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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손기정(孫基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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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시(長崎市) 손기정(孫基禎) # 남승룡 # 독일 베를린올림픽
최근 3개월 조회수 : 1 (5 등급)
【문화】
(게재일: 2023.11.12. (최종: 2023.11.12. 22:29)) 
◈ 손기정과 나가사키
1936년 독일 베를린올림픽에서 우승한 손기정과 남승룡은 중국 상하이를 거쳐 나가사키를 다니는 정기선을 타고 1936년 10월 6일 일본 나가서카항에 도착한다. 일본 선수들은 아무 제지를 받지 않았지만 유독 손기정과 남승룡 선수는 귀국하면서 누구를 만났는지 경찰로 부터 조사를 받았다.
1936년 독일 베를린올림픽에서 우승한 손기정과 남승룡은 중국 상하이를 거쳐 나가사키를 다니는 정기선을 타고 1936년 10월 6일 일본 나가서카항에 도착한다. 일본 선수들은 아무 제지를 받지 않았지만 유독 손기정과 남승룡 선수는 귀국하면서 누구를 만났는지 경찰로 부터 조사를 받았다. 손기정과 남승룡은 고베를 거쳐 도교로 가는 도중에 올림픽 우승 개선행사에 계속 참석했다. 세상은 참으로 모를 일이다. 손기정 선수가 방문했던 아름다운 항구 도시 나가사키가 9년 후에 미국과의 전쟁으로 원자폭탄이 투여되어 징그럽게 변한 잿더미가 되는 것을 상상한 사람이 있을까 의문이다.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1945년 5월 8일 항복한 이후에도 일본은 전쟁을 계속 고집했다. 소련은 일본전 참전을 결정하고 군대를 동쪽 지방으로 이동시킨다. 1945년 7월 26일 미국 대통령 해리S. 트루만, 영국 총리 클레멘트 애틀리, 중화민국 주석 장제스는 독일 포츠담에서 만나 세계 전쟁 종결에 대한 의견을 모은다. 그리고 회담을 하는 도중에 포츠담 선언을 발표한다. 그러나 일본은 포츠담 선언을 거절하고 태평양 전쟁과 아시아 침략 전쟁에 더욱 광분한다.
 
미국은 일본에 “1945년 8월 1일까지 항복을 하면 과거의 전쟁을 일절 불문에 붙이겠다.”는 최종 통첩을 보낸다. 세계 전쟁사에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놀라운 선언과 조건을 제시했다. 일본 군부는 1억 명 옥쇄를 주장하며 연합군의 일본 상륙을 저지하기 위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전쟁 준비에 광분한다. 미국 트루만 대통령은 1945년 8월 2일 어떻게든 4년 동안의 긴 전쟁을 끝내기로 결정하고 원자폭탄 투하를 결심한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월 15분 B29폭겨기 ‘에노라 게이’가 히로시마 상공에서 우라늄형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약 20만 명의 사망자를 냈다. 그리고 3일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약 121만 명에 달하는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한다. 일본은 원폭을 당하고도 전쟁을 포기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연합군은 1945년 8월 14일 오사카를 공습하며 일본을 압박한다. 일본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가 돌연 8월 15일 천황 히로히토가 연합국에 항복한다는 것을 NHK 방송을 통해 알리고 포츠담 선언의 수용을 발표했다.
 
 
원자폭탄으로 참혹하게 변한 나가사키 전경
 
 
필자는 나가사키 시를 방문하여 히데코 기무라 선생님의 안내를 받아 나가사키 평화공원과 원폭자료관, 여기당(如己堂), 나가이 타카시 기념관, 우라카미 성당 등을 방문했다. 원폭자료관에서는 전쟁의 참혹함과 인간의 무지를 함께 느꼈다. 원폭 투하 장소를 방문하였다. 억울하게 죽은 조선 사람들의 추모비에 들려 묵념을 하였다. 여기당은 의사이며 원자물리학자인 나가이 다카시(1908~1951, 바오로, 永井隆)의 한 칸짜리 집이다. 그는 1940년 나가사키 의대 방사선학과 조교수가 되고 1944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결핵 환자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제대로 된 보호 장구 없이 X-레이를 촬영하다 방사선의 방해를 받아 그대로 노출되어 1945년 6월 백혈병을 진단받았다.
 
나가이 다카시 박사는 1945년 8월 8일 방공 당번이어서 야간 당직을 마치고 학교에 있었다. 8월 9일 오전 11시 2분 나가사키 시 마쓰야마 지역 500m 상공에서 작렬한 원자폭탄으로 나가이 다카시 박사는 머리 오른쪽 동맥이 절단되는 큰 부상을 입었다. 그는 머리에서 피가 흘리는 상태지만 일어나 머리에 붕대를 감고 병원 구호대를 조직하고 피폭자 치료와 민간인들의 구호 활동에 나섰다. 사흘째 되는 날 학생들의 사상자 처리가 끝나자 황혼 무렵에 잠시 시간을 내어 1km 떨어진 집으로 걸어갔다. 집 가까이 오니 온통 잿더미였다. 겨우 집을 확인해 돌아보니 모두가 까맣게 불타고, 여러 해를 정답게 같이 살았던 부인 미도리 씨는 골반과 요추만 남았다. 부인 옆에는 십자가가 달린 로사리오의 사슬만 남아있었다. 그는 슬픔도 잊은 채 찌그러진 까만 양동이에 죽은 아내를 말없이 담아 가슴에 안고는 묘지로 걸어갔다.
 
 
나가사키 시를 걷고 있는 나가이 다카시(1908~1951) 박사
 
 
위의 사진은 미군이 나가사키시의 폐허를 걷고 있는 나가이 다카시 박사를 촬영한 사진이다. 그는 1945년 10월 원자폭탄 피폭 당시의 사건을 기록한 〈구호대 활동보고서〉를 작성했다. 보고서에는 “그만 두라, 멈춰라. 전쟁만큼은 하지 말아다오. 사람들은 원자폭탄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모르기 때문에 불장난을 하는 것이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진상을 그대로 알려야 하는 생각에 나는 곧바로 연필을 잡고 나가사키 최후의 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가감없이 기록했다.”고 적었다.
 
원자폭탄이 떨어졌는데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1945년 12월 크리스마스에 우라카미 언덕의 잔해 속에서 성당의 종을 기적같이 발견한다. 이후 우라카미 성당 종루에 세워진 종은 하루도 빠짐없이 평화를 기원하는 종을 울리고 있다. 그는 시한부 생명으로 살면서 1948년 《나가사키의 종》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원폭피해자가 원폭피해 사례를 최초로 고발했다. 그는 한 칸짜리 집에 여기당(如己堂, 뇨코도)이란 이름을 짓고 생활했다. 여기당은 “남을 자기처럼 사랑하라.”는 깊은 뜻을 담고 있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은 지금까지 그를 ‘원자벌판의 성자’로 존경한다.
 
전 세계 사람들은 나가이 다카시 박사가 던지는 평화메세지에 감동받아 여기당을 방문했다. 미국인 헬렌 겔러 여사가 다녀가면서 박사의 건강을 기원하지만 1951년 5월 1일 피폭 휴우증으로 백혈병에 걸린 아이들을 남겨놓고 숨을 거둔다. 나가이 다카시 박사는 숨을 거두기 전까지 원자력의 올바른 이용과 평화를 외치고 《아버지의 목소리》, 《묵주알》 등 많은 책을 저술했다.
 
 
우라카미 성당을 설명하는 기무라 선생님
 
 
나가이 타카시 기념관의 자료를 보고 아내와 우라카미 성당으로 걸어가는데 자꾸 눈물이 나왔다. 기무라 선생님은 걸어가면서 우라카미 성당 성모마리아의 불탄 모습과 무너진 종탑 이야기를 계속 들려주셨다. 언덕을 내려가면서 10번이나 박사가 선종한 여기당을 돌아보았다. 나가이 타카시 박사가 돌아가신 지 70여 년이 지났지만 나가사키의 많은 사람들은 그를 추모하며 그의 삶과 영성을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나가사키 천주교대교구에서는 시복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시복(諡福, Blessed)을 추진하고 있다.
 
필자는 일본 나가사키 범선축제에 참가하여 나카사키항에 도착하면 다음날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나가사키반도 남단에 있는 군함도가 잘 보이는 수선화 언덕에 오른다. 그리고 수선화가 많이 피는 언덕에서 군함도를 바라보며 일제강점기 때 해저 탄광에 강제로 끌려와 일했던 노동자를 생각한다. 바닷가에는 군함도 탄광에서 일하다 탈출하여 헤엄쳐 육지에 도착했지만 그만 기력이 다해 숨진 사람들의 비석이 있다. 바닷가 주민들은 안타깝게 죽은 조선 젊은이를 땅에 묻어주고 작은 비를 세워 슬픈 혼을 달래주었다.
 
다음 화에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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