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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랑사 (玉娘祠) ◈
◇ 10. 보 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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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
채만식
1
玉娘祠[옥랑사]
 
2
10. 보 쌈
 
 
3
기해(己亥) 광무 3년 삼월 보름.
 
4
삼월 보름이라지만 음력으로는 이월 초생, 아직 추위가 다 가시지 않은 초봄이었다.
 
5
옥랑(玉娘)은 모처럼만에 건넌방으로 건너와 잠깐 요령으로 자리에 누웠다.
 
6
새서방 태진이 시감으로 며칠 동안 앓다 급자기 죽은 것이 어저께가 사십구 일이니, 꼭 오십 일. 그날부터 시어머니가 병석에 누워 이내 앓았다.
 
7
노인의 병은 과부로 다 늙게 둔 외아들 하나를 그러나마 이십 전에 허망히 잃고 낙망과 화에서 생긴 병이었다.
 
8
달리 손대가 있지도 아니한 터요 하여서, 옥랑은 늙은 시비 하나를 데리고, 꼬바기 시어머니의 병석에 붙박혀 앉아 두 달 장간을 약시중과 병간을 하였다. 그러느라고 제법 자리에 누워 변변히 잠을 자고 할 겨를이 없었다.
 
9
그러나 엊그제부터 노인은 병이 조금 차도가 있어, 미음도 마시고 밤이면 한 잠씩 잠도 자고,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하였다.
 
10
정신을 차린 노인은 며느리가 그동안 침식을 잊고 옆에서 주야로 병간을 하던 일을 깨닫고, 인재는 너도 건너가 편안히 잠을 좀 자고 하라고, 그럭허다 너마저 병이 나든지 하면 나를 위하는 도리가 무엇이냐고 걱정을 하면서 몇번 권을 하여, 옥랑은 더 어기지 못하고 시비에게 잠깐 시중하고 있도록 이른 후에 건넌방으로 건너왔었다.
 
11
등신이나마 새서방이 없는 자리에 혼자 눕기란 무한 허전하였다.
 
12
마디진 한숨. 그러면서 눈물이 좌르르 베개로 흘렀다.
 
13
콧물 흘리는 애기 새서방을 섬기기 여덟 해. 그 여덟 해를 길러 열 여덟이 되었다. 자랄 만큼 다 자랐었다. 그러나 팔십을 자라도 매양 그만일 사람이었다. 그는 병신(不具者)이었었다.
 
14
그리고, 그러나마 죽었다.
 
15
겨우 인제야 스물네 살. 청상 과부. 앞으로 기나긴 생애를 외로이 외로이 살아가야 하였다. 낙도 없이, 여망도 없이 오직 한숨으로만.
 
16
그 한숨을 어찌 다 쉬는가 싶었다.
 
17
무엇에 매여 무엇을 하자고 이 생애를 살아가야만 하는 것인가 싶었다.
 
18
차라리 시집이라는 것을 오지 말고, 그대로 부모 슬하에서 부모나 섬기고 말았더라면 나왔으려니 싶었다.
 
19
이 생각 끝에 문득, 어느 구석에 가 잠기어 있었던지 모르나, 까맣게 잊은 얼굴 하나가 어릿이 떠올랐다.
 
 
20
'그 장서방. 불 속에서 나를 살려내 주었다는 장서방, 옳아 참……’
 
21
'절을 하고 얼굴을 들다가, 옳아, 웃었지. 그 사람도 웃었지. 웃었어, 들……’
 
22
'그리고 참, 그 주머니랑, 염낭이랑, 허리띠랑……’
 
23
여기까지는 기억이 무심코 즐거웠다. 그러나 이어서
 
24
'양반 쌍놈이 무엇인지 몰라. 그다지도 구별이 엄해야 하는 법인지……’
 
25
할 때에는 소스라치게 한숨이 나오고.
 
26
'그때, 어머니 아버지께서 그러시지를 마시고, 차라리……’
 
27
하면서 또다시 한숨이었다.
 
28
마악 그러자, 옆문이 별안간 덜컥 열리었다.
 
29
놀라, 몸을 반만 일으키는데 어둠 속으로 검은 그림자가 열린 물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30
"아 이머니?"
 
31
목안엣 소리로 그러는데, 저편에서는 조용히
 
32
"도적이 아니니 놀라지 말아요."
 
33
하였다.
 
34
도적이 아니라는 데에, 옥랑은 오히려 가슴이 더럭하였다.
 
35
무서움보다도 악이 버럭 나고 겸해서 당돌한 천품이라
 
36
"도적이야."
 
37
하고 고함을 쳤다.
 
38
궐은 마주
 
39
"포쌈이야."
 
40
하고 외치면서 성큼 달려들어, 가지고 온 홑이불에 뚤뚤 말아 옆에 끼고는, 옆 마당으로 내려선다.
 
41
옥랑은 홑이불 속에서 몸을 버둥거리면서 도적이야, 도적이야 소리를 지르고.
 
42
안방에서 시비가 놀라
 
43
"도적이야."
 
44
행랑에서 종이 몽둥이를 들쳐메고 뛰어나오고.
 
45
마당에서 둘이 마주쳤다.
 
46
"이눔."
 
47
종은 호통하면서 달려들었으나 몽둥이는 빗나가고, 궐이 한번 밀어 박치는 바람에 저기만치가 떨어졌다.
 
48
"포쌈은 기를 쓰구 말리는 법 아냐."
 
 
49
궐은 조롱하듯 그렇게 나무라면서, 유유히 대문을 열고 나간다.
 
50
대문 밖에는 네패 교군이 마침 등대하고 있다가 선뜻 받아가지고는 나는 듯이 그대로 달린다.
 
51
안에서는 종과 시비가 서로 가람
 
52
"도적이야."
 
53
"포쌈이야."
 
54
하고 고함을 쳐쌓는다.
 
55
이윽고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나, 보쌈인 줄을 알고는 장정들이 벌써 어느 지경을 간 지 모르는 가마 뒤를 쫓아가는 시늉하다 돌아와 버렸다.
 
56
궐도 아까 한 말이지만, 과부를 보쌈하여 가는 것은 구태여 나서서 막으려고 서둘지 않는 것이 풍도였었다. 보쌈이란, 그래서 과부 해방에다 약탈 혼인을 겸한, 자못 편리한 물건이었다.
 
57
선용은 지나간 해 가을 사 년 가까이나 긴 방랑을 마치고 황해도로 좇아 경기 땅으로 들어서면서부터 두루 생각하였다.
 
58
전후 두 차례나 객지로 나가 떠돌아다니면서 약간 풍상도 겪고 하였다.
 
59
소득은 무엇이냐.
 
60
별반 두드러진 소득이랄 것이 없었다.
 
61
그렇다면 앞으로 장차 어떻게 할 것이냐.
 
62
도로 다시 시골 구석에 가만히 꿇어엎드려, 농사나 짓고 한다는 것은 가사 옥랑에게 대한 번뇌가 아니더라도 도무지 갑갑하고 마음에 차지를 않는 노릇이었다.
 
63
그렇다고, 또다시 인삼 삽짝이나 해가지고 나서 보았자, 조선 전판을 거진 다 다녀본 나머지니 더 다닐 곳도 없는 것.
 
64
서울은 가 있자 하니 가 있으면서 할 일이 무엇이며, 하는 것도 없이 매부 영석의 집에 의탁하여 신세만 진다는 것도 당치아니 할 말.
 
65
아주 서울로 솔가를 하여 오자면, 그러는 날이면 무엇이든 생화가 있어야 할 터인데, 선용쯤으로는 넘고 처져서 서울바닥에서 가족을 부양할 만한 생화 거리가 졸연히 있으련 싶지가 않았다.
 
66
'역시, 산으로 들어가, 사냥이나 해먹으면서 세상과 등지고 살다가 혹시 계제 보아서……’
 
67
막상 이 도리밖에 없을 것 같았다.
 
68
평안도 강계(江界)에서 한 달 가량 사냥꾼을 따라다닌 일이 있었다.
 
69
범, 곰, 멧돼지 같은 사나운 짐승은 쏘아서 혹은 싸워서 잡고, 험한 산과 직직한 숲을 달리면서, 사슴이니 노루니 따위를 몰고…… 있는 기운을 마음껏 부려본다는, 그것 한가지만으로도 우선 속이 후련한 일이었다.
 
70
호젓이 산에서 사니 누가 이래라저래라 간섭하고 시비할 사람 없고.
 
71
썩어빠진 세상, 아니꼬운 양반붙이, 기승스런 왜놈, 다 꼴 보지 않으니 마음 편코.
 
72
그리고, 그러다 차차로 무리라도 모이든지 하면, 그때는 한편으로 달리 할 일이 있고.
 
73
이쯤 선용은 작정을 하여 두었었다.
 
74
독립협회는 선용을 잠깐 몇 달 흥분시켰다 말았고.
 
75
선용이 연장 구한 것을 남의 눈에 뜨이지 않도록 잘 싸서 박돌이와 나눠지고, 이왕 빠진 충청도 일판을 둘러본 후, 고향집에 당도한 것은 삼월 바로 초생이었다.
 
76
노독을 풀 사이도 없이 당도한 사흘 만에, 선용은 박돌이를 데리고 우선 곰의고개로 올라가 두루 둘러본 후, 다시 거기서 준령을 타고 동북쪽으로 이십 리 상거의 '노루재’로 들어갔다.
 
77
생각던 이와 같아, 어느 편으로 보나 역시 노루재가 나았다.
 
78
곰의고개는 험하고 호젓하다지만, 이쪽 저쪽에 큰 시장(市場)을 끼고 있어 장꾼들의 왕래가 잦고, 길도 제법 길다운 것이 나서 있었다.
 
79
노루재는 그러나, 좌우가 몇백리씩인지 모를 첩첩한 산으로 연하여 있음은 물론이요, 앞과 뒤도 앞으로 삼십 리, 뒤로 사십 리를 가야 비로소 조그만씩한 화전마을(火田部落)이 하나씩 나올 따름, 그 안팎 칠십 리 안짝에는 인가라는 것은 통히 없었다.
 
80
길도 그래서, 일 년에 몇 번, 사냥꾼과 산삼 캐러 다니는 사람들이 오고가고 할 뿐이요, 초군조차 들어오지 않는 곳이라 변변히 길이랄 것이 없는 형편이었다.
 
81
단지 사냥이나 하고 있기로 든다면 모르거니와, 앞으로 달리 일을 하자며는 노루재에다 자리를 잡는 것이 훨씬 유리하게 되어 있었다.
 
82
더우기 노루재에는 마차운 곳에 집이 한 채가 있어서 좋았다.
 
83
고개 마루턱에서 서쪽으로 두어 마장 고개를 내려가다 왼편으로 꺾여 한참 들어가노라면, 조붓하게 말편자 모양(馬蹄形)으로 된 그 안에 가 삼칸집이 하나 있었다.
 
84
한 칠팔 년 전에, 어떤 사람이 여기에다 물역을 들여 집을 짓고 통령(通靈: 도술 공부)을 한다고 하다가 미쳤다던가 죽었다던가 해서 지난해 봄부터 이 집은 비어 있었다.
 
85
안방 건넌방에 대청마루까지 있고, 지붕이랑 벽이랑 구들이랑 다 성하고, 또 뒤꼍으로는 옹달샘이 있고 하여, 문에다 종이나 붙이고 부엌에다 솥단지만 붙이면, 아무 때고 사람이 거접하고 살기에 아쉬울 것이 없을 만한 마침감이었다.
 
86
곰의고개에다 자리를 잡는다고 하면, 집은 짓지 못할 망정 움을 치자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루 이틀에 수월히 될 일이 아니었다.
 
87
자리는 그리하여 노루재로 정하고.
 
88
선용과 박돌이는 이튿날부터 양식을 비롯하여, 건개며 살림제구며 금침과 의복까지 한동안 그릴 것이 없도록 마련을 해서는 올려간다 하느라고 칠팔일을 골몰하였다.
 
89
그러자, 내일은 아주 산막으로 들어간다는 날이었다. 박돌이와 저자에 나갔다. 주막에 들어 술을 한잔씩 마시는 참인데, 주모가 웬 사람과 저희끼리 하는 이야기였다.
 
90
"백생원이 서울로 떠난다지?"
 
91
"떠난답니다."
 
92
"울화로군."
 
93
"울화두 나죠…… 무남독녀 딸 하나 두었다 출가라구 시키니깐 새파란 청상과부가 되니."
 
94
선용은 귀가 번쩍하였다.
 
95
마시려던 술잔을 도로 놓고 주모더러 물었다.
 
96
"아니, 백생원 딸이면 저 버드실루 출가한?"
 
97
"그렇죠."
 
98
"상부를 했어? 과부가 됐어?"
 
99
"것두 여태 모르시우?"
 
100
"내야 객지루 다니다 돌아온 사람이 걸 알 탁이 있나…… 그래 언제 그렇게 됐는구?"
 
101
"그게 작년 섣달 대목 임시니깐, 두 달두 채 못됐죠."
 
102
선용은 속으로, 오냐 그렇다면 내 할 일이 한가지 있도다 하고, 이튿날 박돌이만 먼저 노루재 산막으로 올려보냈다.
 
103
보쌈이라는 것은 동네가 장정들이 온통 들끓어 가서 과부를 싸오고, 그러느라구 양편 동네가 시끄럽고, 따라서 푸짐하고 한 법인데, 선용은 구태여 그렇게 요란스럽게 떠벌릴 필요가 없었다.
 
104
버드실 근처의 마을로 가 실직한 교군꾼으로 네패 교군 한 채만 차렸다.
 
105
차려서 데리고 가서는 손쉽게 싸서 옆에 끼고 나와 교군에 실어 교군을 몰고 달려와……지극히 간단하고 조용하게 해치웠다. 그리고 교군꾼들의 입에서 간 곳이 소문도 퍼지려니와 교군이 험한 곰의고개를 오른다, 숲속으로 산을 타고 노루재까지 간다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곰의고개 밑에서 교군일랑 돌려보내고 속 알맹이만 들쳐업고 산으로 오고.
 
106
산막에 당도하였을 때에는 이미 날이 새려고 하였다.
 
107
선용은 옥랑을 안방에다 내려놓고 나와, 조용히 박돌이더러 잘 지키면서 동정도 보고 하라고 이른 뒤에 혼자 건넌방으로 들어갔다. 하여커나 놀람이 진정되게 하자는 것이었었다.
 
108
선용은 늘어지게 한잠을 자고, 해가 훨씬 한낮 가까이 되어서 밖으로 나왔다.
 
109
박돌이는 마당에 가 오도카니 앉아 지키고 있다. 선용이 손짓을 하는대로 가까이 온다.
 
110
선용은 박돌이를 멀찍이 데리고 가 가만가만히 묻는다.
 
111
"그래, 어떡허구 있지? 울구, 몸부림치구 아니해?"
 
112
"울긴 입쇼, 몸부림은 입쇼."
 
113
"그럼?"
 
114
"그린드끼 고대루 여태 앉었는걸 입쇼, 눈 요로케 내리 깔굽쇼…… 아이 무서. 이쁘긴 이쁜데, 찬바람이 사뭇 도는걸 입쇼."
 
115
"매친 것…… 그래, 무얼 좀 먹으라구 권해 봤나?"
 
116
"거기다 무얼 좀 먹으라면 먹을깝쇼? 그래, 꾀를 하나 냈읍죠. 미음을 어쨌든 물쿠름하게 쒀설랑 큼직한 그릇에다 해서 들여노면서, 헴 여긴 우물이 십 리나 돼, 급자기 물을 길어 오질 못하니 혹시 목 마르시거들랑 이거래두 좀 마십쇼 했더니."
 
117
"허허, 그래서?"
 
118
"들은 상두 않더니, 나중 문틈으로 들여다본깐 웬걸입쇼, 절반이나 자신걸 입쇼."
 
119
"허허, 뚝배기보담 장맛이 낫다더니, 제법일세 그려나."
 
120
"그리군, 조금 아까 또 들여다본깐, 마저 다 자시굽쇼."
 
121
"쯧, 목두 타겠지."
 
122
선용은 소쇄를 하고 나서 비로소 안방으로 들어갔다.
 
123
옥랑은 사람이 들어오건만, 박돌이 말대로 눈을 내리깔고 그린 듯이 앉아서 거듭떠보지도 않는다.
 
124
선용은 빙긋이 웃으면서, 한참이나 옥랑의 하얀 가리마 자리를 내려다 보다가, 바로 그 앞으로 가 앉는다.
 
125
"날 알아보겠소?"
 
 
126
옥랑은 이미 속으로 '오냐, 나는 이대로 앉아서 죽는다. 욕을 보이면 속절없이 욕은 보리라마는, 죽으면 다 그만이다. 먹지 않고, 언제까지고 이대로 앉았노라면 죽어지는 날이 있을 것이 아니냐.’
 
127
하는 독한 마음을 먹은 것이 있었다. 그러고서도 갈증을 견디지 못하여 연방 미음은 먹었으니, 사람이란 결국 약하다고 보자면 한량없이 약한 것이지만.
 
128
아뭏든 그래서, 무슨 소리를 하거나 무슨 짓을 하거나 날 잡아먹어라 하고 대껄도 않고 항거도 않고 하자던 것인데 '날 알아보겠소?’ 라니 곡절이 있는 일이었다.
 
129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고.
 
130
보니, 천만 생각 밖에 그 장서방이 아니더냔 말이었다.
 
131
와락 반갑고 마음이 뇌고 하였다.
 
132
이 마음이 뇐다는 것, 즉 안심은 그러하되 위급한 자리에서 구원을 하여 줄 사람을 만난 안심인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이 사람이기 때문에 위급의 위급성이 해소된 그 안심인 것이었다.
 
133
그러나 옥랑은 그렇게 선용이 반갑고 마음이 뇌고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이런 거조를 한 그에게 대한 미움과 분함이 무섭게 치밀어 올랐다.
 
134
이 날 이 순간으로부터 옥랑의 마음은 완전히 두 갈래로 찢어져 가지고, 끝끝내 서로 각돌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135
옥랑은 이내 도로 고개를 숙이고 앉아서 입술을 아긋이 깨문다. 얼굴은 핏기가 확 퍼지고 숨은 잦았다.
 
136
선용은 옥랑의 손길을 덥석 쥐면서 간곡한 음성으로
 
137
"십 년, 가슴에 묻은 원을 인제는 풀어도 상관이 없지 않소?"
 
138
"………"
 
139
옥랑은 붙잡힌 손길을 홱 뿌리친다. 그는 벌써 죽기로 결심을 하고 무슨 짓을 하거나, 날 잡아 먹으라고 항거조차 아니한다던 싸늘한 고깃덩이일 수가 없었다.
 
140
무어라고든 한바탕 발악을 해 퍼부어 주어야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141
고개를 번쩍 들고 똑바로 선용의 눈을 보면서
 
142
"이 천하 오랑캐 같은 놈아, 너도 사람이냐?"
 
143
"분하거든 분이 풀리도록 욕을 얼마든지 하구려. 그러나 내가 그대를 불 속에서 목숨을 구해준, 그 은혜 갚음을 받자구 이럭허는 것은 아니오."
 
144
"누가 것 말인감…… 내가 무얼 입구 있는지 몰라? 엊그제 겨우 사십구일이 지났어. 삼년상 벗기두 전에, 그래…… "
 
145
"오오!"
 
146
선용은 놀라면서 절절히
 
147
"깜박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오, 깜박 그만…… 오랑캐 아냐 더한 책망을 들어두 할 말이 없소."
 
148
"………"
 
149
"가시오. 데려다 주리다, 지금 당장."
 
150
"………"
 
151
"그렇지만 삼년상 치르구 나서는 올 줄 알아요."
 
152
"올 건 어딨든구"
 
153
"아니 온다?"
 
154
"그럼."
 
155
"정말?"
 
156
"내 송장이나 업어오지."
 
157
"정말?"
 
158
"어떡헐텐구?"
 
159
"못 가."
 
160
선용의 태도와 음성은 강경하였다. 그는 거듭
 
161
"못 가."
 
162
"죽이려므나."
 
163
"오늘은 못 가. 내일 가…… 오늘 내 사람 돼 가지구, 내일 가. 그래야 딴 맘을 먹지 못해."
 
164
"죽이든 살리든 맘대루 하려므나."
 
165
"이거 봐요…… "
 
166
선용은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타이른다.
 
167
"여자가 그렇게 기승스러면 못쓰는 법이오.여자는 온순해야 해요."
 
168
"………"
 
169
"내가 집을 버리구 칠십의 편모와 젊은 가숙을 버리구, 유랑객이 되어 떠돌아다니다 필경은 세상까지 버리구, 이 산중으로 들어온 것이 다 뉘 탓인지 아시요?"
 
170
"………"
 
171
"폐일언하구, 오늘 밤 지나구서 내일 데려다 줄테니, 삼년상 치르구 나서 내가 내려가, 기다리는 곳까지, 그대 발로 걸어올 생각하시요."
 
172
이튿날 새벽에 산을 내려간 선용은 저녁 새때나 되어서 돌아오더니, 옥랑을 들쳐업고 또 다시 산을 내려갔다.
 
173
옥랑은 하릴없이 절개를 꺾이고 만 일을 생각하면, 천길 뛰고 싶게 분하였다. 업고 가는 목덜미를 아드득 살점을 물어떼어도 분은 풀릴까 싶지 않았다.
 
174
그러나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이왕 절개까지 꺾이고 하였으니, 도로 내려가고 무엇하고 하느니 보는 이가 있나 부끄럴 사람이 있나, 그대로 주저앉아 살았으면 하는 생각이 또한 솔깃하였다.
 
175
삼년상도 치르지 않은 사람을 이런 법이 있느냐고 꾸짖었더니, 뉘우치고 놓아 주더라고 하면, 누구나 곧이는 들을 것이었었다. 그러나 남은 속인다지만 내가 나를 속이지는 못하는 것…… 차마 마음에 부끄러워 어찌 시어머니를 섬기며, 죄스러 어찌 새서방의 제청을 대하더란 말인고.
 
176
이런 일을 생각하면 더구나 '나 삼년상이구 무엇이고 다 그만두겠으니, 도로 올라가 살고 맙시다.’
 
177
하는 말이 목안에서 나와지려고 나와지려고 하기 몇번인지를 몰랐다.
 
178
어둑어둑해서 고개 밑에 당도하니 교군이 등대하고 있었다.
 
179
선용은 교군 뒤를 따라 버드실 동구 밖까지 왔다. 거기서 돌아서려면서, 가마 휘장에다 대고
 
180
"잘 가시오."
 
181
하였다.
 
182
옥랑은 그만 설움이, 무슨 설움인지 복받쳐, 곧 울음이 터져나오려고 하는것을 억지로, 억지로 삼키었다.
【원문】10. 보 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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