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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랑사 (玉娘祠) ◈
◇ 4. 마주걸이 삽화(揷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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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
채만식
1
玉娘祠[옥랑사]
 
2
4. 마주걸이 삽화(揷話)
 
 
3
선용은 지나간 해 겨울, 매부 강영석에게서 세상 물정 이야기를 들은 끝에, 나도 땅이나 파먹고 소리없이 가만히 살다만 말 것이 아니라, 차라리 한번 세상 가운데 뛰어들어, 물굽이 치는 세상과 함께 들레면서 나아가는 세상과 함께 나아가 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인 것이 있었다. 그리고 이 생각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가, 마침내는 옥봉으로 인하여 가슴에 묻힌 불이 그로 하여금 집을 뛰쳐나가, 그 생각하던 바에다 몸을 던지게 한 것이었었다.
 
4
지향은 막연히 서울이었다. 매부 강영석을 연줄삼아, 아뭏든 서울로 가보리라 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반드시 서울로만 가야 한다거나, 단숨에 서울로 달려 올라가야 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5
하여커나 그래서 시급한 무슨 볼 일을 지니고 나선 출입이 아닌 바에야, 아낙이 사립문 안에서 배웅을 하면서 이왕 돌아올 기약이 먼 길일진댄, 잠깐 들러 친정 부모를 만나고 떠나 달라던 당부를 저버릴 수가 없었다.
 
6
아들이 없는 노인들이요 겸하여 막내 사위라, 장인 장모의 반겨함은 자별하였고 대접도 극진하였다.
 
7
하루를 묵어 이튿날 점심 후에 마악 떠나려고 하는 차에 맏동서가 당도하였다. 근처에 볼일로 왔다 회로에 잠깐 들렀노라고 하였다.
 
8
맏사위 송서방은 서른다섯인가 먹은 한창 때 사람으로, 이십 리 가량 되는 두뭇개(兩水浦)라는 포구에서 중선도가를 하고 지내는데, 속에 든 것은 없고 판무식이라도 사람은 퍽 걸걸하고 소탈스러웠다.
 
9
그런 사람이 항용 그러하듯이, 송서방도 술과 친구를 좋아하였다.
 
10
선용과는 선용이 혼인때 잠깐 만나고 이번이 처음인데, 바로 오랜 구면같이 흉허물없이 하면서
 
11
"자네 그러잖어두 잘 만났네. 내가 자넬 부디 한번 만날 양으로 벼르구 벼르구 하든 참인데…… "
 
12
하더니, 장모 더라
 
13
"아, 장모님, 술 좀 안 주시우?"
 
14
해서 그러지 않아도 분별하고 있는 술상을 재촉하여다 놓고는 큰 잔으로 선용도 권하고 저도 먹고 한다.
 
15
"그래, 술 잘하지?"
 
16
"별로 잘 못하는 걸요."
 
17
"힘이 그만침이나 좋구서 술을 못 할 이치가 있나. 자, 잔 들어."
 
18
"………"
 
19
선용은 술이라는 것을 아직 그다지 즐겨할 줄을 몰라 그렇지, 먹기로 들면 얼마든지 먹을 수는 있었다.
 
20
"오늘은 나허구 술 좀 먹어. 예서 얼추 축여 가지구 우리 집으루 가서 한바탕 먹드라구? 우리 집에 가지?"
 
21
"가지요."
 
22
"참, 급한 볼 일이나 없나?"
 
23
"가을걷이두 끝나구 한가하길래 지향없이 나섰지요, 바람도 쏘이구 할 겸."
 
24
"그럼 됐어. 그럼 됐어. 나허구 우리 집에 가서 흔한 생선 해서 한바탕 먹자구. 포구 술 맛은 촌 술 맛허군 또 다르이. 색시가 시글시글허구, 응 ?…… 물찬 제비 같은 색시가 발길에 툭툭 걷어채거든. 머, 오입 허구프다면 오입 얼마든지 시켜주지…… 이크, 저 우리 장모님 얌전한 망낭 사위 바람맞힐 양으루 헌다구 방망이 가지구 쫓어 들어오실까보다…… 그렇지만, 아따 장모니임."
 
25
"왜 그러나?"
 
26
장모가 바깥에서 대답이다.
 
27
"술 아니 먹구, 오입할 줄 모르는 사낸 좀사내죠?"
 
28
"술 퍼먹고 다니믄서, 기집질이나 일삼는 사낸 그럼 벼룩사낸감?"
 
29
"흐흐흐흐…… 그렇지만 오늘은 막내사위 제가 좀 빌려갑니다."
 
30
"데리군 가두 술 작작 먹여. 술 별루 아니 먹든 사람, 괜히."
 
31
"네네."
 
32
둘이는 술이 거나하여 가지고 새 때나 되어서 처가를 나섰다.
 
33
산과 들은 울긋불긋 흐드러졌던 단풍이 어느덧 다 낙엽이 지고, 바람 기운 또한 싸늘하여 소조하기 다시 없었다. 하늘만 부질없이 높고 푸르렀고.
 
34
가슴에 겹겹이 번뇌와 울화를 품고, 집을 나와 지향없이 떠다니는 회포가 선용은 가을처럼 못내 적막하였다.
 
35
간간이 주막이 있고, 주막을 당할 적마다 송서방은 들어, 서서 술을 청하였다.
 
36
선용은 술이라도 취하면 울적한 심사가 가시려니 하여 권하는 대로 술을 마시었으나, 아무리 마시어도 술이 취하는 줄도 모르겠고, 마음도 번화하여 지는 줄도 모르겠었다.
 
37
두뭇개 포구가 멀찍이 바라다 보이는 곳까지 와서였다.
 
38
송서방은 문득 이런 말을 하였다.
 
39
"자네, 혹시 그 동학 이야기 들었나?"
 
40
"글쎄요…… 더러 들었지요."
 
41
"자네 근처두 동학하는 사람 많이 있는가?"
 
42
"많든 않지만, 간혹 있나 봅디다."
 
43
"건데, 대체 그 동학이란 게 무어하는 거라든가?"
 
44
"도(道)는 돈데, 우리 보겐 잡도(雜道 : 邪敎[사교]) 같습디다."
 
45
"어째서?"
 
46
"모여 앉어서, 무어 이상한 주문을 외우구. 그리구 무어, 도통을 하면 총알이 몸에 들어오지 않구 한다든가?"
 
47
"아니, 그건 정말인가 보데. 헌 것이 강원도로 저리는 동학꾼들이 들구 일어서서 난리를 꾸몄는데, 관병(官軍)이 연성 몇 천 명씩 내려가 접전을 해두, 번번이 패허구 패허구 한대."
 
48
"그런 소문이 있기는 있읍디다만서두…… 그래, 두뭇개두 동학꾼이 있는가요?"
 
49
"있구말구. 그러구 날더러두 들라구 조르는 거야…… 한번 들어볼까바."
 
50
"총알 몸에 아니 들어오는 도통하실 영으로요?"
 
51
"그렇지."
 
52
"건 해 무얼 하시나요? 포구서 중선 거간해 자시는 이가 총알허구 무슨 상관이 있길래."
 
53
"아냐. 인제 오라잖아 조선 팔도 동학이 죄 들구 일어서서 한바탕 큰 난리들 꾸민대. 그래 가지군, 동학이 천하를 차지하게 된다는군."
 
54
"포구서 중선 거간해 자시구 사는 이가, 남 천하 차지하는 데 참옌 해 무얼 하시나요?"
 
55
"남원부사나 양주목사 하난 받아 논 밥상이래."
 
56
"원이나 목사가 그대지 소원이시요?"
 
57
"양반 싫구, 호강 싫은 사람 있다든가?"
 
58
"나는 양반같이 밉구 보기 싫은 건 없읍디다."
 
59
"나는 양반같이 무섭구두, 부러운 건 없데나."
 
60
송서방은 선용을 데리고 저의 집으로 가 대강 인사를 치르게 한 후, 이내 다시 데리고 거리로 나왔다. 술이라는 것은 반 취할 때까지는 술 맛으로 먹지만, 만취가 되고 나서부터는 색다른 안주 ─ 계집을 곁들여 놓고 노는 맛에 먹는 법이라면서…… 포구는 강바람에 머금긴 생선 비린내로 벌써 포구다왔다.
 
61
생선배가 새로이 들어왔는지, 멀찍이 강변 쪽에서 왁자지껄 뭍사람의 들레는 소리가 요란하고, 생선을 받아진 도부장수가 꾸역꾸역 밀려나온다.
 
62
아직 밤도 아닌데 새 장구 소리에 계집의 노랫소리가 처처에서 일고.
 
63
포구는 촌보다 풍성풍성하였다.
 
64
송서방의 집을 다녀 나와 얼마 아니 가서였다.
 
65
제법 솟을대문을 달고 한, 바로 길 옆 집앞을 지나는데, 앞선 송서방이 멈칫하고 멈춰 섰다.
 
66
선용도 멈춰서면서 송서방을 따라 보았다.
 
67
야트막한 담 너머로 넘어다보이는 사랑마당에서 이 집 하인이리라, 두 놈이 들어서 한 사람을 꽁꽁 묶어, 마침 '마주걸이’에다 올려매고 있었다. 마루에는 주인인 듯 싶은 정자관(丁字冠) 쓴 중늙은이가 서서 지휘를 하는 모양이고.
 
68
선용은 더 서서 하회를 보려고 하였으나 송서방이 소매를 잡아 당겼다.
 
69
걸어가면서 송서방은 소곤소곤 말하였다.
 
70
"근처에서 이름난 최집(崔宅)일세."
 
71
"토호(土豪)?"
 
72
"응…… 어느 놈이 또 붙들려 와, 저 졸경인구? 달라거든 선뜻 얼마간 집어주구 말 일이지."
 
73
뼈다귀는 어엿이 양반의 뼈다귀로되, 제가 싫어서든지 혹은 세도하는 원 집의 눈의 밖에 나서든지, 또 혹은 벼슬을 내놓고 나와서든지 한 양반이 한 고장에 하나나 둘씩은 으례 있다. 일컬어 토호라고 한다.
 
74
지방의 수령과 아울러 백성의 고혈을 빨아 먹는 것이 토호였다.
 
75
조그마한 트집만 있어도, 트집거리가 없으면 바로 대고, 재물을 요구하여서 듣지 아니하면 제 집 하인을 시켜 백성을 붙잡아다 '마주걸이’에 올려 매고 친다. '마주걸이’란, 두 기둥을 세우고 가름장을 건너 맨, 지극히 간편한 형틀(刑具)이다. 이 나무토막 세 개로 된 '마주걸이’ 하나를 밑천삼아 토호는 얼마든지 재산을 모은다.
 
76
토호는 그 고을 원도 괄시를 하거나 함부로 건드리거나 하지를 못한다. 제 비위에 틀리면 토호가 도리어 동현(東軒 : 都廳[도청])으로 달려 들어 상방(上房)으로 쫓아 올라가서, 심하면 이놈 저놈 하고 원을 행실을 낸다.
 
77
뼈다귀는 분명하겠다, 심술은 이무기 여대치겠다, 서울로 간찰 한 장이면 원은 목이 떨어질 수도 있는 판이라, 창피 무릅쓰고 다독거리는 도리 밖에는 없었다.
 
78
선용은 토호의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 행티를 눈으로 보기는 처음이었다.
 
79
"보았지? 양반 무서운 거."
 
80
송서방이 고개로 뒤를 가리키면서 그러는 것을 선용은 퀄퀄히
 
81
"나 같으면 하나두 무설 것 없겠소."
 
82
"붙잡아다 마주걸이에 올려매구 쳐두?"
 
83
"양반이 제 손으로 붙잡아 오구, 제 손으루 매질허구 한답디까?"
 
84
"그야 하인 시켜 하지."
 
85
"하인이 수천 명인가요? 다직 두세 놈. 걸 못 조저대구서 문문히 끌려와, 두들겨 맞구, 재물 뺏기구 해요?"
 
86
"자네 말두 근리허이만, 시방 세상에 양반헌테 항거할 사람이 누군가? 그 당장야 자네 말대루 해 모면을 한다지만, 그 다음 오는 앙화를 어떡허나? 양반의 하인만 조쳐 대구, 양반을 그대루 둬 두면 그 양반이 잠자쿠 가만히 있는다든가? 양반의 씨가 마르기 전에야."
 
87
"가만히 기시유. 내, 놈을 한바탕 혼침을 주께시니."
 
88
"아니, 이 사람이…… "
 
89
송서방은 눈이 휘둥그래 가지고 선용의 손목을 잡으면서
 
90
"자네 어떡헐 양으루 그런 소릴 함부루 입 밖에 내나? 괜히 날 죽일 양으루."
 
91
"염려 마시오. 설마…… "
 
92
그러면서 선용은 웃었다.
 
93
선용은 속으로 마음을 도사려 먹었다.
 
94
'양반? 권세? 오냐 마침 잘 되었다. 떨치고 나선 길이 아니야. 기운은 두었다 무엇에 쓰겠느냐. 야속하고 밉던 놈들, 그 아니꺼운 놈들, 그 원수놈들…… 안 보아주고 애꼈다 사돈 삼을 테냐?’
 
95
선용은 생각을 그렇게 먹자니, 어쩌면 그런 목적으로 집을 나선 것인 것 같기도 하였다.
 
96
둘이는 밤이 이슥하도록 이 집 저 집 술집을 적간하고 다니면서 놀았다. 그러고는 거진 닭이 울 임시해서야 송서방의 집으로 돌아왔다.
 
97
송서방은 술이 취하여 이내 곯아떨어졌다.
 
98
선용은 살며시 몸을 빼쳐나와, 석양 때에 눈 익혀둔 그 최집을 찾아갔다. 달이 있어, 서툴지 않았다.
 
99
대문은 걸렸으나 담을 넘어 수월히 사랑마당으로 내려섰다.
 
100
우선 마주걸이 옆으로 가 보았다. 참바가 여러 가닥 걸리고, 몽둥이가 굴러져 있고, 석양에 사람을 잡아다 닦달하던 자취가 그대로 낭자하였다.
 
101
선용은 사랑방으로 들어갔다.
 
102
방문 여닫는 소리에 아랫목에서
 
103
"거 누구냐?"
 
104
한다.
 
105
늙은 음성이며가, 주인 최가일시 분명하였다.
 
106
선용은 나직이
 
107
"쉿. 소리질르면 죽어."
 
108
"………"
 
109
찍소리도 없다.
 
110
선용은 발로 더듬어 가 최가를 동동 집어 들고, 한 손에단 처네를 걷어 들고 마주걸이가 있는 곳으로 내려왔다.
 
111
최가는 주저앉아 사시나무 떨듯 와들와들 떨고.
 
112
선용은 참바를 내려 꽁꽁 묶어서 마주걸이에 올려매었다.
 
113
몸 근대허며, 사족이 연한 것이며, 도무지 어린아이 다루기 같았다.
 
114
선용은 속으로 대체 이렇게 하잘 것 없는 것이 앉아서 그 행패를 다 부려, 하건만 어느 누가 덤비어 감히 털끝 하나 건드리지를 못해, 그러는 걸 보면 권세란 아뭏든 맹랑한 것이로구나 생각하였다.
 
115
묶어 올려매어 놓고는 선용이 물었다.
 
116
"사랑에서 또 누가 자?"
 
117
"사환아이."
 
118
최가는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이었다.
 
119
"하인들은?"
 
120
"행랑에서."
 
121
"몇이?"
 
122
"둘이."
 
123
선용은 처네를 찢고 솜을 꺼내고 하여, 솜뭉치로 최가의 입을 뿌듯이 틀어막고, 헝겊 가닥으로 재갈을 단단히 물리고 하였다.
 
124
그 다음, 사환아이놈을 끌어내다 묶어서 입을 봉해서 역시 마주걸이에 올려 매었다.
 
125
행랑에서 자고 있는 하인을 한 놈씩 끌어내다 역시 묶고 입을 봉하고 하여 마주걸이에 올려매고 하였다.
 
126
그래놓고는 몽둥이를 집어들고 최가에게로 다가섰다.
 
127
딱, 한번 때리고 물었다.
 
128
"아푸지?"
 
129
최가는 아픔을 못견디어 몸을 뒤튼다.
 
130
선용은 또 한번 때리고
 
131
"아푸지?"
 
132
최가는 더욱 몸을 뒤틀면서 고개를 죽자꾸나 끄덕인다.
 
133
선용은 계속하여 때리고는
 
134
"아푸지?"
 
135
또 때리고는
 
136
"아푸지?"
 
137
또 때리고는
 
138
"아푸지?"
 
139
여남은 대나 때렸다.
 
140
그러고 나서 묻는다.
 
141
"이 다음 다시 또 그 따위 짓을 할까?"
 
142
"………"
 
143
최가는 입이 터졌으면
 
144
"네, 그저 살려주시오."
 
145
하고 빌 것을 못하고서, 개개 고개만 끄덕여 쌓는다.
 
146
"다시 그따위 짓을 했단, 그때는 죽을 줄 알렷다?"
 
147
선용은 마지막, 다짐을 받고는 송 서방네 집으로 돌아와 나갈 때처럼 기척없이 사랑으로 들어갔다.
 
148
아침이 밝자 벌써 소문이 좌악 퍼졌다.
 
149
최집이 밤 사이에 누구의 짓인지, 주인 영감과 사환아이와 하인들과를 꽁꽁 묶어 재갈을 물려서, 그 집 마주걸이에다 메주 달아매듯 동동 달아 매어 놓았다더라…… 양반의 집이라, 상하와 안팎이 다같이 아침 일어나기가 늦기 때문에, 그것도 동네 사람이 지나다 먼저 보고서 잠긴 대문을 두드려, 안엣 사람들을 깨우고 하였었다.
 
150
송서방은 자못 불안한 기색이면서도 빙긋이 웃으면서 선용의 얼굴을 건너다 보았다.
 
151
선용도 마주 피식 웃었다.
 
152
포구는 구석구석이 수군덕거렸다.
 
153
대체, 어떤 홍길동(洪吉童)이가 밤 사이에 그런 장난을 해놓았더란 말이냐고, 저마다 신기하여 하면서, 일변 속 후련해 하기를 마지않았다.
 
154
조반 후, 길을 뜨려면서, 선용은 송서방더러 말하였다. 인제 두고 보라고. 그 녀석이 다시는 행패를 부리지 아니할 것이라고.
 
155
선용은 그러나 옥생각이었었다.
 
156
양반이란 그렇게 무름한 것이 아니었다.
 
157
최가는 정신을 차리자, 열 길 뛰면서 이를 북북 갈면서, 우선 하인을 시켜 어제 석양에 붙들어다 닦달하던 그 사람을 도로 붙잡아 들여 달고 치면서 문초를 하였다. 이놈 네가 어제 당한 원혐으로 어느 적당(賊黨)의 무리와 통모하고서 그 거조를 한 것이니 놈의 성명과 거처를 불라는 것이었다.
 
158
그러는 한편, 고을의 원에게는 간 밤에 화적이 들어와 이러이러한 끝에, 불소한 재물까지 빼앗아 갔으니 급히 무슨 조처가 있도록 하라는 기별을 들여 보냈다.
 
159
기별이 들어가자 이내 형방(刑房)이 포교를 한 떼 거느리고 나와, 그 사람이 사는 동네로 나가, 조금만 그 사람과 얼쩍지근하거나, 또는 수상한 눈치가 있는 사람이면 다짜고짜로 붙잡아단 달고 치고 하였다. 그리고 밤에는 포교들이 최집을 수직하였다.
 
160
이 결과와 난리를 선용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태연히 떠난 것이었었다.
 
161
두뭇개를 떠나 선용은 외가로 갔다. 외가는 정말 들러야 하였다.
 
162
외가에서는 큰 외숙은 승발(吏房[이방]의 書記格[서기격])을 다니고, 둘째 외숙과 세째 외숙은 각기 따로 나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163
그 세째 외숙이 작년 봄부터 동학에 들어가지고, 늘 오락가락하면서 주축을 하더니, 올 여름참부터는 접주(接主 : 郡代表[군대표])를 하였다면서, 아주 함빡 정신이 팔려, 가사 다 불고하고 육장 나가 살다시피 할 뿐더러, 재물을 아까운 줄 모르고 거기다 들여 쌓는다고, 외조모와 큰 외숙이 번갈아 이야기를 하며 걱정을 하였다.
 
164
선용이 보기에는 동학이란 한낱 허황하고 사위스런 잡도에 지나지 못하였다.
 
165
세째 외숙 재춘(朴在春)은 그러나 선용이 아는 바 그런 허황하고 사위스런 것을 돌아 볼 사람이 아니었다.
 
166
갓 사십의 장년으로, 사람이 심히 공명정대하였다. 부정한 것을 용납치 아니하였다. 나의 곧은 것을 가지고 남의 굽은 것 앞에 굴하려 하지 아니하였다.
 
167
이학(理學)과 썩은 유생들의 숭명사상(崇明思想)을 멸시하고, 실학(實學)의 연암(燕巖 朴趾源[박지원])이며, 제가(朴齊家), 다산(茶山 丁若鏞[정약용])이며 하는 선인의 저술을 읽곤 하였다.
 
168
문필이 좋다는 말을 듣고, 원이 구실을 주어 불렀으나 노모 섬기기와 가사의 바쁨을 핑계하고 응치 아니하였다.
 
169
집안에서 무당 판수 불러, 경 읽고 푸닥거리하는 것을 질색으로 싫어하고 금하였다.
 
170
이러한 세째 외숙이 허황하고 사위스런 잡도 동학에 투신을 하였다니 모를 일이었다.
 
171
혹시 내가 동학이라는 것을 잘 모를 것이나 아닌가. 동학이란 그런 허랑하고 사위스런 잡도가 아니라, 외숙 같은 사람도 흔연히 거기에 참예를 하기에 족할 만한, 참되고도 정대한 무엇이 있는 것이나 아닌가 하는 생각도 선용은 하여보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172
선용은, 그렇다면 내 며칠 기다려서라도 외숙을 한번 만나 자상한 이야기를 좀 들어보리라 하였다.
 
173
재춘은 나간 지 열흘이 넘는다는 사람이, 그 뒤에도 삼사 일이나 있다 보름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174
밤 조용한 틈을 타 재춘이 혼자 거처하는 그의 집 사랑에서 단둘이 만났다.
 
175
처음에는 실학에 대한 이야기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재춘은 전에도 선용이 온다치면, 데리고 앉아 실학 이야기를 하기를 좋아하였다. 실학의 내력도 이야기하고 실학파 사람들의 인물도 논하고, 실학의 저서(著書)를 내어놓고 내용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그리고 이날 밤은 박제가의 『 북학의(北學議) 』 를 가지고 이야기하였다.
 
176
농기육칙(農器六則)이라는 대문을 이야기하고 난 끝이었다.
 
177
"그럼 아저씨는 인제 오라잖아 양주목사나 남원부사루 도임하시면 지끔이 『북학의』에 있는 대루 백성들한테 가르쳐서 농사를 짓두룩 하시겠군요?"
 
178
선용이 싱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물었다.
 
179
"무어? 양주목사는 무어며 남원부사는 다 무어야?"
 
180
재춘은 그러면서 선용을 뻐언히 건너다 본다. 그러다 이윽고 눈치를 채고는 피식 웃더니
 
181
"나 동학한다구 할머니께서 널 데리고 앉어 또 그 걱정하시던 게로구나?"
 
182
"아뭏든 동학이 수히 난리를 한바탕 꾸밀테라구요?"
 
183
"걸 내가 어떻게 아느냐?"
 
184
"그리구 동학꾼은 총알이 몸에 들오지 않는다구요?"
 
185
"누가 그런 소릴 하드냐?"
 
186
"강원돈가 거기선 시방 동학 난리가 여러 고을서 났는데, 관병이 몇 천명씩 연해 내려가 접전을 해두 번번이 패하고 한다면서요? 그게 다아 동학꾼들은 암만 총을 맞아두 총알이 몸에 들어가질 아니해 그런다구요?"
 
187
"이애 선용아!"
 
188
"네?"
 
189
"대체 동학꾼이 몸에 총알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동학꾼 단 한 명이면 일 다 될 거 가지구, 무엇하자구 수백 명씩 수천 명씩 들구 일어서서 요란한 난리를 꾸미느냐? 몸에 총알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총을 맞어두 죽을 리 없을 테지. 총 맞어 아니 죽는 사람이면 창이나 칼에두 아니 죽을 테지. 그러니깐 동학꾼 단 한 명만 나서면 관병은 만 명두 더 물리칠 수가 있을 게 아니냐? 동학이 정말로 들고 일어서서 큰 난리를 꾸미게 되는지 어쩐지 그건 나도 모르겠다만, 가사 그런다고 하면 목적이 다른 게 아니겠지. 조정에는 불량한 권신이 짜고 들앉어 정사와 백성을 농락허구, 밖으로는 외국이 군사를 함부로 거느리고 들어와 우리 국토를 엿보고…… 그래, 나라가 조모간에 망할 지경이니 그런 불량한 무리를 베히고 외국 군사를 물리치고 해서 나라를 바로 잡고, 좋은 정사를 베풀어 백성이 편안히 살게 하고…… 이런 뜻으로 난리를 일으킨다면 일으키는 것이겠지. 그렇지만 글쎄, 동학꾼이 총에 맞어두 아니 죽는 재주가 있다면야 구태라 온 팔도가 수천 명 수만 명이 와아 떠들구 일어설 것이 무엇 있느냐? 동학꾼 아무나 한 사람이 칼이나 한 자루 짊어지구 서울루 가서 조정의 악신 놈을 차례로 목베구, 외국 군사는 우두머리 가는 놈만 몇씩 목을 베면 병졸들은 절루 허터져 달아날 것, 그 다음 어진 사람들이 조정에 들어가 어진 정사하구, 그럼 일 다 되는 거 아냐?"
 
190
"그러니깐 아저씨 말씀은 동학꾼이 몸에 총알이 들어오지 않는닷 소리는 괸헌 낭설이다 이 말씀이시겠군요?"
 
191
"무지한 사람들이 하는 소리지."
 
192
"그것두 그렇거니와, 동학이 천하를 얻는 날이면 양주목사나 남원부사 하나는 받아논 밥상이라구 제마다 바라구 있나 보든데요?"
 
193
"동학꾼마다 양주목사니 남원부사니 허구, 고을살이 하나씩 시켜 주자면 조선 땅이 지끔보다 천 갑절 만 갑절 더 커두 모자라겠다."
 
194
"그럼, 나중 가서 또 쌈나겠군요? 제마다 양주목사허구, 남원부사허구 할 양으루."
 
195
"지방 수령(守令)들이 불의한 짓을 해서 재물을 모으구, 호강으루 살구 하니깐 그것이 부러워서 양주목사를 바라구, 남원부사를 바라느라구 동학을 하는 사람이야 어디 참말 동학꾼이드냐 동학이 천하를 얻어 동학꾼이 세상을 다스리는 날에두 시방처럼 지체를 가진 자가 사욕으로 권세를 부리구, 불의한 짓을 한다면야 일껀 나라를 바루 잡고 백성을 건지자고 난리를 일으킨 보람이 어딨겠느냐?"
 
196
선용은 그만하면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197
그렇다면 동학도 무던한 거라고, 노상 괄시할 것은 아닐까 보다고 선용은 속으로 생각하였다.
【원문】4. 마주걸이 삽화(揷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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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만식(蔡萬植) [저자]
 
  1948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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