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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랑사 (玉娘祠) ◈
◇ 8. 통역 정치(通譯政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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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
채만식
1
玉娘祠[옥랑사]
 
2
8. 통역 정치(通譯政治)
 
 
3
삼백 년을 당파싸움으로 갖은 비극, 갖은 추태 다 피우면서 살아온 조선 사람이, 일조에 개화당이 정권을 잡았다고 그 버릇 별안간 남 주었을 리 없는 것이었다.
 
4
갑신정변의 역신으로 몰려 일본 망명을 갔던 박영효(朴泳孝)가 개화당이 정권을 잡고 있는 고국을 찾아, 십 년 만에 조선으로 돌아왔다.
 
5
박영효는 돌아오자마자 한 장의 상소로 반역죄의 면사를 받았고, 다시 겅중 뛰어 내무대신이 되었다.
 
6
김옥균은 죽은 시체를 찢어 대역의 죄를 다스렸거든, 김옥균의 윗길 가는 박영효를 면사가 어디 당한 일이냐고, 상소를 한다 어쩐다 시끄런 하였으나, 천하가 개화당의 천하요 겸해서 박영효는 왕이 특별히 총애를 하던 인물이요 하니, 암만 누가 떠들었자 별 조화 없었다.
 
7
민비는 재치가 빨랐다.
 
8
박영효가 돌아와 면사를 받고, 겅중 뛰어 내무대신의 자리에 올라앉자, 민비는 얼른 그를 끌어당겨 내 사람을 만들었다.
 
9
일본 세력에 눌려 꼼지락을 못하고 있는 민비는 임시방편으로 개화당 사람을 하나 얻어 앞에 내세움으로써, 민비 자신이 받는 일본 세력의 바람막이(防風林) 같은 것을 만들어 두는 것이 좋았었다.
 
10
대원군을 들쳐 업고, 일본공사 정상(井上)의 손짓대로 오락가락하는 김홍집의 찰일본파와, 겉은 일본파요 속은 민비와 손을 잡은 박영효의 왕궁파(王宮派)와, 그리고 노서아 공사 웨베르가 조종하는 이완용, 안경수, 이범진 들의 아라사파(親露派)와 이 세 파가 개화당이라는 도가지 안에서 서로 겯고 틀고 하는 바람에, 가뜩이나 멍이 간 도가지는 거운거운 깨어져 버리려고 하였다.
 
11
일본은 많은 인명을 상하고 국재를 허비하여 청국과 싸워 이기기는 하였으나, 노서아와 독일과 불란서 세 나라가 나서서 협박을 하여, 청국에서 빼앗은 요동반도(遼東半島)를 도로 청국에 돌려주고 나니, 창피가 막심이요, 차라리 전쟁을 아니 했더니만도 못하였다.
 
12
동양에서 세계 열국세력의 성쇠가 가장 예민하게 반영이 되는 곳이 바로 조선 조정이었다.
 
13
일본이 그렇게 국제적으로 바보스럽고 문문한 것을 보자, 조선 조정은 살며시 일본파를 괄시하기 시작하였다. 김홍집이 물러나고, 대신 박정양(朴定陽)이 총리대신의 걸상에 들어앉은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14
일본 세력이 물러가고 노서아 세력이 부쩍 불었다.
 
15
민비는 이번에는 친로파와 얼른 뒤로 손을 잡고, 오랜 소원이던 개화당의 세력을 조정으로 부터 뿌리째 뽑아버릴 책략을 꾸미기 시작하였다.
 
16
박영효는 이래서는 개화당이 피흘리며 싸워온 사업이, 개혁이고 독립이고 다 허사가 되는 것이라 하여 심복인 훈련대 연대장(訓鍊隊聯隊長) 우범선(禹範善)과 이규완(李圭完), 신응희(申應熙) 세 사람을 데리고, 또 한번 변을 일으키어 조정을 숙청시킬 계획을 의논하였다.
 
17
이 음모는 그러나 미리서 발설이 되어 박영효는 또 다시 일본으로 망명을 가고, 결과 개화당은 절로 몰락이 된 형편이었다.
 
18
이때로 부터 이완용, 안경수, 이범진 들이 정부의 요직에 들어앉았다.
 
19
청국이 늙은 범이라면, 일본은 어린 삵괭이요, 노서아는 북방의 주린 곰이었다.
 
20
이 세 마리의 맹수가 조선이라는 한 덩이의 고기를 사이에 놓고 으르렁 거리며 싸웠다. 조선을 얻는 자 극동의 패권을 쥐는 자요, 조선으로 부터 쫓긴자 극동으로 부터 발붙임을 잃고 마는 자이기 때문이었다.
 
21
갑오·을미의 일청전쟁에서 어린 삵괭이 일본은 늙은 범 청국을 때려뉘었다. 그런 결과 일본은 그동안의 청국을 대신하여 조선에다 세력을 잡았다.
 
22
개화당은 이 일본이 조선에다 세력을 박는 그 앞잡이였다.
 
23
사대당이 청국의 앞잡이인 것처럼, 청국으로 하여금 조선이 청국의 속국인 것을 주장하며 청국의 낡은 세력을 조선에서 지탱하며 하게 하는 청국의 앞잡인 것처럼, 또 친로파가 조선을 노서아에 팔리게 하는 노서아의 앞잡이요, 정동구락부가 미국의 앞잡이요 한 것처럼, 개화당은 주관이야 어떠했던 객관적으로는 장차 조선을 일본에다 파는 앞잡이 노릇을 하여논 것이었다.
 
24
일본은 조선에다 청국 대신 세력을 잡았다. 또 요동반도를 빼앗아, 장차 만주를 넘겨다 볼 발붙임까지 만들었다.
 
25
어린 삵괭이 일본이 그렇게 청국을 때려눕히고, 조선이라는 고깃덩이를 집어 삼켜 더우기 만주까지를 넘겨다 볼 채비를 차리려 하니, 북방의 주린 곰 노서아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26
노서아는 독일과 불란서를 추겨가지고, 일본이 청국에게서 빼앗은 요동반도를 도로 청국에게 돌려주게 하였다.
 
27
청국 하나를 때려눕히기가 고작인 때의 일본으로는, 노서아의 독일과 불란서와 이 늡늡장병 같은 세 놈이 눈을 부라리면서
 
28
"너 인석, 그 요동반도 도루 내놓지 못해? 괜히 발끈 들었다 놔 버릴테니."
 
29
하고 을러메는 데는 어떻게 하는 수가 없었다.
 
30
울며 겨자먹기로, 요동반도를 청국에다 도로 내주었고.
 
31
한편, 서울 와서 있는 노서아 공사 웨베르는 그 능란한 수단을 마음껏 부려 민비를 끼고 친로파를 조종하면서, 조정으로부터 일본 세력의 앞잡이 개화당을 싹싹 쓸어버리고.
 
32
일본은 게도 구럭도 놓친 형국이었다.
 
33
적어도 그래서, 조선에 있어서의 세력만이라도 도로 붙들어 볼까 하여, 때마침 갈려온 일본공사 삼포(三浦)가 박영효의 잔당 우범선과 일본인 낭인(浪人)을 시켜, 또 한번 변을 일으킨 것이 곧 을미사변(乙未事變)이었다.
 
34
을미년 시월(陽曆) 초이렛날 밤, 개화당의 장사와 일본 낭인으로 된 오십여 명 일당이 공덕리(孔德里)의 대원군 별장을 엄습하여, 수직하는 병정들을 때려 가둔 후, 여드렛날 첫새벽 세시에 대원군을 승교에 태워 가지고 문안으로 몰아 들어왔다.
 
35
대원군은 이때 공덕리의 별장에서, 조정에서 보낸 삼십 명 병정에게 감금 생활이나 진배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 대원군을 개화당은 이번에 또다시 끌어내던 것이었었다.
 
36
대원군과 개화당 사이에는 대원군은 왕을 보익하여 궁중 사무만 전담을 하고, 정치에는 일체로 참 섭치 아니하되, 손자 이준용(李俊鎔)을 삼 년 동안 일본으로 유학을 보냈다가…… 라는, 그래서 장차 그 이준용으로 왕위를 계승시킨다는 묵계가 있었더라고 한다.
 
37
미상불 그런 교환조건이 아니란다면 궁중 사무나 맡아보고, 정치에는 아무 실권이 없는 자리에 대원군 쯤으로 나와 앉으려고 하였을 리가 없는 것 이었었다.
 
38
스무날 달이 중천에 솟은 달빛 아래, 장사패의 뽑아든 오십 자루 칼의 옹위를 받으면서 대원군의 승교는 서대문에 이르렀다.
 
39
서대문에는 훈련대 제2연대장 우범선이 이두황과 함께 훈련대 백여 명을 거느리고 와 기다리고 있었다. 또 소좌 마옥원(少佐 馬屋原)이 거느린 일본군 수비대도 그 자리에 와 있었다.
 
40
훈련대와 일본군 수비대는 대원군의 승교를 호위하고 직참 광화문으로 달리었다.
 
41
날이 이미 휘엿이 밝았고 광화문은 활짝 열리었다.
 
42
광화문 문 앞에서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이 직접 지휘하는 궁성 수비의 훈련대와 충돌이 일었다.
 
43
반 시간이 못하여, 홍계훈은 탄환을 맞고 넘어지고 수비병은 흩어졌다.
 
44
취향정(醉香亭) 근처에서도 왕궁 시위대(王宮侍衛隊)의 일대가 저항을 하였으나 이내 물리치었다.
 
45
민비는 곤녕합(坤寧閤)에서 붙들리어 개화당의 장사와 일본인 검객의 칼에 시(弑)한 바 되었다.
 
46
당초에 일본공사 삼포가 새로이 조선으로 부임을 하려면서, 망명가 있는 박영효더러, 조선에 나가서 일을 상의할 만한 사람을 천거하여 달라고 하였더니, 박영효는 우범선을 천거하였다.
 
47
삼포는 부임하여 오던 날로 우범선을 불러 그의 의견을 물었다.
 
48
우범선은 첫날에 여우 같은 민비를 죽여 없애지 않고는 조선 조정은 바로 잡아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49
삼포는 처음에는 주저하였으나 필경 동의를 하였고, 그래서 이번 변에 민비를 죽이겠다는 것은 미리서 정한 방침이었다. 민비의 얼굴을 익히 아는 구연수(具然壽)와 또 일본 계집아이 하나를 일행 중에 데리고 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50
날이 밝기를 기다려, 일본공사 삼포가 궁중에 들어와 왕을 시켜 김홍집을 다시 불러들여 찰일본파의 내각을 조직케 하였다.
 
51
궁내대신에 이재면, 총리대신에 김홍집, 내부대신에 유길준, 탁지부 대신에 어윤중, 외부대신에 김윤식, 군부대신에 조희연, 학부대신에 서광범, 법무대신에 장박, 농산공부대신에 정병하 이러하였다.
 
52
친로파 이완용, 안경수, 이범진 들은 쫓겨나고.
 
53
갑오년 전과도 달라, 일본은 국제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있는 때라 낭인들이 조선 사람과 함께 범궐을 하여 왕비를 시하고 하였다는 것으로 거북한 문제가 일게 되자, 일본 정부는 삼포 공사와 낭인들 사십여 명을 붙들어다 광도(廣島) 감옥에 가두었다.
 
54
이름이나마 국모(國母)를 죽이기까지 하고서 들어앉은 김홍집 내각은 하여커나, 이것저것 개혁에 손을 대었다.
 
 
55
양력을 쓰기로 하고 개국 504년 11월 17일을 개국 505년(高宗[고종] 33년 丙申[병신]) 1월 1일로 고치었다.
 
56
종두 규칙을 반포하였다.
 
57
서울 안에 소학교 네 곳을 세웠다.
 
58
군제를 고쳐 중앙에는 친위대(親衛隊), 지방에는 진위대(鎭衛隊)를 두었다.
 
59
연호(年號)를 쓰기로 하고, 건양(建陽)이라 하여 이듬해부터 시행하도록 반포하였다.
 
60
단발령(斷髮令)을 내리고 왕이 국민에게 모범을 보인다 하여 먼저 머리를 깎았다.
 
61
이 단발령이 말썽이었다.
 
62
지방의 유생들은 이 목을 벨지언정 이 상투는 베지 못하오 하고, 상소가 빗발 치듯 하였다.
 
63
국모를 시(弑)하였다는 것과 단발령으로 인하여 지방은 발끈 뒤집히고, 춘천을 비롯한 강원도의 여러 곳과 경기, 충청, 경상 각도에서 의병이 일었다.
 
64
이리하여 김홍집내각은 국민의 미움과 배척의 과녁이 되고 말았다.
 
65
일본과 개화당 내각이 인심을 잃는 것은 노서아 공사 웨베르와 친로파의 바라고 기다리던 기회였었다.
 
66
을미사변에 쫓긴 친로파 이완용, 이범진, 안경수 들은 정동구락부의 친미파들과도 연락을 하여 가며 노서아 공사 웨베르와 함께 일 꾸밀 의논을 하였다.
 
67
계획은 다 익었다.
 
68
건양 원년, 병신(丙申) 이월 열하룻날 첫새벽, 왕은 어린 동궁(東宮)을 보따리처럼 싸서 안고 내관의 여복으로 변복하고, 내인들이 타는 교자 속에 숨어 앉아, 영추문으로 좇아 경북궁 ——— 누차의 변을 치렀고, 마침내는 왕비가 참살을 당하였고, 하여 마굴처럼 무선 기가 돌고 싫증이 난, 그 경복궁을 빠져나와 정동에 있는 노서아 공사관으로 들어갔다.
 
69
이것이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이었다.
 
70
아관파천은 물론 친로파들이 설도를 한 것이었지만, 왕도 십분 그에 동의를 하였던 노릇이었다.
 
71
아관파천에 앞서, 정부에서는 의병을 토벌시키느라고 친위대의 병정을 태반이나 지방으로 풀어 내려보냈었는데, 이것을 안 노서아 공사 웨베르는 서울이 너무 허수하여 못쓰겠다고, 이월 구일날 인천으로부터 노서아 수병 이백 명을 불러올려 공사관을 엄히 수비하였다.
 
 
72
잠을 자다 밤 사이에 왕 ——— 권력의 중심물을 잃어버린 김홍집의 개화당 내각의 대신들의 새벽잠을 두드려 깨워 코앞에 들이대는 것은, 노서아 공사관으로 부터 나온 체포명령이었다.
 
73
변을 듣고, 궁내대신 이재면이 내부대신 유길준더러 그 말을 하자, 유길준은 왕을 잃어버린 것은 궁내대신 너의 태만이라면서 이재면 뺨을 철커덕, 당장 왕을 찾아놓지 아니하면 목을 벤다고 얼러대었다.
 
74
이재면은 궁궐과 궁문을 수직하는 책임은 내부대신 너에게 있지 아니하냐고, 그러니 왕을 잃어버린 죄는 너에게 있느니라고 대들었다.
 
75
이렇게 왕 없는 빈 궁 안에서 서로 찧고 까불고 하는 그 자리에 역신 일당을 체포하라는 벼락령이 떨어졌고, 변을 듣고 달려들어온 김홍집과 정병하가 먼저 순검에게 이끌리어 경무청으로 가, 경무청 문 밖에서 그 즉시로 처형을 당하였다.
 
76
군중이 하루 종일 두 시체를 찢고 짓밟고, 불태우고, 욕하고 하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77
김홍집내각이 국민에게 얼마나 깊이 미움과 원망과 오해를 받고 있었느냐 하는 것을 미루어 알 수가 있었다.
 
78
어윤중은 고향 보은(報恩)으로 달리다 겨우 용인 가로의 주막에서 촌 백성들에게 죽고.
 
79
유길준, 조희연, 장박, 경무사(警務使) 권영진 들은 순검 일대에게 이끌리어 경복궁을 나와 마악 해태 앞에 당도하였을 무렵이었다.
 
80
이때 삼부군(三軍府)는 일본군이 병영으로 쓰고 있었는데, 유길준이 별안간 몸을 날려 일본 병영 문 앞에서 수직하는 일본 병정에게로 달려 들면서 "다쓰께데구래(구해줍쇼)" 하고 소리를 쳤다.
 
 
81
일본 병정은 유길준을 병영 문 안으로 부축하여 들어갔다.
 
82
유길준을 쫓던 조선 순검은 닭을 쫓다 지붕만 올려다보는 개 꼴이 되었다.
 
83
유길준은 일본 병정에게 다른 세 사람이 구원을 청하였다.
 
84
일본 병정이 우우 달려나와 조선 순검에게서 세 사람을 빼앗아 각기 피신을 시켜주었다.
 
85
왕이 친로파의 손으로 넘어가고 천하가 또 한번 바뀌자, 개화당 김홍집 내각이 반포한 여러 가지 혁신법령이 거의 다 철회가 되었다. 단발령 물론 철회 되었다.
 
86
친로·친미파의 내각이 조직은 되었다. 총리대신으로 김병시(金炳始)를 올려 앉히고, 이완용이 외부대신, 박정양이 내부대신, 이윤용이 군부 대신에 경무사를 겸하고, 탁지부대신에 윤용구, 법부대신에 조병식, 궁내대신에 이재순 대강 이러하였다.
 
87
정부를 조직하였다고 하지만 왕을 남에게 빌려준 정부가 실력이 있을 턱이 없었다.
 
88
노서아 공사관은 이백 명의 그 험상궂게 생긴 노서아 수병이 철통같이 수직을 하였다.
 
89
왕은 그 안에 들어앉아 외부와의 연락이라는 것이 아주 끊겨버리다시피 하였다. 궁내대신 이재순과 이완용, 이윤용, 이범진 이 사오 인이 가끔 번 차례로 노서아 공사관으로 와서 왕을 만나보고 할 따름이었다. 외국 사신이 간혹 와서 접견을 하는 것이었고.
 
90
왕과 국민 사이는 그래서, 왕이 흡사히 서백리아로 유형이나 간 것처럼 까마득히 멀었다.
 
91
왕의 신병에는 김홍륙(金鴻陸)이라는 인물이 딸리어 있었다.
 
92
김홍륙은 서백리아로 이민(移民) 갔던 농군으로 재주라는 것은 노서아 말을 조금 아는 것뿐이요, 그 외에는 낫 놓고 기역자 모르는 판무식꾼이었다.
 
93
김홍륙은 웨베르의 신임으로 통역 겸 왕과 조정의 대신들과의 연락을 경계하는 밀탐 겸 왕의 신변에다 배치하여 둔 웨베르의 수족이었다.
 
94
웨베르는 정부에 대하여 무슨 법령을 실시시킬 것이 있다든지 또는 왕에게서 어떤 이권(利權)을 얻어낼 것이 있다든지 하면 김홍륙을 통역시켜 왕에게 주청을 한다.
 
95
김홍륙은 왕의 대답을 웨베르에게 전한다.
 
96
웨베르는 김홍륙의 통역으로 왕에게서 얻은 재가나 승낙을 그대로 곧 실시하도록 조정의 대신을 불러 전달하되, 김홍륙의 통역으로써 한다.
 
97
대신은 듣고 나서
 
98
"네, 알겠읍니다."
 
99
하고 물러나왔다.
 
100
통역정치의 불행과 희극스럼을 조선 백성은 이때부터 벌써 몸으로 겪은 것이 있었다.
 
101
김홍륙은 한낱 통변에서 비서원경(秘書院卿)으로, 비서원경에서 군부 협판(軍部協辦)으로 겅중겅중 뛰어올라갔다.
 
102
왕이 일 년을 노서아 공사관에 있었기 망정이지 이 년만 있었더라면 김홍륙은 그 부력(富力)이 전라도 하나쯤은 사자고도 하였을 것이요, 김홍륙 내각도 한바탕 조직을 하였을는지 모르는 노릇이었다.
 
103
왕이 노서아 공사관에 있는 일 년 동안에 조선의 중요한 이권은 노서아 사람을 비롯하여 불란서, 미국 사람들의 손으로 연방 들어갔다.
 
 
104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의 삼림 벌채권이 노서아 사람의 손으로 들어가고, 방적 공장의 설치권이 노서아 사람의 손으로 들어갔다. 노서아 정부와의 사이에 군용기지의 조차와 철도, 전신의 건설 및 전용에 관한 조약이 맺어졌다.
 
105
불란서는 경의선철도(京義線鐵道)의 부설권을 얻고, 운산 금산(雲山金山) 의 채굴권을 비롯하여 전기, 수도, 철도의 부설권이 미국 사람의 손으로 들어갔다.
 
106
이리하여 아관파천을 한 고패로, 열국의 조선에 대한 침략 정책은 그동안까지의 단순한 정치적·군사적이던 것으로부터 한걸음 나아가 경제적 침략으로 발전이 되었다.
 
107
경제적 침략…… 이것은 그동안까지의 정부(政府) ——— 왕조(王朝)의 멸망으로 부터 나아가 민족국가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었었다.
【원문】8. 통역 정치(通譯政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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