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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女子)의 일생(一生) ◈
◇ 풍물지(風物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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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5
채만식
1
女子[여자]의 一生[일생]
 
2
4. 風物誌[풍물지]
 
 
3
협률사패가 광고돌이를 하면서 웃장거리로 올라오고 있다.
 
4
패의 목애비(頭目[두목])리라. 키 후렷하니 허리는 구부정 썩 건드러지게 생긴 젊은 하나가 끈 단 호각끈을 손가락에 걸고 대롱대롱 흔들면서 맨 앞을 섰다. 인모 망건에 쥐꼬리 당줄에 대모 풍잠에 음양립에 하는 붙은 말 그대로의 늘어진 호사다. 그러나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신수를 가리기 어려워 다듬은 한산세모시 두루마기는 고운때가 묻고 구김살이 갔다. 운두 얕은 흑닥개(감장 가죽신) 위로 비어진 옥양목 버선등도 봉놋방 때가 묻었다. 이 옷이 벗을 때가 약간 지난 것과 그보다도 그 갓을 너무 과히 왼편으로 빼딱하게 쓴 것만 아니라면 어따 내놓아도 한다한 활량이요 멋장이 서방님이다.
 
5
일반으로 재인(才人)들은 호사라는 것이 스스로의 취미요 도락이기도 하지만, 겸하여 호사 곧 생활이기도 한 것이다. 도한(屠漢)은 부모상을 당하면 삼 년 동안 도끼자루를 놓아도 재인은 피리며 징·장고 채를 놓지 않는대서 계급상 도한보다 아래에 위하나 재인은 활량과 서방님네의 노리개이기 때문에 활량과 서방님네가 화려히 차리고 노는 자리에 나아가자 하니 같이 화려히 차리지 아니치 못하는 것이었다.
 
6
(作者註[작자주] : 재인은 노래랄지 그 밖에 다른 음악에 능하거나 혹은 줄타기, 땅재주넘기 따위의 독특한 재능을 지녀 그것으로써 생업을 삼으며, 안해는 무당이요 한 특수 계급을 통틀어 이름이다. 경인(京人)들은 흔히 재인이면 바로 광대거니 여겨 재인과 광대를 혼동하나 사실은 광대는 재인 가운데 따로이 노래가 명창에 이른 사람만을 가리켜 하는 말이요, 재인이라서 저마다 다 광대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노래가 명창이요 광대 행세를 한다고 하여 반드시 재인 출신인 법은 아니다. 가령 ×××(×××) 같은 사람도 재인 출신 아닌 명창의 한 사람인 것처럼.)
 
7
목애비 뒤에는 기생이 꽹과리를 치면서 따랐다. 노랑 구슬에 홍끈 꿴 흑전립 쓰고 연분홍 치마에 남쾌자 받쳐 입고 한 스물두엇이나 되었을까 이쁘장스런 기집이다. 유독 하나를 광고돌이에까지 내세운 것을 보면 인물이 ― 가무는 아직 어떤지 모르되 우선 인물이 ― 일행 중 으뜸가는 기생이던 모양이다.
 
8
징잡이, 장고잡이, 북잡이 세 명의 소고잡이들은 다듬두루마기 대신 대림두루마기나 항라두루마기를 입기도 하고, 혹은 흑닥개 대신 백닥개나 미투리를 신기도 하고 하였으나, 대체로 목애비와 차림새나 주제가 어슷비슷하다.
 
9
이 고을 출신의 재인 유동이는 호적을 불었다. 그 유동이가 그런데 한바탕 인목을 크게 끌었다. 하되 그것은 이 고을 출신의 재인이 협률사에 끼여가지고 본고을에 들어왔다는 것도 아니요, 또는 호적을 불 줄 아는 외엔 장단가락 변변히 치지 못하는 천하의 무재인(無才人) 유동이도 저렇듯 씌어먹는 날이 있던가보다 하는 것도 아니요, 실로 그의 목에 두른 한 장의 칼라때문이었다. 상투 짜고 망건에 갓 쓰고 주항라 두루마기로 빼떼린 그의 목에다 양복깃에 대는 칼라를 둘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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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칼라 머리로 머리를 깎고 활량삿갓 들고 고의적삼 바람에 풀대님한 서방님 건달 하나가 난장판에서 투전이라도 뽑다 오는 길인지 광고돌이 행렬과 엇갈리어 내려가고 있다. 유동이와 바투서 눈이 서로 맞았다.
 
11
유동이는 호적 불던 것을 내리고 얼른 행렬로부터 한 걸음 비어져 나오면서 왼손이 뒤통수를 만짐과 동시에 허리를 너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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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님 유동이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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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허리를 펴면서 다시
 
14
“소일삼아 따라다닙니다, 헤!”
 
15
“선성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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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갓활량은 별양 멈추어 서려고도 않고 빙긋 웃으면서 그대로 지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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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면서 주고받는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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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동이(투전)두 좋으시지만 굿두 좀 보시러 옵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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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꼴 보기 싫여 안 간단다!”
 
20
“제 꼴이 어때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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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 모가지다 두른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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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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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걸 무슨 멋이라구 허는 줄이나 아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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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멋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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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긴 아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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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삿갓활량과 한가지로 유동이가 목에다 양복칼라를 두른 것을 개멋이라고 웃는 사람도 더러 없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호기심과 경이의 눈으로 볼지언정 결코 개멋이라고 코웃음할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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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아이들 떼를 웅기중기 좌우와 꼬리 달아가지고 광고돌이 행렬은 웃장거리의 쇠전머리까지 일렀다. 쇠전마당은 씨름과 노름판이 벌어진 난장이었다. 난장으로부터 사람이 와 행렬로 쏠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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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애비가 먼저 멈추어서면서 호르륵 호각을 분다. 행렬은 즉시 치기를 그치고 그 자리에 가 멈추어선다. 구경꾼들이 삽시간에 행렬을 빙 둘러 에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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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간히 군중이 둘러서기를 기다려 천천히 목애비는 공수잡이하고 한번 허리를 굽혔다 펴더니 잔뜩 코먹은 소리로 외우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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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상 당하 여러 어른네께 광고말쌈 한 말쌈 이쭈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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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는 밭은 기침을 험험 목을 가다듬어 가지고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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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말쌈은 다른 말쌈이 아니오라, 본 남원협률회사로 말쌈을 하오면 만고 열녀에 천하 절색 춘향의 고장 남원읍에서 맨 처음으로 꾸민 협률회사요 팔도 협률회사의 조종 되는 협률회사온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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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잇대어 주욱 내리 꿰는 것이었다. 가로되, 패장(座長) ×××은 천하가 다 아는 명창이요, 여광대 아무개를 비롯하여 꽃 같은 기생이 십여 명이요, 재인 광대는 이십여 명이요 해서 하고많은 협률사 중에도 가장 보암즉한 협률사며, 그리고 오늘 밤은 어사 이도령이 중로에서 방자 장쇠를 만나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남원부사 생일잔치 자리에다 암행어사 출도를 붙이는 대목으로 더욱 재미가 진진할 터이요, 그 밖에 선소리(立唱[입창]), 앉은소리(坐唱[좌창]), 줄타기, 땅재주 등을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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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으른네를 뫼시어 하룻밤 위로를 드리고자 하오니, 본 남원협률사를 애호하시는 마음으로 부디 다수 왕림하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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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말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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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는 윤석을 따라 섰느라고 선 것이 꽹과리잡이의 기생 옆에 가 섰었다. 서서는 목애비의 ‘광고말쌈’보다도 차림새와 생김새가 한가지로 묘한 그 기생을 무심코 말긋이 바라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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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률사패의 광고돌이를 줄레줄레 따라다니고 행렬과 함께 멈추어서서는 구경이나 하고 하잘 숫기가 있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윤석과 동행이 된 이상 절에 간 색시요, 거동에 망아지 노릇이었다. 모든 것을 윤석이 하는 대로 하라는 대로 할 따름이었다. 지금도 마악 읍내에 당도하여 아랫장거리에 이르르자, 마침 협률사패가 광고돌이를 하고 있었고, 윤석은 준호의 의사를 물을 여부도 없이 어서 오라고 재촉까지 하여가며 같이 행렬을 따라 웃장거리로 올라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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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로 오는 눈이 비단 하나나 둘일까마는 기집은 바투 옆에서 하도 말끔히 저를 바라다만 보고 섰는 한 앙징스런 초립동이가 귀엽기도 하고 좀 장난하고 싶은 생각도 났던 모양 발씸발씸 보조개 있는 볼대기로 연방 웃으면서 ― 그 하얀 이 속에서는 노오란 금니가 반짝거렸다.― 그러면서 앞으로 가까이 다가 나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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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립동이, 내가 그렇게 이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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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갸웃 얼굴을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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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는 그만 무렴하여 어쩔 줄을 몰라하면서 귀밑이 빨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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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더 재미가 있어라고 계집은 까르르 자지러져 웃는다. 그러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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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살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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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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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열 살? 열한 살? …… 우리 아들 냈으면 꼬옥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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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잣말로 그러면서 꽹과리채 쥔 손길을 뻗혀 다독다독 등을 두드린다. 준호는 부끄럼에 겸하여 모욕을 느끼고 얼굴이 온통 홍당무가 되어 고개를 들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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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살이 팽팽하여 가지고 있던 윤석이 한 걸음 썩 나서면서 제법 우락부락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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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래? 건방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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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계집의 어깨를 떠다밀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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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집은 그 당돌함과 거세임에 문득 기색이 당황하였으나 곧 눙쳐 깔깔거리고 또 웃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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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성이 대단하시구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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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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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학도(學徒) 동생인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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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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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생김새가 아우 형젠 아닌가 본데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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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따 대구 반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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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나두 이래뵈두 우리 할아버진 진살 다 허섰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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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 손녀딸이 요 모양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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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게 말이죠!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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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겨를에 사람이 꽤 여럿이 모여 에움 가운데 적은 에움을 이루고 소년과 계집의 상지하는 양을 미소러이 구경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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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집의 마지막 웃음소리와 동시에 목애비의 호각이 울었다.
 
62
“이따가 구경 와요오 응? 새서방님이랑 학도 양반이랑. 놀려먹었다구 노여 말구 응? …… 와서 매화라구 찾아요오 내 공짜루 들여 주께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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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집은 행렬로 물러가면서 일변 해끗해끗 돌려다보면서 장난인지 진정인지 아뭏든 당부가 신신하다. 장난인 체 진정인지도 모른다.
 
64
광고돌이 행렬은 다시 불고 치고 하면서 더 많은 아이들과 구경꾼을 달아가지고 홍예문(紅霓門)으로 좇아 성안동네로 향하고 있다. 난장마당에서 일시 쏠려나왔던 군중은 대부분이 도로 난장마당으로 흩어져 들어간다. 준호와 윤석도 그 뒤를 따랐다.
 
65
준호는 어깨가 힘없이 처지고 걸음도 떴다. 그는 마음이 슬펐다. 들어 단짝 그런 봉변을 당한 것이 슬펐다. 저의 사람 다부지지 못한 것도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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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이것이 가장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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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 아프냐?”
 
68
부지런히 혼자 앞을 가던 윤석이 돌려다보면서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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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는 고개만 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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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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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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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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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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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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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은 서서 이윽고 보다가 도로 오더니 상냥히 팔을 잡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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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내가 그년 욕해 줬은깐 일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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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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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는 세상 심술망나니요 우악한 윤석이 이렇게 다정하고 알심 있기도 한 줄은 몰랐다. 슬플 때 막막할 때 받는 남의 친절은 한결 마음에 울리는 것…… 곧 울음이 터지려고 하는 것을 겨우 참는다. 다문 입술이 구지에 실룩거린다.
 
79
철그럭지그럭 환도 소리와 구두 소리가 함께 등 뒤로부터 들리어 두 소년은 얼른 돌아섰다. 금테 두른 모자와 양복에 금마구리한 환도 차고 그 긴다리로 겅중거리면서 원선생이 학교가 있는 성안동네로부터 내려오고 있었다. 원선생은 준호들의 반인 삼년급의 담임선생이었다.
 
80
준호와 윤석은 기착자세로 경례를 한다. 원선생은 올려간 손끝에다 모자챙을 깝신 숙여대면서 웃는 얼굴과 그의 느리고 바라진 물건너(錦江對岸[금강대안] : 忠南[충남]) 사투리로
 
81
“오오 준호! 윤석이! …… 구경 오났구마안?”
 
82
“내애!”
 
83
윤석이 방글거리면서 대답한다.
 
84
원선생은 반의 여러 아이들 가운데 준호와 윤석을 유난히 사랑하였다. 성격과 행동이 정반대인 두 소년이건만 이상히 그는 그 둘을 꼭같이 사랑하였다. 두 소년도 자연 그를 잘 따랐다. 윤석은 아이가 워낙이 그런 아이라 노상 버르장머리없이 굴기를 좋아하고 이른 말도 안 듣고 하기는 하지만……
 
85
원선생은 발걸음을 멈추고 서면서 짐짓 눈을 홉뜨고
 
86
“협률사 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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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88
윤석은 천연덕스럽게 그러면서 준호와 어깨가 맞닿은 손가락으로 볼기짝을 꾹 찌른다.
 
89
준호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90
선생은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덱끄덱
 
91
“아암! …… 학생은 협률사나 그런 건 구경허믄 안돼애 응?”
 
92
“내애!”
 
93
“준호두…… 알았지이?”
 
94
“내애!”
 
95
준호는 얼굴이 화끈하면서도 윤석이 한 대로 대답치 아니치 못한다. 둘이는 읍내로 들어오면서 벌써 예정이 아주 세워졌었다. 가서 우선 씨름 구경을 하고 밤에는 협률사 구경을 하고 협률사가 파하거든 다시 씨름판으로 와서 소씨름을 구경하고 하기로…… 물론 윤석의 계획과 주장이요 준호는 그런 대로 동의를 하고 하였을 따름이었다.
 
96
“선생님, 씨름은 구경해두 일없죠?”
 
97
윤석이 번연히 그렇게 묻는다.
 
98
선생은 고개를 꾸벅
 
99
“응! 씨름은……”
 
100
“나가서 씨름두 허구요?”
 
101
“아암! …… 윤석이 참 씨름 잘 허겠다아? 몇 허리나 이겼니?”
 
102
“오늘은 안직 안 했어요! 어저낀 스물세 허리 이겼어요.”
 
103
“에꾸 스물세 허리나…… 그리구 준호 너는?”
 
104
“………”
 
105
“이앤 오늘 첨예요! …… 이앤 그리구 씨름헐 줄 몰라요.”
 
106
“준호는 참 언제나 좀 자라니이? 으응? …… 아마 저 상투에 눌려갖구 못 자라지 않니이?”
 
107
준호는 오나가나 말썽이 상투였다.
 
108
선생이 멀찍이 가기를 기다려 윤석은 그 등 뒤에다 대고 한손으로 두루마기 자락을 무릎 위까지 치켜올려 잡고 또 한손으로는 볼때기를 쓱쓱 문대면서
 
109
“애, 애, 이 사람은 애, 원중남이라구 허는 사람인대 애, 충청도서 오났는대 애, 애, 아무것두 모르는 사람인대……”
 
110
하다가 제야 깔깔 웃는다. 묵은 원선생의 흉내를 내던 것이다. 준호도 빙긋이 웃지 않지 못한다.
 
111
원선생은 일찌기 지금의 이곳 보통학교가 아직 영명의숙(永明義塾)이라는 사립학교로 있을 때 온 이를테면 대용 교원이었었다. 그때 그가 처음 부임을 하여 전교 생도(팔십여 명) 앞에서 부임인사를 하던 모양이 시방 윤석이 흉내내던 이와 같았었다. 스물한 살이라는 나이보다 훨씬 겉늙었고 키는 멀쑥하게 긴데 누르스름한 모직 두루마기는 가까스로 무르팍을 덮었을 뿐이었었다. 이 돔방두루마기는 이럭저럭 십 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겨울과 봄가을로 평복을 할 때면 심심하면 한번씩 떨쳐 입고 나다니는 수가 있어 ‘원선생 두루마기’라는 붙은문자까지 생기도록 유명한 것이었었다.
 
112
큰 키에다 두루마기가 가량없이 짧아놔서 첫눈에 벌서 사람이 근천스러 보였다. 그런데다 잔뜩 오갈이 들어가지고 손바닥으로 볼을 만져싸면서 그
 
113
“애, 애, 이 사람은……”
 
114
하고 부임인사 겸한 자기 소개를 하고 있는 거동은 맨 뒷줄에서 한 대가리 굵은 생도놈이 커다란 소리로 두런거려
 
115
“허, 망지불사 선생이로곤!”
 
116
한 바와 같이 선생이기엔 너무 데데하고 한심스러웠다. 써 첫선에 생도들한테 달칵 얕보이고 말았다.
 
117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인데…… 한 말은 겸사였지만 일변 사실이기도 하였다. 삼년제의 사립(초등)학교와 이년제의 간이농업학교를 마쳤을 따름이었으니 가히 짐작할 학력이었다. 그런 중에도 산술이 말이 안되게 서툴러 구학산(龜鶴算)의 좀 까다로운 것 같은 것은 번번이 풀지를 못하고 쩔매곤 하였다. 한문도 밑천이 대단히 짧았다. 그의 두루마기처럼 짧았다. 인끈조자(組)를 조합조 맏맹자(孟)를 맹자맹으로 가르쳤다.
 
118
대가리 굵은 생도는 나이 원선생보다 두세 살 심하면 오륙 세나 솟는 놈도 없지 아니하였다. 그런 놈들은 대개 사서삼경을 좍좍 외어대는 놈들이었다. 그 앞에서 조합조, 맹자맹 하고 가르치니 시쁘지 아니할 턱이 없었다.
 
119
선생이 그렇게 단문한 줄을 알기 때문에 생도들은 단지 그를 시들히 여기고 말을 타지 않으며, 그의 가르침을 시뻐하며 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나아가 그를 시험하기와 곯려주기를 일삼아 하였다. 어려운 산술 문제를 알아가지고 와서 풀어달라 하기, 궁벽한 한문 문구나 글자를 찾아가지고 와서 뜻을 가르쳐 달라 하기…… 그럴 적마다 열에 아홉 번은 원선생은 놈들에게 홍안을 당하였고, 놈들은 쾌재를 외치고 하였다.
 
120
그러한 원선생에게도 노상 취할 점이 없는 바는 아니었다. 우선 그는 고정하고 성실하였다. 가령 생도 누가 어려운 산술 문제를 내놓아 그 자리에서 풀어주지를 못하면 놈들한데 갖은 조소 다 들으면서도 매양 어물어물 씻어넘겨 버리는 법이 없이
 
121
“내 그럼 이따 저녁에 자알 생각해 갖구 내일 풀어주께에?”
 
122
하고 반드시 약속을 하여 둔다. 그랬다 그날 밤 밤을 새워가면서라도(이 밤샘을 하면서 그는 소리 없은 눈물을 흘리기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또 자기의 힘으로 정히 감당치 못할 것이면 교장이나 동료의 다른 선생더러 묻기라도 하여서 기어코 이를 풀어가지고 이튿날 생도들 앞에서 언약한 바를 어기지 않고 시행하였다.
 
123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한문 시간인데 독본의 새로운 한 대문 “身體髮膚[신체발부] 受之父母[수지부모] 不敢毁傷[불감훼상] 孝之始也[효지시야]”를 가르치던 날이었다. 평일과 다름없이 어려운 글자를 가르쳐 주고 토를 달아 주고 새겨 주고 그러고는 뜻 설명을 하여 주었다. 하고 나서 마지막 그 대의를 요약하여
 
124
“그러므로 우리는 허다못해 머리카락 하나일지라도 함부로 하거나 상해서는 부모에게 불효가 되는 것이니라.”
 
125
고 하였다.
 
126
그러자 한 생도가 시비조로
 
127
“아, 선생님? ……”
 
128
하고 일어서더니 밑도 끝도 없이
 
129
“효돌 해야 허나요? 불효해야 허나요?”
 
130
하는 것이었었다.
 
131
원선생은 질문답지도 아니한 질문에 잠시 뻐언하고 섰다가
 
132
“어대 그것두 몰랐던감?”
 
133
“저두 효돌 해야 허는 줄은 알지만 선생님 등쌀에 불횰 해야 허니 말씀이죠!”
 
134
“무어? 워째서?”
 
135
“아, 머리카락 하나래두 함부루 허거나 상해선 불효니라구 옛 성현두 그리시구 선생님두 금새 그렇게 가르쳐 주시잖었어요?”
 
136
“………”
 
137
“그런데 선생님은 육장 즈이더러 머릴 깎으라구 허시구, 붙잡아단 억지루 깎아주시구 허시잖어요? 그게 즈일 불횰 가르치시구 불횰 시키시구 허는 거 아녜요?”
 
138
“………”
 
139
원선생은 대답이 꼭 막혔다.
 
140
원선생은 지지리 생도들더러 머리깎기를 권하고 주장하였다. 눈치 보아 그 부형이 과히 반대를 않는 생도면 교원실로 데리고 들어가 상투랄지 머리채를 썩둑썩둑 가위로 잘라주기도 하였다. 그때의 현재로 머리를 깎은 생도가 절반 가량 되었는데 그중의 절반은 원선생의 권으로 혹은 그의 가위로 깎인 머리였었다.
 
141
원선생은 언제나 대답이 막히면 하는 버릇으로 바른손이 귀 뒤로 올라갔다 도로 내려오면서 고개를 바른편으로 갸웃
 
142
“참……”
 
143
그 다음 왼손이 왼편 귀 뒤로 올라갔다 도로 내려오면서 고개를 왼편으로 갸웃
 
144
“글쎄에……”
 
145
또, 그 다음엔 바른손이 바른편 귀 뒤로 올라갔다 도로 내려오면서 고개를 바른편으로 갸웃
 
146
“가마안짜아! ……”
 
147
이 짓을 무수히 되풀이하였다. 얼굴이 벌겋게 홍안 되었음은 물론이었다.
 
148
“내 그럼 이따 저녁에 자알 생각해 갖고 내일 대답허께이?”
 
149
전례에 좇아 원선생은 마침내 이렇게 말미를 빌었다. 생도놈들은 우선 승리를 만세부르는 뜻으로 와아 소리를 지르면서 손뼉을 치는 놈도 여럿이 있었다.
 
150
이튿날 첫시간이었다. 밤잠을 자지 못한 표적으로 충혈된 눈을 하여가지고 원선생은 교실로 들어왔다. 그러나 의기는 자못 양양하였다.
 
151
생도들이 기립 경례를 하고 착석키가 바쁘게 출석 부르기도 잊어버리고
 
152
“자아 제군! 어제 그거 말야! 머리 깎는 거 불효된다는 거 말야! ……”
 
153
하더니 한손을 쳐들어 다른 한손으로 그 손톱을 만져보이면서
 
154
“요거 요거 이 손톱! …… 손톱은 워째 깎나? 그라구 발톱이랑…… 응? 손톱 발톱은 워째 깎나? 응?”
 
155
생도들은 선뜻 뭐라고 대꾸를 하지 못하고 있다.
 
156
원선생은 더욱 자신 있이
 
157
“제군두 손톱, 발톱은 깎지이? 누가 깎아라 말아라 아니해두 깎지들 깎지이?”
 
158
하고 조지듯 묻는 데 대하여 문제를 꼬집어낸 어제 그 생도가 비로소
 
159
“손톱 발톱야 다아들 깎죠!”
 
160
“워째 깎나?”
 
161
“손톱이 자라서 길믄 거리적거리구 때꼽이 껴 더럽구 허니깐 깎죠!”
 
162
“그래 깎을라치면 거리적거리지 않구 이렇게 편치이? 때꼽두 끼지 않지? …… 짧은 손톱이 긴 손톱보담 좋구 유익허지?”
 
163
“그럴 테죠?”
 
164
“그럼 머린?”
 
165
“머린……”
 
166
“머리채 늘어뜨리구 또오 상투 틀구 망건 쓰구 헌 머리가 편허구 존가아? 깎은 머리가 편허구 존가?”
 
167
“깎은 머리가 좋기야 허죠!”
 
168
“정갈허구?”
 
169
“정갈허구요!”
 
170
“거보라구!”
 
171
“그렇지만 손톱은 옛날버틈 깎기루 마련이구 머린 안 깎구서 긴 채루 둬두기루 마련이 아녜요? 그래서 공자님두 긴 머리시구, 맹자님두 긴 머리시구, 우리 할아버지랑 아버지랑 다아 상툴 트시구 헌 거 아녜요? 그리구 손톱은 깎기루 마련이니깐 공자님두 깎으시구, 맹자님두 깎으시구, 우리 할아버지랑 아버지랑 다아들 깎으신 거구요!”
 
172
“그건 옛날 문명허지 못했을 때 말이지 지금은 문명시대가 아닌가베? 제군은 문명시대의 청년이 아닌가베? 문명시대의 청년이 문명 못헌 옛날 사람처럼 상투 타안탄 틀구 머리꼬랑지 늘어트리구 쇠때가 꼈구 헌 머릴 해갖구 다니면 그런 수치가 있남? 상투 틀구 망건 쓰구 너펄너펄 중추막입구, 그라구설랑 워떻게 활발하게 체조랑 경주랑 허나? 워떻게 문명사회에 나가 활동을 허나? 제군 가운데서는 머리 깎은 사람은 알테지만 거뜬허구 정갈해 조옴 좋아? 체조헐 때랑 경주헐 때랑 조옴 편해?”
 
173
“………”
 
174
“문명시대에 난 청년이면 맘두 문명헌 맘을 지녀야 허구, 공부두 문명헌 공부를 해야 허는 것처럼 외양두 문명헌 외양을 차려야 헐 거 아냐? 그래야 문명시대의 청년이요 훌륭헌 사람일 거 아냐? 그런 훌륭헌 사람이 되자구 머릴 깎는데 워째 불횬감? 그게 어디 머릴 깎는 거지 함부루 허거나 상허는건감? 손톱을 깎는 거지 상허는 건 아닌 것처럼 말야!”
 
175
“………”
 
176
말썽꾼 그 생도나 다른 생도들이나 다시는 원선생을 반박할 말이 없었다.
 
177
“그럼 문명사회에서는 여자들도 머리를 깎소?”
 
178
“그럼 활동 ― 일 ― 하는데 편하고 정갈하고 하자고 우리네 어머니도 누이도 다아 중대가리가 되어야 옳소?”
 
179
이런 질문이 나오지 아니한 것은 다행 중에도 더욱 다행이었다.
 
180
원선생은 그 자리의 임시방편으로 문명이라는 것을 내세운 것이 아니었다. 평소부터 그는 열렬히 개화를 도창하여 오던 이를테면 시대의 선각자의 한 사람이었다. 원선생의 신문명, 신풍조에 대한 지식이란 물론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생도들로 하여금 하루바삐 낡은 것을 버리고 신풍조를 받아들여 소위 문명시대의 청년이 되도록 일깨우며 지도하고 싶어하는 열의는 가히 봄직한 것이 있었다.
 
181
기회 있을 때마다 생도들에게 개화사상을 고취하였다. 낡은 사상·학문·습관·전통·제도 이런 것 중에서 시대의 진운을 막는 것을 헤어 통렬히 이를 비판하며 배격하였다. 일본의 명치유신과 및 그 오십 년 미만에 진보 발달한 형태를 극구 예찬하였다. 세계 각국의 문명한 모양을 말하였다. 졸업반 생도들더러는 경성의 상급학교로 진학하기를 절절히 권하였다. 지금은 구학문은 썩은 학문이요 아무 소용이 없고 반드시 신학문이라야 하며, 신학문 없는 사람은 사람값에도 가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182
열만 있고 지식이 모자라는 행동이 항상 맹목적이요 극단에 기울기는 쉽듯이 원선생도 자연 그런 폐단을 면치 못하였다. 그는 선영을 제사하는 것을 순전한 미신이라고 나무랐다. 입춘이니 하지니 백로니 하는 절기와 그 절기에 좇아 농민이 농시를 헤아리는 것을 풍수(風水)와 마찬가지로 허황한 것이라고 나무랐다. 그 밖에도 별별 요절할 망발이 허다하였다. 또 그는 구학문을 썩은 학문 아무 소용없는 학문이라고 배척하면서도 어엿이 “身體髮膚[신체발부] 受之父母[수지부모] 不敢毁傷[불감훼상] 孝之始也[효지시야]” 따위를 긍정적인 태도로써 가르치는 자기 자신의 딜레머함을 별반 괴로와할 줄을 몰랐다. 그런 딜레머를 인식치 못하기 때문이었다.
 
183
선영을 제사하는 것을(미신이라 하여) 비방하는 원선생을 유림측에서는 일종 광인으로 돌려놓았다. 자제를 퇴학시키는 사람도 있었다. 학교로 질문을 온 사람도 있었다. 그에 대하여 원선생의 답변은 이러하였다.
 
184
“죽어서 살은 썩어 없어지고 뼈만 남는 것이 사람의 사후가 아니요? 영혼이니 귀신이니 하는 것은 절대로 없는 것이 아니요! 무덤 속의 백골더러 운감을 하라고 음식을 차려놓고 축을 읽고 하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미신이 아니면 무어란 말이요?”
 
185
이 답변이 한번 전하여지자 사람들은 원선생을 광인도 광인이려니와 선영 위하기를 거절하는 천하 오랑캐 같은 쌍놈이라고 욕하였다.
 
186
누가 무슨 소리를 하건 원선생은 여일히 낡은 것을 깡그리 배척하며 신문명의 예찬과 그를 급속히 받아들이기를 주장하는 ‘개화꾼’임을 변치 아니하였다. 그는 말뿐이 아니라 ‘문명’을 실지로 보여주기에도 노력을 하였다. 권연상자로 토수만하게 만든 통(筒) 머리를 얇은 종이로 발라 긴 실 양 끝에 꿰어가지고 하는 전화도 가르쳐 주었다. 지구의(地球儀)를 사다 지구의 둥근 것이며 공전(公轉)·자전(自轉)과 그로써 이는 주야와 사계의 변화를 설명하여 주었다. 자기의 모교(간이농업학교)에 가서 환등을 빌어다 보여주기도 여러 차례 하였다. 교장을 누누이 졸라 조그마한 걸로 풍금을 한 채 사들여 창가도 가르쳤다. 그러나 이 풍금은 사온지 두 달이 못하여 어떤 성벽 있는 생원님네의 내기거리로서 참혹히 폐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즉 박동지와 김진사가 읍내 학교당에 ‘노래하는 귀신 잡아 넣은 것’을 사다 놓았다는 소문을 듣고 수고로이 삼십 리 밖에서 그 실물을 구경하러 왔었다. 온 뜻을 말하자 원선생이 흔연히 나서 기계요 절대로 귀신을 잡아넣은 것이 아님을 우선 설명하였다.
 
187
두 생원님은 하여간 한번 놀려보라면서 학교당꾼들이 많이 부르는 「학도야 학도야」를 요구하였다. 원선생은 즉시 그 곡을 짚었다. 두 생원님은 귀를 기울여 들었다. 과연
 
188
“하악도야 하악도야 청년학도야! ……”
 
189
하고 부르는 것이 여승하였다.
 
190
그럼 어디 그 시조를 한 장 불러보게 하시오 하였다. 원선생은 시조는 못 부릅니다 하였다.
 
191
“그럴 테지! 양국(洋國 : 西洋[서양]) 귀신이 제아모리 귀신이기로 죄선 시조야 알 탁이 있나!”
 
192
이렇게 박동지는 당연히 여기는 말로서 하였다.
 
193
마침 시간이 되어 교장까지 세 선생이 각기 교실로 들어가고 교원실에는 두 생원님만 처졌다.
 
194
박동지가 용기를 떨쳐 원선생이 하던 대로 발판을 디디면서 건반을 눌러보았다. 삐잉 소리가 났다.
 
195
“정녕 귀신이지요?”
 
196
김진사를 돌려다보면서 동의를 물었다. 김진사도 고개를 꺄웃
 
197
“또 해보시요?”
 
198
하더니 주역을 외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주역을 무시하고 풍금은 삐잉 뿌웅 소리가 역력하였다. 옥추경을 외었다. 역시 효험이 없었다.
 
199
“거 귀신이 아닌가보이다?”
 
200
김진사가 말하였다. 김진사는 처음부터 귀신설(說)에 의혹을 품던 터이었었다. 박동지는 고개를 저었다.
 
201
“아니! 양국 귀신이 주역이나 옥추경을 알 까닭이 있나요?”
 
202
“양국 귀신이나 죄선 귀신이나 귀신은 일반이지 그럴 리 없지요!”
 
203
“진사는 그럼 귀신이 아니면 무어란 말씀이요?”
 
204
“아마 사람이 들앉었나보이다?”
 
205
“천만에!”
 
206
“아냐! 사람이야!”
 
207
“아냐! 귀신이야!”
 
208
“귀신은 아냐!”
 
209
“귀신이래두 우기시는구려?”
 
210
“사람이래두 우기시는구려?”
 
211
“아, 이 좁은 속에 사람이 어떻게 들앉는단 말씀요?”
 
212
“아 주역을 모르구 옥추경을 모르는 귀신이 어딨단 말씀요?”
 
213
“귀신이라면 귀신인 줄 아시요!”
 
214
“사람이라면 사람인 줄 아시요!”
 
215
“글쎄 귀신이야 귀신!”
 
216
“천만에!”
 
217
“그럼 우리 이걸 뜯어봅시다?”
 
218
“뜯어봅시다!”
 
219
“내기허실료?”
 
220
“내기합시다!”
 
221
“뜯어보아서 만약 사람이 없으면 진사 어떡허실료?”
 
222
“이번에 새끼 난 우리 암소를 새끼 얼러 드리지!”
 
223
“두말 없읍넨다?”
 
224
“여부가 있나요! …… 그 대신 사람이 있으면 동지는 날 무얼 주실료?”
 
225
“내 선친 면례헐 양으루 무봉산다 땅(墓地[묘지]) 잡아논 걸 진사 늘 맘 있어 허셨지? 그걸 드리지!”
 
226
“동지두 두말 없읍넨다?”
 
227
“여부가 있나요!”
 
228
두 생원님은 장삼 소매를 부르걷고 달려들어 풍금을 건반을 모조리 뽑아젖혔다. 결과는 박동지가 승리를 하였음은 물론이었다. 그러나 이긴 박동지나 진 김진사나 다같이 원선생에게 어째서 대낮에 도깨비들이 이 행패를 하고 다니느냐고 불측한 폭담을 들었으니 적지않이 망신이었다.
 
229
원선생은 일변 약삭빨리 자기를 향상시키기 위하여 공부를 쉬지 아니하였다.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아 마침내 그는 갑종 훈도의 자격을 얻었으며 판임관이라는 관직이 생겼다. 나이도 인제는 삼십이요 갑종 훈도에 판임관으로 금테 두른 정복 정도에다 환도를 차고 다님즉한 관록과 실력도 엔간하였다.
 
230
생도들을 다루는 솜씨하며 모든 언동 범절이 당초의 그 데데하고 치기 있고 맹목적이요 하던 것이 훨씬 다 가시고서 제법 능란하고 침착한 선생님이 되었다. 아마 이대로 다른 사고만 없이 한 십 년 더 지난다면 이상은 모르되 촌 보통학교의 교장심득 혹은 교장 사무취급 자리쯤은 받아논 밥상일 것이었다.
 
231
사람은 열 번 고쳐 되는 것이라고 칭찬하는 사람도 있었다. 당구 삼년이니 우리 고을 물이 좋기는 좋느니 하고 같은 칭찬을 험구로써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광인으로 부르는 사람은 지금 와서는 없었다. 그만큼 그의 숱한 흉이 죄다 씻기고 잊혀지고 한 것이었다. 그러고서 오직 남은 것이 ‘원선생 두루마기’라는 비유와 부임인사를 하던 모양의 두 가지 였다. 두루마기는 그가 종시 그 두루마기를 가끔가다 떨쳐 입고 다니어 사람들로 하여금 기억을 새롭게 하기 때문이었다. 부임인사의 흉내는 생도들에게 의하여 대대로 전하여 내려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실지로 그 광경을 보지 못한 지금 아이들도 그를 흉내낼 줄은 알았다.
 
 
232
“그래두 협률사 구경허니이?”
 
233
나란히 난장마당으로 향하고 걸으면서 준호가 묻는다.
 
234
윤석은 서슴지도 않고
 
235
“그럼!”
 
236
“선생님헌티 들키믄 어떡허니?”
 
237
“일없어 안 들켜!”
 
238
“그래두우!”
 
239
“들켜두 일없어. 원선생님은 너랑 나랑은 이뻐허신깐 벌 안써!”
 
240
“………”
 
241
준호는 실상 들키고 안 들키고가 앞서는 문제인 것이 아니었다. 모친에게와 마찬가지로 선생에게도 역시 들키어(사후에) 벌을 당할 위협보다도 먼저 협률사 같은 잡스런 놀이를 구경한다는 사실이 저 스스로가 두려운 것이었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일변 협률사 구경을 하고 싶은 생각은 자못 골똘한 바 있었다. 어른 몰래 책으로만 읽은 『춘향전』을 직접 눈으로 본다는 것이 소년 준호에게는 커다란 흥미거리요 유혹인 것이었다. 거기다 아까 그 꽹과리 치던 기생이었다. 여러 총중에서 그렇듯 무안을 주고 조롱하고 하였건만 이상히 반감은 나지 않고 도리어 춘향이로 나와(정녕 춘향이로 나와) 이도령과 놀고 할 그를 부디 좀 보았으면 하는 호기심이 은근히 강렬하였다. 해서 그는 윤석더러 말은 그렇게 하던 것이나 진심인즉 윤석의 대답이 그처럼 시원시원하기를 짐짓 바라던 노릇이었다.
 
242
난장마당은 이름 그대로 난장(亂場)이었다.
 
243
본시 두섬지기라더냐 두섬반지기라더냐 하는 밭을 통 잡아 연전에 새로이 쇠전터를 만든, 그러니 사오천 평이 실한 바닥인데, 총총들이 콩나물 솟듯 들어찼느니 사람이었다. 섰는 자, 앉았는 자, 어깨를 비비며 왕래하는 자, 달리는 자, 혹은 비틀거리는 자 하여가지고 제각기 지껄이고 히히대고 불러 외치고 고함지르고 하면서 노름하고 술마시고 싸움 싸우고, 물론 씨름도 하고 하느라고 정신이 아득하도록 와글벅적 끓고 있었다.
 
244
어지러운 가운데서도 그러나 판은 판연히 갈리어 한복판이 씨름판. 씨름판을 싸고 돌아가면서가 노름판. 그리고 맨 외곽으로 방금 협률사패의 행렬이 머물러 섰던 웃장거리 행길 쪽 한쪽만 트이고는 말굽처럼 빙 둘러 음식가게의 노점들이 일렬로 연이어 진을 치고 늘어서고 하였다.
 
245
노름판…… 그 너른 바닥이 좁다 하고 빈틈없이 빡빡하게 뭉텅이 뭉텅이 무수한 뭉텅이의 노름판이 벌어져 있다. 큰 판은 이삼십 명씩 작은 판은 오륙 명으로 십여 명씩이 더러는 멍석을 피고 더러는 맨바닥에서 본패는 앞으로 둘러앉고 방퉁이꾼과 개평꾼과 구경꾼은 그 뒤로 둘러서고 하여 혹은 윷도 놀고 간혹 화투도 치고 하나 대부분은 투전을 뽑는다.
 
246
꾼들은 주장 젊은 사람들이로되 머리터럭 센 늙은이도 오다가다 보인다. 이십 안팎의 새파란 소년도 종종 섞여 있다.
 
247
제일 많은 것이 상투짜리요 깎은머리와 떠꺼머리 총각도 드문 편은 아니다. 패랭이 쓴 축은 예사라 하겠지만 방립 벗어 깔고 삼베 두건(麻布頭巾[마포두건]) 젖혀쓰고 앉아서 투전목 쥔 상제님만은 부득불 기물로 유난히 인목을 끌지 아니치 못한다.
 
248
소위 반상(班常)의 구별 같은 것은 전혀 가림이 없다. 제로라는 집안의 서방님이, 활량패가, 생원님이, 붉은 다리의 상일꾼이나 머슴 따위는 보통이요, 남의 집 하인배(下人輩)니 전일의 사령배(使令輩)니, 심지어 재인 도한이와 어엿이 한판에 어우러져 가지고
 
249
“삼남이 너 손속 났구나?”
 
250
“생원님 패 좀 봅시다?”
 
251
“남은 어떡허라구 제 욕심만 채우려 드슈? 노름판 경오나 좀 알구 다녀요 제발.”
 
252
하여가면서 사이 좋게 혹은 핀잔 먹어가며 승부를 겨룬다.
 
253
읍내 사람, 외촌 사람 그리고 큰 판이면 간혹 타관 사람이 낀다. 이런 타관 사람들은 항용 난장으로 한몫 톡톡이 보러 각처에서 모여드는 패찬 노름꾼들이다. 직업적인 노름꾼인 것이다. 거개가 탈망이나 맨머리에다 왜포수 건 아니면 대님짝으로 테머리 질끈질끈 동이고 앉아서 앞에는 지전을 비롯하여 로전이야 동전이야 엽전쾌가 수북수북이 쌓여 있다. 온 정신이 투전장과 돈 셈에 가 쏠려가지고 충혈된 두 눈만 날카롭게 빛날 뿐 달리는 옆에서 방금 살인이 난대도 모를 지경으로 열중이 되어 있다.
 
254
그러나 열중 곧 평온은 아니다. 부절히 흥분을 하여 우기고 다투고 하기에 전체적으로 동요와 훤화와 주먹다짐이 끊일 사이가 없다. 죄던 투전장 얼러 땅바닥을 치면서
 
255
“낙지공지 기리미기 도옹 자가사리로고나!”
 
256
하고 고함지르는 꾼이 있는가 하면 보기 좋게 모를 쳐놓고는
 
257
“지화자 지화자!”
 
258
부르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는 멋장이도 있다. 하는가 하면, 군데군데서는 싸움이 벌어진다. 핏대를 세워가지고 게거품 뿜으면서 돈목을 끗수를 다툰다. 잡아먹을 듯 서로 으르렁거린다. 말로 끝장이 안나면 상투 꺼들기 멱살잡이가 인다. 치고 받고 물어떼고 한다. 필경 피가 흐른다. 기절하여 동그라지기도 한다. 완연 아수라장이다. 하건만 이를 금하는 손은 없다. 말리는 손은 혹시 있어도 금하는 손은 없다. 자래로 난장마당은 초상마당이나 제사(大小祥[대소상])마당과 일반으로 노름꾼의 모나코왕국이요 치외 법권이 있는 지대인 것이다. 그리하여 아무 거리낌없이 탁 터놓고 제멋대로들 노름하고, 노름하다 싸우고 나서 도로 노름하고…… 하는 동안에 누구는 천 냥을 잃고 누구는 논 열 마지기를 팔아 없애고 누구는 빚을 오백 원이나 지고 한다. 그러나 누가 천 냥을 따고 누가 논 열 마지기를 사게 되었고 했노란 당자는 한 명도 나서지 않는다. 소문이야 아무는 몇 천 냥을 땄느니 아무는 허리띠 푸르게 되었느니 하지만, 정작 그 아무아무는 도리어 잃었노라고 우는 소리를 한다. 따고도 잃었노라고 하여야 하는 것이 워낙 노름판의 풍속인 것이다.
 
259
윤석이 연방 노름판을 들여다보곤 하면서 앞참을 서고 준호가 그 뒤를 따라 씨름판으로 가고 있는 준호의 손목을 별안간 소댕만한 북두갈고리 같은 손이 덥석 와서 움킨다. 맨상투 바람에 테머리하고 날광목 고의적삼인데 고의는 정강이를 걷어올리고 버선목을 대님으로 묶고 미투리 신고 한 차림새가 벌써 누구네 집 머슴일시 분명하였다. 햇볕에 타 시꺼먼 바탕이 다시 술로 붉은 기운을 곁들여 소위 무른 대추빛인 것도 그의 신분을 증명하는 한가지 조건이리라. 십리만큼씩 난 노랑수염은 막걸리가 말라붙어 절반은 노랑수염 절반은 흰수염이다. 성긴 노랑수염에 무른 대추빛 같은 얼굴이요 겸하여 육척의 장신이니, 눈만 고리눈이었다면 장비 임직한 풍모였으나 유감히도 애꾸눈이어서 무섭기보다도 우습기 먼저 한 인물이었다. 준호는 그러나 우스울 경황은 없고 우선 무서웠다.
 
260
“놔!”
 
261
겁먹은 소리로 짧게 지르면서 붙잡힌 손목을 뿌리치려고 하나 억센 손아귀가 간대로 펴질 리 없었다.
 
262
“히히히!”
 
263
애꾸는 누런 이빨로 웃으면서 허리를 꾸부리고 바싹 들여다본다. 감내가 푸욱 질러 가뜩이나 소년을 숨막히게 한다.
 
264
“몇살 먹었어?”
 
265
“놔!”
 
266
“히히히! 떡 사줘?”
 
267
“………”
 
268
준호는 발버둥을 치면서 한손으로는 구린내나는 입을 떠다밀친다.
 
269
“그러지 말구 나허구 놀러가. 내 떡이랑 사탕이랑 사주께. 돈두 주께 응?”
 
270
“놔! 놔!”
 
271
웬만큼 처져 앉으면서 으악 울 노릇이었으나 오히려 색색거리고 발란질을 해댄다. 무섭기는 처음 순간이요 울 생각은 조금도 없고, 천민의 무엄함이 괘씸코 분하였던 것이다. 약하고 영악치 못한 소년임에 틀림은 없으나 앙똥스럽고 교만한 본성이 노상 없는 바도 아니었다.
 
272
동무요 차림새가 비슷한 것이 같은 신분인 듯한 한 자가 마침 지나다보고 건네는 말이
 
273
“잡것이 장가 들 생각은 않구섬!”
 
274
하는 것을 애꾸가 돌려다보면서
 
275
“히히히! 초립동이 상투…… 오래 산대문서?”
 
276
“무우대가리처럼 아무것두 없는 녀석이 오랜 정치게 살구푼감?”
 
277
“히히히…… 이걸 어디루 둘쳐업구 가야 한다?”
 
278
정히 둘쳐업고 으슥한 곳으로 달리지 아니치 아니할 기세였다. 무례와 잡스럼을 심히 탄 아니하는 것이 또한 난장이어서 누구 한 사람 나서서 말려주는 이 없었다. 사세는 절박하여 십상 당해둔 욕이었다.
 
279
그러나……
 
280
“네끼 사람!”
 
281
천만다행이었다. 준절히 꾸짖는 노인이 있었다. 촌영감으로 풍채며 기상이 별양 장할 것은 없으나 반편스런 머슴꾼 하나쯤 나무라고 견제하기엔 넉넉하였다.
 
282
“어린아일 데리구 무슨 그런 실없은 장난을! ……”
 
283
“히히!”
 
284
“놔줘!”
 
285
“괜히 그러심다! 영감님……”
 
286
“어서 놔주래두!”
 
287
“영감님일랑 어서 저 씨름이나 가 구경헙사요!”
 
288
“썩 놔주들랑 아녀구서! ……”
 
289
좀더 거센 나무람 소리와 함께 짚고 있던 지팽이가 애꾸의 정수리를 딱 갈긴다. 구경꾼으로부터 와 웃음이 터지고 애꾸는 엄살스럽게 아파하면서 맞은 자리를 우딘다. 그러면서 손목 움킨 것을 놓치는 체 놓는다.
 
290
준호는 냉큼 몸을 피하는 대신 눈살을 꼿꼿이 하여가지고 무례하던 자를 아긋이 노려본다. 그러자 윤석이 두리번거리면서 달려들었다. 앞참을 서서 얼마를 가다야 잃어버린 줄을 알고 찾으며 되돌아왔던 것이다.
 
291
“왜 그랬니?”
 
292
무슨 사단이 있었음을 직각하고 급히 그렇게 묻는다. 준호는 그러나 입을 다문 채 군중 틈으로 어슬렁어슬렁 사라지는 그자의 등 뒤만 종시 눈 흘겨볼 뿐 아무 대답도 없다.
 
293
“응? 왜 그랬어?”
 
294
“………”
 
295
“………”
 
296
흔한 일이라 윤석은 문득 그제야 눈치를 채고 벌컥
 
297
“어떤 놈야, 그놈이? …… 응? 어디루 갔니 그놈? 그놈을 막……”
 
298
하고 으르대면서 휘휘 사방으로 눈방울을 부라린다.
 
299
그런 불결한 희롱을 당할 뻔하였다는 것만도 준호는 동무한테조차 부끄럼
 
300
을 타도록 계집아이처럼 숫기 없는 소년이었다.
 
301
“아냐, 괜히 저 거시키 저어……”
 
302
도리어 이렇게 씻어 덮으면서 윤석의 옷소매를 잡아끈다.
 
303
물론 창피하였고 망신인 것이야 이를 나위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바야흐로 그늘에서 자란 순에게 대한 강한 일광이요 비바람이었다. 되약는 시련인 것이었다. 소년은 이때 속으로 이를 갈아붙였다.― 죽더라도 모친에게 매를 맞아 죽더라도 이 야속스런 상투를 잘라버리리라고.
 
304
아이들과 키 작은 사람은 앞으로 나앉고 키 큰 사람은 뒤로 서고 하여 몇 겹인지 모르게 겹겹이 담쌓듯 사람으로 에운 그 안에서 씨름은 판이 벌어져 가지고 있다.
 
305
에움 안편짝 한옆으로 내세운 두레의 굵고 높은 깃대(農旗竿[농기간])에 드리운 줄에는 주머니, 쌈지, 허리띠, 대님, 미투리, 왜포수건, 난목끗 따위의 상(賞品[상품])이 아직도 많이 생선꿰미처럼 주렁주렁 매어달렸다.
 
306
소는 암소는 암소라도 대각이 제가 오늘 밤 소씨름의 상소인 것도 모르는 듯 난장판의 훤화도 아무 흥미 없다는 듯 넌지시 저편짝 밭두렁에서 풀을 뜯으면서 홀로 한가롭다.
 
307
준호와 윤석은 가까스로 사람의 에움을 비벼 뚫고 맨 앞줄로 나가 앉았다. 씨름은 계제 좋게 윤석 또래의 애기상씨름이 한물이었다.
 
308
열서너살박이의 머리 딴 꼬마동이가 두 놈이 고의춤을 마주 잡고 얼러붙어서 밀치락달치락 가랭이도 떴다 딴죽도 감았다 하면서 흡사 부룩송아지 싸우듯 서로 뭉그댄다.
 
309
막 깎은 머리에 질끈 테머리 동이고 굵다란 참대 몽둥이를 쥔 판장이 연방
 
310
“어 ― 우 ― 어 ― 우 ―”
 
311
“넘어간 ― 다 ― 어우 ―”
 
312
하고 울력 소리를 지르면서 요리조리 승부를 살피며 재빠르게 씨름 곁을 따라다닌다.
 
313
“안쪽 감아라! 안쪽 안쪽!”
 
314
“배 붙여주지 마라라!”
 
315
이런 응원의 아우성이 관중으로부터 제각기 편역을 드느라고 요란히 일어 쌓는다. 하는가 하면
 
316
“우리 덕쇠 참 먹어싸게 한다!”
 
317
“소씨름감이다 소씨름감!”
 
318
하고 치켜세우는 패도 있다.
 
319
씨름은 그러나 잘하는 씨름도 봄직한 씨름도 아니었다. 기운만 부리고 아무 재주와 농간이 없어 결국 부룩송아지의 대갈싸움에서 벗을 게 없었다.
 
320
“저런 빙신들! ……”
 
321
윤석의 조롱과 비판이었다.
 
322
“저걸 씨름이라구 허궀어? …… 씨름은 기운두 세예지. 허지만 꾀가 젤인데 둘이 다 꾄 하나두 없잖아? 응? 준호야?”
 
323
“………”
 
324
준호는 어떻게 하는 것이 잘하는 씨름인지 또는 못하는 씨름인지 같은 것은 알 줄을 몰랐다. 오직 난장과 난장씨름이 처음이라 그 긴장한 진짜 승부가 다만 재미있을 따름이었다.
 
325
서투른 씨름이라도 승부는 나는 것, 이윽고 한 놈이 다른 한 놈에게 털썩 넘어박힌다. 관중이 와 함성을 지르고, 판장은 날쌔게 벌써 이긴 편의 손목을 번쩍 치켜들었다. 심판의 선언인 것이다.
 
326
진 놈은 점직하다고 히죽이 웃으면서 먼지를 털면서 판으로부터 물러나간다. 이긴 놈은 이건 또 이기고 여러 사람의 주목을 받기가 점직하대서 역시 히죽이 웃으면서 그 자리에 가 주저앉아 다음을 기다린다.
 
327
판장이 햇씨름을 고르러 관중을 물색하면서 분주히 돌아간다. 윤석은 좀이 쑤시어 안절부절한다. 자청을 하고 나서려는 참인데 판장은 오다가 문득 그 앞이 너무 나온 것을 보고 손의 참대 몽둥이를 들어 한바탕 판을 친다. 발끝을 갈길 듯이 땅바닥을 때리면서 달리면 관중은 뒤로 물씬물씬 물리어 나가고 판이 넓어지는 것이요, 참대 몽둥이는 그 소용으로 지니는 것이다.
 
328
웬만큼 판을 치고 나서 판장은 하나를 손목 잡아 끌어내었고, 그래서 윤석은 그만 도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나 기회는 이내 다시 올 것이라 단념도 실망도 할 필요는 물론 없었다.
 
329
햇씨름은 공단댕기 들여 머리 땋고, 모시두루마기에 가죽반저름 신고한 얼른 보아도 누구네 집 글방도령이었다. 나이는 열서너 살 한 또래였으나 해사한 얼굴이며 가냘픈 몸집이며가 판판 약질로 생긴 것이 도저히 부룩송아지 같은 묵은씨름의 적수가 아니었다.
 
330
과연 씨름손을 잡고 두어 발 빗기가 무섭게 묵은씨름은 햇씨름을 불끈 안아서 태질치듯 쓰러뜨려 버린다.
 
331
그것으로 다섯 허리째의 연승(連勝)이던 모양 판장은 상대로부터 율모기허리띠 하나를 내려다 그의 목에 걸고 이끌면서 일변 거주 성명을 물어
 
332
“해동 조선 ×××도 ××군 ××면 ××리 ×통 ×호 고덕쇠 열세 살 판 나갑네에!”
 
333
하고 외치면서 짬을 반쯤 돌고는 절을 받은 후 비로소 놓아준다.
 
334
드디어 윤석이 등장하였다.
 
335
묵은씨름을 그가 방금 글방도령을 이기기보다도 더 하잘것없이 배붙이기로 넘어뜨렸다.
 
336
계속하여 둘 셋 넷 다섯…… 여섯 허리를 이기고 대님을 상탔다. 다시 또 다섯 허리를 이기고 허리띠를 상탔다.
 
337
향교골 패들과 학교 동무 아이들은 신이 나서 씨름판이 떠나가도록 응원 소리가 요란하다.
 
338
누구는
 
339
“이따 나갈 때 업고 가마아?”
 
340
또 누구는
 
341
“떡 사주께 오늘은 서른 허리만 이겨라아?”
 
342
또 누구는
 
343
“그대루 눌러 소씨름꺼지 해라!”
 
344
하고 고함을 친다.
 
345
준호는 신이 나고 기뻤다. 윤석이 타서는 던져 주고 타서는 던져 주고 하는 상이 늘어갈수록 준호의 기쁨도 함께 더하여 갔다.
 
346
열일곱 허리째에서였다. 윤석은 안쪽을 감고 밀다 햇씨름이 되게 버팅기는 바람에 그를 깔고 엎드러졌다. 하마터면 햇씨름의 머리 뒤꼭지보다 윤석의 팔이 먼저 짚일 뻔하였다.
 
347
판장이 윤석의 팔목을 치켜드는데 관중으로부터
 
348
“판장 눈 삐었다!”
 
349
하고 외치는 소리가 일었다. 심판에 대한 항의였다.
 
350
판장은 더럭 얼굴을 사납게 하여
 
351
“그 판장 눈이 뼜단 눈구멍 좀 이리 뽑아오느라! 어느놈이냐?”
 
352
하고 호통을 지르면서 눈방울을 굴린다.
 
353
하도 그 서슬의 험함에 질렸음인지 다시는 꿀꺽 소리가 없다. 대신 향교골 패에서 판장이 옳다고 입입이 떠든다.
 
354
씨름판의 판장이란 삼군의 장수보다도 어려운 소임이다. 백 명이면 백 명 천 명이면 천 명 죄다가 제각각이요, 제 주장 제 소견을 세우러 드는 무질서하며 통제성 없는 군중들이다. 그러면 군중을 단 한 사람으로써 능히 휘어잡고 어거하되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항의 같은 것은 꿈쩍도 소리를 못하게 하여야만 판장질을 감당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자니 그는 감대 사나와야 하며, 일변 위압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가사 심판이 한 번 실수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를 그대로 내뻗을 억지와 강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애초에 그렇듯 자격 구비의 인물이 아니고는 판장으로 추천이 되어지지를 않는 것이다.
 
355
이런 감대 사납고 아귓심이 세어 군중을 위압 통제하는 자격을(실상은 요령을) 갖추었고, 그러나 심덕은 썩 무던하고, 그리고 일 좋아하는 호사객이요, 하며 혼인집과 초상마당은 빼놓잖고 쫓아다니면서 남의 일 제일같이 거두잡아 해주고, 단오에 편사(便射)차리기, 설명절에 아래청 데리고 걸궁패꾸미기, 추석에 난장 설도하고 판장 노릇 맡아하기…… 해서 이른바 ‘골안 살림꾼’ 혹은 ‘동네머슴’이 어느 고장이고 으례 하나씩은 있는 법이어서 이 판장 갑술이도 정히 그러한 사람이었다.
 
356
항의가 있던 방향으로부터 그 끝에 햇씨름이 척 자원하고 나섰다. 말로써 더 항의를 못하는 대신 실력 ― 씨름을 통하여 싸움을 거는 것이었다.
 
357
자원하고 나선 햇씨름은 나이도 열오륙 세는 되어 보이거니와 등 짤막하고 어깨통 떡 벌어진 체격이 벼 한 섬쯤 져다 먹으라면 선뜻 지고 감직한 애총각이었다.
 
358
판장은 위아래로 한번 훑어보면서 거듭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무가 보아도 너무 솟는 씨름이 아닐 수 없었다. 판장은 그러나 고쳐 생각하고 말없이 씨름을 붙인다.
 
359
이번엔 향교골 패에서 가만히 있으려고 않는다.
 
360
“너무 크다!”
 
361
“들어갔다 소씨름이나 해라!”
 
362
“판장 썩었다! 꼼짝 못하는구나!”
 
363
이렇게들 떠들고 불뚝거려도 판장은 들은 숭 만 숭한다. 관중의 불평과 항의를 못들은 체하는 것도 그를 봉쇄하는 요령의 하나였다. 사실 걸핏하면 저마다 떠들어대고 구석구석이 불뚝거리는 소리요 하는 것을 그를 일일이 다 거들고 어쩌고 하자면 판장은 입이 백이라도 한정이 없는 노릇이었다.
 
364
“아니 이 사람 갑술이!”
 
365
참다 못해 향교골패의 한 사람이 시퍼렇게 성구면서 열로부터 한 걸음 판 안으로 뛰쳐 나선다. 말씨가 그렇고 연갑끼리요 한 것이 익숙한 친구간인 모양이었다.
 
366
판장은 돌려다보지도 않고 저 할 일만 하면서 냉연히
 
367
“갑술인 집으루 찾아오게나!”
 
368
“씨름을 이렇게 돋구는 법이 어딨다든가!”
 
369
“×××소리 작작 해둬!”
 
370
“판장 명색이 이렇게 살(私[사]) 쓰긴가!”
 
371
“열여덟 허리째야! 안 돋구구 밤낮 애기씨름만 시켜?”
 
372
“돋구는 것두 분수가 있지?”
 
373
“………”
 
374
판장은 더는 대꾸도 아니하고 씨름만 붙여준 후에 뒤로 물러선다.
 
375
윤석은 햇씨름보다 워낙 힘이 달렸다. 동동 매달려 다니면서도 갖은 재주부릴 대로 부리었으나 필경 패하고 말았다.
 
376
이로부터 씨름은 급속도로 돋구어 올라가 삽시간에 총각 삼씨름으로 커버렸다.
 
377
소 같은 장정의 떠꺼머리 총각들이 연방 달려들어 한바탕씩 우지끈우지끈 살이 찢어지는 듯 뼈가 퉁겨지는 듯 무시무시하게 겯고 틀고 뛰고 하다간 꿍꿍 나가떨어지곤 한다.
 
378
총각 상씨름이 고비가 차면 그 다음 어른 씨름으로 넘어가야 한다. 판장은 적당히 때를 헤아려 마침 다섯 허리의 연승이 난 기회에 준례대로 상을 베풀고는 뚝 떨어져서 조막만한 초립동이를 햇씨름으로 손목 잡아 끌어낸다. 관중으로부터 와그르 웃음이 터진다. 준호보다도 차라리 작은 초립동이였다.
 
379
덜썩 큰 장정 총각 묵은씨름과 그의 다리 하나 푼수도 못되는 초립동이가 격식 찾아 고의춤 마주 잡고 착 어우러져 돌면서 유유히 씨름을 빌는다. 씨름하고 있는 총각과 초립동이도 어우 넘어간다 하고 울력 소리 한결 드높여 지르면서 그 옆을 감도는 판장도 그리고 관주들 죄다가 빙그레 혹은 싱글싱글 웃지 않는 얼굴이 없다.
 
380
천천히 한 바퀴를 돌고 나서 총각은 어여차 소리와 함께 불끈 허리를 펴 배를 붙이면서 안쪽을 감더니 제야
 
381
“넘어간 ― 다!”
 
382
하면서 벌떡 뒤로 나가 동그라진다. 그풀에 초립동이는 총각의 배에 가말 타듯 타고 앉았고 유쾌한 웃음과 함성이 관중으로부터 혼들리듯 일고 판장은 달려들어 초립동이의 팔목을 치켜올리고 한다.
 
383
준호는 무심코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러나 이내 윤석을 꾹 찌르면서 일어섰다.
 
384
초립동이가 수두룩하다고 하지만 아주 어린(준호와 시방 판에 나간 또래의) 열두어살박이란 그리 흔한 것이 아니었다. 자연 앉았느라면 물색하는 판장의 눈에 뜨일 것이요, 뜨이면 억지로라도 끌려나가는 것이요, 나가서는 씨름을 하고 메어다꽂히고 할 것이요 하니 두루 망신일밖에 없는 것이었다.
 
385
윤석은 그런 눈치를 알아채고 말없이 얼른 따라나서 주었다.
 
386
그동안 벌써 해가 저물어 어슬어슬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387
준호는 길 잃은 어린애처럼 황혼이 걱정스러우면서 집 돌아갈 생각이 불현듯 하였다. 일변 모친이 혹시 그새 돌아오지나 않았나 하여 그 불안 또한 새삼스럽게 가슴 더럭했다. 곧 집으로 달려갔으면 싶었다. 우선 집이 반가울 것이고, 거기에 가령 환(患)이 기다리고 있다 치더라도 하옇든 마음이 놓이고 할 것 같았다. 그러나 한편 그러면서도 뜻은 역시 정작 재미있을 협률사니 소씨름이니의 밤의 구경에 가 더 있어 선뜻 이를 단념하고 돌아설 결단은 나지가 않았다. 항차 이 푸짐한 굿판으로부터 혼자만 미리서 겸하여 동무와도 떨어져 저문 길을 홀로 가다니, 생각만 하여도 섭섭코 외로와 못 할 노릇이었다.
 
388
구수한 고깃국 냄새가 코로 푸욱신 스며든다. 잊었던 시장기가 일시에 돌고 어금니로 신침이 그득히 괸다.
 
389
준호는 아침 새때에 군음식을 조금 먹고는 점심은 뜨는 둥 마는 둥 하여 지금은 탈탈 빈 속이었다. 아낙 진주가 꾸려준 것은 진즉 동구 밖에서부터 연방 윤석의 뱃속으로 옮아 들어가 읍까지 당도하기 전에 말끔 빈 그릇만 남았었다. 다식 한쪽도 준호는 입에 넣은 것이 없었다.
 
390
싯누런 기름이 흥건히 뜬 국물이 큰 가마솥에서 용솟음을 치고 펄펄 끓는다. 목침만씩한 고깃덩이 순대가닥, 간 따위가 쉴새없이 번차례로 솟아올랐다 갈앉았다 한다. 음식가게의 노천(露天) 아래 국솥이요, 이가 준호로 하여금 회 동하게 하는 냄새를 풍기던 것이다.
 
391
“네에 국말이진지(장국밥)에 막걸리요오!”
 
392
주모(酒母)가 손의 주문을 그렇게 되외우면서 밥자배기로부터 밥을 한 덩이 뚝 떠 대접에 담아 들고 자루 긴 놋국자로 솥에서 그 끓는 국물을 퍼부어 대강 덩이를 끈 후 주르륵 국물을 도로 따르고는 다시 퍼붓고 퍼부었단 도로 따르고 한다. 서너 번 그러고 나서 따로이 창칼 끝으로 고깃덩이를 푹 꿰어올려 도마에 놓고 한귀퉁이를 썩둑 자른다. 순대도 한 도막 간도 한 쪽 그렇게 떼어낸다. 그것들을 숭숭 잘게 썰어 밥 만 대접에다 담는다. 마지막 더운 국물을 넘싯넘싯 퍼부어 호초랑 몇 가지 양념을 쳐가지고 부우연 한사발의 막걸리와 함게 손 앞에 내놓는다.
 
393
노점과 노점 사이로 좇아 난장마당을 빠져나가다 준호는 하도 먹음직스런 그 한 그릇의 국밥에 그만 침이 꼴깍 넘어가는 것을 겨우 참았다. 일찌기 입도 대어본 적이 없는 저자의 천한 음식이었다. 그러나 일찌기 이렇듯이도 맛이 있어 보이고 구미가 당기는 음식은 구경해 본 적이 없었다.
 
394
“너 배 안 고프니?”
 
395
뒤따르던 윤석이 그렇게 묻는다.
 
396
“아니! ……”
 
397
준호는 얼른 그러면서 고개까지 젓다가 몇 걸음 더 걷더니
 
398
“너 참 무어 사먹어라!”
 
399
하고 윤석을 돌려다본다.
 
400
“나두 배 안 고파!”
 
401
“돈 주께 사먹어라. 나 여기서 기댈리구 있으께……”
 
402
“나두 돈 있단다. 그래두……”
 
403
“네 돈은 애껴두구 말야!”
 
404
“너랑 겉이 가 사먹으문?”
 
405
“난 먹구푸잖아!”
 
406
“………”
 
407
윤석은 이 조그마한 귀골(貴骨)이 도무지 딱해 못했다.
 
408
두갈랫길에 이르렀다. 객사(客舍)로 가는 길과 성을 넘어서 학교로 갈 수 있는 갈림길이었다. 협률사는 객사마당에서 놀았다. 협률사에서는 벌써 취군 부는 호적소리가 마음 달뜨게 울려온다.
 
409
“넌 그럼……”
 
410
윤석이 잠깐 망설이다
 
411
“협률산 아직두 있어예지 시작헌깐 말야, 천천히 가두 헌깐 말야…… 학교루 가서 기댈리구 있어 응?”
 
412
“무어 사먹으러 가니?”
 
413
“응 아니!”
 
414
“사먹구 오느라?”
 
415
“그래. 내 얼른 댕겨가께 먼첨 가 있어!”
 
416
“곧 오니?”
 
417
“응 곧 가께.”
 
418
윤석은 돌아서서 도로 난장마당을 향해 반달음질을 친다.
 
419
준호는 그 등 뒤에다 대고
 
420
“얼른 댕겨오너라?”
 
421
“그래애! …… 가 우물 옆에서 기댈리구 있어?”
 
422
“돈 정말 가졌니?”
 
423
“걱정 마라!”
 
424
“모자라믄 더 가지고 가거라?”
 
425
“안 모자라!”
 
426
준호는 메때리고 저도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야 꿀안 같았다.
 
427
가뜩이나 황혼이라 우거진 고목 그림자들만 칙칙하고 인기척 없는 학교 경내는 발을 들여놓기가 무싯하였다. 숙직실로 소사실로 한바탕 돌아보았다. 당직 교원도 소사도 추석명절이야 난장이야에 달떠서 학교를 비워던지고 아무도 없었다.
 
428
아무도 사람이 없음을 알자 준호는 무선 기가 더럭 더하여 도망하듯 문간으로 도로 나와서 기다렸다. 그제야 문득 생각하니, 하필 이런 학교에까지 와서 기다리게 하는 것이 이상하였다.
 
429
요기를 하자면 한동안 지체가 되려니 한 것이 뜻밖에 윤석은 이내 곧 달려왔다. 씨근거리면서 뛰어왔다. 무엇인지 기쁘고 만족한 얼굴이었다.
 
430
윤석은 준호를 데리고 학교 뒤꼍의 우물 옆 잔디밭으로 가서 마주 앉더니 군음식 담아가지고 온 싸리바구니를 부스럭부스럭 펼쳐놓는다. 처음부터 송두리째 제가 맡아 차지하고는 마지막 한톨의 밤엿까지 털어먹었고 여지껏 빈 그릇을 들고 다니고 했었다. 한 그 빈 바구니를 펼쳐놓는데 그 속에는 요술같이도 인절미가 들어 있지를 않는가.
 
431
순간 준호는 눈물이 핑 돌았다.
 
432
“너 이거래두 먹어예지 허지, 그러다 괜히 허기지믄 어떡허니?”
 
433
윤석은 마치 어른이 어린애를 달래듯 한다.
 
434
주먹만씩한 콩고명 인절미가 다섯 개…… 조청까지 조끔씩 적시었다.
 
435
시장한 판에 인절미 다섯 개쯤 준호 혼자서 먹어도 나쁠 것이었다. 그러나 윤석은 시재가 도통 그뿐이었다. 일전박이 한푼, 엽전 다섯푼이 도합 그의 시재요, 그런 시재를 죄다 털어서 샀었다. 준호가 돈을 더 주마는 것도 마다하고 이 전이면 인절미 다섯 개가 시세인 줄 번연히 알면서도 인절미 다섯 개로는 모자랄 줄을 또한 번연히 알면서도 말이었다. 주머니돈이 쌈지돈이더라도 나중 가서야 구경도 얻어 하고, 요기도 시켜주면 얻어 먹고, 필요하면 돈으로 취해 쓰기도 하고 할망정이라도 말이었다. 이 경우의 이것 한가지만은 부디 저의 힘으로써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있는 것이나 힘을 다하여 그는 이 가엾은 동무를 구원하는 것이 도리요 아울러 기쁨이었던 것이다.
 
436
오늘 하루는 소년 준호에게 여러 가지로 ‘운명의 날……’이었다. 이 윤석과 새로운 우정이 생긴 것도 그중 한가지에 들 수가 있었다.
 
 
437
진주는 명절답게 한가로움직한 일거리로 베갯모의 수를 놓고 앉았으나 마음은 조금도 한가하지가 못하였다. 새서방 준호의 돌아옴이 너무 더디기 때문이었다.
 
438
열한시를 친 지도 벌써 오랬다. 해전에는 몰라도 밤이 과히 깊지 않아서 돌아오려니 하였지, 설마 이렇게 늦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한 노릇이었다.
 
439
집 앞 행길로부터 사람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진주는 부리나케 마루로 나서서 귀를 기울인다. 읍으로 난장 구경을 갔던 일행들은 일행들인 모양이나 새서방이 그 축에 끼여 돌아오는 기척은 역시 없고 그대로 지나쳐 버린다. 교교하고 달만 낮같이 밝았다.
 
440
마침내 열두시를 친다.
 
441
진주는 가슴이 더럭 내려앉았다.
 
442
열두시면 정말로 너무 늦었다. 암만 무엇하더라도 열두시가 되도록 안 돌아올 이치는 없었다. 그렇다면 정녕 무슨 변고가 난 것일시 분명하였다.
 
443
‘싸웠는지?’
 
444
‘싸움을 했기로서니 몸을 쓰지 못하도록 다치지 아니한 다음에야!’
 
445
‘가지고 간 것을 물도 없이 함부로 급히 먹고 혹시 관격이라도? …… 그 생각하고 팍팍한 것은 별로 넣지 말았건만…… 사향소합환을 어쩌다 깜박 잊었던고!’
 
446
‘난장에는 일쑤 편싸움이 난다는데! …… 애먼 사람도 많이 다친다는 편싸움. 심하면 살인까지 난다는 무서운 편싸움!’
 
447
요행 아무 탈이 없고 다만 구경에 잠착하여 이렇게 늦은 것이라면이거니와 아닌말로 그런 어떤 사단이 난 것일진대 이런 낭팰 데가 없었다. 자결을 하여도 오히려 메꾸어놓지 못할 큰일이었다.
 
448
쫓아가 볼 생각이 불 같았다. 그러나 뜻뿐이지 못하는 노릇, 몸이 여자로 된 것이 답답할 다름이었다.
 
449
뒷일이야 어찌 되었던 머슴 용길이 도령을 보내봄직 하나 낮에 잠깐 들러 점심을 먹고 나간 뒤로는 이내 비치지도 아니했다. 절골 자기 본집으로 도로 간 것이라면 말할 나위도 없지만, 막상 동네 어디서 투전이나 윷에 팔려있기론들 누구를 시켜 찾아서 데려오고 하는 수가 없었다. 인간 명색으로 삼월이년이 웃목 구석에서 자고는 있으나 이 밤중 나서서 그런 심부름을 해오고 할 만한 재치 빠른 구석이 있는 계집아이가 되질 못하였다.
 
450
 
451
시간을 거진 같이하여 절골 용길의 집에서는 박씨부인이……
 
452
초저녁부터 기괴한 망상을 얽기에 잠을 잊고 누워 몸만 두루 뒤척이던 끝이었다.
 
453
지금 불시에 집으로 들이닥치는 날이면 영락없이 무엇이 퉁겨질 것이었다. 삼월이년은 잠만 들면 송장, 준호는 살살 달래서 놀러 내보냈을 것. 멀찍이 아주 난장 구경을 보냈기 십상이요 그러고는 기집과 사내가……
 
454
박씨부인은 환상이 눈에 역력히 밟히면서 푸르르 사족이 떨렸다.
 
455
벌떡 그대로 뛰쳐 일어나 단숨에 집으로 달려가겠는데, 꼭 그 덜미를 짚어야만 하겠는데, 그러나 별안간 그렇게 뛰쳐 일어나 집으로 달릴 핑계가 만만히 없었다. 일껏 약수맞이를 하러 먼 길을 와서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첫 닭이 울고, 울면 곧 약수터로 갈 참이어 한데 잠자다 경풍난 사람처럼 뛰쳐 일어나 집으로 달려가다니…… 이 깊은 밤에.
 
456
그야 뿌리치고 가기로 들면 누가 하는 노릇이라고 하릴없이 바라다나 줄지언정 부득부득 붙잡아 앉히지는 못하겠지만 좌우간 졸지에 그토록 황급히 서둘지 아니치 못하는 구실이 있어야 할 말이었다.
【원문】풍물지(風物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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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만식(蔡萬植)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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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04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