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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저우 10대 사찰 뽑혀... 중국과 일본서 존경받는 감진화상
2023년 9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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닝보시(宁波市) # 감진화상
【문화】
(2023.11.03. 19:11) 
◈ 양저우 10대 사찰 뽑혀... 중국과 일본서 존경받는 감진화상
양저우 대명사는 남조(南朝) 송(宋)나라 제5대 황제 효무제(孝武帝, 劉駿, 430년-464년) 대명(大明) 연간에 황제를 위한 사찰로 건립되었다. 1500년의 오랜 역사를 지닌 사찰 경내에는 대웅보전과 감진기념당, 서령탑(栖灵塔), 1048년에 구양수가 지은 평산당, 서원, 정원, 교육 시설 등이 있다. 당나라 때는 중국 10대 사찰로 뽑혔다.
양저우 대명사(大明寺) 감진 화상 (1)
 
양저우 대명사는 남조(南朝) 송(宋)나라 제5대 황제 효무제(孝武帝, 劉駿, 430년-464년) 대명(大明) 연간에 황제를 위한 사찰로 건립되었다. 1500년의 오랜 역사를 지닌 사찰 경내에는 대웅보전과 감진기념당, 서령탑(栖灵塔), 1048년에 구양수가 지은 평산당, 서원, 정원, 교육 시설 등이 있다. 당나라 때는 중국 10대 사찰로 뽑혔다. 당나라 때는 감진(鑑眞, 688년-763년) 화상이 오래 주석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계를 주고 교화시켰다.
 
아침 일찍 화이안(淮安) 금륭관광호텔을 출발하여 조운박물관을 관람한 장보고유적 답사대원들은 2시간 동안 전용버스를 타고 고속도로 주변을 바라보았다. 양저우 시에 진입한 버스는 큰 도로를 달리다가 작은 마을길로 들어섰다. 그런데 길에는 속도를 내지 못하도록 많은 장애물이 놓여있었다. 워낙 길이 좁고 많은 차량이 다녀서 그런지 도로에 큰 블록을 설치하여 차량들이 속력을 내지 못하도록 막아놓았다. 버스가 지나가는데 마치 곡예를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구글 지도로 검색해 보니 차들이 이 길을 다니는 이유는 양저우 시내로 질러가고 가까워서 대부분 이 작은 길로 다녔다. 버스가 좁은 길로 들어선 덕분에 중국 답사 여행 중에 처음으로 중국 농촌의 속살을 제대로 구경할 수 있었다. 버스가 큰 도로로 나서면서 양주성유지(扬州城遗址)라는 큰 표지판을 발견했다. 필자는 주변 도로를 계속 관찰하다가 사거리에서 버스가 정차했을 때 신호등 앞에 있는 거대한 동상을 보았다. 답사 대원들에게 “저 큰 동상을 보십시오!” 말하고 왼쪽 창을 가리켰다. 달리는 차에서 동상의 사진을 계속 찍고는 버스가 우회전할 때 동상 밑에 있는 글씨를 보니 큰 글씨로 감진이라고 적혀있었다. 참으로 보고 싶었던 감진(鑑眞, 688~763) 화상의 동상을 양저우 시내의 달리는 버스 속에서 처음 보고 감격했다.
 
 
당나라 승려 감진(鑑眞, 688년-763년)
 
 
필자는 양저우의 상징 인물인 감진 화상에 대하여 오래전부터 공부하고, 일본 나라 시의 절을 방문했다. 감진 화상은 중국과 일본에서 최고로 존경받는 승려이다. 또한 일본과 중국 불교 교류에 있어 제일 중요한 인물이라 많은 학자들이 논문을 발표했다. 최치원기념관을 관람하고 다시 버스를 타고 점심을 먹을 식당으로 버스가 출발했다. 대명사 9층 탑이 보였다. 대명사 9층 탑은 수 문제(隋文帝, 541년-604년) 양견이 환갑을 맞아 전국에 30개의 탑을 세우라 조칙을 내려 601년에 건립된 탑으로 서령탑(栖灵塔)이라고 부른다. 높이 90m의 탑은 여러 번 허물어졌다가 1995년에 복원되었다. 달리는 버스 속에서 과거 중국 역사 속의 수많은 인물들이 떠올랐다. 수 문제는 360년이나 오래 지속된 위진남북조 시대 혼란기를 통일한 황제였다. 중국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오늘날 중국이 거대국가로 기틀을 잡는데 수나라 문제의 기여가 크다고 평가한다. 수 문제는 국토를 넓히고 제도를 정비하여 개황성세(開皇盛世)를 맞이했다. 개황성세는 개황지치(开皇之治)라고도 한다. 중국 수나라 수문제의 양견이 혼란기를 말끔하게 정리해 정치는 안정되었다. 황제가 20년 이상 재위하면서 개척한 치세로 당시 사회생활은 정말 풍요롭고 전쟁이 없어 사람들은 편안하게 살았다.
 
이번 장보고 유적 답사에는 일정상 대명사 사찰 방문이 빠져있어 조금은 서운했다. 그래서 버스를 타고 대명사 도로를 지나가면서 당나라 고승 감진 화상이 일본으로 가게 된 당시 상황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촬영하듯이 머릿속에 하나씩 정리해 보며 그려보았다.
 
일본 제45대 쇼무(聖武, 701년-756년)천황은 도다이지(東大寺)를 건축하면서 일본 승려들의 계율을 담담할 율사를 구하지 못해 항상 마음이 불안하고 걱정이 많았다. 일본 불교를 위해서는 정통 율맥(律脈)을 계승해 줄 율사가 꼭 필요한데 일본에서는 마땅한 승려를 구할 수가 없어 당나라에서 반드시 모셔야 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삼사칠증(三師七證)이라 하여 3명의 스승과 7명의 증명법사가 있어야 수계제도가 성립되었다. 쇼무 천황은 당나라에서 전계율사(傳戒律師)를 초청하기로 큰 결심을 했다. 이 임무는 고후쿠지(興福寺)의 요에이(榮叡)와 다이안지(大安寺)의 후쇼(普照) 승려에게 맡겨졌다.
 
 
일본 나라 도다이지(東大寺)
 
 
733년 4월, 학승인 두 승려는 대륙으로 향하는 제10차 견당사사절단의 견당선(遣唐船)에 올랐다. 요에이와 후쇼는 4개월의 항해 끝에 마침내 당나라 땅에 도착했다. 그리고 낙양 대복선사(大福先寺)에 머무르며 율법에 정통한 승려를 수소문했다. 그러나 쇼무 천황이 지시한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마땅한 율사를 찾기가 정말 어려웠다. 말도 통하지 않고. 대부분 승려들은 바닷길로 먼 길을 떠나는 것을 망설였다. 배를 타고 갈 의사는 있지만 대체로 완곡하게 거절했다. 당나라 승려들이 고국을 등지고 망망대해의 바닷길을 건너 낯선 나라 일본에 간다는 것은 오로지 전법에 뜻을 두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3년 뒤님 736年(開元24年、天平8年)에 대복선사에 머물던 도선(道璿, 702년-790년) 승려가 일본 승려의 요청을 받아들여 인도 승려 보리선나(菩提僊那), 베트남 승려 불철(仏哲)과 함께 일본을 방문했다. 일본에 도착한 도선 승려는 북종선(北宗禪)을 전파하기 위해 대안사(大安寺)에 선원을 설치하고 계율로는 범망경소를 찬했다. 도선은 천태종에도 정통한 승려였다. 도선은 계단을 세우려고 무척 노력했지만 전계율사로 모실 승려가 너무 적어 수계의식을 완성할 수 없었다.
 
도선의 일본 제자로는 행표(行表, 722년~797년)가 있다. 행표는 삼론종(三論宗) 승려로 대안사에서 승려들을 가르쳤다. 행표는 일본 천태종의 개조인 최징(最澄, 사이초, 767년-822년)의 스승으로 최징은 804년 1년 국비장학생에 뽑혀 34세에 당나라에 건너가서 선과 밀교를 전수받고 귀국하여 히에이잔(比叡山) 연력사(延曆寺, 앤라쿠지)를 개창하고 부처님 법을 펼치다 입적해 나라에서는 전교대사(傳敎大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최징의 제자인 엔닌이 장보고가 창건한 적산법화원에 머물고 일본에 귀국하여 《입당구법순례행기》를 남긴다.
 
요에이와 후쇼는 전계율사를 구하려고 당나라 사찰을 온종일 찾아다녔다. 그들은 장안의 대안국사와 숭복사에 머무르며 많은 승려들과 교유했다. 성과 없이 한 해 한 해가 지나가 점점 일본 승려의 시름도 깊어졌다. 당나라에 머문 지 9년째 되던 742년에 도항(道航)선사를 만나게 된다. 요에이와 후쇼는 도항선사에게 일본 불교계에 전계율사가 꼭 필요하다는 점과 이를 간절히 바라는 일본 쇼무 천황의 뜻을 전했다. 도항은 자기의 스승인 감진 화상을 이들에게 추천하면서 찾아가라고 제안했다. 도항으로부터 감진이 어떤 인물인지 자세히 전해 들은 요에이와 후쇼는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고 확신하고 바로 양저우 대명사를 찾아간다.
 
당시 감진은 양저우 지역의 최고 고승이었다. 감진은 14살 때 불상을 보고 감동하여 얼마 뒤 대운사(大雲寺)로 출가했다. 21살 때 홍경(弘景)스님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은 감진은 낙양과 장안을 오가며 율학과 천태학(天台學)의 대가들로부터 불교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26살 때 대명사로 돌아와 승려들에게 계율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감진은 양저우 지역을 대표하는 율사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경과 율에 정통한데다가 자비로운 성품의 감진에게 감동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당시에 수계를 받은 사람이 무려 4만 명에 이르렀다. 감진은 율학 외에도 건축, 조각, 수학, 의학에 대해서도 깊게 공부를 하여 여러 사찰의 퇴락한 건물들을 수리하고 그곳에 불보살상을 조성했다. 감진의 손을 거쳐 복원된 절이 무려 80여 곳이었다.
 
요에이와 후쇼는 양저우 대명사로 감진을 찾아가 친견하고는 일본 불교 현황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큰 절을 올리며 간절하게 일본으로 건너가서 율법을 전해줄 것을 간청했다. 감진 화상은 “天台智者(智顗, 538년-597년)스승이신 남악혜사(南岳慧師)께서 입적한 뒤 일본불교를 부흥시킨 쇼토쿠(聖德)태자로 다시 태어나셨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일본 승려를 반갑게 맞이했다. 천태대사 지의는 중국 천태종의 개조로, 수양제의 간절한 청을 받아들여 금릉에서 황제에게 보살계를 수여하고 천태대사의 호를 받게 되었다.
 
그런 뒤 감진 화상은 제자들을 불러 모아 “누가 가겠냐?”고 물었다. 한참이 지나도록 제자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감진이 제자들에게 아주 작게 말했다. “불법(佛法)을 위한 일이거늘 어찌 목숨을 아낄 것인가? 너희가 가지 않는다니 내가 직접 가겠다. 국법(國法)을 어겨서라도 반드시 가겠다.” 스승의 비장한 선언 앞에 도항, 징관, 여혜, 상언, 도흥, 덕청, 사탁 등 많은 제자들도 따라서 함께 일본으로 갈 것을 맹세했다. 모진 고난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앞으로 어떤 난관이 닥쳐올지 모르지만 많은 승려들은 스승의 가르침대로 빠르게 실천하고 행동했다.
 
그 당시 당나라는 상인이나 민간인들이 나라 밖을 나가는 것은 철저히 법으로 금지했고, 이를 어기면 엄한 중벌에 처했다. 감진의 결심은 나라의 법을 어기더라도 부처님의 법을 전하는 전법(傳法)의 길을 가겠다는 대천명이었다. 제자들은 스승의 지시대로 계획에 착수했다. 감진 대사는 직접 나서서 큰 배를 만들도록 지시하고 뱃사람들을 고용했다. 743년 3월 모든 준비를 마쳤으나 절강성 일대에 해적들이 소란을 피우는 일이 발생해 배가 바다에 뜨지 못했다. 그때 제자 중 한 명이 관에 몰래 밀고해 배가 압수당하는 일이 벌어져 첫 번째 일본행은 실패였다. 이에 요에이와 후쇼는 크게 실망했다. 그러나 감진은 전법의 뜻을 꺾지 않았다.
닝보시(宁波市) # 감진화상
【문화】 궁인창의 독서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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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저우 10대 사찰 뽑혀... 중국과 일본서 존경받는 감진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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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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