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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랑사 (玉娘祠) ◈
◇ 11. ‘산막山幕)에서 살걸……’ ◇
카탈로그   목차 (총 : 12권)     이전 11권 다음
1948
채만식
1
玉娘祠[옥랑사]
 
2
11. ‘산막山幕)에서 살걸……’
 
 
3
모를 심어야 한다, 보리타작을 해야 한다, 한참들 바쁜 판에 초상이 났다.
 
4
노인이, 그날 밤 보쌈 난리에 놀라 조금 차도가 보이던 병이 도로 기울어가지고 이내 석달 보름을 신고하다가 마침내 며느리의 무릎에서 감기지 않는 눈을 감기고 말았다.
 
5
초상집이란 바쁘게 마련이었다.
 
6
일가집 부인들이야 동네 여인들이야 해서 사람은 장속같은 와글와글 하나, 주인은 매양 혼자라, 옥랑은 혼자서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면서 눈코뜰 겨를이 없이 바빴다.
 
 
7
상중 바느질이 벌어진 건넌방에서 실이 모자란다고 하여 마악 들어가 꺼내주고 있는데, 늙은 시비 복쇠어멈이 쫓아와서, 때가 늦어가니 손님들 저녁을 지어야 아니하느냐고 쌀 재촉을 또 한다. 벌써 세번째였다.
 
8
"오 참, 쌀 끄내 주지…… "
 
9
옥랑은 그러다, 다시 생각하고
 
10
"아니, 쌀일랑 끄내다 누구더러 좀 씻으라구 하께시니, 복쇠어멈일랑 머슴 데리구가 술을 두어 동이 좀 가져오게 해…… 머슴 혼자 보냈단, 한 동이는 제가 먹구, 한 동이만 지구 오느라구, 오늘 닭 울기 전엔 못 올 테니깐."
 
11
그러고는 분주히 부엌 옆으로 달린 광방으로 간다.
 
12
사랑에서는 문중의 여러 사람이 모여, 하루 종일 양자 정할 의논으로 해를 지운다.
 
13
한편에서는 돌아간 노인 앞으로 양자를 정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14
다른 한편에서는 며느리 앞으로 양자를 정하여, 승중손으로 복제케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15
노인 앞으로 양자를 주장하는 편은, 그 편에 양자감이 있기 때문이었다.
 
16
며느리 앞으로 양자를 주장하는 편은, 그편에 양자감이 있기 때문이었다.
 
17
누구든지 양자로 들어오기만 하면, 한 이백 석 하는 이 집 재산은 그 차지가 되는 판이었다.
 
18
양편이 서로 우기며 서로 물러서지 않는 것도, 이 이백 석거리 재산이 있는 소치였다.
 
19
안에서는 안에서 대로, 노인편과 며느리편이 갈리어 가지고 며느리편은 노인편이 그르다커니, 노인편은 며느리편이 그르다커니 하면서, 상중 바느질이 벌어진 건넌방이 왁자지껄 시끄럽다.
 
20
"아니, 이 댁 며느님이 태상이라는데, 웬 양잘 가지구들 그 야단인구."
 
21
동네 노파 하나가 혼잣말처럼 그러면서 부엌으로 들어온다.
 
22
부엌에서는 헙수룩하게 생긴 젊은 여자 하나가 아궁이 앞에 앉아 불을 때고 있었다.
 
23
몹시 뾰족하게 생긴 입을 삐쭉하면서 노파더러 묻는다.
 
24
"태상이라군 누가 그럽디까?"
 
25
"누구나마나, 이 댁 복쇠어멈이 그리잖아…… 신통허지. 그런깐 그게 유복자 아냐?"
 
26
"이 집 복쇠어멈이 그리는데, 정말 태상이라구 그래요?"
 
27
"내가 늙은 사람이 거지뿌렁허구 댕길까. 지끔이라두 복쇠어멈더러 물어 보면 당장 알 걸 가지구."
 
28
"그럼, 몇 달이라구 그리죠?"
 
29
"건 모르지…… 해두, 쳐보면 알 거 아냐?…… 가만있자, 이 댁 새 서방님이 돌아가신 게 그게 어느 달이드라?"
 
30
"말씀 마슈. 고재두 아이 만든답디까?"
 
31
"무어? 고재?…… 누가?"
 
32
"누군, 죽은 이 집 새서방이죠."
 
33
"정말?"
 
34
"어려서두 고추는 시늉만 달리구, 그 아랜 민투룸하구서 생기려든 형적만 있었드래요. 그래두 커가믄서 목소리 같은 것두 고재 목소리 같지 않구 해서, 아마 병신이 아닌가보다 했죠, 동네서들두. 아 그랬는데, 아따 죽기 며칠 전까지두 글방엘 댕겼잖었어요. 그래, 짓궂은 동무 하나가 하룬 가만히 오줌 누는 델 숨어서 봤드라나요. 했더니 웬걸, 애기적 고대루드래요. 고추는 눈꼽만허구, 그 아랜 그대루 민투룸허구. 호호호…… "
 
35
"어쩌믄…… 그럼, 아인 대체 어떻게 밴 아인구?"
 
36
"정말 아일 뱄다믄야, 포쌈해 갔던 녀석의 아일 테죠."
 
37
"온 절 어째…… 그래두 그때 말엔, 털끝 하나 아니 건드리구, 곱다시 도루 태워다 줬다잖어? 몰랐드라믄서, 가 삼년상 치루라구,"
 
38
"과부가 복중인지 아닌지 것두 모르구, 그 과부 포쌈하러 오는 시럽의 아들 녀석두 있답디까?"
 
39
"그러니 글쎄, 저 일을 어떡헌담."
 
40
"우리야 굿이나 보구 떡이나 얻어먹지, 걱정될 건 무엇 있어요."
 
41
"허긴 그렇지만서두."
 
42
부엌 옆으로 달린 광방과 부엌 사이는 벽 위로 창살문이 나서 있어, 부엌에서 조용조용하는 이야기 소리라도 환히 다 들리게 되어 있었다.
 
43
옥랑은 정신이 아찔하여, 쌀 퍼부으려던 함지전을 짚고, 겨우 쓰러지려는 몸을 가누었다.
 
44
두 여자의 하는 말이, 하나도 빈말이 아니었다. 죄다 그대로였다.
 
45
보나마나 소문은 좍 퍼질 것이었다.
 
46
문중에서도 다 알게 될 것이었다.
 
47
아이를 낳기까지는 혹시 기연가 미연가 할지는 몰라도, 아이를 나 놓는 날이면 그 때에는 제풀에 판명이 될 것이었다. 새서방이 죽은 것과 보쌈에 싸여 간 것과는 두 달 가까이 날짜가 틀리는 것이 있기 때문에…… 팔삭동이라도 낳아놓기 전에야.
 
 
48
망신은 정히 당해 둔 망신이었다.
 
49
무슨 면목으로 세상을 살 것인고.
 
50
문중에서는 결단코 가만히 있으려고 아니할 것이었다.
 
51
시어머니 앞으로 양자를 정한다는 패에서는 그러지 않아도 거리적거리는 생각이요 쫓아냈으면 싶은 판인데, 그만한 핑계거리가 있으니, 조옴 성구고 나설 이치가 없었다.
 
52
과부로 어느 이름 모를 자식을 난 것도 망신인데, 우환 중에 쫓기어 나기까지 하겠으니 더욱 망신이었다.
 
53
쫓기어나니, 어디로 갈 것인고.
 
54
친정은 서울로 떠나고 없었다.
 
55
그야 간찰도 온 것이 있고 하니, 찾아가자면 못갈 리는 없으나, 심화로 계신 부모를 가뜩이나 이 면목을 하여 가지고 찾아가자는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56
선용은 어디가 어딘지를 모르고 향방이 막연하였지만, 생각하면 마음이 내키지 아니하는 것은 아니었다. 갔으면 좋을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싫었다. 분하고 야속하였다. 갈 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밉광머리스러 일부러 어겨서라도 가지 말고 싶었다.
 
57
아무데도 머리 두르고 갈 곳이 없다면 쫓기어 나는 날, 당장은 거리로 나가섰는 수 밖에는 없었다.
 
58
꼴이 무슨 꼴이며, 갖추 그렇게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미리서 나가 버리고 마느니만 못한 노릇이었다.
 
59
미상불 오늘이라도 훌 나가버리면, 수군덕거리는 소리를 귀로 듣지 아니할 것이요, 갖추갖추 치러야 할 치소를 눈으로 보지 아니할 것이요 하매, 도리는 좋은 도리였다.
 
60
그런데 막상 갈 곳은 없으니 답답한 일이었다.
 
61
나가되, 아무도 없는 곳에서 가 혼자 조용히 있고 싶었다.
 
62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조용히……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조용히…… 몇 번을 이렇게 뇌다가, 문득 시묘(侍墓)라는 것을 생각하였다.
 
63
시묘.
 
64
자못 그럴듯하였다.
 
65
묘하에 가서 시묘를 산다면, 그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조용히…… 라는 것이 이루어질 수가 있었다.
 
66
문중에서도 시묘를 살고 있는데 와서 무어라고 트집은 차마 하지 못할 것이니, 한 삼 년 그렇게 하고 나서, 그 다음 가서는 달리 어떻게 하더라도 우선은 그 수가 좋을 것 같았다.
 
67
물론, 투철히 효부(孝婦)도 열녀도 아니면서 시묘라니 당치가 않고, 마음 부끄런 노릇이요 얼굴 간지러울 일이지만, 그러나 시방 그런 것을 구애할 계제가 아니었다.
 
68
쌀함지를 들고 나오자니,사람마다 눈이 배만 유심하여 보는 것만 같았다.
 
69
누가 둘이만 모여서서 소곤거려도 그 이야기가 아닌가 하여 고개가 들어지지 아니하였다.
 
70
소문이란 본시 빠른 것이지만, 빠른 중에도 더 빨랐다.
 
71
칠일 출상인데, 출상하는 당일까지에는 온 동네가 그 소문으로 판을 짰다.
 
72
무슨 그럴 리가 있느냐고, 믿지 않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태반은 사실인 것으로 믿었다.
 
73
해괴망측하다고 비웃고 욕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강약이 부동으로 할 수 없이 욕을 본 것이지, 당자만 나무랄 일이 아니라고 동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74
아뭏든 이렇게 그 사단을 가지고 말이 왁자한 판인데, 느닷없이 그 당자가 시묘를 산다고 올라와 앉았으니 기가 막힐 일이요, 알 수 없는 내력이어서 모두들 코가 뻐언하였다.
 
75
해가 바뀌어 경자년(庚子 : 光武[광무] 4년) 정월 바로 정초였다. 음력으로는 아직도 기해년 세안이었고.
 
76
선용과 박돌은 한낮 겨운 양지쪽으로 판을 차리고 앉아서, 방금 잡아 가지고 온 중돝이나 되는 멧도야지를 가르고 있다.
 
77
지나간 초가을부터 서너 달 동안 멧도야지를 여남은 마리나 잡고, 노루는 그 보다도 더 많이 잡았다.
 
78
잡으면 둘이서 이렇게 가르고 하는 동안에, 제법 인제는 익숙한 칼잡이가 되었다.
 
79
가른 고기는 마을로 지고 내려가 양식이랑 술이랑 바꾸어 왔다.
 
80
호랑이도 대짜를 한 마리 잡았었다. 호피는 벗겨서 방 벽에다 걸어놓았다.
 
81
사냥을 시작하기 전, 여름과 봄에는 주장 산삼을 캐었다.
 
82
도합 세 뿌리를 캐어서 그것은 돈을 받고 팔았다. 그 돈이 백 냥이나 된다.
 
83
시방이야 돈 같은 것은 소용될 것이 없지만, 장차 무리라도 모아 한바탕 일을 벌리자면 우선 돈이 많이 쓰일 터라, 그 마련을 하여 두는 것이었었다.
 
84
선용은 뒷다리 하나를 떼어 털썩 젖혀놓으면서 박돌이 더러 이른다.
 
85
"뒷다리 이거 하날랑은 우리 집에다 주구…… "
 
86
멧도야지나 노루를 잡는 족족, 선용은 제 가든지 박돌이를 시켜서든지 노모에게 고기를 보내기를 잊지 아니하였다.
 
87
"그리구, 묘막에두 좀 들러오구."
 
88
옥랑이 시묘 살고 있는 묘막 말이었다.
 
89
"들러오구말굽쇼. 위정 가기두 할려드냐."
 
90
한 달에 두 번쯤은 박돌이가 묘막으로 동정을 살피러 가곤 하였었다.
 
91
갈 적마다, 먼빛으로 보아도 배가 조금씩 더 불러가는 것 외에는 아무 다른 일은 없었다.
 
92
"제발 그 시묜지 막덕인지만 아니면, 이런 존 고기 좀 보내 주지 않아."
 
93
"아따 인제, 일년허구 조금만 더 참읍쇼. 복 벗구 일러루 오시면 그땐 머 싫두룩 잡숫게 될 테니깐."
 
94
"올 건 어딨어."
 
95
"아니 오시구 어떡허굽쇼."
 
96
"가, 또 업어 와야지 "
 
97
"참, 박돌이두 무얼 하나 좀 업어오깝쇼?"
 
98
"재주대루 하게나마는, 그 성한 대리마저 부러지구퍼서?"
 
99
"호호."
 
100
둘이는 이렇듯 만족하고, 그리고 근심과 부러울 것이 없었다.
 
101
이튿날 일찌감치 고기를 지고 마을로 내려간 박돌은, 하룻밤을 지나 그 이튿날 석양에 돌아왔다.
 
102
박돌은 싱글벙글 웃고 달려들면서
 
103
"애기 우는 소리가 나든 걸입쇼."
 
104
한다.
 
105
선용은 싱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다가
 
106
"해산은 언제 했는지 그건 모르겠지."
 
107
"그야 모릅죠. 허지만 먼점 번 댕겨온 지가 한 열흘밖엔 아니 됐은깐, 그 열흘지간일깝죠."
 
108
"아뭏든 이번엔 내가 좀 가봐야 할까보군."
 
109
달수를 쳐보더라도 열 달이니 낳다는 아이가 저의 씨인 것은 십상 분명하였다. 그러나 그것이야 어디로 갔든, 이 춘 겨울에 한데나 지지 않는 묘막에서 해산을 하였다는 것이, 산모를 위해 대단히 근심스런 일이었었다.
 
 
110
날이 저뭇하기를 기다려 선용은 산막을 나섰다.
 
111
날이 흐리고 눈낱이 빠졌다.
 
112
묘막이란 여느 움과 일반이었다.
 
113
이엉을 둘러쳐, 눈비와 바람을 겨우 막게 하고, 바닥은 그대로 흙 바닥에다 거적을 펴고 하였을 뿐이었다.
 
114
불을 많이 땐, 설설 끓는 방…… 이것이라야지, 겨우 눈비와 바람이나 막는 맨바닥의 움 같은 것은 산모에게는 당치도 아니한 것이었다.
 
115
밤은 아직 그다지 깊지 않았으나,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산 밑이라 바깥은 죽은 듯 괴괴하였다. 눈만 소리 없이 내리어 쌓이고.
 
116
산모는 눈을 감고 반듯이 누워, 숨결이 심상찮이 가쁘다. 들기름 불에 비치는 얼굴이 알아보게 부석부석하다. 이미 생명이 기울었음을 직감케하는 상태였다.
 
117
어린 것은 따로 두터운 이불에 싸서 뉜 채 잠이 들었고.
 
118
복쇠어멈은 다 사라져가는 화롯불에 미역국을 올려놓고 앉아 한숨만 거푸 쉰다.
 
119
오늘이 첫 이레였다.
 
120
복쇠어멈은 옥랑이 묘막에 와 있으면서 부터, 이내 하루 걸러 이틀 걸러 올라다녔고, 그러다 해산을 하던 전날부터는 눌러 있으면서 해복간을 하고 하였다.
 
121
산모는 사흘째 그동안 먹지를 못하고 정신을 놓고 앓았다.
 
122
조금 정신이 들 때마다 복쇠어멈은 제발 내려가자고 졸라싸나, 산모는 고개만 젖고 듣지 아니하였다.
 
123
묘막 안은 찬바람이 돌고 코끝이 시리었다.
 
124
"에구, 성한 사람두 이렇게 사죽이 얼어들어 오는데, 어떡허시자구 글쎄…… "
 
125
복쇠어멈은 산모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혀를 찬다.
 
126
멀리서 부엉이가 운다.
 
127
밤은 깊어가고.
 
128
복쇠어멈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을 한다.
 
129
끝없는 침정 속에서 얼마를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130
문득 산모가 무거운 눈뚜껑을 힘겹게 가까스로 뜬다.
 
131
뜨고는 정신을 가다듬노라곤지, 한참은 그대로 있다 깊은 한숨을 내어 쉰다.
 
132
그러고는 또 한참 있다가
 
133
"복쇠어멈?"
 
134
하고 부른다.
 
135
졸던 복쇠어멈이 놀라서 커다랗게 대답을 한다.
 
136
"거기, 벼루 있지?"
 
137
"국물이라두 좀 마시세여지, 어떡허세요 "
 
138
"벼루에 먹 갈아서 붓에 먹 찍어서 휘유…… 내 손에 쥐어주어."
 
139
"그런 건 병환 다 나신 댐에 허시구, 어서 이 국물이나 좀…… "
 
140
"얼른."
 
141
복쇠어멈은 하릴없이 벼루에 먹을 갈아 가지고 와 붓에 찍어서 손에다 들려준다.
 
142
"배냇저고리 하나."
 
143
"배냇저고리유?"
 
144
응당 종이를 찾는 것이 아니고 배냇저고리를 찾는 것이어서 노파는 두릿두릿한다.
 
145
"얼른."
 
146
재촉을 하여서야 옷보따리를 뒤져 차곡차곡 해둔 배냇저고리를 하나 찾아낸다.
 
147
옥랑은 펼쳐서 얼굴 바로 대게 한 후 등에다 쓴다.
 
148
손이 바르르 떨린다.
 
149
"張不名[장불명]"
 
150
몇 번을 팔을 쉬어가면서 장불명 석 자를 겨우 쓰기를 마치고는 붓과 팔을 떨어뜨린다.
 
151
"그 배냇저고리, 잘 두었다…… "
 
152
이윽고 진정을 하고 나서 말하였다. 말을 하나 숨이 차서 여러 말을 한번에 하지는 못한다.
 
153
"나 죽거들랑…… "
 
154
"에구 그런 말씀을, 왜…… "
 
155
"오늘 밤 못 넹겨."
 
156
"말씀이라두, 그런…… "
 
157
"나 숨지거들랑 날 딱 새든 멀루…… "
 
158
"……… "
 
159
"그 배냇저저고리 갈아 입혀 가지구, 품에 안구…… "
 
160
"……… "
 
161
"저, 황산골 더러 가보았지."
 
 
162
"네에."
 
163
"안구, 황산골루 가서…… "
 
164
"에구, 애기가 배가 고파, 울어쌀 텐데…… 에구 가엾은지구."
 
165
"장서방네 집을 찾아서 주구 와."
 
166
"장서방네유?"
 
167
"장서방네라구 물어서, 잘 모르거든…… "
 
168
"네."
 
169
"연전에 도서원 다니다 죽은 장도청네라구 하면, 알테니…… "
 
170
있는 힘을 다 짜 여기까지 말을 하고는 스르르 눈을 감는다.
 
171
힘없이 낮은 숨결이 잦기만 하다.
 
172
입술이 타고, 얼굴은 핏기가 쓰여 백지장 같다.
 
173
운명이 멀지 않았음을, 아무가 보아도 알겠었다.
 
174
복쇠어멈이 한동안 들여다보다가 나직이 부른다.
 
175
"아씨?"
 
176
"………"
 
177
"아씨?"
 
178
"………"
 
179
"에구 아씨이…… "
 
180
노파는 더럭 겁이 난, 그리고 높은 음성으로 울음 섞어
 
181
"에구 아씨이. 이 일을 어떡허세유. 에구 아씨이."
 
182
병인은 알아는 듣는 표적으로 성가신 듯이 이마를 가늘게 찌푸리는 것이나, 노파는 그 분간을 하지 못하였다.
 
183
선용은 조금 전에 묘막 밖에 당도하여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안의 동정을 살폈다.
 
184
처음에는 아뭇 소리도 없고 다만 괴괴하였다.
 
185
그러나 무슨 이야기를 하는 기척이 들리었다.
 
186
음성이 약하고 낮아 알아듣지는 못하겠으나 둘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분명하였다.
 
187
그렇다면 요행 별 탈은 없나보다고 안심을 하였고, 그러면서 마악 돌아서려고 하는데, 별안간 울음 섞어 아씨 아씨 부르는 소리였었다.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188
잠깐 그대로 망설이다 조용히 거적문을 젖히고 들어섰다.
 
189
노파가 기척을 듣고 돌려다보다 놀라 말도 못하고 와들와들 떤다. 도적이거니 하고. 설마 묘막에 도적이 들 리가 없는 것이지만…… 선용은 눈과 손짓으로 안심을 시킨 후, 옥봉의 옆으로 가 앉았다. 헝클어진 머리, 부질없이 붓기만 하였지 앙상히 야윈 얼굴, 눈물겹도록 볼썽이 아니었다.
 
190
얼굴에는 무어라고 이를 수 없는 것이 사색(死色)이 드리워 있었다.
 
191
길었다 짧았다 고르지 못한 숨결은, 낮고 힘이 없으면서 무단히 잦기만 하고.
 
192
선용은 아뿔싸 늦었구나, 좀 더 일찌기 알았더라면 하고 후회스러웠다.
 
193
시방은 벌써 어떻게 하자는 도리가 없고, 생각지 못할 신명의 도움이나 기다리는 것밖에 없었다.
 
194
한량없이 처량한 마음이면서 내려다만 보고 앉았는 동안, 어느덧 멀리 마을에서 첫닭이 울었다.
 
195
그 닭의 울음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병인은 문득 가만히 눈을 떴다.
 
196
뜨고 선용이 있는 것을 보았다.
 
197
보기는 보나 몽롱한 정신이라 기연가 미연가 싶어, 정신을 차리느라고 무한 애를 썼다.
 
198
그러나, 겨우 어떻게 정신이 맑아진 모양으로, 반기는 미소가 가느다랗게 입술과 눈으로 떠오른다. 그러면서, 고개로 이불에 싸인 어린것을 가리키는 시늉을 한다.
 
199
선용은 알겠노라고 고개를 끄덕끄덕, 그러면서 가만히 옥랑의 손을 쥐고 조용조용히
 
200
"내가 다아 잘못이요."
 
201
"………"
 
202
옥랑은 선용의 말은 못 들은 성, 그대로 입술과 눈에 미소를 드리운 채 한참은 더 선용을 보고만 있다 천천히 눈을 감는다. 감으면서 눈물이 솟아 속눈썹을 적신다.
 
203
그리고는, 선용에게 쥐인 손으로 선용의 손을 만지작 만지작하는 듯 하면서, 목 안에서 겨우 나오는 소리로
 
204
"내가, 몹쓸…… "
 
205
하고는 그쳤다 다시
 
206
"내가 다, 잘못…… "
 
207
하고 또 그쳤다. 또다시
 
208
"산막에서 살걸…… 무단히 미워하느라구…… 산막으루 갈걸, 무단히 미워하느라구?"
 
209
마지막 힘을 다하여 그러고는 차악 까라진다. 만지작거리던 손끝에서도 맥이 풀려버린다.
 
210
미구에 자는 듯 고요히 숨이 졌다.
 
211
선용은 수족을 거두어 주면서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212
매몰스럽기만 하고, 저에게 아무런 뜻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일편의 향의가 있었음을 비로소 알고 나니, 몇십 년을 서로 정다웁게 살던 아내를 여읜 것처럼 이나 설움이 곡진하였다.
 
213
선용은 이 고달픈 시체를 버려두고 일어선다는 것이 차마 못할 일이었다.
 
214
당연히 내 손으로 장사를 지내야 할 것이었다.
 
215
그러나 그것은, 이 시체를 욕되게 함이었다. 시묘토록 산, 하여커나 효부요 절부(節婦)가 아니더냐. 문중과 동네 사람들로 하여금, 효부· 절부에게 다운 존경과 예로써 장사케 함으로써 이름을 빛내도록 할 것이지, 그에게 불측한 짓을 한 자의 손으로 다시 장사까지 지낼 말이면, 욕에 욕을 더 보임이 될 것이었었다.
 
216
선용은 노파더러 물었다. 내가 지금 마을로 내려가 동네 사람들에게 알릴테니, 사람이 올라오도록 혼자 기다리고 있으려느냐고.
 
217
복쇠어멈은 선뜻 그러다뿐이겠느냐고 하였다. 그러면서, 어린 것을 안고 일어서는 선용에게 그 배냇저고리를 꺼내어 주는 것이었었다. 이 사람이 보쌈을 하여간 그 사람이요, 어린 것이 그의 씨요, 그리고 황산골 장서방이라는 사람이요 하다는 것쯤은, 눈치로 다 알아챌 수가 있었던 것이었었다.
 
218
선용은 어린 것 ——— 불명(不名)을 안고 버드실 마을로 내려가, 길녘의 아무 집이나 한 집을 깨어, 묘막에서 시묘사는 이가 죽었다더라고, 지나가는 사람의 전갈처럼 말을 이르고는 그 길로 황산골 본집으로 달리었다.
 
219
어린 것은 처음 안고 묘막에서 내려올 때에는 배가 고픈지 불에 덴 듯 울었으나, 그러다 지쳐 도로 잠이 들어서 다행이었었다.
 
220
황산골 본집에서는 놀라는 모친 앞에서 아내 서씨를 불러, 내 씨니 유모 정하여 잘 기르도록 하라고 안기어 주고는, 선 자리에서 도로 묘막으로 와 보았다.
 
221
멀찍이 보아도 모토불을 피우고, 사람이 얼찐거리고 하였다.
 
222
비로소 노루재로 내키지 않는 발길을 돌리어, 날이 휘엿이 샐 무렵에 산막에 당도하였다.
 
223
박돌은 코가 쑤욱 빠져 돌아온 선용더러 웬일이냐고 두 번 세 번 물었으나, 선용은 대답은 않고 우두커니 마룻전에 가 걸터앉아, 먼산바라기만 하였다. 한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면서.
 
224
어느덧 날이 환히 다 밝고, 그러자 멀리 백학동 백련암으로부터 뗑, 뗑, 아침 예불을 울리는 종소리가 울리어 왔다.
 
225
노루재에서 앞으로 고개를 내려 삼십 리를 가면 화전마을 백학동이요, 백련암은 그 앞 산 중턱에 있었다.
 
226
노루재와 사이에는 중간에 높은 산이 가린 것이 없어, 청명한 날은 절이 아스라이 바라다보이고, 종소리는 조석으로 언제든지 들리었다.
 
227
"뗑 ———"
 
228
"뗑 ———"
 
229
종소리에, 눈을 간소롬히 하고 있던 선용은 그러다 고개를 번쩍 들면서
 
230
"박돌이?"
 
231
"네."
 
232
"자넨 어떡헐려나?"
 
233
"어떡허다닙쇼?"
 
234
"난, 저 백련암으루 가 중노릇이나 하겠네. 자넨 그래, 어떡헐려나?"
 
235
"아니, 대체 어떻게 된 심입쇼?"
 
236
"죽었다네."
 
237
"네? 그 이가요?"
 
238
"인전 아무것두 귀찮으이. 난 중노릇이나 가구 말겠네."
 
239
"아, 두목 으런이 중노릇을 가시면, 박돌인 상좌루 따라갑죠."
 
240
"데리구 와 고생만 시키구, 그래 미안해 그러이."
 
241
"술, 밥, 고기 싫두룩 먹었으면 호강이지, 그 위에 더 바랄 거 있는 갑쇼."
 
242
부랴부랴 둘이는 짐을 챙기었다.
 
243
총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연장과 화약 같은 것이 주체스러웠다. 버리고 갈 수도 없고, 누구를 주잔 말도 아니 나고.
 
244
"혹시 세상일, 어떻게 될지 뉘 압니깝쇼. 가지구 가보는 겁죠."
 
245
박돌이가 이런 말을 하여, 좌우간 그러면, 남의 눈에 뜨이지나 않도록 잘 싸고 묶고 해서 다른 짐과 함께 절로 가지고 가기로 하였다.
 
246
그리하여 이 날로 선용은 박돌을 데리고 백련암으로 가 머리 깎고 혜광(惠光)이라는 법명으로 중이 되었다. 때에 선용의 나이 서른한살이었다.
 
247
한편, 이 해 가을에는 버드실 앞산 우두봉(牛頭峰) 기슭의 당골(當谷) 묘막이 있던 그 자리에 옥랑의 사당이 이루어졌다.
 
248
보쌈에 붙들려 갔다 오고, 아비 모를 자식을 낳고 하였으니, 사당이 당치 않다고 반대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249
보쌈에는 붙들려 가고 싶어 갔느냐.
 
 
250
아비 모를 자식은 낳고 싶어 낳느냐.
 
251
당한 것은 강약이 부동으로 당한 것이고, 투철한 정성이 없이는 아무나 생의치 못하는 시묘를 살았으니, 아뭏든 효부요, 하옇든 절부가 아니냐.
 
252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많기도 하려니와, 사리도 또한 그럴 듯하여 사당은 이루어진 것이었었다.
【원문】11. ‘산막山幕)에서 살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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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만식(蔡萬植) [저자]
 
  1948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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