어갈기우기 세 번이요, 지청구는 수없이 먹었다. 그랬어도 여느때와 달라 아픈 줄도 고까운 줄도 모르겠었다.
 
60
가까스로 글읽기가 끝났다. 책도 덮어 치우는 둥 마는 둥 집으로 반달음질을 쳤다. 발이 땅에 닿지를 않고 둥둥 몸이 떠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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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 밖에 당도하였다. 가슴이 꺼질 듯 두근거렸다. 잠깐 발길을 멈추고 서서 가슴 두근거리는 것을 갈앉히면서 일변 귀를 기울였다. 조용하고 아무 소리도 들려나오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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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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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였다.
 
64
다른 날이라면 예사라 하겠지만 갔던 사람이 방금 돌아왔고 겸하여 교군꾼이랑 이바지짐꾼이랑 여럿이 와 있고 하니, 안에서는 안마당이든 머슴사랑에서든 다소간 웅성거리며 시끄런한 무엇이 없지가 못할 것이었었다. 원은 모친 박씨부인의 들레는 소리가 한바탕 요란스러웠어야 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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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쳐 귀를 더 기울여 보아야 매양 일반이었다. 일반이 아니라 그럴수록 더 조용만 하였다. 오랜 빈집 문전에서처럼 서늘하게 조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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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은 어느덧 제가 먼저 불길한 예감을 예감하고서 새로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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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보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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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쫓겨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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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녕 두 가지 중에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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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부는 사랑에서든지 출입을 하였다 돌아오면서든지 내정엘 들어오려면 반드시 기침소리를 내어야 하는 법이라 하여 박씨부인은 일찍부터 준호에게 그 버릇을 들여노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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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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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결 더 높아진 가슴의 동계를 어찌하지 못하는 채 준호는 그런 중에도 초조하여진 낯꽃을 천연히 가지려 애를 쓰면서 발걸음도 짐짓 느릿느릿이 어른스런 밭은기침과 더불어 마침내 차면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면서 날쌔게 사면을 둘러보았다. 씻은 듯하였다. 아무도 눈에 뜨이지도 않고 나간 집처럼 쓸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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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뛰던 가슴이 일순간 철썩하고 내려앉았다. 그다지도 가볍던 발걸음이 수종을 앓는 다리처럼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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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썩 주저앉겠는 것을 강잉하여 마당을 지나 토방으로 올라섰다.
 
75
그제서야 삼월이가 뒤 울안으로부터 부엌으로 해서 내닫는다. 눈이 충혈이 되고 눈퉁이 통통 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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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서방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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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말고 입을 비죽비죽하면서 눈물이 주르르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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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는 물으나마나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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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는 슬플 때 안따까울 때 마음대로 울기라도 할 수 있는 삼월이가 차라리 부러웠다.
 
80
“마님 어디 출입허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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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는 겉으로는 이만큼 침착하고 어른스러워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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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마악 숲 아래 논으루 산(算)잡으러 가셌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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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면서 하는 삼월이의 대답이었다.
 
84
병작(並作)에는 벤 벼를 단(束)지어 묶는 자리에서 지주가 입회하여 벼 한뭇에 벼 이삭 하나씩을 뽑고 뽑고 하는 것으로써 도합 몇 뭇이 났는지를 센다. 그것을 산잡는다고 한다.
 
85
삼월이가 점심상을 가져다 놓으면서 새 채비로 울먹울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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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아씨가 오셌는데, 마님이……”
 
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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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는 수저를 들 생각도 없었다.
 
89
“가마서 내리지두 못허게 허시구, 떠다미시구, 물을 퍼다 막 끼얹으시구…… 그러구……”
 
90
“………”
 
91
“교군꾼이랑 이바지 짐꾼이랑 작대기루다 두들겨 패시구……”
 
92
“………”
 
93
“솔가질 한 뭇 방으루 안아다 노시군 불을 그어대서 하마트문 불꺼정 날뻔허구……”
 
94
“누가 이년아 널더러 그런 소리 허랬어?”
 
95
준호는 마침내 버럭 쏘아붙이면서 밥상을 밀어젖히고 일어선다.
 
96
집에서 글방으로 가는 길녘에는 군데군데 새막이 있고, 그중에 윤석이네 새막도 있었다. 여느날은 윤석의 어머니가 나와서 새를 보지만 학교를 쉬는 날은 윤석이 대신 보고 한다.
 
97
윤석은 논둑에다 불을 일어 콩을 구워 놓고는 쪼글트리고 앉아 까먹고 주워먹고 하느라고 새까매진 입과 손이 한참 바쁘다. 그 옆으로 새막기둥에 지여 서서 준호는 한만없이 생각에 팔려 있다.
 
98
논은 간혹 벼를 벤 곳도 있고 마악 베는 곳도 있나니, 아직도 무긋무긋 이삭이 가득히 숙은 채 그대로 있는 곳이 태반이다. 그런 누런 벼이삭 일면의 들판으로 가다 오다 조그만씩한 밭뙈기가 있어 빠알간 고추와 파아란 김장이 알쏭달쏭 채색을 곁들인다.
 
99
“지끔 가믄 육십 리 가니이?”
 
100
높아진 하늘 푸른 바탕을 흰구름이 떠가고 있는 양을 언제까지고 한눈 팔고 섰던 준호가, 그러다 밑도 끝도 없이 묻는다.
 
101
윤석은 콩 한 알을 집어올리다 말고 고개를 쳐들면서 말끗이 한참이나 준호의 얼굴을 보고 있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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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이 처갓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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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4
준호는 대답 대신 얼굴만 붉힌다. 지나간 추석 난장 구경을 갔던 이후로 퍽 아주 친하여진 이 윤석에게나 하니 그런 말이나마 물어라도 보던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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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은 도로 고개를 숙이고 부지런히 콩을 먹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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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구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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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8
“빨리 가믄 헌다.”
 
109
“………”
 
110
“길 모르니?”
 
111
“응. 아니.”
 
112
“잘 알아?”
 
113
“잘은 몰라.”
 
114
혼인 때 한번, 그 뒤에 재행(再行) 한 번, 해서 두 번 내왕은 하였으나 교군과 말을 타고 다녔을 뿐이어서 기억이 아리송하였다. 그것도 신작로 삼십리는 어렵지 아니할 것 같으나 그 나머지 산협길 이십 리와 또 십 리가 막상 자신이 나지 아니하였다.
 
115
“데려다 줄랸?”
 
116
“………”
 
117
준호는 차마 말은 내지 못하나 윤석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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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길두 잘 모르구 갔다 괜히 큰일난다. 날두 저물구 헐 텐데.”
 
119
“………”
 
120
“내 데려다 주께.”
 
121
“닌 길 잘 아니이?”
 
122
“난 잘 몰라두 일없어.”
 
123
“어떻게?”
 
124
“가믄서 주막이랑 사람들더러랑 물어서 가믄 돼.”
 
125
준호는, 윤석이, 저에게 있는 것을 무엇이고 있는 대로 죄다 주어도 아깝지 않고 싶게 좋고도 고마왔다. 그는 이 세상에서 제일 좋기가 저의 새댁이요 그 다음이 어떤 누구보다도 이 윤석인 것을 다시 한번 절절히 느끼지 아니치 못하였다.
 
126
한편 쫓겨온 진주의 친정집에서는……
 
127
황혼이 마당으로 자욱이 내리덮이면서 날은 시각으로 저물어가고 있다.
 
128
가을의 황혼은 수심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뜩이 마음 하염없이 하는 것……그런 황혼처럼 우수스런 얼굴이면서 진주는 아랫방 툇마루 끝에 가 넋을 놓고 걸치어 섰는 채 물 밀듯 저문 빛이 짙어드는 뜨락을 언제까지고 내려다만 보고 있다.
 
129
박농(傳農)하는 집안이요 많은 식솔을 치르는 터라 끼니때면 장속같이 시끄럽고 바빴다. 추수도 오백 석이나 받거니와 한편으로는 머슴을 세넷씩 두고 소를 두 바리씩 부리면서 칠팔십 두락의 땅을 가작(家作)도 하였다. 그러느라니 원 가권은 노마나님과 젊은 주인 내외에 어린아이 둘을 합해서 모두 해 다섯밖에 아니 되었지만 머슴이 셋이요 꼬마동이가 있고 계집하인이 둘, 거기다 적어서 너댓 명씩은 날삯 일꾼이 으례 날마다 있고 하여 소와 개, 도야지 말고도 드나들며 일 서두리하여 주는 동네 여인까지 하면 항용 이십 명이 넘는 식구가 먹는 끼니였다. 그것을 안살림을 도맡은 오랍의 댁이 지나간 봄 진주가 시집을 간 뒤로는 계집 하인 둘을 데리고 혼자서 해치러야 하였고, 하자니 자연 쩔맬 지경으로 바빠야 하였다.
 
130
끼니가 저물면, 그래서 어른들이 분주하면 덩달아 성화를 부리고 보채고 하는 것이 내남없이 아이들이었다. 다섯살박이 큰놈은 미처 잦히지도 않은 밥을 내라고 울고 떼를 쓰다 한 볼기짝 얻어맞고는 더 울고 야단이다. 젖먹이는 젖먹이대로 젖 배불리 먹고 하였으면서도 칭얼거리면서 보채어쌓는다.
 
131
집안은 그래서 어른들의 부엌을 드나들며 웅성거리는 소리와 아이들의 울음소리, 성화대는 소리가 뒤범벅이 되어 정신이 아득하도록 시끄런하였다.
 
132
진주는 가마에서 내리던 길로 이내 아랫방에서 혼자 누워 있었다.
 
133
갔다 선 자리에서 도로 쫓겨온 경위도 교군꾼과 짐꾼들이 이야기를 하였지, 진주는 아무더러도 입을 떼지 아니하였다. 혼자서 실컷 울기만 하였다. 그러다 이래서는 할머니한테 도리가 아니라고 강잉해 마음을 진정 한 후 마악 시방 기동을 하여 나오던 참이었다.
 
134
할머니는 진주에게 이 세상에서 단 한분의 혈육의 어버이였다. 오라비 창수는 서울 광주땅에서 양손자를 해 데려온 십 촌도 넘는 먼 일가였다.
 
135
할머니는 진주의 할머니이면서 일변 어머니도 아버지이기도 하였다. 진주는 아버지는 상면도 하지 못한 유복녀로 태어나 첫돌이 잡히자 어머니를 여읜 이른바 천애의 고아였다. 오로지 할머니 한 분의 손에 길리어 열여덟살 토록 자랐고, 지나간 봄에는 하여커나 출가도 하고 하였다.
 
136
상심 많고 외로운 할머니는 노래에 있어 진주가 정히 생활의 전부였다. 오직 진주를 사랑하며 살뜰히 기르고 잘 가르치며 어진 배필에 좋은 가품 골라 성혼시켜서 말치 없이 고생 아니하고 시집살이를 하는 양을 보며 하자는 것이 유일한 일이요, 겸하여 낙이며 희망이었다. 따라서 진주의 행복은 할머니에게는 즐거움이 갑절이나 더하는 행복이었다. 반대로 진주의 불행은 할머니에게는 슬픔이 갑절이나 더하는 불행이었다. 진주가 한번 웃을 일이면 할머니는 두 번 세 번 웃었고, 진주가 한 번 울 일이면 할머니는 두 번 세 번 울지 아니치 못하였다.
 
137
그런 할머니였다.
 
138
할머니가 보기엔 진주는 아직도 어린아이였다. 두루 얌전하고 속도 찰대로 차고 하여 얻다 내놓아도 책잡힐 곳 없는 자랑스런 손녀는 손녀였으나 그래도 아직은 어린아이로밖엔 보이지 않는 것이 할머니의 눈이었다. 그런데다 겸하여 신랑이 겨우 열두살박이의 콧물 흘리는 애기였다. 해서 가사 아무 말썽없이 잘 시집을 산다고 하여도 좀처럼 마음이 놓여할 할머니가 아니었다.
 
139
할머니는 십 년만 더 살고 싶었다. 앞으로 십 년이면 진주는 서른을 바라보고 새서방 준호도 이십이 넘으니, 그때 가서는 엔간히 마음 걸려 하지 아니하고 죽어도 눈이 감기어지려니 하였었다.
 
140
그러던 할머니였다.
 
141
너무 부자집으로 시집을 보내어도 일이 많아서 고생이요, 가난한 시집은 가난하여 고생이요 한대서 한 이삼백 추수나 하여 양식 걱정이나 않고 지내는 자리를 희망하였었다.
 
142
시동기간이 여럿이면 그 수발을 하기에 가외의 고생을 한대서, 그런중에도 손아랫 시뉘가 있으면 없는 험도 드러난대서, 되도록 형제 단출하되 손아랫 시뉘 없는 자리를 희망하였다.
 
143
그러느라고 고르고 고르다 그 여러 가지 희망조건에 비교적 맞는 자리라 하여서 믿고 한 혼인이었다.
 
144
했던 것이 천만 꿈 밖에 이 파탈이었다.
 
145
시어머니라는 여인이 성질이 약간 까다롭다고는 들었지만 그대도록 사납고 그악스런 줄은 전혀 몰랐었다.
 
146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렇게 하고 쫓기어 올 줄이야…… 천하에 귀에도 담기조차 끔찍한 그런 누명을 쓰고서……
 
147
할머니는 그날 하마 자결을 할 뻔하였다. 만일 성미가 급한 노인이었다면 칼을 물로 엎드러지려고 하였을는지 몰랐다.
 
148
진주는 제가 근심되고 슬프고 한 것보다도 할머니를 걱정되게 하고 슬프게 하고 하는 것이 더 걱정되고 슬프고 하였다. 내가 천연하고 있어도 할머니는 걱정하고 슬퍼하고 하실 테거든 하물며 내가 이렇게 식음을 폐하고 누워 울기나 한다면 할머니는 오죽이나 더 걱정을 하시며 슬퍼는 하시랴 할 때 민망한 생각이 들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149
‘참고 나가서 기동을 해야지. 종차로는 있는 날까지는 할머니 앞에서 맹세코 울지도 말고 슬퍼하는 기색도 드러내지 말아야지. 아무 걱정할 일도 없는 것처럼 흔연하고 있어야지.’
 
150
‘올케가 혼자서 저다지 바빠하니 손을 좀 덜어주어야지. 하다못해 아이들 이라도 보아주어야지.’
 
151
‘그러느라면 자연 어우렁더우렁 잊어버리고 한동안씩 지날 수가 있을 것이요, 하면 할머니도 저으기……’
 
152
이러면서 진주는 일어나 밖으로 나오느라고 나왔었다.
 
153
그렇게 곧잘 마음을 돌려먹고 나오기는 나왔으나 거기에는 생각잖이 수심을 돕는 황혼이 기다리고 있었다.
 
154
슬픔과 근심을 형용에 나타내어 슬퍼하며 근심하며 하지 않기도 노상 수련을 쌓지 아니하고는 섬뻑 어려운 법이어서, 진주도 일껏 마음을 가다듬은 보람도 없이 무심중 추레한 황혼에 섭쓸려 그처럼 얼굴에 가득히 수심을 드리우고 방심해 있었던 것이었었다.
 
155
진주는 생각이 시방 새서방 준호에게 가 멎어 있었다.
 
156
마악 지금쯤 글방으로부터 돌아올 무렵이었다.
 
157
방금 저기 차면 밖에서 풀기 없이 걸어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158
‘삼월이가, 내가 왔더란 이야기를 했을 텐데!’
 
159
듣고 그만 낙담실망하여 할 얼굴이 눈에 서언히 밟히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160
‘차라리 조금 더 있다 가볼걸.’
 
161
이런 후회가 절로 났다.
 
162
할머니랑 오라비 내외랑은 그새 보름 남짓한 동안에 시어머니의 그 요란하던 기승이 웬걸 삭았을까 보냐고, 이왕 그리 된 바이니 훨씬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잠자코 있느라면 그 부인도 속이 갈앉아지면서 너의 무실한 것도 저절로 깨치고 하게 될 터이니, 그때를 기다려 가는 것이 마땅하겠다고 누누이 만류를 하였었다.
 
163
그러나 진주는 제일 무엇보다도 새서방 준호가 밤과 낮으로 까맣게 기다리면서 애가 말라할 일을 생각하여 한시가 급하였고, 한 달이니 두 달이니 하며 청처짐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한 며칠 있다 가마는 말을 삼월이를 시켜 일러둔 것이 ── 언약이 있기까지 하였으니.
 
164
겸하여 시어머니한테만 하더라도 이내 도로 가서 없는 죄나마 청죄를 하여야망정이지 너무 오랫동안 민두룸하고 있어서는 이퉁을 쓰는 것 같아 십상 괘씸한 생각이 들기가 쉬울 것이며, 역시 일찌감치 가보느니만 못한 노릇이었다.
 
165
가서 한 닦달 치를 것은 번연하였으나 아무때 치러도 한번은 치르고라야 말 형편. 치르고 나면 그로써 일은 하여튼 무사히 끝장이 나는 것이었다.
 
166
그래서 하루바삐 일이 끝장이 나니 우선 좋고, 덕분에 하루바삐 할머니의 근심을 덜어 드리니 좋고, 그리고 누구보다도 하루바삐 새서방을 기쁘게 하여 주니 좋고.
 
167
결과는 그러나 동네 개라도 내어쫓듯 하는 창피까지 당하고서 낭패를 보았고, 새서방과 할머니로 하여금은 오히려 아니 갔더니만 못하게 근심을 더 사도록 한 것이었었다.
 
168
중절모자 쓰고 두루마기는 걷어서 띠로 허리에다 매고 깜장 단화 신고 한 이 집 젊는 대주 창수가 번쩍거리는 자행거를 끌고 차면 안으로 들어서다 아랫방 툇마루에서 누이를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169
진주는 얼른 마당으로 내려서면서 오라비를 맞이하고.
 
170
창수는 갸름하니 신경질로 생긴 얼굴이 놀라던 다음 순간 더럭 분노로 바뀌면서 자행거를 차면에다 함부로 기대 세우고 분주히 안방 앞마룻전에 가 포갬다리를 하고 걸터앉는다.
 
171
“어서 세수랑 허시구 진지 잡숫게 허시우, 시장허실 텐데.”
 
172
진주가 가까이 와 기색과 음성을 천연히 하여가지고 권을 한다.
 
173
창수는 꼿꼿한 눈살로 이윽고 앞만 보고 있다가
 
174
“대관절 무어래믄서 또 쫓드냐?”
 
175
“무어래긴 무어라우?……”
 
176
그럴 때에 올케가 부엌으로부터 물 묻은 손을 씻으면서 나와
 
177
“에구 말씀두 마시우! 온 그런 시상으.”
 
178
“그래서?”
 
179
“글쎄 가마서 나오는 사람을 사뭇 앙가슴을 쥐어지르믄서 못 나오게 주잕히구. 그래두 기어나가려구 허니깐 바가지루다 물을 퍼다 끼얹구…… 방으단 불을 싸놓구…… 그런 난리가 없었다우.”
 
180
“무엇이 어째?”
 
181
창수는 두 주먹과 입술을 푸르르 떨면서
 
182
“걸 가만둬 둬?”
 
183
“가만 아니 두믄 명색이 부몬걸 으떡하우?”
 
184
“부모라니? 그따위가 부모야?”
 
185
“교군꾼이랑 이바지짐 지구 갔던 우리 머슴 둘이랑 깡그리 작대기찜을 맞군, 제마다 절름절름, 조조군사가 돼가지고 왔다우. 애기씨가 몸 아니 다치느라구 그런 중으두, 다행이지.”
 
186
“그놈들두 천하 병신놈들이지, 그래 그 봉변을 당허는 걸 멀뚜웅멀뚱 보구 있으며, 때린다고 문문히 얻어맞구만 있어?”
 
187
“즈이들이니 으떡허우?”
 
188
“아 작대를 도루 뺏어가지구 허리토막을 부질러놓지 못해?”
 
189
“내 온 그 으런이!”
 
190
“박돌아!”
 
191
떠나가게 꼬마동이를 부른다.
 
192
대가리가 부룩송아지 같은 놈이 송아지처럼 대답을 하면서 들어온다.
 
193
“네 두레청에 가서 징 쳐서, 동네 장정들 있는 대루 모아라.”
 
194
“예.”
 
195
“장정을 백 명만 몰구 가, 그놈의 집을 도륙을 아니 놓나 보아라.”
 
196
“이 으런이 으떡하자구 이리셔어!”
 
197
아낙이 발을 동동 구르면서 박돌이의 나가는 등 뒤에다 대고 고만두라고 소리를 지른다.
 
198
창수는 아낙을 눈 부릅뜨면서
 
199
“왜 나서서 참섭야 ?”
 
200
“당신 그 욱허시는 승정 제발 좀 곤치세요.”
 
201
“그럼 우린 다아 죽었다고 번번이 그 일을 당허구두 꿈쩍 소리 말란 말요?”
 
202
“우리가 참아여지 으떡허우?”
 
203
“참을 일이 제금 있구, 참아두 한이 있지, 그래……”
 
204
“애기씰 위해 참아야 해요. 화나신다구 함부루 덧들였다, 영 등갈이 나는 날이면 애기씬 으떡허우?”
 
205
“………”
 
206
창수는 거친 숨을 내쉬면서 잠자코 한참이나 무엇을 생각하더니 문득 음성을 부드럽게 하며
 
207
“진주야 ?”
 
208
하고 부른다.
 
209
신경질인 사람이 잔정이 있는 법이었다.
 
210
그런 성격에서 오는 것 말고도 창수는 진주에게 오라비로서의 정이 범연치가 아니하였다.
 
211
지금으로부터 열다섯 해 전 열두 살 먹은 창수는 때에 이미 아무도 없는 진주의 양친의 양자로 이 집에를 와 할머니의 손자에, 세살 난 진주의 오라비가 되었다.
 
212
창수의 생가는 열일곱 살을 맏이로 한 삼형제를 데린 홀어머니가 굶기를 먹듯 하면서 살아가는 간구한 집안이었다. 그런 간구한 사람들에게 오백 석 추수의 양자짜리란, 하늘서 떨어진 복처럼 뜻밖이요 달가운 것이었었다. 그렇지나 않고서야 십 촌이 넘는 수백리 타관 일가가 양자를 청한다고 선뜻 응할 리가 없는 노릇이었다. 더우기 겨우 열두살박이의 막내동이를 내놓기에는.
 
213
부자집으로 양자를 와 호강을 하고 장차에는 오백 석 추수의 전장까지 물려받고 하여 신세를 고치고 한다는 것은 아직 열두살박이의 물욕 없는 소년에게는 아무 관심도 흥미거리도 아니었다. 그는 당장 어머니와 형들과 집과 그리고 낯익은 마을이랑 동무들이랑을 떠나, 아무도 아는 사람도 없는 집에 와서 살게 된 것이 우선 절박한 슬픔일 따름이었다.
 
214
이 갓 젖 떼인 송아지가 어미를 찾아 보채는 근경과 다름이 없을 소년의 마음을 이윽고 정붙게 하는 것이 할머니의 살뜰한 거천과 어울러 진주의 재롱이었다.
 
215
할머니는 소년의, 일종 팔려오다시피한 가련한 정상을 무한 측은히 여기며, 있는껏 정성을 다하여 잘 거천하였다.
 
216
소년은 주리던 창자를 맛있는 음식으로 배불리 먹으면서 해어진 남루대신 고운 비단옷을 입었다. 나뭇지게 지고 나무를 하는 대신, 사랑에다 독서당 앉히고 글을 배웠다. 이 녀석 저 자식 하며 하시를 받는 대신 도련님 도련님 하고 떠받침을 받았다.
 
217
이런 말하자면 좋아진 모든 범절이 단지 형식으로가 아니라 그 고비고비에 할머니의 세심한 주의와 따뜻한 정성이 서리어 있던 것이요, 그것이 인하여 소년으로 하여금 할머니에게 정이 맺히어지게 하였다.
 
218
진주는 마악 두 돌이 잡히어 종알종알 말을 배우고 한참 이쁜 짓을 할 무렵이었다. 일찌기 본 적이 없는 이 재롱스런 애기를 ── 누이를 끔찍 이뻐하였다. 그는 할머니한테보다도 진주한테 먼저 정이 들었었다.
 
219
이렇게 내력은 핏줄이 먼 남매였으나 어지빨리 의없는 남매보다 훨씬 정이 도타운 그들이었다.
 
220
“워너니 도루 가서 산댔자……”
 
221
창수는 차근히 담배를 붙여물고 진주더러 타이르듯 하는 말이었다.
 
222
“……지지리 학대만 더 받다가 필경 가서는 영영 도루 쫓겨오구 말기가 십상일 것이다. 그따위루 생긴 시어미치구 며느리 둘셋은 아니 쫓는 시어미가 자고로 없는 법야. 그러니, 그러니 말이다, 진주야?”
 
223
“내?”
 
224
“너 맘 고쳐 먹어라.”
 
225
“? ……”
 
226
“일찌감치 상부(喪夫)헌 심만 잡어라. 그랬다 시집 다시 가렴.”
 
227
“! ……”
 
228
“이런 말이 너버틈두 해괴허게 들릴는지 모르겠다만서두 지끔은 옛날 세상과는 다르잖니? 남자가 상처를 했다든지, 온 갈렸다든지 해서, 두번이구 세 번이구 장가를 갈 수 있는 것처럼, 여자두 시방 세상은 두 번이구 세 번이구 시집을 가두 상관 없게 마련야. 여자도 같은 사람이란 그 뜻으루.”
 
229
“………”
 
230
“개화가 별다른 것인가? 그런 게 다아 개화지. 개화허는 사람이 다 제금 따루 있나? 아무구 하면 개화지. 너두 그러니깐 개활 좀 허란 말야. 개화 생각이 없으니깐, 가령 시집을 다시 가야 헐 경우에두 감히 생심을 못허구 허는 것이지, 한번 개화속으루 생각이 뚫리는 날이면 배고플 때 밥 먹구, 졸리면 잠자구 허기처럼 두루 수나롭구 떳떳헌 일이란다.”
 
231
창수는 개화꾼이었다. 그는 늦게나마나 고을에서 학교도 다녔거니와 다시 서울로 가서 삼 년 동안 ××학당을 다녀 졸업하고 돌아왔었다.
 
232
닦은 바 신학문과 쏘인 바 새로운 견문이 때의 젋은이로는 그것으로써도 족하다 할 것이었으나 그는 눌러서 미국이든 일본이든 유학을 갈 마음이 간절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 늙어, 큰 살림을 감당키 어렵노라는 할머니의 부름을 응종치 아니치 못해 우선 붕지를 누르고 일단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었었다.
 
233
이러한 오라비를 오라비로 둔만큼 진주도 개화와 세상의 신풍조에 대한 이야기에 매양 귀가 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막상 그것이 저 자신에 관계된 ── 더우기 시집이라는 것을 두 번 가느니 마느니 하는 한 개의 사건이고 보매, 정신상 졸지의 당황을 느끼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무어라고 대답 같은 것이 나올 계제가 아니었고, 귀밑 붉은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234
창수는 담배를 갈아 피워 물고 말을 계속한다.
 
235
“첫째 신랑 된 당자가 사람이 변변해야 허구, 그러구 시집 인심이 그악질 아니해야 허구 허는 법인데, 네 시집이란 명색은 그중 하나나 된 것이 있드냐? 신랑이라는 아이는 어리기두 어리거니와 보아허니 몹시 용절스럽구 헌 것이 사람질허기는 글러 뵈드라. 그런데다 시어머니란 인간은 그런 천하 말 못허게 그악스럽지. 허니 도대체 무슨 내장을 바라구 그 시집을 살며, 또 구태여 살아야 할 며리는 무엇 있느냐?”
 
236
“………”
 
237
“다시는 가볼 생각을 허지 말구 집에 있거라. 집에 있다가 좋은 자리 골라 멀찍헌 타관으루 다시 시집 가게 해라. 내가 장담허구, 서울 가서 개명헌 신랑으루다 버젓헌 새서방 하나 골라주마. 가난헌 자리거들랑 이 전장(財産) 다아라두 가지구 가렴. 털어놓구 말이지, 이게 뉘 전장이냐? 네 것 아니냐? 내게는 실상 상관 없는 전장 아니냐? 네가 죄에 다아 가지구 간대두 털끝만치두 아까워헐 내드냐? 너만 가 잘사는 노릇이라면……”
 
238
창수라는 사람의 사람 됨됨이의 일면을 엿보기에 족한 말이요 태도였다.불같이 급하고 서리같이 매서운 성질이면서 아울러 의리가 굳고 심히 호협한 기개가 있었다. 거상에 그는 재물을 의리보다 가볍게 다루었다.
 
239
이 호협한 기개는 작은 것이나 구차한 것에 만족치 아니하고 크고 떳떳한 것을 부단히 경륜하는 야심과 서로‘방패의 반면’같은 관계성을 가지는 것이었었다.
 
240
조선이 일본에게 합방이 되던 한국 말년 바로 전부터 조선에는 세 가지의 큰 사회적 움직임이 머리를 들기 시작하였다. 국민의 정치에의 관심이 그 하나요, 산업 즉 경제에의 관심이 그 하나요, 새로운 학문 즉 문화에의 관심이 그 하나요 하였다.
 
241
이 세 가지 관심 가운데 정치적인 것은 정복자의‘게다’짝에 짓밟혀 버렸고.
 
242
경제에의 관심과 문화에의 관심은 그것 역시 정복자의 핍박이 노상 없었던 바는 아니나, 그래서 부득불 기형적이기는 하였으나 아뭏든 현실에로 발전을 하여 나아갔다.
 
243
창수는 처음 그 새로운 학문에의 뜨거운 지향이 그와 같이 가정적인 사정으로 인하여 일단 꺽이게 되자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그러면 당분간 아직……’이라는 생각으로 경제 방면으로 행동 방향을 바꾸었다. 작년부터 시작한 매갈이가 그것이었다. 매갈잇간(玄米工場[현미공장])을 설시하여 놓고 자가(自家) 추수는 물론이요 농민에게서랑 지주에게서 벼를 사 모으면서 일변 현미로 갈아서 실어내다 파는 것이 매갈이라는 것이었다.
 
244
선비의 솜씨요 또 첫시험이라 작년에는 적지 아니한 손을 보았으나 금년에도 계속하여 이른벼부터 매일 수십 석씩 더러는 백여 석씩 자꾸자꾸 사서 주야로 현미를 뽑아 연방 ××항(××港)으로 실어내고 하는 참이었다. 그러느라고 자행거까지 사놓고 하루 걸러큼씩 ××항엘 나다니곤 하였다.
 
245
창수는 이 매갈이를 하느라고 작년에 만 원, 금년에 새로 이만 원의 빚을 졌으나 그런 자본의 출처에 대하여 집안에서는 아무도 괘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또 ××항이 미두(米豆) 고장이요, 매갈이는 미두의 바로 이웃으로 통하는 길인 것을 염려하는 사람도 없었다. 겸하여 빈번한 대처(××항) 출입에는 소위 교제라는 외화(外華)가 따르는 것을 근심하는 사람도 없었다. 다만 진주 하나가 오라비가 궐련을 피우는 것에서 막연하나마 약간의 의구를 느낄 따름이었다.
 
246
오라비는 지나간 봄 출가를 할 때까지도 집에서는 으례 담뱃대로 담배를 피웠다. 궐련은 출입을 가서만 피우되 제일 값 헐한 것으로 사 피웠다. 그러던 오라비가 그동안이 겨우 반 년인데 이번에 와서 보니 육장 궐련으로만 피우고 있고, 그러나마 값비싼 산호표니 칼표니 금물림을 한 이름도 못 듣던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이었었다.
 
247
오늘도 창수는 칼표를 피우고 있었다.
 
248
‘매갈이를 해서 밑지기만 한다면서 용은 저렇게……’
 
249
진주는 당장 제 신상에 관한 경황을 문득 잊고 혼자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무심코 고개를 갸웃한다.
 
250
그 가느다란 한 줄기의 담배연기가 장차에는 진주에게도 등한치 아니한 운명을 간섭하리라고는 물론 짐작이나 할 바가 없었던 것이고.
 
251
“그야 할머니가 기시구 허신데 번접스러이 내가 나서서 네 일을 이래라저래라 간섭헐 순 없는 노릇이지만서두……”
 
252
창수가 음성을 고쳐 하며 마악 다시 이야기를 계속할 즈음에 생각지 아니한 준호가 거기에 당도하였다.
 
253
할머니가 굽은 허리에 젖먹이 증손주를 업고 한 팔로 준호의 손목을 이끌 듯하면서 연해 얼굴을 들여다보고 하면서 차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254
“시상으, 왔거들랑 바루 들어오는 게 아니라, 시상으 문앞으서 비잉빙 돌구 있어? 사람두 온. 남의 집인감. 처가에 왔으믄서.”
 
255
계면스레 발걸음이 쭈뼛거리는 준호를 달래듯 등을 다독다독, 일변 그래싸면서 데리고 들어오고 있던 할머니는 그러다간 또 혼잣말로
 
256
“쯔쯧, 신통두 허지, 오느라구. 아암 오구말구. 와야 허구말구.”
 
257
진주는 눈물이 핑 돌았다.
 
258
진정 반가왔고, 할머니의 말씀따나 참으로 신통하였다. 저 어린 나이에 가직치도 아니한 길을 제 발로 걸어 이렇게 찾아오리라고는 전혀 생각 밖이었다. 보는 이만 없다면 곧 업어라도 주고 싶었다.
 
259
반가움은 그러나 순간이요 인하여 걱정이 더럭 솟았다.
 
260
시어머니가 보내서 ── 하다못해 허락이라도 받고서 ── 왔을 리는 만무한 것, 몰래 달아나온 것이 번연하였다. 무서운 형벌을 손수 장만하였음이나 다름이 없었다. 내일이라도 돌아가 한 발자죽 집안으로 들어서는 그 자리에 사정 없는 매질은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261
광경이 여언히 눈에 보이는 것 같으면서 사뭇 가슴이 떨렸다.
 
262
임의로 할 수 있는 노릇일진댄 영영 머물러 있게 하고 돌려보내지 말았으면 두루 좋기야 하겠지만 그것은 법이 아니요 사리에도 어그러지는 일이었다. 또 붙잡아 두고 돌려보내지 않는다고, 작히나 잠자코 있을 시어머니 박씨부인도 아니었다.
 
263
“어서 저녁 좀 분별허게 해라. 나그네두 하나 있구 허니…… 겉이 와준 동문가 보드라. 사랑에서 기대리고 있으니, 어서. 시장허긴들 조음들허겠느냐.”
 
264
진주와 함께 반색을 하면서 마당으로 내려서는 창수의 아낙더러 할머니가 그렇게 이르던 것인데, 그러자 창수가 걸터앉았던 마룻전에서 불끈 일어서면서 버럭 지르는 소리가
 
265
“자네 무엇허러 오는가? 바가리루 물 좀 퍼다 끼얹어 달래나?”
 
266
할머니, 진주, 창수의 아낙 모두들 황급하였다. 준호 당자야 무색하여 몸 주체할 바를 몰라했음은 물론이고.
 
267
창수는 성난 숨을 잠깐 들이쉰 후에 다시
 
268
“교군 타구 왔거들랑, 작대기루 다리뼉다구를 부질러놔 달래나? 방에다 불 좀 싸놓아 보여 달래나?”
 
269
그러고는 신발을 차벗고 마루로 올라가 쿵쿵거리면서 건넌방으로 들어가버린다.
 
270
떨어질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섰던 준호는, 그러다 다음 순간 창수의 말이 다 그치기 전에 벌써 몸을 홱 돌이키면서 차면 밖으로 반달음질을 쳐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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