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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은리 화수당(花樹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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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군(任實郡) 재실(齋室) # 화수당
최근 3개월 조회수 : 12 (3 등급)
【향토】
(게재일: 2024.01.04. (최종: 2024.01.02. 22:43)) 
◈ 어은리 화수당(花樹堂)
삼계면 어은마을에 있는 화수당은 이 지역에 거주하는 청주한씨의 재실로 팔작 기와지붕에 정면 5칸 측명 2칸으로 1940에 지었다고 한다. 담장은 흙돌 담장인 조선식담장으로 되어 있다. 이곳에는 주련이 4개가 있고 안에는 현판 4개가 걸려 있다.
목   차
[숨기기]
어은리 화수당(花樹堂)
 
삼계면 어은마을에 있는 화수당은 이 지역에 거주하는 청주한씨의 재실로 팔작 기와지붕에 정면 5칸 측명 2칸으로 1940에 지었다고 한다. 담장은 흙돌 담장인 조선식담장으로 되어 있다. 이곳에는 주련이 4개가 있고 안에는 현판 4개가 걸려 있다. 화수당은 마을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문 앞에는 자연석의 작은 바위가 서있다. 또한 그 옆에는 우리나라 옛 농경문화유산인 연자방아 돌이 세워져 있다.
 
 
 
 

1. 삼계 화수당기(花樹堂記)

 
당(堂)은 운수현(雲水縣) 노산(魯山) 아래 부자봉(夫子峯) 이구(尼邱)의 남쪽에 있다. 대개 성수산(聖壽山)이 팔공(八公)에서 시작해서 떠받들어 싣고 펑퍼짐하게 수 십리가 마치 숙였다 일어난 듯 달리다 멈춘 듯하며 기상(氣象)은 용이 오르는 듯 호랑이가 달리는 듯하며 형세(形勢)는 상서로운 구름이 끼여 있는 듯하다. 서북쪽에는 웅진(雄鎭)이고 남쪽을 바라보니 방장(方丈)이 첩첩하여 아득히 일산 같고 동쪽에는 만행산(萬行山)이 있어서 구름 밖에 우뚝 솟은 것이 하늘기둥 같고 그 중앙에 대촌면(大村面)이 있고 동쪽을 어은동(漁隱洞)이라고 한다.
 
옛적 청주(淸州) 한(韓) 안양공(安襄公) 휘(諱) 종손(終孫)의 처(妻)인 청양현부인(靑陽縣夫人) 김씨(金氏)가 두 아들 진산공(珍山公) 희(曦) 창원공(昌原公) 석(晰)을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가서 살았다. 진산(珍山)의 자손이 4개의 파(派)로 갈라졌고 선영(先塋)에 흩어져 살면서 여러 번 병란(丙亂)을 겪었으니 대수(代數)가 멀어지고 규약(規約)이 해이해지게 되었다.
 
지난 갑술(甲戌)년 진사(進士) 규성(圭成)씨가 문중(門中) 임무를 맡고 있을 때 그의 족대부(族大父) 영식(榮植)·정식(廷植)씨로부터 ‘가문(家門)의 법규(法規)를 세워 정하라.’는 명(命)을 받들게 되었다. 소나무를 판매한 약간 돈을 자본(資本) 삼아, 여러 해 동안 성실하고 근면히 하여 각처 선영(先塋)의 제전(祭田)도 더 늘리고 또 석의(石儀)도 갖추었다. 돈독하고 화목함이 예전보다 배나 되었고, 애경사(哀慶事)에도 상부상조하였고, 봄 3월에 가을 9월에 의례 화수(花樹) 모임을 갖고 윤리(倫理)가 돈독하고 화락했으니 마침내 남쪽의 아름다운 일이 되었다.
 
하지만 일정한 모임장소가 없어서 매년 4개의 파(派)가 돌아가면서 장소를 변경하는 번거로움을 면치 못했다. 경진(庚辰)년에 태연(泰淵)군이 여러 종중 어른들에게 묻고 의논하여 구지(舊址)에 터를 잡아 5칸 당(堂)을 지었으니 동쪽 서쪽에 3개의 실(室)과 중앙에 2개의 헌(軒)이 있는 규모였다. 문호(門戶)를 사방으로 열면 한자리에 수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니 이른바 ‘한 실(室)에 백족(百族)이 모일 수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저 시경(詩經)에 “전인(前人)이 이미 묵힌 밭은 후인(後人)이 계승하여 개간해야 하고, 이에 아비가 실(室)을 지었다면 그 자식은 반드시 단청을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오호라, 한(韓)씨 현부인(縣夫人) 모자(母子) 및 영식(榮植)과 몇몇 공(公)들이 이미 먼저 일을 시작했다. 후곤(後昆)은 마땅히 선대의 아름다운 업적을 추모 계술(繼述)하여 능히 각각 힘써 본받아 대업적(大業蹟)을 공고히 해야 하니, 이것이 바로 부자(夫子)가 이른바 ‘부모에게 효도하여 집안을 화목하게 하는 것이 천하(天下)에 지덕(至德)의 요도(要道)이다.’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위(韋)씨 집안 화수(花樹)388)만이 어찌 유독 예로부터 아름답다고 하겠는가. 지금 중석(重錫)·용수(鏞洙)가 먼 길을 찾아와서 기문(記文)을 요청하였다. 나는 실로 감동을 느낀바가 있어서, 이를 적어서 제공(諸公)들의 찾아보는 자료로 갖춘다.
 
단기(檀紀) 4287년 갑오(甲午) 6월 소서절(小暑節)
완산(完山) 최병심(崔秉心)은 기(記)하노라.
 
 
 

1.1. 花樹堂記

 
堂在雲水縣魯山下夫子峯尼邱之陽 蓋聖壽山 根於八公 而扶輿磅礡數十里 若頫而起 若騖而止 氣如龍虎蹲跳 勢如瑞雲葱鬱 雄鎭乎西北 南望方丈重重 縹渺如華蓋 東有萬行亭亭 雲表如天柱 中有大村面 東曰漁隱洞 在昔淸州韓安襄公諱終孫妻靑陽縣夫人金氏 率二子珍山公曦昌原公晰 南下奠居 而珍山子孫分爲四派 散居世葬 累經兵燹 代遠規弛 往在甲戌 進士圭成氏門任時 其族大父榮植廷植氏之命 立定門法 以賣松錢若干爲本 積年誠心勤敏 各處先塋增置祭田 且具石儀 敦睦倍舊 哀慶相助 春三秋九 例會花樹 敦倫敍樂 遂爲南中美事 但無定所 每年四派 未免輪回 至庚辰泰淵君 詢謀僉宗 相舊址作五間堂 東西三室中二軒 門戶四開 便成一座 可容數百人 所謂一室百族之會者非也歟 夫前人旣菑 後人當繼畬 若考作室 厥子必墍雘矣 嗚呼韓氏縣夫人母子及榮植數公 旣先刱統 則後昆固當追述先懿 克體各勉以篤鞏大業蹟 是乃夫子所謂立孝修睦爲天下之至德要道也 然則韋氏之花樹者 奚獨專美於古也耶 今重錫鏞洙遠來請記 余實有所興感 書
 
此以備 諸公瞻繹之資焉
檀紀四千二百八十七甲午六月小暑節 完山 崔秉心 記
 
 
 

2. 화수당 진산공(珍山公) 묘석의(墓石儀) 개수기(改竪記)

 
병진(丙辰)년 11월 동짓날 안양공(安襄公)의 부조묘(不祧墓)에 다례(茶禮)를 지냈다. 그리고 우리 종족(宗族) 노소(老少)가 화수당(花樹堂)에 일제히 모여 종중(宗中) 일을 토론하였다. 모두 말하기를 ‘진산공(珍山公) 묘석의(墓石儀)를 개수(改竪)하는 일은 오래 숙원(宿願)했던 일이고 더 미룰 수 없으니 궐연(蹶然)히 분발하여 개수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오호라, 우리 진산공(珍山公)의 묘소(墓所)에는 옛적 묘갈(墓碣)이 있지만, 세월이 오래되어 이끼가 끼고 또 규모(規模)도 박약(薄弱)하다. 그러므로 누차 개수할 것을 꾀했으나 재력이 미치지 못해서 이 해 저 해 미룬 지가 오래되었다. 미루어두고 개수하지 않는다면 백년토록 하청(河淸)하기를 기다리는 겪이다. 그러므로 이에 추진회(推進會)를 설립(設立)하고 여러 종족과 널리 의논하였다. 대중이 모두 기꺼이 찬성하고 성금을 헌납하니 모인 것이 백미(白米) 70여 섬이었다. ‘이번 기회에 사복시정공(司僕寺正公)·대호군공(大護軍公)·정략장군공(定略將軍公)의 묘소석의도 아울러 개수하자.’고 의논하였다.
 
이듬해 정사(丁巳)년 봄 비석 세우는 공사에 착수했다. 문학박사(文學博士) 이가원(李家源)이 진산공(珍山公) 갈문(碣文)을 지었으며, 추연(秋淵) 권용현(權龍鉉)이 사복시정(司僕寺正)·대호군(大護軍) 양공(兩公)의 갈문을 지었고, 가락(駕洛) 김형재(金亨在)가 정략장군(定略將軍)의 갈문을 지었다 기미(己未)년 봄 공사를 마치고 그것으로 비석(碑石)을 세웠다. 인석(人石)에 상석(床石)을 배치하니 묘역(墓域)이 경결하고 엄숙하여 정령(精靈)께서 생존해 계시는 것 같았다. 산과 내는 더 빛났고 동부(洞府)는 환하게 새로우니, 아아, 성대하도다.
 
무릇 우리 종원(宗員)들이 조상을 숭배하고 친족들과 화목하게 지내는 것을 마음으로 삼고 반드시 숙연히 조상을 생각하고 이에 정성을 바쳐 제사(祭祀)모시는 것을 영원히 지켜 바꾸지 않는다면 먼 조상을 추모하여 근본(根本)에 보답(報答)하는 도를 했다고 할만하다.
 
이 공사는 백년토록 하려던 대업(大業)이었으니 어찌 노고가 없이 이루어졌겠는가. 이 사업을 하는 동안 족질(族姪) 창연(昌淵)군은 총무(總務)와 재무(財務)를 담당하여 게을리 하지 않고 시종일관 정성과 노고를 다 하였으며, 족형(族兄) 효호(孝鎬)씨·금석(金錫)씨는 연로한 나이로 돈을 수납하는 책임을 맡아 추위더위를 무릅쓰고 노력한 공노가 실로 많았다. 나는 보잘 것 없는 재주로 외람되게 중한 채임을 맡았다. 비록 자리만 차지했으나 이어 추모하는 마음이 더 절실했다. 그러므로 대략 그 전말(顚末)을 위와 같이 서술하노라.
 
진산공(珍山公) 15세손 동석(東錫)은 손 씻고 삼가 쓴다.
 
 
 

2.1. 珍山公墓石儀改竪記

 
歲丙辰十一月冬至之節 行安襄公不祧墓茶禮 而吾宗少長齊會于花樹堂 討論宗事 僉曰珍山公墓石儀改竪 積年宿願之事 而不可以遷延也 則蹶然奮發營之可也 嗚呼 惟我珍山公墓所舊有碣 歲久苔蝕 且規模薄弱 故累圖改竪 然財力未逮 此年彼年遷延者久矣 遷延而不營 則如待百年之河淸也 故於是設立推進會 廣議于諸宗 則衆皆肯贊而獻誠 聚得者白米七十餘石也 此際司僕寺正公大護軍公定略將軍公之墓所石儀 亦幷謀改竪 翌丁巳春伐石始工 文學博士李家源 撰珍山公碣文 秋淵權龍鉉 撰司僕寺正大護軍兩公碣文 駕洛金亨在 撰定略將軍碣文 己未春訖工 以之而立碑 人石置床石 墓域淨肅 精靈如在 山川增彩 洞府明新 猗乎盛哉 凡吾宗員以崇祖睦族爲心 必思肅然羹墻 致慤於斯 以承祭祀 永守勿替 則可謂追遠報本之道矣 是役也從百世之大業也 則豈無勞而成就哉 其在施役中 族姪昌淵君 掌總務財務 始終無懈 極誠殫勞 族兄孝鎬金錫兩氏以老齡 擔收錢責 冒寒暑努力之功 實多矣 余以菲才 猥荷重任 雖尸位 而仍切追慕之感 故略敍其顚末如右
 
光復後己未夏五月上澣
珍山公十五世孫 東錫 盥手謹識
 
 
 

3. 화수당서(花樹堂序)

 
당(堂)을 ‘화수(花樹)’라 이름 지은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대개 예날 위원외(韋員外)389)가 종족(宗族)을 모아놓고 천륜(天倫)을 즐겼다. 그런데 이 일을 당(唐)나라 때 잠삼(岑參)이 화수가(花樹歌)로 글을 지어 훌륭한 가문의 이름이 전해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후대에는 성대한 가문의 일이 되었으니 지금 여기에서 취하여 명명한 것이리라.
 
내 듣건대 ‘근본이 서야 도(道)가 생기며, 집에 들어가면 효도하고 집을 나오면 공경하며, 아비가 아비답고 자식이 자식다움에서부터 임금과 신하에 이르러서도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다워야 백 가지 행동이 따라서 선(善)하게 되며, 형제가 우애하고 종족이 화락하게 된다.’라고 하였으니 바로 이것이 성인(聖人)이 세운 가르침의 근본(根本)이다.
 
오직 우리선조(先祖) 진산공(珍山公) 휘(諱) 희(曦)께서는 충효(忠孝)의 고가(古家)로써 이 고장에서 사셨다. 진신(縉紳)과 재보(宰輔)가 대대로 번연(繁衍)하게 배출하였고 효(孝)·제(悌)로써 그 근본(根本)을 세우고, 시(詩)·예(禮)로써 그 덕(德)을 닦아 남쪽에서 성족(盛族)이 된 것은, 거의 선대(先代)의 유광(流光)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에 고종(高宗) 갑술(甲戌)년 돌아가신 족대부(族大父)이신 영식(榮植)씨 등 여러 어른께서 화수계(花樹稧)를 창설(創設)하였다. 그리고 사파(四派)의 제장노(諸長老)가 그 뜻을 계승하고 그 일을 서술하였다. 규일(圭馹)·광호(光鎬)·영석(榮錫)씨가 장의(掌議)로서 주관하고 규필(圭弼)·규섭(圭燮)·규학(圭鶴)씨가 서로 이어 임무를 교대하였으니 추위와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멀고 가까운 곳에서 근면하게 일을 한지가 여러 해가 되었다.
 
그 성의(誠意)가 독실하고 화목(和睦)이 도타웠으니 옹옹(雍雍)하여 친소(親疎)간에 구분하지 않았고 이이(怡怡)하여 노소(老少)의 차이가 있음을 알지 못했다. 의례 매년 봄과 가을에 계사(稧事)를 치를 적에 군현(群賢)과 소장(少長)이 모두 한 당(堂)에 모였으니 그 예모(禮貌)의 정중함과 그 위의(威儀)의 훌륭함은 어찌 위(韋)씨 집안만 아름다울 뿐이랴.
 
그러나 모임장소가 없는 것이 아쉬웠다. 혹은 4개의 파(派)가 윤회하면서 모이니 조금이나마 비용걱정도 없잖아 있었다. 그러므로 지난 경진(庚辰)년 모든 분들이 도모하고 의논하여 구지(舊址)에 터를 잡아 5칸 당(堂)을 지었으니 3개의 실(室)과 2개 헌(軒)의 규모였다. 문호(門戶)를 사방으로 열면 100여명이 앉을 수 있었으니 선대를 이어 단란하게 모이는 낙은 지금 족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 풍속이 옛 같지 않아서 변괴(變怪)가 곳곳에서 발생했다. 아아, 우리 잔손(孱孫)들은 전무후무한 이 말운(末運)을 당하여 어떻게 하겠는가. 혹여 옛 성인(聖人)이 입교(立敎)한 근본을 어기지 않고 또 돌아가신 장노(長老)께서 계술(繼述)한 의(義)도 실추하지 않고 서로 돈목(敦睦)하고 상호 면려(勉勵)하여 영세(永世)토록 지켜나간다면 어찌 우리가문(家門)의 낙(樂)에서만 그치겠는가.
 
임인(壬寅)년 동지일(冬至日)
후손 대연(大淵)은 삼가 서(序)하노라.
 
 
 

3.1. 花樹堂序

 
堂之名花樹 其來久矣 蓋古者韋員外 會宗族而樂天倫 歌花樹而傳美名者 爲後世之盛事也 今取於斯而命之歟 吾聞本立而道生 入則孝出則悌 父父子子以至君臣 百行之事 隨以善之 兄弟以友之 宗族以樂之者 卽聖人立敎之本也 惟我先祖珍山公諱曦 以忠孝古家 奠居玆鄕 縉紳宰輔 世出繁衍 以孝悌立其本 詩禮修其德 爲南中盛族者 殆幾流光矣 越在高宗甲戌 先族大父榮植氏數公 設花樹稧以刱之 四派諸長老 繼其志述其事 圭馹光鎬榮錫氏 掌議主之 圭弼圭燮圭鶴氏 相繼替任 不顧寒暑 遠近而勤敏者累年 其誠意之篤和睦之敦 雍雍然不分有親疎之間 怡怡焉不知有老少之異 例年春花秋菊之月 修稧事也 群賢少長咸集一堂 其禮貌之款 威儀之盛 奚但韋氏之美也 然恨無場所 或輪四派 不無顆費之慮 故去庚辰僉謀議同 相舊址而作五間堂 三室二軒 門戶四開 則可坐百餘人 承先團會之樂 今可足矣 但世風不古 變怪層生 嗟我孱孫不前不後 當此末運如何 倘不違古聖人立敎之本 又不失先長老繼述之義 交相敦睦 互爲勉勵 永世勿替 則豈但爲吾家之樂而已哉
 
龍集壬寅冬至日 後孫 大淵 謹序
 
 

 
각주
388) 위씨(韋氏)의 집안 화수(花樹): 당(唐)나라 때 위장(韋莊)이 화수(花樹) 아래에 친족을 모아 놓고 술을 마시곤 하였다. 잠삼(岑參)의「위원외화수가(韋員外花樹歌)」시(詩)에 “그대의 집 형제는 당할 수 없구나, 역경(列卿)과 어사(御史)와 상서랑(尙書郞)랑이 즐비하구나. 조회에서 돌아와서는 늘 꽃나무 아래에 모이나니, 꽃이 옥 항아리에 떨어져 봄 술이 향기로워라.”라고 한데서 연유한 고사(故事)로, 후대에는 종친(宗親)의 친목모임으로 쓰이게 되었다.
389) 위원외(韋員外): ‘위’는 성(姓). ‘원외’는 관직. 당(唐)나라 때 위장(韋莊). 화수(花樹) 아래에 친족을 모아 놓고 술을 마시곤 하였다. 잠삼(岑參)의「위원외화수가(韋員外花樹歌)」시(詩)에 “그대의 집 형제는 당할 수 없구나, 열경과 어사(御史)와 상서랑(尙書郞)랑이 즐비하구나. 조회에서 돌아와서는 늘 꽃나무 아래에 모이나니, 꽃이 옥 항아리에 떨어져 봄 술이 향기로워라.”라고 한데서 연유한 고사(故事)로, 후대에는 화목한 가문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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