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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으로 본 임실
고고학으로 본 임실
임실의 재실
임실의 재실
임실의 재실
임실의 재실
임실의 재실
임실의 재실
임실의 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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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의 재실
임실의 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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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으로 본 임실
고고학으로 본 임실
Ⅱ. 선사시대 때 거점지역으로 발돋움
고고학으로 본 임실
고고학으로 본 임실
고고학으로 본 임실
임실의 재실
임실의 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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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支石墓]) 선돌(-) 원삼국 시대(原三國時代) 임실군(任實郡) # 원삼국시대 집자리 유물 # 임실 고인돌 # 임실 상가 윷판유적 # 임실 하가유적
최근 3개월 조회수 : 16 (3 등급)
【향토】
(게재일: 2024.01.04. (최종: 2024.01.04. 21:07)) 
◈ Ⅱ. 선사시대 때 거점지역으로 발돋움
인류가 불을 처음 이용하고 돌을 깨뜨려 만든 뗀석기와 나무나 뼈로 만든 도구를 사용한 시기를 구석기시대라고 한다. 인류의 역사에서 99% 이상을 차지한다. 임실군에 사람들이 처음 살기 시작한 것은 후기 구석기시대로 추정된다. 임실군 신평면 가덕리 하가유적에서 뗀석기와 몸돌, 슴베찌르개, 각추상석기, 나이프형석기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목   차
[숨기기]
Ⅱ. 선사시대 때 거점지역으로 발돋움
 
 
인류가 불을 처음 이용하고 돌을 깨뜨려 만든 뗀석기와 나무나 뼈로 만든 도구를 사용한 시기를 구석기시대라고 한다. 인류의 역사에서 99% 이상을 차지한다. 임실군에 사람들이 처음 살기 시작한 것은 후기 구석기시대로 추정된다. 임실군 신평면 가덕리 하가유적에서 뗀석기와 몸돌, 슴베찌르개, 각추상석기, 나이프형석기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임실 상가 윷판유적에서 서쪽으로 1.5km 가량 떨어진 곳으로 그 부근에서 섬진강이 U자형으로 휘감아 돈다. 호남정맥 남쪽 기슭에서 시작된 여러 갈래의 물줄기가 하나로 합쳐져 오원천을 이루고 계속 남쪽으로 흐르다가 신평면 소재지에서 섬진강으로 흘러든다.
 
임실 하가 유적 항공사진
 
 
 

1. 신평 하가유적

 
임실 하가유적은 섬진강 최상류 지역에 자리하고 있으며, 임실군 신평면 가덕리 하가마을 인근에 있다. 2000년 5월에 발견되어 2006~2011년까지 다섯 차례 조선대학교 박물관 주관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이 유적 앞 물가에는 유문암 자갈을 비롯한 양질의 돌감이 흔하고, 구석기시대에는 사냥하고 채집하기 좋은 동식물이 풍부했을 환경으로 여겨진다. 임실 하가유적을 중심으로 인접한 운암면, 관촌면, 신덕면에서 보고된 구석기 출토 지점은 무려 30여 곳이나 된다.
 
임실 하가 유적 발굴 광경, 조선대 박물관
 
구석기 출토 상태
 
 
발굴조사 결과 유적의 규모는 최소 50,000㎡로 추정되며, 두 개의 구석기문화층과 하나의 신석기문화층이 층위를 이루고 있음이 밝혀졌다. 다섯 번의 발굴조사 모두 구석기 ‘위 문화층’에 집중되었으며 약 620㎡가 발굴되었는데, 많은 돌날 제작터가 드러났고 2만여 점의 석기가 나왔다. 숯으로 잰 방사성탄소연대는 기원전 20,000년 전후이다.
 
임실 하가유적은 돌날이 대량으로 만들어졌고 다양한 사냥도구와 갈린 돌, 돌확모양 석기 같은 가공도구가 있으며 화덕자리도 발견되어, 발달된 사냥 기술을 가진 구석기인들의 긴 살림터(base camp)로 추정된다. 특히 일본 고유의 석기로 알려진 ‘나이프형석기’와 ‘모뿔석기(각추상석기)’가 ‘슴베찌르개’와 함께 나와서 후기구석기시대에 한국과 일본의 문화교류를 연구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구석기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우리나라의 구석기유적 중 슴베찌르개의 밀집도가 가장 높은 임실 하가유적은 구석기시대 사냥 도구를 제작하던 곳으로 밝혀졌다. 슴베찌르개는 일본열도의 구석기와 관련성이 깊어 향후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 구석기문화의 교류 양상을 밝히는 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았다. 특히 일본 고유의 석기로 알려진 나이프형 석기가 출토됨으로써 우리나라와 일본 구석기문화의 교류 및 일본 후기 구석기문화의 원류를 규명할 수 있는 자료로 큰 관심을 모았다. 임실 하가유적을 중심으로 60여 개소의 구석기유적이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임실군이 구석기시대부터 거점지역으로 발돋움 한 것으로 점쳐진다.
 
기원전 10,000년경부터 시작된 신석기시대는 토기의 발명과 마제석기의 출현 등으로 상징된다. 이 시기의 초기에는 본격적인 농경 단계로 진입하지 못하고 채집경제에서 생산경제로 탈바꿈하면서 정착생활을 영위하는 생활유적이 처음 등장한다. 그리하여 신석기시대의 유적은 대체로 하천변이나 해안가에서 주로 발견된다. 임실군은 섬진강 본류와 지류를 따라 양쪽에 평야와 구릉지가 넓게 펼쳐져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정착할 수 있는 좋은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다.
 
1993년 섬진강댐 수몰지구인 임실군 운암면 운정리에서 빗살무늬토기편이 수습된 이후, 현재까지 10여 개소의 신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되었다. 달리 갈담저수지葛潭貯水池 혹은 옥정호玉井湖라고 불리는 섬진강댐은, 1928년 구댐과 1965년 신댐이 완공되었지만, 당시에는 학술조사를 실시하지 않고 댐 공사가 진행되어, 지금도 많은 매장문화재가 물속에 잠겨있다. 섬진강댐 수몰지구에서 수습된 빗살무늬토기편에서 다양한 문화요소가 확인되어, 신석기시대부터 임실군을 중심으로 그 주변지역과 교류관계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상정해 볼 수 있다.
 
구석기 모음
 
나이프형 석기
 
모뿔석기
 
 
우리나라에서 기원전 1,50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청동기시대가 시작된다. 이때부터 중국 북방문화의 영향을 받아 안정적인 농경생활의 시작, 마제석기의 본격적인 사용, 사회복합도의 증가가 한층 뚜렷해진다. 그리고 토기의 표면에 아무런 장식이 없는 민무늬토기無文土器가 주종을 이루어 달리 민무늬토기시대無文土器時代라고도 불린다. 기원전 700년경부터는 이전의 화전농법에 의한 밭농사에 비해 거의 영구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정착농경인 논농사로 생활방식이 바뀐다. 청동기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고인돌과 돌널무덤石棺墓, 독무덤甕棺墓 등 다양한 무덤이 새롭게 등장한다는 점이다.
 
임실군 운암면 운정리에서 풍화암반층을 장방형으로 파내고 그 안에 판석형 깬돌割石을 잇대어 놓은 돌널무덤이 조사되었다. 섬진강 강줄기와 평행되게 장축방향을 두고 돌널石棺의 바닥면에는 민무늬토기를 일부러 깨서 전면에 깔았다. 아직까지 독무덤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았지만, 1970년대 초 운암면 운정리 장자골에서 다수의 독무덤이 모습을 드러낸 바 있었기 때문에 이른 시기의 독무덤이 그 존재를 드러낼 것으로 예상된다. 아직은 그 성격이 상세하게 파악되지 않았지만 임실군 전 지역에 골고루 산재된 40여 기의 선돌立石1)도 큰 관심을 끈다.
 
 
운암면 운정리 유적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인 고인돌은 31개소에 100여 기 정도 분포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 고인돌들은 주로 하천을 중심으로 그 양쪽에 평야가 펼쳐져 있거나 교통로가 통과하는 운암면과 덕치면, 신덕면, 신평면 일대에 주로 산재되어 있다. 하나만 있는 경우도 간혹 확인되고 있지만 대부분 수기 내지 수십 기씩 무리를 이루고 있다. 특히 덕치면 사곡리 안하마을에는 농협창고를 중심으로 북쪽에 20여 기와 남쪽에 10여 기의 고인돌이 한곳에 무리지어 있다. 신평면 소재지 서쪽 산자락 정상부에도 크고 작은 10여 기의 고인돌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운정리 빗살무늬토기 조각들
 
 
 

2. 강진 필봉리 고인돌군

 
임실군 강진면에서 운암면으로 이어진 27번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1km 가량 가면 도로 서쪽에 있는 논에 고인돌 4기가 있다. 이 고인돌군의 동쪽에는 ‘필봉농악전수관’이 위치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갈담천으로 흘러들어가는 한 갈래의 물줄기가 남쪽으로 흐르고 있다. 모두 4기의 고인돌은 남방식으로 덮개돌의 길이가 2~3m 내외로 비교적 큰 편에 속하며, 폭은 50~90m 내외이다. 덮개돌의 장축방향은 모두 물줄기 방향과 일치하고 있으며, 상면에는 지름 5cm 내외의 성혈이 확인된다. 이 외에도 비교적 크기가 큰 석재들이 일부 확인되는데, 본래 많은 수의 고인돌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경지정리사업을 실시하는 과정에 유실된 것으로 판단된다.
 
 
 

3. 덕치 사곡리 고인돌 A

 
임실군 덕치면과 삼계면 경계를 이룬 원통산(603.5m) 북서쪽 기슭 말단부에 사곡리 안하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지싸레들과 샛터앞들로 이루어진 비교적 넓은 충적지의 중앙부에 자리한다. 717번 지방도가 통과하는 사곡교에서 동쪽으로 100m 가량 떨어진 덕치농협창고 주변에 30여 기의 고인돌이 무리지어 있다. 농협창고를 중심으로 북쪽에 20여 기와 남쪽에 10여 기의 고인돌이 무리지어 있는데, 마을 입구에 위치한 최옥순씨 집에도 5기의 고인돌이 있다. 이 고인돌들은 기반식과 개석식이 섞여있으며, 개석식 고인돌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덮개돌은 판석형과 괴석형으로 하천과 평행되게 남북으로 장축방향을 두었으며, 덮개돌의 크기는 장축 100cm 내외부터 250cm까지 매우 다양하다. 오래 전 마을 진입로와 민가의 조성, 농협창고를 지으면서 적지 않은 고인돌이 유실 내지 훼손된 것으로 추정된다.
 
 
운정리 1호 돌널무덤
 
운정리 돌널무덤 발굴 광경, 군산대 박물관
 
돌널무덤 출토 유물
 
섬진강댐 수몰로 훼손된 운정리 돌널무덤
 
 
 

4. 덕치 사곡리 고인돌 B

 
임실군 강진면과 순창군 동계면을 이어주는 717번 지방도를 따라 가면 사곡교를 지나 남동쪽으로 200m 가량 떨어진 논둑에 자리한다. 즉 지방도에서 가막골마을로 들어가는 입구로 논둑에 1기의 고인돌이 있다. 몇 년 전 경지정리사업을 실시하면서 덮개돌 하단부가 땅속에 묻혀 굄돌의 존재여부를 파악하지 못했다. 현재 1기의 개석식 고인돌만 남아있지만, 본래 더 많은 고인돌이 자리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덮개돌은 판석형으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하천과 평행되게 남북으로 장축방향을 두었으며, 그 규모는 장축 353cm, 단축 186cm, 높이 70cm내외이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100m 가량 떨어진 안하마을 입구에 30여 기의 고인돌이 자리한 사곡리 고인돌군 A가 있다.
 
 
덕치면 사곡리 고인돌 전경
 
사곡리 고인돌 모습
 
사곡리 고인돌 근경
 
 
 

5. 삼계 세심리 고인돌군

 
삼계면 세심리 택승정마을 북쪽 산봉우리(278.1m) 정상부에서 남쪽으로 뻗은 산줄기의 말단부에 자리한다. 이 마을 북서쪽 당산나무 주변에 8기의 고인돌이 있는데, 본래 더 많은 고인돌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산나무 북쪽 민가구역의 기반조성과 진입로 및 농로를 조성하면서 적지 않은 고인돌이 유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고인돌들은 대부분 3-5개의 굄돌로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기반식으로 덮개돌의 하단부가 땅속에 파묻혀 그 구조를 파악하지 못한 것도 있다. 덮개돌은 대체로 판석형으로 산줄기와 평행되게 장축방향을 두었으며, 일부 고인돌은 흙이 심하게 유실되어 그 하부구조가 드러났다. 덮개돌의 크기는 장축 218~318cm, 단축 110~230cm, 높이 40~90cm내외이다.
 
 
 

6. 성수 양지리 고인돌

 
성수면 소재지 북쪽 은행정이마을에 자리한다. 이곳은 성수면 양지리와 도인리, 삼봉리 경계인 산봉우리(382.7m) 정상부에서 남-북 방향으로 뻗은 산줄기의 남쪽 기슭 하단부로 그 말단부에 양지들이 있다. 양지들과 은행정마을 사이의 밭에 한 기의 기반식 고인돌이 자리하고 있는데, 덮개돌은 괴석형으로 둔남천과 평행되게 동서로 장축방향을 두었다. 민가와 인접된 밭으로 본래 이곳에는 2기의 고인돌이 더 있었으나 민가를 신축하는 과정에 한기의 고인돌이 유실되었다고 한다. 고인돌의 규모는 장축 354cm, 단축 176cm, 높이 178cm이다.
 
 
성수면 양지리 고인돌 지표조사, 군산대 박물관
 
 
 

7. 신덕 삼길리 고인돌군

 
신덕면 삼길리 외량마을에서 북쪽으로 500m 가량 떨어진 논 속에 자리한다. 이곳은 치마산(558.1m) 정상부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의 말단부로 몇 년 전 경지정리사업이 이루어졌다. 현재 논 속에 2기의 고인돌이 남아있는데, 남쪽 고인돌을 1호로 여기서 북쪽으로 7m 정도 떨어진 것을 2호로 명명하였다. 1호 고인돌은 덮개돌이 판석형으로 약간 북쪽으로 기울어졌으며, 덮개돌의 남쪽 측면에 ‘나주나씨묘동羅州羅氏墓洞’이라는 명문이 있다. 유구의 장축방향은 산줄기와 평행되게 남북으로 두었으며, 고인돌의 하부구조가 상당부분 노출되었다. 장축 430cm, 단축 130cm, 두께 220cm 내외이다. 2호 고인돌은 덮개돌이 역시 판석형으로 남북으로 장축방향을 두었으며, 덮개돌의 아래 부분이 잡석으로 채워져 고인돌의 구조를 상세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덮개돌은 장축 470cm, 단축 310cm, 두께 130cm이다. 여기서 북쪽으로 20m 가량 떨어진 논둑에도 고인돌 덮개돌로 추정되는 대형 판석이 흙속에 파묻혀 있다.
 
 
신덕면 삼길리 고인돌 유적 전경
 
삼길리 고인돌들
 
삼길리 고인돌
 
 
 

8. 신덕 신덕리 고인돌 A

 
신덕면 신덕리 신기마을에서 동쪽으로 250m 가량 떨어진 곳에 자리한다. 본래 신덕면 소재지가 있었던 신덕리 학산마을에서 749번 지방도로를 따라 정북방향으로 가면 조월리로 들어가는 지점에서 북쪽으로 100m 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다시 말해 지방 도로에서 시멘트로 포장된 농로를 따라 북쪽으로 100m 정도 가면 농로와 논둑에 한 기의 고인돌이 걸쳐있다. 고인돌은 덮개돌이 괴석형으로 그 하단부가 땅속에 파묻혀 고인돌의 구조를 상세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덮개돌의 장축방향은 호남정맥과 직교되게 남북방향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와 평행되게 남북으로 두었다. 덮개돌은 장축 320cm, 단축 135cm, 높이 68cm이다. 여기서 북동쪽으로 60m 떨어진 논둑과 북쪽으로 100m 가량 떨어진 밭에도 고인돌의 덮개돌로 추정되는 대형 석재가 자리한다. 장축 350cm, 단축 250cm, 높이 70cm 내외이다.
 
 
 

9. 신덕 신덕리 고인돌 B

 
신덕면 신덕리 새터마을을 향해 약 500m 가량 가면 도로 양편에 4기의 고인돌이 있다. 이 가운데 1기는 오른편에 있고 나머지 3기는 길 왼편에 나란히 있다. 이 고인돌군들을 가로질러 도로가 횡단하고 있는 관계로 현재 4기만 확인되었지만, 본래 더 많은 고인돌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인돌 가운데 1기는 도로공사 중 약 3분의 1가량 파괴되어 불완전한 상태로 있다. 1호는 길 오른편에 위치한 것으로 장축 370cm, 단축 190cm, 높이 90cm 이며, 2호는 길 왼편에 위치한 것 중 가장 북쪽의 것이며, 장축 250cm, 단축 190cm, 높이 67cm이다. 3호는 장축 520cm, 단축 240cm, 높이 96cm이며, 4호는 도로와 인접하여 그 일부가 파괴된 상태로 장축 480cm, 단축 290cm, 높이 112cm이다. 장축의 방향은 모두 남-북으로 두었다.
 
 
 

10. 신덕 조월리 고인돌

 
신덕면 조월리 조월마을 서쪽 구릉지 말단부에 1기의 고인돌이 있다. 고인돌의 남쪽에는 북동쪽에서 발원하여 남서쪽의 옥정호로 합류하는 옥녀동천이 흐르고 있다. 고인돌의 규모는 장축 330cm, 단축 220cm 내외이며, 높이 120cm 가량 된다. 고인돌의 장축은 옥녀동천의 흐름과 일치하는 동서로 방향을 두었다.
 
 
 

11. 신평 호암리 고인돌 A

 
신평면 호암리와 신덕면 오궁리 경계인 산봉우리(401.1m) 정상부에서 섬진강 북쪽까지 남북방향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 하단부에 몇 년 전 폐교된 신평중학교가 있다. 신평중학교 운동장 남쪽에 섬진강 본류와 평행되게 동서로 장축방향을 둔 고인돌이 있는데, 덮개돌의 규모는 장축 435cm, 단축 188cm, 높이 71cm이다. 이 유적의 남쪽으로는 섬진강 본류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른다.
 
신평면 호암리 고인돌 유적
 
 
 
 

12. 신평 호암리 고인돌 B

 
신평면 호암리 하두마을에서 동쪽으로 300m 가량 떨어진 논둑에 자리한다. 신평면과 관촌면의 경계를 이루는 산봉우리(363.1m) 정상부에서 섬진강 북쪽까지 남-북 방향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 하단부에 자리한다. 이곳의 남쪽에는 관촌면과 신평면 소재지를 이어주는 49번 지방도와 섬진강 본류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른다. 섬진강 본류와 평행되게 동서로 장축방향을 두고 있으며, 덮개돌의 규모는 장축 430cm, 단축 180cm, 높이 98cm이다.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굄돌 3개가 노출되어 있으며, 성혈은 확인되지 않았다.
 
 
 

13. 신평 덕암리 고인돌군

 
신평면 덕암리 덕전마을로부터 남쪽을 향해 뻗어 있는 길을 따라 500m 가량 가면 산기슭 밭둑 위에 군데군데 3기의 고인돌이 있다. 1호는 덮개돌의 장축 280m, 너비 230m, 높이 115cm이며, 2호는 1호로부터 남쪽으로 30m 정도 떨어져 있는데, 장축 260cm, 단축 170cm, 높이 98cm 이다. 3호는 2호로부터 남서쪽으로 약 300m 떨어진 밭둑 위에 묻혀있는데, 장축 249cm, 너비 180cm, 높이 125cm이다. 장축 방향은 모두 남-북이다.
 
 
 

14. 신평 원천리 고인돌 A

 
신평면 소재지가 위치한 원천리는 남동쪽에 섬진강 상류인 신평천이 흐르고 동쪽으로는 북에서 남으로 흘러 신평천에 합류하는 작은 하천으로 둘러싸여 있다. 신평면 면사무소에서 745번 지방도를 따라 슬치재 방향으로 300m 남짓 가면 도로 동쪽 민가 사이의 밭에 한 기의 고인돌이 있다. 이 고인돌은 동쪽에 남북으로 흐르는 지장천과 나란히 놓여 있으며, 굄돌은 확인되지 않는다. 덮개돌의 규모는 장축 480cm, 단축 347cm 내외 이며, 높이 117cm 가량 된다.
 
 
신평면 원천리 고인돌
 
 
 

15. 신평 원천리 고인돌 B

 
신평면 소재지 원천리 북서쪽에는 동-서 방향으로 뻗은 능선이 신평천까지 뻗어내려 마을의 북쪽과 서쪽을 감싸고 있으며, 이곳에 원천리 고인돌군 B가 있다. 이 고인돌군이 자리한 곳의 남동쪽에는 지장천이 흐르고 있다. 현재 확인되는 고인돌은 모두 10~15기 내외로 일부는 밭으로 개간하면서 얼마간 이동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덮개돌의 규모는 장축 130~230cm, 단축 80~100cm 내외이며, 높이는 50~60cm 가량 된다. 덮개돌의 장축방향은 모두 섬진강이 흐르는 방향과 일치하는 북동-남서방향이다. 이 일대에는 고인돌로 추정되는 석재 이외에도 부정형의 돌이 산재되어 있다.
 
 
 

16. 오수 대정리 고인돌군

 
오수면 대정리 대말마을 서쪽에 남-북 방향으로 뻗은 구릉지의 정상부에 자리한다. 구릉지의 정상부를 따라 동서방향으로 개설된 농로가 있는데, 이 농로와 인접된 민묘구역에 임실 대정리 고인돌군이 있다. 민묘구역의 북서쪽 가장자리에 2기의 고인돌 중 동쪽 고인돌을 1호로 남서쪽 고인돌을 2호로 명명하였다. 1호 고인돌을 3개의 굄돌로 덮개돌이 받쳐진 기반식으로 판석형 덮개돌은 구릉지와 평행되게 동서로 장축방향을 두었다. 1호 고인돌 남서쪽에 자리한 2호 고인돌은 덮개돌의 하단부가 땅속에 묻혀 그 구조를 상세하게 파악하지 못했지만, 덮개돌은 1호와 동일하게 동서로 장축방향을 두었다.
 
 
 

17. 오수 둔덕리 고인돌

 
오수면 둔덕리 방축골마을에서 동녘골로 이어지는 소로를 따라 가면 소로 끝에 자리한 민가 내에 한 기의 고인돌이 있다. 몇 년 전 고인돌의 덮개돌 하단부를 시멘트로 메워져 굄돌의 존재여부를 파악하지 못했다. 이 마을 주민들은 고인돌을 ‘복바위’라고 부른다. 현재 1기의 개석식 고인돌만 남아있는데, 본래 더 많은 고인돌이 그 주변에 자리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덮개돌은 판석형으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하천과 평행되게 남북으로 장축방향을 두었으며, 덮개돌의 규모는 장축 280cm, 단축 196cm, 높이 36cm이다. 성혈은 4개가 확인되었다.
 
 
 

18. 오수 신기리 고인돌군

 
오수면 신기리 재터마을 입구에 위치한 모정으로부터 북쪽으로 100m 가량 떨어진 곳에 신기리 고인돌군이 있다. 이 고인돌들은 대부분 기반식으로 덮개돌은 장타원형으로 하천과 직교되게 동서로 장축방향을 두었다. 1호 고인돌은 장축 340cm, 단축 310cm, 높이 50cm 내외이며, 2호는 장축 360cm, 단축 170cm, 높이 80cm내외이다. 1호 고인돌의 덮개돌 윗면에 10여 개의 성혈이 남아있으며, 1 ‧ 2 ‧ 3호 고인돌 모두 굄돌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 유적의 동쪽에 오수천을 따라 괴석들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더 많은 고인돌이 조사될 가능성이 있다.
 
 
 

19. 오수 오암리 고인돌군

 
오수면 오암리 오촌마을 정자로부터 그 서쪽 저수지 아래 산기슭 일대에 고인돌이 흩어져 있다. 원래는 더 많은 수의 고인돌이 있었는데 농경지를 개간하거나 민묘구역을 조성하는 과정에 상당수 훼손되었다. 현재도 십 수기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모두 7기의 고인돌만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맨 서쪽의 높은 곳에 있는 것을 1호로 이름을 붙였다. 덮개돌의 장축방향은 북서-남동이고, 장축 369cm이며, 단축 240cm, 높이 50cm이다. 굄돌이 7, 8개가 보이는데 대부분 쓰러져서 크기는 알 수 없다. 2호와 3호는 논가의 묘지 옆에 있다. 2호의 덮개돌은 장축 방향이 북서-남동이고, 장축 364cm, 단축123cm, 높이 55cm로 파괴되었다. 3호의 덮개돌은 장축방향이 동북-서남으로 장축 305cm, 단축 190cm이다.
 
 
 

20. 오수 주천리 고인돌

 
오수면 오산리 금산동마을에서 남서쪽으로 350m 가량 떨어진 곳에 자리한다. 이 산줄기의 정상부에 자리한 민묘구역의 북쪽에 한 기의 고인돌이 자리하고 있는데, 오래전 민묘구역을 조성하면서 덮개돌이 일부 파손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인돌은 기반식으로 판석형 덮개돌은 산줄기와 평행되게 동서로 장축방향을 두었다. 덮개돌의 크기는 장축 270cm, 단축165cm, 높이 60cm 내외이다.
 
 
 

21. 운암 쌍암리 고인돌 A

 
임실 운암중학교를 중심으로 주변에 5기의 고인돌이 있다. 이 유적의 서쪽으로는 ‘옥녀동천’이 옥정호로 흐르고 있으며, 북동쪽으로는 신덕면과 운암면을 경계 짓는 산들이 감싸고 있다. 『문화유적 총람』에 운암중학교 주위에 20여 기의 고인돌이 존재한다고 되어 있지만 현재 5기의 고인돌만 남아있다. 그 중 1기는 학교 운동장에 약 3분의 1정도 묻힌 상태로 놓여 있고, 2기는 남쪽과 서쪽의 담장 속에 파 묻혀있다. 학교 운동장에 묻혀 있는 것은 장축이 남동-북서 방향이며, 장축 347cm, 단축 242cm이다.
 
 
 

22. 운암 쌍암리 고인돌 B

 
운암면 쌍암리 아래새터마을 서쪽 논 가운데 7기의 고인돌이 무리지어 있다. 이곳은 옥녀동천이 옥정호로 합류하는 지점에 해당된다. 이 고인돌들의 덮개돌은 대부분 응회암이며, 굄돌은 3호 고인돌과 7호 고인돌에서 확인되었다. 다른 고인돌은 덮개돌이 흙속에 묻혀 있어 확인하지 못하였다. 이 일대에는 본래 3개소에 걸쳐 6~8기의 고인돌이 무리지어 있었는데, 지금은 1개소에 7기만 남아있다. 1호 고인돌은 장축 360cm, 단축 240cm, 높이 70cm 내외이며, 2호는 장축 280cm, 단축 200cm, 높이 120cm이다.
 
 
 

23. 운암 운정리 장자골 고인돌

 
섬진강댐 수몰지구인 운정리 장자골 남동쪽에 임실 운정리 유적이 자리하고 있다. 섬진강 본류가 ‘U’자형으로 휘감아 도는 지류의 정상부와 남쪽 기슭에 적지 않은 유구가 밀집 분포되어 있다. 이 유구들은 심하게 유실 내지 훼손된 고인돌과 개석이 유실되어 그 내부가 노출된 유구만을 대상으로 수습조사가 이루어졌다. 군산대학교 박물관 주관으로 실시된 수습조사에서 5기의 고인돌과 2기의 돌널무덤, 2기의 파괴분이 조사되었다.
 
고인돌은 지류의 정상부에 남-북 방향으로 일정한 거리를 둔 상태로 3기와 서쪽으로 얼마간 떨어진 곳에 2기가 자리하고 있다. 이 가운데 3호와 4호 고인돌은 하부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나 다른 고인돌은 하부구조가 파악되지 않았다. 3호 고인돌은 하부구조가 토광으로 밝혀졌는데, 토광은 네 모서리를 심하게 모줄임 하여 비스듬히 파내어 마련되었다. 흙의 유실로 덮개돌이 경사면을 따라 상당히 기운 4호 고인돌은 하부구조를 이룬 벽석이 대부분 노출되었다. 4호 고인돌은 할석과 천석을 혼용하여 세우거나 눕혀서 벽석을 마련했는데, 벽석은 대부분 유실되었다. 이 고인돌들은 외곽에 타원형, 장방형, 방형의 묘역을 구획하고 그 중앙에 매장주체부를 둔 진안 용담댐에서 조사된 고인돌과는 유구의 속성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지류의 정상부에서 2기의 돌널무덤이 조사되었다. 위에서 소개한 4호 고인돌 북쪽 직경 5m 내외의 구역에 2기의 돌널무덤이 분포되어 있다. 1호 돌널무덤의 개석은 세장방형의 판석형 할석이 가지런히 변을 맞추어 덮여 있었다. 판석형 할석들 사이의 공간은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할석들로 정교하게 메웠다. 개석을 드러내자 아래에 정교하게 짜인 석관이 노출되었다. 개석과 석관 사이에는 수평을 맞추기 위해 얇은 판석형 할석이 벽석에 맞추어 횡으로 올려져 있었다. 석관은 네 벽 모두 판석형 할석이 사용되었다. 장축인 북벽은 4매 중 중앙의 2매는 판석형 할석을 옆으로 눕혀 수직으로 세웠고, 단벽과 맞닿은 2매는 보다 작은 할석을 이용하여 세로로 세웠다. 남벽은 2매의 대형할석형 판석을 옆으로 세웠다. 단벽인 동벽과 서벽은 각 1매씩의 판석형 할석을 이용하여 가로로 눕혀 축조하였다. 동벽에서 40cm까지는 생토면이 그대로 이용되었고, 이를 제외한 바닥 전면에는 갈색연질호를 파쇄하여 정교하게 깔았다. 이 토기는 직립된 구연부에서 저부로 내려가면서 약간씩 좁아져 결실된 저부로 마감되었다. 석관의 각 모서리 부분에는 어느 정도 높이를 맞추어 부정형 할석이 놓여있는데, 이는 고인돌의 굄돌로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2호 돌널무덤은 4호 고인돌의 하부구조와 함께 이미 지표상에 노출되어 있었고, 많은 부분이 이미 오래전 파괴된 것으로 여겨진다. 토광은 맞대어 벽석을 수직으로 세워 석관을 축조하였다. 벽석의 대부분이 일부분만 남아있었는데, 이중 서벽은 완전 유실되었다. 벽석은 장방형 판석형 할석을 세로로 세웠는데 벽석을 세우기 위한 굴광흔은 따로 마련되지 않았다. 바닥은 생토면을 고르게 다듬어 그대로 이용되었다. 동쪽에 치우친 북벽에 맞대어 바닥에서 유경식 마제석촉 1점이 출토되었다.
 
1호 고인돌과 2호 고인돌 중간지점에서 2기의 파괴분이 조사되었다. 1호와 2호는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는데, 서로 300cm 정도 떨어져 있었다. 2기 모두 토광만 일부분이 남아있을 정도로 심하게 유실되어 있었다. 고인돌과 돌널무덤은 그 중심연대가 청동기시대로 추정된다. 돌널무덤과 고인돌은 유구의 보전상태가 양호하지 않고 유물의 출토량도 그다지 많지 않아 그 조성시기를 파악하기 쉽지 않다. 외곽에 묘역을 구획하고 그 중앙에 매장주체부를 둔 진안 용담댐 돌널무덤과 유구의 속성에서는 큰 차이를 보였지만, 그 조성시기는 비슷할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돌널무덤과 고인돌은 동일지역에 입지를 두어 그 조성시기에서 큰 편차가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임실 운정리 장자골은 섬진강댐 수몰지구 중 선사시대부터 역사시대까지 다양한 문화유적이 밀집된 대표적인 곳이다. 신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그 조성시기를 달리하는 다양한 문화유적이 운정리 일원에 밀집 분포된 것은 가는정이를 통과하는 교통로와 관련이 깊을 것으로 판단된다. 다시 말하면, 섬진강과 동진강유역을 곧장 이어주는 호남정맥의 큰 고갯길인 가는정이가 적지 않은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운암면 운정리 유적 발굴 광경, 군산대 박물관
 
운정리 고인돌 유적 발굴 광경
 
운정리 고인돌 덮개돌 제거 후 모습
 
운정리 고인돌 발굴 후 모습
 
운정리 고인돌 출토 무문토기
 
운정리 고인돌 출토 간돌검
 
운정리 고인돌 출토 돌화살
 
섬진강댐 수몰지구 내 운정리 고인돌 유적
 
운정리 고인돌 들
 
운정리 고인돌 들 - 2
 
운정리 고인돌 들 - 3
 
운정리 고인돌 들 - 4
 
운정리 고인돌 들 - 5
 
운정리 고인돌 들 - 6
 
운정리 덮개돌이 유실된 고인돌
 
 
 

24. 운암 입석리 고인돌

 
운암면 입석리 구암마을의 북쪽에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해발 284.8m의 야산이 있고, 동남쪽으로는 해발 205.5m의 야트막한 야산이 있다. 고인돌은 두 야산 사이의 계곡에 위치한다. 본래 지형은 이어져 있는 하나의 능선이었으나 섬진강댐으로 수몰되면서 간헐적으로 수몰이 이루어진다. 이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이곳에는 예전부터 1기의 고인돌 밖에 없었다고 하며, 물에 잠기면 뱃길로 이용하기 위하여 고인돌의 덮개돌 일부를 떼어냈다고 한다. 고인돌의 규모는 장축 380cm, 단축 220cm, 높이 100cm이다. 덮개돌은 북동-남서방향으로 장축을 두었으며, 굄돌은 확인할 수 없었다.
 
 
 

25. 운암 학암리 고인돌

 
운암면 학암리 광석마을과 새터마을 사이의 새보들 서쪽에 자리한다. 임실읍 신안분지를 적시고 줄곧 북서쪽으로 흐르는 석보천 북쪽에 새보들이 있는데, 여기서 서쪽으로 400m 가량 떨어진 곳에서 석보천이 섬진강 본류에 합류한다. 아직 경지정리사업이 이루어지지 않은 새보들 논둑에 고인돌 덮개돌로 추정되는 길이 250cm 이상 되는 2매의 판석형 할석이 박혀있다.
 
 
 

26. 청웅 구고리 고인돌군

 
청웅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500m 남짓 떨어진 곳에 소룡골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서 북서쪽으로 200m 남짓 떨어진 곳에 8기의 고인돌이 자리하고 있다. 현재 논과 밭의 경계에 3기의 고인돌, 여기서 동쪽으로 25m 떨어진 밭에 2기, 그리고 다시 동쪽으로 35m 떨어진 논과 밭의 경계에 3기의 고인돌의 무리지어 있다. 굄돌이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기단식 고인돌이다. 모든 덮개돌이 하천과 평행되게 남북으로 장축방향을 두고 있는 점에서 그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할 것으로 추정된다.
 
임실군에 산재된 고인돌은 대체로 구릉지와 하천변, 산기슭에 입지를 두었는데, 그 입지에서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차이점이 없다. 아직까지 탁자식卓子式 고인돌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고 기반식基盤式 혹은 개석식蓋石式 고인돌이 일색을 이룬다. 고인돌의 덮개돌은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으면서 그 주변의 하천 혹은 산줄기와 평행되게 장축방향을 두었다. 섬진강댐 수몰지구인 운암면 운정리에서 5기의 고인돌이 조사되었는데, 진안 용담식 고인돌의 특징인 방형 혹은 원형의 묘역시설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청동기시대의 생활유적으로는 덕치면 망월촌과 성수면 도인리가 있다. 모두 교통의 중심지로 다른 지역의 생활유적과 마찬가지로 그 주변지역이 잘 조망되는 구릉지 혹은 산줄기의 정상부에 입지를 두었다. 임실 망월촌리에서 5기와 임실 도인리에서 7기의 집자리住居址2가 조사되었다. 이 집자리들은 대체로 풍화암반층을 일정한 깊이로 파내어 바닥면을 마련하고 그 중심부에 장타원형 구덩이가 배치된 전형적인 송국리형松菊里型이다. 아직까지 청동기시대 이른 시기 집자리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았지만, 임실군의 청동기문화는 송국리형 집자리의 확산과 함께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 말미암아 청동기시대에도 농경문화의 발달과 함께 그 주변지역과의 문화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을 것으로 점쳐진다.
 
 
청웅면 구고리 고인돌 유적 전경
 
논둑에 파묻힌 구고리 고인돌
 
 
 

27. 덕치 망월촌 유적

 
익산지방국토관리청에서 시행하는 순창-운암간 국도 30호선 및 27호선 확장공사 구간에 자리한다. 이 유적은 회문산에서 내려오는 산자락의 하단부로 전북 임실군 덕치면 덕치리 망월촌마을 부근에 해당한다. 호남문화재연구원 주관으로 이루어진 발굴조사에서 청동기시대 주거지 5기와 구상유구 1기, 원삼국시대 주거지 39기와 수혈, 고려시대 수혈과 석곽묘, 석조우물 등이 조사되었다.
 
청동기시대 주거지는 그 평면형태가 원형계로 중앙에 타원형구덩이가 마련된 송국리형이다. 이제까지 섬진강유역에서 확인된 청동기시대 주거지 가운데 가장 상류에 위치하는 것으로 흑도 및 뚜껑, 축약된 굽의 형태 등으로 보아 송국리형 문화 후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원삼국시대 주거지는 평면형태가 대부분 방형계를 이루고 있으며, 주공이나 벽구가 거의 시설되지 않았다. 돌출부를 가진 7기의 주거지가 조사구역 한곳에 밀집 분포하고 있는 점은 망월촌유적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이 유적의 조성시기는 유구 및 출토유물, 주변유적과의 비교를 통해 볼 때 기원후 3세기를 전후하여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고려시대 유구로는 석곽묘와 수혈 4기, 우물 등이 있다. 석곽묘는 횡구식과 수혈식으로 등고선과 직교하는 방향으로 장축을 두고 있다. 우물과 수혈 등에서 일상생활용기로 사용되는 자배기류와 청동제품, 해무리굽 청자발 등이 출토되어, 이 유구들은 고려시대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지금까지 임실군 관내 매장문화재 발굴조사는 삼국시대 고분과 산성 등이 보고된 것을 제외하면 거의 전무한 실정이었다. 그러나 최근 임실 하가 구석기유적을 중심으로 비교적 많은 유적들이 보고되고 있다. 임실 망월촌유적은 그 성격이나 위치상으로 볼 때 앞으로 전북의 서부와 동부를 연결하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큰 기대를 모으고 있다.
 
 
좌 덕치면 회문마을 선돌 면담조사
 
우 회문마을 선돌
 
좌 덕치면 장암리 암치마을 선돌
 
우 암치마을 선돌
 
상 삼계면 어은리 어은골마을 선돌
 
하 어은리 어은골마을 선돌 지표조사 광경
 
상 청웅면 옥전리 행촌마을 선돌
 
하 옥전리 행촌마을 선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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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면 도인리 유적 개토제 광경
 
상 덕치면 회문리 망월촌 유적 전경
 
중 회문리 망월촌 유적
 
하 망월촌 유적 청동기시대 집자리
 
망월촌 유적 출토 유물
 
상 도인리 1호 청동기시대 집자리
 
하 도인리 출토 유물 모음
 
성수면 도인리 유적 발굴 후 모습
 
발굴 광경, 군산대 박물관 발굴단
 
도인리 유적 7호, 20호 집자리
 
도인리 유적 원삼국시대 집자리
 
20호 집자리 새모양토기 출토 상태
 
20호 집자리 출토 새모양토기
 
 
 

28. 신평 상가 윷판 유적

 
임실군 신평면 가덕리 상가마을 산36번지에 임실 상가 윷판유적이 있다.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윷판형암각화로 상가마을에서 잠두산 골짜기로 접어드는 도로 아래 넓게 형성된 자연암반으로 가덕지 부근에 있다. 자연암반층은 길이 35m, 너비 9m의 바위 군으로 12~14° 가량 경사진 곳으로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자연지형을 이룬다. 잠두산 골짜기 입구에 위치하여 암각화가 조성된 이후 줄곧 표면격리와 풍화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모두 10여 개의 자연암면 중 주암면과 별면에서 암각화가 발견되었는데, 동서로 긴 주암면은 그 평면형태가 거의 장방형으로 가장자리가 완만하다.
 
주암면에는 22점의 윷판형암각화가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암각화가 풍화된 뒤 그 일부 흔적이 남아 윷판의 형태를 갖는 많은 수의 홈이 남아있다. 그리하여 윷판형암각화와 작은 홈이 서로 중첩되어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으며, 한 점의 고누판과 80여 점의 바위구멍이 함께 조사되었다. 그리고 바위구멍으로 이어지는 긴 선각도 두 점이 있다. 주암면 상단부 오른쪽 가장자리에 삼우정三友亭이라고 새긴 암각명문과 우측 하단부에 비석을 세웠던 비석공도 있다. 별면에서는 한 점의 윷판형암각화와 방형의 바위구멍 두 점, 그리고 20여 점의 작은 홈 또는 바위구멍이 조사되었다.
 
우리나라의 남부지방에서 비교적 폭넓게 분포된 것이 윷판형암각화이다. 1990년대 초반 고인돌 상석에서 그 존재가 처음 학계에 보고된 이후 야산의 정상부나 구릉지의 자연암석에서 주로 발견되고 있다. 그리고 익산 미륵사지와 경주 황룡사지 주초석, 고구려 적석총, 경주 월성과 경복궁 종루에서도 발견되었다. 윷판형암각화는 농경사회에서 천문관측이나 점의 도구, 시기를 예측하는 척도로 우리 민족의 천문사상과 고유사상이 응축된 결정체로 평가받고 있다. 우리나라 남부지방에서 청동기시대부터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도 윷놀이가 가장 대중적인 민속놀이로 전승되고 있다.
 
 
신평면 상가 윷판유적 실측도
 
신평면 상가 윷판유적 학술대회, 한국암각화학회
 
 
 

29. 임실의 유구와 유물

 
기원전 300년을 전후한 시기에는 중국 연나라3와 고조선古朝鮮의 무력 충돌로 고조선 사람들이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새로운 격변의 시기를 맞는다. 고조선의 준왕과 고조선 사람들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청동기시대 고인돌 사회가 급격히 해체되면서 새로운 질서의 재편 과정은 마한馬韓의 형성으로 이어진다.
 
 
원삼국시대 집자리 유물 출토 상태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한조韓條에는 마한에 모두 54개의 소국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마한의 영역이 오늘날 경기 서해안·충남·전북·전남 등에 걸쳐 있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이 소국들은 대체로 군 단위마다 하나씩 자리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실군에도 마한의 소국이 있었을 것으로 점쳐지고 있지만, 아직은 그 실체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서력기원 개시 전후부터 300년경까지의 약 3세기 동안을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라고 부른다. 1970년대 고고학계에서 처음 제기된 시대 구분법으로, 삼국이 고대국가 체제를 완성하기 이전까지 삼국시대의 과도기적인 단계로, 그 이전에는 삼한시대·부족국가시대·성읍국가시대·마한으로 불리었다. 원삼국시대에는 청동기의 소멸과 함께 철 생산의 성행, 고인돌의 소멸, 김해식토기가 처음 등장한다. 그리고 이전 시기에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널무덤과 덧널무덤, 독무덤이 더욱 대형화되고, 여기에 지역성이 강한 주구묘周溝墓4와 분구묘墳丘墓,5 구덩식 돌덧널무덤이 새롭게 출현한다.
 
임실 망월촌에서 39기와 임실 도인리에서 21기, 청웅면 석두리에서 37기의 원삼국시대의 집자리가 조사되었다. 임실 석두리 산성에서 남쪽으로 뻗은 산자락에 자리한 임실 석두리를 제외하면 대부분 청동기시대 집자리와 중복관계를 보였다. 임실 석두리는 대부분 2∼3기 이상씩 중복관계를 보이고 있으면서 대부분의 집자리가 화재로 폐기된 것으로 밝혀졌다. 임실역에서 동남쪽으로 2km 가량 떨어진 임실 도인리는 인위적으로 구획한 것처럼 구릉지의 정상부를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대형 집자리가 배치되어 큰 관심을 끌었다. 마한의 집자리는 그 평면형태가 방형 혹은 장방형으로 풍화암반층을 파내어 생활공간이 마련되었는데, 그 출입구는 대부분 남쪽에 두었다.
 
 
도인리 출토 원삼국시대 토기 모음
 
 
유물은 항아리短頸壺와 장란형토기長卵形土器, 귀때토기注口土器,6 시루甑, 바리鉢, 그릇받침器臺 등 마한의 토기류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특히 호남지방의 마한계 분묘유적과 생활유적에서 나온 새모양 토기鳥形土器가 도인리 20호 집자리에서 출토되어 큰 관심을 끌었다. 이제까지 고창 예지리 1호분과 익산 간촌리 2-3호, 나주 용호 14-3호, 영광 군동 A-6호묘, 서천 오석리 96-6호분과 나주 복암리 랑동 7호 집자리에서 새모양 토기가 나왔다. 임실 석두리 22호 집자리에서는 함안 황사리 고분군 등 경남 함안지역 출토품과 흡사한 4세기 후반대 가야계 굽다리접시高杯가 출토되어 이목을 집중시켰다. 유구의 속성과 유물의 조합상에서 여러 지역의 문화요소가 함께 공존하여 문화상으로는 점이지대漸移地帶7를 이루었다. 선사시대 이래로 지속된 섬진강유역의 지역성이 마한까지 그대로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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