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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군(任實郡) 재실(齋室) # 경성재
최근 3개월 조회수 : 27 (2 등급)
【향토】
(게재일: 2024.01.01. (최종: 2024.01.02. 13:43)) 
◈ 갈마리 경성재(敬誠齋)
이 재실은 임실읍 갈마리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에 거주하는 강화노씨(江華 魯氏)의 재실이다. 입향조는 노여(魯輿)로 자는 덕운(德運)이며 호는 송재(松齋)니 효간공의 아들로 창녕부사를 지내셨다. 무진년 고려 창왕 1년(1388) 정월에 현량과에 올라 진현전 제학에 이르렀다.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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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마리 경성재(敬誠齋)
 
이 재실은 임실읍 갈마리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에 거주하는 강화노씨(江華 魯氏)의 재실이다. 입향조는 노여(魯輿)로 자는 덕운(德運)이며 호는 송재(松齋)니 효간공의 아들로 창녕부사를 지내셨다. 무진년 고려 창왕 1년(1388) 정월에 현량과에 올라 진현전 제학에 이르렀다. 이씨 조선이 개국하자 전라도 성수산 아래 운수읍(현재 임실읍) 동쪽 20리쯤 상동면 관전촌에 퇴거하여 송경(지금의 개성)을 잊지 못하는 뜻으로 서재에 편액하기를 송재라 한 것은 옛 도읍을 버리지 않음을 뜻한 것이라 하며 오남(五男) 인언(仁彦) 감찰공으로 하여금 다시 개성으로 들어가 살게 했다고 군지에 기록되어 있다. 무인년(1938)에 문중에서 창건하였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집으로 현판이 1개 걸려있다. 현판은 성수면 월평리 육우정(六愚亭)을 지은 육우 중 한명인 우당(愚堂) 이광의(李光儀)가 친우인 우계(愚溪) 노학규(魯學奎)의 부탁으로 지었다.
 
 
 

1. 갈마 경성재기(敬誠齋記)

 
운수현(雲水縣)의 동쪽 바깥쪽 땅의 갈마촌 좌측 해좌사향(亥坐巳向, 남동향) 사원(巳原) 터에 봉분과 빼어난 건물이 있다. 이곳이 노공(魯公) 휘(諱) 덕일(德一)의 무덤이다. 즉 노씨의 별장[平泉]1)이고, 대대로 전해지는 효(孝)와 우애[友]는 이미 세상에 알려졌다. 비조(鼻祖)의 휘(諱)는 노계(魯啓)이다. (노계는) 중국에서부터 기국(箕國)에 들어와 벼슬하여 사도(司徒)가 되어 5교를 펼치고, 8정과 정전제를 펼치셨다. 강화에 봉함을 받았으니, 조선에서 노씨가 있게 된 것은 공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17대를 지나 휘(諱) 노충국(魯忠國)2)이라는 분이 계셨으니, 일곱명의 학사와 더불어 (당에서) 신라로 와서 백성들의 풍습을 높은 곳으로 이끌었으니 이들이 8학사이다. 이가 공의 중조(中祖)이다.
 
고려 말에 이르러 휘(諱) 노여(魯輿)라는 분이 계셨으니, 이분이 장령(掌令)을 지내신 송재공(松齋公)3)이다. 고려에서 변혁이 일어나려는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남으로 내려와, 본군(임실군) 원상동면 관전리에 은둔하였다. 그 집에 편액하기를 송(松)이라 하였으니, 그것은 송경(松京, 松都, 개성)을 잊지 않으려는 의리 때문이다. 스스로 호를 송재(松齋)라 하였으니, 그가 공의 12세조이다. 많은 벼슬을 하고 이름난 집안(簪纓古族)에는 이어져 오는 유훈이 있는데, 공에게는 오로지 효(孝)와 우(友)이다. 이것이 곧 집안을 다스리는 법도이다. (송재공의) 훌륭함은 세상에 저명하고, (송재공의) 일은 삼강록(三綱錄)과 군지(郡誌)에 실려 있다. 자손들은 이로 인하여 무덤 아래에서 살게 되었다. 이로부터 고향(桒梓古里)으로 삼았다.
 
5세손 노학규(魯學奎)4)가 선대의 뜻을 이어 받아 효우로써 가정의 교훈을 삼고 집안을 다스리는 도(修齋)로써 자기 자신을 단속하는(律身) 공부로 삼았다. 그리고 선조를 추모하는 정성을 더욱 돈독하게 하여 매 가을 서리 내리고, 봄 이슬이 있는 계절에 맞춰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것(秋霜春露)과, (무덤 주위를) 살피고 청소하는 것을 폐하지 않았다. 단지 무덤 아래에 신주(神主)를 섬겨 모시는(妥靈) 장소가 없는 까닭으로 항상 매우 딱하게 여기며 애처롭고 한스러워 했다.
 
이에 집안 모든 사람들에게 되풀이하여 타일러 ‘무덤의 송추(묘자리 근처에 심은 나무)를 경계하여 베지 말고 애호하여, 후손(兒孫)으로 하여금 목재용으로 얻을 수 있게 한다면, 반드시 묘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나의 소원이다’라고 말하였다. 뜻은 있으나 이루지 못하고(未越) 죽었다. 그 조카(姪子) 노종수(魯鍾洙)가 숙부의 평소 소망(素志)을 이어받아, 지난 병자년(1936) 봄에 여러 친족들과 묘 아래에 병사(丙舍 ; 묘지에 지은 집)를 짓는 계책(計策)을 의논하고(議謨), (마침내) 마음을 하나로 하고 힘을 모아서 머지않아 재각을 이루고 경성(敬誠)이라 현판을 달았다.
 
공경을 다하고(極敬) 정성을 다하여 빌며(致誠), 경건하고 정결히 하여 제사를 올려(灌薦) 신도(神道)의 의가 있음을 밝혔다. (경성재는) 매우 검소하게 만들었으나, 기둥과 집(棟宇)이 헌앙하고 대청의 벽(廳壁)은 명랑하니 보기 좋구나(庶哉). 영령(英靈 ; 죽은 사람의 영혼을 높여 이르는 말)은 그 위에 있으니 지극히 아름답다. 봄과 가을 세제(歲祭) 때에 비와 눈이 오면 즉 이곳에서 제사를 지낼 수 있다.
 
어이! 뜻이 있으면 끝내 이루어지고, 정성이 있으면 반드시 펼칠 수 있다고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묘사는 소가 우는(牛鳴) 명당에 있으니, 매월 한 차례 종족이 모여서 정의를 돈독하게(敦倫) 하니 이것은 선조의 뜻을 잊지 않기 위한 것이다. 그러한 즉 위원외(韋員外)의 화수5)이고, 소노천의 보정6)이 아니겠는가. 오로지 옛 일에서 명성을 독차지하는(專美)것이 아니겠는가. 신중하고도 좋구나. 무릇 노씨의 선조를 사모하는 규모이겠는가.
 
노종수가 나에게 실력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고[不文], 처마에 둘 만한 한마디 말을 청하였다. 그래서 사양했지만 뜻을 얻지 못하여 이와 같이 기재한다.
 
무인년(1938) 가을 9월 상한(上澣)
완산 이광의(李光儀)7)가 삼가 짓다.
 
 
 

1.1. 敬誠齋記

 
雲水縣東 一候之地 渴馬村左巳原 有封秀堂者 是魯公諱德一 衣履之藏也 卽魯氏之平泉 而世傳孝友 已著於世矣 鼻祖有諱啓 自中華入于箕國 仕司徒 敷五敎修八政 及井制 受封江華 朝鮮之有魯氏 由公始焉 十七傳而有諱忠國 與七人 往敎新羅 一襄民俗 是爲八學士 寔公之中祖也 至麗末有諱輿 是掌令松齋公也 見麗祚遷革 棄官南下 遯跡于本郡元上東面 官田里 扁其齋曰松 不忘松京之義 自號曰 松齋 寔公之十二世祖也 簪纓古族 世襲遺訓 公惟孝友 是則修齋有度令 聞著于鄕里 事載三綱錄 及郡誌 子孫因居于壠下 自作桒梓古里 五世孫學奎 繼述庭訓 以孝友修齋之道 爲律身之工 而尤篤于慕先之誠 每秋霜春露之節 不廢省掃 但墓下無妥靈之所 故常恫恫悒恨 申諭于諸族曰 邱壠之松楸 戒之勿伐愛護 爲兒孫可得與材用 則必成墓閣 是所願也 有志未越而卒 其姪子鍾洙 繼述其叔父 平昔之素志 去丙子春 議謨於諸族 乃建丙舍于墓下 同心齊力 不日成齋 揭之曰敬誠 極敬致誠 虔潔灌薦 明其有神道之義也 制甚約而㨂宇軒 仰廳壁明朗庶幾 英靈爲在其上乎 至若 春秋歲祭之時 爲有雨雪 則可以將事於斯矣 於噫 有志竟成 有誠必伸 豈不云乎 盖墓舍在於牛鳴之地 而每月一會合宗族 叙敦倫 是不忘祖先之義 則韋員外之花樹 蘇老泉之譜亭 奚獨專美於古也 欽哉善哉 凡魯氏慕先之規謨乎 鍾洙甫謂余 不文而請一言 于齋之楣矣 辭不獲已而記
 
戊寅秋八月 上澣
完山李光儀 謹識
 
 

 
각주
1) 당나라의 재상인 이덕유가 소유했던 平天莊을 말하는 듯. 즉 노씨의 별장을 의미함.
2) 노충국(魯忠國) 당나라 천보(天寶)중에 중랑장(中郞將)에 임명되고 병신년(경덕왕)에 신라(新羅)로 건너와 팔학사(八學士)가 되셨다. 팔학사는 중랑장(中郞將) 노충국(魯忠國), 예부상서(禮部尙書) 변원(卞源), 한림(翰林) 노오(盧塢), 대장군 민숙(閔叔), 상서령(尙書令) 홍열(洪悅), 중랑장(中郞將) 동엽(董燁), 하남태수(河南太守) 이흔(李 ), 대사도(大司徒) 여원래(呂元來)를 말한다.
3) 공의 휘는 여(輿)요 자는 덕운(德運)이며 호는 송재(松齋)니 효간공의 아들로 창녕부사(昌寧府使)를 지내셨다. 무진년(戊辰年) 고려 창왕(昌王) 1년(1388) 정월에 현량과(賢良科)에 올라 진현전 제학(進賢殿 提學)에 이르렀다. 이씨 조선이 개국하자 전라도 성수산(聖壽山)아래 운수읍(현재 임실읍) 동쪽 20리쯤 상동면 관전촌에 퇴거하여 송경(지금의 개성)을 잊지못하는 뜻으로 서재(書齋)에 편액(扁額)하기를 송재(松齋)라 한 것은 옛 도읍을 버리지 않음을 뜻한 것이라 하며 오남 인언(仁彦) 감찰공으로 하여금 다시 개성으로 들어가 살게 하였다.(운수지에 기록)공(公)께서 다섯자녀를 두셨으니 장남의 휘는 인호(仁好)니 충청 및 북 병사(忠淸 ,北 兵使)요, 차남의 휘는 인지(仁止)니 경기감사(京畿監司)요, 삼남의 휘는 인복(仁復)이니 한림학사(翰林學士)요, 사남의 휘는 인철(仁喆)이니 기장현감(機長縣監)이요, 오남의 휘는 인언(仁彦)이니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로 이때에 오파(五波) 즉 병사공파(兵使公波),감사공파(監司公波),한림공파(翰林公波),현감공파(縣監公波),감찰공파(監察公波)로 갈라졌다. 정부인(貞夫人)은 남양홍씨(南陽洪氏)며 묘소는 전북 임실군 성수면 천동리 艮坐. 묘사일은 음력 10월 10일 임.
4) 호는 우계, 현판을 지은 이광의 등과 함께 1919년에 육우정을 만들었다.
5) 잠삼(岑參, 715~770)이 지은 위원외가화수가(韋員外家花樹歌)를 말한다.
6) 소순(蘇洵)이다. 소식(蘇軾)의 부친으로 노천(老泉)은 그의 호이다. 소순이 그의 할아버지 묘 옆에 보정(譜亭)을 세우고 돌에다 새겨 기록하여 일가붙이들에게 경계하여 말하되, “상사(喪事)에는 반드시 부고하고, 장가를 들면 반드시 알리고, 늙은이는 반드시 외로운 이를 지키고, 부자는 가난한 자를 거두어라. 비하자면 곧 옛사람들이 선대와 친밀하고 후대와 화목함을 세우는 것이다.”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7) 호 우당(愚堂)이며 1919년에 성수면 월평리에 육우정(六愚亭)을 지었으며, 1936년에는 청금안을 편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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