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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으로 본 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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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현리 지효재(止孝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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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군(任實郡) 재실(齋室) # 지효재
최근 3개월 조회수 : 5 (4 등급)
【향토】
(게재일: 2024.01.04. (최종: 2024.01.02. 22:27)) 
◈ 봉현리 지효재(止孝齋)
이 재실는 삼계면 봉현리 숙호마을 서쪽, 세심리와의 경계인 능선 끝, 길가 언덕에 있다. 이 지역에 거주하는 조양 임씨(兆陽 林氏)의 선조 국헌(菊軒) 임옥산(林玉山)의 재실이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 기와집으로 현판이 2개 주련이 5개 걸려있으며 4304년(1971)에 지었다.
목   차
[숨기기]
봉현리 지효재(止孝齋)
 
이 재실는 삼계면 봉현리 숙호마을 서쪽, 세심리와의 경계인 능선 끝, 길가 언덕에 있다. 이 지역에 거주하는 조양 임씨(兆陽 林氏)의 선조 국헌(菊軒) 임옥산(林玉山)의 재실이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 기와집으로 현판이 2개 주련이 5개 걸려있으며 4304년(1971)에 지었다. 축대 위에 서 있고, 앞에 석등 2개가 있으며 계단 아래의 대문간은 3칸으로서 양옆이 고방이다. 담 밖 오른쪽 언덕에 ‘兵曹參判菊軒先生林公神道碑’(4304년)가 서 있다. 임옥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남원부(南原府) 효자(孝子)조에 실려 있는 인물로 효도가 지극하였으므로 조선 성종 때 조정으로부터 정려의 은전이 내렸으며, 선전관이 제수 되었다. 세심초등학교에 그를 기리는 ‘국헌장학회’가 있다. 그의 효자 정려는 지금의 장수군 산서면 오산리 하오 마을에 있다.
 
 
 
 

1. 숙호 지효재 중수기(止孝齋 重修記)

 
지금 ▣▣은363) 옛 용성(龍城)으로 삼계면(三溪面) 봉현(蓬峴)의 해자(亥字) 언덕은 조양임씨(兆陽林氏)의 양세(兩世) 네 분을 모신 곳이다. 바로 참의(參議)와 참판(參判) 부자와 부인의 합묘이다.
 
재숙(齋宿)하기 위한 묘막(墓幕)[丙舍]은 백여 년이 되었다. 돌아보니 후손들은 여러 군에 흩어져 살고 있고, 사는 곳마저 백리 떨어진 곳이어서 수 백리 떨어져 있는 구롱(邱隴)이 더러 범총(犯塚)을 당해 언덕이 파헤쳐지게 되었고 재사는 여막이 무너졌는데도 세월이 흐르도록 수리하지 못하였다.
 
지난 경신년(庚申) 후손 종희(琮熙)가 여러 종족을 모아놓고 정성스럽게 말하기를, “후손이 되어 하루라도 마음이 편할 수 있겠습니까?” 하더니 홀로 그 공사를 장려하였다. 투총(偸塚)을 어디에 호소하며 재사를 어떻게 중건할 것인가? 선령(先靈)이 오르내리는 그 곳을 편안히 여기도록 한 이후에 재숙을 깨끗하게 유지한 지 40년이 지나니 재안(齋顔)이 다시 완폐(頑獘)해져 옛날과 같아졌다.
 
작년 10월부터 묘사(墓祀)를 지내고 음복하는 자리에서 다시 의논하여 이르기를 우리 종희를 따라 누가 할 것인가? 하니, 여러 종족이 모두 종훈씨(鍾壎氏)를 추대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이에 여러 군(郡)에 유사(有司)를 따로 정해 재물을 모으고 공사를 격려하여 띠로 부당(釜堂)을 입히고 재사의 용마루를 다시 덮으니 옛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여러 종족이 모두 말하기를, “실기(實記)가 없으면 안된다.”고 하면서 나를 불러 부탁하였으나 내가 병으로 사양하였다. 그 일에 함께 할 수 없었지만 뜻하지 않게 삼가 다시 말하기를, “지금 천하에 강상이 무너졌고 전형(典刑)은 부셔졌다. 근래 부모의 초상과 제사도 지내지 않는데 하물며 현원(玄遠)의 조상을 위해 봉분을 만들고 제사를 모시겠는가? 백세(百世)를 하루 같이 머물면서 재숙하며 계신 듯이 모신 정성을 바꿀 수 없는 것이로구나. 이곳이 오히려 자손을 위한 곳이 되어 직분을 함께 하니 참찬공의 자손을 위하는 것이 더욱 아름답구나. 공의 효성이 하늘에서 낸 것으로 나라 안에 크게 알려져 선왕께서 불러서 만나시고 윤음을 내리고 관직을 제수하여 편안히 부모를 봉양하였고 그가 죽자 치제하라 하고 슬퍼하였다. 무룻 이런 조상의 후손이 되어 이런 효성을 하지 못하면 또한 그 후손되는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겠는가? 외람되이 세도(世道)을 절실히 느껴 병을 무릎쓰고 써서 그 후손들에게 고하노라.
 
신축년 7월 어느 날, 안동(安東) 권순명(權純命) 짓고
14세손 임종훈(林鍾壎) 쓰다.
 
 
 

1.1. 止孝齋 重修記

 
今之▣▣ 昔之龍城也 三溪面之蓬峴亥原安 兆陽林氏 兩世回窯 卽參議參判父子 若配位雙兆也 齋宿亦有兩舍 又百有年矣 顧後昆散居列郡 地遠百里 若數百里 邱隴 或被犯塚而岡 由及時掘黜 齋舍有廬圮 而亦容年歲闕修 去庚申年以後昆琮熙 會諸族議曰 是其爲姓孫所可一日安於心乎 獨與厥役偸塚焉 訴拷齋舍焉 重建使先靈陟降 安其所後昆齋宿致其潔後 四十年齋顔復頑弊如舊焉 自昨年十月墓祀餕席復議曰 繼吾琮熙 以爲誰 諸族咸推鍾壎氏 爲可於是別定 列郡有司 鳩財蕫工 釜堂焉衣莎柎表 齋舍焉惕怵露尾 視舊愈與諸族 咸曰 不可無記實以示後徵余以文 余辭病莫能與役而不獲則謹以復曰 今天下 綱常墜矣 典刑破矣 近之爺孃之親 而猶有不喪不祭者 况復玄遠之祖 而封之祀之 百世如一日 合而齋宿 致如在之誠不替乎 雖然斯猶爲子孫者之所共職分 而爲參判公子孫者 爲尤難 公之孝出於天而大鳴國中 先王召之見 而降論音除之官 而便養親 及其沒而賜之祭而恤焉 夫爲是祖之孫 而不如是之孝奉 又不媿於爲其孫乎 猥切世道之感 力疾敍之 歸告于其後昆
 
歲舍 辛丑 7月 日 安東 權純命 記
14世孫 鍾壎 書
 
 
 

2. 숙호 지효재기(止孝齋記)

 
다북쑥에 이슬이 맺히고 가래나무나 개오동나무에 찬서리가 내리면 군자(君子)는 이를 밟으며 슬퍼하고 놀라는 마음을 금하지 못하니 이것은 먼 조상을 생각하고 근본에 보답하려는 정성이 마지 못하는 까닭이다. 정성을 버릴 수 없다면 봄가을로 우러러 참배하는 곳도 없을 수 없으니 이것이 재각을 설립하는 까닭이다.
 
우리 선조 국헌선생(菊軒先生)은 충효의 거룩하신 행적이 이처럼 높으시고, 군왕[聖朝]이 예우(禮遇)함이 그처럼 융숭하였으니, 마땅히 신명의 보우를 많이 받으실 일이었으나 천리(天理)는 알 수 없어 재각과 창고가 임진왜란[龍蛇兵燹]에 재앙을 입었다. 게다가 문호(門戶)마저 영세해져 무덤 아래 제사를 모실 집칸도 없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지나가는 사람도 가리키며 지적하고 초동도 탄식을 하니 그 자손으로서 이마에 땀이 솟는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만일 가난하다고만 핑계하고 세월만 미루어 나간다면 각자의 사정에만 몰두하여 조상을 등한시 한다는 지탄을 면할 수 없고, 또한 종중에서 재각을 세우자는 합의가 나올 가망도 없다. 나는 이점을 송구히 생각해 오다가 끝내 통문을 발송하여 여론을 물어보니 다행히도 모든 후손들의 뜻이 하나같았고, 각자 힘에 따라 협조하고 공사에 착수하여 감독하기 시작하였다. 지난 기미년(己未) 겨울에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 경신년(庚申) 늦은 봄, 몇 달 동안에 신속히 완공되니 여러 종친들이 모아준 성의가 참으로 고마웠다. 그러나 약한 힘이 미치지 못하여 몇칸을 세운 것이 기와도 못 올리고 짚으로 덮어 단청도 못하여 자연색으로 두었다. 남들이 보면 너무도 초라하다고 할지 모르나, 우리 선조께서 본래 청백하신지라 밝으신 영혼으로 보신다면 행여나 검소할망정 사치롭지 않은 것이 오히려 마땅할지 모른다.
 
재각이 완성된 뒤에 지효재라 이름을 붙이니 그 의의는 예부터 내려오는 유래가 멀다. 아. 옛날 우리 선조는 효(孝)로써 고을을 다스렸고, 그 덕으로서 백성들을 교화하였으며, 고을의 풍속이 크게 변하고, 그 끼치신 음덕과 남기신 향기는 사람들의 이목에 젖어서 지금까지도 칭송하고, 찬양해 마지 않고 있다. 항차 자손된 사람으로서는 선조의 미덕을 계승하기를 어찌 생각지 않겠는가. 『시경(詩經)』에 말하기를, “길이 효도를 생각하라, 효도만을 오직 본받으라”하였으니 이것은 우리 선조의 물려주신 교훈이다. 또 너의 조상에 때 묻지 않게 하고 그 덕을 힘써 닦는 것은 오직 후손들의 책임이라 할 것이다. 원컨대 모든 종인들은 재각이 완성되었다고 우리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지 말고, 더욱 힘써서 이곳을 찾아 뵙고, 출입할 때에는 잠깐의 한 생각으로도 ‘지효(止孝)’ 두 글자를 잊지 않는다면 우리 가문이 다시 번창하는 동기가 이 ‘효’라는 글자 속에서 발현하게 될 것이다. 또 한가지 일러 둘 것은 이 재각이 오래 전하여 썩지 않는 길은, 역시 잘 이어받는 성의에 있다. 이어받는 정성은 또한 효도(孝道)의 큰 근본이 되는 것이니, 나는 이것으로 후손들의 성의를 기다려 보겠노라.
 
신유년(辛酉) 가을 8월 상한(上澣)에 불초 후손 종희(琮熙) 삼가 쓰다.
 
 

2.1. 止孝齋記

 
頻蘩春露 榟楸寒霜 君子履之 悽愴怵惕之心 靡不用其極 是追遠報本之誠所 不容已者誠旣不容已則 不容無春秋瞻拜之所 此齋之所由設也 惟我先祖菊軒先生 忠孝偉蹟 若是其卓磊 聖朝禮遇如彼其隆崇 宜有神明陰隲 而天理難諶 齋閣庫舍 收入于龍蛇兵燹之危 仍又門戶零替堂斧之下迄無奉禮廳事 致使行路指点樵牧興嗟其於雲仍 泚顙之愧 顧何如哉 若諉之於貧乏因循捱過則 不惟不免於慢先濟私之譏 全宗健齋之議了 無其日矣 余爲是之惧玆 乃發通詢議 僉謀歸同 各自度力捐助 而募工蕫役 肇于去己未冬 告功于翌年 庚申之暮春 不幾月而迅速 利成深荷 僉宗之湊誠 然拘於孱力之不逮 結構數間 不瓦而蒿 不丹而素 盖於餘人則 必視之草草而在吾先祖 淸白昭昭之靈容 亦無其寧儉不侈之爲宜耶 齋旣成扁以止孝 揭號之義 自來遠矣 噫昔我先祖 以孝治縣邑也 民化其德 鄕風丕變 其遺韻餘馥 塗人耳目 尙今歌頌之愛賞之 况在子姓獨不思所以紹述先美乎 詩所謂永言孝思 孝思惟則 先祖之貽謨也 無忝爾祖 聿修厥德 後昆之攸責也 願僉宗勿以齊成謂吾事已了 而勉勉循循 升降出入 無一時一念不忠乎 止孝則 亦安知吾門昌大不復從孝字中 出來耶 且齋之壽傳 不杇 亦係於善繼善述 繼述之誠 未始非 孝思之元符 吾以是登後焉
 
歲辛酉秋 8月 上澣 不肖 後孫 琮熙 謹書
 
 

 
각주
363) 원문에 지워진 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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