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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女子)의 일생(一生) ◈
◇ 혁명가(革命家)의 후예(後裔) ◇
카탈로그   목차 (총 : 7권)     이전 7권 ▶마지막
1933.5
채만식
1
女子[여자]의 一生[일생]
 
2
革命家[혁명가]의 後裔[후예]
 
 
3
아랫방…… 일찌기 처녀 적부터 진주가 거처하던 방이었고, 혼인 때에는 신방을 차리고 한 그 방이었다. 그 방에서 다시 진주와 준호는 기약치 아니한 밤을 또 한번 맞이하였다.
 
4
촛불이 환히 밝은 가운데 초저녁은 건듯 겨웠고.
 
5
준호는 눈을 내리깔고, 만들어 앉힌 것처럼 고대로 앉아 옆에서 누가 무슨 소리를 하거나 눈썹 하나 까닥도 않는다. 앞에는 저녁 밥상이 손도 대지 아니한 채 고스란히 놓여 있다. 할머니가 식은 국과 찌개를 손수 내다 손수 데워 들여온 것이 도로 다 식는다.
 
6
진주는 달래다 달래다 팡져, 우두커니 밥상머리에 가 앉았을 뿐이다.
 
7
준호는 좀처럼 속이 풀어질 수가 없었다. 생전 처음 당한 일이었다. 집안에서고 나가서고 남한테 그런 박절스런 면박을 당해본 일이 없었다.
 
8
어떻게도 무렴하고 부끄럽든지 곧 죽고 싶었다.
 
9
몸이 당장 그대로 없어져버리지 않아지는 것이 야속하면서 그는 한사코 달리었다.
 
10
안으로부터 심상치 아니한 높은 음성과 노인의 성화하면서 쫓아나오는 기척을 듣고 의아하여 사랑에 있던 윤석이 대문 밖으로 나오다 마침 그를 막지 아니하였더라면 준호는 이 밤에 어디 지경을 갔을는지 몰랐다.
 
11
윤석은 이유는 어떠하였던, 달려나가는 사람을 아뭏든 붙잡고 보아야 할 것으로(만류해야 할 것으로) 알았고, 뒤미처 쫓아나온 할머니가 다른 한편 팔을 부여잡고 하여 준호는 더는 달아나지를 못하였다.
 
12
준호는 붙잡힌 팔을 빼치려고 몸부림을 치고 발버둥을 치고 하였다. 아무 소리도 않고 싸움에 지친 수탉처럼 새근새근하면서 함부로 근두박질을 했다. 얼마를 그러다 그만 시진하여 펄썩 땅바닥에 가 주저앉아 버렸다.
 
13
“온 이런 망신이 있나, 점잖은 사람이. 저 하인들이랑 보는데……”
 
14
할머니가 안아 일으키면서 하는 이 말은 효과가 대단하였다. 준호는 단박에 저항을 버리고 할머니가 안아 일으키는 대로, 손목 잡아 이끄는 대로 안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15
준호는 제 집에서도 그러지 못할 테거늘 항차 흉허물 많다고 하는 처가에 까지 와서 하인배들이 보고 하는 앞에서 그런 볼성없는 거동을 하다니 망신도 이만저만찮은 망신이었다. 가사 죽을 고통을 참을값이라도 체모를 지키지 아니하여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 이미 준호의 어린 머릿속에 위협적으로 쩔어 있는 바 모친 박씨부인의 훈도였던 것이다.
 
16
어려움 있는 손님이었다. 그가 대문 밖에 주저앉아 이짐을 부린다고 여럿이 달려들어 네 손발 갈라잡고 동동 들어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 머슴 시켜 불끈 안아들여 갈 수도 없는 처지. 그러니 무심코 할머니는 한말이었으나 그 말 한마디가 아니었다면 옆에서 벼락불이 떨어진다더라도 선뜻 준호로 하여금 이끌리어서나마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지는 못하였을 것이었었다.
 
 
17
“난 그만 죽어버리든지, 머리 깎구 절루 가서 승(女僧)이 되든지 허구 말아예지, 오나가나 이렇게 애만 태우구 어떻게 사람이 사는구 !”
 
18
진주가 밥상머리에 앉았다 퍼뜩 혼잣말로 하는 것이었다. 철없는 아기 새 서방 앞에서 소견머리없이 진심으로 무슨 팔자 자탄 같은 것을 뇌사리고 할 진주는 아니었다. 하도 그렇게 토라져 가지고 앉아서 예사 달래고 하는 말로는 밤이 새어도 무가내할 것 같고 해서 슬며서 속을 한번 질러주어 보자는 생각이었다.
 
19
미상불 반응은 있어, 이윽고 준호는 여지껏 내리깔고만 있던 눈을 가만히 들면서 가만히 기색을 살핀다.
 
20
그러고는 얼마를 있더니 붙은 입술이 조금만 떨어져
 
21
“그럼, 나 밥먹구 허믄 낼 나하구 겉이 집이 가우?”
 
22
하고 겨우 묻는다.
 
23
준호는 새댁이 오늘 일껏 왔다가 그런 못 당할 일을 당하고 또다시 쫓겨오고 말았으매, 인제는 영영 올 생각을 아니하려니 하였다. 그리고 준호에게는 그것이 걱정이요 위협이었다.
 
24
“낼? 겉이요?”
 
25
진주가 웃으면서 묻고, 준호는 눈으로 그렇다고 대답을 한다.
 
26
“겉이 갔단 정말 또 큰일나라구요?”
 
27
“………”
 
28
“이놈, 누가 널더러 가 데리구 오래드냐시믄서, 어머님이 훌훌 뛰실게 아녜요?”
 
29
“………”
 
30
“저야 괜찮다지만, 어머님헌테 그 무선 맬 또 맞구 하실 테니, 걸……”
 
31
“난 매 맞아두 일없어, 머.”
 
32
“나 인제 새달에 가께요.”
 
33
“………”
 
34
“새달 ——— 시월 스무날이 어머님 생신 아녜요? 그러니깐 열아흐랫날 가께요.”
 
35
“그럼 한 달두 더 남았게?”
 
36
“오늘이 초열흘이니깐 한 달하구 아흐레죠 머. 그렇지만 한 달 아흐레 잠깐 아녜요?”
 
37
“꼭 오우?”
 
38
“그럼요.”
 
39
준호는 진주의 얼굴을 말끗 건너다본다. 그러고는 돌르느라고 하는 말이 아닌 줄을 알고서야 배깃이 웃는다. 안심을 하여도 좋았던 것이다.
 
40
사랑에서 윤석이 혼자 저녁 먹는 것을 나가 보고 들어오던 할머니가 도란도란 나는 이야기 소리를 듣고 반겨하면서 방문을 연다.
 
41
준호는 마악 수저를 들고 첫술을 뜨는 참이었다.
 
42
“국서껀 또 식었을 텐데……”
 
43
할머니는 혼잣말로 그러면서 방으로 들어온다.
 
44
“얘야 온, 좀 데워 들여오들랑 아니허구서……”
 
45
“안직 그리 식지 않었어요.”
 
46
그러다 진주는 국그릇에 손을 대어보면서
 
47
“얼른 데워오까요?”
 
48
하고 준호더러 묻는다.
 
49
준호는 고개만 젓고.
 
50
할머니는 밥상 한편머리로 가 앉아 하도 귀여 못하겠는 듯이 준호의 밥 먹고 있는 양을 들여다본다.
 
51
“별안간 반찬이 없어서…… 이렇게 소밥(素食)을 대접해 어떡허나? 다신 처가에 아니 올까보군!”
 
52
찬이 없다는 건 겸사였다. 찬은 떡 벌어졌었다. 할머니는 준호가 그런 무안을 당하였으니 좀처럼 처가 걸음을 하려 아니할 것이 실상은 걱정이었다.
 
53
미상불 준호는 이 처가엘 다시 와 그 처남을 대하고 할 염의가 시방 같아서는 날 것 같지가 아니하였다.
 
54
“온 글쎄 그럴 도리가 있드람 ? 썩 마당으루 내려서서, 어서 오라구, 반갑게 맞아들이들랑 아니허구서. 처남이란 건 매부를 다아 참 칙사처럼 위해야 하는 법인데…… 그러나마 그 매부가 어떤 매부길래.”
 
55
준호는 다뿍 거북스러 고개를 숙이고 밥만 파고 있고.
 
56
“그 무슨 성미가 그렇게두 괄괄허담. 그 사람은 워낙 그것이 큰 험이어든. 꼭 그거 한가지가……”
 
57
“………”
 
58
“저두 맘으루야 매부를 무어 참 여간 귀여허구 소중히 생각허나. 친동생 진배없이 여기는걸. 늘 허는 말을 듣거나 눈치를 보거나…… 그러면서두 그 욱허는 승깔을 오늘은 못 참구서 고만.”
 
59
“………”
 
60
“그래 벌써 혼자서 뉘우치구 있을 거야. 그래 사죄를 와 허구퍼두 시방 부끄러 못오구 있지. 그 속 번연히 아는 배……”
 
61
“………”
 
62
“내, 내일 아침일랑 새벽같이 붙들어 가지구 와서 두 무릎 단정히 꿇려앉히구섬, 매부 어저껜 내가 잘못했스니 죽여 주오, 허구 빌게시니 해야지…… 아니 빌구 배기나. 아니 빌었단 나한테 곤장을 단단히 맞구라야 말텐데.”
 
63
옆에서 듣고 앉았던 진주는 곧 웃음이 터지려고 하는 것을 겨우 참는다.
 
64
할머니는 준호가 외톨 손자사위로서 다시 없이 사랑스럽고 소중도 하려니와 한편으로는 자별한 기대가 한가지 있는 것이 있었다.
 
65
할머니의 눈에는 준호가 그 유순하고 숫기 많은 천품이, 장차 자라서 집안(家庭)이라는 것을 등한히 할 사람이 아닐 것으로 보였다. 그는 매양 집안에 있어서 집안을 위하여 집안일이나 하면서 세상을 살아나갈 한 착실한 지아비 재목이었지, 엉뚱히 집안을 떠나 집안을 불고하고 천하일에 참여를 하여 서둘며 납뛰고 할 패기(覇氣) 같은 것은 타고난 것이 없었다.
 
66
천하일에 참여하고 서둘고 남뛰고 하느라고 집안을 떠나 집안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마침내는 신명(身命)을 그르친 지아비를 섬기었으며 아들을 두었던 할머니는, 손자사위의 그러한 성품이, 사랑하고 소중한 단 한 점의 혈육인 진주의 안온한 장래를 위하여 작히 다행스런 일이었다.
 
67
할머니는 성을 강씨라고 하고, 소공주골(小公主洞) 남진사의 부인이었다.
 
68
할머니 강씨부인이 아직 정정히 젊던 서른한 살 적, 고종(高宗) 이십일년(西紀[서기] 1884년) 갑신(甲申) 시월 열아흐렛날…… 이 날은 말할 것도 없이 수구파(守舊派)의 사대당(事大黨)이 김옥균(金玉均) 일파의 새 정부를 도로 없이하려고 창덕궁으로 원세개(袁世凱)의 청병(淸兵)을 이끌어들여 쿠데타를 일으킨 결과 개화당(開化黨)이 삼일천하로써 패를 당하고 정권은 다시금 민씨(閔氏)네 일파의 수중으로 돌아가던 그날이었다.
 
69
이 날도 남진사는 집을 나가려면서
 
70
“기대리지 마시오.”
 
71
하고 나갔다.
 
72
태연한 얼굴로 태연히 하는 말이었고, 배웅하는 강씨부인도 역시 태연히
 
73
“상심해 다녀오세요.”
 
74
하기는 하였다.
 
75
그러나 강씨부인은 가슴은 결코 평온할 수가 없었다.
 
76
죽으면 돌아오지 못할 테니 기다리지 말란 그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77
남진사는 평일에는 늦으면 늦겠다든지, 혹은 오늘은 돌아오지 못하겠다든지 하는 말로써 하여, 집안 사람의 기다리는 걱정을 덜게 하였었다. 그러던 그가 그저께 ——— 열이렛날 아침부터 그 기다리지 마시요란 말을 하였다.
 
78
농통스런 여자라면이거니와 강씨부인쯤으로는, 험난한 시절에 천하사에 참여하는 남편을 섬기는 몸인지라, 늘 거기에 대한 주의와 관심을 등한히 하지를 아니하였고, 그래서 은근히 어떤 큰일을 꾸미며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나마 기수 채고 있던 끝이라 남편이 전에 없이 이르기를
 
79
“기대리지 마시요.”
 
80
하는 말에서 그러면 오늘 드디어 거사를 하는구나 하는 짐작을 선뜻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81
과연 석양 때 경우궁(景祐宮)에서 남진사도 그 당의 한 사람인 개화당이, 민씨네 사대당의 낡은 주권을 엎어뜨리고 새 정부를 꾸미는 변이 일어났었다. 이것이 후세에 갑신시월의변(甲申十月義變)이라 이르는 우정국(郵征局) 쿠데타였다.
 
82
온종일과 밤새도록을 가슴 졸이면서 기다리던 강씨부인은 거진 새벽녘에야 무사히 돌아온 남편을 맞이하였다.
 
83
남진사는 흥분이 가시지 아니한 얼굴에 일변 흡족하여 하는 웃음을 지우지 못하였다. 그는 부인으로 하여금 술을 내오게 하여 서너 잔 거듭 마시었다. 그러나 문득 곤히 자고 있는 열한살박이 외아들 병수를 깨워 옆에 바투 앉히고
 
84
“어서어서 자라서 나라일 하렷다?”
 
85
“네에.”
 
86
소년은 목 잠긴 소리로 대답이었다.
 
87
“집안일이나 제 한몸만 생각하느라고 나라일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88
“가장 천하고 보잘것없는 자올시다.”
 
89
“큰일 앞에 주검을 두려워하는 자는?”
 
90
“천하에 졸장부올시다.”
 
91
“장부는?”
 
92
“모름지기 의(義)를 목숨보다 중히 여기고 천하를 위하여 내 한몸을 저바립니다.”
 
93
여기까지는 평일과 다름이 없었다.
 
94
남진사는 인하여 머리를 쓸어주면서
 
95
“병수야?”
 
96
하고 곡진히 부른다.
 
97
병수는 뜻밖이라 대답 대신 고개를 들고 부친의 얼굴을 본다.
 
98
“아버지 없어도 낙심 말구, 외로워 말구, 어머니 뫼시구 자라지이?”
 
99
“………”
 
100
“아버지의 신칙이 없다구 자라 졸장부가 되어서는 아니되렷다?”
 
101
“네.”
 
102
소년은 겨우 대답을 한다. 이 끝엣 두 가지 문답은 처음 일이었다.
 
103
또 남진사가 아들을, 적어도 교육하는 자리에서 그쯤 음성을 곡진히 한다던가 더우기 머리를 어루만진다던가 하면서 노골히 애정을 드러내며 애무를 한 적은 일찌기 없었다.
 
104
강씨부인은 옆에서 시중을 들면서 남편이 조모(朝暮)의 생사를 예측 할 수 없을 만큼 위험 절박한 용솟음 가운데 뛰어들었다는 것이 마침내 사실이라는 것과 그리고 기다리지 말라는 말이, 죽지 아니하면 돌아오게 될 테니라는 뜻인 것이 과연이었음을 확실히 깨닫지 아니치 못하였다.
 
105
남진사는 잠깐 눈을 붙이는 시늉하다, 이른 새벽에 총총히 집을 나가면서 역시 기다리지 말라는 말을 이르고 나갔다. 그리고 사흘째인 이날 ——— 열아흐렛날도 그렇게
 
106
“기대리지 마시요.”
 
107
하고 나가던 것이었었다.
 
108
남진사가 집을 나간 지 얼마 아니하여, 동북간방(東北間方) 창덕궁 대궐 쪽으로부터 총소리가 일었다.
 
109
총소리는 한참 동안 콩을 볶다 끊기고 끊겼다는 또 콩을 볶고 하기를 온종일 계속하였다.
 
110
밤이 들어서야 총소리는 아주 끊이고 말았다. 좌우간의 결말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그 침정이 가장을 사지에 보낸 집안 사람으로 하여금 한결 초조로운 불안을 느끼게 하였다. 참다 못해 강씨부인은 하인을 놓아 동정을 수소문하게 하였다.
 
111
“창덕궁서 일병이 대국병헌테 함몰을 당하고, 개화당은 쫓기어 북묘(北廟)로 상감을 뫼섰다워요.”
 
112
이것이 염탐 나갔던 하인의 첫 보고였다.
 
113
조금 있다 또 한번 내보내 보았다.
 
114
“대국병이 북묘를 엄습하고 상감을 빼앗어 저의 영문으로 뫼시고 개화당은 왜관(日本公使館[일본공사관])으로 쫓겼다워요.”
 
115
두 번째의 보고였다.
 
116
강씨부인은 이 두 차례의 보고로 이날 변의 윤곽은 짐작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차라리 모르고 있더니만 못한 노릇이었다. 남진사의 편이 패한 것이 번연한데 그의 안위는 알 길이 없기 때문이었다.
 
117
이때 남진사는 부상한 몸에 이중 삼중으로 실망과 비통한 가슴을 안고 일본공사관에 남은 동지들과 헤어져 홀로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118
이날 창덕궁에서 남진사는 용맹스럽게 잘 싸웠다. 일병 이백 명과 몇 십명에 불과한 개화당편의 역사가 이천 명의 청병을 맞아 싸운다는 것은 결코 수월한 싸움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라를 건지려는 정열에 불타는 개화당편의 젊은 역사들은 적을 두려워 아니하고 용감히 싸웠다. 그중에서도 남진사는 목숨을 아주 탁 내던지고 대담스럽게 싸웠다. 물론 결국엔 패하고 말기는 하였으나 적어도 싸우는 동안만이라도 남진사의 그렇듯 용감함이 얼마나 이편의 사기(士氣)에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119
남진사는 처음에는 왼편팔에 총탄을 맞았다. 그러나 굴함이 없이 그대로 싸웠다. 그리고 석양 무렵에 왼편 다리에 또다시 총탄을 맞고 쓰러져 몸을 지탱코 설 힘이 없을 때까지 그는 부라퀴로 싸워대었다.
 
120
정신없이 싸울 때는 몰랐으나 부상하고 쓰러져서야 그는 문득 일병의 싸우는 것에 주의가 끌렸다.
 
121
남진사는 전자부터 일병이 싸움에 다부지고 용맹하다는 말을 듣기는 하였으나 실지로 보자니 미상불 빈말이 아니었다.
 
122
대단히 용맹하였다. 특별히 단병접전에서는 일병 하나가 능히 청병 너댓씩은 대적해내었다. 원체 청병이 수효가 많기 때문에 일병은 하릴없이 하나둘 연방 쓰러지기는 하던 것이나 그래도 조금치도 겁하지 않고, 악악 덤비면서 싸웠다. 청병은 떼로 와 덤비다가도 하나가 픽 쓰러지면 죄다가 물씬물씬 뒤로 물러나가는데 일병은 도무지 뒤로 물러설 줄을 몰랐다. 둘이고 셋이고 함께 덤비다가 그중 하나든지 둘이든지가 쓰러지면 죽는 놈은 죽는 놈이고 산 놈은 그냥 그래도 앞으로만 나가곤 하는 것이었다.
 
123
“희한스러! 용맹해!”
 
124
남진사는 처음엔 이렇게 탄복하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같은 전열(戰列)에서 같이 용맹히 싸우고 있는 개화당, 즉 조선 사람 역사들과도 함께 바라다 볼 때에 심중에 퍼뜩 한가지 의문이 솟는 것이 있었다.
 
125
‘우리는 저렇게 우리 나라를 ——— 조선을 위해서 싸운다지만 저네들 일병은? 대관절 무엇 때문에 저다지도 목숨 아까운 줄, 주검 두려운 줄 모르고 저다지도 투철히 싸우는 것일까?’
 
126
적지 아니한 충격이었다. 남진사는 급박한 싸움판인 것도 상처의 아픔도 다 잊고서 함빡 그 생각에 남져버렸다.
 
127
고개를 커다랗게 끄덕이기도 하다, 갸웃하고는 언제까지고 꼼짝 않고 생각만 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단 갑자기 고개를 설레설레 젓기도 하다, 이 짓을 무수히 되풀이하였다.
 
128
그러다 마지막 부상한 몸을 상체를 별안간 벌떡 일으키면서
 
129
“옳거니! 선생님 말씀이 옳았어. 청국이 늙은 범이요 아라사가 북방의 주린 곰이라면 일본은 어린 표범이니라고. 절절히 옳은 말씀이여. 일본인들 우리에게 야망이 없을까보냐고. 우선 그 힘을 빌려 쓰기는 하되 크게 경계는 해야 하느니라고.”
 
130
워낙 상처의 출혈이 많았던 탓으로 남진사는 미구에 혼절이 되었었다.
 
131
남진사는 개화당의 모모한 여러 동지들과 마찬가지로 때의 큰 선각자이며 혁신운동의 숨은 지도자 유대치(劉大致)의 문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동지들에 비하여 대치의 문하인으로는 매우 연천한 편이었다. 이를테면 후진인 셈이었다. 또 개화당에 가담하기도 그다지 오랜 것이 아니어서 이렇다 할 공로도 없으며 존재도 자못 미미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몇몇 두목엣 사람들은 남진사가 하여커나 녹록치는 아니한 인물인 것과 그래서 장차 한몫 쓰일 모가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진작부터 인정하고 있었다. 계제에 그러자 먼젓날의 우정국 거사에서와 오늘의 덕수궁 접전에서며 떨친 바 용맹으로 인하여 그가 실행적인 방면에 있어서도 대단히 요긴하고 미더운 동지임을 알게 되었었다. 그러하였기 때문에 우선 임시나마 흩어지게 하는 다른 아랫길 동지들 축에 넣지 않고 짐스런 부상자를 착실히 보호하여 창덕궁에서 북묘로, 북묘에서 다시 일본공사관으로 데리고 오기까지 한 것이었었다.
 
132
의원은 팔과 다리가 다 탄환이 뚫고 나가고 박혀 있지 아니하였다는 것과, 팔은 무사하겠으나 다리는 십상 병신이 될까 보다면서, 제독한 약을 뿌리고 고약을 붙이고 하였다.
 
133
치료를 받으면서 남진사는 두 번째 혼절을 하였고, 다시 정신이 들기는 김옥균(金玉均)을 비롯하여 상하 동지들이
 
134
1. 우선 일본공사를 따라 일본으로 피하여 갈 것.
135
2. 일본서 일본 정부와 교섭하여 유력한 병력을 보내도록 하여가지고 쉬이 다시 거사를 할 것.
 
136
이 두 가지 결정을 마악 짓고 난 참이었었다.
 
137
“그러니 남진사도 같이 가시겠지?…… 몸이 저대지 상했으니 좀 조심 되기야 하겠지만, 의원이나 하나 데리고…… 일본만 가면 양의(洋醫)도 많고 하니깐 상처는 염려 없으리다.”
 
138
김옥균이 일동이 일본으로 가기로 작정한 바를 설명한 후에 이렇게 남진사더러 청이랄까 권이랄까, 말을 하던 것이었었다.
 
139
핏기 없는 얼굴에 눈을 스르르 감으면서 잠깐 침음하는 듯하다가 남진사의 입에서는 의외엣 대답이 나왔다.
 
140
“나는 일본으로 갈 생각도 없으려니와 여러분이 다만 한때 피신을 가신다는 것은 모르되 끝끝내 일본의 힘을 끌어들여서 일 도모를 하시려 하시는데는 찬성을 할 수가 없읍니다.”
 
141
별반 공로도 없고 아랫길 동지에 지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일조에 그가 두목 축에 참예를 하게 된 것이나 진배없는 기회를 주는 것이거늘 일언에 감히 물리치다니, 그도 그려니와 오래도록 부동의 방침으로 지켜오는 개화당의 행동방략을 감히 불가한 것이라 하는 데는 방자스럽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좌중의 박영효·서광범·서재필 이하 다들 낯꽃이 일제히 달라졌다.
 
142
김옥균은, 그 역시 심중의 동요가 없지 못하였을 것이나 태연히 묻는다.
 
143
“무슨 연유로 ?”
 
144
“아까 대궐(昌德宮[창덕궁])서 일병이 접전하는 양을 보고 고옴곰 생각했읍니다. 대체 저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저렇게 목숨을 애껴 아니하고 용맹히 납듸면서 싸움을 하는고? 퍽퍽 죽어 넘어지면서도 기승으로 덤비면서 싸우지 아니했읍니까? 일병도 사람이어든 제마다 귀한 목숨이요 소중한 피가 아니겠읍니까? 왜 어째서 귀한 목숨을 버리고 소중한 피를 흘리면서 그대지 꿋꿋이 싸웁니까? 반드시 무슨 목적이 있을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우리네 조선 사람은 나라를 건지겠다는 목적이 있으니까 목숨 아냐 더한 것을 버리고라도 싸우는 것이 아닙니까? 밖으로는 우리 나라를 저의 속국으로 삼으려는 청국을 쫓고, 안으로는 썩은 민가네의 악정을 뿌리뽑고, 그래서 나라를 건져내자는 크나큰 목적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목적보다 가벼운 목숨을 아깝다 아니하면서 싸운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일병은? 일병이야 일본 사람이 아닙니까? 조선 사람이 조선을 위해 싸우는 판에 뛰어들어 일본 사람이 무슨 목적으로 같이 싸워 주고, 늘비하니 죽어 넘어지고 합니까? 설마 장난이야 아니겠지요?”
 
145
“어째 장난이람? 번연히 우리 조선 도와주자는 노릇 아니요?”
 
146
한 동지가 핀잔하듯 하는 말이었다.
 
147
남진사는 그를 돌아다보면서
 
148
“왜 도와주나요 ?”
 
149
“왜는 무슨 왜? 이웃 나라 정리로 도와주는 거지.”
 
150
“허어! 여니 사람과 사람끼리는 친구간의 정리라든지 혹은 의협심이라든지 그런 걸로 이해 상관 아니하고, 가사 목숨이 위태한 일이라도 나서서 도와주고 싸움도 가로맡아 주고 하는 수가 있지요마는, 나라와 나라 사이에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어떤 나라가 병력을 들여서 다른 어떤 나라를 도와주는 데는 반드시 제 나라에 그만한 이해상관이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임진왜란 때에 명나라가 국력에 뒷줄이 당기는 판이면서도 무엇 때문에 그 많은 출병을 해주었읍니까? 조선이 왜국한테 망하고 보면 순망치한으로 장차 환이 명나라에 크게 미칠 테니까 그래 상국(上國)의 의리를 내세우는 체하고 출병을 한 것이 아닙니까? 조선이 백번 망하드래도 왜국의 환이 명나라에 미칠 염려가 없었다면 단 백 명의 군사도 보내려 들지 아니했읍니다.”
 
151
좌중은 아무도 대꾸를 하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152
“청국이 늙은 범이요, 아라사가 북방의 주린 곰이라면 일본은 어린 표범이니라. 일본인들 우리에게 야망이 없을까보냐. 이런 말씀을 선생님께 하신 적이 있는데 들 들으섰는지요?”
 
153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기울이고 혹은 서로 얼굴을 보고 할 뿐, 김옥균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154
“그러니 힘을 빌려 쓰되 크게 경계해야 하느니라고 말씀은 하섰지.”
 
155
“일본은 자고로 조선에다 맹랑한 야망을 품어 내려온 나랍니다. 조선땅을 여간 탐을 낸 것이 아닙니다. 또 조선땅이 탐이 날 뿐만 아니라, 섬 중에서만 군색히 살기보다는 한바탕 중원 천지에 나가서 큰소리를 쳐보기가 소원입니다. 임진란의 괴수 풍신수길(豊臣秀吉)이가‘동양천지에서 잘났다는 놈은 제마다 중원 복판에다 한번씩 도읍을 해보지 아니했느냐. 이 수길이 이연(李淵)이나 철목진(鐵木眞)이나 주원장(朱元璋)이만 못하란 법이 어데 있느냐’이런 소리를 했답니다. 이만치 일본이란 앙뚱스런 종족입니다. 조선을 먹고, 먹은 조선을 드디고 건너가, 중원을 무찌르고 하자는 것이 일본 종족의 면면한 야망입니다. 임진왜란이 별 것입니까?”
 
156
“풍신수길이놈이 조선 사기찻종이 탐이 나서 그랬대지 않소?”
 
157
맨처음 남진사를 핀잔주던 백아무(白某)라는 동지가 입을 삐죽하면서 옆엣 동지더러 하는 말이었다.
 
158
남진사는 들은성도 않고 김옥균 말을 대하여 말을 잇는다.
 
159
“나는 오늘 대궐서 일병들이 접전하는 것을 보고, 놈들이 한 놈 한 놈이 제마다 풍신수길이 같다고 생각을 했읍니다. 종차로 여러분이 일병을 천 명을 청해 온다면 천 명의 풍신수길을 데려오는 것이요, 만 명의 일병을 청해온다면 만 명의 풍신수길을 데려오는 줄로 아서야 합니다. 그래도 그여히 데려오시겠읍니까?”
 
160
백아무라는 동지가 얼른 나서면서 시비조로
 
161
“곤달걀 지고 성 밑엔 못 가기지그려. 조선은 그럼 영영 망하고 말란 말이요 ? 원세개도 민가들도 그대로 우두커니 두고 보잔 말이요?”
 
162
“청국은 당정코 물리쳐야 하지요. 민가네 패 물론 다 쓸어내야 하지요. 그러나 그것을 일병을 데려다 하는 날이면 앞문의 늙은 범을 쫓자고 뒷문으로 어린 표범을 불러들인 거조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라사를 시켰다가는 그건 주린 곰을 불러들여 이 강산을 싹싹 핥게 하는 짓이나 다를거시 없고요.”
 
163
“아니 그러면……”
 
164
백모라는 동지가 마침내 얼굴에 핏대를 세우고 앞으로 나선다.
 
165
하는 것을 김옥균이 손을 들어 제지한 후에 천천히 남진사더러 묻는다.
 
166
“남진사의 말은 도대체 외국의 힘을 빌어가지고 독립을 도모하고 내정을 혁신하고 하는 것이 잘못이다 후환이 온다 그런 뜻인데, 그러면 당장 눈썹이 타는 이 국난을 뉘 힘으로?”
 
167
“우리 힘으로 하지요.”
 
168
“우리 힘?”
 
169
“백성이 있지 않습니까?”
 
170
“백성?”
 
171
“우리 나라 일은 우리 나라 백성을 데리고 하는 수밖에 없읍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 일은 우리 나라 백성을 데리고 해야만 합니다.”
 
172
“흥. 백성은 농사하라는 백성이지 정치(政治)에 참여하라는 백성인가?”
 
173
백모라는 그 동지가 빈정거린다.
 
174
남진사는 못 들은 체, 자기 할 말만.
 
175
“백성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개화당은 개화당 사람 몇몇이서 남의 나라 군대 ——— 일본의 병력을 빌어 청국 세력과 민가네를 쫓고서 상감을 뺏어 뫼셔다 새로 정부를 꾸미고…… 그러는가 하면 민가패는 청병을 끌고 와서 상감을 뺏어 뫼셔다 저이네 정부를 꾸미고…… 만날 이 짓들만 하고 있으니, 그것을 심하게 말하면 장난이요 좋게 말을 해야 고작 개화당이면 개화당 몇몇 사람끼리 개화당 일을 하는 것이요, 민가패는 저이들 일족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요 하지, 나라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뜻은 나라일이거니 하겠지요. 핑계는 나라일을 하노라 하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무슨 나라일이 됩니까?”
 
176
“백성을 데리고 하자니 백성이 응하고 나서 주어야 아니하오? 나라가 망해야 오불관언으로 구경만 하고……”
 
177
“백성이 죽어가야 오불관언으로 당쟁이나 일삼던 나라(政府)와, 백성을 노략질해서 호강으로 살던 벼슬아치들이 백성으로 하여곰 나라(國家)를 저바리게 한 것이 아닙니까? 우리 나라 백성은 백성이 나라를 돌아보려다가는 살 수가 없었읍니다. 나라를 의지하려 하나 나라는 빼앗어 가는 것은 있어도 주는 것은 없었읍니다. 자연 나라를 생각지 않고 나라를 떠나 제 홀로 살도록 궁리가 뚫리고 길이 들고 한 것이 아닙니까? 있어도 없으나 다름없는 나라, 무섭기나 하고 빼앗어 가기나 하는 나라, 그런 나라인데야 망하는 것이 그대지 애석할 것이 있겠읍니까?”
 
178
“그러니 남진사 말대로 시방 백성들이 그렇게 나라일에 등한한 것을 그 힘으로 일을 해보자는 말이 공연한 말이 아니요?”
 
179
“그렇지만 지금부터라도 백성은 우리들 선도자(先導者:指導者[지도자])가 잘할 나름입니다. 가르치면서 모아서 합심을 시키면 됩니다. 암만 본조 오백변 정사가 나뻐서 백성의 마음이 나라로부터 떨어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조선 백성이라는 혼백은 없어지지 아니하고 백혀 있읍니다.”
 
180
“해가에!”
 
181
“더디어도 허릴없지요.”
 
182
“그 짓을 누가 하고 있드람!”
 
183
백아무라는 동지의 자포적으로 쏘아붙이는 말이었다.
 
184
그 말을 받아 남진사는 단정적으로
 
185
“못하면 우리는 선도자 될 자격이 없겠지요.”
 
186
하여버린다.
 
187
좌중 여럿의 표정에 굵은 파문이 일었다. 이윽고 김옥균이 무겁게
 
188
“남진사의 주장도 일변 이치가 있기야 하지만, 내 생각 같아서는 지나친 천착이 아닌가 싶소이다. 일본이 반드시 조선을 먹자는 흑심만 있다고는 볼 수도 없지 아니하오? 더구나 지금은 병자수호조약(丙子 : 江華修好條件[강화수호조건])이 있고 한 터인데.”
 
189
“그렇지만 바로 얼마 전에 조선을 치자는 정한론(征韓論)으로 일본 조야가 시끄란했던 일도 생각해야지요. 남의 나라를 꼭 먹어야 할 판이고, 먹을 계제만 당했다면야 조약 같은 것을 거리껴 아니 먹고 말 것인가요?”
 
190
“글쎄 그런 억지가 없을 것은 아니겠지만,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신의(信義)라는 것이 노상 없으란 법도 또한 없는 것이니까.”
 
191
김옥균은 일본 정부의 요로 사람들과 민간 사람들이 여러 친지가 있었다. 또 일본공사 화방의질(花房義質)과도 깊은 교분이 있었다.
 
192
그런 인물들의 심히 호의적이요 별로 음험한 사심이 없어 보이는 언동으로 미루어 일본이 과연 조선을 저희의 속국으로 정복하여 버리려는 야망이 있는 것으로는 단정하기가 어려웠다. 역시 조선이 종래의 청국의 간섭과 중압으로부터 벗어나 한 실력 있는 독립국가로서 발전을 하여 나가야만 비로소 동양에 있어서의 각국간의 외교적 세력이 균형이 잡히는 동시에 서로간에 알력과 충돌 대신 평화와 우호관계와 그리고 골고루의 번영이 보전이 될 것이매, 그래서 일본은 발을 벗고 뛰어들어 열심히 일을 서두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옳은 생각인 것 같았다.
 
193
마침 유대치를 찾으러 나갔던 사람이 또다시 허행을 하고 돌아왔다. 집은 아주 빈집이고, 아무리 수소문을 하여도 알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대치는 이날 낮때부터 온데간데없이 종적이 사라졌었다.
 
194
다른 여러 사람도 여러 사람이려니와 이 길로 가서 대치를 만나 오늘의 느낀 바를 다 설파한 후에 더불어 앞일을 의논하렸던 남진사의 실망은 대단히 컸었다.
 
 
195
남진사는 집 문 밖에서 강씨부인을 불러내어, 밝는 날 하루에 살림을 대강 청장하고서 아들 병수를 데리고 뒤쫓아오라는 말을 총총히 이르고는 그대로 교군을 몰아 고향으로 내려갔다.
 
196
고향이라고 하지만 선산과 토지가 있을 뿐, 여러 대 전에 떠났었고, 원근간 일가친척도 없어 타관이나 진배없는 생소한 곳이었다. 그러나 고을의 원이 남진사와는 동문수학을 하였고, 시방도 절친한 사이여서 그의 두둔으로 몸을 피하여 있기엔 십상 안전한 것이 있었다.
 
 
197
갑신으로부터 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 십 년 동안에 한국 말년의 국운은 알아보게 더 기울었다.
 
198
노서아 공사 웨베르는 당대에 수완이 뛰어난 외교관이었다.
 
199
북경 있는 노서아 공사관 서기관 웨베르는 갑신 유월 임시로 조선에 파견되어 오자 손쉽게 한아통상조약(韓俄通商條約)이라는 것을 체결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을유(乙酉)년에는 정식으로 공사에 임명 되어 서울로 와 주재하면서 함경도의 부령(富寧)을 노서아에게만 개방한다는 조약을 맺었다.
 
200
웨베르는 그 안해가 또한 영리한 여자이어서 내외가 한가지로 궁중을 드나들고 정부의 요인들과 사귀고 하면서 교묘한 수완을 부리어 고종을 비롯하여 상하의 도타운 신임을 얻게 되었다.
 
201
이로부터 제정노서아의 동진정책은 한국 조정에다 녹록치 아니한 세력의 토대가 쌓여진 것이었다.
 
202
이리하여 청국과 일본 외에 다시 노서아까지 참여를 하여가지고 세 나라가 제마다 제 홀로 조선을 제 손아귀에 움켜쥐려 겯고트는 암약에 한국 궁정과 조정은 불길이 번쩍번쩍 이는 외교 싸움에 국제무대가 되고 말았다.
 
203
선잠이 덜 깨어 어리숙하기 짝이 없는 조선이었다. 주권이 있되 없으나 다름없는 조선이었다. 백성은 유순하고 조정은 무력한 조선이었다. 이런 만만한 것이 있을 데가 없었다.
 
204
극동에 있어서 조선을 얻는 자는 앞으로 동양 천지를 억누르고 어른 노릇을 할 수 있는 자였다. 조선을 잃는 자는 동양에서 쫓기고 마는 자였다.
 
205
한 덩이의 고기를 사이에 놓고 늙은 범과 어린 표범과 주린 곰이 저마다 저 혼자서 집어삼키려고 으르렁대는 이 싸움은 결국 동양 정복의 선수권을 결정짓는 싸움이었다. 써 맹렬할밖에 없는 것이었다.
 
206
세 마리의 맹수 사이에 충돌은 조만간 일고라야 말 것이요, 그러나 승리하는 자가 그중에 어느 자이거나 이씨조선의 한양조(漢陽朝)는 그 이전에 이미 운명이 결정되어진 코스를 밟을 따름일 것이었다.
 
207
내정은 내정대로 어지러웠다.
 
208
개화당을 무찌른 수구파에서는 민비를 중심으로 또다시 민씨네 일파가 세도를 부리었다. 조정과 궁중은 탐욕과 포학과 살상과 그리고 미신의 소굴로 다시 돌아갔다.
 
209
개화당의 갑신정변이 직접적으로는 실패를 하였다지만 간접적이나마 노상 아무것도 끼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조정이 영(令)으로써 민간의 의복제도를 간편하고 활동적인 것으로 개선시킨 것이며, 양식 병원 제중원(濟衆院)이 생긴 것이며, 지방으로부터 오는 세미(稅米)를 나르는 기선이 등장한 것이며, 더우기 육영공원(育英公院)이라는 이름으로 학교를 세워 신학문을 교수케 한 것이며, 이런 것이 주장 갑신정변의 은연한 여파였음엔 갈데없었다.
 
210
그러나 그런 것쯤의 개혁과 시책으로는 기울어진, 그리고 수구파의 등쌀에 더욱더 기울어가는 국운을 바로잡을 수는 없었다.
 
211
외직(外職)으로 나아가는 자 그 관직을 돈으로 사가지고 가지 아니하는 자가 드물었다. 간혹 아니 사가지고 가는 자가 있다면, 그는 권문의 자질이나 뒷줄 좋은 양반치들이었다.
 
212
외직으로 나간 자들은 저네에게 주어진 바 권한 안에서 벼슬을 분매(分賣 : 小賣[소매])하였다. 턱없는 세납을 받았다. 백성에게 무실한 죄를 씌워놓고 속죄의 값을 받았다.
 
213
연달아 흉년이 들었다. 그중에도 병술년의 흉년과 무자(戊子)·기축(己丑) 년의 가뭄은 유심하였다.
 
214
백성들은 최후의 길선에까지 쫓기었다. 그들의 앞에는 주검의 검은 구렁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215
‘어서 무슨 도리가 생겨야지!’
 
216
백성들은 절망 가운데서 문득 무엇인가를 막연히 기다렸다. 이 막다른 급박한 사태에 어떤 혁변이 오기를 기다리는 한 농민적인 본능의 발현이었다. 그것은 누구든 한번 손짓을 하거나 부르기가 무섭게 와하고 따라 일어설 마음의 노함이 무의식중에 익어서 있음을 의미하는 상태였다.
 
217
갑오년 정월, 전라도의 조그마한 고을 고부(古阜) 땅에서 동학 접주 전봉준(全琫準)을 두목으로, 동학꾼과 농민이 합치어 일어난 민란(民亂:反亂[반란])은 정히 농민들의 그 노함의 현실적 폭발인 것이었다.
 
218
그 이전에도 처처에 소규모하고 분산적으로 농민봉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이 고부의 갑오동학이란이 가장 규모가 컸고 겸하여 비교적 조직적인 것이었었다.
 
219
동학의 거사한 소식을 듣자 남진사는 당일 밤으로 백여 명 동지를 불러모아 가지고 아들 병수와 함께 고부로 달려갔다. 병수는 그 사이 벌써 이십세의 헌다한 장부로 성장이 되었었다.
 
220
갑신정변에 일단 실패를 보고 다리 병신까지 된 남진사였으나 뜻마저 꺾인 바는 아니었다.
 
221
십 년 동안 그는 청년들에게 신사상과 신학문을 가르침과 더불어 백성들을 일깨우기에 정성과 노력을 기울였다. 이천 석 추수의 재산을 절반이나 그 사업에 대었다.
 
222
백성들은 완고하였다. 몽매하였다. 그들은 좀처럼 남진사의 개화운동에 따르려 아니하였다. 경계하고 피하였다. 비방과 조소도 하였다.
 
223
남진사는 때마침 동학이 득세하여 많은 백성이 그리로 돌아감을 보고 자기도 즉시 동학에 들었다.
 
224
실상 남진사는 동학이 마음에 그다지 내키지가 아니하였다. 야릇한 주문을 외우고 괴상한 의식을 지내고 하는 것이 사위스런 미신 행위 같아서 자못 불쾌하였다. 그러나 백성을 얻기 위하여서는 나 한몸의 결벽쯤은 희생을 하여도 무방하였다.
 
225
남진사는 미구에 고을의 접주가 되었고, 삼사백 명의 남녀 동학꾼을 거느리는 데 이르렀다.
 
226
동학이, 싸우면 이기고 치면 빼앗고 하면서 고부를 비롯하여 부안(扶安)을, 전주를. 그러고는 일단 물러났다 다시 충청도로 해서 공주(公州)로 짓쳐 들어갈 때에는 그 세가 삼만에 이르렀다.
 
227
남진사는 이렇게 늘어가고 강하여 가는 세력을 보고, 백성이 힘이 있음이 역시 사실임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 힘으로써 서울을 무찌르고 우리 힘으로 우리 나라를 바로잡을 것을 확신하였다. 공주의 싸움에서 관군을 돕는 일병의 탄환을 맞고 말에 떨어져 운명을 하는 순간에도 그는 그 신념을 버리지 아니하였으며, 조용히 웃는 얼굴로 눈을 감았다.
 
228
조선의 농민봉기(農民蜂起)의 역사에 가장 빛나고도 큰 기록을 남긴 갑오 동학은 공주 접전의 패전으로 끝을 우선 막았다.
 
229
부친의 시체를 공주성 밖의 산중에 가장하고, 살아남은 동지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온 남병수는 인하여 관가에 잡혀 옥에 갇힌 바 되었다.
 
230
동학의 잔당은 잡히는마다 총살이었다. 병수도 총살을 면치 못할 사세였다. 남진사의 벗이던 원은 이미 갈려간 지 여러 해였었다.
 
231
강씨부인은 남은 재산의 절반을 헐어 원 이하로 육방의 이속(吏屬)이며 옥사정은 물론 심지어 통인과 급창이에게까지 듬뿍듬뿍 뇌물을 썼다. 일변 서울로는 연줄을 놓아 아들의 구명운동에 있는껏 힘을 썼다.
 
232
효과 있어, 병수는 놓여나와서 서울로 피신을 하였다. 관가의 문서에는 파옥(破獄 : 獄脫[탈옥])으로 적혔었다.
 
 
233
조선이라는 한 덩이의 고기를 탐내어 늙은 범 청국과 어린 표범 일본은 갑오년 유월 스무이튿날 새벽 아산(牙山) 앞바다의 충돌로써 마침내 싸움이 붙고 말았다.
 
234
어린 표범은 사나왔다. 늙은 범은 성환(成歡)에서 패하고 평양에서 패하고 정여창(丁汝昌)의 거느린 북양함대(北洋艦隊)도 패하였다.
 
235
싸움판은 만주로 옮아가, 구련성(九連城)과 여순이 함락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정월에는 위해위(威海衛)가 빠졌다.
 
236
일군은 승세를 몰아 북경을 무찌를 기세를 보였다.
 
237
청국은 하릴없이 항복을 하였다.
 
238
일청전쟁이 터지기 바로 전, 원세개가 서울로부터 도망하던 그날부터 한국 조정은 일본의 독천장이 되었다.
 
239
개화당은 좋을씨고나 하고 대원군을 떠받고 나서서 일병의 총검의 위세를 빌어 신정부라는 것을 조직하였다. 김홍집(金弘集)이니 박정양(朴定陽)이니 김윤식(金允植)이니가 모두 대신의 자리에 나아갔다.
 
240
신정부에서는 대소 이백여 가지의 이른바 혁신적인 시책을 차례로 반포하였다.
 
241
1. 공사의 문서에 개국기원을 쓸 일
242
1. 청국과의 조약을 파기할 것 파기하고, 개정할 것 개정할 일
243
1. 세계 열국에 특명대사를 파견할 일
244
1. 죄인은 범죄자 본인 이외에 그 가족을 연좌시키지 아니할 일
245
1. 문벌과 반상의 구별을 폐할 일
246
1. 평민에서 인재를 등용할 일
247
1. 과거제도를 폐할 일
248
1. 조혼을 금지할 일
249
1. 과부의 재혼을 금치 말 일
250
1. 공사간 노예제도를 폐할 일
251
1. 문존무비(文尊武卑)의 폐풍을 없앨 일
252
1. 백정·재인 등의 천대를 폐할 일
253
1. 과거 십 년 이내에 양반이나 관원이 백성에게서 빼앗은 토지며 가옥 같은 것 가운데 적확한 증거가 있는 것을 수사하여 원 소유자에게 돌려줄 일
254
1. 궁중으로부터 권신과 무당 판수를 몰아낼 일
255
1. 타성양자(他姓養子)를 인정할 일
256
1. 각 아문마다 외국인 고문을 둘 일
 
257
중요한 것을 추리면 대강 이러하였다. 또 그러한 혁신정책과 시설을 내세워 시행하기에 힘쓴 당로자들의 열의도 가상한 것이 있었다.
 
258
그러나 그것은 결국 방안에서 부는 피리였다. 노래가 백성의 귀에는 들리지를 아니하였다. 혹간 들은 자가 있다 하여도 그들은 이해할 줄을 아직은 몰랐다. 따라서 백성들은 노래에 화하여 춤추지를 아니하였다. 결국 갑오경장(甲午更張)이란 개혁은 정치가들만이 홀로 여섯 달 동안 불다 만 피리이고 말았다.
 
259
네 사람만 모이면 둘씩 둘씩 패가 갈리어 싸움을 하는 것이 조선 사람…… 개화당 안에도 그새 벌써 김홍집·어윤중은 대원군파, 박영효·서광범은 민비파, 이렇게 두 파로 분열이 생겨가지고 연방 갈등이 생기고 하였다. 일본의 세력을 업고 들어와 제 힘이라고는 없이 생겨진 일종의 허수아비 정부였다. 그런 것이 우환 중에 내부 분열까지 생기니 하는 일이 일답게 되어질 리가 없었다.
 
260
조그마한 일본이 노대제국 청국을 이겨 넘어뜨린 것은 노서아를 비롯하여 구미열강에게 큰 놀람이었다.
 
261
조선을 손아귀에 넣고 만주의 요동반도를 차지한 일본은 노서아의 극동정책에 대하여 마침내 현실적으로 목에 비수를 겨눈 격이었다.
 
262
노서아는 불란서와 독일을 추겨가지고 소위 삼국간섭이라는 것을 하여 일본이 청국에게서 배상으로 빼앗은 요동반도를 도로 빼앗아 청국에 돌려주었다. 일본은 원통하나 설마 한 마리의 어린 표범으로 북방의 곰 외에 두 마리씩 덤비는 맹수와 싸울 용기는 없었다. 의기양양하였던 일본은 어깨가 축 늘어졌다.
 
263
이 국제관계의 소장(消長)은 재빨리 한국 조정에 미치었다. 개화당의 친일파는 밀려나고 친로파(親露派)가 득세를 하였다. 박영효 일파는 역신에 몰려 일본으로 망명을 하였다. 개화당과 일본 세력에 눌렸던 민비와 그 일파는 기회를 타 웨베르와 손을 잡았다. 이완용·이범진 따위도 이때는 친로파였었다.
 
264
그렇지 않아도 악이 잔뜩 받친 일본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일본 공사 삼포(三浦)는 수비대와 검객을 몰로 궁중으로 들어가 고종을 협박하여 친로파를 쫓고 친일파의 정부를 고쳐 세우게 하였다. 이번에 민비는 몸을 피해 달아나다가 일인 검객에게 해를 입은 바 되었다. 물론 계획적으로 한 흉행이었다. 이것이 을미(乙未 : 高宗[고종] 32년, 西紀[서기] 1895년) 팔월 이십일의 변이었다.
 
265
민비…… 그의 국가에 저지른 죄상을 컸다. 그러나 국민은 외적에게, 이름이나마도 국모(國母)의 학살을 당할 이유를 가지지 아니하였다. 나라가 변변치 못하다는 비애는 있을지언정.
 
266
아무려나 신정부에서는 양력을 채용하고, 종두(種痘) 규칙을 반포하고, 서울에다 네 곳에 소학교를 세우고, 지방의 요지에 우편국을 설시하고, 군제를 고쳐 서울에는 친위대, 지방에는 진위대(鎭衞隊)를 두고, 연호를 건양(建陽)이라 정하여 이듬해 병신(丙申)년부터 시행하고, 그리고 머리 깎는 단발령(斷髮令)을 내리고 하는 등 비교적 실제적인 개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267
“이 목을 베어 바쳐도, 이 상투는 베지 못합니다.”
 
268
이러면서 경향의 완고한 유생의 무리와 백성들은 크게 단발을 분개하고 반대하였다.
 
269
여러 천년을 상투 있이 살아 내려온 백성이었다. 그들이 유일한 진리로 믿으며 생활의 유일한 지도이론으로 신봉하는 유교의 모든 경전 ——— 천자(千字)로부터 사서삼경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대문에도 상투를 깎고 맨대가리가 되어도 좋다고 가르친 대문은 없었다. 상투를 베는 자는‘중놈’이 있을 따름이었다. 지금에 상투를 베는 것은‘중놈’아닌‘중놈’이 되거나, 저 오랑캐 왜놈을 본뜨는 것이었다. 국모를 학살한 원수가 있는 왜놈이요, 국토를 넘겨다보는 왜놈이 아니뇨. 임진왜란에 전 강토를 짓밟으며 무고한 살육을 방자히 하고, 많은 재화와 백성을 노략하여 간 왜 놈이요, 그 전과 그 뒤에도 늘 변방을 침노하여 근심과 재앙을 끼쳐 준 왜놈이 아니뇨. 그런 왜놈을 본뜨며 그에 화하다니. 백성들로서는 미상불 펄펄 뛸 노릇이었다.
 
270
조정이나 지도자들은 일찌기 한번도 백성에게 외쳐 단발이‘중놈’이 되는 것도, 오랑캐의 풍속이나 왜놈에 화하는 것도 아님을 깨우쳐 준 일이 없었다. 백성들이 여러 천년 믿으며 지켜내려온 유교의 경전에 대신할 새 시대의 새로운 생활이 이념을 가르쳐 일깨워 준 일도 없었다. 그러고서 졸지에 낡은 것을 버리라고만 시키니 거기에 파탈이 생기지 아니할 수가 없던 것이었었다. 일반으로 백성들이란 소처럼 느리기는 하되, 확실히 걸을 줄은 알되, 말처럼 조급히 달리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인 것이었다.
 
271
쌓이고 쌓인 사회적 불평이 민비의 학살과 단발령을 도화선삼아 드디어 터져나고 말았다. 그들은 단발령도 친일파와 일본의 조종이라 하였다. 춘천을 맨 처음으로 중부와 남방 각지에서 국모의 원수를 갚아라, 상투를 베게 한 친일파의 목을 베어라 외치면서 폭동이 일었다. 의병이 일었다.
 
272
조정은 떨었다. 선유사(宣諭使)를 내려보내나 아무 효험이 없었다. 친위대를 파견하여 무력으로 진압을 시키기 시작하였다.
 
273
친위대가 지방으로 나가자 노서아 공사 웨베르는 공사관을 호위한다는 핑계로 인천에 있던 육전대(陸戰隊) 백 명을 서울로 데려왔다.
 
274
진작부터 기회를 엿보며 밀계를 꾸미고 있던 이완용·이범진(李範晋)들의 친로파의 무리는 일변 노병의 힘을 빌어 협박적으로, 일변 대원군이 그 손자 이준용(李埈鎔)을 세워 찬역의 난을 일으킨다는 참소로 꾀어 고종을 노서아 공사관으로 빼돌리는 데 성공하였다. 왕을 빼앗았으니 정권은 노서아와 친로파의 손으로 돌아가고. 친일파는 우 일본으로 도망을 가고, 더러는 난민과 반대당에게 죽고. 이렇게 잔망스럽고도 용렬스런 전쟁 ——— 쿠데타도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사실(史實)일 것이다.
 
275
한국의 내정에 대하여 미국의 손이 뻗히어지기는 우선 간접적이기는 하나 이 소위 아관파천(俄館播遷)에서 비롯하였다. 친로파의 배후에 친미파의 조력과 조종이 있었던 것이다.
 
276
건양(建陽) 원년(丙申[병신]) 가을, 일찌기 갑신정변에 미국으로 망명을 갔던 서재필이 특사(特赦)를 입고 돌아와 혁신운동을 시작함으로써 조선의 혁신운동은 한 새로운 에폭을 그었다.
 
277
서재필은 외교부 고문의 지위에 있으면서 관리들을 계몽시키는 한편, 조선말과 영문으로 독립신문을 발간하였다. 그는 거리에 나가 민중과 청년을 모아놓고 세계의 새로운 풍조를 설명하며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연설을 하였다. 민중과 청년들은 이를 환영하였다.
 
278
청국의 속국임을 자인하는 표적이던 서대문 밖 모화관(慕華館)에다 그 반대인 조선의 독립국임을 주장하는 독립문을 세우기로 하였다. 그리고 십일월 십사일에 독립문 정초식(定礎式)이 있었는데, 이날 독립협회가 조직이 되었다.
 
279
개혁과 자주독립에 열기를 가진 많은 청년들과 학생이 독립협회의 깃발 아래도 모여들었다. 학생은 주장 배재학당의 학생들이었고, 남병수도 거기에 빠지지 아니하였다.
 
280
배재학당 안에는 독립협회보다 조금 앞서 학생들로 조직된 협성회(協成會)라는 것이 생기어 있었다. 이승만·주시경(周時經) 들이 지도를 하였고 무시로 시국강연 연설회·토론회 같은 것을 열어 청년들의 신지식을 기르고 개혁정신을 고취하는 모임이었다.
 
281
병수의 혈관에는 그 부친 남진사의 혁명투사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또 어려서부터 늘 배운 것이 역시 혁명정신이었다. 그런데다 갑오 동학에서 실지로 투쟁을 얻은 귀중한 체험도 있었다.
 
282
길지는 못하나 협성회의 한동안은 병수의 진보적인 식견을 급속히 높이는 동시에 싸우려는 열기도 또한 비교적으로 높이었다.
 
283
독립협회의 외치는 소리는 젊은 패들로 하여금 진득이 학원 안에 머물러 ‘연습’을 하는 것에 만족하도록 허락치 아니하였다. 병수는 주저없이 동무들과 함께 독립협회로 달리었다.
 
284
독립협회도 초기에는 이완용 따위며 그 밖에 조정의 대관이라는 인물들의 회원이 섞여 있어 그다지 신통스런 것이 못 되었었다. 그것이 소장 회원들이 실제 운동을 하면서 회의 영도권을 잡게 되자 노후 회원과 불순분자들은 차차로 떨어져나가고 건양(建陽) 이년 가을 이상재·윤치호들이 서재필을 대신하여 회를 지도하면서부터는 회는 완전히 청년들의 것인 동시에 활동도 훨씬 더 활발하고 적극적이어졌다.
 
285
그들은 거진 매일같이 종로에 나가 청년과 군중을 모아놓고 백성들의 각성을 재촉하는 연설을 하였다. 토론도 하였다. 정부를 공격하였다. 나라가 목전에 망하고 있는 사정을 들어 국민의 애국심을 선동하였다.
 
286
또 신문은 신문대로 언론으로써 그것을 하고.
 
287
이렇게 독립협회는 외국의 병력을 빌어 총칼을 겨누고 궁정으로 돌격하는 대신 삼촌의 혀를 가지고 거리로 ——— 민중에게로 나아갔다. 반대당을 쫓고 정권 잡기를 급히 하는 대신 민중을 일깨워 그 여론을 끓어오르게 하였다.
 
288
효과는 컸다. 이 한때의 청년들과 민중은 혁신과 자주독립을 마치 쌀이 귀해진 때에 쌀을 걱정하고 나무가 귀해진 때에 나무를 걱정하듯이 걱정하였다. 거리나 가정이나 혁신과 자주독립이 이야기가 되지 아니하는 때가 없었다.
 
289
일찌기 정동에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라는 것이 있었다. 학교며 교회며 외교방면의 미국 사람과 친미적인 조선 사람과 그리고 조정의 현관들을 회원으로 한 한 사교단체였었다. 독립협회는 이 정동구락부가 변신을 한 것이었다. 그런만큼 초기에는 그와 같이 보수적 인물과 이완용 따위의 불순분자가 포섭되어 있었던 것이요, 그러나 그러한 인적 요소는 미구에 숙청과 도태가 되었다 하지만, 그 회 자체의 혈통(血統)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290
미국공사 알렌(朝鮮名[조선명] 安連[안련])이 무대감독이 되어가지고 미국 편의 선교사며 학교 관계자들이며 제중원 관계자들과 함께 독립협회를 등 뒤에서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힘써 원조하는 사이에 서울의 전기와 수도시설 경영의 이권이 미국인 실업가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평안북도 운산금광(雲山金鑛)이 역시 미국 사람의 것이 되었다. 미국공사관의 서기관 썬스는 궁내부 고문이 되었다. 운산금광에서는 거기에서 난 금으로 금화(金貨) 오십만 원을 궁중에 바치어 고종으로 하여금 입이 벌어지지 않지 못하게 한 일도 있었다.
 
291
학교를 세워 교육을 시켜 주고, 병원을 세워 의료를 하여 주고 하는 건 물론 고맙지 아니한 것은 아니었다. 경제적 원조도 물론 고맙다 할 것이었다.
 
292
그러나……
 
293
한 강국이 어떤 약한 땅을 무력으로써 정복하여 식민지로 삼는 것은 단지 무력적 정복 그것에 궁극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력적 정복 그 뒤에 있을 경제적 착취에 진실로 식민지 획득의 주장 목적이 있는 것이었다. 군대가 총칼로 정복을 하여 놓으면 자본가가 그 뒤를 따라와 공장을 세우고, 흔한 원료와 헐한 노동력으로써 상품을 만들어 이문을 남기는 것…… 결국 이것이었다.
 
294
자본가라는 것은 그러나 반드시 총칼 가진 군대의 뒤만 따라오는 것은 아니었다. 하느님의 사도의 꽁무니에도 따라오고, 학교 선생님이나 의사의 꽁무니에도 따라오는 것이었다. 그들이 의식적으로 데리고 오지야 않는다더라도.———
 
295
독립협회가 어떤 한 개의 끝장을 보지 못하고 중도에 흐지부지하고 만 것이, 친로파·친일파·사대당 들처럼 매국노(賣國奴)의 더러운 이름을 쓰기를 면하는 결과가 되었다면, 그의 몇몇 지도자들의 위태로울 뻔한 불명예를 위하여 작히 요행이었다고나 이를 것인지.
 
296
광무(光武) 이년(戊戌[무술]: 西紀[서기] 1898년) 시월 이십팔일, 독립협회는 종로 네거리에다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라는 것을 열었다. 국민대회(國民大會) 같은 것이라고 할 것이었다.
 
297
만민공동회는 행정의 개혁에 관한 일곱 가지 조항을 결의하여 가지고 그 자리로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 박정양(朴定陽)을 비롯하여 각부의 대신들을 불러다 놓고 그 개혁안을 실시하도록 정부에 육박하였다.
 
298
정부는 독립협회의 세력을 두려워하여 할 수 없이 만민공동회의 결의를 우선 실행할 약속을 하였다. 그러고는 십일월 사일 밤, 독립협회가 반란을 음모한다는 명목으로 경무청(警務廳)을 시켜 이상재 이하 간부들 열일곱 명을 체포하고 회의 문서를 압수하는 일방 독립협회를 해산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299
격분한 청년들은 경무청 앞으로 모여 거기서 다시 만인공동회를 열고 정부를 규탄하고 체포한 독립협회의 간부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300
체포된 이상재 이하를 재판소로 넘기었다. 재판소 앞으로 모여 여전히 그 석방을 요구하였다.
 
301
필경 민중은 승리하여 체포된 일행이 놓여나왔다.
 
302
민중은 그것으로 만족치 않고 계속하여 종로에서 시위의 집회를 열고 독립협회를 무고(誣陷)한 조병식(趙秉式)을 처벌할 것, 먼저의 일곱 가지 건의를 즉시 실행할 것, 독립협회 해산령을 취소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십오일부터는 자리를 인화문(仁化門) 앞으로 옮기고 소장(疏章)으로 직소를 하면서 기세를 올리었다.
 
303
십일월 이십일일, 이날도 인화문 앞에는 만민공동회가 열리어 있었다. 이 열중하여 있는 민중을 별안간 수백 명의 폭도가 엄습을 하였다.
 
304
난목수건으로 테머리를 질끈질끈 동이고 날아갈 듯 감발짚신을 신고 손에는 저마다 몽둥이, 대창, 장검을 들고, 그중 몇몇은 육혈포를 들고 한, 수백 명의 폭도는 아우성을 치면서 만민공동회를 습격하였다.
 
305
독립협회의 세력이 나날이 커감을 본 정부에서는 며칠 전부터 이기동(李起東)을 시켜 지방의 등짐장수패(褓負商패)를 불러올렸다. 구실인즉은 등짐장수패의 관리부서였던 상리국(商理局)을 부활한다는 것이었었다.
 
306
천여 명이 모였고 그들을 소위 황국협회(皇國協會)라는 이름으로 갑작 조직을 하여가지고 정부는 폭력으로써 독립협회의 기세를 꺾으려 한 것이었었다.
 
307
대창과 몽둥이라고는 하지만 아뭏든 무장을 하였고, 또 조직적인 습격에 대하여 독립협회편은 창졸간 맨주먹으로 어떻게 하는 수가 없었다.
 
308
일순간 수라장이 되었다. 독립협회편의 많은 사람이 상하였다. 그러나 독립협회편은 용렬하지 않았다. 맨주먹으로 혹은 돌을 집어던지면서 대항을 하였다. 대담히 육박을 하여 적을 덮쳐누르고 그 가진 바 무기를 빼앗아 유효하게 쓰는 사람도 있었다.
 
309
병수는 몽둥이 하나를 빼앗을 수가 있었다. 다른 무기를 빼앗은 사오명의 동지와 함께 병수는 전위가 되어 앞으로 짓쳐나가면서 적을 막 무찔렀다.
 
310
싸움은 밀치락달치락하면서 서대문 밖 감영 앞으로 벌어져 나갔다.
 
311
이 싸움은 날이 저물면 제물에 정전이 되고 밝으면 다시 어울리고 하여 여러 날 동안 계속이 되었다. 고종이 친히 궐문 밖에 나와 대신들과 각국 사신들이 배석한 자리에게 군민이 한몸이 되어 혁신을 도모하라는 유고와 더불어 양편을 화해시킴으로써 겨우 싸움은 종말을 지은 형편이었다.
 
312
병수는 이 유고의 날에 참예를 못하고 제중원에 누워 상처를 치료받고 있었다. 그는 둘쨋날 남대문 밖 싸움에서 몸을 상하였었다.
 
313
얼마 동안의 치료로 대창에 찔린 외상은 합창이 되었으나 몽둥이로 옆구리를 맞은 것은 필경 내종이 되어 마침내 생명을 빼앗고 말았다.
 
314
병원으로부터 집으로 나와 누웠다 일었다 하면서 시름시름 앓기 일 년. 그러다 기해(己亥: 光武[광무] 3년) 가을에는 병이 와락 기울면서 인하여 세상을 떠났다. 겨우 이십오 세의 아까운 나이로.
 
315
그의 임종에 임신 칠 삭의 안해를 불러앉히고 모친 강씨부인더러랑 요행 사내자식이거들랑 나라에 바쳐달라는 유언을 하였었다. 한 것이 해산을 하니 계집아이 ——— 지금의 진주였다.
 
316
그 전전해 정유년에 아들의 뒤를 좇아 도로 서울로 이사를 해왔던 강씨부인은 이듬해 경자(庚子) 이월 며느리가 해산을 하고 몸 추기를 기다려 또다시 고향으로 내려와 우금 오늘에 이르른 것이었었다.
 
317
나라일에 몸을 바치는 남편을 섬기고, 아들을 받들고 하는 안해였으며 어머니였음으로 하여 이런 파란과 곡절을 치르면서 생애가 상심으로 일관한 강씨부인이었다. 작히 자신의 지난 바를 여겨 사랑하는 오직 한 점의 혈육 진주로 하여금은 그런 고난은 겪지 말기를 바람도 노상 무리는 아닐 것이었다.
 
318
강씨부인은 물론 일찌기 남편 남진사면 남진사, 아들 병수면 병수의 하는 일에 대하여 간섭을 하거나 불평을 한 적은 없었다. 여장부답게 나서서 적극적으로 조력은 하지를 못할망정 그것을 말리며 방해를 한 적은 없었다. 장부로 떳떳한 일이라고 생각하였었다. 그러므로 만일 손자사위 준호가 얌전히 가정이나 지킬 인물이 아니어 보였더라도 섭섭해하거나 그런 자리를 택한 것을 불만히 생각할 리는 없었다. 다만 보아하니 숫기 많고 얌전스런 것이 집안을 지키며 살림에 착실한 재목인 것 같아서 아무려나 다행이로다고 하는 것일 따름이었다.
 
 
319
진주가 새서방 준호더러 꼭 가마고 단단 언약을 한 시월 열아흐렛날.
 
320
오때가 훨씬 겨워서.
 
321
향교골 준호의 집에서는 마당에 차일을 드높이 치고 안팎으로 동네 남녀가 그득히 모여 들끓었다. 오직 한 포기 있는 일가인 준호의 외숙 내외와 아이들도 새옷을 갈아 입고 와서 있었다.
 
322
부엌과 과방(菓房)에는 음식이 그득그득히 쌓이고, 일변 장만을 하느라고 벅적 바빴다.
 
323
몸집 커다란 박씨부인이 총지휘를 하느라고 모처럼 행주치마를 두르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이 사람 붙잡고 단속, 저 사람더러 재촉하기에 사뭇 수고로왔다.
 
324
정녕 큰 제사가 아니면 경사겠다.
 
325
그러나 이 집에 시월달에 이다지 떠벌릴 큰 제사는 있지 않았다.
 
326
그렇다면 환갑잔치나 혼인이겠는데, 내일이 박씨부인의 생일은 기라도 환갑은 아니다.
 
327
혼인?
 
328
자녀라야 외톨로 준호밖에 없고, 그의 혼인은 지나간 봄에 치르지를 아니하였던가 그러나……
 
329
집 앞 들판을 건너 남쪽으로 있는 범고개라는 야트막한 고개로부터 한 호화로운 행렬이 넘어오고 있다. 큰 백마에 분홍 두루마기 남쾌자를 입은 조그마한 초립동이가 올라앉아 앞을 서고, 그 뒤로 가마에 호피 덮은 팔패 교군이 따르고, 그 뒤에 부담마의 수모가 지삿갓 쓰고 따르고, 그 뒤로 남바위에 풍안(風眼 : 眼鏡[안경]) 잡순 샌님이 남여(籃輿) 위에 높이 앉았고, 그 뒤로 혼수함(婚需凾)을 비롯하여 농바리짐과 이바지짐이 열댓이나 따르고…… 누가 보아도 신부집에서 신랑집으로 오는 신행길이요 갈데없었다. 거기다 고개를 넘어서면서는 전립전포(戰笠戰布)에 청사초롱 메고 신랑 신부 양편으로 갈라선 나졸이 일제히
 
330
“어 ― 구부허 ―”
 
331
하고 견마성을 아뢰니 더구나 의심할 여지도 없는 것이었다.
 
332
견마성 소리가 들리자 집안에서는 신행길이 들어온다고 새로이 동요가 일면서 바빠들 하고.
 
333
성급한 여인네들과 아이들이 한떼 우하고 대문 밖으로 몰려나간다.
 
334
등대하고 있던 무당이 대문 앞에다 짚으로 불을 놓고 동동동 징을 울리면서 살막이를 한다.
 
335
집 문앞에서 구경을 하면서 여인네들이 주거니받거니 지껄이는 소리였다.
 
336
“참 혼란스럽기두 허이. 이바지짐 말구 농바리짐만 여덟 짐이지?”
 
337
“이번 색시넨 만석군이래.”
 
338
“건데 색시가 지랄장이래.”
 
339
“아냐. 서대린(庶足[서족] :庶族[서족])데 막 나믄서 본실댁이 안아다 길렀대.”
 
340
“아뭏든 무슨 흠이 있던지 있은깐 속내 빤히 알믄서 이 혼인을 허지.”
 
341
“그런 게 아니구, 인물이 아주 천하 박색이래. 그래 과년이 차두룩 혼처가 아니 나서서 삼백석거리 주기루 방을 돌렸드래. 그러자 이 집이서 청혼을 하니깐 얼른……”
 
342
“그러나저러나 이번 며느린 또 며칠이나 부질 헐려누?”
 
343
“이번야 삼백석거리가 붙었는걸 만만히 그렇게 되나.”
 
344
“신랑이 도망을 뺐드라구?”
 
345
“읍내 학교랑 뒷산에서 붙잡어왔대는군.”
 
346
“장가 세 번만 가믄 정승 팔자보담 낫대는데 으째 마대!”
 
347
“어려두 먼첨 색시허구 금실이 여간만 아니 좋았더라는구면.”
 
348
“신정이 구정만 못허드라구, 호호호.”
 
349
“신행길은 들판길을 다 지나 마침내 동네 앞을 동서로 뻗친 신작로로 올라섰다. 거기서 십여 보 서쪽으로 오면, 신작로가 집으로 꺾여 들어오는 고무래정자의 소로와 닿는 곳이다.
 
350
구경하는 사람들이 호화로운 신행길에만 눈이 쏠려 미처 못 보았으나, 신작로의 서편 동구 안으로는, 범고개에 신행길이 나타나던 거의 동시에 한 채의 네패 교군한 가마가 또한 나타났었다. 중년의 여인 하나가 가마 옆에 따르고 뒤에는 두어 짐의 이바지짐이 따르고 하였다.
 
351
신행길이 신작로에서 드디어 고무래정자의 소로로 내려섰을 때 가마의 일행도 바로 고무래정자 길머리까지 당도하였다.
 
352
신행길은 선두는 이미 고무래정자 소로로 들어섰으나 꼬리는 저편짝 들판 길에 가 물려가지고 신작로를 횡단하고 있는 참이라 가마의 일행은 신행의 신작로 횡단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듯 그 자리에 가 멈추어 섰다.
 
353
이윽고 신행길의 맨 꼬리까지 신작로의 횡단은 끝이 났다. 길 트이기를 기다리고 멈추어 섰던 것이라면 가마의 일행은 당연히 전진을 하여 그곳을 지나서 동쪽으로 갔어야 할 것이었다.
 
354
그러나 가마의 일행은 가마 옆에 따랐던 중년의 여인이 가마의 휘장을 벗기고 가마 안과 무슨 이야기를 잠깐 주고받는 듯하더니, 인하여 가마머리가 일백팔십도를 돌면서 오던 길을 되짚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355
만일 사람이, 그중에서도 젊은 여자가 아무 때 아무 곳에서나 마음대로 울음을 울 수가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면, 시방 저 오던 길을 되짚어 돌아가고 있는 가마 안으로부터는 자못 애절한 울음소리가 울리어 나왔을는지도 모른다.
 
 
356
(第一部[제일부] 終[종])
 
357
〈朝鮮代表作家全集[조선대표작가전집] 第[제] 8 卷[권], 서울타임스社[사], 1947〉
【원문】혁명가(革命家)의 후예(後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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