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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6년 김만덕(金萬德) 제주특별자치도(濟州特別自治道)
【문화】
(2024.04.18. 14:44) 
◈ 김만덕, 월해금법 제정 후 167년 만에 바다 건너 육지행 허락
만덕(萬德), 제주 사람을 구하다!
이백여 년 전 제주도는 심각한 기후변화로 1792년부터 1795년까지 4년간 가뭄으로 흉년이 계속되고, 전염병이 번져 연일 아비규환(阿鼻叫喚)이 이어졌다. 매일 사람들이 굶어 죽고, 마을마다 병으로 죽어 이 기간에 죽은 자가 17,963명이나 되었다.
만덕(萬德), 제주 사람을 구하다!
 
 
이백여 년 전 제주도는 심각한 기후변화로 1792년부터 1795년까지 4년간 가뭄으로 흉년이 계속되고, 전염병이 번져 연일 아비규환(阿鼻叫喚)이 이어졌다. 매일 사람들이 굶어 죽고, 마을마다 병으로 죽어 이 기간에 죽은 자가 17,963명이나 되었다. 이런 심각한 상황은 육지 지역도 마찬가지였지만, 조정에서는 구호 곡물 1만 1천 석을 배에 실어서 보내지만, 수송 선단 12척 중 5척이 침몰해 상황이 더욱 심각했다.
 
 
▲ 제주도 김만덕 기념관
 
 
제주도 거상 만덕은 이웃의 아픔을 돌아보면서 자기의 전 재산을 내놓고 육지에서 쌀을 구해 오도록 하였다. 당시 제주도는 태풍이 지나가면서 배들이 모두 망가지고 항구 시설도 파괴되어 정말 항구에는 제대로 모양을 갖춘 배들이 거의 없었다. 연달아 온 태풍으로 모든 것이 한순간 지옥같이 변했지만, 상인 만덕은 제주 뱃사공을 찾아가 어렵게 설득했다.
 
뱃사공은 배를 다시 고쳐 육지로 나갔지만, 흉년으로 육지의 쌀값도 이미 천정부지로 올랐다. 뱃사공은 쌀 500여 석을 비싸게 사서 만덕에게 전달했다. 이에 만덕은 쌀을 친척에게 일부 나눠주고, 제주 관아에 모두 내놓았다.
 
흉흉한 소문이 자꾸 돌아 제주 목사 이우현은 제주도 참상을 있는 그대로 조정에 보고했다. 당시 전 제주 현감 고한록(高漢祿)이 300석을 내고, 장교 홍삼필(洪三弼)과 유학 양성범(梁聖範)도 100석을 내어 사람을 살리는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정조 20년(1796년) 11월 25일 병인 1번째 기사에 “제주의 기녀 만덕(萬德, 1739~1812)이 재물을 풀어서 굶주리는 제주 백성의 목숨을 구하였다고 제주 목사가 보고하였다. 이에 임금이 상을 주려고 하였으나 만덕은 사양하였다. 만덕은 소원이 바다를 건너 상경하여 금강산을 유람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이에 정조가 허락하고, 한양 올라오는 연로(沿路)의 고을들은 양식을 지급하게 하였다.”라는 글이 있다.
 
【출전】【태백산 사고본】, 『정조실록(正祖實錄)』 45권,
「丙寅 濟州妓萬德, 散施貨財, 賑活饑民, 牧使啓聞。 將施賞, 萬德辭, 願涉海上京, 轉見金剛山, 許之, 使沿邑給糧。」
 
 
제주 김만덕의 육지 출륙(出陸) 소원은 개혁 군주 정조에 의해 쾌히 받아들여졌다. 조선 정조는 “제주 기녀 만덕을 한양으로 올라오게 하라. 내가 친히 그의 소원을 들어줄 것이다.”라고 의정부에 명했다.
 
 
▲ 조선의 배
 
 
정조는 만덕이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의 각 군현과 역(驛)에서 숙식과 편의 제공하도록 명했다. 만덕은 1796년 병진년 음력 7월 28일 제주 화북포구에서 제주 목사와 마을 친척들의 환송을 받으며 돛단배에 올랐다.
 
그때 만덕의 나이가 이미 환갑을 앞두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손을 흔들며 “멩심허영 갔당 옵서!”라며 배웅을 하였다. 만덕 할머니가 탄 배는 중선으로 격군(格軍)을 포함해 약 40~50명이 탔다. 그들은 옹기종기 앉아서 멀리 산에 보이는 한라산을 바라보며 배가 육지에 잘 도착하기만을 원했다.
 
당시 제주와 강진, 해남을 오간 배의 규모는 문신 김상헌(1570~1642)이 기록한 《남사록(南傞錄)》에 자세히 적혀있다. 1600년 김상헌이 해남을 통해 제주도로 들어갈 때 일행은 38명이었다. 이증(李增, 1628-1686)이 1679년(숙종 5년) 9월 16일 제주 관리들의 비리를 조사하러 가면서 탄 배에는 53명이 승선했다.
 
돛단배는 좋은 바람을 만나면 아침에 제주에서 출발하여 한없이 넓고 푸른 남해를 건너서 10시간쯤 지나 저녁나절에 강진 마량이나 남포에 도착했다.
 
 
▲ 제주 고지도 金南吉, 1702년 제작 《한라장촉(漢拏狀矚)》 크기 476×733mm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제주 사람들은 관리들의 탄압과 극심한 공출 압력으로 섬에서 도저히 살기 어려워 배를 타고 육지로 몰래 이주하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이때 조정에서는 1629년 월해금법(越海禁法)을 제정하고, 육지로 나갈 수 있는 사람은 과거 응시자, 공물 운반자, 공적인 업무 수행자에 한정하였다.
 
상인 만덕 할머니가 월해금법이 제정된 이후 바다를 건너 육지로 나간 것은 실로 167년 만에 처음 있는 일로 제주도에서는 경사였다. 제주 사람은 200년이 지나서 1834년부터 자유롭게 육지를 왕래했다.
 
만덕은 한양으로 올라가면서 여러 고장을 천천히 둘러보고 화성행궁(華城行宮)도 구경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경기도 화산에 이장하여 현륭원(顯隆園)을 조성하고. 화성행궁을 건축했다.
 
 
정조는 신도시를 구상하고 1794년(정조 18) 1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1796년(정조 20) 9월 초에 화성행궁 축조를 마쳤다. 정조는 인근 주민들에게 임금을 나눠주고, 공사 책임제 등을 시행하여 예상보다 국가재정을 많이 절약했다. 특히 정약용이 거중기를 만들어 경비를 대폭 줄였다.
 
정조는 지리적 위치가 좋은 화성을 상업 도시로 만들려고 상인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상점도 만들어 주고, 백성들이 편안하게 농사지을 수 있도록 넓은 농장과 저수지도 곳곳에 만들었다.
 
 
▲ 정조의 화성행차(화성원행반차도)
 
 
상인 만덕은 나이가 많아 제주에서 배를 타고 육지에 내려 한양 도성에 이르는데, 4개월이나 걸렸다. 그것도 1년 중 가장 추운 음력 11월 24일(양력 1796년 12월 22일, 목요일)에 만덕은 한양 땅을 디뎠다. 만덕은 임금이 계시는 한양 도성에 도착하여 땅에 엎드려 임금이 사는 대궐을 향해 절을 올렸다.
 
만덕은 지나가는 사람에게 영상(領相) 채제공(蔡濟恭, 1720~1799) 대감의 집을 물었다. 채제공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영조 후반과 정조 시대 남인의 영수로 정조를 가장 가까이서 보좌한 신하였다. 채제공의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 번옹(樊翁), 시호는 문숙(文肅)이며, 그는 사도세자의 스승으로 사도세자의 신원(伸冤)을 주장하고, 다산 정약용(丁若鏞), 금대(錦帶) 이가환(李家煥, 1742~1901) 등을 후견하며, 정조의 탕평책(蕩平策)을 추진하게 하며, 화성 성곽 축성에 많은 공을 세웠다.
 
 
채제공은 제주로부터 고생스럽게 한양에 도착한 만덕 일행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맨발로 나와 반겨주었다. 나이가 많은 채제공은 만덕의 바닷길 수고로움을 여러 번 격려했다. 영상은 만덕에게 머물 곳을 제공하고, 대궐에 기별하여 만덕의 한양 도착을 정조에게 아뢰었다.
 
정조는 선혜청(宣惠廳)에 명하여 만덕에게 식량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정조는 조선의 엄격한 신분제 속에서 여성의 몸으로 상업에 뛰어들어 막대한 부를 이루고, 이웃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아낌없이 내놓은 여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궁중에는 법도가 있었다.
 
관리들은 재산이 많은 기녀(妓女)를 대궐에 들이는 일은 궁중 법도에 어긋난다고 사헌부에서 연일 글을 올려 조정은 의론이 날마다 분분했다. 만덕은 양인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12살에 부모를 모두 잃어 기녀의 수양딸로 자랐다. 이후 만덕은 성장하여 관아에 찾아가 신분을 다시 회복했다.
 
조정에서는 논의 끝에 만덕을 내의원(內醫院) 의녀의 반수(班首)로 명했다. 만덕은 전례에 따라 대궐로 들어가 여러 궁에 문안을 드리고, 의녀로서 시중을 들었다. 만덕에게 내려진 내의원 의녀 반수는 비록 명예직이지만, 여성으로서는 최고 벼슬에 오른 셈이었다.
 
 
▲ 정조 20년 일성록(日省錄-김만덕 선행기록)
 
 
정조는 법도에 따라 궁궐에서 효의왕후(孝懿王后 金氏, 1754~ 1821) 김씨와 함께 만덕을 만나 오래 대화를 하였다. 정조가 전교하기를, “네가 일개 여자로서 의로운 기운을 발휘하여 굶주린 백성 천여 명을 구제했으니 참으로 기특하다.”라고 말하자. 만덕은 망극하옵니다! 말하고는 고개를 전혀 들지 못했다. 법도에 따라 임금님의 존안을 볼 수 없어 고개를 계속 떨구고 있었다. 정조가 다시 물었다. “제주도의 조석파(潮汐波)가 어떠했는가?”
 
만덕은 “제가 산에서 보았는데 마치 거대한 산이 섬을 덮치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광경은 생전 처음 보았습니다.” 정조는 “낮이었는가?” 만덕은 답하기를 “한밤중이었습니다.” “그럼. 미리 알고 산으로 피했느냐?” 만덕은 “사전에 땅이 울리는 느낌을 받아, 먼바다에서 지진이 일어난 조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경험이 많은 노인에게 들은 일이 있습니다.”라고 가냘픈 목소리로 답했다.
 
정조는 “제주의 참상이 어떠했느냐?” 만덕이 슬픈 표정으로 “집들이 모두 쓸려가고, 농작물은 모두 소금에 절인 것 같았습니다. 모두가 썩어서 수확할 곡식이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정조는 “너는 어떻게 그런 큰 재산을 모았느냐?”라고 물었다.
 
 
만덕은 지난 어려웠던 시절을 떠올리며 “저는 육지에서 오는 배들이 들어오는 제주 건입 포구에 작은 점포를 차려 외지 상인들의 물건을 위탁받아 팔고는 제주의 특산물인 말총, 미역, 전복, 표고버섯, 양태, 우황, 약초, 녹용, 귤 등을 수집하였다가 육지 상인들에게 공급하여 많은 재물을 모았다.”라고 소상하게 말했다. 만덕은 정조에게 저녁 늦게까지 제주민의 애환을 숨김없이 사실대로 고했다.
 
정조는 만덕의 소원인 금강산을 찾아가는 연유를 다시 물었다. “네 소원이 금강산에 오르는 것이라고 했는데, 정녕 그러하냐?” 만덕은 “예.”하고 짧게 답했다. 만덕은 “예로부터 사람이 죽어서 지옥에 가지 않으려면, 죽기 전에 한 번은 꼭 금강산 비로봉에 올라야 한다고 들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정조는 “내 너의 소원을 들어줄 것이다. “만덕은 나이가 많다. 산을 오르는 것이 여의찮을 테니 금강산의 승려들에게 가마를 메고 안내하도록 하라. 지금은 매우 추우니, 날씨가 따뜻할 때 금강산 여행을 다녀오라.”라고 말하고 상으로 많은 물건을 하사했다. 효의왕후와 정조는 만덕의 손을 꼭 잡아주고 건강을 잘 돌보라고 말했다. 만덕은 정조와 효의왕후에게 절을 하고 대궐을 물러 나와 영상 채제공의 집으로 돌아갔다.(2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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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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