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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6년 김만덕(金萬德) 채제공(蔡濟恭) # 도망시 # 백저행
【문화】
(2024.04.18. 18:46) 
◈ 금슬이 너무 좋았던 아내, 자식을 낳다 죽어 슬퍼... 백저행 시 지어 사모
영상(領相)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의 도망시(悼亡詩)
조선 후기 영의정을 역임한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18세인 1737년에 직장(直長) 오필운(吳弼運)의 딸 15세 동복(同福) 오 씨(吳氏, 1723~1751)와 혼인을 했다. 채제공과 부인 오 씨(吳氏)는 금슬이 너무 좋아 이웃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했다.
영상(領相)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의 도망시(悼亡詩)
 
 
조선 후기 영의정을 역임한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18세인 1737년에 직장(直長) 오필운(吳弼運)의 딸 15세 동복(同福) 오 씨(吳氏, 1723~1751)와 혼인을 했다. 채제공과 부인 오 씨(吳氏)는 금슬이 너무 좋아 이웃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했다.
 
정언 송영중이 영조가 한림권점(翰林圈點)으로 발탁한 채제공을 잡류(雜流)라고 논책하며, 채제공의 부친 채용일의 이름이 무신란의 옥사 초사(招辭)에 있으니, 역적과 연루된 자식을 발탁했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대해 채제공은 사리를 따져 똑똑히 밝히는 상서(上書)를 올렸다.
 
채제공은 영조 27년(1751) 1월, 32세에 부인상을 당했다. 당시 채제공은 아버지 채용일(蔡膺一)이 비안현감(比安縣監, 경북 의성)으로 있어 지방에 가 있었다. 1751년(영조 27) 신미년 정월에 채제공은 처가가 있는 한양 만리동 약봉(藥峯)으로부터 온 서찰에 놀랐다.
 
아내 오 씨(吳氏)가 출산하다 아이와 같이 죽었다는 부고를 전달받은 것이다. 채제공은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고 한양으로 가려고 여장(旅裝)을 꾸렸다. 채제공은 지난 세월 아내와의 추억에 잠겼다. 벼슬을 버리고 아내와 함께 오순도순 살려는 계획을 차마 실행하지 못한 것이 못내 한스러웠다. 채제공은 아내가 긴긴 겨울밤을 남편을 기다리며, 얼마나 원망했을까 하고 생각하니, 마음이 더욱 심란하고 울적했다. 가슴속에서 피눈물이 나고 속이 너무나 쓰라렸다.
 
 
▲ 樊巖 蔡相國 70세 眞影
 
 
1751년 3월에 부인 오 씨의 묘소를 정하는 일로 집의(執義) 이손(李塤)에게 논척을 당했다. 집의는 조선 시대 사헌부 종3품 관직으로 성품이 청렴하고 강직한 선비 1명을 선발하여 정사를 비판하고 관리를 규찰하며 풍속을 바로잡았다.
 
채제공은 중인(中人)의 분산(墳山, 분묘를 쓴 산)을 탈취하였다는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어 강원도 삼척으로 유배되었다. 대리청정하던 사도세자가 채제공을 파직(罷職) 처분했지만, 실상은 영조가 파직 처분한 것과 다름없었다.
 
영조는 1년 정도 채제공을 삼척으로 귀양 보내면서, “삼척은 경관이 아름답고 산천이 맑고 시원하다. 내가 일부러 땅을 가려 유배를 명하는 것은 ‘蔡某’를 아껴 그가 병으로 상할까 걱정해서이다.”라며 특별히 선별해서 채제공을 삼척으로 유배 보냈다. 삼척으로의 귀양살이에 대해 채제공은 가장 힘들 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라고 기억했다. 당시 삼척 부사는 옥호자(玉壺子) 정하언(鄭夏彦, 1702~1769) 이었다.
 
채제공은 홀연히 저세상으로 떠난 아내가 남편이 비안(比安)으로 떠날 때 했던 말들이 자꾸만 떠올라 미칠 지경이었다. 채제공은 한숨에 한양 처가에 도착해 아내가 죽은 까닭을 물었다. 장모는 “아내 오 씨는 아기를 낳다가 죽었다. 장모(偏母)는 슬픔 속에서도 염습하는 수의(壽衣)를 짓고, 계집종이 빈소에 전(奠)을 올렸다.”라고 울며 당시를 회상했다.
 
부인 오 씨의 묘는 안성시에 있다. 채제공은 가슴에 원통함이 가슴에 맺히고, 하늘이 노래져 그 이야기를 듣고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었다. 채제공은 처가에 머무는 동안 매일 밤 꿈속에서 아내를 만났다. 꿈속에 보고 싶은 아내가 낮에도 찾아오니 채제공은 연신 눈물만 흘렸다.
 
 
▲ 번암집
 
 
채제공은 부인 오 씨가 죽은 뒤 텅 빈 안방에 들어가 보니, 자신의 옷이 마름질하던 채 그대로 있는 모습을 보고 백저행(白紵行)을 썼다. 처음에는 미안함에 혼자 중얼거렸는데, 어느덧 슬픔이 지나쳐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붓을 들어 속에 있는 말을 그대로 담아 적었다.
 
그는 가난했던 시절에 함께 살았던 아내에 대한 미안함에 고개를 차마 들 수가 없었다. 고금에 보면 수많은 사람이 부인을 먼저 저세상으로 떠나보내고, 홀로 외롭게 남아 아내를 그리워하는 애끓는 사부곡(思婦曲)를 남겼다. 채제공은 아내가 떠나간 후 매일 마음속에 그립다, 보고 싶다는 말을 계속 읊조렸다.
 
채제공은 마름질하던 옷감을 바라보면서 한꺼번에 쏟아지는 그 비통한 느낌을 처절하게 시어(詩語)로 뱉어내었다. 채제공은 죽은 아내가 짓다 만 흰 모시옷을 입어보고 아내의 애절하고 지극한 사랑을 느껴 시 백저행(白紵行)을 여러 수를 지었다.
 
시 백저행(白紵行)은 소박하고 간결하다. 채제공이 사별한 아내가 만들다 미처 손을 못 댄 모시옷을 마무리하려고, 집에 침모(針母)에게 간곡히 부탁하니 노파는 자신의 솜씨가 부족하여 부인 대신 지을 수가 없다고 했다. 옷을 자세히 살펴보니 폭을 이미 잘라 마름질은 끝마쳤고 두어 줄 바느질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모시옷을 빈방에서 펼쳐 보니 마치 옷이 어렴풋이 아내 얼굴을 보는 것만 같아 마무리가 덜 된 옷을 입어보고는 말하길, “황천의 부인에게 누가 내 말 좀 전해주오! 당신이 지은 모시옷이 내 몸에 아주 잘 맞는다고!” 말했다.
 
 
▲ 채제공 뇌문비(誄文碑) (사진:용인시)
 
 
맏며느리의 갑작스러운 부고 소식을 접한 채용일(蔡膺一, 1686~1765) 비안현감(比安縣監)은 병산(屛山, 비안 別號)에서 한양으로 올라와서 이삼십 일을 머물다가 조문하고, 비안 관아로 돌아갔다. 비안은 비옥(比屋)현과 안정(安貞)현을 합쳐 1421년 안비(安比)현으로 했다가 1423년 비안(比安)현으로 바꾸었다.
 
채제공의 아버지가 임종할 때 채제공에게 “너는 매사에 선(善)을 다하라.”라고 유지를 남겼다. 그래서 채제공은 그날 이후 당호를 ‘매선당(每善堂)’이라 현판을 걸고 아버지의 유훈을 새겼다. 채제공의 곧은 심성과 인간성은 물론, 평생을 좌우한 그의 정치 신념은 아버지의 유훈과 죽은 아내의 내조가 큰 몫을 차지했다.
 
채제공(蔡濟恭)은 15세에 향시(鄕試)에 합격하고, 1743년 24세 때 문과 정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 부정자에 임명되었다. 1747년 익릉별감(翼陵別監)을 거쳐 1748년 승문원에 들어갔다.
 
이후 예문관의 사관으로 있다가, 1753년 호서 암행어사에 임명되어 충청도를 암행감찰하고, 균혁법을 시행 조사하고, 변방 대비문제를 진언하였다. 채제공은 정조 재위 24년 중 23년을 정성을 다해 보필했다. 채제공이 부인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를 감상한다.
 
 
〈백저행(白紵行)〉  채제공(蔡濟恭)
 
皎皎白紵白如雪
云是家人在時物
家人辛勤爲郞厝
要襋未了人先歿
 
눈부시게 하얀 모시, 흰 눈처럼 깨끗하니
아내가 죽기 전에 옷을 짓던 것이라오.
아내가 어렵사리 남편 위해 마련해서
허리와 깃 옷을 짓다 못 끝내고 먼저 죽고 말았네!
 
舊篋重開老姆泣
誰其代斲婢手拙
全幅已經刀尺裁
數行尙留針線跡
 
늙은 침모(針母)가 묵은 상자 열어 보고 울먹이며
솜씨 없어 아씨 대신 지을 수가 없다 하네
모시 베 전 폭이 이미 잘라 마름질은 끝마쳤고
두어 줄 바느질하던 자욱이 여기저기 남아 있네.
 
朝來試拂空房裏
怳疑更見君顔色
憶昔君在窓前縫
安知不見今朝着
 
아침에 시험 삼아 빈방에서 모시옷을 펼쳐 입어보니
어렴풋이 당신 얼굴 다시 보는 것만 같소
당신이 지난날 창가에서 바느질을 하던 때를 생각하니
이 옷 입은 나를 보지 못할 줄을 어찌 알았겠소.
 
物微猶爲吾所惜
此後那從君手得
誰能傳語黃泉下
爲說穩稱郞身無罅隙
 
이 물건은 하찮아도 당신의 사랑이 소중하니
차후에 당신이 바느질 한 옷을 다시 입기 어려우리라.
누가 황천의 당신에게 내 말 좀 전해 주오!
당신이 지은 모시옷이 내 몸에 아주 잘 맞는다고
 
 
[辛未正月 聞室人喪報 自屛衙將還京第 抆淚述懷]  채제공(蔡濟恭)
 
縱去那相見
吾行已後時
驚心藥峯札
遺恨鹿門期
 
비록 간들 누구를 만나겠는가?
내가 가도 이미 다 늦은 일인데
약봉의 서찰 받고 놀란 이 마음
녹문산(호북성 襄陽縣의 後漢 방덕공(龐德公)의 기약 어긴 한을 남겼네.
 
故國迷春望
虛堂怨夜遲
凄涼臨別語
不忍更提思
 
도성에서 아득히 먼 봄 기다리고
빈집에서 긴긴밤을 원망했으리
이별할 때 처량하게 내게 한 말을
차마 다시 떠올리지 못하겠어라
 
人事應多失
悲端實萬重
天何慳一子
郞又隔三冬
 
사람 일은 여의찮은 것이 많지만
슬픔의 단서 실로 만 겹이로다
하늘은 아들 하나 주지 않았고
남편은 또 겨울 내내 멀리 가 있었네.
 
斂服偏親製
床需短婢供
可憐冤結意
連夜夢相從
 
편모(偏母)가 염습(殮襲)하는 수의(壽衣)를 짓고
계집종이 빈소에 전(奠)을 올렸다네
가련하게 원통함이 가슴에 맺혀
매일 밤 꿈속으로 찾아오도다.
 
 
채제공의 아내를 그리워하는 도망시(悼亡詩)는 드라마의 장면처럼 불쑥 다가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채제공은 사별한 부인을 평생 못 잊고 그리워했다. 그의 시는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절절하게 노래한 사부곡(思婦曲)이다. 채제공은 벼슬이 높아지면 부인의 묘소를 찾아 술을 올리며 영원한 사람을 맹세했다.
 
【번역】 유세차 신사년 이월 辛未朔 십칠일(1761년, 영조 37년, 채제공 42세)에 가선대부 경기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개성부유수, 강화부유수 채제공은 글로써 죽은 아내 정부인 동복 오 씨 묘에 맹세하여 말한다. 아아! 부인이여. 어찌 그리도 명이 짧았는가! 관찰사 남편은 아직도 머리가 검고, 감영은 넓고 가마(板輿)는 빛나는데, 어찌하여 깊이 잠이 들어(잠매, 潛寐) 거친 골짜기를 홀로 지키는가. 그대가 처음 시집올 때 나는 참으로 가난했네. 언덕 남쪽의 집은 성곽을 등진 오두막이었네. 시집온 지 사흘 만에 부엌에 들어가 어렵고 쓸쓸한 살림살이 시작했네. 찬 새벽 얼음 깨고 세수하여 섬섬옥수 손이 모두 터져 갈라졌네. 신혼 초 빈천하고 가난하여 온갖 어려움 다 있었으나 자나 깨나 남편이 어진 사람 되기만 빌었었네. 꿀벌처럼 고생하며 양식을 마련하였으나, 꿀벌처럼 먹지도 못하고 떠나감을 애통해하네. 영예로운 직첩이 내려졌으나 아득한 지하에서 어찌 알리오! 부족한 재주로 소임을 다하지 못했는데, 지나친 성은을 입어 대장기가 휘날리는 경기 관찰사로 부임하였네. 곳간에 쌀은 기름지고 장작더미는 언덕처럼 쌓여 있네. 다른 여인이 들어와 거문고를 타니 적막한 저승에서 원망하며 울지 않으랴. 매번 지난 일을 회상하니 끝없는 슬픔에 잠기네. 네 마리 말이 모는 수레를 몰아 무덤 옆 나무에 메어 놓았네. 여러 고을에서 정성스럽게 좋은 음식을 올려보내 무덤을 에워싸고 성대한 음식을 차려 놓았네. 살아서는 박하게 살고 죽어서 풍성하니 생각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 산새 울고 소나무도 읊조리는듯하여 나의 슬픔을 도와주네. 부디 슬픈 눈물을 거두시고 술 한 잔을 올리니 흠향하시게!
 
【출처】〈祭亡室贈貞夫人吳氏墓文〉 「維歲次辛巳二月辛未朔十七日丁亥 夫嘉善大夫京畿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廵察使開城府留守江華府留守蔡濟恭 文以矢之于亡室贈貞夫人同福吳氏之墓曰 嗟嗟夫人 一何命薄 有夫按節 顚髮尙黑 營府潭潭 板輿有㷜 奈何潛寐 獨守荒麓 念君始歸 我時貧窶 坡南之屋 背郭如斗 三日入廚 井臼寥落 和氷曉頮 纖指皸瘃 貧賤糟糠 艱難備閱 寤寐祈祝 所天賢達 辛苦蜜熟 哀爾蜂飢 煌煌榮誥 冥漠何知 不才欺天 聖恩偏誤 旄麾戟纛 履玆畿輔 廩米流脂 峙柴如阜 他人入室 琴瑟是鼓 寂寞泉塗 能不冤泣 每理疇昔 我懷潛䀌 駕彼四牡 來繫墓木 列郡震悚 登以芳羞 環擁一抔 大胾 珍臑 薄生豊死 撫念何及 咬禽韻松 助我悽惻 尙收哀淚 歆此玄酌 尙饗。」
 
1796년 음력 11월 24일. 58세에 처음 한양 도성에 도착한 만덕(萬德)은 영상 채제공 집의 문을 두드려 영상으로부터 자상한 보살핌을 받았다. 채제공은 금강산을 다녀온 만덕과 헤어질 때는 만덕이 어린아이처럼 보채고 울자 《만덕전》을 건네주며 울지 말라고 하였다. 만덕은 비록 여성이지만, 당대의 문사들과 교유한 여사(女士, 여성 선비)였다. 제주로 간 만덕은 매일같이 부처님께 꽃과 향을 바쳐 영상의 건강을 기원했다. 번암 채제공은 1799년 1월 18일에 향년 79세로 타계했다. 영상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한 김만덕은 매일 향을 피워 고인을 추모했다. 영상 채제공은 100년 만의 남인(南人) 재상이며, 영조가 발탁하여 사도세자의 스승이 되고, 정조를 정성껏 섬긴 제209대 영의정이다. 채제공의 장례는 3월 26일에 사림장(士林葬)으로 장례가 거행되어 경기도 용인에 모셔졌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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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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