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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군(任實郡) 재실(齋室) # 귀후재
최근 3개월 조회수 : 7 (4 등급)
【향토】
(게재일: 2024.01.04. (최종: 2024.01.02. 22:32)) 
◈ 어은리 귀후재(歸厚齋)
삼계면 어은리 표지석을 따라 직진하여 마을을 들어가기 전 제각골에 있다. 귀후재(歸厚齋)는 이 지역의 청주 한씨 문중의 재실로 팔작지붕 아래 겹처마를 두르고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현판이 5개 주련이 6개 걸려있다. 동남으로 작은 출입문이 있고, 솟을대문에는 수덕문(修德門)이란 편액이 걸려 있으며, 석촌 윤용구가 쓴 귀후재 편액이 걸려 있다. 1931년에 중건되고 1987년에 다시 중수하였다.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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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은리 귀후재(歸厚齋)
 
삼계면 어은리 표지석을 따라 직진하여 마을을 들어가기 전 제각골에 있다. 귀후재(歸厚齋)는 이 지역의 청주 한씨 문중의 재실로 팔작지붕 아래 겹처마를 두르고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현판이 5개 주련이 6개 걸려있다. 동남으로 작은 출입문이 있고, 솟을대문에는 수덕문(修德門)이란 편액이 걸려 있으며, 석촌 윤용구가 쓴 귀후재 편액이 걸려 있다. 1931년에 중건되고 1987년에 다시 중수하였다. 석촌 윤용구는 한일합방이 되자 조선총독부에서 작위를 주었으나 이를 받지 않고 거절하여 당시 조선 선비들의 추앙을 한 몸에 받은 사람이다. 여러 서체에 두루 능하였으나 그의 해서는 특히 유명하여 당나라 구양순의 필법에 추사 김정희의 필의가 가미된 강골한 필치이다.
 
 
 
 

1. 어은리 귀후재기

 
증자(曾子)가 말하길, ‘부모의 장례를 신중하게 치르고 조상을 추모하면, 백성들이 모두 두터운 덕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재각을 지은 까닭이다. 우리 14대조 할머니 청양현부인(靑陽縣夫人) 김씨(金氏)는 우봉현령(牛峰縣令) 김이석(金以石)의 딸이다.
 
남편이 일찍 죽자 아들 진산공(珍山公)과 창원공(昌原公)을 데리고 남쪽 대방(帶方, 남원)의 어은동(漁隱洞)으로 내려와서 존거(尊居)하며 두 아들을 교육하였는데 매우 법도가 있었다. 학문에 나아가 자질을 갖추더니 모두 음직(蔭職)으로 관직에 나가 여러 차례 외직에 거치면서 명성을 쌓았다.
 
지금까지 남쪽 사람들이 현명한 증자의 어머니와 맹자의 어머니에 비유하고 있다. 돌아가시자 무덤을 이 언덕에 썼는데, 비로소 대대로 우리 한씨의 선영(先塋)이 되었다. 묘(墓) 아래 분암(墳菴)을 두고 1년에 한 번 제사를 지내고자 하였으나 그 품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헌종 을사년(1845)에 온 종족이 의견을 모아서 재각을 지으니 제사를 지내고 모여서 두터운 정을 나눌 만하였다. 세월이 많이 흘러 쇠락하게 되자 모든 종족들이 근심하며 중수하기로 결의하고 힘을 모았다. 나의 조카 규진(圭珍)도 충심으로 열심히 일해 공사비를 모았다. 홍석(泓錫)과 함께 그 일을 맡아서 준공하였는데, 옛 것에 비해 규모가 늘어났다.
 
바라노니 후손들이 우리 현부인(縣夫人)의 균시(均示)의 마음을 본받아 영원토록 묘소를 지키고, 종중을 돈독히 하며, 더욱 화목하게 지낸다면 어찌 세세토록 무궁한 복을 받지 않겠느냐? 내가 졸렬한 문장으로 감히 기술하니 이와 같은 뿐이다. 시를 걸어 말하기를,
 
 
先世殫誠立此齋  조상들이 정성을 다하여 이 재각을 세웠고
齋中團話正柔佳  재각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니 정말 아름답구나.
誼洽塤箎連一氣  사이 좋은 형제들364) 일기(一氣)가 잇닿아
情深花樹樂無涯  정이 깊은 친족의 즐거움은 가이 없구나.
 
繞壟杉松森八夢  무덤가 소나무 삼나무 숲에 여덟가지 꿈이라
懸楣粉墨爛書懷  처마에 걸린 단청과 글씨 지워져 가나
願言百代追遺訓  바라노니 백세토록 유훈(遺訓)을 따르면
式好源源第上階  끊임없이 법식으로 삼아 섬돌에 오르리라.
 
경신년(庚申) 중양절[重陽日] 후손 용숙(容肅)이 삼가 글을 짓다
 
 
曾子曰愼終追遠 民德歸厚 此齋之所以作也 惟我十四代祖 妣靑陽縣夫人金氏 牛峰縣令金公以石氏之女也 早遭晝曲 率二嗣珍山公昌原公 南下於帶方漁隱洞 因爲尊居敎育 二公極其有法就學成材 俱以蔭仕累典州郡皆有聲績 至今南人比之 曾母孟母之賢及其歿也 因爲衣履之所 此原始爲吾韓世葬之地也 墓下因有墳菴 歲行一祀 而有所齎志未就者矣 憲廟乙巳 闔宗詢謀 創設齋宇 可容修祭之所 腆親之會矣 據疊年月 至于頹傷 僉族懼然以重修之擧決議合助優力而佛佞之侄 圭珍亦以盅心拮据鳩工之費與泓錫甫擔其事而竣役 比舊增制也 願言後承體吾縣夫人均示之心 永守虔奉敦尙雍睦則豈非世世無窮受祐之休哉 余以文拙敢記止此云爾 繫詩曰
 
先世殫誠立此齋
齋中團話正柔佳
誼洽塤箎連一氣
情深花樹樂無涯
繞壟杉松森八夢
懸楣粉墨爛書懷
願言百代追遺訓
式好源源第上階
 
 
 

2. 어은 귀후재 중수기(歸厚齋重修記)

 
우리 선조 청성군(淸城君)은 시호(諡號)는 안양공(安襄公)이시다. 공의 부군의 휘는 한종손(終孫)으로 훈업(勳業)이 국가의 사적에 빛나게 실려 있으며 세사(世祀)를 지내라는 특명이 내려졌다. 한성에서 3월 21일에 돌아가셨는데 교하 파라동 연다산 임좌원에 장사지냈다.
 
이에 현부인(縣夫人) 김씨는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고아 둘을 데리고 대방 광동(曠洞)에 가서 의거하였다. 지금의 어은동(漁隱洞)인데 대개 부친 우봉현령을 지낸 김이석(金以石)의 농장이 있던 땅이다. 아들을 가르치기를 반드시 옳은 길로 엄격하게 하고 각고의 노력으로 학문에 힘써 이름을 이루어 나랏일에 종사하였다.
 
장자 희(曦)는 진산군수(珍山郡守)를 지냈고, 둘째 절(晣)은 창원부사(昌原府使)를 지냈으며 모두 명성을 쌓았으니 부인이 가르치는 데 힘을 썼기 때문이다. 고을 사람들이 지금까지 부인을 현명하다고 칭찬하고 있다. 홍치(弘治) 계해년(1503) 7月 19日 부인이 죽으니 어은동 계좌(癸坐) 언덕에 장사지내니 비로소 우리 한씨의 세장지가 되었다.
 
묘 아래 분암(墳菴)365)이 있으니 1년에 한번 제사를 올리고 여러 족인들이 모여서 돈친하는 정의를 풀었으니 부끄럽지는 않도다. 문정공(文正公) 범중엄(范仲淹)366)이 널리 의장(義庄)을 두어 종족을 구제하였으니 우리 현부인이 자손을 보는 것처럼 하시어 친소(親疎)가 없으셨다. 비록 의장(義庄)을 널리 두지는 못했지만 재각을 수호하고 공경히 받들어367) 제사를 지내고 종족이 모이는 곳이 되어도 옛 사람들이 의장을 남긴 뜻을 거의 이룬 것이리라.
 
돌아보니 건축한 지 이미 오래되어 이미 퇴폐해져서 중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가을 제사를 지내고 음복하는 자리에서 여러 사람의 의논하고 협동하여 비용을 모아서 공사하였다. 규진(圭珍)과 홍석(泓錫) 두 사람을 추대하여 일을 맡겼다. 두 사람이 두루 상세하고 근면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열심히 하였다. 옛 규모와 비교하여 크고 새롭게 만들었다. 재각을 귀후(歸厚)라고 하였으나 편액을 걸 겨를이 없었다가 지금에서야 비로소 편액을 달았다. 대개 증자(曾子)에 말씀하신, ‘죽음[終]을 신중하게 하고, 조상을 추모하면 백성의 덕이 두터운 데로 돌아갈 것이다.’ 라는 뜻이다. 삼가 생각해보니 이 재각을 설립한 것은 본래 조상을 섬기고 종족들이 돈독히 하는데 있고, 풍속을 두터이 하고자 함이었으니 그 중요함이 또한 조상의 덕을 추모하고 조상의 유훈을 삼가 지켜나가는 것에 있다.
 
옛 재각을 중수하여368) 세세토록 바꾸지 않고 이끌어간다면 선령이 위에 계시면서 풍년이 들게 복을 내리시리니 우리 가문의 창대함을 헤아릴 수 없을 것이며 이 재각도 더불어 영원토록 융성할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그 전말에 대해 이와 같이 기록하였다.
 
경신년[上章涒灘] 6월 하한 어느날 후손 규설(圭卨) 삼가 지음.
 
 
 

2.1. 歸厚齋重修記

 
惟我先祖 淸城君 諡安襄公 府君諱終孫 勳業昭載國乘 特命世祀 卒于漢城 諱辰三月二十一日也 葬于交河波羅洞 烟多山壬坐之原 於是縣夫人金氏 自遭晝哭 携二孤 往依于帶方廣洞 今漁隱洞 盖本庭父親 牛峯縣令 諱以石 置庄之地也 訓子必嚴義方 刻苦學問 名成而從王事 長子諱曦 官珍山郡守 次子諱晣 官昌原府使 所至皆有聲績 寔夫人敎導之力也 鄕人至今稱夫人賢 弘治癸亥七月十九日 夫人卒葬于漁隱洞 癸坐之原 此原始爲吾韓世藏之地 墓下有墳菴 世行一祀 諸族團聚 以敍敦親之誼 無愧范文正公 廣置義庄 而濟宗族 自吾縣夫人視之均是子孫 固無親疎 雖未能廣置義庄 而守護祭閣 虔奉烝嘗 以爲合族之所 亦庶幾乎 古人置庄之遺意也 顧建屋之日月已久 至於頹敗不可不重修 去秋享祀飮福之筵 僉議恊同 乃籌費鳩工 推圭珍泓錫二君 掌其事 二君周詳勤敏 始終克勤 比舊規而增新制 齋稱歸厚 未遑揭額 至是始扁之 盖取曾子所云 愼終追遠 民德歸厚之意也 窃惟斯齋之設 本爲尊祖敦族 以厚風俗也 而其要又在乎 追慕先德謹守遺戒之一道也 肯構肯堂 世世勿替引之 則先靈在上 降福禳禳 吾門之昌未可涯量 而是閣亦與之永世幷隆豈不休哉 記顚末如右焉
 
上章涒灘 6月 下澣 日 後孫 圭卨 謹識
 
 
 

3. 어은리 귀후재기

 
우리 선조비(先祖妣) 현부인(顯夫人) 김씨(金氏)의 영령이 깃든 묘 아래 제사를 준비하는 곳을 오래 전에 마련하였는데, 지금에서야 ‘귀후(歸厚)라고 편액 하였다. 그 뜻은 대개 증자가 말씀하신 ’신종추원(愼終追遠)에서’369) 취하였다. 부인은 두 아들, 진산공(珍山公)과 창원공(昌原公)을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 오셔서 이곳에 거처를 정하셨다. 아들을 의롭게 살도록 가르치며 척숙(戚叔)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선생의 문하에서 종유하여 깨우치도록 하였다. 스스로 책망하며 겸손히 낮추며 성현(聖賢)의 책들을 읽어 크게 깨우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에 음관(蔭官)으로 관직에 나아가 순리(循吏)370)의 으뜸이 되었으므로 지금까지 현부인(賢夫人)을 칭찬하고 있다. 후손들이 번창하여 경향(京鄕)에 두루 거주하며 조금이나마 벼슬살이를 하는 종족이 된 것은 실로 부인이 쌓은 선행으로 후손들이 누리는 경사[餘慶]가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 이 재각을 수선하니 선조를 존경하며 종족과 돈독하게 지내라는 유훈과 진실로 떳떳한 도리를 지키며 덕을 좋아하는 양심(良心)이 저절로 그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무릇 세상에 이름난 재각을 보면, 그 시작은 사람이 흥함에 있지 않음이 없고 그 끝은 사람이 폐함에 있지 않음이 없으니 갑자기 우리 한씨 후손이 혹여 제사를 태만히 하여 귀후재(歸厚齋)의 본의를 꺽어 무너져 버리게 된다면 어찌 후손의 과오가 아니라고 하며 피할 수 있겠는가?
 
재각에 흠이 되었던 것은 미처 그 실기(實記)를 서술하여 걸지 못하였던 것인데 지금 우리 후손 강속(江石) 참정공(參政公)이 유연(油然)하게 감흥(感興)으로 그 사실에 대해 널리 상고하여 판각하여 걸었다. 해관(海觀) 상서(尙書) 윤용구(尹用求)가 재각의 편액을 두고 주련(柱聯)을 지었으니 이 재각의 전말에 대해서 스스로 이렇게 여러 후손들이 상세하게 첨앙(瞻仰)할 수 있게 되었으니 빛이 날 것이다. 그 일을 맡아서 부지런히 일하며 게을리 하지 않았던 규진(圭珍)과 홍석(泓錫) 두 후손의 공이 크다. 이에 아울러 이 판각을 드리워 이와 같이 쓰고 시를 짓는다.
 
 
森然喬木蔭斯齋  울창한 교목(喬木)이 이 재각에 드리우니
變葉傳芳邁德佳  이파리 변하여 꽃피워 아름다운 덕에 힘쓰네.
義篤三貞功有緖  의로 삼정(三貞)을 도타우니 공덕이 이어지고
家肥六順福無涯  집안에서 육순(六順)371) 걸우게 하니 복이 그지없구나.
 
安藏衣履山川助  의발을 안장하니 산천이 도우시고
永奉烝嘗歲月懷  영원히 제사를 모시며 세월 품으리니
敦族何論親遠別  친족 화목에 어찌 멀고 다름을 논하리오.
聽先遺訓盡登階  선현의 유훈을 들으며 다 섬돌에 오르리라
 
경신년 6월 하한(下澣) 어느날 후손 긍석(肯錫) 삼가 씀.
 
 
 

3.1. 歸厚齋 遺事追記

 
維我先祖妣懸夫人 金氏靈竁之下 久有設薦苾之所 今扁曰歸厚 其義盖取曾子慎終追遠也 夫人率二嗣 珍山公昌原公 南下于玆土 因爲奠居焉 敎子以義方 命遊戚從叔金寒喧先生之門悔寐 自責折節 讀聖賢書 沛然有得也云 于時以蔭 官出宰爲循吏之最至 今有賢夫人之稱後承 亦爲蕃昌遍居京鄕 僅不失衣冠之族者 實由夫人積累之餘慶未艾也 抑惟斯齋之修繕 克遵祖敦族之遺訓 誠以秉彛好德之良心 自有所不能已也 凡觀世人有名之堂榭其始也 莫不有人興之其終也 莫不無人廢之儻 使 吾韓後孫或怠慢於祀事 以歸厚齋之本義 至於摧敗 則安得逭不肖孫之過哉 齋之所欠者 未遑揭敍實之文也 今同裔孫江石參政公 油然興感 博攷其事 實揭板焉 海觀尹尙書用求 署齋額題 柱聯斯齋之顚末 自此有詳諸孫之瞻仰 亦有光焉 掌其事而勤務不懈者 圭珍泓錫 二遺孫最功焉 故幷此垂刻 如右繫詩曰 森然喬木蔭斯齋 變葉傳芳邁德佳 義篤三貞功有緖 家肥六順福無涯 安藏衣履山川助 永奉烝嘗歲月懷 敦族何論親遠別 聽先遺訓盡登階
 
上章 涒灘 六月下澣日 後孫 肯錫 謹記
 
 
 

4. 어은 귀후재 안양공 불조묘 이건기(安襄公 不祧廟 移建記)

 
우리 17대 조고(祖考) 한종손(韓終孫)은 세종 정묘년(1447)에 등과하여 청요직[淸秩]에 오르고 매양 자신의 직책에 힘과 마음을 다하였다. 경태(景泰) 을해년(1455)에 훈직으로 특별히 추충좌익공신 가정대부 병조참판(推忠佐翼功臣 嘉靖大夫 兵曹參判)에 제수되고, 청성군(淸城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안양(安襄)이다.
 
무자년(1468) 3월 21일에 죽으니 파주군 교하면 연다산리 연대산 임좌원에 장사지냈다. 훈공으로 특별히 ‘부조(不祧)’의 은전을 입어372) 연산 모촌사(茅村祠)에 제향되었다. 숭정(崇禎) 두 번째 계묘년(1723)에 현 임실군 어은리로 옮겨 봉안하여 수 백년을 이어져 봉향하고 있다.
 
아! 경술년(1910)의 국치 이후에 외세가 침입하여 이교(異敎)가 횡행하여 인륜강상이 두절되었고 염치가 모두 사라졌다. 하늘과 땅이 뒤바뀌고 사람과 금수를 구별하기 어렵게 되었으며 오랑캐 풍습이 독기를 부리며 묘역(廟域)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 후손된 자로 누군들 깊이 근심하지 않으며 편안히 묵고할 수 있겠는가?
 
얼마나 다행인지 정축년 봄에 여러 후손들이 두루 의견을 모아 협력하여 청양현부인(靑陽縣夫人) 김씨의 묘를 왼쪽 기슭 정결한 곳으로 옮겼다. 얽히고 설킨 세상일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규모는 예전과 같았으나 새로 단청을 입히니 사당의 모습이 숙연하다. 돌아가신 분을 추모하며373) 우러러 바라보니 정령(精靈)이 계신 듯하다. 생각건대 주묘(周廟)의 동천(東遷)을374) 봄가을로 알게 되리니 추원(追遠)하는 도리가 예나 지금이나 어찌 다르겠는가? 또한 마땅하게도 귀후재(歸厚齋)가 전처럼 제사를 모시고 예를 강학하는 방도에 거의 도움이 될 것이다. 비록 내가 어리석기는 해도 봉사(奉祀)에 있어서 스스로 삼가며 스스로 힘쓸 것이다. 대략 이건기(移建記)를 적는다.
 
을유(乙酉) 동지[至月] 상순[上澣]
17세손 대연(大淵) 삼가 지음.
16세손 동석(東錫) 삼가 씀.
 
 
 

4.1. 安壤公不祧廟 移建記

 
惟我十七代祖考諱終孫 世宗丁卯登第 歷敭淸秩 每以盡其職爲心 景泰乙亥 以勳特賜推忠佐翼功臣 嘉靖大夫 兵曹參判 封淸城君 諡安襄 以成化戊子 三月二十一日 卒葬于坡州郡 交河面 烟多山里 蓮臺山 坐壬原 以勳特命不祧之典 享連山 茅村祠 崇禎再癸卯 移奉于現任實漁隱以之 而奉承數百載矣 嗚呼 自庚戌國恥以後 外勢侵入 異敎橫行 綱倫斁絶 廉恥都喪 天壤易處 人獸難別 夷風肆毒 乃至於廟域爲其後 仍者孰不爲深憂遠慮 而晏然黙過乎 何幸歲在丁丑春 諸宗詢議協力 再移于靑陽縣夫人金氏 玄竁左堐 淨潔之地 俗累隔遠 規其古如 而新添丹雘 廟貌肅然 瞻仰羹墻 精靈如在矣 竊惟周廟東遷春秋識之 則其在追遠之道 古今何殊哉 又所可宜者 歸厚齋 在前粢盛講禮之方 庶乎有補 而雖余至愚 其於奉祀 自兢自勉焉 略敍爲移建記
 
歲乙酉 至月 上澣 十七世孫 大淵 謹植
十六世孫 東錫 謹書
 
 
 

5. 어은 귀후재 청성군 사우이건기(淸城君 祠宇 移建記)

 
내가 일찍이 『예기』를 읽다가 ‘죽어서 세사(世祀)하는 경우가 다섯 가지 있다.’는 곳에 이르러 우리 선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가만히 느끼는 바가 있었다. 그에 대해 말하자면, 백성들에게 법을 베풀었거나, 죽음으로 일을 일으켰거나 수고하여 나라를 안정시켰거나 큰 재앙을 막았거나 환란을 막은 경우이니 여기 하나라도 해당되면 해마다 제사를 지낼 수 있다. 도덕을 높이고 공훈에 상을 주는 것은 첫 번째 의리인 것이다.
 
우리 청성부원군은 을해년(1455)에 책훈되어 군(君)에 봉해졌고 증시(贈詩)되어 세사(世祀)를 지내도록 했으니 나라에서 예에 의거하여 내린 특별한 은전이다. 사우가 예전 연산 모촌에 있었는데 계묘년(1723)에 남원 어은동으로 옮겨 세웠고 그후 세 번째 맞이한 정축년(1957)에 또 마을의 북쪽 현부인(縣夫人) 묘소가 있는 곳으로 옮겼다. 조용하고 그윽한 곳을 선택한 것이다.
 
슬프다! 세상의 도리가 쇠퇴하고 인사(人事)가 변화하였으니 어찌 그렇게 되는 동안에 감개한 마음이 없었겠는가. 종가(宗家)에 간직된 문적이 불행히 병란을 거치면서 사라졌지만 다행히 국조실록(國朝實錄)에 이르기를, ‘공(功)이 있어서 상(賞)을 주었고, 덕(德)이 있어 벼슬을 주었으며, 가려 써서 책훈의 은전이 있다‘고375) 했으니 이것이 비록 간략한 두어 마디의 말이라고 해도 부군의 공과 덕을 대개 미루어 볼만하다 하겠다.
 
오호라 제사라는 것은 정성일 따름이니 신(神)의 유무는 정성의 있고 없고 여하에 달려 있을 뿐이다. 옛사람들이 말하기를, 지성(至誠)이면 소박한 제물로도 제사를 지낼 수 있다고 하였으니 반드시 정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부군의 자손들이 경향(京鄕)에 흩어져 있고 그 숫자가 억뿐만은 아니겠지만376)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이 언제나 뜰에도 차지 아니하니 어찌 정성이 있다고 하겠는가.
 
오직 바라는 것은 집집마다 반드시 정성스럽게 하고 사람마다 반드시 정성스럽게 하여 진실로 힘이 미치는 바에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 같다는 한탄이 없도록 약속하여 서로 경계하고 서로 힘쓴다면 영령이 오르내리시는 것을 옆에 계신 듯 보이는 듯 할 뿐 아니라 어버이에게 친하고 동기간에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다. 매우 화락하게 지내는 가운데 문호가 창대해질 것이니 또한 이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 않겠는가. 내 비록 우매하나 그윽이 이로써 우리 안양공(安襄公) 부군의 후손에게 깨우쳐 알게 하고자 이를 기록한다.
 
정축년 11월 일
16세손 한정호(韓廷鎬) 삼가 지음
 
 
추음 귀후재운(追吟 歸厚齋韻)
 
墓下劑兼廟下齋  묘소 아래 귀후재가 사당아래 재각을 겸했으니
齊儀嚴整倍前佳  재의가 엄정하여 전보다 배나 하네
桂蓮拱揖軒窓外  대소과(大小科)에 오른 이들 창밖에 공읍하고
沙月縈回隧道涯  백사장에 뜬 달은 무덤길 따라 휘영청 밝네
 
百世簪纓承祖蔭  백세에 잠영(簪纓)들은 선대의 음덕을 이어받고
千年花樹說親懷  천년된 많은 친족 정담을 즐기는구나
秋霜春露苾芬日  봄이슬 가을서리 향사철 그날이면
明盛雲孫越沙階  성복한 후손들이 섬돌에 즐비하네
 
병인(1984) 3월 21일 17세손 택수 삼가 짓다.
 
 
 

6. 淸城君 祠宇 移建記

 
不肖嘗讀禮記 至於死而世祀者 有五未嘗不念 及於吾祖 而窃有感爲矣 其曰法施於民 曰以死勤事 曰以勞定國 曰能禦大舊 曰能捍大患 盖有一於此 可世祀之 乃尊道德賞功勳之第一義也 惟我淸城君府君 當景泰乙亥 榮勳而封君 贈諡而命世祀者實是國朝據禮之特恩也 祠宇舊在連山茅村矣 崇禎再癸卯 移建于南原之漁隱洞 厥後三丁丑 又移安于洞之北 縣夫人墓洞 盖嫌其村 喧而取其幽靜也 噫世道之汚隆 人事之變幻 烏能無感慨於其間也哉 但文籍之藏于宗家者 不幸經兵燹 無所著見 惟幸國朝實錄 有曰功懋賞德懋官庸擧策勳之典云云 此雖寧寧數語可以槩府君之德之功矣 鳴呼 祭也者 誠而已矣 神之有無 在於誠之存不存如何耳 古人有言 至誠薄物可祭 盖言其必於誠也 爲吾府君子孫者 散在京鄕 其麗不億而與乎 祭者常木盈庭 烏在其誠之者也 惟願家家必於誠 人人必於誠 苟力之所曁 期無如不祭之嘆 而相戒相勗爲則 不惟英靈陟降 如在如見之誠 以至於親親也敦睦也 融融於和氣之中 而門戶之昌大 亦將不基於此矣乎 余雖愚昧窃欲 以此痛告于爲吾安襄公 府君後裔者也 是爲記之
 
丁丑 十一月 日
十六世孫 廷鎬 謹識
 
 
追吟 歸厚齋韻
 
墓下劑兼廟下齋 齊儀嚴整倍前佳 桂蓮拱揖軒窓外 沙月縈回隧道涯
百世簪纓承祖蔭 千年花樹說親懷 秋霜春露苾芬日 明盛雲孫稱涉階
 
 

 
각주
364) 원문의 훈지(塤篪)는 서로 가락이 잘 맞는 두 개의 관악기로서 보통 형제를 가리킬 때 쓰는 표현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하인사(何人斯)에 “伯氏吹塤 仲氏吹篪”라 하였다.
365) 분암(墳菴): 분묘의 수호를 위하여 건립된 암자, 또는 수호시설을 가리킨다.
366) 범문정공(范文正公)이 설립한 의전(義田) : 송나라 전공보(錢公輔)의 의전기(義田記)에 “범 문정공이 바야흐로 귀현(貴顯)할 당시에 항상 풍작을 거두는 근교의 비옥한 토지 1000묘(畝)를 마련하여 의전이라고 이름 붙이고는 뭇 친족들을 공양하고 구제하는 자본으로 삼았다.”라는 말이 나온다. 문정(文正)은 송나라 범중엄(范仲淹)의 시호이다. 『事文類聚』
367) 약사증상(禴祠烝嘗) : 고대 종묘에서 지내던 시제(時祭)로 주대(周代)에는 약은 여름 제사, 사는 봄 제사, 증은 겨울 제사, 상은 가을 제사였음.
368) 긍구(肯構) : 긍구긍당(肯構肯堂)의 준말로, 『서경』〈대고(大誥)〉에, “만약 아버지가 집을 지으려 작정하여 이미 그 규모를 정했는데도 그 아들이 기꺼이 당기(堂基)를 마련하지 않는데 하물며 기꺼이 집을 지으랴.〔若考作室 旣底法 厥子乃弗肯堂 矧肯構〕” 한 대목에서 온 말로, 자손이 선대의 유업을 잘 계승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는 고가(古家)를 자손들이 중수(重修)한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369) 신종추원(愼終追遠) : 부모의 상을 당했을 때와 선조의 제사를 지낼 때 애통함과 경건함을 극진히 하며 예법에 맞게 행하는 것을 말한다. 종(終)은 부모의 죽음을 뜻하고, 원(遠)은 선조를 뜻하는데, 『논어』 학이(學而)에 “어버이 상을 당했을 때 신중하게 행하고 먼 조상님들을 정성껏 제사 지내면 백성들의 덕성이 한결 돈후하게 될 것이다.〔愼終追遠 民德歸厚矣〕”라는 말이 나온다.
370) 순리(循吏): 공무를 중히 여기고 법을 잘 지키는 선량한 관리
371) 육순(六順)은 사람이 쫓아야 할 여섯 가지 바른 도리이다. 곧 군(君)은 의(義), 신(臣)은 행(行), 부(父)는 자(慈), 자(子)는 효(孝), 형(兄)은 애(愛), 제(弟)는 경(敬)을 말한다.
372) 예전에, 나라에 큰 공훈을 세운 사람의 신주를 영구히 사당에 모시게 하던 특전
373) 원문의 갱장(羹墻)은 어진이를 사모하는 말이다. 『후한서(後漢書)』 이고전(李固傳)에, “순(舜)이 요(堯)를 사모하여, 앉아 있을 적에는 요 임금을 담에 뵙는 듯하고, 밥 먹을 적에는 요 임금을 국에서 뵙는 듯했다.” 하였다. 죽은 사람에 대한 간절한 추모의 정을 말한다. 요(堯) 임금이 죽은 뒤에 순(舜)이 3년 동안 사모하는 정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밥을 먹을 때에는 요 임금의 얼굴이 국그릇 속[羹中]에 비치는 듯하고, 앉아 있을 때에는 담장[墻]에 요 임금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듯했다는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63 李杜列傳』
374) 원문의 동천(東遷)은 주(周)나라 유왕(幽王)이 무도하여 견융(犬戎)에게 살해되자 그의 아들인 평왕(平王)이 서쪽 호경(鎬京)으로부터 동쪽 낙읍(洛邑)으로 도읍을 옮긴 것을 말하는데, 이전을 서주(西周)라 하고 이후를 동주(東周)라 한다.
375) 『세조실록』 권13, 4년(1458) 6월 29일 참고.
376) 《시경》 〈인지지(麟之趾)〉에 “기린의 이마여! 진진한 공성이, 아아, 기린 같구나.〔麟之定 振振公姓 于嗟麟兮〕” 하였는데, 공성(公姓)은 공손(公孫)을, 진진(振振)은 인후한 모습을 말한 것이다. 〈종사(螽斯)〉에 “메뚜기가 날아 많이도 모였네. 너의 자손들이 진진하구나.〔螽斯羽 詵詵兮 宜爾子孫 振振兮〕” 하였는데, ‘진진’은 ‘성대한 모양’을 말한 것이다. 원문의 진진공손(振振公孫)은 성대하게 번창한 신라 왕족을 비유한 것이다. 〈문왕(文王)〉에 “상나라 자손들이 그 숫자가 억뿐만이 아니지만, 상제가 이미 명하셨기 때문에 주나라에 복종하였네.〔商之孫子 其麗不億 上帝旣命 侯于周服〕” 하였다. 여기서는 신라의 왕족들이 그 숫자가 매우 많았다는 뜻으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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