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한글 
◈ 제성대(帝星臺) ◈
◇ 출발(出發) ◇
카탈로그   목차 (총 : 18권)     이전 2권 다음
1938.5-1939.4
김동인
1
제성대(帝星臺)
2
出發[출발]
 
 
3
"도독(都督) 영감 계신가?"
 
4
여기는 신라구의 관할인 광주도독부(光州都督部)를 주관하는 도독의 사택이었다. 말위(馬上)에는 한 여남은쯤 난 소년이 타고 있고 그 소년에 배종해 온 시종이 이 댁 하인을 불러서 통자를 한다.
 
5
"네이 계시옵니다."
 
6
"부여(扶餘)댁 도련님 견훤(甄萱) 아기께서 영감께 잠깐 뵈옵겠다고 여쭈게."
 
7
"네이."
 
8
하인은 들어갔다. 하인이 들어간 동안 소년은 말께소 내려서 아무 표정도 없는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9
이윽고 들어갔던 하인이 나왔다.
 
10
"들어옵시삽니다."
 
11
"음─."
 
12
배종하여 온 시중이며 하인배들은 중대문 밖에 멈추어 두고 소년은 혼자서 사랑으로 들어갔다. 도독은 댓돌 위에 까지 나와서 이 소년 귀인을 맞았다.
 
13
주객은 사랑에 마주 앉았다. 견훤은 인사가 끝난 뒤에 용건을 화두에 오르게 되었다.
 
14
"어떻게 왕림하셨읍니까?"
 
15
"네 다름이 아니라 부여 웅진(熊津) 방면에 약 일 삭 한하고 길을 좀 떠나야겠는데 그 증단(證單)을 한 장 해줍시사고 왔읍니다."
 
16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무찌르고 임금 의자왕(義慈王)을 당나라로 잡혀간 뒤에 공식으로는 백제는 망한 셈이었다. 그러나 의자왕이 당나라로 잡혀간 뒤에는 태자 융(隆)이며 백제 국민들이 이리저리 쫓겨 다니면서 백제 복벽운동을 끊임없이 하였고, 그때 일본 가 있던 백제 왕자 풍(豐) 등도 또한 귀국하여 칭왕을 하며 백제 재건에 퍽이나 노력하였다. 그 때문에 백제 구역(舊域)을 관할하는 당나라 도독이며 그 뒤를 맡은 신라 관원들은 백제 왕족의 거래를 엄중히 단속하고 관할구역이 다른 곳으로 가려면 반드시 그곳 도독의 증단(證單)을 가져야만 통과 혹은 통행케 하였다.
 
17
백제 망한 지 이백 수십 년─ 지금은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지만, 제도가 그냥 남아 있으니만치, 백제 왕족들은 여행을 하려면 반드시 증단을 도독에게 받는 것이었다.
 
18
백제 왕족으로─ 더욱이 태자 융(隆)이 정통 갈래의 팔대 손인 부여 아자개(扶餘 阿慈介─ 백제 시조 온주〈溫祖〉왕이 부여 계통이니만치 성씨를 부여라 하였다)의 아들인 견훤(甄萱)은 그의 거주하는 광주 이외에 가려면 신라 관원의 증단이 필요하다.
 
19
"어느 분이 가시렵니까?"
 
20
"시생이─."
 
21
도독은 뜻않고 소년을 바라보았다. 여남은 살 난 소년이 몸소 웅진 부여 등지를 간다는 것이 너무나 과한 일이므로….
 
22
소년은 도독의 눈이 자기에게 부어져 있는지 어쩐지 전혀 무관심한 듯 한 얼굴이었다. 소년이라 보기 힘든 억센 이마며 눈이며 입이며 얼굴 전면- 무엇을 생각하는지 혹은 아무 생각도 없이 앉았는지, 명랑한 편보다 오히려 음울한 편에 가까운 뚱하니 앉아서 자연적으로 마주보이는 담벼락을 바라보고 있다.
 
23
"용무(用務)는?"
 
24
"성묘(省墓)차 올시다."
 
25
"혼자 가십니까 혹은 문중 동행하실 분이라도 계십니까?"
 
26
"혼자 갑니다."
 
27
"혼자서 어떻게…."
 
28
"이 밝은 세상에 혼잣길이 무서울 것이 있읍니까? 도적을 만나면 호령해서 쫓고, 호랑이를 만나면 쏘(射)고- 아무 염려 마십쇼."
 
29
염려가 아니라 기이하여 물은 것이다.
 
30
때는 신라 경문왕(景文王) 십사년 을미, 당나라로 따지자면 건부(乾符) 이년, 지금으로부터 약 천삼십여 년 전- 아직 여름이라기에는 이르고 봄이라기 는 좀 늦은 절기였다.
 
31
도독은 잠시 더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32
"좀 있다 하인을 도독부로 보내시면 해두었다가 드리지요."
 
33
하고 쾌히 승낙하였다. 사실에 있어서 증단이니 무엇이니 하는 것은 지금은 단지 제도가 그냥 있으니 그냥 시행하는 것이지 엄하지도 않고 깐깐하지도 않고, 언제든'해줍시사’하면 내어주는 것이었다.
 
34
"그럼 조금 있다가 하인을 보내오리다."
 
35
하고 소년은 그 자리를 일어섰다.
 
36
아직 도독이 공정에 나가지 않고 자택에 있는 때였으니까 시각으로 보자면 조반 직후쯤이었다.
 
37
견훤이 하인을 도독부에 보내서 증단을 찾아온 것은 낮이 거진 된 때였다.
 
38
견훤은 증단을 가지고 아버지가 거처하는 사랑으로 들어갔다.
 
39
혼자 앉아서 무슨 책을 읽고 있던 아버지는 견훤이 들어오는 것을 한순간 쳐다보고 다시 눈을 책에 부었다. 그 맞은편에 견훤은 가 앉았다. 그리고 말 대신으로 아버지의 앞으로 증단을 내밀었다.
 
40
아버지는 힐끗 증단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책으로 돌리면서 물었다.
 
41
"어디 가려느냐?"
 
42
"네."
 
43
"어디를?"
 
44
견훤은 대답치 않았다. 잠시 침묵….
 
45
"아버님."
 
46
잠시 뒤에야 찾았다. 아버지는 그냥 책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47
"응?"
 
48
"아버님. 벽장에 비장해 두신 품칼을 제게 주셔요."
 
49
아버지는 홱하니 눈을 책에서 들었다. 적지 않게 놀란 모양이었다.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바라는 보았으나 아버지가 잘 아는 바, 이 아들의 얼굴은 '표정’ 이 없다. 무슨 일(기쁜 일 슬픈 일 놀라운 일을 막론하고)을 만날지라도, 무표정한 얼굴을 지금도 여전하였다.
 
50
"그것은 왜?"
 
51
아들은 대답 대신으로 눈으로 증단을 가리켰다. 그리고 증단을 설명하는 바는 단지 성묘차로 웅진 부여 방면으로 부여 융(扶餘隆)의 직손(直孫) 견훤(당년 9세)이 약 일 삭 한하고 돌아온다는 것을 말할 뿐이요, 증단을 발행한 연월일은 오늘 -상지(上之) 십사년 을미 사월 십일- 로 되어 있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다시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52
"성묘에 품칼은 무얼 하느냐?"
 
53
"아버님."
 
54
견훤의 목소리는 지극히 작았다.
 
55
"다시 시하에 돌아올 날이 있을지 어떨지 모르겠읍니다."
 
56
아버지는 한참을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들의 말을 알아들었다.
 
57
"오오, 나서려느냐?"
 
58
아버지의 목소리도 아들이나 일반으로 듣기 힘들도록 작았다.
 
59
"그래 언제 떠나려느냐?"
 
60
"내일 동트기 전에 떠나겠읍니다."
 
61
"수하(手下)는 누구를 데리고."
 
62
"혼자서 떠나겠읍니다."
 
63
"네 힘이 넉넉할 듯싶으냐?"
 
64
"모르겠읍니다. 장차 기르겠읍니다. 십 년, 이십 년, 오십 년- 한(恨)을 품고 넘어지든가 백제국을 재건하든가 둘 중에 한 가지의 끝장을 보고야 말겠읍니다.
 
65
아버지는 머리를 수그렸다. 한참을 감개무량한 듯이 잠자코 있었다.
 
66
"야, 너까지 아홉 대(代)째로다. 대대로 벼르기만 했다. 네 대에 비로소 길을 떠나는구나. 떠나라. 성공해라. 하늘 아래 너 혼자인 줄 굳게 믿어라.
 
67
너보다 높은 이는 하늘 한- 온 천하가 네 아랫사람이라는 신념을 굳게 가져라. 너를 호령할 자는 하늘 밖에 없으시다. 알겠느냐?"
 
68
"네 알겠읍니다."
 
69
"부자의 연도 오늘로 끝이로다. 이후 언제든 견훤(甄萱)의 손으로 백제국이 재건되었다는 소문이 들리면 이 늙은 아비가 요행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그때 네 발 아래 가서 꿇어 절하마. 너와 내가 군신지간이 되기 전에는 다시 아비를 만날 생각을 하지 말아라."
 
70
견훤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71
"저도 그 생각이올시다. 장차 그 품칼로 신라 임금을 자진(自盡)케 하고 제 수하 장졸로 신라 궁실 비빈(妃嬪)들을 욕뵈어서 열대 조상님 의자왕과 낙화암의 원수를 눈앞에 갚기 전에는 다시 아버님께 뵙지 않겠읍니다.
 
72
"음, 밤에 제성대(帝星臺)에서 제사를 드리고 그리고는 떠나거라."
 
73
아버지는 벽장을 열었다. 무슨 커다란 궤짝을 꺼내었다. 단단히 잠근 쇠를 열고 뚜껑을 들치며 그 안에는 또 궤짝이 들어 있었다. 이렇게 하기를 사오 중(重) ─ 맨 마지막에는 비단으로 싼 무슨 물건이 하나 나왔다. 겉을 싼 비단 보자기를 펴니까, 그 속에서 나온 것은 금과 은으로 장식한 한 개 품칼 이었다.
 
74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조심조심히 칼날을 자루에서 뽑았다. 명공의 만든 칼인 모양으로서 번쩍 광채가 난다. 견훤도 뜻하지 않고 한 걸음 무릎으로 앞으로 다그어 앉았다.
 
75
한참을 그 칼을 굽어보고 있을 동안 아자개의 눈에서는 커다란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졌다. 평생에 무표정한 견훤의 눈에도 눈물이 한 꺼풀 보였다.
 
76
"이 칼로 목을 찌르시고…."
 
77
─지금으로부터 이백 수십 년 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밀물같이 백제 서울 부여로 몰려들어와서 이를 맞아 싸우다 싸우다 못해 임금 의자(義慈)는 당나라고 잡혀간 뒤 태자 융(隆)이 백제의 잔민들을 모아 가지고 고국 복벽 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잔당의 세력이 신라와 당나라의 합친 힘을 도저히 당할 수가 없었다. 융은 신라 임금(태종 춘추왕)과 장군 김유신의 앞에 사로잡히어 나아갔다. 얼마나 욕을 보았으랴.
 
78
"죽어라!"
 
79
"자진해라."
 
80
망국왕에게 대한 승리자의 명령으로 스스로 찼던 품칼을 뽑아 자기 목숨을 끊을 때 얼마나 그 한이 컸으랴.
 
81
"자 이 칼을 물려받아라. 이후 요행 일이 뜻대로 되는 날이라도 결코 신라 임금을 난군 중에 잃지 말아라. 네 눈앞에서 이 칼로 자진케 해라. 원한이 크다. 원한이 크면 보수도 크느니라. 나라와 ─ 지위와 ─ 생명과 ─ 음 ─."
 
82
아버지가 다시 싸서 주는(원한 큰) 품칼을 견훤은 받아 몸에 간직하였다.
 
83
그런 뒤에 아버지에게서 물러나왔다.
 
84
아버지 아자개는 아들이 내일 성묘차로 길 떠난다는 뜻을 집안 사람들에게 알리었다. 그러나 떠나는 진의는 제 안해에게조차 말하지 않았다. 말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이었다. 말하지 못할 종류의 것이었다.
 
85
내일 길 떠난다 하지만 견훤도 아무 준비도 않고 있었다. 단지 자기가 사랑 하여 타던 준총을 하인에게 명하여 잘 씻기와 잘 먹이기와 가장 든든한 안장을 메우기를 명한 다음 자기는 여전히 다른 말을 타고 벌에 나가서 달리며 쏘며 진일을 보냈다. 다시 돌아올 기약이 없는 길을 떠나려는 사람이라고는 볼 수가 없었다.
 
86
그 날 고스란히 밤은 깊어 갔다.
 
87
초열흘, 꽤 이지러진 달은 고요히 잠든 누리를 비추고 있었다.
 
88
이 광주는 북쪽을 마치 병풍같이 두른 언덕에도 어둑침침한 달빛은 고요히내려 비추고 있다.
 
89
깊어 가는 밤 ─ 자시 ─ 축시.
 
90
흙으로 된 그 언덕에 광주 정북쪽으로 연한 중턱쯤 한 커다란 바위가 있다. 높이가 한 길쯤, 남북이 열 자쯤, 동서가 이십 척쯤 되는 깍은 듯이 네모난 바위로서 대체 그 바위가 본시부터 거기 있었는지, 누가 거기 옮겨다놓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흙으로 된 이 언덕에 그런 바위가 천연적으로 있다 하는 것도 곧 머리를 끄덕이기 힘든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 작지 않은 바위를 인력으로는 도저히 옮길 수가 없겠는지라 역시 천연적으로 있는 것이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바위는 누구가 명명하였는지는 모르지만, ' 제성대(帝星臺)’라 불리웠다.
 
91
빈틈없이 어둑침침히 비추는 달빛은 이 제성대에도 내려비추어서 이슬 머 금은 바위는 가까이서 보면 여기저기 푸르게 번득인다.
 
92
 
93
첫여름 밤이었다. 벌써 수렁이에서 까고 나온 벌레들의 소리가 여기저기 서애 연 스럽다고 형용할이만치 간간히 들렸다.
 
94
문득 저편 언덕 밑에 사람의 그림자가 어둑침침한 달빛 아래 나타났다. 하나이 아니요 둘이었다.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은 품이 어른과 아이인 듯 싶었다.
 
95
벌레 소리가 그 두 사람의 통과함을 따라서 일변 잦고 일변 일었다. 그러한 가운데서 묵묵히 걸어서 그들은 제성대의 앞에까지 이르렀다.
 
96
과연 어른과 아이였다. 어른은 아자개였다. 아이는 견훤이었다.
 
97
제성대 앞에까지 이른 그들은 손에 들고 온 보자기를 잔디밭에 내려놓고 폈다. 주, 과, 포의 간단한 제찬이었다.
 
98
준비하여 가지고 온 비로 제성대를 깨끗이 쓴 뒤에 그들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99
"아버님."
 
100
"음 지성으로!"
 
101
부자지간의 대화는 이것뿐─ 다시 말이 끊어졌다.
 
102
가묘(家廟)에도 하직을 하고 나왔다. 장차 꾸미려는 커다란 일을 이 이름이 상서로운 제성대에 빌고 출발하려는 것이었다.
 
103
"아버님, 이 뒤 성공하는 날이 있다 하면 이 대(臺)에서 첫 잔치를 열겠 읍니다."
 
104
"그런 좋은 날이 오면, 그때까지 그냥 수(壽)가 있다면 이 늙은 머리를 제일 먼첨 네 앞에 수그려 절하마."
 
105
빌기를 다하고 언덕을 내려오매(단지 성묘차로 떠나는 줄 아는) 하인은 말에 노자를 드북히 실어 행길에 등대하고 있었다.
 
106
견훤은 말께 올랐다.
 
107
"아버님 안녕히 계세요."
 
108
"오냐. 몸 성히 가거라. 몸 성치 못하면 아무 일도 다 틀리느니라."
 
109
말은 우렁찬 숨을 쉬었다. 견훤이 고삐를 약간 늦굴 때에 말은 그의 힘 있는 다리를 뚜거덕 뚜거덕, 북쪽을 향하여 옮겼다.
 
110
마상의 소년은 다시 뒤를 안 돌아보고 천천히 말을 몰았다. 그의 뒷 모양을 바라보는 아버지는 아들의 양이 온전히 어둑침침한 가운데로 사라지기까지 마치 거기 못 박아 놓은 사람같이 서서 전송하고 있었다. 마음으로는 한없이 한없이 아들의 장래를 축복하였다. 예삿사람이 마음내지 못할 거대한 일을 감행하고자 떠나는 아들의 장래를….
 
 
111
견훤은 광주 땅을 벗어나서는 신라 관원의 증단도 찢어 버렸다. 서로다 얼굴을 아는 광주이니 증단도 쓸데있지만 다른 곳에 가서는 아주 쓸데없는 종이 조각 일 뿐더러 그 종이가 어떻게 남의 눈에 띄어 신분이 알리면 도리어 귀찮기 때문이었다.
 
112
낡은 온갖 겨레를 다 벗어 버리고 단지 의자왕의 제 십대 손이라는 관념 하나만을 가지고 목적 관철에 힘쓰자, 불행 성공키 전에 넘어지는 날에는 한 개 길가의 주검이 될 것이요, 요행 일이 바로 되면 넓게는 백제 왕국의 재건이요 개인적으로는 임금의 신분을 취득하여 천만세까지 누리고 또 누리자.
 
113
수일 후에 견훤의 모양은, 부여 사자수(泗泚水) 가에 나타났다. 거기서 고로(古老)를 하나 붙들어 가지고, 전해 내려오는 백제 망국의 전말이며 낙화암의 비극 전설을 들었다.
 
114
굽어보면 용용히 흐르는 사자수는 이백 년 전 그날도 오늘과 같이 말 없이 흘렀으리라. 말없이 흐르는 저 물에 몸을 던진 삼천 궁녀의 원한을 지금 어디 쌓여 있나.
 
115
몸을 빼쳐 물에 던진 주검의 원한도 원한이려니와 미처 빼치지 못하여 굶주린 당나라와 신라 장졸에게 욕보고 죽은 그 원한과 억분은 또 얼마나 하였으랴.
 
116
이를 설명하는 백제 유민인 고로(古老)의 눈에서 눈물이 흐를 때, 욕 본다는 의외에는 분명한 해석을 못 내렸지만 견훤의 무표정한 얼굴에서도 드디어 눈물이 나왔다.
 
117
온갖 사물(事物)이며 이치(理致)에 대하여 인식, 판단 등의 힘이 매우 조숙(早熟)한 견훤은 당시(이백여 년 전)에 여기와 및 이 근처를 무대로 하여 일어났을 참극들을 서언히 머리에 그려볼 수가 있었다. 당나라와 신라 군사들에게 불타 버린 옛날의 대궐 터에 그냥 남아 있는 주출돌이며 깨어진 기 왓장에서 옛날의 웅대함과 강성함을 엿볼 수가 있느니만치 의자왕이 한낱 죄인같이 묶이어 당나라 서울로 갈 때의 광경이 더욱 눈물겨웠다.
 
118
견훤은 말을 타고 진일을 백제의 옛터를 돌아다니며 조상의 위업을 상상 하여 보고 조상의 패망을 통곡하였다.
 
119
그날 밤을 성내에서 묵은 뒤에 이튿날 해뜰 때쯤은 견훤의 모양은 벌써 부여에서 수십 리 밖 벌판으로 말을 달리고 있었다.
 
120
〈이 소년 왕손에게 대한 사상(史上)기록은 매우 모호하다. 그의 출생에 대하 여서도 어떤 책에는 상주 가은현(尙州加恩縣)에 사는 농부 아자개의 아들이라 하였으며 다른 어떤 기억에는 광주(光州)에 사는 부자집 딸이 자의 동자(紫衣童子)로 화한 지렁이(蚯蚓)와 밀통하여 낳은 바란 아주 고약한 것까지 있다. 짐작컨대 그의 이름이 견훤이라, 발음이 지렁이와 흡사하므로 어렸을 때 아이들끼리의 별명이 지렁이였었는지도 모른다. 하여간 후일 기록을 남긴 사람이 다 신라 계통의 사람이라 견훤에게 호의를 가질 자는 없었으므로 그의 위대한 백제 복벽운동을 한낱 도적의 행사로 곡필(曲筆)을 하였을 것이다.〉
 
121
부여에 들러서 고국의 멸망을 통곡한 후에 방랑의 길에 오른 견훤은 그로부터 십여 일 뒤에 지리산맥(智異山脈)의 어떤 험준한 골짜기를 헤매고 있었다.
 
122
말은 명마, 기수도 또한 명기수인 이 좋은 콤비는 험한 산로를 평지인 듯이 그냥 말께 탄 채로 올라가며 내려가며 방황하고 있는 것이었다.
 
123
시간을 기다리는 차였다. 험하기도 험하거니와 수풀과 고목이 우거진이 산간에 절간이라도 없는가고 찾는 중이었다. 절간이 있다 하여도 보이지 않을것이다. 저녁 짓는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야 그 아래 절간이나 인가가 있는줄을 알 것이다. 저녁 짓는 시간을 기다리면서 한 걸을 두 걸음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124
깍아세운 듯한 산이 높은지라 해는 벌써 산 뒤로 숨은 지가 오래다. 그러나 좀체 저녁 연기가 오르지를 않는다.
 
125
"빈 산인가?"
 
126
이만치 큰 골짜기에 절간 하나 암자 하나 인가 하나가 없을까. 일이 실패할지라도 낙망할 줄을 모르는 천성을 타고난 이 소년은 그냥 그래도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127
이윽고 한 줄기 보였다. 우거진 나무 숲 위에 곧추 단 한 줄기의 연기가 하늘로 벋치고 있다.
 
128
목적하였던 바를 발견하였지만 소년은 그다지 반기는 듯도 않았다. 말 머리를 그쪽으로 돌렸다.
 
129
과연 좋은 말이었다. 깍아세운 듯한 절벽을 혹은 올라뛰고 혹은 더듬으며 말은 주인이 고삐를 돌리는 대로 서슴지 않고 올라갔다. 소년도 말 안장에 마치 평지에 않은 듯이 까딱없이 앉아 있다.
 
130
거기까지 이르러 보니 단 한 간의 암자였다. 암주는 백발─ 이라기보다 머리털은 전혀 없고 흰 수염을 기다랗게 늘인 늙은 중이었다. 노승은 말발 소리를 듣고 저녁 짓던 손을 멈추고 기이한 듯이(차차 가까이 오는) 소년과 말을 바라보았다.
 
 
131
견훤은 입 속으로 혀를 채었다. 벌써 기대에 어그러지는 모양이었다.
 
132
견훤은 말께 내려서 고삐를 끄을고 가까이 갔다. 노승이 먼저 입을 열었다.)
 
133
"이 심산까지 웬 아이냐?"
 
134
"웬 분이오니까 해 보시지요?"
 
135
노승의 얼굴에는 잠시 당황한 기색이 나타났다. 그 뒤에는 미소.
 
136
"그래 웬 분이오니까?"
 
137
"어진 스승을 뵈러 다니는 구도소년(求道少年)이올시다."
 
138
"빈도께 도를 구할 생각은 없소이까?"
 
139
"스님께 구할 바는 오늘 저녁과 내일 아침의 반염과 오늘 하룻밤을 지낼 자리 뿐이올시다."
 
140
"어렵잖은 일이니, 구하는 대로 해드릴 터이지만, 맹수(猛獸)에게 밤새말을 물어 가지 말라는 부탁은 아마 벌써 하셨겠지요?"
 
141
"맹수가 있읍니까?"
 
142
"허어, 아직 연천(年淺)하시군. 맹수가 이런 험산에 살지 않으면 어디서 삽니까?"
 
143
"그럼 말도 암실 안에서 밤을 지내도록 한 가지 더 구합니다."
 
144
"자리가 좁을걸요."
 
145
"나 잘 자리에 말을 세우고 내가 말 아래서 자면 그 자리가 그 자리 아니오니까?"
 
146
노승은 잠시 소년의 얼굴을 우러러 보았다.
 
147
"도령을 가르칠 만한 높은 스승은 구하기 힘드오리다."
 
148
드디어 항복하였다.
 
149
"도령의 구하는 도는 어떤 도오니까?"
 
150
"왕자지도(王者之道) ─ 그 외에 잡술(雜術)로 병법, 무술 ─ 소년 답지 않게 식량이 크오니 닷 되만 더 끓여 주십시오. 말은 꼴을 넉넉히 먹였으니 생각 마시고. 자 비룡(飛龍 ─ 말이름)이, 우리는 먼저 들어가자."
 
151
견훤은 말을 끌고 암자 안을 들어가서 윗목에 말을 세우고 자기는 말의 배아래 들어가 앉았다.
 
152
"너는 오늘밤 서서 지내아겠구나."
 
153
배 아래서 손을 들어 말의 가슴을 두드려 주매 말은 기쁜 듯이 코를 버룩거리었다.
 
154
사월에서 오월로 유월로 칠월로 ─ 항간에 이름만 학자의 문을 두드리며 고덕의 칭송이 높은 도승을 찾으며 또는 이름없이 숨어서 도를 닦는 고사를 찾으며 산으로 평지로 견훤의 무정처한 방랑은 그냥 계속되었다.
 
155
그 칠월에 국상이 났다. 신라 경문왕이 승하를 한 것이다.
 
156
그의 방랑의 길이 더듬고 또 더듬어서 동수(棟藪)까지 이른 때였다.
 
157
좌우편으로 산을 끼고, 가운데는 개천이 흐르는 ─ 험준하다 할 수는 없지만 펑펑하다고도 할 수 없는 골짜기에서 여전히 좋은 스승을 찾아 돌아다니던 견훤은 여름날 더위에 덜민 말을 씻기 위하여 개천가로 내려갔다.
 
158
개천에서 자기도 멱감고 말도 씻겨서, 더위를 식히고 있던 견훤은 문득 이 개천 상류에서 흘러 내려오는 산채(山菜)를 보았다. 우연히 개천에 흘러든 것이 아니었다. 뒤달아 내려오는 품이 분명히 상류에서 누구가 산채를 개천에 씻고 있는 것이었다.
 
159
견훤은 산채의 주인을 알아보고 싶었다. 벗었던 옷을 다시 주워입고, 내렸던 안장을 다시 메우고, 다시 말께 올라서 상류 쪽으로 찾아 더듬었다.
 
160
얼마 올라가지 않아서 견훤은 산채 주인을 만났다. 상좌 아이였다. 새 빨갛게 깍은 머리를 여름날 햇볕에 반짝이며 개천가에 앉아서 산채를 씻고 있는것이었다.
 
161
견훤은 말께 내려서 말을 끄을고 차차 가까이 갔다. 처음에는 개천의 물 소리 때문에 말 발소리를 못 들었는지 상좌는 견훤이 꽤 가까이까지 이른 때야 비로소 머리를 뒤로 들어 보았다. 열 살이 약간 넘을 듯하였다. 애꾸눈 이었다.
 
162
애꾼눈이 상좌는 견훤에게 그다지 호기심을 안 일으킨 모양이었다. 이런 산간에 이런 소년이 단 혼자서 말을 타고 들어온다는 것이 누구에게든 호기심을 일으킬 만한 일인데 이 애꾸눈이는 그다지 호기심도 안 일으킨 모양으로 다시 머리를 앞으로 씻던 산채를 그냥 씻는다.
 
163
견훤도 걸음을 멈추고 우두머니 서 버렸다. 고삐를 잡은 채 태평무사한 사람과 같이. 그것은 어떻게 보면 상좌가 산채 다 씻기를 기다리는 듯도 하여 보이고 어떻게 보면, 길가다가 잠시 선 채로 다리쉼을 하는 듯도 하였다.
 
164
기이한 광경이었다. 산채 씻던 소년 중은 뒤에 사람이 온 것을 분명히 보았겄만 저 할 일만 하고 있고, 말끌고 온 소년은 상좌를 목적하고 왔을 것이지만 상좌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듯이 서 있고, 산에서는 뻐꾸기 만연하여 울고, 소나무 끝에는 바람이 불고.
 
165
이윽고 상좌는 산채를 다 씻었다. 씻어서는 소쿨에 담아 가지고 물이 뚝뚝 흐르는 것을 옆에 끼고, 돌아섰다. 거기서는 외발자국 길이 있는데 그 길에 견훤이 말고삐를 잡고 서 있는 것이었다. 상좌는 그리로 향하여 왔다. 자기가 오노라면 견훤이 당연히 비켜줄 줄로 믿는 듯이….
 
166
상좌는 견훤에게서 삼 보 거리 되는 곳에 와서 섰다. 서서는 견훤은 보지 않고 그의 애꾸진 눈으로 견훤의 말을 기웃이 보았다.
 
167
"거 말 참 좋다."
 
168
드디어 입을 열었다. 견훤이 즉시로 응하였다.
 
169
"눈이 절반이라 보기도 절반만 보이는 모양이군. 사람은 안 보이고 말만 보이느냐?"
 
170
상좌는 힐끗 견훤을 보았다.
 
171
"음 사람도 좋군."
 
172
"눈으로만 봐두 너보다야 곱이나 나앗지."
 
173
이 두 번이나 자기의 병신눈에 대하여 조롱을 받은 소년 상좌는 꽤 성 이난 모양이었다. 또 다시 힐끗 견훤을 보았다. 단 한 개의 눈이 노염으로 불 붙었다.
 
174
"이 자식!"
 
175
물이 뚝뚝 흐르는 산채 소쿨을 그 자리에 놓았다.
 
176
"그래 눈소리는 왜 두 번씩이나 한단 말이냐!"
 
177
견훤은 싱그레 웃었다.
 
178
"원망을 하려면 너희 부모님께나 그렇지 않거든 하나님께나 해라."
 
179
와락!
 
180
덤벼드는 애꾸눈이와 막아내는 견훤과─ 두 소년의 격투는 거기서 맹렬히 시작 되었다.
 
181
힘이 비슷비슷하였다. 힘이 비슷한지라 싸움도 비슷하였다. 그러나 비슷하다고는 하지만 둘이 다 좀체의 어른으로도 당키 힘든 힘인 듯싶었다. 두 소년의 싸움 때문에 부러져 나가는 나무며 굴러 나가는 돌멩이로 보아서 둘이다 좀체의 힘이 아니었다. 견훤이 타고 온 말은 한 걸음 물러서서 주인의 싸움은 본체만체 자기의 꼴만 뜯어먹고 있었다.
 
182
둘이 다 기진맥진하여 인제 더 싸움을 계속하지 못하게 되어서야 싸움은 끝이 났다. 그러나 어느 편이 항복을 하여 끝난 것은 아니었다.
 
183
"그 자식 제법일세."
 
184
넘어져 굴러내려가다가 바위에 걸려서 그 바위를 의지하며 비슬비슬 일어서면서 다시 덤벼들 준비를 하며 이렇게 중얼거리는 애꾸눈이에게 견훤 이 다시 한번 눈을 들추어,
 
185
"이 자식, 다시 덤벼들다가는 성한 눈조차 버린다. 인젠 그만둬라."
 
 
186
씨근거리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이 싸움의 마지막이었다.
 
187
"또 눈 ?"
 
188
"왜 남달리 병신눈을 가졌느냐."
 
189
"요것을!"
 
190
"좀체 요것이 아니란다."
 
191
이리하여 완력 싸움이 다시 말 싸움으로 변하였다.
 
192
"넌 대체 어디 물건이냐?"
 
193
"너는 대체 어디 물건이냐?"
 
194
서로 물었다.
 
195
"나 말이야? 나는 저 말(견훤 자기가 타고 온 말) 온 데서 오신 분이다."
 
196
"나는 너희 같은 구린내 나는 농군과 달라 적어두 ─ 적어두 ─."
 
197
"적어두 어떻단 말이냐."
 
198
"적어두 근본이 다르느니라. 야, 그래두 내 평생 처음이루다. 너만한 자식은. 하니깐. 함께 우리 절루 가서 저녁이나 한 끼 먹고 가거라. 하룻밤 자겠다면 자리도 빌려 주마."
 
199
"불감청이언정일세."
 
200
절이라는 절, 암자라는 암자를 모조리 찾아다니는 견훤이다. 이의가 있을 리가 없었다.
 
201
"너의 스님은 고덕하신 분이냐?"
 
202
가는 길이 이렇게 물어 보매,
 
203
"그만하면 열(劣)한 편은 아니지."
 
204
애꾸눈이의 대답은 이러하였다.
 
205
애꾸눈이의 이름은 선종(善宗)이요 절 이름은 동화사(桐華寺)라 하였다.
 
206
선종의 말을 듣자면 자기가 이 절에 와 이 있는 것은 대저 임시이요 언제든 좋은 곳이 있으면 다시 그리고 달려갈 생각이라 한다.
 
207
견훤은 그의 말에 대꾸만 하면서 말을 끌고 그의 뒤를 ─ 투들투들한 산길을 골라 짚으면서 따라갔다.
 
208
아까 싸울 때에 주먹에 맞고 바위에 부딪치고 하여 모두 붓고 부르트고 한 얼굴을 서로 고소하면서 바라보며 아까와 달리 의좋게 절에까지 갔다.
 
209
절에서 견훤은 먼저 선종의 신분을 알아보고 싶었다. 아까 싸울 때에 말말 곁에나 마 ' 근본이 다르노라’고 장담하던 선종의 신분을 알아보고 싶었다.
 
 
210
당년에는 과연 좀 색다른 근본의 주인이 민간에도 꽤 많았다. 백제와 고구려가 모두 칠팔백 년간을 누리다가 망하였으니, 그 갈래로도 적지 않은 자손들이 민간에 헤어져 있을 것이었다. 가락(駕洛)국이며 그 밖 작은 나라들의 왕손들도 지금은 전부 민간에 내려 있을 것이었다. 근 일 천 년간을 누려 내려온 신라에도 박(朴), 석(昔), 김(金), 세 가지의 성의 왕손들이 민간에 내린 자도 적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면 이 선종은 어떤 근본을 가진 소년 이길래 자기는 근본이 다르노라고 호어를 하고 있나?
 
211
틈을 엿보아 견훤은 선종을 데리고 뒷산 으슥한 곳으로 갔다. 가서 알아보매 이 애꾸눈의 과거는 대략 이러하였다.
 
212
애꾸눈의 아버지는 이번 세상 떠난 경문왕이었다.
 
213
경문왕도 본시 원갈래의 임금이 아니었다. 한낱 왕족이었다.
 
214
경문왕의 전왕인 헌안(憲安)왕은 아드님이 없고 그 대신 마님 두 분이 있었다. 그때 경문왕은 한낱 왕족으로 화랑(花郞)으로 있었으며 이름을 응렴(應廉 혹 應兼[응겸])이라 하였다.
 
215
응렴 화랑이 국내 순시(國內巡視)를 하고 돌아온 때, 임금은 응렴을 위 하여 임해전(臨海殿)에서 잔치를 열었다. 그리고 그때(응렴은 당년 열다섯 살 났었다) 임금은,
 
216
"그래 그 새 순시할 동안 네가 보고 좋다고 생각한 것이 무엇이냐?"
 
217
고 물어 보았다. 응렴은,
 
218
"소신이 본 중, 세 가지 좋은 것이 있었읍니다. 첫째론 높은 집 자제가 건방지지 않은 것이옵고 둘째로는 가면 사람이 사치하지 않은 것이옵고 셋째 로는 세도가문에 교기 있지 않는 것이었읍니다."
 
219
고 복주하였다. 왕은 이 대답이 너무나 기특하므로 사랑스러워서, 당신께 공주가 두 분이 있는데 마음대로 취하면 부마(駙馬)를 삼으마 허락하였다.
 
220
이 기꺼운 윤허를 듣고 들어온 응렴 화랑은 자기의 낭도(郎徒)들에게 그 소식을 전하였다. 그러니까 낭도 중에 범교사(範敎師)라는 낭도가 응렴 화랑에게 대하여, 그러면 두 공주 중에 어는 공주를 취하시겠느냐고 묻는다.
 
221
이것은 당찮은 질문이었다. 맏공주는 자색이 아름답지 못하고 괄괄하여 마치 사내와 같았다. 어차피 공주를 취하는 이상에는 자색이 아름다운 버금 공주를 취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응렴은 범교사에게 그래도 말 하였다. 그랬더니 의외에 범교사는 머리를 가로 젓는다.
 
222
"안 됩니다. 맏공주를 취하십쇼."
 
223
"왜?"
 
224
"글쎄 소인의 말씀을 들으십쇼. 그러면 장차 세 가지 좋은 일이 생기리다."
 
225
범교사는 응렴의 많은 낭도 중에 지혜 많기로 이름난 사람이었다. 이 범 교사가 버쩍 우기므로, 응염은 부득이 맏공주를 택하기로 하였다.
 
226
응렴 화랑이 왕의 맏사위기 된 지 석 달 만에 왕이 승하하였다. 왕에게는 아드님이 없었다. 왕위(王位)는 맏사위 되는 응렴에게로 굴러왔다.
 
227
응렴이 드디어 신라 왕이 되었다.
 
228
그때 범교사가 신왕께 달려와서 하례를 드렸다.
 
229
"전하 폐화 잠룡시대에, 소인이 일찍이 세 가지 좋은 일이 있겠다고 하지 않았 읍니까. 지금 그 세 가지가 다 이루었사오니 첫째 상공주를 맞으시기 때문에 대행왕을 안심하시게 하였고 둘째 상공주를 맞으셨기에 오늘 이 높으신 위에 오르셨고 셋째 지금 천승의 위에 계시오매 이전에 흠모하시던 버금 공주도 어의 하나에 달렸읍니다. "왕은 즉위한 후에 작은공주까지 제이 왕후로 맞았다.
 
230
그러나 이 임금에게는 아직도 사랑의 불만이 있었다. 이전 화랑 시대에 서로 사랑하던 처녀가 있었다. 임금은 그 처녀까지'부인’으로 대궐로 맞아 들이었다.
 
231
이전에 임금이 버금공주만 맞은 때에는 제일 왕후는 제이 왕후만 투기 하였다. 투기의 대상이 그 하나밖에 없었음으로…. 그런데 지금 웬 뚱딴지 민간에서 처녀 하나를 구하여 올리고 보니, 인제는 제일, 제이, 두 왕후가 한편이 되어 성세를 합하여 새로 맞은 민간 색시에게 대항하게 되었다.
 
232
하늘은 이 사건을 더욱 복잡하게 하느라고 민간 색시의 몸에서 왕자까지 생기게 하였다.
 
233
제일, 제이, 두 왕후의 질투는 더욱 불타오르게 되었다. 더구나 임금이 그 새 왕자를 사랑하는 것을 볼 때에 당신네들의 지위까지 염려되어 더 근심 스러웠다. 그래서 생각해 낸 꾀가 일관(日官)을 시켜서 일금께'그 왕자가 그냥 살아 있다가는 신라 사직이 위태롭다’고 모함을 하게 되었다.
 
234
임금은 좀체 믿지 않았다. 그러나 일관, 왕후, 대신 ─ 연하여 같은 말을하매 마지막에는 안 믿을 수가 없었다.
 
235
왕은 군사를 시켜서 그 민간 색시와 및 그의 몸에서 탄생한 왕자를 죽이라고 분부하였다. 왕명을 받잡고 온 군사들에게 색시는 죽었다. 그러나 왕자는 왕자의 유모가 몰래 미리 빼 낸 덕에 생명만은 부지되었다. 생명은 어떻게 보존되었지만 너무 서두르느라고 그만 실수하여 오른편 눈을 손가락으로 다쳐서 애꾸눈이가 되었다.
 
236
그 애꾸눈이 왕자가 이 동화사의 상좌 선종이었다.
 
 
237
자기의 신분을 다 이야기하고 난 선종은 그 단 한 개의 눈을 들어서 견훤을 쳐다보았다.
 
238
"어떠나? 그래 세상이 세상일 것 같으면 너 같은 것들과 상종이나 할 신분이냐?"
 
239
견훤은 여전히 무표정하였다.
 
240
"그렇지 세상이 세상일 것 같으면 너 같은 것은 벌써 십여 년 전에 송장이 되어서 지금쯤은 해골도 남아 있지 않을 테니까, 상종이 다 뭐냐?"
 
241
견훤의 대답은 이것이었다.
 
242
이 대답에는 선종도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잠시를 퀭하니 견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243
"그래 왕자(王子)자리 떼이구 중이나 되려구 왔느냐?"
 
244
견훤은 잠시 뒤에 다시 물었다.
 
245
"중? 눈깔이 둘이라도 쓸데없는 눈깔이로구나? 내가 끝까지 중으로 지낼듯 싶으냐?"
 
246
"그럼 지장(知庄)이냐?"
 
247
선종은 머리를 저었다.
 
248
"도독(都督)이냐?"
 
249
선종은 역시 머리를 저었다.
 
250
재상이나 화랑도 아니었다.
 
251
"신라 왕 ─."
 
252
선종의 목적도 엉뚱한 야망은 이것이었다. 견훤은 탄식하였다.
 
253
"세상을 절반밖에 못 보는 네 치하(治下)에 있는 백성이야말로 가련하겠다."
 
254
그런 뒤에 한참 머리를 수그리고 손에 든 채찍으로 땅에 무슨 글을 쓰고있던 견훤은 머리를 약간 들었다.
 
255
"야, 선종아."
 
256
"?"
 
257
"중 노릇이나 그냥 해라 ""듣기 싫다."
 
258
"네게는 과해."
 
259
"듣기 싫어."
 
260
"이봐라. 네가 초대면인 내게다가 누구인지 신분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내게다가 네 신분을 다 이야기했지? 뿐더러 네 희망까지도 말했지. 내가 만약 궁실의 누구든가 화랑이든가 하면 단박에 이 칼이."
 
261
하면서 견훤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품칼을 비죽이 내어보였다.
 
262
"벌써 네 목덜미에 박혔을 게 아니냐? 너는 경망해 대망(大望)을 품을 자격이 없어. 중 노릇이나 끝까지 해라. 도승이 되면 그것도 다행이지만 그것도 어떨는지."
 
263
"요 배라먹을."
 
264
"자. 내려가자. 내 이담에 연(輦)을 타고 너의 절을 찾을 테니 그때 허리 부러지지 않게 조심해서 절해 맞아라."
 
265
"에끼."
 
266
두 소년은 일어섰다.
 
267
어느덧 소년들이 앉았던 산 쪽은 벌써 햇볕이 없고 건넌 산만 비추고 있다.
 
268
봉오리에서 봉오리를 나는 새.
 
269
그 밤 견훤은 선종과 한방에 잤다.
 
270
자리에 들면 푸 잠들어 버리는 견훤은 곧 잠들어 버렸다. 그러나 한잠 들었다가 곁에서 무엇이 바스석거리므로 깨어 보매, 선종이 일어나서 가만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271
견훤은 그다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뒷간에라도 가거니 하였다. 그러나 선종은 다가서는 꽤 한참을 지나서도 돌아오지 않는다.
 
272
기다리는 바람에 정신이 쇄락하여지고 정신이 쇄락해진 바람에 잠이 깨었다. 깨어서 한참이나 기다려도 선종은 돌아오지 않으므로 혹은 이 절에서는 이런 밤중에 무슨 하는 일이라도 있는가 하여 다시 잠을 청하여 잤다.
 
273
이튿날 아침에 깨니까 절에서 무엇이 두런거린다.
 
274
"달아났어."
 
275
"그럴 녀석이야."
 
276
"남의 말까지 훔쳐 가지고."
 
277
적지 않게 두선거리므로 나가서 알아보니, 선종이 어젯밤에 없어졌다 하는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견훤이 타고 온 말을 훔쳐 타고 달아났다 하는 것 이었다.
 
278
중들은 견훤에게로 와서 연방 선종에게 대한 비평을 한다. 본시부터 좋지못하던 애로서 중들과도 만날 싸움으로 일삼고 도적질깨나 넉넉히 할 녀석이라고 떠들썩하였다.
 
279
견훤은 잠잠히 돌아섰다.
 
 
280
말을 잃은 것이 애석하였다. 망아지 적부터 손수 길렀다. 본시 종자도 좋거니와 망자지 적부터 손수 기르니만치 손쌀았다.
 
281
삼사 년간을 손수 씻고 먹이고 닦던 말을 잃어버린 견훤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 하였으나 마음으로는 적지 않게 쓸쓸하였다.
 
282
"병신 고운 데 없읍니다."
 
283
자기에 책임없는 일이지만 이렇게 미안한 듯이 말하는 중들에게 대답도 않고 견훤은 방으로 들어왔다.
 
284
견훤은 내심 혀를 채었다. 말을 잃은 것이 딱하였다.
 
285
장차로 얼마나 더 가야 될지 알 수 없는 표랑의 길을 더듬는 몸으로 좋은 말은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었다. 몸에 지니고 나온 황금이 적잖으니 아무런 말이든 사자면 사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산간 험로를 평지와 같이 걸어줄 명마는 구하기 힘들 것이다. 뿐더러 구하기 쉽고 어려움은 둘째두고 비록 짐승이나마 망아지 적부터 길러 온 정의도 적지 않다.
 
286
"망할 녀석. 대망(大望)은 커녕 쥐뿔도 못 가질 녀석이다."
 
287
온김에 이 절의 주지(住持)의 인품도 한번 보아야 할 것이다. 선종의 말을 듣건대 열한 편은 아니라 하니 열하지 않으면 얼마나 고덕한 승일까.
 
288
말 도적맞은 조상을 하면서 들여다 주는 조반을 먹고 견훤은 주지를 만나러 나섰다. 견훤은 주지를 만나지 않았다. 만나러 그 방 앞에까지 가매 안에서는 주지의 밥주정하는 소리가 들려 나오는 것이었다.
 
289
힘들다. ─ 힘들다. 사람 구하기가 과연 힘들다. 견훤은 어린 마음에 연해 탄식 하였다. 한 사람의 스승을 구하기가 이렇듯 힘드니 장차 적지 않은 협력자는 어떻게 구하나.
 
290
이 골짜기는 인제는 더 들어가야 절도 없고 암자도 없고 인가도 없다 한다. 그러면 인제는 다시 여기서 발을 돌이켜서 들어온 길을 도로 나가야한. 여기서 인가까지 가자면 하룻길이 넉넉히 된다. 말을 도적맞았으니 인제부터는 걸어서 다닐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291
견훤은 하룻밤 묵은 사례를 한 뒤에 절을 나섰다.
【원문】출발(出發)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여러분의 댓글이 지식지도를 만듭니다. 글쓰기
〔소설〕
▪ 분류 : 근/현대 소설
▪ 최근 3개월 조회수 : 181
- 전체 순위 : 431 위 (2 등급)
- 분류 순위 : 61 위 / 882 작품
지식지도 보기
내서재 추천 : 0
▣ 함께 읽은 작품
(최근일주일간)
• (85) 삼대(三代)
• (23) 적도(赤道)
• (21) 탁류(濁流)
• (20) 어머니
▣ 참조 지식지도
▣ 기본 정보
◈ 기본
  # 제성대 [제목]
 
  김동인(金東仁) [저자]
 
  조광(朝光) [출처]
 
  1938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 참조
 
▣ 참조 정보 (쪽별)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지식놀이터 :: 원문/전문 > 문학 > 한국문학 > 근/현대 소설 카탈로그   목차 (총 : 18권)     이전 2권 다음 한글 
◈ 제성대(帝星臺)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07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