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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성대(帝星臺) ◈
◇ 도선사(道詵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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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5-1939.4
김동인
1
제성대(帝星臺)
2
道詵師[도선사]
 
 
3
절기로 따지자면 팔월 중순- 가만 앉아 있기에는 춥지도 덥지도 않은 가장 좋은 절기였다. 그러나 길을 걷기에는 아직 꽤 더웠다. 잃어버린 말이 무척이도 그리웠다.
 
 
4
그렇게 그립던 말을 견훤은 얼마 안 가서 도로 찾았다. 견훤도 내심 혹은 그런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하였지만 말은 자기의 주인이 아닌 애꾸눈이 소년의 명령에 복종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얼결에 가자는 대로가 주었지만 아무리 가도 제 주인은 나서지 않고 새 사람이 그냥 등에 타고있는지라 드디어 이를 거부한 모양이었다. 어떤 산 모퉁이를 돌아설 때 견훤은 저편 맞은편에서 이쪽으로 향하여 맥없이 걸어오는 자기의 비룡(飛龍- 말 이름)을 발견하였다. 무슨 일에 직면하든지 표정이 변하여 본 일이 없는 견훤도 이때만은 환희로 말미암아 얼굴이 한순간 번득였다.
 
5
"비룡아."
 
6
뜻하지 않고 손을 들고 고함쳤다.
 
7
주인을 잃고 맥없이 뚜거덕뚜거덕 오던 비룡은 이 소리를 알아들었다.
 
8
발을 멈추었다. 귀가 뾰쪽 하늘로 향하였다. 맞은편에서 자기를 향하여 고함 치는 주인을 드디어 발견하였다.
 
9
흐흥 비룡도 한 번 소리높이 울었다. 그 다음 순간은 그야말로 비룡같이 주인에게로 향하여 달려왔다. 바위 돌부리 구렁텅이가 모두 비룡에게는 평지인 듯하였다.한 번 발을 구른 비룡은 그 다음 순간은 어느덧 주인의 앞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는 반갑기 한량없다는 듯이 그의 기다란 얼굴을 숙여서 소년의 어깨에 부비어 대었다.
 
10
잃었던 애마를 다시 찾은 견훤도 잠시는 너무 반가워서 말의 갈기만 두들 겨주고 있다가 "자, 또 수고를 해라."
 
11
하고는 몸을 날려서 안장에 올라가 앉았다.
 
12
그 날 날이 거의 저물어서 견훤은 선종을 만났다. 저편 앞에 가는 소년의 뒷 맵시가 선종인 것을 알아보고 견훤은 말의 속력을 좀 돋구어서 따라갈 때 앞서가던 선종은 말 발소리를 듣고 필시 견훤이라 짐작하고 곁길로 몸을 숨기려 하였다. 그러나 견훤의 속력은 숨으려는 선종을 숨도록 버려 두지 않았다. 어느덧 뒤및고 도로혀 몇 걸음 앞섰다. 말께서 내렸다.
 
13
마주 선 견훤과 선종. 선종이 그만 싱겁게 웃었다. 애꾸 안 진 한쪽 눈만으로 씩하니 웃은 뒤에,
 
14
"저렇게 잘 가는 놈이 아침에는 그렇게도 안 갔담."
 
15
하면서 말을 넘겨보았다.
 
16
"병신 고운 데 없다구 게다가 도적질까지 ? 숨기는 왜 숨으렸느냐 ?"
 
17
"면목 없으니깐 숨지."
 
 
18
"목(目)은 본시부터 절반이 아니냐. 대체 몇 리나 타고 왔느냐 ?"
 
19
"한 이십 리 왔을까. 그 담에야 어디 영 갈래야지. 딱 버티구 서더니 그 뒤에는 움쩍을 않겠어. 나두 그만하면 꽤 타는 편인데 이 놈만은 어쩔 수가 없어. 내려서 끌어두 보구, 채찍으루 때려두 보구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더구나. 그래서 할 수 없이 그 뒤는 걸었지. 쓰지두 못할 말 때문에 애만 썼다."
 
20
"도적놈에게도 핑계는 있구나. 야 어서 길이나 가자. 어제 보니깐 좀 더 내려가야 인가가 있더라. 어둡기 전에 인가까지는 가야지."
 
21
가벼이 몸을 날려 말께 오르는 견훤의 모양을 선종은 부러운 듯이 쳐다보았다.
 
22
"나도 뒤에 좀 태워 주려므나."
 
23
견훤은 굽어보았다. 굽어서 선종의 표정을 보고 뒤에 타기를 승낙하였다.
 
24
말은 소년 둘을 등에 싣고 벼랑길을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25
날이 꽤 어두워서야 두 소년은 인가에까지 이르렀다. 위로는 동화사까지가 하룻길이요 아래로는 주막거리까지가 하룻길이 되는 이 단 한 집의 인가는 때때로 동화사에 왕래하는 사람의 편의를 보아 주기 위하여 빈 방이 하나 있었다. 이 근처의 산 일대가 모두 동화사의 소유로써 이 인가는 말 하자면 동화사의 산지기나 일반이었다.
 
26
그날 밤 자리에 나란히하여 누은 두 소년은 창을 열고 팔월 중순의 쇄락한달을 우러러보며, 제각기 제 심회에 잠겨 있었다.
 
27
"야 견훤아."
 
28
이윽고 선종이 먼저 입을 열었다.
 
29
"응 ?"
 
30
"나는 이름을 고치기로 작정을 했다."
 
31
"뭐라구 ?"
 
32
"궁예(弓裔)라고."
 
33
"왜."
 
34
"좋지 않으냐 ? 궁예라. 남에 세상에 나서 왜 하필 지저분하게 선종(善宗) 이란 말이냐. 동화사 밥덕대 스님이 지어 준 이름이다. 선종이 다 뭐야. 궁예라. 궁예라. 이제부터는 궁예라고 불러다고."
 
35
"궁예야."
 
36
"왜 ?"
 
37
"……."
 
38
"왜 그래 ?"
 
 
39
"불러 달라기에 불렀지 뭐가 있을 게 뭐냐 ?"
 
40
"그러면 이번은 폐하 하고 한번 불러 보렴."
 
41
"폐하 ? 말 도적 폐하가 어디 있더냐 ? 적괴나 되리라."
 
42
이 말을 내어던지고는 선종- 궁예가 무엇이라 중얼거리는 것을 귀 곁으로 넘기며, 견훤은 다시 달을 우러렀다.
 
43
해는 낮의 주인이오 달은 밤의 주인이다. 그러나 해는 이그러짐없이 언제까지 든 내내 밝게 비추나 달은 왜 그렇지 못하여 빛나면서도 어둡고 또한 중순에는 차되 그믐에는 없어지나. 대체 음(陰)이라 하고 양(陽)이라 하는것은 무엇인가.
 
44
이런 방면으로 밀려 가던 그의 생각은 홱하니 전회를 하며, 지금 자기의 곁에 누워서, 같이 달을 우러러보고 있는 애꾸눈이 소년의 신상에 미쳤다.
 
45
이 병신소년에게는 온 세상이 원수이다. 단 한 사람 원수 아니던 그의 어머니는 그가 어렸을 때 그 지아버님 되는 경문왕에게 죽인 바 되고 그 뒤는 이 세상이 죄다 병신소년에게는 원수이다. 월전에 세상 떠난 경문왕은 이 병신 소년의 친아버님이라 하지만 당신의 아들이 병신으로나마 살아 있는 줄 알기만 하면 즉시로 잡아 죽이기를 주저치 않을 원수이다.
 
46
지금 임금은 이 소년에게는 이복형님이라 하지만 역시 서로 죽이기를 사 양치 않을 원수지간이다. 제일 태후, 제이 태후, 이복누이 조카들- 그의 혈족이라는 혈족 친족이라는 친족 어느 한 사람이 소년의 편이 되어 줄 사람이 없다. 이 세상에 요렇게도 개밥의 도토리와 같이 외따로이 삐어져 나온 사람도 있을까.
 
47
이 병신소년은 장차 자기의 힘만 자라면 대궐로 뛰쳐들어가서 한바탕 서둘러 대고 운이 좋으면 왕위까지라도 누리어 보려고 한다.
 
48
그러나 사람됨이 경망하였다. 그런 야망을 품기에는 너무나 가벼웠다.
 
49
지금 견훤 자기가 노리고 있는 것도 신라 임금의 목숨이다. 그러나 자기는 결코 신라 사직에는 손대지 않으리라. 자기의 조상이 신라 임금에게 욕 보고 죽인 바 되었으니, 그 품갚음으로 신라 임금의 목숨을 엿보는 것이지 남의 일천 년 사직에야 손을 대어서 몇백만 생령으로 하여금 원한 머금은 백성이 되게 하랴.
 
50
만약 자기의 이러한 꿈같은 야심이 성공이 되는 날 우연히도 지금 자기의 곁에 누워 있는 애꾸눈이 소년도 성공을 하여, 자기의 눈앞에서 애걸을 하고 있는 신라 임금이 이 애꾸눈이의 후신(後身)이라 하면 ?
 
51
견훤은 자기의 공상이 너무도 허망한 데로 날개를 벋어가므로 그만 스스로 고소하고 그 공상을 내어던졌다. 그런 뒤에 잠을 청하려고 눈을 감았다.
 
 
52
"선종- 아니 궁예야. 오늘 밤엘랑 아예 말 훔칠 생각을 내지 말아라.
 
53
공연한 헛애만 쓰느니라. 서느럽다. 문 닫아라. 난 졸리다. 먼저 자리라."
 
54
견훤은 모로 돌아누우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55
"나도 자겠다."
 
56
궁예는 일어나 문을 닫고 다시 자리에 들었다.
 
57
잠시 뒤에 견훤은 소년답지 않게 우렁차게 코를 골면서 잠이 들었다.
 
58
이 코고는 소리에 궁예는 잠을 들 수가 없어서 연방 견훤을 흔들고 하였다.
 
59
그러나 흔드는 그 순간만 콧소리가 멎을 뿐이지 흔들기를 멈추면 다시 시작이 되고 하였다.
 
60
궁예는 새벽녘에 가서 겨우 잠이 들었다.
 
61
밝는 날 두 소년은 어제 저녁과 같이 한 말에 함께 타고 다시 길을 떠났다. 오늘 저녁 주막거리까지 가서, 거기서 남으로 가든 북으로 가든 혹은 그냥 동행을 하든 결정하기로 하였다.
 
62
걸어서 하룻길을 말로 가매 그들은 흥그러웠다. 가다가는 말에서 내려 혹은 씨름도 하고 혹은 멱도 감으며 흥그러이 내려갔다.
 
63
이렇게 내려가던 그들은 이상한 물건 하나를 발견하였다. 고삐를 잡은 견훤이 발견하고 궁예에게 알으킨 것이었다.
 
64
처음에는 짐승으로 보았다. 소름이 온 몸으로 쪽 돌았다. 안장에 찬 활을 벗기려고 서둘렀다. 그러면서 자세히 보매 짐승이 아니었다.
 
65
사람이었다. 발가숭이 사람이었다. 몸에 한 올의 실도 감지 않은 진정한 발가숭이 - 머리털도 반반히 깍였으니 혹은 중일까.
 
66
가까이 이르렀다. 너무도 해괴하므로 두 소년은 말도 못하고 굽어보았다.
 
67
중(?)은 자기가 이렇듯 발가벗고 다니는 것이 아무 부자연한 일이 없다는듯이 태연히 소년들을 쳐다보았다.
 
68
서로 어금났다. 서로 등지게 되었다. 그때였다. 중(?)이 돌아섰다.
 
69
"아나 이 애."
 
70
소년을 불렀다.
 
71
궁예가 먼저 돌아보았다. 견훤도 말을 세우며 돌아보았다.
 
72
"이 애들아. 좀들 내려라."
 
73
그렇게 명할 권한이라도 잡은 듯한 당당한 명령이었다.
 
74
사리에 어그러진 명령이었으나 웬 까닭인지 가슴에 탁 울렸다. 견훤이 먼저 말께서 내렸다. 뒤따라 궁예도 내렸다.
 
75
"너희 둘 점심 있느냐 ?"
 
 
76
말께서 내린 소년들에게 향하여 중(?)의 두번째 말이 이것이었다.
 
77
궁예는 힐끗 견훤을 보았다. 견훤이 대답하였다.
 
78
"우리 둘이 먹을 게 있읍니다."
 
79
"너희 둘이 먹을 걸 나까지 셋이나 먹자. 저 개천가로 가지고 가자. 에이 시장 한 걸."
 
80
중(?)은 이렇게 말한 뒤에는 소년들이 따라올 것을 굳게 믿는 듯이 뒤 도안 돌아보고 개천으로 내려간다. 아닌게아니라, 견훤은 말을 끄을고 뒤를 따랐다. 궁예도 애꾸진 눈으로 앞을 겨냥하면서 따라갔다.
 
81
세 사람은 개천가에 자리를 잡았다.
 
82
"어이. 이렇게 많이 먹는가. 아이 둘의 점심이 한 말 밥이로구나."
 
83
견훤이 내어다 놓은 점심을 중(?)은 눈을 둥그렇게 하고 보았다. 사실 상상 키 힘들 만치 굉장한 분량이었다.
 
84
소년 측에서는 견훤이 먼저 입을 열었다-.
 
85
"옷은 평생에 안 입으십니까 ?"
 
86
"왜 ? 입지. 아침에도 입고 길을 떠났는데, 너무 덥기에 오다가 벗어 버리고 말았다."
 
87
"그러면 저녁 서느러울 때는 어떻게 하십니까 ?"
 
88
"그때쯤은 동화사 산지기네 집에 들면 속인의 옷이나마 얻어 입지."
 
89
중이었다. 견훤이 다시 물었다.
 
90
"그럼 스님은 동화사로 가십니까 ?"
 
91
"음, 거기서 월동(越冬)이나 할까 하고…."
 
92
"존함은 ?"
 
93
"도선(道詵)이라고 약간 유명하니라."
 
94
?-견훤은 몸을 떨었다. 가슴이 뛰놀았다. 도선사(道詵師)의 도승(道僧)으로서의 높은 이름을 곳곳에서 들었다. 그러나 어느 절에 주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오늘은 여기 내일은 저기 표랑하는 승이라, 좀체 만날 수 가 없었다. 높은 스승을 구하여 돌아다니는 견훤은 처처에서 듣는 이 도선사의 이름에 한번 만나고 싶은 생각은 늘 있던 배었다. 뜻하지 않고 여기서 만난이 발가숭이 중- 그가 도선사였다. 처음 서로 길이 어금나며'아나 이애’ 하고 부를 때에 그 소리가 가슴에 뭉클하였다. 좀체의 사람에게 머리를 숙일 줄 모르던 견훤 자기가, 뜻하지 않고 그에게 머리를 숙이고 그의 당 치 않은 온갖 명령에 전후를 살핌없이 복종하였다.
 
95
그의 눈에는 세상만사가 모두 도의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무인 심산 이기 로서니 그래도 어쩌다가 사람을 만날지도 모를 일이어늘 그렇게도 발가숭이로 길을 갈 수 있겠으며 덮다고 옷을 벗었으면 그 옷을 하다 못해 꾸려 들고라도 갈 것이지 귀찮다고 길가에 버리고 장차 도착되는 곳에서 새로이 얻어 입을 배짱 등등으로 보더라도 좀체의 인물이 아니었다.
 
96
선문(禪門)에 들고자 스승을 구하는 바가 아닌 견훤으로서는 단지 고승(高僧) 일지라도 만족치 못하다. 이러한 도선과 같은 활달한 도승에게서 먼저인 간도를 배워야 할 것이다. 견훤은 잠시 이 도선의 문에 들고자 마음먹었다.
 
97
곁의 궁예를 보았다. 좀 경망하기는 하나 역시 색채 다른 야심을 품고 있는 궁예라 궁예의 심정도 알아보고 싶었다. 궁예 역시 슬금슬금 도선을 쳐다보는 품이 자기와 같은 생각을 품은 듯이 보였다.
 
98
세 사람은 점심을 달게 끝내었다.
 
99
"스님, 그렇게 길가시다가 아낙네라도 만나시면 어떻게 하십니까 ?"
 
100
"만나면 만났지 무슨 일이 있으랴 ?"
 
101
"스님이 피하십니까 아낙네가 피하십니까 ?"
 
102
"내가 왜 피하랴. 아낙네가 피하고 싶은면 피하고 싫으면 그만둘 테지."
 
103
이때 궁예가 말틈에 끼어들었다.
 
104
"스님, 제 관상을 좀 봐 주십쇼."
 
105
도선은 승으로뿐 아니라 음양오행지술이며 온갖 잡술에도 통한 이로 이름이 높았다. 절간에 몸을 붙이고 있었더니만치 익히 도선사의 성화를 들었던 모양 이었다.
 
106
도선은 궁예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한 마디로 해석을 내렸다-.
 
107
"대적(大賊)은 되리라."
 
108
이번은 견훤이,
 
109
"저는 어떻습니까 ?"
 
110
고 물어 보았다.
 
111
"너도 대적이니라."
 
112
"대적 이상은 못 되리까 ? 저 애- 궁예라는 애와의 우열(優劣)은 ?"
 
113
"눈깔이 하나이 더 있으니 조금 나을까 ? 대적 이상은- 이상은-."
 
114
도선은 눈을 구을려 견훤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견훤은 자기의 무표정한 얼굴을 정면으로 향하였다.
 
115
한참을 견훤의 얼굴을 들여다본 뒤에야 도선은 비로소 대답하였다.
 
116
"자식복이 없어서 대적 이상은 좀 어디 힘들까부다. 가석한 일이로군."
 
117
"그 액을 면할 수가 없으리까 ?"
 
118
"자식은 부모에게 속한 것이니깐 전혀 네게 달렸지."
 
 
119
"스님 다니신 중에 산수는 어디가 좋습더이까 ?"
 
120
"송악(松岳)이 좋더라."
 
121
송악 ? 송악이면 고구려의 구역(舊域)이다. 견훤의 듣고 싶은 바는 백제 구역 중의 좋은 곳이다. 그러나 쉽사리 입 밖에 내어 묻기 힘든 말이다. 견훤은 주저하였다.
 
122
말 사투리 등으로서 도선사는 이 소년의 마음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123
빙긋이 웃으면서,
 
124
"서 남방에는, 웅진, 부여보다 완산주(完山州)가 승하더라."
 
125
견훤은 잠시를 생각하여 본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126
"스님, 저는 높으신 스승을 뵙고자 천하를 편주하던 터이올시다. 스님 문하에 잠시 두어 주실 수가 없겠습니까 ?"
 
127
"승이 되려느냐 ?"
 
128
"아니올시다. 속인으로 종시하겠읍니다마는 스님의 높으신 덕행과 학문을 백분 일이나마 물려받고자…."
 
129
"정주(定住)가 없는 나를 어떻게 ?"
 
130
"따라다니겠읍니다."
 
131
"승이 속인을 무에라고 데리고 다니겠느냐 ?"
 
132
"스님도 그런 일에 구애되십니까 ?"
 
133
도선사는 대답 대신으로 소리 높이 웃고 말았다. 반승낙은 된 셈이었다.
 
134
"그럼 동화사로 가시려면 모시고 가겠읍니다."
 
135
"유명은 하지만 가르칠 것은 아무것도 없는 알무식장이니라. 그런 줄 알고 따라오려면 따라오고 마음대로 해라."
 
136
"그럼 모시겠읍니다."
 
137
"어허. 점심 맛있게 잘 먹었군. 짐스러워 점심까지 내버리구두 인간이라 시장 증이 나더니… 저물기 전에 산지기네 집까지 가야지…."
 
138
도선사는 몸을 일으켰다.
 
139
여기 흥미 있는 것은 궁예의 태도다. 동화사에서는 인심을 잃었거니와 거기서 일단 도망해 나왔던 그로서 다시 돌아기기도 열적을 것이다. 도선사를 쫓으려나 혹은 저 갈길을 새로이 개척하여 찾으려나.
 
140
견훤이 물어 보았다.
 
141
"너는 어쩌려느냐 ? 나는 스님을 따라서 동화사로 갈 터인데."
 
142
궁예는 그의 단 하나의 눈을 감았다.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첫째 결정 키 힘든 모양이었다.
 
143
첫째로는 이름 높은 이 스승을 놓치기가 싫을 것이다.
 
144
둘째로는 정체 모를 이 백마의 소년 견훤이 입문을 하는데 자기만이 떨어진다는 것도 싫을 것이다.
 
145
그러나 도망해 나온 동화사로야 어찌 다시 돌아가랴. 더우기 그는 동화사의 상좌라 동화사로 돌아간다면 동화사 부처를 섬기어야 할 신분이다.
 
146
한참을 그의 단 하나의 눈을 감고 생각을 한 뒤에 드디어 눈을 떴다.
 
147
"나는 밥덕대 스님 다시 만나기 싫어서 그냥 내려가련다."
 
148
"그럼 여기서 작별이로다."
 
149
"음, 스님, 저는 여기서 하직하겠습니다. 견훤이도 잘 가거라."
 
150
"장래 성공하거라."
 
151
여기서 궁예는 등지고 돌아섰다.
 
152
견훤은 도선사에게 가까이 갔다.
 
153
"스님 말께 오르십시오."
 
154
"싫다. 말을 타면 서느러워. 걸음을 걸어야 한다. 네나 타거라."
 
155
"저도 걸어갑지요."
 
156
이리하여 벌거숭이 중과 소년과 말- 이런 기괴한 일행은 다시 산길을 더듬어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157
"스님도 사투리로 보아서 백제십니다그려."
 
158
올라가는 길에 견훤은 이렇게 물어 보았다.
 
159
"나 말이냐 ? 나야 천하의 도선이지. 백제는 무엇이고 신라는 무엇이냐
 
160
?"
 
161
"스님은 당나라에 오래 가 계셨다지요 ?"
 
162
"얼마간 있었느니라."
 
163
"그곳에 이인(異人)이 많습더이까 ?"
 
164
"에쿠. 넘어질 뻔했다. 음, 워낙 바닥이 넓은 데라서 편력하노라면 이 인도적지 않게 만나겠더라."
 
165
"스님의 도덕이며 음양술도 당나라서 닦으셨습니까 ?"
 
166
"담벽에게 배웠나니라."
 
167
"네 ?"
 
168
기이한 대답에 견훤은 눈을 크게 하였다.
 
169
"면벽(面壁)하고 명상해서 체득했느니라."
 
170
"스님이 아직껏 만나신 분 가운데 어느 분이 가장 덕이 높으십더이까 ?"
 
171
"나보다 이상되는 이를 찾다 찾다 못했으니 아마 내가 으뜸이리라."
 
172
"지혜는 ?"
 
173
"그 역 마찬가지니라."
 
 
174
길이 험한지라 땅바닥만 굽어 살피면서 길을 가던 견훤은, 문득 머리를 들어서 눈앞을 보았다. 자기의 눈앞에 걸어가는 이 벌거숭이의 인물- 오십이조 금 지났을 만한 중늙은이의 승- 그는 스스로 지혜와 덕이 가장 으뜸 되는 사람 이노라고 장담을 한다. 아직껏의 오십여 년의 생애의 대부분을 산천 편답으로 보낸 그는 이 고르롭지 못한 길을 마치 평지인 듯이, 발바닥에 눈이라도 있는지 굽어보지도 않고 활개치며 간다. 그의 넓다란 벌거벗은 등판을 멀거니 바라보며 가는 동안 십여 보 이내에 견훤은 돌부리를 차고, 세 번절룩 하였다. 그러면서도 견훤은 한참을 그 넓은 등판에서 눈을 떼지를 못 하였다.
 
175
"너는 대체 무슨 도적질을 하려느냐 ?"
 
176
"글쎄올시다. 저는 아직 도적질할 생각은 없는데요."
 
177
"요놈. 앙큼스럽게. 바른대로 말을 할 것이지."
 
178
"글쎄올시다. 잃었던 물건을 어디 힘자라면 찾아나 볼까 할 따름이올시다."
 
179
"그럼 너는 부여씨(扶餘氏)냐 ? 에쿠쿠. 길이 적잖게 험한 걸."
 
180
"땅을 좀 보시지요."
 
181
도선의 질문에 대답하기 싫은 견훤은 이렇게 딴 말로 돌려 버렸다. 도선도 그것을 추궁하지 않았다.
 
182
"땅을 굽어봐 ? 저런 좋은 산수를 보지 않고 땅바닥을 보아 ?"
 
183
"땅은 산수가 아닙니까 ?"
 
184
"요놈. 말대답질은 제법일다."
 
185
"스님 제 말씀에 대답을 못하셨으니까, 천하 제일 지혜자는 저올시다. 스님은 제이위로 떨어지셨읍니다."
 
186
"하하하하."
 
187
이것으로 일단의 대화는 끊어졌다. 벌거숭이와 소년과 말- 이 기괴한 일행은 다시 묵묵히 길을 걸었다.
 
188
한참을 가다가 도선이 생각난 듯이 물었다-.
 
189
"아까 그 녀석은 무엇이냐. 그 애꾸눈이 말이로다."
 
190
"동화사 상좌로 있다가 환속하겠다고 달아나는 녀석이올시다. 상좌 적에는 이름이 선종(善宗)이고 환속한 뒤에는 궁예(弓裔)라는…."
 
191
"좀 무엄한 말이지만 내 그 녀석과 신통히도 모습이 같은 이를 보았기에 말이로다."
 
192
"누구오니까 ?"
 
193
흥미와 호기심을 일으키는 말이다. 더욱이 경어(敬語)를 써서 말하는 것이 더 마음끌렸다.
 
194
"두 분이나 보았는데 저번 승하하신 임금님과 또 한 분은 그때 태자로 계시다가 지금 등극하신 임금님- 그 부자분이 꼭 모습이 한모습인데 무엄한말이지만 애꾸- 뭐라 ? 궁예 ? 그 녀석이 꼭- 더우기 지금 새 임금님과 한판에 박은 듯하단 말이지. 눈 하나이 병신일 따름이지."
 
195
견훤은 한순간 숨을 죽였다. 궁예가 스스로 자기의 신상을 말할 때에라도 그 말을 온전히 안 믿었던 배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또한 전면적으로 믿었던 배도 아니었다. 그저 지나가는 말을 듣는 쯤으로 들어 두었던 것 이었다. 그랬더니 지금 이 도선사의 말을 들으니까 과연 그가 경문왕의 낙윤(落胤)이라는 것이 사실인 모양이다. 그러면 그의 그 앙칼진 마음으로 언제든 한번 신라 궁실을 소란케는 하여 볼 것이다.
 
196
그러나 그런 내막까지를 도선사에게 피력할 필요를 느끼지 않은 견훤은 단지 지나가는 말이 듯이,
 
197
"그 녀석이 어떻게 그런 분과 모습이 같을까요 ?"
 
198
하여 두었다.
 
199
"글쎄 말이로다. 내 오며 오며 지금껏 생각했는데 필유곡절이랴."
 
200
"……."
 
201
또 이야기는 끊어졌다.
 
202
이 기괴한 일행이 산간의 단 한 집인 동화사 산지기의 집까지 이른 것은 날이 꽤 어두워서였다.
 
203
저녁 뒤 뜰에서 달구경들을 하여 즐기고 있던 이 집 딸이며 며느리는 질겁을 하여 도망쳤다.
 
204
도선은 이곳도 여러번 지난 일이 있는 모양으로 집주인은 잘 알았다.
 
205
도선은 집주인을 불러내어 옷 한 벌을 장수하여 입었다.
 
206
"스님께는 작겠읍니다."
 
207
"작으나 크나."
 
208
그런 것에 구애될 도선이 아니었다.
 
209
그날 밤을 그 집에서 묵고 이튿날 일찍이 길을 떠났다.
 
210
가다가 차차 더워 오니까 먼저 웃옷만 벗어서 던지려다가 생각난 듯이 말잔 등에 던지고 한참 더 가다가 더 더워 오니까 이번은 아래 옷을 벗어서 말잔 등에 던지고- 이리하여 또 벌거숭이가 되었다.
 
211
이른 저녁 때쯤 동화사에 도착하였다. 동화사에세 오 리쯤 되는 곳에서 견훤은 성화시켜서 위아래 옷을 입게 하였다.
 
 
212
불문의 격식이 어떠한지는 모르지만 먼저 한 상좌가 도선사를 보고 달려와서 합장예배를 한 뒤에 도루 돌아가서 절에 알린 모양이었다. 주지이하 가모두 달려나와서 그것은 마치 국왕을 맞는 신화들과 같이 엄숙히 절하여 맞았다. 도선사는 속인의 복색을 한 채로 흉허물 없는 사람같이,
 
213
"여기서 대밭〔竹林〕이나 거닐면서 월동을 하러 왔읍니다."
 
214
고 한다.
 
215
"얼마이고 계십시오."
 
216
본당 서북쪽으로 남향하여 외따로이 암자 하나가 있었다. 이 가을과 겨울을 도선사와 견훤은 그 암자에서 지내기로 하였다.
 
217
"그 소년은 웬 소년이오니까 ?"
 
218
주지가 이렇게 물을 때에 도선은,
 
219
"빈도의 제자외다."
 
220
고 간단히 치워 버렸다.
 
221
견훤은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었다. 도선께 배우고자 따라왔지만 수 일 동안은 아무것도 묻는 일도 없고 도선도 아무것도 가르치는 바도 없이 무위 히 보냈다.
 
222
승도들의 생활- 견훤 자기네의 생활과는 아주 딴판인 이 기괴하고도 경건스러운 생활을 관찰하며 혹은 뒤 대밭에 가서 대를 깍아 활과 살을 만들기를 연습하며 혹은 벼랑턱 낭떠러지 등을 말을 달리며, 또는 승려들과 밀려서 가을 시들어 가는 산채 따기 등등으로 수일간을 보냈다.
 
223
그 어떤날 견훤은 암자 안에서 조용히 스승과 마주 앉을 기회를 얻었다.
 
224
"스님."
 
225
"? ""저는 스님께 배우고자 스님 문하에 들었읍니다."
 
226
"그래."
 
227
"첫째로 배우고 싶은 것은 왕자(王者)의 길이올시다."
 
228
도선은 그윽히 눈을 들었다. 잠시를 견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 뒤에 입을 열었다.
 
229
"왕자의 길이란 말하자면 대적(大賊)의 길 말이지. 지금 천하에 주인 없는 땅이 없는데, 왕자의 길을 배워 무얼 하느냐 ?"
 
230
"잃었던 것을 찾으려고 그럽니다."
 
231
"그러면 너는 사실 부여씨(扶餘氏)란 말이냐 ?"
 
232
"……."
 
 
233
아니랄 수도 없었다. 그렇달 수도 없었다. 잠잠하여 버렸다.
 
234
"네가 만약 부여씨일 것 같으면 왜 부여씨의 발상지인 아리나레(鴨綠)를 넘어서서 천하를 엿볼 꿈을 못 꾸고 요 근처에서만 배회하느냐 ?"
 
235
"그것은 고구려가 아니오니까 ?"
 
236
"이백 년 전 조상이나 일천 년 전 조상이나 조상이야 일반이니라, 일 천년 전 조상이 한 갈래는 아리나레 넘어서 천하를 엿볼 동안 한 갈래는 겨우 요 구석에서 요 모양으로 지내다가 쓰러진단 말이냐 ? 어차피 저도 쓰러는 졌지만."
 
237
승답지 않은 말이었다. 천하를 삼킬 듯한 이 기개에 견훤은 단지 멍멍히 스승의 얼굴을 우러를 따름이었다.
 
238
"하다못해 송악(松岳)으로나마 가라 해도 그도 못할 콩알 만한 간을 가지고 왕자의 길을 배워 무얼하느냐. 송악에 자리잡고 남으로 이천 리 북으로 이천 리- 천하는 못 되나마 동방(東邦)은 전부- 그맛 백심도 못가지고….
 
239
송악에 왕기(王氣)가 보이더라. 송악 오백 년- 오백 년이면 짧지 않지. 중원의 주인 된 자 누구 오백 년 누린 자 있더랴 ?"
 
240
나오는 말 말이 모두가 승답지 않은 호쾌한 말이었다. 견훤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
 
241
"스님. 송악이 그렇듯 좋습더니까 ?"
 
242
"음 오백 년 왕기는 보이더라."
 
243
"배제는 칠백 년을 누렸는데 오.백-"
 
244
말하려는 것을 스승이 끊었다-.
 
245
"욕심이 과하면 못써. 신라 일천 년, 백제 칠백 년 고구려 칠백 년- 백제와 신라는 뒤에서 고구려가 막아 주었기에 그만치 누렸지, 한(漢), 수(隋), 당(唐)의 힘을 스스로 막았을 듯싶으냐 ? 고구려 칠백 년은 놀라운 왕 기니라. 천하의 주인 된 자로도 삼백 년 사백 년이 으뜸이요 단 백년 미만이 수두룩 하지 않으냐 ?"
 
246
견훤은 잠시 입을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247
"스님 일전에 말씀하신 그 완산주는 어떻습더이까 ?"
 
248
"완산주 ?"
 
249
도선은 머리를 기울이었다. 잠시 생각하는 듯일 눈을 감았다가 떴다-.
 
250
"완산은 미약하더니라. 제성대(帝星臺)가 광주에 있고 왕기가 완산주에 있어 서로 갈렸으니 미약할 밖에 있느냐 ?"
 
251
"참 제성대는 무엇이오니까 ?"
 
252
"제성대는 융 태자(隆太子) 칭황시(稱王時)에 하늘에서 날아 내렸느니라.
 
 
253
그때 융 태자가 광주에 도읍만 하셨더면 백제 사직은 그냥 보전이 될 것을…. 가석한 일이나 운명을 어찌하랴."
 
254
조석으로 보고 놀고 하던 그 바위가 그런 바위던가. 과연 가석한 일 이었다.
 
255
"그럼 스님, 제성대를 많은 인력을 들이어 완산주에 옮겨다 놓으면 어떻게 되리까 ?"
 
256
"아이다운 말이로다. 인력으로 그 바위를 어떻게 옮긴단 말이냐."
 
257
완산주는 미약하다 한다. 미약하다는 것은'없다’는 것과는 뜻이 전혀 다르다. 미약하게라도 있기만 하면 미약하던 것이 장차 강하게 될 날도 있을것이 아닌가. 아니 도대체 산수 음양설이란 것부터가 얼마치나 믿을 것인가. 용기와 희망으로 빛나는 소년의 마음은 스승의 그런 깨침 아래서도 광휘 있는 장래를 몽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258
그러면서도 내심 견훤의 어린 마음을 기껍게 한 것은 자기는 스승을 바로 만났다 하는 점이었다. 단지 석제자(釋弟子)로 고덕한 사람을 만났더면 혹은 불씨의 학문을 배웠을지 모른다. 공제자(孔弟子) 역시 마찬가지다. 자기는 단지 그러한 도덕적 학문을 배우고자 수도의 길을 떠난 바가 아니다.
 
259
지금 자기가 섬기는 스승은, 비록 그의 적(籍)은 불문에 있다 할지라도 그의 학문은 세상 만반사에 통하였다. 불제자라 하나 그의 마음은 또한 쾌활 호탕하고 불규하여 천하 제일이노라고 자칭하는 자신의 말에 과연 부끄럴데가 없었다.
 
260
그 날의 이야기는 그 뒤에는 다른 승이 들어오기 때문에 흐지부지 하여져 버렸다. 그러나 견훤은 마음에 무슨 적지 않은 물건을 얻은 듯한 느낌으로 매우 무거웠다.
 
261
가을이 가고 남국에도 첫눈이 내렸다.
 
262
남국의 눈- 더구나 첫눈치고는 놀랍게 많이 내렸다. 이 날 견훤은 활을 들고 토끼 사냥을 나섰다.
 
263
스승께는 사냥을 꺼리어서 스승이 법당에 예배간 틈에 몰래 나가려 하였다. 그랬는데 몰래 하려는 일에는 반드시 고장이 나는 법이라 법당에 돌아오던 스승과 막 암자를 나서려는 견훤이 딱 마주쳤다.
 
264
"어디 가느냐 ?"
 
265
"네."
 
266
"어디 ?"
 
267
하릴없었다. 등에는 살통을 지고 어깨에는 활을 메었다. 견훤은 머리를 수그릴 따름이었다.
 
268
"사냥가누나."
 
269
"네."
 
270
"무슨 사냥이냐 ?"
 
271
"토끼 사냥이올시다."
 
272
"음. 많이 잡아오너라. 오래간만에 맛있는 저녁 먹어 볼까 ?"
 
273
"스님도 잡수세요 ?"
 
274
"암. 먹잖구."
 
275
간단하였다.
 
276
"아. 살생한 것을…."
 
277
스승은 빙긋 웃었다.
 
278
"아니니라. 부처께서 경계하신 것은 남살(濫殺)이지. 그저 살생이 아니니라. 사람을 죽인다든가 혹은 농사에 긴히 쓰는 소나, 물건 운반에 쓰이는말 같은 것을 죽이는 것은 잘못이지만, 토끼 같은 것은 호랑이나 삵이나 사람에게 잡혀 먹히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난 게니깐 먹는 것이 옳으니라. 많이 잡아다 맛있는 저녁을 먹어 보자."
 
279
한 뒤에는 그냥 휘 암자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280
지내 보면 지내 볼수록 불규호탕한 성격을 나타내는 스승의 뒷모양을 눈 이 멀거니 바라다보다가 문이 닫힌 뒤에 견훤은 골짜기로 향하였다.
 
281
너덧 살부터 벌써 활쏘기를 연습한 그는 나이가 나이라 강궁(强弓)은 당할수가 없지만 작은 활이면 거진 백발백중이었다. 낮 전으로 여섯 마리의 토끼를 잡아 가지고 돌아올 수가 있었다.
 
282
점심에 스승은 토끼고기를 맛있는 듯이 뜯으며 이런 말을 하였다.
 
283
"작은 것을 아는 자는 큰 것을 모르는 법이니라. 벼룩, 모기는 사람의 피를 빨아먹고 살지. 사람의 몸에서 피가 연방 생겨 나지만 않으면 벼룩 모기한테 다 빨려 피가 말라서 죽어 버릴 것이다. 그런 해로운 생물(生物)까지라도 생물이라 해서 살생치 못 한다면 이는 작은 것만 알고 큰 것은 모르는 사람의 말이니라. 토끼나 닭이나 해물(海物)들을 먹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 것들은 먹히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난 것이니깐 그것을 먹는 것이 왜 죄악이 되겠느냐. 부처께서 경계하신 것은 남살이지 그저다 죽이지 말라는 바가 아니로다. 후인(後人)이 그것을 잘못 해석할 따름이지."
 
284
그런 뒤에는 잠시 고기를 뜯고서 말을 이었다.
 
285
"네가 얼마 전에 물은 일이 있지. 왕자의 길을 배우고 싶다고. 왕자의 길도 그게니라. 살생을 금했다고 다 죽이지 말라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백성을 사랑해야 한다고 덮어놓고 사랑해서는 안 돼. 왕자는 백성을 애(愛) 하여 서는 못 쓰느니라. 휼(恤)하여야지. 애민(愛民)은 목민자(牧民者)의 할 일이요 왕자(王者)는 휼민(恤民)을 해야 하는 법이니라."
 
286
견훤은 고기 먹던 손을 멈추고 스승의 입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스승은 이 말만 한 뒤에는 다시 고기 먹기에 여념이 없었다. 여섯 마리의 토끼를 사 제단 두 사람이어서 굳은 뼈만 남기고는 홀짝 다 먹어 버렸다.
 
287
이튿날 또 사냥을 나가려고 주섬주섬 할 때에 스승이,
 
288
"또 사냥이냐 ?"
 
289
하고 물었다.
 
290
"네."
 
291
"어디, 나도 가서 구경이나 할까 ?"
 
292
하더니 견훤의 뒤를 따라 나왔다.
 
293
너멋 골짜기에는 과연 토끼가 많았다. 심산중에 잡는 사람 없이 자유로이 번식 되었으니만치, 우글우글 하였다. 사제 두 사람의 모양이 어떤 바위 위에 나타나자 사면에서 토끼들이 구멍으로 향하여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294
견훤은 이 가운데서 숨지 않고 있는 놈이 한 마리라도 없는가고 활에 살을 먹여 가지고 살폈다.
 
295
있었다. 한 마리. 귀를 오뚝 세우고 이편에서 움찍하기만 하면 달아나려고 잔뜩 벼르고 있다.
 
296
스승도 그 토끼를 발견하였다.
 
297
"생금할 재간은 없느냐."
 
298
견훤은 지세와 위치를 살펴보았다. 토끼와 바야흐로 뛰려는 방향으로 저편 아래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고 그 바위 아래 구멍이 있고 거기서 그 토끼까지 발자욱이 있었다. 거리로 보아서 바위에서 토끼까지의 거리나 바위에서 견훤 자기까지의 거리나 비슷비슷 하였다. 견훤은 스승에게 대답하였다.
 
299
"생금할 수 있읍니다."
 
300
"어디 ?"
 
301
견훤은 활과 살을 땅에 가만히 놓았다. 그런 뒤에 토끼가 목적한 방향으로 뛰게 하기 위하여 한 번 고함을 지르며 발을 굴렀다. 이편에서 먼저 바위의 구멍으로 향하여 가면 토끼는 다른 데로 달아날 염려가 있으므로 과연 토끼는 일사천리의 세로 제 구멍을 향하여 달아난다. 그 방향을 분명히 본 뒤에 견훤도 전속력으로 구멍을 향하여 달려갔다.
 
302
견훤은 구멍 곧 앞에서 토끼에게 뒤미쳤다. 몸을 날려서 엎어지며 한 손으로는 구멍을 막으며 오른손으로는 토끼를 잡았다.
 
 
303
버둥거리는 토끼의 귀를 잡아 가지고 돌아오매 스승은 빙긋이 웃으면서,
 
304
"토끼 잡는 지혜와 재간은 제법인걸. 사(射)는 어떠냐 ?"
 
305
한다.
 
306
"사도 힘이 부족하니 강궁은 못 쏘나마 보통 활은 제법입지요."
 
307
"어디 ?"
 
308
활의 시험이다. 견훤은 토끼를 구럭에 잡아 넣고 활과 살을 들고 일어섰다. 그리고 어디 또 토끼가 없는가고 살폈다. 그때에 다행히(불행일까) 꿩한 마리가 하늘을 날아가는 그림자가 휙 하니 눈 위에 비치었다.
 
309
견훤은 머리를 번쩍 들었다. 공중의 꿩을 발견하는 순간 살은 그리로 향 하야 날아났다. 스승이 알아채고 그리고 머리를 들 때는 살에 뀌인 꿩은 사선을 그리면서 건너편 언덕 눈 속에 떨어져 박혔다.
 
310
"졸재(卒材)는 넉넉하다."
 
311
"장재(將材)도 못 되고 겨우 졸재입니까 ?"
 
312
"일군지장은 되리라."
 
313
"그렇지만 스님, 저같이 백면(白面)으로 큰 자리를 엿보는 자는 졸에서 장으로 장에서 왕으로 이런 길을 밟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
 
314
"그 말 한 마디에 장재의 싹이 보인다. 전일 만났던 궁예라나 하는 그 애도 보아하니 제 속으로는 무슨 적잖은 야욕을 품은 듯하지만 장재가 안 뵈어.
 
315
백면이 장을 건너뛰어 어디를 올라가겠느냐. 과즉 장이요 그렇지 못하면 졸이니라."
 
316
-그 날도 토끼 여섯 마리와 꿩 한 마리를 낮 전에 잡아 가지고 돌아오게 되었다.
 
317
그 겨울을 도선사와 견훤의 사제는 동화사에 꾹 박혀서 보냈다.
 
318
겨울 동안에 견훤이 배운 바가 적지 않았다.
 
319
배운다 할지라도 무슨 강론을 하듯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 아니었다.
 
320
기회 있을 때마다 그 기회를 붙들어 가지고 한 마디씩으로 깨쳐 주는- 그 천금으로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가르침을 견훤은 가슴을 뛰놀리며 귀를 기울이고 들어서 모두 가슴에다가 아로새겨 두었다.
 
321
도선사의 학문은 무진장인 듯싶었다.
 
322
전문인 불교는 무론이었다. 유학(儒學)에도 조예가 꽤 깊었다. 도학(道學)도 적지 않게 연구한 모양이었다. 그 위에 온갖 잡학(雜學)에도 통치 못 하는 것이 없는 듯하였다.
 
323
이러한 종합적 대지식이 정렬되어 튀어져 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라, 그것은 과연 금으로도 바꿀 수 없는 귀하고 거룩한 말이었다. 한창 총명할 나이의 견훤이라 들은 것은 잊어버리지 않고 가슴깊이 새겨 두고 하였다.
 
324
긴 겨울도 지났다.
 
325
눈 녹은 개천으로 좔좔 소리치며 흐를 때에 도선사와 견훤의 사제는 동화사를 떠나서 다시 표랑의 길을 밟았다.
 
326
길을 가면서도 만나는 사물, 당하는 경우 등에 따라서 도선사는 한 마디한 마디씩으로 그의 지식을 견훤에게 전수하기를 게을리지 않았다.
 
327
혹은 여기서 하루이틀, 혹은 저기서 두석 달, 혹은 십여 일- 그야말로 아무 목적도 없는 진정한 표랑이었다.
 
328
이 무정처 무목적한 표랑이 있어서 견훤이 부산물(副産物)로 얻은 것은 지리(地理)에 대한 지식이었다. 장차 어떠한 환경 아래서 어떠한 길을 돌아다닐지 예측도 할 수 없는 견훤은 이 신라와 백제를 두고 무른 메주 밟듯 돌아다니는 여행에서 적지 않은 지식을 얻었다.
 
329
견훤은 만 사 년간을 도선사를 사사하였다. 그리고 열셋 나는 해 가을에 스승께 하직을 하였다.
 
330
"야. 인제는 내 지식의 알맹이만은 대개 들려준 듯싶다. 인제 남은 것은 겉껍질뿐…. 그 외에, 병법, 창술 검술 등은 내 모르는 배로다. 참, 당나라엔 창술 검술 등의 달인(達人)이 간간 있더라만…."
 
331
이런 말을 들은 것이 그 해 여름이었다. 그러나 그 새 사 년간에 든 정이 차마 곧 하직할 수가 없어서 석 달을 더 모시고 다니다가 광주 자기의 고향 근처에 이르러서 드디어 하직하였다.
 
332
온갖 것을 초월한 듯하던 스승도 인정만은 초월치를 못한 모양이었다.
 
333
무연히 자기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잠시를 묵묵히 있다가야 입을 열었다.
 
334
"음. 최후에 네게 들려주고 싶은 말은 다른 것이 아니라 상학상(相學上) 네게는 자식복이 없어. 자식이 안 태거나 태어나면 불초자거나. 전일 너하고 완산주를 지날 때도 알려 주었거니와 완산주에는 왕기(王氣)가 부족해.
 
335
네게 자식복이 부족한 점과 아울러 생각하면 그것이 걱정스럽다. 게다가 송악의 왕기가 너무 강하던걸."
 
336
마지막 일러 주는 이 경계를 명심해 들으며 스승의 축복을 받고 드디어 견훤은 스승을 하직하였다.
 
337
여기서 자기 집이 하룻길이 못 된다. 그러나 일찌기 떠날 때에 아버지에게서,
 
338
"내가 너를 임금으로 절하게 되기 전에는 다시 만날 생각을 말아라."
 
339
고 엄교를 들은 그를 멀리 자기 집으로 벋은 대로(大路)를 바라보면서 자기는 협로로 빗서지 않을 수 없었다.
 
340
바라던 바 높은 스승을 만나서 마음의 닦달을 하였다. 인제부터는 몸의 닦달 이었다. 창술, 검술, 병법, 등등, 스승의 말한 바 장재(將材)로서의 닦달이 필요하다.
 
341
"졸(卒)에서 장(將)으로 장에서-."
 
342
인제는 체격이 제법 왕강하여진 견훤은 노경(老境)에 들어서는 애마 비룡의 위에 비껴타고 가을 높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호쾌히 웃었다.
【원문】도선사(道詵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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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07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