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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은리 추원재(追遠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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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군(任實郡) 재실(齋室) # 추원재
최근 3개월 조회수 : 7 (4 등급)
【향토】
(게재일: 2024.01.04. (최종: 2024.01.02. 22:23)) 
◈ 삼은리 추원재(追遠齋)
오수역에서 동계로 향하는 13번 국도상 삼계면 진입 후 삼은, 뇌천표석에서 좌회전하여 전주 광양 간 공사현장으로 나뉘는 갈림길 정면 둥근 형태의 집 옆 소로를 따라 밭과 숲을 500여m 헤치고 올라가야 있다. 추원재(追遠齋)는 이 지역에 거주하는 풍산 심씨의 입향조 찰방농와(察訪 聾窩) 심언통(沈彦通)의 재실이다.
목   차
[숨기기]
삼은리 추원재(追遠齋)
 
오수역에서 동계로 향하는 13번 국도상 삼계면 진입 후 삼은, 뇌천표석에서 좌회전하여 전주 광양 간 공사현장으로 나뉘는 갈림길 정면 둥근 형태의 집 옆 소로를 따라 밭과 숲을 500여m 헤치고 올라가야 있다. 추원재(追遠齋)는 이 지역에 거주하는 풍산 심씨의 입향조 찰방농와(察訪 聾窩) 심언통(沈彦通)의 재실이다. 재실의 담은 없고 맞배지붕 아래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지었으며 여타 재실에 비해 처마를 길게 늘여 지었다. 상량의 ‘숭정기원후오정유(崇禎紀元後五丁酉)’를 보아 고종 34년(1897)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 위쪽의 칸에는 삼성재(三省齋)라는 글씨가 있는데 규격은 가로 74cm에 세로 39cm로 편액이 걸려 있다. 또한 재실 안에는 농와부(聾窩府), 군분암기(君賁庵記)의 현판 3개 걸려있다.
 
 
 
 

1. 삼은리 추원재기(追遠齋記)

 
남원[帶方]의 북쪽, 삼계의 동쪽에 있는 삼산(三山)은 은연하게 솟아 있으니 여러 산 가운데 중간 기슭이 바로 농와(聾窩) 우리 선조의 의리(衣履)를 묻은 곳이다. 중종께서 재위하실 때에 내금위(內禁衛)와 외관(外官)으로 찰방(察坊)까지 지냈다. 불행히 기묘사화를 당해 천리나 떨어진 남쪽으로 물러나 시를 지으며 예법의 내용을 도야(陶冶)하였다. 남원의 말천(秣川)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고 산림으로서 시서(詩書)를 즐기며 기꺼이 은거하면서 번민하지 않았으니350) 군자(君子)와 같았다.
 
공의 탁월한 절의(節義)에 대해 임금에게 알려져 우리 임금님께서 병자년에 특별히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하고 분황(焚黃)하라고 하여 장차 제사를 모시게 되었는데 재각(齋閣)이 한 채 없어서 자손들이 한스럽게 생각한 지 오래되었다. 지난 정유년 봄에 남원과 임실의 여러 족인들이 비로소 재물을 모아 짓기 시작하여 사람들에게 묻고 상의하였는데 그 뜻이 같았다.351) 이에 구릉의 목재를 베고 새로 동우(棟宇)를 세우고 동서에 방 두 곳과 중간에 대청(大廳)을 두었다. 기와벽돌[瓦甓]로 거듭 덮고 몰아치는 비바람을 막을 수 있도록 하였다. 자손들이 와서 모의하니 1년도 못되어 공사를 마치고 낙성을 알리게 되었다.
 
아! 공의 업적이 이렇게 두텁구나. 송백(松柏)을 바라보며 서리와 이슬을 밟노라니 슬프고 두려운 마음이 불현듯 사모하는 마음 가운데 나오는구나. 재각에 이름이 없어 소홀하게 여기는 것처럼 보일까 해서 지난 갑진년 봄에 안동(安東) 상공(相公) 김성근(金聲根)씨가 ‘추원(追遠)’이라고 두 글자를 써서 편액하여 걸었다. 그런데 아름다운 편액에 본기(本記)가 없을 수 없어서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였다. 나 또한 글에 능하지 않아서 사양하다가 그만 졸렬하다는 것을 잊고서 외람되게 대략 기술하여 뒤에 볼 사람들을 위해 쓴다. 오호라, 감히 명(銘)을 하기를,
 
 
濟濟賢良  장하도다. 현량한 이여!
贊襄中朝  중조(中朝)를 도우셨네.
北門風雨  북문에 몰아치던 비바람
勇退來潮  밀려오는 조수에 용퇴하네
夢驚石枕  돌베개에 꿈이 깨어
望依九霄  높은 하늘 바라 의지하네
秣川幽庄  말천의 아득한 전장(田庄)
終世逍遙  살아 생전 소요하였으니
松亭一麓  소나무 정자 한 기슭에
于以妥靈  영령이 깃드시나.
四時烝嘗  사시(四時)에 제사 올리리니352)
芬苾有馨  그 향기 향기로우리라
派分雲南  계파가 나뉘어 남쪽에 구름같은 후손
陸離紫靑  자색 청색 관복이 반짝반짝 빛나네
效忠篤孝  충효를 돈독히 본받으니
以是式刑  모범이 되었구나.
歲在丁酉  정유년에
是齋經始  재각을 비로소 짓으니
棟宇鞏固  튼튼하게 지은 건물
不儉不侈  검소하지도 사치스럽지도 않구나
庭梧園竹  뜰안에 오동나무 대나무
鸞停鵠峙  난새와 고니 같은 후손들이여353)
追感遠慕  추원하며 감모하는 마음을
百世以竣  백세토록 영원하리
 
고종 즉위 42년 을사년 8월 하한(下澣)에
후손 진표(鎭杓)가 삼가 글을 짓다.
 
 
 

1.1. 追遠齋記

 
帶方之北 磊溪之東 三山隱然聳窣 盖諸山之中麓 乃聾窩先祖 衣藏之所也 粤在中廟盛際 以內禁衛 外官至察坊 而不幸遭己卯之禍 千里南退之日 有詩贊陶謨夷禮之句 入南原之秣川晦跡 山林以詩書自娛其甘之 遯世無憫 君子同徑矣 公之節義卓犖入於啓聞今上丙子 特贈吏曹參議 焚黃之筵 將祀之辰 以無有一齋閣之所 子孫齎恨久矣 去丁酉春 南任諸族 營始鳩財 徇謀僉同 爰伐邱材 新建棟宇 東西兩房 中間大廳 瓦甓重覆 上雨㫄風 肯構功之 子來孫謨 減將不朞 功迄告成 噫先公之積厚於玆感矣 且夫瞻松栢履霜露 悽愴怵惕之心 抑亦感時寓慕中出來也哉 齋之無號 似涉疏忽 故去甲辰春 安東金相公聲根氏 書額追遠二字 揭而華楣 然不可無本記 請余以弁其首 余亦不能以不文爲辭 遂乃忘拙僭踰 略敍梗柒 以啓後之覽者 嗚呼 敢爲銘曰
 
濟濟賢良 贊襄中朝
北門風雨 勇退승潮
夢驚石枕 望依九霄
秣川幽庄 終世逍遙
松亭一麓 于以妥靈
四時烝嘗 芬苾有馨
派分雲南 陸離紫靑
效忠篤孝 以是式刑
歲在丁酉 是齋經始
棟宇鞏固 不儉不侈
庭梧園竹 鸞停鵠峙
追感遠慕 百世以竣
 
上之卽祚 四十二年 乙巳 八月 下澣 後孫 齋卽 鎭杓 謹識
 
 
 

2. 삼은리 추원재 농와(聾窩) 부군(府君) 분암기(墳菴記)

 
북문에 비바람 몰아치기 전에 돌베개를 베고 누었는데 놀라 꿈에서 깨었으니 나의 13세조 농와(聾窩)354) 부군(府君)은 기묘의 징비(懲毖)를 일으킨 것이다.
 
공은 풍산군(豊山君) 심구령(沈龜齡)355)의 고조부로, 중종 재위 연간에 벌열한 가문의 자제였다. 첫 벼슬살이 금천찰방(金泉察訪)을 그만두고 천 리 먼 곳으로 은둔하여356) 삼계의 돌을 뚫어 은거하다가 묻혔다.357)
 
대개 무덤이라는 곳은 자손들이 백세토록 그리워하며 추억하기 위한 곳이니358) 진씨가 ‘사정(思亭)’을 지은 까닭이다. 그러나 원야(原野)의 예법은 가묘(家廟)에서 사라져도 한 해에 한 번 제사를 사대부가에서는 행하고 폐지하지 않는 것이다. 공의 묘각의 규모도 대략 준비하여 치제(致齊)하고 재숙할 수 있는 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럭저럭 지내다가 미처 겨를이 없었는데 용순(龍淳)이 여러 종족들과 함께 묘지터에 대해 의논하여 네 칸의 재각을 짓기로 하였다. 정유년 3월에 시작하여 10월에 공역(功役)에 이르러 완공되었다. 여러 종인(宗人)이 용순(龍淳)이 처음부터 끝까지 힘을 다하였기 때문에 그런 일에 대해 기록하는 글을 부탁하였다.
 
아! 공의 아름답고 의로운 언행에 대한 문적들이 산일되어 지금 여러 종인들과 함께 고을에 전하고 있는 유풍(遺風)과 여운(餘韻)을 강구하기에 힘썼다. 연로하신 분들이 가지고 있는 남아있는 운율과 유풍을 힘써 강학하고자 하였다. 연로한 사람이 가지고 있다면 그 한 가문의 은혜와 권세가 높게 빛나는 날에359) 가라앉아 멀리 떠나 은거하여 궁핍하게 살면서 죽을 때까지 당파 속에서 해를 입지 않았으니360) 그 기상과 규모를 영원토록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선생이 백향산(白香山)의 팔관십육자(八關十六子)361)로서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이 을사년(乙巳)에 동생 괴마(槐馬) 임백령(林百齡)의 묘석(墓石) 표문에 대해 이런 뜻을 발휘하였다고 할 만하다. 내가 공의 후손으로 제주(祭酒)를 따르고 향을 피우며362) 정성껏 하나의 거짓됨 없으니 개연한 생각이 든다.
 
고종 병자년에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되고 포상되었다.
 
고종 즉위 34년 정유년
후손 참봉 심용순(沈龍淳) 글을 짓다.
 
 
 

2.1. 聾窩府君 墳菴記

 
北門風雨前 宵事石枕時 時夢亦驚 我十三世祖 聾窩府君 己卯懲毖之作也 公以豊山君 諱龜 齡爲高祖 當中廟盛際爲 閥閱子弟而 莁仕官 金泉察訪而止千里 好遯穿三溪之石菟裘而牛眠焉 盖墓者貌也 子姓之百世羹墻所託而 甄氏思亭之所 以作也 而原野之禮 殺於家廟歲一之祭士大夫家行之不廢 公墓儀略備而致祭 齋宿之舍 因循未遑龍淳與 諸宗謀趾墓而營立四楹之室 經始於 丁酉 三月 至十月 功役告訖諸宗以龍淳始終致力 屬以記事之文 嗚乎 公之嘉言懿行 文籍散逸 今欲與諸宗講勉其遺風餘韻之傳於鄕國 耋老者則有之 方其一門恩權隆赫之日 浮沈遐郵 隱約歿身 偉然爲元祐完人者 其氣像規模可想見於百世而奇蘆沙先生 以白香山八關十六子林石川 乙巳槐馬表墓石則 庶可謂發揮此意矣 我爲裔於公者 灌鬯焄蒿誠一無僞之際 慨然其有思乎 今上丙子 褒贈吏曹參議
 
上之卽祚 三十四年 丁酉
後孫 參奉 龍淳 記
 
 
 

3. 삼은리 추원재 추원재 중수기(追遠齋重修記)

 
무릇 물건이라는 것은 새 것이 성(盛)하고 오래되면 쇠하는 것이니 대개 물건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임실[雲水]의 남쪽, 삼계(三溪)의 동쪽에 있는 삼은리(三隱里)의 분토동(粉土洞)에 재각이 있는데, 그 이름이 ‘추원(追遠)’이다. 순천김씨 임실파가 재계(齋戒)하는 곳이다.
 
대들보를 올린 것이 숭정(崇禎)후 4년이고 이름을 지은 것이 지금 360여 년이었으니 그 쇠락함은 당연한 것이다. 여러 종중이 이로써 근심하여 머리를 모아 도모하니 모든 의논이 하나로 모아졌으니 중수 한 가지 일이었다. 그러므로 계사년 9월에 시작하여 다음해 2월을 넘겨 공사를 마쳐 이렇게 재각과 집이 외연하게 우뚝 서게 되었다.
 
재(齋)라는 것은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중수하려는 곳이다. 옥(屋)이라는 것은 팽임(烹飪)하는 곳이니 옛터에 새로 지은 것이다. 그 경비는 석재(昔齋) 동구(東㧨)옹과 도산(陶山) 춘희(春熙)씨가 거출(巨出)하고 여러 자손들도 형편에 따라 다소 냈다. 그 감역은 춘희씨가 홀로 맡았으며 농헌(農軒) 동언(東彦) 등이 보조(輔助)하였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여러 자손들은 장차 이 재실에서 재계하고 이 재실에서 숭조돈종(崇祖敦宗)의 정의(情誼)에 대해 강학해야 할 것이니 부조(父祖)에게도 자손에게도 경사스럽고 다행스런 일이다. 무엇이 이보다 크겠는가?
 
갑오년(2014) 2월 일
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전문위원 북헌공(北軒公) 주손(主孫) 동주(東柱) 근찬
 
 

3.1. 追遠齋重修記

 
凡物之以新盛以舊衰는 是物之衆也라 雲水之南 三溪之東 三隱里之粉土洞에 有齋名曰 追遠者는 是順天金門 任實派 齋戒之所也인데 而以樑面有崇禎後四年 字放之면 距今爲三百六十餘年之多하니 其衰落은 理當然也라 諸宗이 以是憂之하니 鳩首思度하니 僉謀歸一者는 惟重修一事而已라 故로 以癸巳年 九月에 經始하여 越明年 二月에 畢工하니 於是焉 一齋一屋이 巍然特立이라 齋則爲俎豆之所 而重修者也요 屋則爲烹飪之所 而固舊址新建者也라 其經費는 昔齋東哲翁과 陶山春熙氏가 巨出之하고 諸子孫도 亦隨多少出之에 其監役은 春熙氏 獨當而 農軒東彦甫等이 輔助之也라 然則 自今以往으로 諸子孫이 將以斯齋而齋戒之하고 以斯齋而講崇祖敦宗之誼하리니 於父祖於子孫에 其慶幸이 敦大於此哉리요
 
甲午年(2014) 2月 日
前 韓國學中央硏究員 專門委員 北軒公 主孫 東柱 謹撰
 
 
 

4. 삼은리 추원재 중수기(追遠齋 重修記)

 
우리 선조 사직공(司直公) 이권(以權)께서는 단종이 왕위를 양보하는 계유년(1453)를 당하여 향촌으로 돌아오셨다. 그후에 봄가을로 이슬과 서리를 밟으며 선조를 추모(追慕)하기 위하여 이곳 삼계면 삼은리 산60번지 산아래 숙종 9년(1683)에 추원재(追遠齋)를 건립하였다. 재실(齋室)이 퇴락하고 묘역이 붕괴되어 자손된 도리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 정화사업추진위원회(淨化事業推進委員會)를 조직한 후에 도감(都監)에 동영(東英)을, 감역(監役)에 동진(東秦)을 선출하여 후손들의 헌성금(獻誠金)으로 준공되었다. 그 갸륵한 정성을 자손 만대에 영원히 귀감이 되도록 기술하고 다음과 같이 그 이름을 열거하노라.
 
신미년 1991년 월 일
종회장 종익(鍾益) 주연(柱淵)
 
 
惟我先祖 司直公諱以權께서는 端宗遜位를 當하여 田里歸來하셨다. 그 後春露秋霜에 先祖를 追慕키 爲하여 이곳 三溪面 三隱里 山六◯番地 山下 肅宗九年에 建立한 追遠齋이다. 齋室이 頹落하고 墓役이 崩壞되어 爲子孫으로서는 目不忍見으로 本淨化事業 推進委員會를 組織한 후 都監東英 監役東奏를 選出하여 後孫들의 獻誠金으로 竣工됨에 그 갸륵한 精誠을 子孫萬代에 永遠한 龜鑑이 되도록 記述하고 左에 그 名을 列擧하노라.
 
辛未年 一九九一年 月 日
宗會長 鍾益 柱淵
 
 

 
각주
350) 『주역』 〈대과괘(大過卦) 상(象)〉에 “연못이 나무를 죽이니 대과이다. 군자가 이로써 홀로 서 있어도 두렵지 않고 세상을 등져도 근심이 없다.〔澤滅木大過 君子以獨立不懼 豚世無憫〕”라고 했다. ‘대과’란 너무 뛰어난 것을
351) 『주역』 〈계사전 하〉 12장에 나오는 말이다.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서 순 임금이 왕위를 선양할 사람으로 우를 지목하고 말하기를 “사람들에게 묻고 상의하여 그 의견이 모두 같으며 귀신이 따라 순하다.〔詢謀僉同 鬼神其依〕”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러한 뜻이다.
352) 원문의 증상(烝嘗)은 약사증상(禴祠烝嘗)의 줄임말로 고대 종묘에서 지내던 시제(時祭)로, 주대(周代)에는 약은 여름 제사, 사는 봄 제사, 증은 겨울 제사, 상은 가을 제사였음.
353) 난정곡치(鸞停鵠峙) : 본래는 현사(賢士)가 벼슬자리에 있음을 뜻하는 말이다.
354) 농와는 심언통(沈彦通)을 말한다. 풍천심씨. 1880년 노사 기정진이 지은 묘갈이 있다. 여기에서, 농와공이 김천도찰방에 있을때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를 비롯한 젊은 선비들이 화를 입었는데, 그때 주동인물 심정(沈貞)은 곧 농와공의 아버지인 판관공 심광필과 친형제가 되므로 이 일을 을사사화 때의 괴마 임백령과 그의 형 뇌천 임억령의 형제의 일과 서로 같다고 평하고 참의공은 이때에 자기 숙부의 잘못을 인정하고 세상에서 숨으려고 이곳 남원의 말천방에 은거하였다고 기술하였다.
355) 심구령(沈龜齡, 1350~1413), 자는 천석(天錫), 호는 병담(屛潭), 시호는 정양(靖襄)이다. 일찍이 무예 훈련에 힘써 솜씨가 인정되자 이방원을 호종하였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때 박원길, 정도전 등을 제거하는데 공을 세웠다. 그뒤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때에도 상장군으로서 이방원을 호종하여 좌명공신 4등에 책록되었고, 풍천군(豊川君)에 봉해졌다. 1406년(태종 6) 겸중군동지총제(兼中軍同知摠制)가 되었고 이어서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에 임명되었다. 당시 남해안 일대에 왜구가 침입하자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로서 왜구격퇴에 큰 공을 세웠다. 그 뒤 천추사(千秋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고 부진무(副鎭撫)·겸동지의흥부사(兼同知義興府事)를 역임하였다. 그런데 1410년 군령과 군기관리의 소홀이라는 혐의로 대간에 의하여 탄핵, 파직되기도 하였으나 국왕의 신임이 두터워 이듬해에는 오히려 지의흥부사로 승진하였다. 이어서 별시위 일번절제사(別侍衛一番節制使)를 역임하였고,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에 이르렀다.
356) 주희가, 영종(寧宗) 때 한탁주(韓侂胄)가 권력을 장악하고 조여우(趙汝愚)가 문책을 당하는 등 시사가 잘못되는 것을 보고 분개한 나머지 한탁주의 간사한 실상을 논하는 내용으로 봉사(封事)를 썼다. 그런 뒤에 이를 올리려다가 그 길흉에 대해 점을 쳐 본 결과 둔지가인괘(遯之家人卦)를 만나 ‘둔(遯)의 꼬리이다. 좋아하지만 은둔한다.[遯尾好遯]’는 점사(占辭)가 되었다. 이리하여 즉시 초고를 불태우면서 아예 말을 하지 말자고 혀를 깨물었다 한다. 『晦庵別集 卷1 劉德脩』
357) 도구(菟裘)의 꿈 : 늙어서 은퇴하여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소망을 말한다. 춘추 시대 노(魯)나라 은공(隱公)이 환공(桓公)에게 자리를 물려주고서 도구 땅으로 돌아가 살고 싶다고 말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春秋左氏傳 隱公11年』 현재의 묘소에 이상(異狀)이 발생한 것을 가리킨다. 우면(牛眠)은 장사를 지낸 묘지를 말하는데, 진(晉) 나라 때 소가 누워서 잠자는 곳을 길지(吉地)라고 여겼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晉書 周訪傳』
358) 갱장(羹墻) : 어진이를 사모하는 말이다. 『후한서(後漢書)』 이고전(李固傳)에, “순(舜)이 요(堯)를 사모하여, 앉아 있을 적에는 요 임금을 담에 뵙는 듯하고, 밥 먹을 적에는 요 임금을 국에서 뵙는 듯했다.” 하였다.
359) 은권륭혁지요(恩權隆赫之妖): 은총과 권세가 높고 빛나는 것은 그 속에 재앙의 기틀이 잠재하기 때문에 요괴가 된다는 말.
360) 원문의 ‘元祐完人’은 당파로 인한 상호 모략과 중상 속에서 해를 입지 않고 보전할 수 있었던 사람을 가리킨다. 송나라 신종(神宗) 때부터 철종(哲宗) 때인 원우 연간에 이르기까지 당쟁이 극심하여, 사마광(司馬光)을 중심으로 한 문언박(文彦博), 소식(蘇軾), 정이(程頤), 황정견(黃庭堅) 등의 구법당(舊法黨)과 왕안석(王安石)을 중심으로 한 채경(蔡京), 증포(曾布) 등의 신법당(新法黨)이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휘종(徽宗) 때에 채경 등이 권세를 잡게 되자, 원우 연간에 재상을 지낸 사마광을 비롯한 문언박, 소식, 정이 등을 원우간당(元祐奸黨)으로 지목하여 배척하였다. 그 뒤 신법당 양사성(梁師成)은 구법당에 대해 온건한 태도를 취하며 그들을 회유하는 정책을 시행하고자 하여, 은둔해 지내던 유안세(劉安世)에게 편지를 보내 관직에 나오기를 종용하였다. 그 편지에, 자손을 위해서라도 관직에 나오기를 바란다는 말도 있었다. 유안세가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자손을 위할 생각이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폐기되어 지낸 지 30년 동안 조정의 권귀(權貴)에게 한 줄〔一點墨〕도 글을 보낸 적이 없다. 나는 원우 완인(元祐完人)이 되어 사마광을 지하에서 뵙고자 한다. 이런 소신을 깰 수 없다.” 하고 그 편지를 돌려보내고 답장을 하지 않았다. 《송사(宋史)》 권345 〈유안세열전(劉安世列傳)〉, 《송명신언행록(宋名臣言行錄)》 후집(後集) 권12 등에 나온다.
361) 팔관 십육자(八關十六子) : 당경종(唐敬宗) 때 이봉길(李逢吉) 당인(黨人)의 일파를 말한다. 팔관(八關) 즉 장우신(張又新)ㆍ이속(李續)ㆍ장권여(張權輿)ㆍ유서초(劉栖楚)ㆍ우(李虞)ㆍ정석범(程昔範)ㆍ강흡급(姜洽及)ㆍ이훈(李訓) 등 8인과 그들에게 부회(傅會)한 사람 8인이 모두 요직에 임명되었으므로 팔관 십육자라 불렀다. 『唐書 李逢吉傳』
362) 원문의 灌鬯焄蒿는 관괘(觀卦)의 괘사(卦辭)에 나오는 ‘관이불천(盥而不薦)’이라는 말에 대해서, 정이천(程伊川)은 “술을 땅에 부어 귀신이 강림하도록 할 때까지는 성의와 공경하는 뜻이 그래도 남아 있다.〔灌鬯之初 誠敬猶存〕”라고 해설하였는데, 주희의 본의(本義)에서 다르게 해설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물음을 받고는, 주희가 대답하기를 “관이라는 말의 의미는 단지 손을 씻는다는 것이지, 술을 땅에 부어 귀신이 강림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이천은 선유의 잘못을 답습하였다. 만약 제물을 올리고 난 뒤에는 성의가 줄어든다고 말한다면, 선왕이 제사를 지낼 적에 단지 강신(降神)할 때까지는 그래도 성의가 남아 있다가 막상 제물을 올린 뒤에는 모두 예법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盥只是浣手 不是灌鬯 伊川承先儒之誤 若云薦羞之後 誠意懈怠 則先王祭祀 只是灌鬯之初 猶有誠意 及薦羞之後 皆不成禮矣〕”라고 대답한 내용이 『주자어류(朱子語類)』 권70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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