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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랑사 (玉娘祠) ◈
◇ 5. 성은(聖恩)이 금수(禽獸)에 미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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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
채만식
1
玉娘祠[옥랑사]
 
2
5. 성은(聖恩)이 금수(禽獸)에 미치다
 
 
3
임오군란(壬午軍亂)에 위태한 목숨을 피하여 장호원(長湖院)으로 가 민응식(閔應植)의 집에 몸을 숨기고, 새숨을 쉬던 민비(閔妃)는 요행히 청국이 출병을 하여 어엿이 군사적 보호정치를 베푸는 덕분에, 더우기 대원군(大院君)을 붙들어 천진(天津)으로 데려다가 보정(保定)에다 감금을 하여 주는 덕분에, 민비는 도로 다시 세상을 만나 팔월 초하룻날 청국 군대 일중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요란스런 거둥 행차로 다시금 서울로 돌아왔다. 그 환궁 행차 일행 가운데 일찌기 민비의 측근에서 보지 못하던, 그리고 인물이 절묘한 젊은 계집 하나가 섞여 있었다.
 
4
민응식의 집에 숨어 앉아 불안코 울적한 날을 보내던 민비는 마침 좋은 말동무 하나가 생기었다. 김창렬(金昌烈)이라고 하는 동네의 무당이었다.
 
5
무당 김창렬은 인물이 똑 떨어지게 잘 생겼었다. 말솜씨가 능란하였다. 태도는 공순하고 은근하였다. 그런데다 점을 치라고 한다치면 지나간 일을 으수하게 알아맞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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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시 무당 판수는 좋아하는 민비겠다, 이쁘게 생긴 계집이 능란한 말솜씨와 은근한 태도로 살뜰히 위로를 하고 하겠다, 함빡 궐녀가 눈에 들었다.
 
7
그러자 하루는 궐녀가 한 점괘를 얻었다. 민비가 팔월 초생이면 어김없이 환궁을 하리라는 것이었다.
 
8
점이 영하였던지, 어쩌다 올바로 맞았던지, 아뭏든 궐녀가 알아맞힌 대로 팔월 바로 초하룻날 민비는 환궁을 하게 되었었다. 민비의 궐녀에 대한 신뢰와 총애는 더욱 두터워지게 되었다.
 
9
임오 이후, 갑신정변(甲申政變)을 거쳐 경인(庚寅)·신묘(辛卯)에 이르기까지 근 십 년, 궁정을 무당과 굿판으로 꾸미고 온갖 잡되고 사위스런 놀이의 구렁을 만들었으며, 거기에 물쓰듯 쓰이는 엄청난 비용을 왕과 조정으로 하여금 어엿이 벼슬을 팔아 충당케 하였으며, 인하여는 그것이 기우는 이조(李朝)의 국운에 한 채찍을 더한 바가 되었고, 그런 장본인이야말로 장호원의 무당 김창렬이요, 나중엔 생신(生神)으로 모시어 산사당(生祠堂)까지 지은 진령군(眞靈君) 바로 그였었다.
 
10
갑신정변이 개화당의 삼일천하로 끝을 막자, 정권은 또다시 사대당 민씨네 일파의 수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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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국과 일본은 천진조약(天津條約)을 맺어, 다같이 조선으로부터 군사를 물려가고 조선으로부터 잠시 손을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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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국과 일본이 각기 군대를 보내어 가지가지로 간섭을 하고 하던 압박이 일시에 풀리자, 한국 조정은 그만 어깨가 가쁜하고, 긴 장마 끝에 햇빛을 본 것처럼 명랑하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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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은 나의 수중으로 돌아왔어, 개화당의 무리들은 죄다 일본으로 도망을 가고 없어, 외국의 압박은 풀리어, 보수당의 민씨네들은 활개를 치면서 하고 싶은 노릇 다 할 수가 있었다.
 
14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두 번 변에 민씨네들은 미상불 많은 피를 흘리었다. 민겸호(閔謙鎬)는 임오군란의 난군에게 죽었다. 민태호(閔台鎬)는 갑신정변에 죽었다. 민승호(閔升鎬)는 대원군이 시골 어떤 수령의 선사처럼 보낸 화약 궤짝이 폭발되어 죽었다. 민비가 죽을 고패를 두 번이나 치른 것은 물론 이었다.
 
15
민씨 일문에서는 흘린 피의 값을 받아내었다. 임오군란에 죽은 민겸호의 아들 민영환(閔泳煥), 갑신정변에 죽은 민태호의 아들 민영익(閔泳翊), 대원군이 화약 궤짝으로 죽인 민승호의 아들 민영달(閔泳達), 그리고 민비의 피난하였을 때 보호자 민응식(閔應植), 이들을 중심으로 갑신정변 후의 새 정부는 조직이 된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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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씨네 세력의 총수는 물론 민비였다.
 
17
민비는 조정을 그들 외척으로 하여금 빈틈없이 판을 짜게 하여 놓고는, 스스로는 내전에 앉아서 대두리만 지휘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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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은 그렇게 해서 안심이 되겠다, 뒷일 별로이 근심없겠다, 민비는 궁중에서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면서 지낼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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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같이 진령군을 시켜 거판지게 차려놓고 굿을 하였다. 춤추고, 노래하고, 마시고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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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이 멀다 하고 금강산에다, 묘향산에다 산제(山祭)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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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굿하고, 산제 올리고 하는 것이 모두가 세력과 복록이 만년토록 꺾임이 없어지이다 하는 것이었다. 임오군란, 갑신정변, 생각만 하여도 소름이 끼쳤다. 꿈에라도 두번 다시 볼까 무서운 재앙이었다. 부디 이런 재앙이 다시는 없도록 하여 줍시사 하는 축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굿하고, 제 지내고 하여 축원을 올리면 재앙은 오지 아니하고, 권세와 복은 길이길이 누릴 수가 있는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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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백은 무당 진령군이 주재하였다.
 
23
민비는, 진령군의 영험으로 하면 재앙을 물리치고 권세와 복록을 길이 누릴 소원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으로 믿었다. 따라서 나와 나의 종문의 길흉화복은 오로지 진령군에게 매여 있는 것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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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령군의 세력은 솟아 오르는 아침 해와도 같았다. 약간 세력이 있다는 조정의 현직(顯職)이나 도백(道伯)이 진령군의 말 한마디로 파편이 되는 수가 허다하였다. 원이나 목사를 한 자리 얻어 하려고 줄을 넣고 뇌물을 쓰면서, 한낱 무당 계집 앞에 아첨을 마지 아니하는 불알 달린 사나이가 얼마든지 있었다.
 
25
이유인(李裕寅)은 진령군의 충졸로서 좋은 표본이었다. 무당 김창렬에게 진령군이라는 존호(尊號)를 내릴 건의를 한 것도 이유인이고, 진령군의 산사당을 짓게 한 것도 이유인이었다. 덕분에 발신을 하여, 후일 법부 대신(法部大臣)까지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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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조정은 진령군의 뒤치다꺼리를 하기에 허파에서 바람이 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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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까지는 세도 대신들이 은밀히 하노라고 하던, 벼슬팔기를 인제는 왕이 손수, 그리고 드러내놓고 하게 되었다.
 
28
"김아무가 오만 냥을 바치고 남원부사를 하겠다고 합니다."
 
29
대신 이아무가 왕한테 이렇게 품을 하면, 왕은 두말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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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냐, 그래라."
 
31
또, 대신 박아무가 들어와서
 
32
"송아무가 육만 냥을 바치고 순창군수를 하겠다고 합니다."
 
33
하면, 왕은 역시 한마디로
 
34
"오냐, 그래라."
 
35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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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그러나 단순한 편이었다.
 
37
대신 이아무가, 오만 냥에 김아무를 남원부사에 천거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다른 대신 민아무는 부리나케 대궐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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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무가 남원부사를 소원합니다."
 
39
"남원부사는 대신 이아무의 천거가 있어, 김아무로 벌써 작정이 되었다."
 
40
왕의 대답이요, 대신 민아무는 묻는다.
 
41
"그 김아무는 얼마를 바치기로 하였읍니까?"
 
42
"오만 냥을 바치기로 하였다."
 
43
"강아무는 팔만 냥을 바친다고 합니다. 이왕이면 삼만 냥이나 더 바치는 강아무에게 주시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44
"그러면 강아무에게 팔만 냥을 받고, 남원부사를 주게 하여라."
 
45
대궐을 물러나오는 대신 민아무는 즉시 강아무를 불러, 상감께서 너를 남원부사를 시키신다는 어명이 내렸으니, 십만 냥을 바쳐라 한다.
 
46
강아무는 십만 냥을 선뜻 바친다.
 
47
강아무는 진작부터 대신 민아무에게 청을 하여, 벼슬살 주선을 하던 터이라면 물론 말할 것도 없겠지만, 도무지 벼슬할 생각을 한 적이 없었고, 따라서 주선을 한 일이 없던 사람일지라도, 그는 왕명이요 세도 재상의 명령이니 거역할 길이 없었다. 울며 겨자먹기로, 십만 냥 져다 바치고, 억지엣 남원 부사 도임을 한다. 대신 민아무는 십만 냥 받아, 구문 이만 냥을 따먹고, 팔만 냥은 대궐로 들여보낸다.
 
48
이 대신 민아무는 거기에 차차로 맛을 들여 사람을 놓아 시골 부자를 적간하여다간, 그 재산 정도에 따라, 원도 시켜 주고, 목사도 시켜 주고, 무엇도 시켜주고 하면서, 구문 따먹기에 재미가 쏟아졌다.
 
49
하루는 대궐에 들어가
 
50
"전라도 보성(寶城) 땅에 '황발이’라는 자가 선공감역(繕工監役)을 하기가 소원이라 합니다."
 
51
하였다.
 
52
왕은 물었다.
 
53
"얼마나 내기로 하였느냐?"
 
54
"만 냥을 내기로 하였읍니다."
 
55
"그럼 만 냥을 받고, 황발이를 선공감역을 시켜라."
 
56
대신 민아무의 지시로 사람이 정사문적(政事文蹟)을 가지고, 전라도 보성 땅의 황발의 집을 찾아갔다.
 
57
주인을 만나자고 하니, 노파가 나왔다.
 
58
"바깥주인은 어데 갔소?"
 
59
"바깥주인은 없읍니다."
 
60
"없다니, 출입을 했단 말이요?"
 
61
"옛날에 죽고, 우리 집은 과부집이랍니다."
 
62
"그럼, 황발이는 누구요?"
 
63
"우리 집 개랍니다."
 
64
"무엇이 어째? 황발이가 개라구?"
 
65
궐은 뒤로 벌떡 자빠질 뻔하다가, 재우쳐 묻는다.
 
66
"황발이가 이 집 주인이 아니고, 정녕 개요?"
 
67
"우리 집에 흰 개 한 마리가 있는데, 네 발에 가 누른 털이 나서, 황발이 황발이 하고 부르고 동네 사람들은 우리 집을 황발네집 합너이다. 그래, 속을 모르는 타관 손님은 황발이가 이 집 주인인 줄 알고, 더러 실수를 하기는 하지요. 그래도 정히 의심스럽거든, 보여 드리지요."
 
68
노파는 안으로 대고
 
69
"황발아!"
 
70
하고 부른다.
 
71
부르는 소리에 응하여 과연 안으로부터, 발에 누른 털이 난 흰 개 한 마리가 꼬리를 치면서 달려나온다.
 
72
황발이가 사람이 아니라 개요, 개는 말고 개보다 더 못한 것이라 하더라도, 한번 그 황발이에게 감역 구실을 제수한다는 왕명이 있는 이상, 감히 거역할 도리가 없는 것으로 궐은 말을 하였다.
 
73
주인 노파는 성은(聖恩)이 지극하시어 은혜가 금수에게 까지 미치니, 이런 황감할 데가 있느냐고, 상납전(上納錢) 만 냥에 중비전(中費錢 : 手數料[수수료]) 3천 냥을 얹어, 궐자가 요구하는 대로 선뜻 내놓았다.
 
74
이날부터 개 황발이는 감투는 대가리에 맞지가 아니하여서 쓰지는 아니하였을 망정, 부르기는 황감역이라 하였다.
 
75
"황감역!"
 
76
집안에서 그렇게 부른다치면, 놈이
 
77
"거 누구?"
 
78
하는 듯이 꼬리를 치면서 달려나오고.
 
79
동네 사람들은 황발네집 황발네집 하던 것을, 황감역집 황감역집 하고 부르고.
 
80
그리고 개 황발이가 바친 일만 삼천 냥은 심부름 온 궐자가 한 이천 냥 따먹고, 일만 일천 냥은 대신 민아무에게 가져다 바치고, 대신 민아무는 한 삼천 냥 따먹고서 팔천 냥을 궁중에 바치고 한 것은 물론이었다. 그 팔천 냥은 민비의 진령군이, 굿하고 제 지내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면서 질탕히 노는 비발의 일부에 충당이 된 것도 또한 물론이었다.
 
81
그러하여 그것은 마치, 어떤 사가(私家)의 허랑하고 요망한 계집이, 남편의 벌어들이는 재물을 가지고, 일야로 무당 판수 사귀어 굿하고 무꾸리 하기에 낭비를 하고, 그것이 차차로 도에 넘치어, 용이 달리게 되면 남편을 볶아, 남편으로 하여금 필경엔 불의한 재물에 손을 대게 함으로써, 몸에는 죄를 쓰고, 집안은 망하고 하는 것과 흡사 같은 것이 있었다.
 
82
고부현감(古阜縣監) 조병갑(趙秉甲)은 성이 조가니, 막상 황발이 황감역은 아니었을 것이다. 일찌기 강아무가 꿈에도 생각지 아니하였던 남원부사를 대신 민아무의 주선으로 십만 냥 바치고 억지로 사서 하여 오듯이, 조병갑의 고부현감도 그런 억지엣 현감이었던지 혹시 몰랐다.
 
83
혹은 제가 수령을 한 자리 사고 싶어서 사가지고 온 것인지도 몰랐다.
 
84
그러나, 내력이야 어떻게 된 내력이었던, 그가 현감을 하는 데에 적지 아니한 밑천을 들였을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85
개 황발이도 감역 한번 하기에 일만 삼천 냥이나 돈을 나라에 바치었거든, 하물며 사람으로, 더구나 작을 망정이라도 한 고을의 현감을 하는데 공짜로 하였대서야 사람 체면에 벗은 짓일 것이었다.
 
86
들인 밑천을 뽑고 싶은 것이 사람의 상정이었다. 조병갑도 들인 밑천을 뽑아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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뽑는 데는 들인 밑천만 뽑는 어리석은 사람은 드물었다. 들인 밑천의 열 곱절이고 스무 곱절이고를 뽑아내야 하였다. 그래야만, 밑천을 들여 현감자리를 산(장사를 시작한) 보람이 있는 것이었었다.
 
88
역대의 현감이 와락 그다지 청렴한 바는 아니었으되, 조병갑은 토색질이 유난히 심각하였다. 고부란, 본시 작은 고을이어서 긁는다고 하여도 우나게 많이 나오는 것이 적은데, 조병갑의 욕심은 남달리 컸던 관계였을는지도 모른다.
 
89
궁리궁리한 끝에 조병갑은 만석보(萬石洑)라는 보(洑 : 貯水池[저수지])의 수세를, 그 해치를 다 받아들였는데, 시침을 뚝 따고 백성더러 수세를 바치라 하였다.
 
90
지나간 무자년 전후로부터 시작하여, 자주 흉년은 들겠다, 각항 물음새는 많겠다, 오늘은 원이 빼앗아 가는가 하면 내일은 도적이 들고, 모레는 토호에게 붙들려 가고, 그리하여 가뜩이나 살길이 없는 백성들 더러, 한번 문수세를 또 다시 물라 하니, 딱하고 억울할 도리가 없었다.
 
91
그대로 당할 수가 없다 하여, 백성들이 공론을 하여 가지고 대표를 뽑아 전주 감영으로 보내어 감사 김문현(金文鉉)에게 원정을 하였다.
 
92
소식을 들은 조병갑은 수도자들을 붙잡아다 무서운 매질을 한 후에 옥에 가두고 하였다.
 
93
참고 참던 백성들은 필경 들고 일어서서 동헌으로 달려들었다.
 
94
조병갑은 도망을 빼고.
 
95
전주 감영으로부터 안핵사(按覈使) 이용태(李容泰)가 대포(大砲) 한 채에다, 병정 천 명을 거느리고 고부로 달려들었다.
 
96
고부 일판은 이용태의 군사에게 짓밟혀 소(沼)가 되어 가려고 하였다.
 
97
여기서 전봉준(全琫準)이 불러 모은 일단의 동학군과 이용태의 관군은 충돌이 되었고, 그것이 곧 규모와 세력이 크기로, 조선의 역사에서는 일찍이 보지 못하였다고 일컫는 백성의 난리(民衆蜂起[민중봉기]), 갑오 동학란(甲午東學亂) 이었다.
 
 
98
전봉준은 우선 백산(白山)을 엄습하였다.
 
99
백산은 부안의 해변이 가까운 곳으로 때마침 서울로 실어 올려갈 세미(貢米) 사천 석이 들여쌓여 있었다.
 
100
전봉준은 백산을 엄습하여 사천 석 쌀을 빼앗아, 주린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101
백성들은 춤을 추고 기뻐하면서 동학군을 추앙하고 전봉준을 칭찬하였다.
 
102
너른 마당 여기저기에다 멍석을 여러 닢씩 연대어 펴고, 쌀섬을 툭툭 뜯어 몇 섬씩이고 쏟아놓았다. 옥같이 흰 쌀이었다. 흐벅지게도 많은 쌀이었다.
 
103
쌀…… 보기만 하여도 반가운 물건이었다.
 
104
이른 봄부터 시작하여 파종을 하고, 논을 갈고, 모를 심고. 더운 여름 폭양 아래서 비지땀 흘려가면서, 세 번 네 번 매 가꾸고. 그러면서 날이 가물면 가물어 걱정, 비가 많이 오면 비가 많이 와 걱정. 그러는 동안, 요행 무사히 가을이 되어 벼가 익고. 익은 벼를 거둬들여 타작하고. 매에 갈아, 절구에 찧고…… 하여서 비로소 얻은 쌀이었다.
 
105
얼마나 신고를 하였던고. 참으로 쌀알 하나하나에 땀과 정성이 맺힌 그 쌀이었다.
 
106
그런 쌀을 늙은 부모, 젊은 처자식과 함께, 부르게 마음놓고 먹어 보질 못하고서, 세미야 무엇이야 하여서 빼앗긴 쌀이었다. 빼앗기고는 굶주리는 쌀이었다.
 
107
그 쌀이 시방, 눈앞에서 수북수북이 나와 쌓여 있는 것이었다.
 
108
생각하면, 일변 야속도 하거니와 그러나 역시 반가운 쌀이었다.
 
109
옹퉁이를 가진 여인, 멱서리를 지게에 진 농군, 소쿠리를 옆에 낀 노파, 자루를 든 어린아이…… 수백 명 주린 군중이 동학군의 지휘를 받으며, 하나씩 하나씩 쏟아논 쌀더미 앞으로 나선다.
 
110
말을 든 동학군이 묻는다.
 
111
"식구가 몇이지요?"
 
112
"세 식구랍니다."
 
113
대답하는 여인의 옹퉁이에다 서 말을 푹푹 되어 부어 주면서
 
114
"자, 얼른 가지구 가 밥 지어 배불리 자시요. 또 그 다음."
 
115
이번에는 농군이 멱서리를 들이댄다.
 
116
"몇 식구지?"
 
117
"다섯 식구요."
 
118
"자아 닷 말. 얼른 가 마누라더러 밥 지으라구 해서 어린 놈들 허구 배불리 먹어요, 그리구 그 다음 또."
 
119
노파가 소쿠리를 들이대면서 걱정이다.
 
120
"우리는 일곱 식구나 되는데, 그릇이 이래 어떡헌담."
 
121
"우선 조금만 가지구 가 밥 지어 자시구, 아들더러 지게에다 멱서리 얹어 가지구 오라구 일르시우."
 
122
백성들의 동학군과 전봉준에 대한 추앙과 칭송은 자못 요란한 것이 있었다.
 
123
동학군으로 인하여 인제야 살 세상이 돌아온 것인가보다 하였다.
 
124
이로 인하여 동학군의 기세는 부쩍 높아졌다.
 
125
백성들이 너도 나도, 대창과 몽둥이와 칼 같은 것을 들고 다투어 동학군에 가담을 하였다.
 
 
126
갑오년(高宗[고종] 31년, 西紀[서기] 1894년) 이월 그믐날이었다.
 
127
이용태의 거느린 관군은 가정(佳井) 서남쪽 황토현(黃土峴)에 진을 치고, 동학군은 가정 동쪽에 진을 쳐, 산골짝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였다.
 
128
관군은 이날, 각지의 등짐장수(負商[부상]패)를 긁어모아 자칭 삼천의 병세라고 하였으나, 실상은 천 명이 조금 넘었을 뿐이었다.
 
129
관군에서는 동학군을 하잘 것 없는 것으로 넘보았다.
 
130
"깐놈들, 제깐놈들이 언제 훈련을 받아 보았나, 총이 총다운게 있으며, 있으면 또 쏠 줄은 아나, 농사일하다 말구 우우 몰려든 붉은다리들이, 접전을 할 게 어딨드람. 우리 대환고(大砲) 한 방이면 놈들이 경풍을 해 달아나구 말걸."
 
131
이렇게 관군 병정들은 동학군을 넘보았고, 대장 이용태 역시 같은 생각이어서 상하가 한가지로 방심을 하였다.
 
132
관군은 밤에 야영(夜營)을 하는데, 모토불을 낮같이 밝게 피우고, 그 앞에서 술 마시고 춤추고 노래 부르고 하면서 질탕하게 놀았다.
 
133
동학군은 미상불 오합지졸(烏合之卒)이었다. 그야말로 언제 훈련을 받았을까, 총쏘기와 칼쓰기를 배웠을까. 괭이와 호미를 쥐던 그 사람들에 그 솜씨였지 별수가 없었다.
 
134
병기(兵器)로 말하더라도, 총은 백 명에 한 자루도 어려웠다. 대개가 창과 칼이요, 그 밖에 몽둥이, 도리깨, 쇠스랑 이런 것들이 그들의 병기의 태반이었다.
 
135
수효는 많아, 오천 명이 넘는다고 하지만, 그렇듯 훈련도 없고 병기도 변변치 못하고 한 군사를 가지고, 비록 때의 조선 병정이라고 하여도 하여커나 훈련이란 것을 받았어, 저마다 총은 지녔어, 겸해서 대포까지 있어, 한, 정규군(正規軍) 명색의 관병을 맞이하여, 대낮에 그리고 정도로 결전을 하게 된다면, 대단히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136
전봉준은 나서던 길로 앞이 칵 막힌 형편이었다.
 
137
전봉준은 한낱 백면서생이었다. 약간 병서(兵書) 같은 것을 보았다고는 하지만, 실전을 치러 본 경험이 없기로는 거기 진중에 허다히 있는 동학군 누구 한 사람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138
싸움을 하면, 싸움이 하여지는 것이거니만 하였던 것인데, 막상 진(陣)에 서서 당하자 하니 이런 난관이었다. 난관이로되 당장 성패(成敗)가 나고마는 그 난관이었다.
 
139
전봉준은 초경이 되도록 고옴곰 궁리의 근심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탐보가 와서 관군진의 형편을 보하였다.
 
140
전봉준은 선뜻 일어나 막원(幕員) 몇 사람을 데리고 나가서 관군진을 탐색하여 보았다. 결과, 탐보가 보한 대로 관군이 방심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임을 알았다.
 
141
결단한 바 있어 가지고 진중으로 돌아온 전봉준은 밤 삼경을 기다려, 정예로 뽑은 삼백 명을 거느리고 몸소 선두가 되어 관병의 본진을 엄습하였다.
 
142
고단하여 코 골며 잠들었기 아니면 술이 취해 곤드레 만드레하던 관병들은, 미처 내던진 총칼을 집어 한번 저항을 꾀할 겨를도 없이, 전진이 그대로 야습군의 엄습에 짓밟혀 흩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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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야습전에서 관군은 팔백 명이 상하고 죽고 하였다. 대포 한 채, 총 육백 자루에, 많은 창과 칼과 그리고 군량 사백 석과, 이렇게를 내버리고 관병은 정읍(井邑) 쪽으로 달리었다.
 
144
전봉준은 군량은 풀어서 근처의 백성을 불러 기민(饑民)을 주고, 병기는 거두어서 군사들에게 적당히 노나 주었다.
 
145
이 첫진(初陣)의 승전은 관병이나 한 천여 명 남짓한 것을 무찔렀다는 그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큰 효과를 스스로 낳게 되었었다.
 
146
우선, 동학군 군사들에게 자신과 용기를 주었다. 싸우면 이기는 것이라는 자신이 생기고, 따라서 앞으로 오는 싸움에 그들은 실력 이상의 용기를 가질 수가 있었다.
 
147
그 다음 총 ——— 화기(火器)가 턱없이 부족한 동학군은, 대포 한 채에다 육백 자루의 총을 얻음으로써 부쩍 그 실력이 늘었다.
 
148
이와 같이 동학군이 자신과 용기가 생긴 반대로 관군편에서는 동학군을 실력 이상의 어떤 초인간적(超人間的)인 힘이 있는 것으로 알고, 동학군 이라면 무슨 신병(神兵)인 것처럼 무서워하는 경향이 생기었다.
 
149
"황토현 접전에, 동학군은 단 백 병으로 이용태의 대군 삼천 명을 전멸시켰다드라."
 
150
"동학군은 총을 맞아도 죽지 않는다드라."
 
151
"동학군은 관군의 총에서 물이 나게 하는 주문을 외운다드라."
 
152
"동학군은 칼춤을 추면, 검광(劍光)에 어리어 사람이 보이지 않는 다드라."
 
153
"대장 전봉준은 제갈양 같은 도술과 장비 같은 용력을 겸한 장수라드라."
 
154
관군에게 커다란 공포관념을 주고라야만, 이 풍문은 동학군에게 수만의 날카로운 병기와 훈련있고 용맹한 군사를 보태어 주니 보다도 더한 힘을 끼친 것이 있었다.
 
155
무주(茂州)를 비롯하여 인읍 각지의 동학이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연속 전봉준의 깃발 아래로 모였다. 동시에 다른 여러 고을에서도 각기 한 고을 한 고을을 중심으로 난을 일으켰다.
 
156
이것은 역시 황토현 접전의 승리가 가져다 준 결과의 하나였었다.
 
157
그러므로 만일 황토현 접전에 그 조그마한 승리가 없었다고 한다면, 고부의 동학란은 강원도를 비롯하여 이곳저곳에서 분산적으로 일어 분산적으로 전투를 계속하다 말다 하고 있는 다른 지방의 동학란과 같이, 한낱 지방적이요 분산적인 것에 그치고 말았기가 쉬웠지, 막상 역사에 기록이 된 그러한 세력과 규모가 큰 '갑오 동학란’에 까지 발전은 되기가 어려웠을 것이 아니었는지. 물론 갑오동란다운 민중봉기가 일만한 역사적 사회적 근거와 사태가 존재하였던 것은 사실이겠지만, 적어도 그 것이 갑오년에 또 전봉준의 지도로 그렇듯 진행과 발전은 미처 되지를 못하였을는지도 몰랐다. 전봉준의 시초부터의 포부와 계획은 비록 어떠하였던 간에…… 황토현 승전이 있은 후 정읍으로 군사를 나아가기 전, 전봉준의 성언사사(聲言四事)라는 것이 있었다.
 
 
158
1.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재물을 빼앗지 않는다.
159
2. 충효양전, 제세안민(忠孝兩全 濟世安民)
160
3. 이왜(夷倭 : 일본)를 쫓고, 성도(聖道)를 맑게 한다.
161
4. 군사를 몰아 서울로 들어가, 양반과 권신(權臣)을 다 멸하고, 크게 강기(綱紀)를 떨치며, 명분(名分)을 세워서 성훈(聖訓)을 좇는다.
 
 
162
이 네째 조목의 군사를 몰아 서울로 들어가……라는 것을 보아도, 그의 넘치는 자신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163
고시문(告示文)과 창의문(倡義文)을 써서 각지에 붙이게 하였다.
 
164
고시문은 내용이 대강 이러하였다.
 
 
165
"성군이 위에 계시되, 생민은 도탄에 빠졌도다. 민폐와 아전의 포흠은 탐관(貪官)으로 말미암고, 탐관이 생김은 집권의 탐욕으로 말미암는도다. 내 이제, 백성을 건지고 나라를 위하자 함이거늘, 어찌 아전과 백성을 구별함이 있으리요. 근본을 찾으면 아전도 또한 백성이니라. 각 공문부의 아전의 포흠과 민폐의 조건을 일체로 와서 보하라. 이를 분별할 도리가 있으리라.
 
166
마땅히 장래에 개혁할 자를 들면 아래와 같도다.
 
167
1. 전운영(戰運營)이 아전과 백성에게 폐해가 있는 것.
168
2. 균전관(均田官)의 폐를 버릴 것과, 또는 폐가 생기는 것.
169
3. 각 시정의 분전수세(分錢收稅)하는 것.
170
4. 식렴에 대한 시세(市稅).
171
5. 외국 잠상(潛商)의 물가를 올리는 것.
172
6. 각항 물건에 대하여 도가세(都賣稅)를 받는 것.
173
7. 백지(白地)에 세를 물려, 송전(松田)에 묵게 하는 것.
 
174
이 밖에도 폐를 다 기록할 바이 없도다.
 
175
우리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민(四民)은 동심협력하여 위로 나라를 돕고, 아래로 죽음에 잦은 생민을 편안케 함을 얻으면 어찌 다행치 아니하리요."
 
 
176
이 고시문에서 전봉준이 아전을 일반 백성과 한가지로 보며, 그들을 어루만진 것은 특별히 주목할 사실이었다.
 
177
그리고 또 창의문은 이러하였다.
 
 
178
"사람이 세상에 나 가장 귀한 소치는 인륜이 있음으로써로다. 군신부자는 인륜의 으뜸이니, 임군은 어질고, 신하는 바르고, 아비는 인자하고, 자식은 효도하고, 그런 연후에 나라를 이룩하고, 능히 무량한 복록을 누리는 것이로다. 이제 우리의 성주, 인효자애하시고 신명현량하시니, 정도의 신하 잘 그 총명을 도울지면, 요순의 덕화(德化)와 문경(文景)의 다스림을 바랄 수 있을지로다. 사람의 신하된 자 나라에 보답하기를 생각지 않고, 부질없이 벼슬과 녹을 엿보며, 총명을 가리고 권세에 아첨하고, 충간(忠諫)하는 사람을 요망한 말이라 이르고, 정도의 사람을 불측한 무리라 이르는 도다. 안으로 보국(輔國)하는 길이 없고, 밖으로 백성을 괴롭히는 관원이 많아 민심은 날로 더욱 변하여, 들어서는 의지할 바 없으며, 나가서는 강토를 보전 할 방책이 없도다. 학정은 날로 더 하고 거리에 원성이 끊임이 없어, 군신의 의, 부자의 윤기, 상하의 분수 사라지고 남음이 없도다. 관자(管子)는 사유(四維 : 仁義禮智[인의예지])가 늦추어지면 나라가 망한다 일렀거니와, 금일의 형세 예보다 심함이 있는도다. 공경(公卿)을 비롯하여 수령 방백(守令方伯)에 이르기까지 나라의 위태함을 근심함이 없고, 부질없이 저의 집을 가멸케 할 뜻만 간절하여, 벼슬 뽑는 자리를 생화의 거리로 삼고, 과거의 마당을 상고의 바닥을 삼는도다. 허다한 세납은 국고로 바쳐짐이 없이 사장(私藏)에 들어가 쌓이고, 나라는 빚에 눌리되 갚을 뜻을 아니하는도다. 교사하고 음란함이 꺼릴 바를 모르고 팔도는 어육이요 만민을 도탄하며 수재(守宰)의 탐학이 비길 곳이 없도다. 이리하고서 어찌 백성이 곤궁치 아니 할까 본 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 근본이 쇠하면 나라 곧 망하는도다. 보국 안민의 길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당을 꾸미어 오직 구차한 생도를 꾀하기에 부질없이 녹위(祿位)를 훔치는 도다. 어찌 이치에 옳음이리요. 우리의 무리 비록 초야의 유민이라 할지라도, 임군의 땅을 밥 먹고, 임군의 옷을 옷 입고 하는 자, 나라의 위태함을 차마 좌시키 어려워, 팔도가 마음을 한가지로 하고, 억조가의를 같이하여, 이에 거의(擧義)의 기를 들되, 써 공사에 보답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기를 꾀하며 생사의 명세를 하는도다. 오늘의 광경이 놀라운 바 있음일지라도 부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각기 생업에 안신하고, 더불어 승평(昇平)의 일월을 축하하며, 다 함께 성화(聖化)를 입음을 얻을지면 천만행이리로다."
 
 
179
이 격문에서 특별히 주목이 되는 것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 근본이 쇠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대문이라 할 것이었다.
 
180
그리고, 격문과 고시문과 성언사사는 다 전봉준이 몸소 지은 것이었고, 미루어 그의 문필이 녹록치 아니하였음을 알 수가 있었다.
 
 
181
전봉준은 군사를 나아가 우선 정읍을 쳤다.
 
182
정읍은 전봉준의 동학군이 온다는 소리를 듣고 원은 자겁하여 도망을 하였다.
 
183
한 방의 총도 쏘지 아니하고 동학군은 정읍을 빼앗았다.
 
184
전봉준은 병기는 거두어 군사의 무장을 갖추고, 양식은 흩어 기민을 주었다.
 
185
전봉준은 배하의 군졸로 하여금 관아를 부수거나 불을 지르지 못하도록 하였다.
 
186
백성에게서는 닭 한 마리라도 약탈치 못하도록 엄히 영을 내렷다. 만약 범하는 군졸이 있으면 선 자리에서 총살의 극형으로써 처형을 하였다.
 
187
정읍에서 전봉준은 남쪽으로 향을 잡아, 고창(高敞)을 뺏고, 무장(茂長)을 뺏고, 그리도 나서 장성(長城)으로.
 
188
장성에서 다시 북으로 짓쳐 올라가 태인(泰仁)을 뺏은 후 금구(金溝)로.
 
189
금구는 전라감영 전주의 서쪽 관문이요, 부르면 들릴 지척의 상거였다.
 
190
전봉준의 동학군이 처음 오천의 군세를 가지고, 고부 황토현 첫진에서 승전을 한 후, 정읍으로 부터 시작하여 고창으로, 무장으로, 장성으로, 태인으로 이렇게 한 바퀴를 돌아 금구에 이르렀을 때에는 동학당원과 백성을 합하여 그 세가 삼만에 다다랐었다.
 
 
191
"敬天守心[경천수심]" (하늘을 받들고 본분을 지킨다.)
192
"輔國安民[보국안민]"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케 한다.)
193
"除暴救民[제폭구민]" (포학을 물리치고 백성을 건지자.)
194
"滅逐夷倭[멸축이왜]" (오랑캐 일본을 쫓아라.)
 
 
195
이런 기치가 하늘을 덮는, 삼만의 군졸이 굽이굽이 이십 리에 뻗쳐 고각을 울리면서 꿈틀거리고 나아가는 양은 거창스런 행군 그것 하나만으로도 일찌기 조선땅에서는 구경치 못하던 성사요 시끄러움이기에 넉넉한 것이 있었다.
 
196
금구, 다음은 물론 전주였다.
 
197
전라감사 김문현은 갈 곳 없는 춘풍 샌님이었다. 저의 다스리는 전라도 각 군이 동학군 천지가 되었어도 별로이 걱정하는 내색이 없고, 동학의 대군이 감영 전주로 쳐들어 온다고 하여도 역시 태평으로 앉아 술이나 먹고 하였다. 그러다 동학군이 마침내 전주성 성 밖에까지 몰려와서야 인궤(官印箱)와 함께 성을 동학군에게 내주고, 고부 황토현의 패장 이용태로 더불어 몸을 피하였다.
 
198
이리하여 전주마저 피 한 점 흘리지 않고 동학군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199
그동안 조정에서는 맨처음 고부에서 동학란이 일었을 때, 어윤중(魚允中)을 선무사(宣撫使)로 내려 보내어 말로써 진정을 시키려 하였고, 그 뒤에도 수차 선무사니 선유사니 하는 것을 연방 내려보냈으나 물론 아무 소득이 없었다.
 
200
그러던 중, 동학의 세는 날로 더 커가고 하여, 마침내 오월, 장위영(壯衛營) 점령관 홍계훈(洪啓薰)으로 호남초토사(湖南招討使)를 시켜, 병사 이문영(兵使 李文永), 대관 원세록(隊官 元世錄)과 함께 장위영 병정과 강화 병정을 합친 이천 명 군사를 주어 호남으로 내려 가게 하였다.
 
201
홍계훈의 관군이 수로로 좇아 내려와 금강 어귀 군산(群山)에 하륙한 것이 오월 그믐. 이때는 동학군은 벌써 남쪽으로 내려가, 고창 무장 등지에서 행동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202
홍계훈은 대관 원세록에게 군사 약간을 나눠 주어, 나주(羅州)로 보낸 후, 병사 이문영으로 하여금, 날래기로 이름난 강화 병정 사백 명과 본부 삼백명까지 칠백 명을 거느리고 급히 장성으로 가게 하였다.
 
203
나주는 진작에 동학군의 일대가 점령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전라우도(全羅南道)로 좇아 전라좌도(全羅北道)의 동학군과 연락을 맺는 요지였다.
 
204
관군은 이 목을 눌러놓고, 고창 무장에서 행동을 마치는 동학군의 주력 부대가 정녕 장성으로 나올 것이매, 이 장성에서 기다려 한싸움을 하자는 계획이었었다.
 
205
계획은 그러하였으나, 우선 나주로 간 대관 원세록이 동학군에게 전멸을 당하였고, 장성에서는 병사 이문영이 또한 동학군의 주력부대에게 역시 전멸을 당하여 버렸다.
 
206
홍계훈이 관군 주력을 몰아 장성으로 왔을 때에는, 그리하여 병사 이문영이 패하고 동학군은 북쪽으로 행동을 시작하여 장성은 텅 빈 뒤였었다.
 
207
관군은 동학군의 뒤를 쫓아 북쪽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한 걸음 앞선 동학군은 벌써 태인을 무찌르고 금구로 가고 없었다.
 
208
홍계훈은 아뿔사 전주가 위태하다고 군사를 재촉하여 전주로 직참 달렸으나, 달려가 보니 전주 성내에는 이미 동학군이 가득차 있었다.
 
209
관군과 동학군은 닥개비질을 하고 다니면서, 한바퀴 빙 돌아 결국 전주에서 서로 만난 셈이었다.
 
210
관군은 즉시 성을 치기 시작하였다.
 
211
동학군의 수효도 많거니와 저항이 자못 맹렬하여, 예사 성문으로 돌격을 한다거나 성으로 기어오른다거나 하는 방식으로는 도저히 가망이 없었다.
 
212
네 채의 대포를 늘어놓고, 성 안으로 대고 들이 쏘아대었다.
 
213
겨냥도 무엇도 없이, 성 안으로만 대고 육중한 대포 탄환을 사정없이 퍼부었다.
 
214
관군이 쏘는 대포 탄환은, 그런데 동학군의 진은 다 버리고 하필 왕조의 사당인 조경묘(肇慶廟)에 가 꿍꿍 떨어져 이를 무너뜨리고 불이 일고하였다.
 
215
전봉준은 급히 군사를 시켜 불을 잡으라 하였으나 필경 다 사르고 말았다.
 
216
그러더니 그 다음에는 태조(太祖)의 진영(眞影)을 모신 경기전(慶基殿)을 관군의 대포 탄환이란 놈이 날아와서 함부로 전각을 부수고 하였다.
 
217
보를 들은 전봉준은 잠깐 침울하더니, 즉시 관군으로 군사(軍使)를 보내어 휴전을 청하였다.
 
218
관군이나 우리나 나라를 위하고 왕실(王室)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은 일반이다. 그런데 지금 관군에서 쏘는 대포가 왕실에 지중한 묘전을 부수고 있다. 우리는 차마 이것을 볼 수가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전주성으로부터 퇴각을 하겠노라…… 이것이 휴전의 이유였다.
 
219
관군대장 홍계훈으로는 이런 횡재가 없었다.
 
220
즉시 휴전의 약속은 이루어져 동학군은 전주성을 관군에게 비어 주고, 멀리 장성으로 퇴각을 하였다. 그것이 한참 더운 여름, 칠월 바로 초생이었다.
 
221
이 휴전조약에는 조약된 내용만 가지고 한다면, 동학군은 동학군대로 또한 대단히 유리한 것이 있었다.
 
222
조정은 동학과의 과거의 불화(不和)를 풀고, 동학은 서정쇄신에 협력할 것과, 횡포한 탐관오리며 불량한 유림이며 양반을 소탕할 것과, 그 밖에 반상의 구별을 폐하고, 토지제도를 개혁할 것 따위의 열두 가지 조목이 약속이 되어 있었다.
 
223
그리고 그것을 실행하기 위하여 전라좌우도(全羅左右道)의 각 고을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시하고, 민간에서 뽑은 사람으로서 집강 한 사람과 의사원(議事員) 몇 명을 두어 관(官)을 돕게 하기로 하였었다. 이를테면 일종의 자치 기관이었었다.
 
224
그러나 이것은 동학군으로 하여금, 하여커나 우선 전주성으로부터 물러가게 하자는 관군편의 임시방편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었었다.
 
225
그 증거로는 홍계훈은 그와 같은 조건으로 동학군과 휴전조약을 맺었다는 장계를 조정에 올린 것이 없고, 도리어 승전을 하여 전주성을 빼앗은 듯이 한 것으로 미루어 알 수가 있었다.
 
226
동학군은 물러가, 각기 고을의 수령과 상의하여 집강소를 세우는 운동을 하였었다.
 
227
그러나 그것은 대개가 흐지부지하고 말았다.
 
228
동학군 편에서 조경묘와 경기전이 부서지니, 우리는 왕실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에 차마 접전을 더 계속하고 있을 수가 없어 성을 비워놓고 물러가겠노라…… 이것은 결국 표면의 이유에 지나지 못하였다.
 
229
천하를 도모하자고 크게 소리치고 일어선 동학이었다. 이미 삼만의 무리가 모였고, 전주는 호남 제일성(湖南第一城), 대단히 중요한 근거지였다. 조경묘와 경기전 쯤 동학 자신의 큰 목적과 사명에다 대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230
그러하건만, 쉽사리 성을 비워주고 삼만의 군세가 만만하게 퇴각을 하는데 달리 중대한 이유가 있어야 하였다.
 
231
전주에는 삼만 명 군사를 오래도록 먹여낼 군량이 없었다. 앞으로 한 달을 지탱하기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 한 달간에 관군을 쳐 물리치고, 외처로 부터 넉넉한 군량을 들여온다면 이거니와, 만일 그러지 못하는 날이면 농성군은 자멸을 하는 판이었다.
 
232
확실한 소식을 들으면, 조정이 청국에다 청병을 하였다고 하였다. 임오군란 적에도 갑신년에도, 조정은 청국에다 청병을 하여 내란을 진정한 전감으로 미루어 족히 있음직한 노릇이었다.
 
233
청국이 조선에 출병을 하는 날이면, 천진조약에 좇아 일본도 또한 조선에 출병을 할 터이었다.
 
234
그렇게 되면, 동학은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히 하자던 노릇이 도리어 타국의 군대를 들어오게 하여 타국 군대로 하여금 국토를 짓밟고 백성을 괴롭히게 하고 하는, 반대의 결과를 끼쳐놓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우선 물러가 총창을 거두고, 형세 보아 의논을 고쳐 함만 같지 못하였다.
 
235
그럴 뿐만 아니라, 내일이라도 청병과 일병이 호남으로 몰려 내려오는 날이면, 병기와 훈련이 불비한 동학군은 정예한 그들 타국군대의 공격 앞에서 하잘 것 없이 전멸이 되고 말 것이었다.
 
236
어디로 생각하나, 지금에 전주성을 끝끝내 지키기를 고집함은 안팎으로 환을 장만하는 거조가 아닐 수 없었다.
 
237
미상불 조정에서는 원세개에게 청병을 교섭하고, 유월 삼일날 정식으로 정부의 공문을 내었다. 원세개는 이름은 청국의 조선사서(朝鮮使書)의 공사(公使)라는 것이었으나, 내용은 청국이 조선에 보낸 총독이었다.
 
238
이 조선정부의 청병 교섭은 원세개 자신이 꾸며낸 계략이었었다.
 
239
원세개는 조선에 동학란이 일고, 차차로 더 창궐하여 가되, 조선정부는 자력으로 능히 진압치 못하는 형편인 것을 보고는 바야흐로 때는 온 것이라 하였다.
 
240
일본과의 천진조약은 원세개로 하여금 조선을 쥐고 흔드는 데에 병력(兵力)의 이용을 막아버렸었다. 검객에게서 칼을 빼앗음과 일반이었다.
 
241
때마침 일본은 정당의 난립과 국론의 통일이 되지 못한 것으로 밖으로 대고 버틸 힘이 매우 약하여졌다.
 
242
지금에 한떼의 군대를 이끌어들여 우선 동학란을 진압하고, 인하여 조선의 내정을 지도 간섭하되, 필요에 따라선 왕을 대원군이나 누구로든 바꾸고…… 하게 되면 청국의 조선에 대한 실질적인 종주권(宗主權)의 실적이 이루어 지는 것이요, 갈데없이 조선은 청국의 속국인 것이 사실화하는 동시에 일본의 간섭과 발언을 틀어 막을 수가 있으리라는 것이었었다.
 
243
원세개는 내무부의 독판(內務部督辦)이요, 친군통위영의 통위사(親軍統衛營統衛使)요, 친군경리청의 경리사(親軍經理廳經理使)요 한, 당상 민영준(閔泳駿)을 넌지시 불러 조선정부로 하여금 청국에 원병을 청하는 운동을 일으키도록 달래었다.
 
244
민영준은 동학군의 난은 형세가 나날이 급하여 가겠다, 막아낼 힘은 없어 걱정이겠다, 한 판에 원세개의 훈수가 있고 한지라 선뜻 한마디로 응낙을 하였다.
 
245
호남초토사 홍계훈에게로 민영준의 내훈이 갔다. 동학의 세력이 심히 커 관병의 힘으로는 도저히 소탕할 가량이 없으니, 이 계제에 청국에 원병을 청하소서 하는 전보주청(電奏[전주])을 왕께 올리라는 것이었었다.
 
246
내훈대로 홍계훈의 전보주청이 왔다.
 
247
민영준은 홍계훈의 주청전보를 왕께 보인 후, 사세가 이러하니 청국의 원병을 빌어옴이 가한 것을 주장하였다.
 
248
왕은 청국이 만일 출병을 하면 일본도 따라서 출병을 할 것이니, 두 타국이나 타국 군대를 불러들여 부질없이 후환을 자초할 며리가 없는 것으로 듣지 아니하였다.
 
249
민영준은 원세계와의 언약이 있는지라 거듭 청병을 주장하였다.
 
250
왕은 하릴없이 오월 열이렛날 밤 은밀히 중신들을 불러 청병문제를 의논케 하였다.
 
251
정부의 요로대신들은 거개가 민씨네를 중심으로 한 사대당(事大黨)들이었다. 그들은 청국을 의지하여 청국의 세력 밑에서 저희네를 보전하는 데에는 아무 이의가 없었다.
 
252
그러나 그, 콧등이 새파란 어린 녀석 원세개의 교만과 방약무인한 태도, 대신들을 상노만큼도 못 여기어 중인의 앞에서 꾸짖기를 개 잡도리 하듯 하고, 심지어 얼굴에 침을 다 뱉기를 예사로 하는 원세개가 아니던가.
 
253
그리고 그의 음험한 술책.
 
254
만일 원세개에게 또다시 병력의 뒷심을 가지게 한다면, 그는 임오군란 이후에 부리던 그 온갖 행패를 또 다시 부리게 될 것이었다.
 
255
또 청국이 조선에다 출병을 하면, 일본도 천진조약을 핑계하여 저희도 출병을 할 것이었다.
 
256
깜찍하고도 사나운 왜인들. 이건 생각만 하여도 몸서리가 치었다. 더우기 일본의 병력이 조선에 들어오게 되면, 천하에 말 못할 개화당패의 세력이 묻어 들어와, 또다시 무슨 일을 저질러놀는지 모르는 것.
 
257
일껏 청국군사 일본군사 다 물러가 눌렸던 어깨가 거뜬하고, 개화당을 쫓고서 다시 천하를 차지하여 가지고 한 세상 마음 턱 놓고 살아가볼까 하던 것인데, 타국 병정을 또 다시 청해 들여야 하다니.
 
258
동학란이 물론 걱정스럽지 아니함은 아니었다.
 
259
버러지 같은 무리들이 언감히 난을 일으키어 양반계급에 반항을 하다니, 천참만륙을 하여도 아깝지 아니하였다.
 
260
그런 무리들을 청병 아냐 더한 것이라도 불러들여 깡그리 도륙을 시켜 마땅하였다.
 
261
그렇게 난을 평정시키는 것은 좋고 무방하나 그 뒤가 역시 거북스런 것이었었다.
 
262
이와 같이 그들이 선뜻 청국에 청병하기를 꺼리어 하는 것은 청국의 군대가 와서 주둔하고 있음으로 해서 저희네들이 그에 껴눌려 지기를 펴지 못할 것이 걱정스런 것이지, 결코 외국 군대의 총칼을 빌어 동족을 살육하며, 국토를 짓밟게 하는 것을 부끄러이 여긴다거나, 나라의 주권이 침해됨을 근심한다거나 하여서가 아님은 물론이었다.
 
263
이유는 여하튼, 그리하여 그들은 청국에 청병을 할 강단을 선뜻 내지 못 하는 형편이었다.
 
264
속은 들 그러하였지만, 그러나 잘못하다 원세개의 미움을 살 것이 두려워, 만좌의 대신들 중 누구 한 사람 감히 입을 열어 청병을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265
때의 영의정 심순택(領議政 沈舜澤)은 그 집안이 전대부터 대원군의 섭정 시절에 모진 냉대와 핍박을 받아 심히 불우한 가운데, 대원군에게 깊은 반감을 품은 집안이었다.
 
266
그러면서도 심순택은 한편으로는 민씨네 세도 일문에 대하여 불평과 반항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267
그런 속을 아는 교활 노숙한 민씨네에서는 심순택을 불끈 안아올려, 정부의 제일 높은 자리, 영의정 자리에다 앉혀놓았다.
 
268
물론 이름만 높고 버젓하였지, 때의 영의정이란 아무 실권도 없는 뒷방 영감일 따름이었다.
 
269
심순택은 영의정 자리 바람에, 민씨네에 대한 불평과 반항심은 그럭저럭 하여 버리고, 대원군에 대한 원심만 그대로 지닌 채, 팔구분 만족하고 앉았는, 말하자면 춘풍샌님이었다.
 
270
이런 춘풍샌님 영의정이, 와락 나서서 청국의 원병은 불가하오 하고 반대를 할 주변이 없을 것은 물론이었다.
 
271
그중에서는 다부지다는 좌의정 조병세(趙秉世)가 겨우 소신을 말하였다.
 
272
내란은 어떻게 하여서든 우리의 힘으로 진정을 시킬 것이다. 내란을 진정키 위하여 타국에 청병을 하여 옴은 장차 사직을 위태케 하는 노릇이다. 청국이 일찌기 장발적(長髮賊)의 난을 당하여 외국병을 불러들였다 마침내 국토를 떼어주는 등 치욕을 입지 아니하였더냐. 나는 이에 청병을 청한다는 데에 절대로 반대를 하노라…… 이런 뜻이었다.
 
273
왕은 거기에 일변 동감은 동감이었으나 민영준 등의 의사를 받아 다시 한마디 아니치 못하였다.
 
274
외국에 청병을 하는 것이라면, 장차 땅도 떼어주어야 하고 하겠지만, 청국이야 우리 나라의 상국이 아니냐. 땅을 세삼스럽게 떼어 줄 일도 없고, 치욕이 될 일도 없지 아니하느냐.
 
275
조병세는 다시 말하였다.
 
276
청국이 비록 상국이라 하지만, 옛날 임진왜란 적에 구원을 온 명나라 군사가 조선에 와서 한 일을 생각지 못하는가. 명나라 군사가 지나는 곳, 적군 왜병이 지난 자취보다도 우리의 백성은 더 해를 입었고, 우리의 국토는 더 황폐가 되었다 이르지 아니하였는가. 겸하여 청국이 출병을 하면, 일본도 출병을 할 것이니 그는 어찌할 것인가.
 
277
이 밤의 회의는 가부의 결정을 보지 못하였다.
 
278
그 뒤로 원세개는 성화같이 민영준을 족쳤다. 민영준은 그럴 적마다 왕과 민비를 졸랐다.
 
279
한편으로 전라도에서는 관병의 패보와 동학의 기세가 날로 높아간다는 보가 빗발치듯 하였다.
 
280
그리하여 왕은 마침내, 유월 삼일날, 조정으로 하여금 청국에 원병을 청하는 공문을 원세개에게 내게 하였다.
 
281
기다리고 있던 노릇이라, 유월 팔일, 엽지초(葉志超)로 하여금 한 여단(一箇旅團[일개 여단])을 거느리고, 군함 평원(平遠)으로 호위케 하여 아산(牙山)으로 좇아 조선땅에 올랐다.
 
282
이삼 일 늦어서 일본군대는 대도여단(大島旅團)의 한 여단이 인천에 올라 즉시 서울로 들어왔다.
 
283
조선의 동학란이 청국과 일본으로 하여금 전단을 열게 한 불집이 된 내력이란 바로 이러한 것이었었다.
 
284
이렇게 안으로는 동학란이 일어 국내가 소란하고, 밖으로는 그것이 국제 문제에 물결이 미쳐, 온 동양 전판이 한바탕 시끄러울 조짐을 보이고 있을 이 때, 장선용은 서울서 경복궁을 파수하는 병정으로 있었다.
【원문】5. 성은(聖恩)이 금수(禽獸)에 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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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만식(蔡萬植) [저자]
 
  1948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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