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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랑사 (玉娘祠) ◈
◇ 12. 사당(祠堂) 앞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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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
채만식
1
玉娘祠[옥랑사]
 
2
12. 사당(祠堂) 앞에서
 
 
3
십 년의 세월이 흘러 경술년(庚戌), 융희(隆熙) 4년.
 
4
팔월 열흘께. 음력으로는 칠월 바로 초하룻날이었다.
 
5
중 혜광이 된 선용은 해가 절반 남아 기울기를 기다려, 먹장삼 입고 송낙쓰고 목에다 염주 걸고, 팔에다 단주 걸고 주령 짚고, 목탁과 바랑은 없고…… 이렇게 차리고서 절을 나선다.
 
6
박돌이가 절 문까지 따라 나오며
 
7
"안녕히 댕겨옵쇼."
 
8
한다.
 
9
"댕겨오믄세."
 
10
선용은 대답하고 몇 걸음 걸어가다 생각이 나서
 
11
"오 참, 그 머루하구 다래허구 가지구 오게. 깜빡 잊었군…… 이렇게 잊음 많어가구, 아마 늙었나 보다!"
 
12
미상불 선용은 늙었다.
 
13
마흔이 갓 넘었을 뿐인데, 얼굴이랑 몸매 가짐가짐이랑 말이랑, 한 오십 되어 보인다.
 
14
얼굴에는 굵고 잔 주름이 가로 세로 패이고, 송낙을 벗으면 흰머리가 제법 희끗희끗 하였다.
 
15
기운도 준 편이지 는 편은 아니었다.
 
16
스무 살, 서른 살 한창 그 당년에는 시체말로 한 시간에 삼십 리나 가기는 수월하였다. 그러던 것이 시방은 그 대중으로 걷자면 조금 힘이 들었다.
 
17
백련암에서 노루재를 거쳐 곰의고개까지 오십 리, 곰의고개에서 버드실까지 사십 리, 도합 구십 리를 걸어, 마침 황혼이 질 무렵에 옥랑의 사당엘 당도하자면, 그래서 네 시간을 가까이 걸려야 하였다.
 
18
버드실 앞으로 멀찍이 떨어져서 있는 우두봉이 왼편 한 줄기가 서쪽을 향하여 빗밋이 미끄러져 내렸다. 아래로 기슭이 가까와 올수록 경사는 차차로 더 너그럽다.
 
 
19
이 야트막한 산줄기를 사이에 둔, 그 너머편이 당골(堂洞)이었다.
 
20
골이라지만 인가가 있고 한 동네인 것이 아니요, 옛날에 근처 어디만치 인지 산신당(山神堂)이 있었던 것으로 생긴 이름이었다.
 
21
삼면이 산으로 둘린 그 산들의 기슭이 모여서 이루어진 두릿한 분지(盆地)였다. 다만 전면이 훨씬 얕은 산등성이로 가리어 있어 앞이 약간 트인 셈이나, 그것도 그 산등성이에 올라서기나 하여야 버드실 동네라도 보이지, 정복판에서는 그야말로 하늘 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
 
22
골은 전면(全面)이 훨씬 산기슭 높은 데까지도 솔이나 잡목이 있는 것이 없고, 고운 금잔디가 심어논 듯 퍼언히 깔려 있다.
 
23
골 한복판을 양편으로 가른 것처럼 작은 골짝이 패어 있다.
 
24
이 골짝을 따라 얼마쯤 올라가느라면 바위 틈에서 흐르는 옹달샘에 이르러 골짝은 끊겨버린다.
 
25
그 샘에서 왼편으로 십여 칸 떨어진 곳에 무덤이 위아래로 둘.
 
26
다시 샘에서 바른편으로 오륙 칸 비껴서 조그마한 사당이 한 채…… 바로 옥랑사(玉娘祠)로, 옥랑이 시묘를 살다 세상을 떠난 그 묘막 자리였다.
 
27
사당에서 또 조금 바른편으로 비껴서는 옥랑의 무덤이 있고.
 
28
사당은 네 기둥과 홍살로 사면을 두른 그 안에 비가 서 있을 뿐, 바깥을 돌각담으로 둘러친 것도 없고 한 지극히 조촐한 사당이었다.
 
29
연조는 불과 십 년이라고 하지만, 떳떳이 보살피는 임자가 있는 바 아니요, 동중소간에 맡겨둔 탓으로 황량하기 다시 없었다.
 
30
지붕은 기왓장이 벗겨지고 깨어지고, 퇴색한 단청(丹靑) 대신 산새의 똥자죽만 그득하고 기둥과 홍살은 상하고 부러지고.
 
31
잡초만 부절없이 어우러진 주위로는 가뜩이나 솥단지 불을 땐 자리와 시꺼먼 돌덩이가 함부로 굴러 있어, 낭자하고 어설프기 그만이었다.
 
32
이런 호젓하고 황량한 사당 앞에서, 때마침 어스름이 자욱이 내리고 있을 무렵, 송낙 쓰고 먹장삼 입고 한 중이 하나, 눈 감고 고개 숙여 합장하고 만들어 세운 듯 서서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는다. 백련암으로 좇아 내려온 중 선용이었다.
 
33
향로가 있을 리 없고, 흙을 한줌 쥐어다 놓고 꽂은 두어 개피의 만수향에서는 가느다란 연기가 하염없이 솟아오른다.
 
34
눈 감고 고개 숙여 합장하고 그린 듯 서서 있는 선용의 바야흐로 옥랑에게 잦아진 감회는, 그 앞에서 솟아오르는 만수향 연기와도 같이 면면하고 애절스런 것이 있었다.
 
35
십 년을 하루같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날이 차나 한번도 거름이 없고, 다달이 초하룻날이면, 선용은 백련암으로 좇아 내려와 이렇게 두어 개피의 향을 피우며 옥랑의 명복을 빌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36
그것은 정성이요, 아울러 선용의 낙이기도 하였다.
 
37
만수향이 하마 다 탈 때까지 선용은 움직일 줄을 모른다. 그러다, 날이 훨씬 어둑어둑하여서야 하직삼아 다시 한번 나직이
 
38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39
하고는 비로소 그린 듯이 섰던 자리를 헤트린다. 그러나, 그래도 미진하여
 
40
"왕생극락하시요. 부디 왕생극락하시요."
 
41
하고 산 사람한테 말하듯 한다.
 
42
별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하였다.
 
43
산새가 날아와 사당의 홍살에 깃들려다 놀라 후드득거리고 도로 날아간다.
 
44
선용은 사당을 한 바퀴 둘러본다.
 
45
언제나 그러듯이 낭자하고 황량한 것이 마음에 걸리나 하릴없는 노릇이었다.
 
46
다달이 초하룻날이면 반드시 본집엘 들르곤 하여, 오늘도 본집에서는 갖은 찬수에 저녁을 지어놓고, 아내 서씨와 아들 불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친은 연전에 세상을 떠났고, 불명은 어느덧 나이 열한 살이 되고 하였었다.
 
47
뜰 앞으로 마주 내려왔다 올라와 앉기를 기다려 불명이 절을 한다.
 
48
"오냐. 그새 공부 잘 했느냐?"
 
49
"네."
 
50
"………"
 
51
저의 생모(生母) 옥랑을 고대로 그려논 모습이었다. 갸름한 얼굴, 날씬한 콧날, 초리가 위로 약간 치솟은 눈, 여승 저의 생모 옥랑이었다.
 
52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선용은 샘솟듯 곤곤히 솟느니 귀여운 정이었다.
 
53
물론 겉으로 드러내어, 가령 머리를 쓸어준다든지 하면서, 노골히 애정을 보이거나 하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나 속마음으로는 이런 사랑스럽고 귀여운 것이 있을 것이 없었다.
 
54
"머루랑 다래랑 가지구 왔으니 먹어."
 
55
"네."
 
56
"한꺼번에 많이 먹으면 배탈이 나. 조금씩 먹어."
 
57
"네."
 
58
단정히 무릎 꿇고 앉아서 대답이 공순하였다.
 
59
선용은 그런 것이 다 미흡하여 못하였다. 단지 예법대로 공순하고 어려워하고 할 따름이지, 별양 아비라고 따르고 싶어하는 임의로와 하는 거동이 통히 보이는 것이 없었다.
 
60
응석도 부리고 함부로 장난도 치고 하였으면 좀 좋으랴 싶었다. 시방 한창 그럴 열한살박이 선머슴 아이가 아니던가.
 
61
내차고 붙임성 없고…… 이런 성품까지도 저의 생모를 닮은거니 하면, 선용은 문득 마음이 어둡고 하였다.
 
62
불명은 서씨를 저의 생모로 알고 있었다.
 
63
또, 어머니라는 임의로운 것이 있고 하여, 선용에게토록 대범스러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래도 여느 다른 아이들 처럼은 임의롭고, 덥적덥적하고 하지는 않는 눈치 같았다.
 
64
서씨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아니할 만큼 귀여워하고 애정이 극진하였다.
 
65
그러므로 서씨가 무슨 친소생이 아니라서 범연히 굴기 때문인 것도 아니었다.
 
66
이윽고 아내 서씨가 저녁상을 들고 들어와 앞에 놓고 물러앉는다.
 
67
"불명이가 아버지께 청이 있답니다."
 
68
"청? 무슨?"
 
69
"새루 학교당이 생겼는데, 저두 겔 댕기겠읍니다구요."
 
70
"댕겨야지, 신학문 배워야 하구말구."
 
71
그러면서 선용은 불명의 낯꽃을 살핀다. 응당히 기뻐하는 기색이 얼굴에 드러났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대로 천연하고 앉았을 따름이었다.
 
72
"그런데, 그 학교당이라는 게, 교사는?"
 
73
"죄선사람이죠"
 
74
"그렇다면 몰라두…… 요새 더러 일인들이 교사로 오는 학교당이 있다는데, 그건 못 쓰지. 일인 교사 밑에서 배우면 매양 일인이 되구 말테니 당한 일인가."
 
75
서씨는 잘 삭힌 독한 소주로 거듭 대여섯 잔이나 반주를 권한다.
 
76
선용은 사양치 않고, 기름진 안주를 안주삼아 연방 받아 마신다.
 
77
옛정 두었던 여인의 사당을 찾아가 분향을 하면서 연연히 그를 잊지 못하여 하고.
 
78
본집이 있고, 아내와 자식의 위안을 받고.
 
79
술, 고기 막 먹고.
 
80
중 하고는 알뜰한 중이었다. 도선(道詵)이 같은 중이요, 노지심(魯智深)이 같은 중이었다.
 
81
선용은 절에 있으면서도 별로이 중노릇을 하는 것이 없었다.
 
82
조석으로 부처 앞에 나아가 눈감고 합장하고 서서
 
83
"나미아미타불, 관세음보살."
 
84
하고는 한참씩 서 있을 줄은 알았다.
 
85
옥랑의 명복을 빌던 것이었다.
 
86
단지 옥랑의 명복을 빌던 것이지, 부처를 위함이거나 저 자신의 저승길을 닦자는 노릇이 아니었다.
 
87
식자는 조금 들었겠다 하여, 늘 불경을 앞에 놓고 읽곤 하였다. 그러나 그는 불경을 읽는 것이지, 거기에서 무슨 깨달음을 얻으려는 뜻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88
그러고는 다달이 초하룻날이면 산을 내려 옥랑의 사당을 찾아가 분향을 하면서 옛정을 생각하고. 본집에 가서는 술, 고기 함부로 먹고, 남의 가장 노릇, 남의 아비 노릇 다하고 이튿날 절로 돌아오고.
 
89
꼬옥 절에서 쫓기어나기 마침이었다. 절에서는 그러나 그를 괄시하지 못 할 처지였다. 절로 돌아올 때, 돈 백 냥과 호피 한 장을 한목에 시주한 것이 있어, 가난하던 절이 논을 많이 장만하여 부자가 된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90
십 년, 범패소리를 들으면서 절에서 사는 동안, 말이 무거워지고 몸가짐이 유유하여지고, 몸에서 중 냄새가 나고 한 것은 중이 되었다고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속은 하나도 중이 된 것이 없었다.
 
91
옥랑을 잃음으로써 만사에 뜻이 없어 중이 된 그는, 중이 되는 그것에 조차도 뜻이 있어지지를 못하는 사람이고 만 것이었었다. 소위 중도 못 되고, 속인도 못 되고 였었다.
 
92
구월, 경술년 구월, 바로 초생이었다.
 
93
마을에 갔던 박돌이가 석양에 씨근버근 달려들면서 하는 소리였다.
 
94
"아, 왜국이, 그눔들이 우리 죄선을 먹었단갑쇼. 합방이라드냘 했단 갑쇼."
 
95
"………"
 
96
선용은 우두커니 먼산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윽고
 
97
"죽일 놈들이로곤…… 그놈들이 그여코 이 거조를 냈으니. 고현놈들."
 
98
갑진(甲辰) ․ 을사(乙巳)년의 일로전쟁에서 세계에서도 크다는 노서아를 이기고, 대강국이 된 일본은 소망대로 조선을 저희 혼잣 것을 만들 수가 있었다.
 
99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으로 정미년의 양위(讓位)와 군대 해산(軍隊解散)으로, 을유년 사법권 위양(司法權委讓)으로, 경찰권 위양(警察權委讓)으로, 이내 먹어 들어왔다. 그러다 마침내 경술합방이었다.
 
 
100
누구 하나 나서서 시비할 녀석도 없었다. 늙은 범 청국은 힘을 못쓰는 지가 오랬고, 북방의 주린 곰 노서아는 어린 삵괭이에게 섣불리 대들다 그만 혼침이 나서 달아나 버리고.
 
101
영국 같은 나라는 일본과 동맹국이니 말할 것도 없었고. 미국은 하와이나 필리핀을 넘겨다보지 말라는 뜻으로, 일본이 조선을 먹는 데에 동의를 하였고.
 
102
"아, 눔들을 가만히 둬야 옳은갑쇼? 눔들을, 막."
 
103
박돌이가 연방 주먹을 부르 쥐어싸면서 분해하는 것이었었다.
 
104
선용도 분한 깐으로 하면 당장 마을로 쫓아내려가 일인 놈들을 닥치는 대로 쳐 죽이고 말겠으나, 단 한 놈이라도 상관 없고, 필경엔 그러나 저 이의 손에 죽고 마는 것도 상관 없고 하였으나, 그렇게 한다고 빼앗긴 나라가 금새 도로 찾아지는 노릇은 아니었다.
 
105
선용은 노상 남만 탓을 할 일이 아니라 하였다.
 
106
밤이나 낮이나 당파싸움이나 하고. 그러느라고 가뜩이나 시방 넘싯넘싯 넘겨다보고 있는 외국 세력이나 청하여 들고. 그러다 필경 와서 나라를 빼앗기고 만 것이라 하였다.
 
107
조정과 양반들이라는 것들은 백성들을 하나도 살게 하여 주는 것은 없고 일일이 못살게만 굴었고, 백성들은 조정 ── 나라가 털끝만큼도 고마울 것이 없고, 소중한 생각이 없었고. 백성들에게는 조정 ── 나라가 원수스럽고, 그런 원수스런 조정 ── 나라는 차라리 없는 것이 좋았고, 그렇기 때문에, 조정 ──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고도 하나도 아까운 생각이 날 것이 없고. 그러느라니 백성들이 나서서 막으려 들지 아니한 것이요, 그래서 속절없이 빼앗기고 만 것이라 하였다.
 
108
썩을 대로 썩고, 악할 대로 악한 이씨조정(李氏朝廷)은 응당히 망하여야 할 것이었고. 조만간 뉘 손에 망하여도 망하고 말게 된 판국이었고. 그것이 그런데, 백성의 손에 망하지를 못하고 타국 ── 일본에게 망한 바 되어서, 조정이 망함을 따라 나라마저 빼앗기었으니, 애석한 일이라 하였다.
 
109
"형제 화목히 지나구, 좀 불합한 일이 있더래두 남과 시비가 있거나, 일상을 겨루거나 할 때는 합심합력해서 대들구, 그러는 집안이 남한테 만만히 쥐어 지나구, 수모당하구 하는 법 없느니. 박돌이두 자식이나 있었드라면 이런 교훈이나 할 걸 그랬지."
 
110
선용은 그런 말을 혼자 말하듯 푸뜩푸뜩 하고 앉았다, 또
 
111
"조선이란 나라는 쫑애속으루만 살기루만 마련인가 보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는 청나라가 명나라를 때려뉘구서 집어삼키더니, 이번엔 청국 허구 아라사를 때려뉘구서 일본이 늘럼 집어삼켰으니, 이댐엔 그럼 아라사가 일본을 때려뉘면 아라사가 집어삼기구, 미국이나 영국 법국이 일본을 때려 뉘면, 미국이나 영국 법국이 집어삼키구 하렷다…… 이리저리 팔려다니는 종의 자식 신세만두 못하구나."
 
112
그 뒤로 선용은 울적한 날을 보내고 있던 중, 닷샌가 되어서 본집으로 부터 급한 전갈이 왔다. 불명이 몹시 앓는다는 것이었었다. 의원은 상한이라고 한다면서, 닭 울 임시에 떠나서 왔는데, 밤 새기가 어려울까보다고 하였으니, 그동안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전갈 온 사람은 말하였다.
 
113
이름이 없다는 불명(不名)은, 막상 명(命)이 없다는 불명(不命)이었던지, 선용이 달려 내려가 석양 무렵에 본집엘 당도하였을 때에는, 이미 싸늘한 시체 앞에서 서씨가 홀로 울고 앉아 있었다.
 
114
선용은 눈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언제 병이 났으며, 증세는 어떠하였고, 어떤 의원의 약을 썼으며, 죽기는 어느만 때쯤 죽었으며 한 것을 앉아서 조곤조곤이 듣고. 또 장사도 지내고. 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115
선 자리에서 그대로 집을 뛰어나왔다.
 
116
무엇이든지 앞에 다들리는 것이면, 산이든 바위든 때려부술 것 같았다.
 
117
선불 맞은 멧도야지처럼 향도 없이 씽씽 걷기만 하였다.
 
118
어디로 해서 이렇게 왔는지 모르되, 문득 정신이 들어 살펴보니 낯선 마을이요, 해는 어슬어슬하였다.
 
119
송낙 쓴 고개를 도로 푹 숙이고 다시 또 씽씽 가고 있는데, 칵 누군지 와다 들렸다. 다들림과 동시에
 
120
"고라, 빠가. 눈구멍이 없어, 이 중놈아."
 
121
하면서 주먹이 와 등감을 찧는다.
 
122
일인 하나와, 상투 꽂고 망건 쓴 맨머리에 동저고리 바람에다 개양 ── 각반 치고, 발가락 째진 왜버선에 왜짚신 신고 한 차림새가 벌써 일인의 차인꾼이 갈데없는 한 자와, 두 놈이서 웬 사람 하나를 양편에서 일인은 멱살을 쥐고, 차인꾼은 상투를 거머쥐고, 개끌듯 끌고 오는 일행과 선용은 다 들리었고, 욕설과 주먹은 물을 것도 없이 차인꾼의 짓이었었다.
 
123
왜채(倭債)라고 하는 것이 있었다. 일인의 계획적인 저리 대금(低利代金)이었다.
 
124
이자는 헐하고, 기한은 무름하고 한 맛에 너도 나도들 쓴다.
 
125
기한 안에 갚으면 이거니와 기한이 하루만 지나도 돈은 소용 없고 논문서를 가져다 바쳐야 한다.
 
126
기한에 갚지도 않고, 논문서도 가져오지 않는 사람은 일인이 차인꾼을 앞세우고 쫓아다니면서 붙들어다 일인의 농장에 가두어 두고, 가족이 논문서를 가져오도록 까지 두들겨 패고 하면서 놓아주지 아니한다.
 
127
지금 선용과 다들린 것이, 그런 왜채 쓰고 아니 갚은 작자를 붙들어 가고 있는 것임은 첫눈에 보아 알 수가 있는 것이었었다.
 
128
평온한 마음일 때에 보아도 눈에서 생열이 나는 거동이었다. 항차 환장이 되다시피 한 이 때리요. 우환 중에 차인꾼의 그런 무례하고 괘씸한 거조리요.
 
129
차인꾼의 주먹이 와 등감을 찧고 난 다음 순간, 욱 하면서 선용의 두 팔은 벌써 차인꾼을 불끈 들어 그대로 땅바닥에다 태질을 쳐놓는다.
 
130
일인이 하도 어처구니가 없이 입을 떡 벌리고 섰다 꽁무니에서 육혈포를 뽑는다.
 
131
육혈포를 뽑는 그 팔을 달려들어 움키면서 오도독 분지른다. 분질러 가지고는 역시 불끈 머리 위로 들어 태질을 친다.
 
132
곰의고개에서 도적 하나를 잘못 그만 죽게 하고 마음에 못내 걸려 하던 장선용은 이미 아니었다.
 
133
반죽음을 한 두 놈을, 양손에 하나씩 집어 들고 휘휘 둘러보다, 마침 길 옆집의 울타리 밖으로 있는 우물로 주르르 가서 풍덩풍덩 떨어뜨린다.
 
134
"어느 놈이든지, 이걸 건져냈단 보아라. 모가지를 비틀어 놀테니."
 
135
몇 사람이 멀찍이 서서 무서무서하고 있는 데다 대고 선용은 커다랗게 호통을 하고는 가까운 산을 향하여 훵하니 가버린다.
 
136
반 시간이 못되어 총을 멘 순사들이 달려왔고 뒤를 추적도 하였으나 아무 소득이 없었다.
 
137
이날 밤 선용은 산중에서 헤매다 이튿날이야 겨우 방향과 길을 찾아 백련암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그 날로 즉시 박돌이를 데리고 노루재 산막으로 옮았다.
 
138
이때부터 경술, 신해, 임자, 계축 사 년 동안에 걸치어, 노루재를 중심으로 한 백 리로 부터 일백오십 리 안짝의 사방 일원에는, 일인과 일인 밑에서 일보아 주는 조선 사람, 순사, 헌병과 헌병 보조원들로 인한 피해가 종종 심하였다.
 
139
신해년에는 황산골에도 헌병 분견소가 새로 설시가 되었는데, 들어단짝 분견소장이 전주로 부터 부임을 하여 오던 도중에서 총을 맞고 죽었다.
 
140
황산골에서 전주나들이(全州街道[전주가도])를 5리 가량 나가면, 솔고개라는 조그마한 고개가 있었다.
 
141
별양 높거나 험한 고개도 아니요, 겸해서 탄탄대로겠다, 황산골은 바로 지척이겠다 하여서 안심을 하고 끄덕끄덕 말께 앉아 지나는 참인데, 고개 옆 언덕으로 부터 땅 한 방을 쏘자 채 손도 못 놀리고 말 위에서 나가 떨어졌다.
 
142
이때에 초빈(草殯)속에서 송낙 쓰고 먹장삼 입고 한 중이 툴툴 털고 나와 총과 탄환과 육혈포를 거둔 후, 저기만치 우두커니 섰는 말을 때려 쫓고는 산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143
그 뒤에도 황산골 분견소에서만도 보조원이 둘이나 출장을 나갔다 죽고 죽고 하였다.
 
144
노루재를 중심으로 한 일판에서, 사 년 동안에 걸치어 일인과 일인의 밑에서 일보아 주는 조선 사람, 순사, 헌병과 헌병 보조원이 죽고, 혹은 집에 불을 지르고 한 것이 삼십건이 넘었다.
 
145
선용은 무리를 모으지 아니하였다. 열이나 스물이나 백 명 천 명이 있어도 매양 그 없애자는 것을 없애지 못할 바이면 하나나 열, 스물이나 백 명 천명이 나가 다를 것이 없었다.
 
146
그리하여 선용은 간혹 늙은 박돌이를 데리고 다닐 때도 있었으나 그역 걸리적거리기나 할 따름이어서 주장 단신으로 다니곤 하였다.
 
147
선용은 한 자루의 총으로 능히 일본을 물리치리라는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도 아니하였다.
 
148
다만 이왕에 내친 걸음이요 살 멋 없는 세상이니, 아무 때고 저 이의 손에 죽는 날까지 분풀이나 하면서 날뛰는 껏 날뛴다는 것이었었다.
 
149
그러하기 때문에 그는 두려움이 없고 담대할 수가 있었다. 단신으로 사람이 득실득실하는 일인의 농장에 들어가 한목 셋씩이나 해하고, 불을 지르고 한 것도 있었다. 그것이 계축년 초가을이었고, 범인이 중이요 힘이 장사요 하다는 것이 이때에야 비로소 드러났다.
 
150
선용은 그렇게 사냥질 ── 인간 사냥질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 된 뒤에도, 여전히 다달이 초하룻날이면 옥랑의 사당을 찾아 잠깐 분향을 하는 것을 버리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151
계묘년 만가을이었다.
 
152
마침 구월 초하룻날이어서 사흘째 나가 돌아다닌 피곤함을 무릅쓰고, 장삼 속에 숨긴 총만 박돌이에게 내주고서 총총히 버드실로 내려왔다.
 
153
늘 하던 대로 향불을 피운 후, 눈 감고 고개 숙여 합장하고 고요히
 
154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155
하고는 그린 듯이 움직이지 않고 오래도록 서 있었다.
 
156
나뭇군이 셋이 나무를 한 짐씩 지고 내려오다, 사당에서 여남은 칸 못 미쳐서 지게를 받치고 쉰다.
 
157
나뭇군을 만나기는 예사였다.
 
 
158
나뭇군들도 이 사당 앞에서, 이 어떤 중은, 또한 예사였다.
 
159
얼마만에야 선용은 다시 한번 고요히
 
160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161
하고는 눈을 감고 고개 숙여 합장한 자세를 흐트리면서, 이번에는 산 사람과 이야기하 듯이
 
162
"왕생극락하시요. 부디 왕생극락하시요."
 
163
하는데 별안간 울리는 호통소리였다.
 
164
"꿈쩍 마라, 이놈 장선용이."
 
165
나뭇군들 ── 나뭇군으로 변복한 헌병과 보조원들은 어느덧 제각기 나뭇짐에서 오연발 총을 뽑아 똑바로 선용을 겨누고 있다.
 
166
선용은 놀라지 않았다.
 
167
"꿈쩍 마라. 대구 쏜다."
 
168
그 말을 받은 선용은 빙긋이 웃기까지 하면서 명령하듯 일렀다.
 
169
"그대로 쏘아라."
 
170
"항거하면, 못 쏠 줄 알고 이놈!"
 
171
"내가 너희한테 포박은 당하기가 싫어, 그러니 쏘아라."
 
172
보조원은 헌병더러 무어라 한다.
 
173
헌병은 보조원더러 지시를 한다.
 
174
두 보조원이 잔뜩 무서워하면서 나아오려고 한다.
 
175
"너이두 내가 힘이 어떤 줄은 알지. 포박을 아니 당하려고 용을 쓰는 마당이면 너희는 하나나 둘은 죽어. 차라리 쏘구 말아라."
 
176
보조원들은 들은 성은 않고 조촘조촘 나아온다.
 
177
"이놈들이."
 
178
두 팔을 번쩍 들고 달려들듯이 하면서 호통을 지르는 다음 순간, 헌병의 총에서 먼저
 
179
"탕 탕."
 
180
이어서 보조원들의 총에서도
 
181
"탕 탕."
 
182
산울림이 멀리까지 울려나간다.
 
183
산새가 놀라 깃을 치고 날아간다.
 
184
염초 냄새가 좌악 풍긴다.
 
185
평생에 그리던 옥랑의 앞에서 그의 영혼을 뒤따르리라고는 선용이 생각지도 바라지도 못하였던 노릇이었다.
 
 
186
(1948(戊子[무자]). 1. 18, 鄕第[향제]에서) <성화사, 1961>
【원문】12. 사당(祠堂)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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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옥랑사 [제목]
 
  채만식(蔡萬植) [저자]
 
  1948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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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3년 02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