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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궁인창의 독서여행
◈ 다섯번의 일본 항해 실패... 753년 도일 불법 전수
얼마 후 감진 일행은 18명의 선원을 다시 고용하고 옥공, 화공, 조각가 등 여러 기술자를 태워 12월 하순 준비를 마치고 배를 출항시켰다. 밀항하는 배에는 모두 80여 명이 승선했다. 배에는 귀중한 불상, 경전, 향로, 약품이 가득 실렸다.
양저우 대명사(大明寺) 감진 화상(2)
 
 
얼마 후 감진 일행은 18명의 선원을 다시 고용하고 옥공, 화공, 조각가 등 여러 기술자를 태워 12월 하순 준비를 마치고 배를 출항시켰다. 밀항하는 배에는 모두 80여 명이 승선했다. 배에는 귀중한 불상, 경전, 향로, 약품이 가득 실렸다. 그러나 큰 바다는 일본으로 부처님 법을 전하러 가는 이들을 순순히 보내주지 않았다. 배가 출항한 지 며칠이 안 되어 폭풍을 만나 배의 일부가 부서져 눈물을 머금고 항구로 배를 돌렸다. 배를 수리해 한 달 뒤 다시 출항했으나, 이번에는 절강 해역에서 암초에 부딪쳐 배는 침몰하고 승려 일행은 목숨만 간신히 건질 수 있었다.
 
이듬해 봄에 감진 화상 일행은 다시 일본행을 시도한다. 월주(越州)지역에서 감진에게 계율을 설하고 수계를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을 때였다. 그곳에서 수계를 마치고 일본으로 떠날 준비를 하던 중 한 승려가 이를 눈치를 채고 일본 승려 요에이와 후쇼를 관청해 고발했다. 후쇼는 피했지만 요에이는 붙잡혀 장안으로 압송되어 가다가 몰래 탈출했다. 세 번째 일본행도 실패로 돌아갔다.
 
감진은 일본에 건너갈 방법을 구상하다가 아예 생각을 바꾸었다. 제자 한 명을 복주(福州)로 먼저 보내 식량과 배를 미리 구입해 대기시키고 물건들을 실었다. 감진은 30여 명의 제자들과 천태산으로 순례를 떠난다며 절강을 통해 복주로 향했다. 그곳에서 천태산을 순례한 감진 일행은 사찰을 다니며 배가 기다리는 복주로 향했다. 그런데 양주에 남아있기를 바라는 감진의 제자가 이를 막아달라는 상소문을 올려 황엄현(黄厳県) 선림사(禅林寺)에서 승려들은 모두 붙잡혔다. 네 번째 시도는 관에 의해 완전히 저지당했다. 감진 승려 일행은 용흥사로 보내졌다.
 
그들은 모두 국가에서 감시하는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관청에서는 그들을 감시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요에이와 후쇼는 크게 절망했다. 한없이 자비로운 고승 감진에게도 죄스러웠다. 745년 2월 두 승려는 고승 감진에게 양주를 떠나겠다고 말을 하였다. 감진은 그들에게 말하기를 “지금은 나라의 감시가 너무 심하니 일단 그렇게 하시오. 허나 내가 일본에 가려는 마음은 변함이 없소.”라고 답했다. 두 명의 일본승려는 눈물을 흘리며 물러 나와 거처를 옮겼다.
 
승려 감진이 늙은 몸을 이끌고 일본에 가려는 것은 오로지 부처님 법을 전하려는 굳은 의지 때문이었다. 노승이 일본에 간다는 소문이 넓게 퍼져 수많은 사람들이 감진 화상이 머무는 곳마다 수계를 받겠다고 모여들었다. 고위 관리들도 많이 찾아와 계를 받았다. 3년이 지나자 관청의 감시도 느슨해졌다.
 
요에이와 후쇼는 양저우 숭복사(崇福寺)에 머물던 감진대사를 만나 다시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향할 것을 요청한다. 큰 스님은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아무도 모르게 비밀스럽게 일을 진행해나갔다. 748년 6월 26일 밤 그들은 양주의 바닷가에 모였다. 감진과 14명의 제자들, 선원과 기술자 등 모두 35명이었다. 일행은 신하(新河)에서 배를 띄워 동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대양에 나서자마자 큰 풍랑을 다시 만났다. 이들은 해역을 표류하다 월주에 배를 정박시켰다. 다시 10월에 바다로 향했다. 그런데 거대한 폭풍을 만나 배가 표류하면서 14일간 죽음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그들은 모두 살아서 육지에 내렸으나 관리들에게 붙잡혀 인근 사찰로 보내졌다. 다섯 번째 일본으로 가려는 밀항도 실패로 끝났다.
 
당나라 조정에서는 감진 화상이 일본으로 가려는 목적과 의미를 잘 알지만 외국으로 나가는 것을 국법으로 금지한다고 결정해 방법이 없었다. 750년 초 건강이 급격히 나빠진 승려 요에이가 시름시름 앓다가 마침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율사 초빙을 위해 당나라에서 17년간 불철주야 노력하다 이역만리 당나라에서 숨을 거둔 것이다. 홀로 남은 승려 후쇼의 충격은 너무 컸다. 관청에 더 이상 쫓겨 다니느니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무렵 감진 화상의 몸에도 이상이 왔다. 침침하던 눈이 피로가 겹치면서 아예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게 됐다. 어떤 약이나 치료도 소용없었다. 게다가 감진과 일본행을 다섯 번이나 시도했던 제자인 상언(祥彦)까지 병으로 죽고 만다. 751년 대명사로 돌아와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계를 주고, 사찰 전각을 수리했으며, 불상을 조성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동시에 어떻게 해야 일본으로 건너가겠다는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항상 마음속으로 고민했다.
 
753년 10월 일본에서 보낸 일본 견당사사절단이 천황 1세 1회 파견과 20년마다 한 번 파견한다는 조공(朝貢) 기약(期約)에 따라 꼭 20년 만에 당나라 항구에 도착했다. 견당사사절단은 천황의 명에 따라 당 현종(685년-762년)을 친견하고 감진 화상과 그의 제자들이 일본에 율법을 전할 수 있도록 정식 요청했다. 도교(道敎)를 굳게 신봉하는 당 현종은 “도교를 불교와 함께 선양하겠다면 그렇게 해도 좋다.”라고 기쁘게 허락했다. 당시 현종은 도교에 심취하여 ‘불교를 억압하되 폐지하지는 않는다(抑而不毁).’는 묘한 정책을 취하고, 오로지 불교의 과도한 발전은 억제하고 이용만을 생각했다. 견당사 후지와라 키요가(藤原淸河)는 연광사(延光寺)에 머무는 감진 화상을 예방하고 함께 일본으로 떠나자고 간청한다. 감진 화상은 흔쾌히 승낙했다.
 
753년 11월 19일 감진은 12년 만에 여러 제자들과 소주(蘇州) 황사포(黄泗浦)에서 일본견당선에 올랐다. 일본행 배를 기다리던 후쇼도 동승했다. 일본견당선은 폭우와 격랑을 만나 표류를 거듭하던 끝에 구사일생으로 오키나와(沖縄本島) 본섬을 경유하여 753년 12월 20일 미나미사츠마 시 보즈 부근의 아키쓰마야우라(秋妻屋浦) 상륙했다. 이때 감진 선사의 나이는 66세로 눈이 실명한 상태였다. 다자이부에서 1년 머문 감진 화상은 난바(難波)를 거쳐 헤이조쿄(平城京)로 들어간다. 일본 항구에는 감진 승려 일행을 보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감진이 일본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황실에 전해져 쇼무 천황은 감격했다. 65세의 노승이 5번의 밀항을 실패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6번째 항해하여 일본 땅에 부처님 법을 전하러 온 것이다. 쇼무 천환은 칙사를 보내 자신의 마음을 전하도록 했다. “거센 바다를 건너 멀리서 이렇게 오셨으니 기쁘기 한량없다. 불법을 전수하고 수계하는 일을 감진법사에게 일임한다.”는 내용을 전했다.
 
쇼무 천황은 불교홍포를 위해 무진 애를 썼다. 743년 도다이지(東大寺)를 건립하려고 시작하여 대불 조성에 혼신의 노력을 쏟았다. 그러나 사찰 건립이 점점 어려워지자 당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승려 행기(行基, 668~749)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백제 왕인의 후손이었던 행기는 평생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선사업을 벌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스님을 따랐고 스님 덕택에 수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불사에 동참했다. 쇼무 천황은 행기 대사를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대승정(大僧正)에 추대한다. 대불의 완성을 바로 앞두고 연세가 많은 행기 대승정은 입적하여, 752년 4월 9일 열린 대불 점안에 참석할 수 없었다.
 
필자는 일본 나라 시를 방문하면 문수보살(文殊菩薩)의 화현으로 일본 사람들에게 높이 추앙을 받는 행기대사의 동상을 찾아 1시간씩 바라본다. 행기 대승정은 일본인들의 마음에 영원한 스승으로 남아 오늘도 킨데스 지하철역 2번 출구에 서서 오고 가는 많은 사람들의 근심과 걱정을 염려해 주고 계신다.
 
 
행기(行基) 대승정, 일본 나라시 킨데스역 2번출구
 
 
쇼무 천황은 자신을 지탱해 주던 행기(行基) 대승정이 돌아가시자 큰 기둥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끼고 출가를 결심한다. 처음에 지은 동대사 사찰은 70미터가 넘는 거대한 전각에 대불도 16미터가 넘고 무게만 300톤이나 됐다. 10년간 진행된 대작불사를 위해 시주한 이가 42만 명이 넘었고 기술자도 51만 명이 넘었다. 쇼무 천황이 딸에게 천황의 자리를 양휘하고 스스로 ‘삼보(三寶)의 하인’이라 칭하며 출가해버린 것도 행기의 입적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런 쇼무 천황에게 있어서 중국에서 건너온 고승 감진 화상은 엄청난 희소식이었다. 새로 천황에 오른 딸 고켄도 아버지 태상천황의 마음을 깊이 이해했다. 고켄 천황은 감진 화상이 도다이지에 머물도록 배려했다. 이어 전등대법사(傳燈大法師)라는 칭호도 내렸다. 감진은 도다이지에 불교 계단을 세웠다. 제자들로 삼사칠증을 구성해 승려들은 물론 천황과 황태자에게도 계를 주었다. 일본에 적법한 수계의식을 거친 승려들의 첫 배출이었다.
 
감진 화상은 일본 후쿠오카 다자이후에 있는 관세음사에서 1년, 나라(奈良) 동대사에서 5년, 당초 제사에 4년을 주석하며 승려 수계 제도를 정립하였다. 감진은 일본에 도착한 후 부처님 법을 전하러 왔다는 사명감을 한 번도 잊지 않았다. 감진과 중국에서 건너온 제자들은 일본 승려들에게 계율과 천태학을 정성을 다하여 가르쳤다. 당에서 가져온 천태삼부경을 비롯해 많은 불전들이 승려들에 의하여 필사되어 전국에 퍼져나갔다. 감진은 눈이 멀었지만 한시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정창원에서 불경을 빌려 읽기도 했다.
 
755년 11월 황실에서 하사받은 니다베친 왕의 땅에 사찰을 새롭게 짓기 시작했다. 도쇼다이지(唐招提寺)라는 중국식 사찰을 건축하여 수많은 승려들을 교육시켰다. 감진은 승려들과 백성들에게 약초, 인쇄, 계율, 천태학, 건축지식, 서예, 조각 등을 전해주고 열심히 가르쳤다. 히덴인(悲田院, 비전원)을 열어 가난과 질병 등을 구제하려 힘썼다. 唐招提寺는 가장 영향력 있는 사찰이 되어갔다.
 
쇼무 천황이 죽고 준닌(淳仁)이 천황에 오르자 일본 승려들의 반발로 감진의 사원 관리를 중단시킨다는 새로운 조칙이 선포됐다. 감진 화상은 조칙에 굴하지 않고 승려들을 설득해가면서 불교 수계 계단 설립을 추진해나갔다. 그 결과 761년 시모쓰케 지역의 야쿠시지(藥師寺)와 지쿠젠 지역의 간제온지(觀世音寺)에도 계단을 설립했다. 조정에서는 이곳에서 수계의식을 거치지 않으면 승적을 얻을 수 없도록 했다. 763년 감진의 건강은 갈수록 악화됐다. 제자들은 스승의 입적이 멀지 않았음을 알고 감진의 모습을 조각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감진화상좌상(사진: 일본 당초제사, 건칠, 높이 80.1cm)
 
 
감진은 입적을 며칠 앞두고 “원컨대 내가 앉아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란다.” 감진 화상은 서쪽을 향해 절하고 단정히 앉아 입적했다. 감진 화상의 일대기를 수록한 동정전(東征傳)에는 감진을 화장할 때 온 산에 그윽한 향기가 자욱했다고 전한다. 감진이 당나라에서 건너와 일본에 전한 건축, 의학, 미술 등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여 지금도 일본에서 감진이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꼽힌다. 천황 쇼무가 감진에게 보낸 글은 일본 최초의 불교문화사라는 ‘원형석서(元亨釋書)’ 등에 전한다.
 
제자들은 감진 화상이 입적하기 전에 미리 스승의 얼굴을 그렸다. 그리고 제자 인기(忍基)법사가 763년에 종이를 이용하여 스승의 상을 제작하였다. 건칠에 채색을 입힌 80cm 높이의 좌상이었다. 오늘날 일본 국보로 지정된 ‘감진화상좌상(鑑眞和上坐像)’이 그것이다.
 
1963년에는 감진의 입적 1200주년을 기념해 중국과 일본에서 성대한 기념행사가 열렸다. 1973년 감진이 머물던 양저우 옛터에 도쇼다이지 금당을 본떠 기념관을 만들었다. 13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감진은 중국과 일본 교류의 상징으로 손꼽힌다.
 
덩 샤오핑(鄧小平)은 중국의 개혁 개방과 현대화를 이끈 걸출한 정치가이며 군사 지도자였다. 그는 중국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하고 중·일 양국의 평화와 우호를 위해서 확실한 기초를 세웠다. 1978년 10월 23일 덩 샤오핑 중국 국무원 부총리는 일본 정부의 초청에 응하고 일본을 방문하여 <중일 평화 우호조약 비준서>의 교환식에 참석해 문서에 비준했다. 덩 샤오핑은 일본의 근대산업시설들을 돌아보고, 나라 시에 있는 당초제사唐招提寺를 방문해 1200년 전에 중국에서 건너온 승려 감진화상의 조각상을 보았다. 그는 「一件具勇深遠意義的盛事」라고 말했다. “일본인들이 이 조각상을 1200여 년에 걸쳐 진심을 다해 정성껏 보존하여 현재까지 이루고 있구나! 조각상의 가치를 떠나 정말 존경스럽고 감사하다. 중국과 일본 쌍방의 생각이 연결된 순간으로 양국에게 있어 최대의 사건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불교나 그 계율이 아니라, 중일(中日) 양 국가 간의 상호존경(相互尊敬)과 상호신뢰(相互信頼)의 마음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덩 샤오핑의 지도력 덕분에 일본 국보인 감진선사의 등신불(肖像僧像) 감진화상좌상(鑑眞和上坐像)은 일본에서 옮겨와 1980년에 양저우와 베이징에서 친견법회를 개최하여 불자 50만 명이 참배했다.
 
중국은 감진 화상 친견법회를 계기로 문화대혁명 때 파괴한 전국의 불교사원을 하나씩 복구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일본 불교계 승려들은 중국과 공식으로 수교하기 전에 양저우 대명사와 잦은 교류를 하였다. 1973년에 양저우 대명사를 방문했고, 1250년 전의 고마움을 전하고자 천년고찰 대명사에 감진선사를 기리는 기념관을 세우고, 승려교육기관 감진학원, 도서관 등을 지어 선사의 유훈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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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03. 19:15)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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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