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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은리 명성재(明盛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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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군(任實郡) 재실(齋室) # 명성재
최근 3개월 조회수 : 14 (3 등급)
【향토】
(게재일: 2024.01.04. (최종: 2024.01.02. 22:36)) 
◈ 어은리 명성재(明盛齋)
오수역에서 동계로 가는 13번 국도에서 삼계면 소재지 못미처 군수 이기방 선정불망비에서 우회전하면 바로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명성재(明盛齋)는 이 지역에 거주하는 연안김씨(延安金氏)의 선조 판결사 만은(晩隱) 김벽(金壁)의 재실로 팔작지붕 아래 겹처마를 두르고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지어졌다.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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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은리 명성재(明盛齋)
 
오수역에서 동계로 가는 13번 국도에서 삼계면 소재지 못미처 군수 이기방 선정불망비에서 우회전하면 바로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명성재(明盛齋)는 이 지역에 거주하는 연안김씨(延安金氏)의 선조 판결사 만은(晩隱) 김벽(金壁)의 재실로 팔작지붕 아래 겹처마를 두르고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지어졌다. 북동서쪽으로 각각 작은 문이 있으며, 조선식 담장으로 되어 있다. 본 재실은 고종 17년(1880)에 세웠고, 내부에 3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입구의 솟을대문 상량에는 신사(辛巳 : 1941) 4월 1일 상량문을 써서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1. 어은 명성재기(明盛齋記)

 
호남의 남원은 예부터 산수가 아름답고 수려하기로 이름나 있었으며 남원의 말천(秣川)은 더욱 아름답기로 이름나있다. 하늘이 빚은 노산이 우뚝 북쪽에 세워져 있고 그 남쪽 기슭에 마디마디 힘이 서려 주위 10여리에 여러 집안의 이름난 묘소들이 많아 10여 곳에 이른다. 모두 재각과 재실이 있다. 우리 12세 조고(祖考) 증판결사(贈判決事) 부군(府君)의 묘소가 있는 말천방(秣川坊) 원천국(源川局) 경좌원(庚坐原)도 노산의 한 기슭이다. 산세[龍勢]가377) 육징(六徵)하여 여러 이름난 묘와 더불어 병칭되니 그 단정하고 평활한 곳이 뛰어나다고 할 만하다.
 
부군의 시조는 고려(高麗) 사문박사(四門博士) 김섬한(金暹漢)이시다. 나복산인(蘿葍山人) 김도(金濤)를 거쳐 조선조에 이르러 문정공(文靖公) 김자지(金自知)가 부군의 5대조이다. 재령군수(載寧郡守) 문재공(文載公) 김잉팔(金仍八), 호당(湖堂) 전한공(典翰公) 김준(金嶟), 생원진사 양시에 입격한 김계윤(金繼尹), 전설사 별좌(典設司別坐) 김순례(金順禮)는 고조부, 증조부, 조부, 부친이시다. 빛나는 덕(德)과 아름다운 행적이 세세토록 이어져 명망이 있었다. 부군(府君)은 임진왜란에서 공훈을 세워 포상되는 은전을 입었다. 그 묘소에 있어서 고관을 지낸 외손들도 즐비하여 전배(展拜)하는 예를 행하여 심상하게 행로에 왕왕 우러러 바라보는 마음이 있었으니 지금까지 2백여 년이다.
 
무덤 아래 한 칸의 재소(齋所)도 없어 자손들이 한을 품은 지 오래되었다. 경진년 족대부(族大父) 김농수(金瀧秀)씨와 삼종숙(三從叔) 김사언(金思源)씨 및 나의 아버지 김사언(金思彦), 그리고 여러 종인들이 무덤 아래 땅에 재실을 짓고서 ‘명성(明盛)’이라고 편액을 걸었다. 대개 『중용(中庸)』의 ‘재명성복(齋明盛服)’에서 그 뜻을 취하였다.378)
 
아! 부군의 후손이 몇 백명인지 각읍에 흩어져 살고 있고 제사를 지내는 날에 찾아와 참가하는 사람이 백여 명이다. 함께 이 제각에 올라 그 제복(祭服)을 갖춰 입으니 자연스레 그 가지런하지 않았던 마음마저 가지런해지고 제사를 드리며 그 명결(明潔)을 다하니 선령(先靈)이 좌우에 가득 계신 듯하다. 이에 선조를 사모하는 마음의 만에 한 가지라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제각은 본래 띠지붕이었는데 18년 후에 족형 김한기(金漢基)씨가 여러 종가의 의견을 물어서 서까래를 더하고 기와를 새로 덮었다. 이 일에 나도 참여하였으니 정유년 봄이었다.
 
9월 중양절 13대손 김양기(金亮基) 삼가 짓다.
 
 
 

1.1. 明盛齋記

 
湖南之南原 古稱山水佳麗 南原之秣川 尤稱其美 天作魯山屹然北立 其南麓節節 有力周回十餘里 諸家名墓多至十數 皆有齋所爲室焉 惟我十二世祖考 贈判決事府君墓所 在於秣川坊 源川局 庚坐原 亦魯下一麓也 龍勢六徵與諸名墓並稱而其端正 平濶似或勝之府君 以高麗四門博士 諱暹漢爲鼻祖 歷羅葍山人 諱濤 至我朝文靖公 諱自知 卽府君之五代祖也 文載寧郡守公 諱仍八 湖堂 典翰公 諱嶟 生進俱中 諱繼尹 典設司別坐 諱順禮 高曾祖禰也 徽德美蹟 連世有望 府君有功 於龍蛇之役 至蒙褒典 其於墓所外裔冠 盖比比有展拜之禮 尋常行路往往 有瞻仰之心 迨至二百餘年 墓下無一間齋所 子孫茹恨久矣 粤在庚辰 族大父 諱瀧秀氏 與三從叔 諱思源氏 及不肖之先人 諱思彦 與諸從 創設一齋于墓下 容武之地 揭之以明盛 盖取思傳齋明盛服之義也 噫 府君之裔 其麗幾百 散在各邑 歲事之日 來參者爲百餘則 共登是齋服其祭服 自然有齊 其不齊之心 粢盛之薦 盡其明潔庶幾 先靈洋洋乎左右矣 於是可以見慕先之萬一齋本茅 盖後十八年 族兄漢基氏 詢議于群 從加之椽覆之瓦 是役也 不肖參焉 時則丁酉春也
 
是歲秋九月 重陽 十二代孫 亮基 謹識
 
 
 

2. 어은 명성재기(明盛齋記)

 
남원의 치소(治所)에서 서북쪽으로 40리 쯤에 노산(魯山)이 있으니 바라보기에도 울창한 소나무와 삼나무 숲이 미산(米山)을 둘러 앞에 우뚝 섰고 원천(原川)은 삼계(三溪)로 흘러 내리는 곳이니 이곳은 판결사[判決] 김벽(金璧)379)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그 아래에 명성재(明盛齋)가 날개를 펴고 일어서는 듯 있으니 판결사[判決]의 후손 김용수(金龍秀), 김사원(金思源), 김사언(金思彦)씨가 지은 사가삼영(四架三楹)의 끝에 단연(短椽)380)을 갖춘 재각으로 축례(祝禮)를 할 만하고 초동목수(樵童牧豎)를 경계할 만하다. 재각이란 봄가을에 무덤[窀穸]381)을 탁겸(托兼)하는 것이니 어찌 일찍이 산수를 즐기려고 만들겠는가?
 
김사언(金思彦)의 후손 김도기(金道基)군이 그런 사실에 대해 추술(追述)하고 기둥에 걸 글을 나에게 부탁하였다. 내가 제안(齋顔)을 쓰기에는 과분하고 부족하다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생각하니『중용(中庸)』의 가르침에서382) 출척(怵惕)하는 바가 있어서 그 재각의 뜻을 부탁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精神)이라는 만물(萬物)에 체득되어 그 정성으로써 깨우치는 것이니 마치 순임금이 국그릇에서 요임금을 보고 담장에서 요임금을 보는 것 같이 양양(洋洋)한 것이겠구나. 정성을 드리지 않으면 사물이 없는 것이니 사물이 없으면 정신을 체득할 수 없으니 존재하겠느냐! 그러므로 정신에게는 정성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을 위주로 해야 하니 공경하지 않으면 정성도 있을 수도 없는 것이다. 때문에 반드시 재명(齋明)은 그 안에서 전일하게 하고 성복(盛服)은 그 밖에서 엄숙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무릇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것은 어떤 일인들 공경하지 않을 수 이겠느냐마는 성인(聖人)이 더욱 정신에게 공경함을 다하였던 것은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대개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형태가 없으면 소홀히 하고 들리지 않으면 편안하게 여기는 것이라 아무리 하늘이 맺어준 근친(近親)이라도 사라지면 멀어지는 법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죽은 사람 섬기기를 산 사람 섬기듯이 하고, 이미 돌아가신 분 제사 모시기를 살아계신 것처럼 모시는 것이 지극한 효도이다.’라고 하였던 것이다.383) 『중용』의 귀신장(鬼神章)은 ‘부모를 편안하게 한다’는 내용 아래 이어지는데 무릇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더욱 정성스럽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또한 순임금이 순임금이 되고, 문무주공(文武周公)이 문무주공이 되는 것은 그 순서대로 받들어서 높일 사람을 높이고 귀한 사람을 귀히 여기고 어른을 어른으로 대접하여 그 체상(褅嘗) 제사의384) 근본을 밝혔기 때문이다. 무릇 여러 김씨 가운데 이 재각에 오른 사람은 편액한 까닭을 보면서 스스로 공경하면 백성에게 시행되지 않아도 백성들이 공경할 것이니 무너져가는 세상에서 다행이지 않겠는가?385)
 
판결공(判決公)이 남쪽 땅의 훌륭한 선비이신데 효자 승박(承朴)을 두셨고, 또한 5세를 내려가 시중(是重)이 송시열의 문하의 고제로서 그 무덤가에 칭제(稱齋)하였으니 모두 음성을 듣는다.
 
경자년(庚子) 3월 완산(完山) 후손 하석(霞石) 김용원(金容元)이 짓다.
 
 
 

2.1. 明盛齋記

 
南原治之西北 四十里有魯山 松杉望之蒼鬱遶米山 而前屹原川注三溪而 流是有 金判決 諱璧 衣履之藏 而其下有所謂明盛齋 翼然而起 判決後孫 龍秀 若思源 思彦氏 實刱焉 四架三楹 尾以短椽 于以容祝禮 于以戒樵牧 一齋而春秋窀穸之托兼焉 曷嘗爲溪岑娛也 思彦之胤嗣 道基君追述其事 以揭楹文屬余 余以爲齋顔可侈則未也 竊有所怵惕于思訓者 請因命齋之義 而復之可乎 神者體乎萬物 而格之 以其誠 如在羹見堯 在墻見堯 固洋洋乎 而不誠無是物 無物則神無 所體而在焉 故祭神以誠爲主 非敬無以存誠 故必使齊明以一其內 盛服以肅其外也 夫修己治人 何事非可敬 而聖人尤致敬於神者 以其所不見不聞也 盖人之情 忽於無形 恬於無聲 雖以天親之近 且切旣沒則遠 故曰事死如事生 事亡如事存 孝之至也 此鬼神章所以係於父母順矣之下而猶懼夫愈遠愈不誠 又以舜之爲舜文武周公之爲 文武周公 係之其次 推而及奠奠貴貴長長 發明其褅嘗之本 則凡諸金之登是齋者 視所以 扁 自身而敬可不施於民 而民敬之庸非頹世之幸也歟 判決公 旣南服善士矣 而有孝子曰 承朴又五傳 而有諱是重 以宋門高第 稱齋於其阡 皆聲咳而聞
 
庚子 三月 完山 後人 霞石 李容元 贊
 
 
 

3. 어은 명성재기(明盛齋記)

 
무릇 재각의 편액은 명성(明盛)이라 하였는데, 『중용(中庸)』386) 장구(章句)의 ‘조상 제사를 잇는 것이 첫 번째 의리이다.’라는 구절에서 취한 것이다. 나의 12대 할아버지 장예원(掌隸院) 판결사(判決事) 부군(府君)과 그 부인 함양박씨(咸陽朴氏)가 묻히신 곳이다. 치소[任府]의 서북 방향의 노산(魯山)의 산기슭의 원천골[源泉]에 자손들이 세거하면서 근처 마을에 자라고 있는 오동나무와 삼나무를 보살피고 가꾸면서 선영(先塋)을 돌아보고 청소하며 지낸 세월이 얼마나 되는 지 알 수조차 없다.
 
공의 이름은 김벽(金璧)이고 자(字)는 화가(和可), 호는 만은(晩隱)이다. 신라의 종실에서 나왔으며, 시조인 김섬한(金暹漢)은 고려조 사문박사(四門博士)를 지냈다. 그 후로부터 세습하여 길게 이어졌는데 고려말에 이르러 나복산인(蘿葍山人)의 문행(文行)과 충의(忠義)와 조선 초에 문정공(文靖公)의 도덕(道德)과 문장(文章)은 사서[史乘]에 실려 소상히 밝혀져 있다. 문정공의 셋째 아들 김잉(金仍)은 문과에 급제하고 군수를 지냈는데 공의 고조부가 된다. 증조부는 김준(金嶟)으로 문과에 급제하고 사예(司藝)에 올랐으며, 조부는 김계윤(金繼尹)으로 생원과 진사시에 모두 급제하였다. 아버지 김순례(金順禮)는 전설사 별좌(典設司 別坐)를 지냈다. 연산군대 갑자년에 관직에 나가려는 뜻을 끊고 낮고 거친 곳으로 은거하여 비로소 남원의 북쪽 광동(廣洞)의 사저(私第)에서 살기 시작하였다.
 
공은 천성이 순수하고 강직하며, 재주와 행동이 남보다 뛰어났다. 어려서 성균관[國庠]에 들어갔는데 곧 참봉(參奉)에 제수되었다. 성리학에 침잠하여 탐구하면서 만헌(晩軒) 정염(丁焰), 활계(活溪) 이대유(李大㽕) 등 여러 선비들과 도의(道義)로 사귀었다. 평상시 동정(動靜)할 때 한결같이 주자[紫陽]를 따랐으며387) 수신제가(修身齊家)의 가법(家法)에는 충효를 법도로 삼았다. 매번 국기일(國忌日)에는 반드시 재계하고 정성을 다하였다. 종신토록 게을리하지 않았다. 임진왜란[龍蛇之燹]으로 한양을 지키지 못하고 임금께서 수레를 타고 파천(播遷)하셨을 때, 공은 남쪽 고을에 있었는데 변란을 듣고는 통곡하면서 북쪽을 바라보면서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며 밤낮으로 그만두지 못했다. 호남 좌도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고을사람들이 공을 추대하여 만헌 정염과 더불어 모주(謀主)가 되었지만 연로하여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과 청계(淸溪) 양대박(梁大樸)에게 양보하였다. 아들 김승박(金承朴)에게 집안의 장정들과 마을 사람들을 거느리고 식량[粮餉]과 군[器械]들을 수송하도록 하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정유재란[丁酉再猘]에는 명나라 장수 양원(楊元)에게 글을 써서 산성을 지키라고 권유하였으나 명나라 장수가 듣지 않았다. 마침내 패하여 적성(積城)이 함락되는 날에 공이 울분으로 크게 울부짖으며 눈물을 흘리며 피를 토하였다. 이로 인하여 병세를 얻어 드디어 세상을 등졌으니 향년 90세였다.
 
아! 처음부터 끝까지 충심으로 나라를 걱정하여 위급한 난리에 의리로 죽기를 맹서하여 비록 책상 맡에서 고종(考終)하기 보다는 차라리 열열히 기꺼이 칼날을 밟고 끓는 물에 나가고자 하였으니 이것은 학문의 힘 가운데 나오지 않은 것이 없다. 그때에 도신(道臣)이 직접 공의 충효과 학행에 대해 여러 차례 임금에게 아뢰어서 장예원(掌隸院) 판결사(判決事)에 증직되는 은혜를 입었으니 그 영광스런 감회가 지극하였다.
 
애석하구나! 후손이 쇠퇴하여 크게 드러나지 못하였으니 선열(先烈)의 통한이 얼마나 극심하였겠는가? 비로소 경진년 봄에 공의 묘 아래 약간의 땅에 재각을 세우고 장차 제사를 지낼 때 재숙(齋宿)하는 곳으로 삼았다. 그리고 명성(明盛)이라는 호액(號額)을 걸었다. 또 계사년(癸巳) 가을에 서까래를 보수하고 기와를 덮었고, 묘표와 묘갈을 고치고 새로 묘도(墓道)를 증설하였다. 아, 나의 뒤에 오는 후손들이 이 재각에 올라서 선조들의 묘를 바라보고, 재각의 이름을 돌아보면서 그 뜻을 생각하며, 각자 안으로는 재계(齋戒)하는 정성을 다하고 밖으로는 옷을 갖춰 입는 의례를 닦아서 양양(洋洋)하게 옆에 계신 듯한 영령을 이어간다면 재각의 이름을 지은 뜻을 더럽히지 않게 될 것이다.
 
 
斯齋營立已多時  이 재각을 건립한 지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났으니
愴慕追先義可知  구슬피 선조를 추모하는 뜻을 알 수 있겠네.
霜露凄凄天氣變  처량하게 내려 앉는 서리이슬에 천기(天氣)는 변하는데
楸杉鬱爵歲年遲  울창한 오동나무 삼나무에는 세월이 더디네.
後來榱棟修能葺  훗날 서까래 마룻대 고쳐가면서
永世焄香賴及期  영원히 제향을 올려 기약하리니
降陟精靈如在在  오르내리시는 정령(精靈)이 계신 듯 하니
雲孫無忝式遵儀  후손들은 욕되지 않게 법식을 따르겠지.
 
숭정후(崇禎後) 5을~ 4월 어느 날
12대손 김한기(金漢基) 삼가 글을 짓다.
 
 
 

3.1. 明盛齋記

 
夫齋之扁 以明盛爲者 斷取思傳章句之文 以寓承祀祖先之義也 惟我十二代祖考 掌隸院 判決事 府君 妣咸陽朴氏 壽藏之地 任府西北 魯山之麓 源泉之谷 子孫世居 近洞護養楸杉 瞻掃塋域 不知幾經霜露矣 公諱璧 字和可 號晩隱 系出 新羅 宗姓 鼻祖 諱暹漢 爲麗朝 四門博士 自後 世襲蟬聯 逮夫麗季 蘿葍山人之文行忠義 國初 文靖公之道德文章 昭載史乘 文靖公之第三子 諱仍文科郡守 卽公之高祖也 曾祖諱嶟文科司藝 祖諱繼尹生進俱中 考諱順禮 以典設司別坐 燕山甲子 絶意 榮途 筮遯遜荒 始居南原北 廣洞之私第焉 公賦性純剛 才行卓絶 早升國庠 旋除寢郞 潛究性理之學 與丁晩軒李活溪諸賢 爲道義交 平居動靜 一遵紫陽 家法修齊 有度忠孝 實至每遇國忌 必齊素致誠 終身不惰 龍巳之燹 京都失守 乘輿播越 公時在南鄕 聞變痛哭 北望籲天 晝宵不撤 及湖左義旅之起也 鄕人推公 與丁晩軒爲謀主 以年老讓于高霽峯梁淸溪 命子承朴 收率家丁里人 輸送粮餉器械 終始匪懈 丁酉再猘 貽書天將楊元 勸守山城 天將不聽 竟以敗績 城陷之日 公發憤號哭 淚盡血出 因病歲餘 遂以沒世 享壽九十
 
噫乎 終始憂國之忠 急難誓死之義 雖得考終於几席之上 寧肯下於蹈刃赴湯之烈也 斯莫非學力中出來者也 其時道臣 及直指以公忠孝學行 累啓天陛 蒙贈掌隸院判決事 榮感至矣 惜乎 後承淪沈 不能大闡 先烈痛恨何極 始於庚辰春刱立 是齋於公墓下 數武之地 以爲將祀時齋宿之所 因揭明盛之號額 又於癸巳秋 補椽盖瓦改竪表碣 增新墓道 噫 凡吾來裔登是齋 瞻先墓者 顧名思義 各使內致齋明之誠 外修盛服之儀 以承洋洋如在之靈 則庶不忝命齋之義也夫
 
斯齋營立已多時 愴慕追先義可知
霜露凄凄天氣變 楸杉鬱爵歲年遲
後來榱棟修能葺 永世焄香賴及期
降格精靈如在在 雲孫無忝式遵儀
 
崇禎後五乙元 四月 日 十二代孫 漢基 謹識
 
 

 
각주
377) 용세(龍勢) : 용은 산맥, 산맥이 내려온 형세를 말하는 것.
378) 원문의 思傳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지은 책이라는 뜻으로 『중용(中庸)』을 말한다.
379) 김벽(金璧): 본관은 연안. 자는 화가(和可), 호는 만은(晩隱). 문정공(文靖公) 김자지(金自知)의 후손이며, 김순례(金順禮)의 아들이다. 김벽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정암 조광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534년(중종 29)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천거로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비들이 의병장으로 추대하였으나, 김벽은 자신의 나이가 83세의 고령이라는 이유로 이를 사양했다. 대신 아들 김승박을 시켜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의 창의소(倡義所)에 군량과 군비를 보냈다. 또한 왜란 중에 김벽은 명나라 장수 양원(楊元)에게 편지를 보내어 ‘읍터는 지세가 가파르거나 험하여 적을 막을 만한 곳이 없어 지키기 어려우니, 오직 산성을 고수하라’고 하였으나 양원이 이를 듣지 않아 마침내 패전했다고 한다. 뒤에 관찰사의 천거로 판결사(判決事)에 임명되었다.
380) 단연(短椽) : 기둥 윗머리의 사개통에 들보나 도리를 받치기 위해 가로나 세로로 먼저 얹는 짧은 나무를 가리킨다.
381) 원문의 둔석(窀穸)은 무덤의 광중(壙中). 묘혈(墓穴)을 가리킨다.
382)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지은 중용을 思傳이라고 한다. 문맥을 미루어 중용의 가르침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383) 『중용장구』 제19장에 “죽은 이 초상 치르기를 산 사람 섬기듯이 하고, 이미 돌아간 이 제사 모시기를 생존한 이 섬기듯 하는 것이 지극한 효도이다.〔事死如事生 事亡如事存 孝之至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384) 교사(郊社)의 …… 의(義) : 교(郊)는 하늘에 올리는 제사이고, 사(社)는 땅에 올리는 제사이다. 체(褅)는 천자가 종묘에서 선조들에게 올리는 제사이고, 상(嘗)은 가을 제사이다. 계절마다 모두 제사가 있는데, 여기서는 대표적으로 하나만 든 것이다
385) 주풍(周豐)이 …… 말 : 노 애공(魯哀公)이 은사 주풍에게 유우씨(有虞氏)와 하후씨(夏后氏)가 백성에게 신임과 공경을 받은 이유에 대해서 묻자, 주풍이 “잡초 우거진 무덤 사이에서는 백성들에게 슬퍼하라고 시키지 않아도 백성들 스스로 슬퍼하고, 사직과 종묘 근처에서는 백성들에게 공경하라고 시키지 않아도 백성들 스스로 공경한다. 은나라 사람이 맹서하는 글을 짓자 백성들이 배반하기 시작하였고, 주나라 사람이 회합하는 일을 행하자 백성들이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참으로 예의와 충신과 정성스럽고 진실한 마음이 없이 백성의 위에 군림한다면, 비록 굳게 약속을 한다 할지라도 백성들이 풀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墟墓之間 未施哀於民而民哀 社稷宗廟之中 未施敬於民而民敬 殷人作誓 而民始畔 周人作會 而民始疑 苟無禮義忠信誠慤之心以涖之 雖固結之 民其不解乎〕”라고 대답한 기록이 『예기』 〈단궁 하(檀弓下)〉에 나온다.
386) 원문의 思傳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지은 중용을 말한다.
387) 원문의 자양(紫陽)은 주희(朱熹, 1130~1200)를 가리킨다. 자양은 주희의 별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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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군 (淳昌郡)
고창군 (高敞郡)
부안군 (扶安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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